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천만 겨레여 기억하라 단기4252년 기미 3월1일 이날은 배달민족의 대대손손이 영원토록 잊지 못할 기념의 날이다. 5천년 역사에 최대의 굴욕인 소위 한일병합의 오점을 우리의 피로써 씻기 시작한 날이요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세계만방에 선언한 날이다.

 

30년 전 이날 참담하던 제1차대전은 이미 끝나고 신세계 건설의 기본조건으로 성명한 미국대통령 윌슨 씨의 민족자결주의는 전 세계 피압박민족에게 전한 폭탄적 희보이었다. 우리의 생존권을 빼앗고 인권을 억압한 적의 밑에서 10년간을 와신상담한 우리의 민족적 의분은 드디어 폭발되어 용감하게도 비무장항쟁이 발작됨에 따라서 3천리 방방곡곡에 태극깃발을 휘날리며 3천만의 이구동성으로 울려나오는 고함소리는 태산을 움직일 듯 밀리는 조수같이 터지는 폭음같이 곳곳마다 수천수만 대중의 조국애의 불타는 시위의 행진의 행사는 전개되었다. 포악무도한 총칼에 맞아 기10만의 형제자매는 희생되었다. 우리 가슴 속에 서리어 있는 나라 망한 자의 슬픔은 3천리 산하에 넘쳤었다. 그리하여 내로는 전 민족독립 의식을 강하게 하고 외로는 만천하의 동정을 환기하였다.

 

민족해방의 동기는 기미 3월1일에 싹트고 잎 되기 시작하여 을유 8월15일에 그 열매를 맺게 되었으매 기미운동을 수인사(修人事)라 하면 을유해방은 대천명(待天命)의 격이었나니 전자는 인(因)이며 후자는 과(果)이었다. 만일 우리 민족으로서 이 운동이 없었다면 금일의 해방은 무의식적 의타적이라는 기록을 역사에 남기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제1차 대전의 독립선언과 제2차 대전의 독립획득은 오로지 민족혼의 지속적 활동을 표시한 것으로서 민족총의를 계속한 혁명선배들의 해외해내에서 악전고투한 결정이니 우리는 선열각위께 못내 사의를 표하는 바이다. 기미년 오늘의 의거는 우리 민족의 혈관 속에 언제나 약동하고 있는 민족적 성격이 한번 발현된 것이었나니 우리 민족의 의혈로써 이로 일 제단을 꾸미었던 것이며 민족자주의 정신은 이로써 더욱 진전되어 감을 영원히 기념하여야 할 것이다.

 

이에 우리는 모름지기 이 신성한 민족적 자립의 호국정신을 배양하여 실력으로써 국위를 세계에 선포하자. 그리고 항시 천은을 감사하며 일층 더욱 깊이 보우하심을 성심으로 기원할진저. (<조선일보> 1948년 3월 2일)

 

1948년 3월 1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기미독립선언 기념대회에서 발표된 “기미독립선언 기념문”이다. ‘독립선언’과 ‘독립획득’ 사이의 인과관계를 강조한 점이 눈에 띈다. 엄밀히 말하자면 1945년 8월 ‘해방’ 이후 31개월째 ‘독립’은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독립의 자격을 확인할 필요를 이 기념문 기초자는 의식했던 것 같다.

 

이 기념대회는 서울시 주최였고, 남조선과도정부 행정명령 제13호(1948년 2월 20일)에 의해 유일한 3-1절 기념대회로 규정된 행사였다. 해방 후 두 차례 3-1절 기념대회는 좌익과 우익 행사가 따로 열렸고, 그에 따른 시위대의 충돌이 있었다. 이번에는 그런 충돌을 없애기 위해 행정명령을 발포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이번 행사 역시 통합된 것이 못 되었다. 좌익이 외면한 것은 물론이고, 이승만과 함께 기념사를 맡을 예정이던 김구가 이 대회를 보이콧한 것이다. 한독당은 2월 25일 상무위원회에서 시 주최 기념대회에 불참하고 독자적으로 기념식을 갖기로 했다. (<동아일보> 1948년 2월 27일) 기념대회에 이어 ‘중앙정부 수립 결정안 축하대회’를 열기로 한 것이 걸림돌이 되었을 것이다.

 

한독당의 기념식은 조촐하게나마 경교장에서 열렸다. 그만해도 대접을 받은 셈이다. 근민당도 당사 안에서 기념식을 열려고 했는데 경찰에게 해산당했다.

 

“3-1절 행사 금지로 근민당서 담화 발표”

 

근민당 대변인은 2일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3·1절 기념행사에 대하여 옥외 집회는 관제로써 독점하고 실내는 자유라는 행정명령에 의하여 본당에서는 당본부 회의실에서 당원만으로 기념행사를 하려고 관계 당국에 전일 통지하였는데 기념당일 정오 식을 거행하려할 때 돌연 해산을 요구하며 때마침 고 여 당수 추모주회까지도 불허하게 되었으니 이날의 혁명적 의의로 보아 중대한 모독이다.” (<경향신문> 1948년 3월 3일)

 

행사와 관계없이, ‘3영수’의 기념사는 2월 29일자 도하 각 신문에 실렸다.

