[김기협의 '페리스코프'] 공자가 본 한국 : 인간적인 '聖人'을 기억하며

기사입력 오전 9:03:54

  <공자 평전>이란 제목으로 내려는 책을 번역하고 있습니다. 원서는 안핑 친(Annping Chin)의 The Authentic Confucius(2007)입니다.

안핑 친은 <천안문>, <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 등의 책으로 한국에도 많이 알려진 조너선 스펜스의 부인으로 부부가 함께 쓴 책이 <20세기 포토 다큐 세계사 1>(김희교 옮김, 북폴리오 펴냄)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동아시아 문명의 중요한 한 축이었던 공자를 밖에서 바라보는 대범함과 안에서 바라보는 치밀함이 얽힌 그의 시각은 중국계 미국인의 위치가 잘 활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고전의 주제를 현대인의 시각으로 본다는 데 이 책의 첫 번째 가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대목대목 오늘 우리의 문제를 공자를 비롯한 중국 고대 사상가들이 우리 곁에서 함께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작업하다가 눈에 띄는 대목을 뽑아 내놓으며 제 의견을 약간씩 덧붙이겠습니다.

이 책의 번역은 인세 계약으로 했습니다. 그러니 이 글을 내놓는 데
판촉의 의미도 없지 않음을 자백합니다. 그래도 그런 의미보다는 독자 여러 분과 나누고 싶은 뜻이 훨씬 더 큰 것이니,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정확한 읽기보다 쉬운 읽기를 위해 내용 일부를 줄인 것임을 밝힙니다. <필자>

인간적인 '聖人'을 기억하며

공자가 섭 지방에 있을 때 그곳 장관이 이런 말을 한 일이 있었다. "우리 동네에 직궁(곧은 활)이라는 이름의 사람이 있는데, 자기 아버지가 양을 훔쳤을 때 고발하고 나섰답니다." 공자는 이렇게 대꾸했다. "우리 동네에서 곧다고 하는 것은 이와 다릅니다. 아비는 아들을 감싸주고 아들은 아비를 감싸줍니다. 그 안에 곧음이 있습니다."

직궁이라는 자는 한 좀도둑의 아들일 뿐이었지만, 그의 행동은 중국 역사를 통해 가장 뜨거운 논쟁 주제의 하나를 불러냈다. 도덕철학가들과 역사가들을 그만큼 많이 끌어들인 주제는 아마 주공과 그 못된 형제들 사이의 관계 정도일 것이다. 주공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개인과 사회 사이의 관계를 따지는 주제였다. 가족에 대한 사랑과 사회에 대한 의무가 양립할 수 있는 것인가, 그 둘이 상치될 때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공자는 직궁이 곧은 사람이 아니라고 보았다. "아비는 아들을 감싸주고 아들은 아비를 감싸주는" 것이 정상이고, 곧음은 그 안에 있다는 것이었다. 18세기의 학자 정요전이 <통예록>에 실은 글 한 편이 내가 보기에는 이 관점의 가장 효과적인 표현이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공변됨이 자리 잡으면 사사로움이 모두 사라질 것이다." 이 말이 공변됨을 끌어올리는 것이라고 볼 수가 없다. 사실, 공변됨과 별 관계가 없는 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런 가르침은 모든 것을 똑같은 마음으로 대하고 모든 사람을 구별 없이 사랑하자는 것이다.

정요전은 오직 공익만을 위해 행동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깊은 의심을 품는다.

모든 사람이 사사로운 동기로 행동할 때 한 사람만이 그렇지 않다면 그것을 진정 사사로운 동기가 없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성현들조차도 공변됨을 실천하기 어려워했는데 그것을 쉽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모든 사람이 어려워하는 것을 쉽게 만드는 재주를 가진 것일까? 자기가 가졌다고 우기는 것을 정말로 가진 것일까?