 

“3-1절 맞아 3거두 기념사”

 

3-1절을 당하여 이승만 박사 김구 씨 김규식 박사는 29년 전 조선 자주독립을 절규하며 악독한 왜적과 피투성이의 투쟁을 한 열렬한 애국정신을 회고하며 UN소총회에서 가능한 지역의 선거를 결의한 이때 조국광복의 열의에 넘친 다음과 같은 기념사를 각각 발표하였다.

 

“통일국권 회복” 이 박사: “오늘은 29년 만에 처음으로 특색을 가진 기미운동의 경축일이다. 세계 우방의 협조로 총선거를 진행하여 정권 수립을 결정할 것이다. 기미년에 시작한 대업이 오늘 성공되는 것이다. 지금은 세계대세가 일변하여 강권주의를 제지하고 공의로써 세계평화를 유지하자는 정신이 표명되는 시기이므로 이 대운(大運)에 순응하여 애국남녀가 3·1정신을 다시 발휘하여 우리 4천년 영광스러운 역사를 다시 전개하여 기미년 목적을 완성하리니 이번 총선거로 세우는 정부는 기미년 한성에서 세운 임시정부의 계통으로 통일국권을 회복하는 것이다.”

 

“자주독립 결심” 김구: “우리는 해방이 되었다는 조국의 통일과 독립을 보지 못한 채 또 3-1절을 맞게 되었다. 동맹군은 우리 국토를 무기한으로 점령하고 말았다. 소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나 남에서 떠드는 중앙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은 모두가 우리의 조국을 영원히 양분시키며 도탄에 빠진 동포를 아주 사지에 넣는 것밖에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우리의 살 길은 자주독립의 한 길뿐이다. 주저 말고 유혹되지도 말고 앞만 향하여 매진하자. 내가 비록 불초할지라도 이 길을 개척하고 나가는 데는 앞에 서서 나갈 각오와 용기를 가지고 있다. 3-1절을 지킬 때에 3-1절의 역사와 또 거기서 얻은 교훈을 다시 한 번 새롭게 인식하고 일심일덕(一心一德)으로써 자주독립의 길만 향하여 나가기를 다시 결심하자.”

 

“목적달성 맹서” 김 박사: “오늘 이 기념에 있어서 오직 한 가지 바라는 것은 1919년 3·1운동을 개시할 때와 같이 계급이나 지방이나 종교나 사상이나 이념의 분별없이 동심협력하여 세계의 여하한 변동의 유무를 불구하고 우리 3천만은 완전한 자유와 독립을 얻고 한 나라의 한 민족이 되어 우리의 목적하고 바라던 바를 완전히 달성한 쾌락의 기념으로 이 다음 기념을 맞이하게 되기를 맹서하여 바라마지 않는다.” (<경향신문> 1948년 2월 29일)

 

이승만과 김구는 제대로 붙었다. 그에 비해 김규식은 지금의 기념이 “쾌락의 기념”이 못 된다는 표현을 통해 유엔소총회 결정에 대한 불만의 뜻을 우회적으로 밝혔다. (김규식이 말한 “쾌락”은 중국어 ‘快樂’의 ‘즐거움’, ‘흥겨움’의 뜻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이승만의 “기미년 한성에서 세운 임시정부의 계통”이란 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한성임시정부’는 1919년 만세운동의 여파 속에 일어난 몇 갈래 임시정부 수립 운동의 하나였다. ‘운동’이란 말을 쓰는 것은 임시정부로서 실체를 갖추는 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 뚜렷한 실체를 갖췄던 상해임시정부로 통합된 것은 그 해 가을의 일이었다.

 

한성임시정부는 4월 하순에 수립을 선포했는데, 종이 위에 세워진 정부일 뿐이었다. 그런데 한성임시정부에서 이승만을 ‘집정관총재’로 추대했고, 이승만은 그로부터 ‘대통령’을 자칭하기 시작했다. 상해임정에서 그를 국무총리로 임명했는데, 그가 대통령직을 고집한 것은 한성임시정부에 기대어 대통령 자칭한 것을 발판으로 한 것이었다.

 

한성임시정부 관련 문건은 전해지는 것이 거의 없다. 이승만이 남긴 서류 중에서 발견된 것 하나가 주목을 받아 왔는데, 정병준은 <우남 이승만 연구>(역사비평사 펴냄) 193-195쪽에서 그 내용을 이승만이 바꿔서 선전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미주에 널리 알려진 한성정부 문건은 국내에서 제작된 목판 인쇄본의 내용이 아니라 1919년 7월 4일 이승만이 발표한 내용을 담은 “대한민쥬국대통령의 선언셔”였다. 최근 <우남이승만문서> 동문편(東文篇)에 원본이 공개되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한성정부 문건의 원문을 보지 못했다. 알려진 것은 이승만이 발표한 신문 보도뿐이었고, 이는 상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승만이 발표한 내용을 원래의 한성정부 포고문과 비교해보면 가장 결정적인 두 사람의 직책이 변경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국무총리총재인 이동휘가 국무총리총장으로 격하된 반면, 노동국총판이었던 안창호는 노동부총장으로 한 단계 격상된 것이다.