그런 사람은 공익의 옹호자로서 명성을 얻고자 하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사람도 아닐 것이라고 정요전은 말한다. 사람이라면 자기 가족을 남보다 더 사랑하고 자기 아들을 이웃집 아들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마음에 앞뒤가 있다는 것은 원초적인 인간의 조건이며, 그것 때문에 성현들조차도 공변됨처럼 고상하고 중요한 미덕을 실천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던 것이다.

이 인간의 조건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공변되고 정당한 것처럼 보이는 행동일지라도 진정한 인격의 표출로 볼 수 없다는 것이 정요전의 주장이다. "곧음이 그 속에 있다"는 공자의 말씀을 그는 그렇게 받아들인 것이다.

직궁이 아비를 고발한 뒤에 어떤 일을 겪게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기원전 3세기의 기록 중에 서로 엇갈리는 적어도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한비자는 관리가 직궁을 사형에 처했다고 한다. "임금에 대해서는 곧은 태도를 보였지만 아비에게 못할 짓을 했다"는 이유였다고 한다. 한비자는 이 관리의 결정을 무능하고 혼란스러운 것으로 그린다.

<여씨춘추>에 실린 또 하나의 기록에서는 직궁이 아비의 처형 직전에 아버지의 벌을 대신 받겠다고 나서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그래서 직궁을 처형하려 하는데 그가 고개를 들어 관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제가 아비의 죄를 고발한 것은 정직한 일 아닙니까? 그리고 아비가 받을 처형을 대신 받겠다고 나선 것은 효성스러운 일 아닙니까? 정직하고 효성스러운 일을 한 것 때문에 제가 처형을 받는다면 이 나라에 처형을 면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여씨춘추>에 인용된 공자의 이 일에 대한 논평은 2000년 후의 정요전이 하고 싶었을 말이었다. "직궁이 '정직'하다고 하는 말이 괴이하구나. 그가 아비를 팔아 얻고자 한 것은 이름이 아니었는가?"

ⓒ프레시안(그림=손문상)

  지고의 인간상을 "성인"으로 표현하는 것은 기독교 문명이나 유교 문명이나 마찬가지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같은 말을 쓰지만, 원래의 개념에는 차이가 있다. 기독교의 "saint"를 동양 말로 옮길 때 동양에서 지고의 인간상이라는 뜻으로 쓰여 온 "성인"이란 말을 빌려 쓴 것일 뿐이다.

기독교의 성인은 초인적인 존재인 반면 유교의 성인은 인간적인 존재라는 차이점을 위 글에서 알아볼 수 있다. 기독교의 초월적 신앙과 유교의 세속적 합리성을 대비시켜 유교를 하나의 종교로 볼 수 없다는 의견도 많이 있어 왔거니와, 그 차이가 지고의 인간상 사이의 차이에서 단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유교를 종교로 볼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종교란 무엇인가?" 하는 정의에 달린 일이겠지만 유교에 세속적 측면이 강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기독교에도 세속적인 측면이 없는 것이 아니다. 어느 종교나 초월적 측면과 세속적 측면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유교도 예법 방면에서는 초월적 특성을 상당히 보이지만, 윤리 방면에서 세속적 특성이 압도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지고의 인간상이란 윤리관의 초점이다. 기독교의 성인은 신자들에게 자기 곁에 서기 위해 현실을 초월할 것을 요구한다. 유교의 성인은 이와 달리 현실을 받아들이라고 가르친다. 성인 자신도 인간적 번민에 시달리는 '사람'이며, 번민을 피하지 않고 치열하게 끌어안는 고통 속에서 도덕적 가치를 이룩했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자는 한국 인구의 일부분일 뿐이다. 그러나 서양문명 안에 체화된 기독교적 관념과 태도가 19세기 이래 이 사회에 들어와 신자가 아닌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 속에까지 자리 잡은 것이 적지 않다. "훌륭한 인간"을 어떤 사람으로 보느냐 하는 윤리적 지표로 "초월적 존재"를 많은 사람들이 떠올리게 된 것도 이런 변화의 하나일 것이다.

내가 김대중 대통령에게 몇 해 전까지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데도 "초월적 존재"를 요구하는 마음이 작용했다. 나는 그의 모든 장점과 공로에도 불구하고 그의 "3김식" 행태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가 퇴임하고 난 뒤에야 남북관계 발전을 비롯한 그의 탁월한 업적을 음미하며 그가 현실을 끌어안은 자세를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등장을 반가워한 것도 애초에는 "악을 미워하는" 부정적 심리 때문이었다. 김 대통령을 비롯한 한국 정치계를 모두 부정적으로만 보고 있던 터에 구태를 벗어난 인물의 등장이 반가웠던 것이다.

반가운 만큼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면서 이라크 파병에서부터 시작해 현실 속에서 그의 번민을 관찰하게 되었다. 더러 이런저런 차원에서 그의 오류가 눈에 띠어도 내 마음이 부정적 심리로 돌아가지 않은 것이 편파적 태도라고 비판받을 수도 있겠지만, 내게 더 중요한 것은 현실을 받아들이는 내 자세가 성숙해 온 과정이었다. 그 과정을 통해 김 대통령에 대한 관점도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

내 마음이 너그러워진 것은 두 분 대통령에 대해서만이 아니다. 한나라당의 몇몇 인물들에 대해서도 전에는 "어떻게 저런 너절한 정당에 몸을 담을 수 있을까?" 하고 쳐다보기도 싫어하던 것을 차츰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었다. "아, 이런 상황에서 저런 역할을 맡아주는 분들이 있다는 것이 이 사회를 위해 참 고마운 일이구나." 하는 생각도 많이 하게 되었다.

동양학을 전공하는 나 같은 사람까지도 50대를 지나면서야 유교 윤리관을 새로 바라보게 되었다는 사실에서 우리 사회가 얼마나 서양적, 기독교적 윤리관에 많이 물들어 있는지 절감한다. 지금 이 시점에서 어느 쪽 윤리관이 우리 사회를 위해 더 좋은 것인가를 재단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다만, 최소한의 균형을 위해서라도 유교적 관점의 보완 필요가 절실하다는 생각이 일단 든다.

Posted by 문천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10년 전으로 : 주칼 교수의 '過誤'

기사입력 오후 3:06:30

주칼 교수의 '過誤'

1991년 1월 체코슬로바키아 의회는 비밀경찰 관계 기록을 조사해 비밀경찰에 협력한 일이 있는 의원들에게 자진사퇴를 권유하고 불응하는 사람들의 명단을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3월 22일에는 끝끝내 사퇴를 거부한 의원 10인의 명단을 발표했다.

명단 첫머리에 경제위원장 루돌프 주칼의 이름이 있었다. 1968년 프라하의 봄 이래 대표적 저항 지식인으로 시민포럼의 공천을 받아 의회에 진출했던 주칼의 혐의는 프라하대 교수로 있던 1961년 오스트리아에 체류할 때 같이 어울리던 미국인 학생들에 관한 정보를 비밀경찰에 제공했다는 것이었다.

주칼은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억울함을 호소했다. 협박 때문에 부득이하게 행한 일이며 가치 있는 정보를 제공하거나 대상 학생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최선의 주의를 기울였음을 밝혔다. 국내 정치와 관계없는 일이기 때문에 고백할 필요도 없는 일로 생각했다고 해명했다. 스스로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다는 말로 소명을 마쳤다.

그러나 동료 의원들도 선거구민들도 냉담했다. 사퇴가 유죄를 시인하는 것으로 여기고 버티던 주칼은 결국 다음 선거 출마를 포기했다. 프라하의 봄을 잊지 못해 온갖 유혹을 뿌리치고 전향을 거부해 교수직에서 쫓겨난 뒤 20년간 막노동으로 살아오면서도 경제 정책을 비판하는 수많은 글로 체제의 변화를 촉구해 온 한 양심적 지식인이 기다리던 새 체제 아래 매장당하고 만 것이다.