 

이런 변경이 이루어질 수 있는 첫 번째 가능성은 전사과정에서의 오류가 발생했을 경우이고, 두 번째 가능성은 이승만이 의도적으로 변경한 경우이다. 논리적으로 볼 때 이동휘가 국무총리총재로 알려질 경우, 이는 이승만의 ‘대통령’ 자임에 결정적인 장애가 될 것이 분명했다. 왜냐하면 이승만은 “당초에 한성에서 국한문으로 집정관총재라 하고 영문은 프레지던트”로 했으며, “內地에서 總裁라 거시 즉 統領이라 이 英文으로 President”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논리적으로 한성정부가 단일한 대통령-국무총리 제도라는 뜻이었다. 즉 이승만은 한성정부에서 집정관총재라고 발표했고, 이것이 AP-뉴욕타임즈 등을 통해 미국에 ‘president’로 알려졌으며 자신은 ‘president’라는 영문 단어를 사람들이 이해하기 쉬운 대통령으로 명명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승만은 ‘집정관총재=president=대통령’이며, 세 가지 명칭이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한성정부는 ‘총재=통령=president’의 체제가 아니었다. 총재는 이승만 한 명만이 아니라 이동휘까지 2명이었고, 한성정부는 2총재-8총장의 집단 지도 체제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 이승만은 자신의 최고 지도자로서의 권위를 위협할 수 있는 이동휘의 국무총리총재 직명을 격하시킴으로써 1집정관총재-9총장 체제, 혹은 대통령-국무총리-장관의 수직적인 권력 체제를 강조하려 했던 것이다.

 

한성임시정부는 실체가 없는 기구였기 때문에 이승만이 자기 직책을 뭐라고 내놓든 지적할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 직함을 만드는 데 거침없이 이용되었던 것이다. 이제 그 한성임시정부를 이승만이 들고 나오는 것이 무엇 때문일까? 그는 귀국 후 상해임정의 대통령 경력을 발판으로 지도자 행세를 해왔다. 임정 주석 김구가 그를 인정해줬기 때문에 탄핵으로 물러난 문제도 덮어질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김구와 맞서게 된 마당에, 그는 상해(-중경)임정 아닌 한성임시정부에서 자기 권위의 근거를 내세우기로 한 것이다.

 

경교장의 한독당 기념식에서 김구는 이런 말을 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귀국 이래 이승만을 자신보다 앞세워 온 자세를 이제 거두겠다는 것이다.

 

“나는 귀국 후 지방을 시찰할 때 지방 민중에게 말하기를 자기는 아무 정권이나 지위에 대한 욕망을 가지지 않았으며 만약 조선이 독립된다면 자기는 농촌에 들어가 농군이 되기를 원하며 초대 대통령은 나의 숭배하는 선배인 이승만 박사를 추대할 것을 늘 주장하여 왔으며 민족통일노선으로 일로매진하여 온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조선문제가 급전환된 이때 모모 인사들이 나한테 이 박사와 제휴하고 나가는 것이 옳지 않은가 하고 권고하는 사람도 있으나 나의 생각으로는 38선을 그대로 두고는 우리 민족과 국토를 통일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민생문제를 도저히 해결할 수 없으므로 행동을 같이 할 수 없으며 남조선선거에 응할 수 없는 것이다.” (<조선일보> 1948년 3월 2일, <서울신문> 1948년 3월 3일)

 

한편 김구와 김규식이 불참한 서울운동장 기념대회에서 이승만은 연설 중 총선거 시행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그중 이런 이야기도 있었다.

 

“근자 풍설에 총선거는 도별로 순차 이동실시 하련다는 언론이 있었으나 이런 말은 UN결의안에도 없었던 것이요 따라서 탐지한 결과 다 허언으로 돌아가고 말았으니 조금도 염려할 게 없는 것이다.” (<동아일보> 1948년 3월 2일)

 

총선거의 도별 순차 실시는 유엔소총회에서 제섭 미국대표가 “가능지역 총선거” 제안의 설명 중 했던 이야기다. (제섭 연설의 요지를 군정청 공보과에서 성명서로 발표했고, 해당 내용을 2월 25일자 일기에 소개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소총회 결의안 주문에서 빠졌다. 이승만은 이를 빌미로 총선거 순차 실시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나선 것이다.

 

하지 사령부는 5월 9일 총선거 실시를 알리는 “조선인민대표의 선거에 관한 포고”를 3월 1일 발포했다. 이런 내용이었다.

 

조선인민에게 고함.

 

연합국총회는 연합국임시조선위원단을 설치하였으며 조선인민의 자유와 독립의 즉시 달성에 관하여 동 위원단이 협의할 대표 즉 국회를 구성하여 조선국가정부를 수립할 대표를 택하는 선거의 실시를 건의하였으므로 또 연합국 임시조선위원단은 연합국 소총회와 상의하였으므로 동 소총회는 총회의 결의에 규정한 프로그램을 동 위원단에게 가능한 부분의 조선에서 수행함이 연합국임시조선위원단의 의무라는 견해를 표명하였으므로 또 연합국임시조선위원단은 동 위원단에게 가능한 부분의 조선에서 여사한 선거를 감시하기로 결정하였으며 미국육군이 점령한 지역은 동 위원단에게 가능한 지역이므로 이제 본관은 재조선미국육군사령관으로서 부여된 권한에 의하여 자에 좌와 여히 포고함.

 

1. 조선인민대표의 선거는 연합국임시조선위원단의 감시 하에 본 사령부 관내지역에서 1948년 5월9일 차를 거행함.