동구권 해체 후 드러난 비밀경찰의 행적을 보면 인간의 약점을 여지없이 파고든 온갖 추악한 공작이 다 있었다. 돈, 권력, 명예, 섹스, 이용되지 않은 미끼가 없다. 고삐 풀린 인간성 파괴 속에서 주칼의 '과오'는 '인간의 조건'을 결코 넘어선 것이 아니었다. 그의 몰락을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했지만 그런 안타까움을 밟으며 동유럽의 민주화는 진행됐던 것이다.

고영복 씨 간첩 혐의 발표는 국민들을 어리둥절하게 한다. 이 사회에서 그만큼 능동적으로 활동해 온 인물이 도대체 무슨 동기로 36년간 두 얼굴을 지켜왔다는 말인가. 남한에서 고 씨의 위치가 황장엽 씨가 북한에서 가졌던 위치보다 더 안정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 동기에 대한 설명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고 씨가 체제의 갈등 속에 희생되더라도 그의 '과오'에 대한 인간적 이해가 있어야 우리가 추구하는 체제가 '인간의 얼굴'을 가질 것이다. (1997년 10월)

▲ <춘추>의 기재는 매우 간략하고 포폄의 표현이 전혀 붙어 있지 않다. '팩트'만을 적어놓은 것일 뿐인데, 생각 있는 사람은 그 팩트만을 보고도 잘잘못을 판단할 수 있기 때문에 포폄이 저절로 된 것이다. 그래서 "공자가 <춘추>를 정리하매 난신적자가 떨었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역사 서술의 의미가 여기에 있는 것이고, <친일인명사전>은 그 의미를 잘 살린 작업이다. ⓒ프레시안

  기원전 11세기 중엽의 중국에서 상나라를 물리친 주나라 왕은 무왕이었다. 무왕이 몇 해 후 갑자기 죽었을 때 아들 성왕이 아직 어린 나이였다. 무왕의 동생 주공이 섭정을 맡아 천자 노릇을 대신하다가 성왕이 성년이 된 후 물러났다. 주공이 실질적인 천자 노릇을 잘하면서도 신하의 본분을 잘 지킨 것을 공자가 높이 찬양하여 유교의 전범이 되었다.

주공이 섭정을 맡고 있을 때 가장 어려웠던 일은 그 형제인 관숙과 채숙이 상나라 잔여세력과 함께 일으킨 반란이었다. 이 반란을 진압한 후 주공은 형 관숙을 처형하고 동생 채숙을 추방했다. 형제들에게 가혹한 처분을 내린 이 일이 가족에 대한 의무와 사회에 대한 의무 사이의 갈등을 보여준 것이기 때문에 유교 도덕론의 중요한 사례가 되었다.

맹자가 기원전 319년부터 몇 년 동안 제나라 선왕에게 의탁하고 지낸 일이 있었다. 당시 선왕의 큰 과제는 북쪽의 연나라 정벌이었는데, 정벌의 명분을 맹자 같은 도덕군자에게 승인받고 싶은 것이 그를 우대한 동기였던 모양이다. 맹자는 이 명분을 승인해 줬다. 그런데 정벌군이 살인·약탈 등 명분을 무색하게 하는 행태를 보여 맹자가 승인을 철회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선왕이 난처한 입장이 되었을 때 진가라는 신하가 총대를 메고 나섰다. 주공 같은 성인도 형제들에게 상나라를 맡겼다가 일이 잘못되어 참혹한 형벌을 내리기에 이르렀으니, 그리 될 줄 알면서 맡겼다면 어질지 못한 것이고, 모르고 맡겼다면 지혜롭지 못한 것이 아닌가? 성인도 이처럼 완벽할 수 없는 것인데 왕께서 하신 일에 약간의 허물이 있다고 맹자가 심하게 따질 수 있는 것인지, 그 입을 틀어막아 놓겠다는 것이었다.

진가가 맹자를 만나 마음먹은 대로 따졌다. "주공이 반란 일으킬 것을 알고 맡기셨는가?" "모르고 맡기셨다." "그러면 성인에게도 허물이 있는 것 아닌가?" 이에 대한 맹자의 대답이 주공을 옹호하는 명 논설로 전해진다.

"주공은 동생이고 관숙은 형이었으니 주공의 허물이라 하더라도 그 또한 마땅한 것이 아닌가? 더욱이 옛날 군자는 허물이 있으면 그것을 고쳤는데, 지금의 군자는 허물이 있을 때 그것에 매달린다. 옛날 군자의 허물은 일식과 월식 같아서 사람들이 모두 바라보고, 고침에 이르러서는 모두 우러러보았는데, 지금 군자는 어찌 허물에 매달리기만 하는가? 게다가 그에 맞춰 변명만 늘어놓는구나."

어젯밤 <친일인명사전>을 다룬 문화방송(MBC) <100분 토론>을 보며 생각난 대목이다. 허동현과 주익종, 이 사전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쪽 얘기의 주된 내용인즉 당시의 상황을 감안하여 포폄을 행해야 한다, 민족국가를 이루고 있는 지금의 잣대로 식민지 시대의 행위를 재단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하는 것 같다.

이것이 바로 "허물에 매달려 변명만 늘어놓는" 꼴 아니겠는가. 어느 누구도 상황에 대한 완벽한 판단은 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허물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한국이 일본 지배에서 독립한 것이 우연한 일이겠는가? 식민 지배는 부자연스럽고 폭력적인 상황이었다. 일본의 힘이 아무리 압도적인 것으로 보일 때라도 그 문제점은 감춰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생을 무릅쓰고 독립운동에 나선 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민족을 위한 친일"이란 말까지 나온다. 일신의 영달을 위한 친일보다는 나은 것 같지만, 사람의 마음속을 어떻게 꿰뚫어보고 그 본심이 착한 것이었다고 판단한단 말인가? 그리고, 본심이 착한 것이라고 해서 있는 허물이 없어지는가? 민족의 독립이 역사자연스러운 흐름이라 한다면 그 흐름을 가로막은 허물은 본심의 선악에 관계없이 엄연한 것이다.

양쪽 패널의 관점 차이는 '친일'의 의미에서 극명하게 갈라졌다. 새 사전의 가치를 옹호하러 나선 박한용과 주진오는 '친일'이라는 "팩트(fact)"를 밝히는 것이 사전의 목적이라고 하는 반면 허동현과 주익종은 '친일'을 "죄악"으로 보는 전제를 바닥에 깔고 있었다.

10년 전의 논의 양상이 뒤집힌 것이다. 10년 전의 친일 논의에서 민족주의자들은 '친일'을 무조건 '반민족'으로 몰아붙이는 경향이 있었고, 반대자들은 친일 행위라 해서 합리적 행동까지 싸잡아 범죄시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반론을 펴곤 했었다. 그런데 지금 친일을 규명하자는 쪽에서는 가치판단 없이 사실만을 밝힌다고 하는 반면 그 반대자들은 친일 사실을 밝히는 것만으로 유죄 판단을 하는 것처럼 펄펄 뛰고 있는 것이다.

이 변화가 어떻게 일어난 것일까? 여기에 바로 <친일인명사전>의 가치가 있다. 최소한의 사실 규명도 되어 있지 못한 상황에서 친일을 비판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합리적 기준에 관계없이 목청을 높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제 사전 편찬 작업을 통해 어느 정도 사실이 규명된 상황에서는 보다 냉정한 시각과 자세를 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반면 친일을 옹호하려는 입장에서는 변명할 길이 좁게 되었다. 그래서 사전 수록이 적절한지 의문을 제기할 여지가 있는 몇몇 사례를 지적하고 나오는데, 적절치 못한 수록일 경우 문제가 심각한 것처럼 과장하기 위해 수록 자체가 마치 '단죄'인 것처럼 엄살을 떨게 되는 것이다.