 

2. 여사한 선거는 연합국임시조선위원단과 상의 후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개정을 가할 입법의원선거법(1947년 9월3일부 법률 제5호)의 조건과 규정에 의하여 차를 행함.

 

재조선미국육군사령관 미국육군중장 존 알 하지

 

군정청관보 포고 1948년 3월 1일

 

 

Posted by 문천

 

김구와 김규식이 보낸 편지가 어제오늘 사이에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전해졌을 것 같다. 김규식의 비서 송남헌은 그 편지 부치던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1948년 2월 16일 나는 그녀[러시아어에 능통한 송남헌의 지인 고릴리]와 함께 왜성대로 갔다. 당시 남산 경성방송국 부근에 있는 일제 때의 총독부 관사촌을 사람들은 왜성대라고 불렀는데, 여기에 소련군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갔을 무렵이 저녁때였는데, 마침 우리는 저녁식사 후 산보를 나온 소련군 장교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녀는 유창한 소련어로 사정 이야기를 하며 북한에 편지를 보내줄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소련군은 하루 전에 평양으로 가는 기동차가 이미 출발하여 지금 당장은 안 되고 일주일 후인 2월 25일 기동차가 다시 출발할 때 반드시 보내주겠으며, 그렇게 보내면 3월 1일경에는 두 사람에게 편지가 전달될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우리는 두 종류의 편지를 주었다. 하나는 김일성 김두봉에게 보내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당시 북한주둔 소련군 사령관인 코르토코프 장군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소련군 사령관에게 보낸 편지는 김일성 김두봉에게 편지를 보내니 수고스럽지만 전달해달라는 의례적인 내용이었다. 남북의 정치인이 직접 만나 한반도 통일문제를 논의하도록 하자는 백범과 우사의 북으로 가는 편지는 이러한 방식으로 해서 북쪽에 전달되었다. (<송남헌 회고록>(심지연 지음, 한울 펴냄) 99쪽)

 

이 편지를 보낼 방침을 정한 것은 2월 4일의 민족자주연맹(민련) 정치위원 상무집행위원 연석회의에서였다고 송남헌은 회고했다. 그 무렵 김구와 김규식은 유엔위원단 대표들과 잦은 접촉을 통해 남북협상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었으므로 편지를 보낼 계획도 알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군정은 편지 송달에 협조하지 않을 것을 의심했기 때문에 길거리에서 만난 소련군 장교에게 전달을 부탁했던 것이다. 미군정의 후원 하에 정치활동을 펼쳐온 김규식 측에서 미군정의 태도에 이런 의심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 주목할 만하다.

 

편지 송달을 유엔위원단에 맡기는 방안도 의논되었던 모양이다. 2월 6일 김구와 김규식이 위원단을 방문해 메논 의장, 호세택 사무국장, 잭슨 제2분과위원장과 만났을 때의 일이라고 한다.

 

김규식 김구 메논 호세택 잭슨 간의 회의에서는 북으로 발송하는 서한에 대하여 유엔위원단 캐나다 대표로 하여금 주한 영국대사관에 의뢰하여 영국-소련-북한으로 이어지는 외교루트를 통해 정식으로 전달되도록 할 것이 확약되었다. 위원단 측은 남북요인정치회담안을 위원단 회의에 정식으로 상정하여 머지않아 열릴 유엔 임시총회에 반영을 하겠으므로, 이 서한의 회신이 도착되는 대로 즉시 알려줄 것을 요청하였다. 메논은 임시총회 개회 중에 회신이 도착하더라도 즉시 전문으로 알려줄 것을 당부하였다. (<남북협상 - 김규식의 길, 김구의 길>(서중석 지음, 한울 펴냄) 132쪽)

 

김구-김규식-민련 측은 2월 16일자 편지를 사사로운 것이라 하여 그 내용은 물론 발송 사실도 공표하지 않고 있었다. 몇 가지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 첫째, 편지를 주고받는 양측 사이에 공식적 관계가 세워져 있지 않기 때문에 사신의 형태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둘째, 남북협상 반대세력의 개입을 막기 위해서였다. 셋째, 받는 쪽에서 불필요한 부담감을 갖지 않도록 하는 배려였다.

 

요컨대 없던 길을 새로 만드는 단계에서 될수록 조용히 일이 진행되기를 바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유엔위원단에 맡겨 공식 외교루트를 통해 전달하는 공식 편지를 따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쪽이 너무 시간이 걸릴 것 같기 때문에 따로 편지를 보내면서 사신의 명목을 취한 것일 가능성도 있다.

 

비밀은 억측을 낳기 마련이다. 3월 7일자 <동아일보>에 악의적 기사가 나타났다.

 

“양 김 씨 남북회담 요청 북조선서 거절 통고”

 

열화 같은 민중의 총선거 지지를 그대로 묵살하고 김구 김규식 양 씨는 지난 2월 9일 유엔조위의 메논 의장에게 남북요인회담 알선을 탄원한 바 있었거니와 소식통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양 김 씨는 또다시 북조선 스티코프 장군에게 김일성 김두봉 양 씨와 함께 남조선에 내림하여 남북요인회담을 하여 달라는 서한을 발송하였었다는데 최근에 북조선에서는 이를 거부하는 서한을 남조선 양 김 씨에게 전달하였다고 한다.