<춘추>의 기재는 매우 간략하고 포폄의 표현이 전혀 붙어 있지 않다. '팩트'만을 적어놓은 것일 뿐인데, 생각 있는 사람은 그 팩트만을 보고도 잘잘못을 판단할 수 있기 때문에 포폄이 저절로 된 것이다. 그래서 "공자가 <춘추>를 정리하매 난신적자가 떨었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역사 서술의 의미가 여기에 있는 것이고, <친일인명사전>은 그 의미를 잘 살린 작업이다.

'친일'이 과연 죄악일까? 친일 문제를 깊이 연구해 온 박한용이 친일 행위를 '매국형', '직업형', '전범형'으로 분류하는 작업을 한다는 얘기를 들은 일이 있다. '매국형'과 '전범형'은 분명히 범죄 차원에서 생각할 대상인데 극소수에 해당되는 것이고, '직업형'의 경우는 사정이 복잡하다. 허물이라 하더라도 '죄악'이라기보다 '어리석음'으로 생각할 측면이 많다.

진가가 맹자에게 따진 주공의 허물도 나쁜 결과를 예상하지 못한 '어리석음'의 문제다. 주공은 그 허물을 반성하고 고침으로써 후세 사람들의 귀감이 되었다. 도덕에서 반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보여주는 사례다.

일신의 영달을 위해 친일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역사의 흐름에 어긋나는 짓이었음을 깨달았을 때 반성을 제대로 한다면 일시적인 고통을 통해 허물을 고치고 새 출발을 할 수 있다. 그 일시적인 고통을 어떻게 하면 피할 수 있을까, 그리고 친일을 통해 확보해 놓은 기득권을 지킬 수 있을까, 눈치만 보며 허물에 매달려서는 새 시대를 당당한 자세로 맞을 수 없는 것이다. 해방 후 미 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큰 죄악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반성 대신 눈치로 빠져나갈 여건을 만들어준 것이다.

역사는 계속되고 있다. 지금 대한민국 사회 일각의 '친미' 경향은 일제시대의 '친일' 못지않은 수준의 문제를 보여주고 있다. '반미'를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중요한 우방으로서 미국을 존중하되, 미국의 이익을 위해 한국 사회를 등짐으로써 역사의 죄인이 될 위험을 피하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이 조심할 필요를 많은 사람들이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데는 친일의 의미를 제대로 밝히지 못해 온 사정이 작용해 왔다. 역사의 경험을 이 사회가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해서 사회 차원의 반성이 안 되고 있었던 것이다.

역사는 드러내 보이기만 하면 스스로 말한다. <100분 토론>에서 박한용과 주진오가 목청 한 번 높이지 않고 담담히 임하는 태도와 비교해 허동현과 주익종이 말 자르기에 바쁘고 눈길이 갈팡질팡하는 것을 보며 정직한 역사 서술이 "난신적자를 떨게 하는" 힘을 느낀다.

Posted by 문천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10년 전으로 : 소인정치의 시대

기사입력 오전 8:37:09

소인정치(小人政治)의 시대

중국의 고대봉건제에서 지배 계층, 즉 제후(諸侯)와 대부(大夫)를 군자(君子)라 했고 피지배 계층, 즉 서인(庶人)을 소인(小人)이라 했다. 군자와 소인은 말하자면 정치사회적 계급의 호칭이었던 것이다.

예기(禮記)에 "형벌은 대부에게 미치지 않고(刑不上大夫) 예법은 서인에게까지 내려가지 않는다(禮不下庶人)"고 한 것도 신분에 따라 다른 방법으로 사회 질서의 원리가 작용했음을 보여준다. 피지배 계층이 형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통제되는 반면 지배 계층은 명예를 아끼는 마음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공자는 도덕성을 기준으로 군자와 소인을 구분하는 관점을 세웠고, 군자와 소인은 도덕적 계급이 되었다.

10세기에 세워진 송(宋)나라는 종래 왕조의 직접적 인신(人身) 지배와 달리 관료 집단 중심의 통치 구조를 만들었다. 새로운 지배 계층으로 떠오른 사대부(士大夫) 집단은 이념에 따라 정치적 태도를 결정하는 스스로를 군자로 자처하면서 정치 이념과 무관한 피지배 계층을 소인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같은 지배 계층 속에서 자기 뜻에 맞지 않는 부류를 사이비(似而非) 사대부라는 뜻에서 소인으로 규정했다.

의리(義理)를 추구하는 군자의 모임인 붕(朋)과 이익을 좇는 소인들의 모임 당(黨)을 구분해서 보는 구양수(歐陽修)의 붕당론(朋黨論)은 지배 계층의 붕당 현상이 정치 구조의 한 중요한 부분이 되었으며 순기능과 역기능을 아울러 드러내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좋은 붕당은 훌륭한 정치를 가져오지만 나쁜 붕당은 정치를 망치는 최대의 원흉이라는 것이다.

조선시대 정치를 얘기할 때 '당쟁(黨爭)의 폐해'를 누구나 먼저 떠올리는 것은 일제 식민사관이 아직도 청산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제가 심어준 통념대로 조선 정치사가 소모적-파괴적 당쟁사 뿐이었다면 그 나라가 어떻게 500년이나 버틸 수 있었겠냐고 당쟁사 연구가 박광용 교수는 반문하며 선인들이 추구한 군자정치(君子政治) 이념의 계승이 현실 정치의 발전을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한다.

오늘의 정당들은 도덕성을 강조한 동양 정치의 전통도, 정책 노선을 추구하는 서양 정치의 원리도 일체 아랑곳 않는 것 같다. 지방대의원의 양식을 못 믿어 중앙당의 공천 심사권을 강화하는 여당이 세(勢) 불리기를 위해 지구당을 조정한다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권력과 이익을 따라서만 정당이 움직인다면 민주주의는 어느 곳에 깃들인단 말인가. (1998년 5월)

▲ "말도 안 되는 판결을 거듭거듭 내리는 헌법재판관들에게 묻는다. 그대들은 이완용이 그대들보다 더 나쁜 짓을 했다고 생각하는가?" ⓒ프레시안

  내가 어릴 적에는 '유교 망국론'이 '당쟁 망국론'과 함께 우리 사회에 상식처럼 통하고 있었다. 지금은 유교와 당쟁이 동아시아 문명과 조선 정치의 핵심이었다는 사실과 서양 세력과 일본의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들을 의도적으로 폄훼한 측면이 밝혀짐에 따라 인식이 많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그 그림자가 많이 남아 있다. 특히 유교의 도덕 정치에 대해서는 "비현실적인 문제에만 몰두해서 민생 등 현실 문제를 소홀히 함으로써 사회 발전을 가로막았다"는 혐의가 일반인의 생각 속에서 완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도덕 정치와 대비되는 것이 마키아벨리즘으로 대표되는 현실주의 정치다. 20세기 초반 열강의 침략 앞에서 동아시아의 선구적 지식인들은 서양인의 현실주의를 부러워하며 과거의 도덕주의를 반성했다. 그래서 서양인들이 유교의 일부 문제점을 지적해 주자 그것을 열렬히 증폭시켜 유교와 도덕주의를 역사의 죄인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현실주의도 서양에서 절대적 진리로 통하는 것이 아니다. '마키아벨리스트'는 비판의 의미를 품은 말로 통한다. '서양 오랑캐'라 하지만 그들도 도덕의 중요성을 나름대로 이해한다. 특히 공직의 도덕성에 대해서는 상당히 명료한 의식이 형성되어 있다.

이해관계에 따른 행동을 제한하는 도덕성이 공직에서 문제가 되는 까닭이 어디에 있는가? 공직에는 개인의 힘이 경쟁하기에 너무 강한 공권력이 붙어 있기 때문이다.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는 자기 이익을 지키고 키우기 위해 취할 수 있는 행동이 넓은 범위에서 허용된다. 사법적 기준에만 걸리지 않으면 도덕적 기준으로는 별 제한이 없다. 그러나 공직자의 공권력 행사를 이처럼 너그럽게 허용했다가는 사회 질서가 남아날 수 없다.