 

그 이튿날 기자회견에서 김구는 편지 발송 사실을 시인했다. “편지는 보냈는데 아직 회답이 없다.”고 대답한 것이다. (<경향신문> 1948년 3월 9일) 그러나 편지 내용은 밝히지 않았다.

 

3월 25일 평양에서 남북협상을 공개적으로 제안하고 나오자 김구와 김규식은 3월 31일에 김일성, 김두봉으로부터 받은 편지와 함께 2월 16일자 편지의 요지를 공개했다. 김구는 김두봉 앞으로, 김규식은 김일성 앞으로 편지를 썼는데 형식은 달라도 내용은 같은 것이었다고 한다. 김규식이 보낸 편지의 요지는 이런 것으로 발표되었다.

 

1. 우리 민족의 영원 분열과 완전 통일을 판가리 하는 최후의 순간에 민족국가를 위하여 4, 50년간 분주치력(奔走致力)한 애국적 양심은 수수방관을 허하지 않는다는 것.

 

2. 아무리 외세의 제약을 받고 있는 우리의 현실일지라도 우리의 일은 우리가 하여야 할 것이라는 것.

 

3. 남북 정치지도자 간의 정치협상을 통하여 통일정부 수립과 새로운 민주국가의 건설에 관한 방안을 토의하자는 것.

 

4. 북쪽 여러 지도자께서도 가지실 줄 믿는 데서 위선 남쪽에 있어서 남북정치협상을 찬성하는 애국정당 대표회의를 소집하여 대표를 선출하려 한다는 것. (<남북협상 - 김규식의 길, 김구의 길> 135-136쪽)

 

강신주는 <벽초 홍명희 연구>(창작과비평사 펴냄) 503쪽에서 2월 16일자 편지를 보내는 데 홍명희의 역할도 있었음을 밝힌다. 남북협상 추진의 지지 기반이 남북을 통해 다각적으로 형성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볼 수 있다.

 

이처럼 김구-김규식과 같은 거물급 정치지도자들이 남북요인회담을 추진하게 된 이면에는 홍명희의 역할이 중요하게 작용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일련의 증언에 의하면 홍명희는 남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북의 지도자들과 직-간접적인 교섭을 누차 가졌다고 한다. 1947년 12월 김일성은 남한에서 활동 중이던 북조선노동당 정치공작원 성시백을 불러들여 남북합작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이에 따라 성시백은 홍명희를 만나 협의하는 한편 김구-김규식의 측근 인물들과도 연계를 시도했다는 것이다.

 

또한 민주독립당 서무책임위원으로 홍명희의 측근이던 유석현에 의하면, 1948년 2월경 비밀리에 남하한 백남운이 홍명희를 만나 남북협상을 통해 통일정부를 수립하도록 하자고 제의했다고 한다. 홍명희는 이러한 제의에 동조하여 김규식에게 연락을 취했으며, 김규식은 김일성-김두봉에게 남북요인회담을 제안하는 서한을 공동 명의로 보내는 데 대한 김구의 동의를 얻어냈다는 것이다.

 

김구-김규식의 서한을 받은 뒤 북조선노동당 측은 대남연락부장 임해를 서울에 급파하여 홍명희 등과 접촉하고 김구-김규식의 측근인물과도 만나 남북요인회담을 제안한 진의와 배경을 타진하게 했다고 한다. 귀환 후 임해는 김구-김규식의 남북회담 제의는 그들의 애국적 결단에 따른 것이며, 거기에는 민족자주연맹의 홍명희와 박건웅-권태양 등의 노력이 적지아니 작용한 것으로 보고했다고 전해진다.

 

김구와 김규식의 연합 제의에 대해 이북 지도부는 그 ‘진의와 배경’을 따져볼 필요가 있었다고 한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한 가지는 반공-반탁에 앞장서서 최근까지 이승만 노선을 지지하던 김구의 진의를 믿을 수 있느냐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이남 중간파를 무시해도 된다는 남로당 측 주장을 검증할 필요였다.

 

2월 8일자 일기에서 남로당의 ‘2-7 구국투쟁’을 설명할 때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하>(중앙일보사 펴냄)에 수록된 노동당 간부 출신 박병엽의 증언을 소개했다. 1947년 12월 초와 1948년 1월 말의 남북노동당연석회의에서 박헌영과 이승엽이 “남로당의 힘이 강하기 때문에 유엔한국위원회의 활동을 파탄시킬 수 있다.”, “남한에서의 단정 반대 세력과의 연합은 현 단계에서는 필요 없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같은 책 326-327쪽에는 남북협상 제의 서한을 둘러싼 북로당의 논의 내용에 대한 박병엽의 증언이 실려 있다.

 

김구-김규식의 남북협상 제의 서한은 외교경로와 소련군 대표부를 통해 북한에 공식적으로 전달됐습니다. 그러나 북로당은 민련의 2월 4일 결의, 김구의 성명, 심지어 김구-김규식의 편지내용까지 미리 입수했어요.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는 정치공작원 성시백이 민련과 한독당에 끈을 대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동향은 북로당 중앙에 무전으로 즉각 타전됐습니다. (...)