도덕 정치가 동아시아에서 일찍부터 발달한 것은 국가의 공권력이 높은 수준까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는 마키아벨리 시절까지 그런 규모의 공권력이 형성되지 않고 있었다. 그 후 근대국가가 만들어지면서 공권력 남용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된 것이었다.

그런데 동아시아 사회에서는 서양의 힘을 너무나 선망한 나머지 과거의 도덕주의에 대한 반성이 지나쳐, 도덕성을 무시하는 풍조까지 나타나게 되었다. 미국 대통령 당선자의 공약 가운데 바뀌었으면 하고 바라는 부분을 놓고 한국 대통령이 "선거 때 무슨 소리는 못하냐?" 하는 장면이 이 풍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서양에서 도덕주의의 힘이 유교의 도덕주의보다 아무리 약한 것이라 해도 "거짓말은 나쁜 짓"이란 기초상식은 지켜지고 있는 반면 한국에서는 그 정도 기초 상식도 통하지 않는 것이다.

미디어 법 관계 헌법재판소 판결은 무엇보다 공직의 도덕성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헌법재판소…참 해도해도 너무한다. 법률의 의결 과정에 하자가 있어도 의결된 법률의 효력에는 문제가 없다고?

수도 이전 위헌 판결에서 보인 헌법재판관들의 어처구니없는 수준 문제가 그대로 다시 한 번 드러나는 일이다. 아니, "관습 헌법"? 헌법재판소는 헌법 만들어내는 데가 아니란 말야! 국민이 원하는 헌법은 정당한 절차 거쳐서 대충 만들어 놨어! 꼭 고치거나 보탤 게 있으면 또 정당한 절차 밟아서 만들 거야! 재판관 너희들 입맛대로 만들어줄 필요 없단 말야!

이 어처구니없는 수준이란 것이 기술적 수준은 아닐 것이다. 수십 년 동안 법률로 밥 벌어먹고 살아온 재판관들에게 기술적 문제가 있다면 더 나은 수준을 누구에게 바라겠는가? 도덕성의 수준 문제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도덕성이란 게 뭔가? 양심껏 행동하라는 것이다. 사람마다 양심의 질에 얼마간 차이가 있겠지만, 그래도 '사람'이라면 최소한의 수준이 있으리라는 전제 아래, 사람들이 이해관계보다 양심에 따라 행동하면 사회가 크게 잘못되는 일이 없으리라는 것이 도덕주의 관점이다.

자기를 희생시켜 국가와 민족에게 헌신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내 이익을 버리면서 남들에게 잘해주라는 것이 아니다. 자기 신분과 역할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감을 가지라는 것이다. 헌법재판관으로서 최소한의 책임을 여러 가지 얘기할 수 있겠지만, 헌법재판소가 국민의 불신을 받지 않도록 애쓰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 아니겠는가?

"입법 과정에 불법성이 있지만 법률의 효력에 문제가 없다." 온갖 패러디를 즉각 불러일으키는 이런 판결 내용을 놓고 이해관계에 따라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고 화를 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의 호불호를 떠나, 헌법재판소의 기능에 대해서는 누구도 신뢰할 수 없게 만드는 일이다. 마음에 드는 판결 내려줬다고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헌법재판소의 국가 질서 유지 기능에는 기대감을 줄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정권 유지 기능이라면 몰라도.

이완용을 생각해 보자. 당대의 어느 누구 못지 않은 교양과 기능을 아울러 갖춘 인물이었다. 그리고 대한제국 정부의 최고직에 있던 인물이었다. 한일합방이 잘된 일이라고 우기는 뉴라이트 논객들조차도 이완용까지는 옹호하고 나서지 못한다. 자기 신분과 역할에 대한 책임을 너무 뚜렷하게 등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말도 안 되는 판결을 거듭거듭 내리는 헌법재판관들에게 묻는다. 그대들은 이완용이 그대들보다 더 나쁜 짓을 했다고 생각하는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하기 바란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