 

북로당은 2월 18~20일 이례적으로 사흘간 남측의 협상 제의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의했습니다. 지도부의 관심은 민련이 대북 서한을 띄우기로 한 결정이 빨리 나온 배경이 무엇이냐에 쏠렸습니다.

 

허가이 등 소련파는 김규식의 협상 제의를 당시 고조되고 있던 남북협상 움직임을 깨려는 미군정의 ‘입김’이라고 주장했어요. 이들은 그 근거로 “미군정 사령관 하지의 정치고문들이 뻔질나게 김규식의 사무실을 들랑거렸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이에 맞서 김두봉-최창익 등 연안파는 “미국의 작용을 무시할 수는 없겠으나 김구-김규식의 애국적 결단이라는 측면도 중요하게 봐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김일성-김책 등 빨찌산파도 연안파를 지지하는 입장을 폈습니다. 갑론을박을 계속한 결과 대세는 김구-김규식의 제의에 호응하자는 쪽으로 기울어졌지만 마지막 날까지도 결론을 내지 못했어요. (...)

 

[2월 22일 서울에 파견되었던] 임해는 귀환 직후 2월 24일부터 재개된 정치위원회 확대회의에서 서울 사정에 대해 간략히 보고를 했습니다. 그는 김구-김규식의 남북협상 제의는 그들의 애국적 결단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어요. 그리고 여기에는 민련의 홍명희-박건웅-권태양 등의 노력이 적지 않게 작용했다고 덧붙였습니다.

 

임해의 보고가 끝난 다음날 김일성은 남한 우익 지도자들의 애국주의를 높이 평가하고 환영함으로써 이들과 연합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여운형이 비워놓은 자리로 다시 눈이 간다. 왜 이제야 남북협상인가? 유엔위원단이 들어와 있어야 남북협상이 필요한 것이고 가능한 것인가? 여운형은 좌우합작의 궁극적 목표를 남북합작에 두고, 북로당 지도부와의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환갑의 몸을 끌고 38선을 십여 차례나 넘어 다녔다. 좌우합작의 쌍두마차로 여운형과 함께 김규식을 일컫지만, 좌우합작의 연장선 위에서 남북합작을 추진할 인물은 단연 여운형이었다.

 

 

Posted by 문천

 

유엔조선위원단은 소련의 북조선 입경 거부에 직면하자 “총선거를 통한 조선 국민정부 수립”이라는 사명을 제대로 달성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소총회에 보고하여 활동방향에 대한 지침을 받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메논 의장이 2월 19일 소총회에 조선 상황을 보고하면서 조선위원단에서 고려한 세 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가) 조선위원은 그 사업을 추진시켜 미군이 점령하고 있는 남조선에만 선거를 실시하고 남조선에 조선 전체를 위한 정부를 수립할 수도 있다.

(나) 조선위원은 남조선에 남조선을 위한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남조선 선거를 실시할 수도 있다.

(다) 또 조선위원은 남북조선을 통일할 다른 가능성도 강구할 수 있다.

 

지금까지 ‘분단건국’이란 말을 써 왔는데, 그 의미를 엄밀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위의 (가), (나)안을 비교한다면 (나)를 ‘분단건국’으로, (가)는 ‘단독건국’으로 표현하는 것이 정확하다고 할 수도 있다. (가)안은 남조선 선거만으로 조선 전체의 국가를 세운다는 것이고, (나)안은 남조선 선거를 통해 남조선만의 정부를 세운다는 것이니까.

 

그런데 (나)안은 사실 ‘건국’까지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북에 세워져 있던 북조선인민위원회를 북조선 인민을 대표하는 북조선 임시정부로 보고 그에 상응하는 남조선 임시정부를 세워서 완전한 건국은 양쪽 임시정부가 주체가 되어 진행해 나가도록 한다는 것이다. 유엔의 역할은 건국 작업의 기반조건을 만들어주는 데 그치고 진짜 건국은 조선인 손에 맡기는 결과가 될 것이었다.

 

한편 (가)안은 유엔의 손으로 조선 건국을 완성한다는 것이다. 조선 전체의 국가를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분단건국’이 아니라고 그 지지자들은 주장하지만, 3분의 2 주민의 선거만으로 전체를 위한 국가를 만든다는 이념적 문제가 있었고, 그와 똑같은 논리로 이북에서도 조선 전체의 국가를 만들 형편이 분명했다는 점에서 현실적 문제가 있었다. 이것이 진정한 ‘분단건국’ 방안이었다고 할 수 있다.

 

메논은 보고연설에서 위원단의 다수 의견이 (나)안을 지지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런데도 2월 25일 소총회에서 미국대표는 (가)안을 소총회 결의안으로 제안했다. 미국대표 필립 제섭은 전날 회의 발언에서 제안 취지를 설명했는데, 그 요지를 서울 주재 미국무성대표 랭든이 군정청 공보부를 통해 성명서로 발표했다. 성명서 전문이 2월 26-27일자 <경향신문>에 게재되었는데, 중요한 내용이 담긴 뒷부분만을 옮겨놓는다.

 

조선위원단은 그들을 원조하고 있는 점령당국과 협의하여 선거법 및 그 세칙을 제정하며 적령자 선거권을 기초로 비밀투표에 의한 선거를 실시하기 위하여 투표지역 혹은 지대를 규정하고 선거일자를 결정하도록 그 조치를 강구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전 지역 혹은 지대에서 동시에 선거를 실시하는 것을 감시하기 위하여는 동 위원단의 인원수는 불충분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므로 동 위원단은 수 지역 혹은 지대에서 순차로 선거를 감시할 것 즉 조선의 남부 도로부터 실시하여 그 도가 완료되면 점차로 북쪽으로 이동 실시하도록 한다는 것을 발표하여야 할 것이다. 또 위원단은 총선거의 목적은 동 위원단이 조선국민의 자유 및 독립의 긴급 달성에 관하여 협의할 수 있는 대표자 즉 국민의회를 구성하여 조선중앙정부를 수립할 수 있는 대표자들을 선출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즉시 발표하여야 할 것이다.

 

국련조선위원단은 그들이 발표한 계획에 따라 마땅히 총선거 감시의 업무를 추진시켜야 할 것이다. 우리는 동위원단이 38선에 도착하여 그들의 중대한 사명인 남북조선 통일선거 감시를 이행함에 있어서 추호라도 저지되는 일이 없이 국련총회에서 부여된 정당한 권리를 당당히 행사하여 주기를 충심으로 바라는 바이다. 만약 불행히도 동 위원단이 소련당국의 방해로 인하여 38이북지국의 총선거감시의 업무를 계속 추진시킬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한다 할지라도 그 결과는 조선국민의 3분지 2이상이 그의 해당한 조선 국민의회의 대표를 선출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조선국민의 3분지 1은 동 의회에 그들의 대표를 참석시킬 기회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또 조선국민은 물론 전 세계의 모든 국민은 이러한 기회를 그 누구가 거부하였는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조선 국민의회는 성립될 것이다. 좌석이 다 차지 않더라도 성립될 것이다. 그리고 동 의회는 그가 원한다면 국련총회의 결정에 명시된 바와 같이 조선 국민정부 수립에 관하여 동 위원과 협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또한 동 의회가 북조선의 인민들과 그들이 국민정부에 참여할 것을 협의하는 데 성공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이와 같이 국련총회 의결 중 나머지 조항을 실천하는 데 관하여 동 위원단과 협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간단히 말하면 미국의 입장으로서는 동 위원단이 소총회에 제출한 제1안을 시인 채택하여야 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제2제안에 대하여는 답변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소총회에 배부하여 달라고 서기국에 대기한 결의안 중에 우리의 의견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미국에 관한 한 미국대표는 총회의 결의안의 제 조항을 이행함에 있어서 미국의 협력을 이에 서약하는 바이다.

 

여기서 “조선 국민의회(Korean National Parliament)”라 한 것이 전 조선인을 대표하는 정치기구로써 “조선 국민정부(Korean National Government)”를 세우는 주체로 제안되는 것이다. 요점은 ‘가능지역 선거’를 통해 통일국가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설명에는 요점 외의 다른 내용이 들어있다. 결의안 주문에는 들어가지도 않고 실제로 실행되지도 않을 내용이다. 선거를 한꺼번에 실시하는 것이 아니라 남쪽 끝에서 시작해 도 하나씩 차례로 선거를 실시하며 북쪽으로 올라오게 한다는 것이다.

 

왜 실행하지도 않을 이런 방법을 설명한 것일까? 각국 대표들이 메논의 보고에서 당연히 품게 되었을 의혹을 무마하기 위해서였다. 의혹은 두 가지였다. 남북을 포괄하는 진짜 ‘총선거’를 이렇게 쉽게 포기해도 되는 걸까? 조선인 사이의 큰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유엔위원단의 역량으로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가 과연 가능할까?

 

소총회는 이전 총회에서 1년간 설치를 결정한 기구였다. 안보리에서 다룰 안건들이 소련의 거부권 때문에 막히는 것을 피하기 위해 미국이 제안해서 만든 편법기구였고, 극히 제한된 기능만을 가진 기구였다. 총회와 안보리에서 위임한 안건만을 다룰 수 있었고 어떤 결정에든 출석회원 3분의 2 찬성이 필요했고, 가맹국에 대해 권고를 직접 행할 권한도 없었다. 지금 조선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도 1947년 11월 14일의 총회 결의안에서 조선위원단이 “필요한 일이 있을 경우 소총회와 협의할 것”을 규정해 놓았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제한된 기능의 임시기구로 만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총회에서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였다. 공산국가 아닌 나라라 해서 미국 주장을 무조건 지지해주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미국 주장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찬성하는 ‘괴뢰국가’들도 몇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 국가는 주체적 입장을 지키고 싶어 했다. 그중 일부는 미국이 원조 등 정책수단을 통해 지지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미국이 꼭 마음먹은 제안은 통과시킬 수 있었지만 비용이 들었다. 억지스러운 제안일수록 비용이 많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948년 2월 하순의 소총회에서 미국은 조선의 단독건국 방안을 꼭 관철시키고 싶었다. 그래서 2월 26일 회의에서 찬성 31, 반대 2, 기권 11이라는 결과를 얻어냈다. 당시 출석상황에서 미국 제안의 통과를 위해서는 30표의 찬성이 필요했다. 공산권 6개국이 참석했다면 34표의 찬성이 필요했을 것이다. 소총회 설치에 찬성한 나라들도 소련 주장처럼 소총회를 미국의 허수아비로 만들어준 것은 아니었다. 보이콧을 하지 않았다면 1948년 2월 26일의 조선 관계 결의안 같은 억지스러운 결의안의 통과는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앞서 밝힌 것처럼 반대한 나라는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였다. 소련을 쉽게 편들어줄 나라들이 아니다. 기권한 나라는 아프가니스탄, 콜럼비아, 덴마크, 이집트, 이라크, 노르웨이, 파나마, 사우디아라비아, 스웨덴, 시리아 및 베네주엘라였다. 기권도 미국 제안의 통과를 가로막는 효과에 있어서는 반대와 마찬가지였다.(한 나라의 반대나 기권을 상쇄하기 위해서는 두 나라의 찬성이 필요하다.) 불출석은 소극적으로 도와주는 효과를 가진 것이었다. 2월 28일자 <동아일보>의 한 기사에서는(“찬성과 기권국”) “이 나라들은 소련과의 인접한 나라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팔레스타인 분할안에 만족을 느끼지 아니하는 회교도가 많은 나라들”이란 해석을 붙이기도 했다.

 

같은 날 <동아일보>의 다른 기사에서는(“정부 수립에 자유 협의 - 국의 권한의 각서”)에는 소총회에서 여러 나라 대표의 발언이 소개되어 있다. 찬성한 대표들 중에도 미국 제안을 흔쾌하게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사실을 알아볼 수 있다.

 

인도대표이며 조위위원 의장인 메논 박사는 미국의 각서는 ‘유익한 지침’이라고는 보나 이는 위원단을 구속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였다. 메논 씨는 또한 조선으로부터 협의 목적을 위한 선거계획 이외의 여하한 계획도 국련이 고려치 않는 데 실망을 표명한 수십 통의 전보를 수취하였다고 발표하였다.

 

뉴질랜드 대표 제임슨 손 씨는 미국안을 지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에 대한 유일한 대안은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는 것인데 무위는 남조선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조선인에게는 독립이 약속되었다. 국련은 그 자체의 헌장을 실시하는 데 단호한 태도를 취하여야 한다. 위원단에 대한 위탁사항이 총회에 의하여 변경되지 않는 한 위원단은 모든 가능한 수단에 의하여 그를 추진시켜야 할 것이다. 만약 방해가 계속된다면 위원단은 가능한 곳에서만 선거를 진행시킬 수밖에 없을 것이다.”

 

파키스탄대표 마이스파하니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미국안은 이상적도 완전하지 않다. 그러나 적어도 이는 평화를 저해하거나 조선인 자신에 해를 끼칠 가능성이 가장 적은 것이다. 특별총회를 소집한다 하여도 이는 어느 파의 심경을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이다. 문제 처리를 더욱 지연시키고 조선 내 분열을 그동안 심화시킬 것이다. 이 총회는 모 국가의 방해를 예견하였던 것이며 위원단이 소련군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하여 업무를 진행시킬 것을 희망하였다.”

 

호주대표 레이프 하리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용 빠져 있음]

 

필리핀대표 로물로는 25일 미국안이 모종 위험성을 띠운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이 위험성은 중대한 것이며 우리는 이를 무릅쓰고 나갈 권한이 없는 것이다. 나는 협의목적만을 위한 선거를 희망하는 바이며 중간에 있어 미소간 교섭재개를 요청하는 바이다.”

 

칠리대표 죠아킨 라라인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호주, 카나다, 스칸디나비아 제국은 우리가 염려할 만한 제점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여차한 우려는 행동을 방해하여서는 안 된다. 국련은 그가 특수한 정책을 갖고 있는 때에 체념상 침묵을 할 수 없다. 그는 지체없이 행동노선을 따라서 나아가야 한다. 나는 미국안에 찬성하는 바이다.”

 

덴마크대표 워리엄 보르베르그 씨는 소련이 결석하고 있으므로 기권하겠다고 말하고,

 

스웨덴대표 군나르 학그로프 씨는 “신사태 발전이 화해에 의하여서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실증하였으므로 미소 교섭을 재개하거나 불연이면 5대국의 협의 또는 특별 국련총회 소집을 원한다.”고 말하였다.

 

에콰도르대표 호메로 비테리-라프론테 씨는 미국안을 지지하면서 이는 남북조선에 대립하는 정부를 출현시킬 위험이 있는데 만약 쌍방이 다 국련에 신청한다면 국련은 어느 정부를 승인할 것인가를 질의하였다.

 

이집트대표 마무드 베이 파우 씨는 위원단이 미국결의안을 실시할 실력이 없으므로 기권하여야 한다고 말하였다.

 

캐나다 대표 레스터 피어슨 씨는 선거가 불법이라고 경고하였으며,

 

레바논대표 카림 아쓰쿨 씨는 조선인만이 결정할 수 있는 문제 결정의 기회를 조선인에 주는 것이라 하여 미국안을 지지하였다.

 

우루과이대표 유레스크 로드리게스 씨는 선거 직전 및 후에 더욱 화해를 목적한 교섭을 추진시키라고 말하였다.

 

노르웨이대표 핀 모 씨는 미국안은 총회 계획을 이탈하는 것이며 이의 채택은 국제법을 위험하게 개혁하는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