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와 김규식이 보낸 편지가 어제오늘 사이에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전해졌을 것 같다. 김규식의 비서 송남헌은 그 편지 부치던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1948년 2월 16일 나는 그녀[러시아어에 능통한 송남헌의 지인 고릴리]와 함께 왜성대로 갔다. 당시 남산 경성방송국 부근에 있는 일제 때의 총독부 관사촌을 사람들은 왜성대라고 불렀는데, 여기에 소련군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갔을 무렵이 저녁때였는데, 마침 우리는 저녁식사 후 산보를 나온 소련군 장교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녀는 유창한 소련어로 사정 이야기를 하며 북한에 편지를 보내줄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소련군은 하루 전에 평양으로 가는 기동차가 이미 출발하여 지금 당장은 안 되고 일주일 후인 2월 25일 기동차가 다시 출발할 때 반드시 보내주겠으며, 그렇게 보내면 3월 1일경에는 두 사람에게 편지가 전달될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우리는 두 종류의 편지를 주었다. 하나는 김일성 김두봉에게 보내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당시 북한주둔 소련군 사령관인 코르토코프 장군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소련군 사령관에게 보낸 편지는 김일성 김두봉에게 편지를 보내니 수고스럽지만 전달해달라는 의례적인 내용이었다. 남북의 정치인이 직접 만나 한반도 통일문제를 논의하도록 하자는 백범과 우사의 북으로 가는 편지는 이러한 방식으로 해서 북쪽에 전달되었다. (<송남헌 회고록>(심지연 지음, 한울 펴냄) 99쪽)

 

이 편지를 보낼 방침을 정한 것은 2월 4일의 민족자주연맹(민련) 정치위원 상무집행위원 연석회의에서였다고 송남헌은 회고했다. 그 무렵 김구와 김규식은 유엔위원단 대표들과 잦은 접촉을 통해 남북협상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었으므로 편지를 보낼 계획도 알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군정은 편지 송달에 협조하지 않을 것을 의심했기 때문에 길거리에서 만난 소련군 장교에게 전달을 부탁했던 것이다. 미군정의 후원 하에 정치활동을 펼쳐온 김규식 측에서 미군정의 태도에 이런 의심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 주목할 만하다.

 

편지 송달을 유엔위원단에 맡기는 방안도 의논되었던 모양이다. 2월 6일 김구와 김규식이 위원단을 방문해 메논 의장, 호세택 사무국장, 잭슨 제2분과위원장과 만났을 때의 일이라고 한다.

 

김규식 김구 메논 호세택 잭슨 간의 회의에서는 북으로 발송하는 서한에 대하여 유엔위원단 캐나다 대표로 하여금 주한 영국대사관에 의뢰하여 영국-소련-북한으로 이어지는 외교루트를 통해 정식으로 전달되도록 할 것이 확약되었다. 위원단 측은 남북요인정치회담안을 위원단 회의에 정식으로 상정하여 머지않아 열릴 유엔 임시총회에 반영을 하겠으므로, 이 서한의 회신이 도착되는 대로 즉시 알려줄 것을 요청하였다. 메논은 임시총회 개회 중에 회신이 도착하더라도 즉시 전문으로 알려줄 것을 당부하였다. (<남북협상 - 김규식의 길, 김구의 길>(서중석 지음, 한울 펴냄) 132쪽)

 

김구-김규식-민련 측은 2월 16일자 편지를 사사로운 것이라 하여 그 내용은 물론 발송 사실도 공표하지 않고 있었다. 몇 가지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 첫째, 편지를 주고받는 양측 사이에 공식적 관계가 세워져 있지 않기 때문에 사신의 형태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둘째, 남북협상 반대세력의 개입을 막기 위해서였다. 셋째, 받는 쪽에서 불필요한 부담감을 갖지 않도록 하는 배려였다.

 

요컨대 없던 길을 새로 만드는 단계에서 될수록 조용히 일이 진행되기를 바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유엔위원단에 맡겨 공식 외교루트를 통해 전달하는 공식 편지를 따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쪽이 너무 시간이 걸릴 것 같기 때문에 따로 편지를 보내면서 사신의 명목을 취한 것일 가능성도 있다.

 

비밀은 억측을 낳기 마련이다. 3월 7일자 <동아일보>에 악의적 기사가 나타났다.

 

“양 김 씨 남북회담 요청 북조선서 거절 통고”

 

열화 같은 민중의 총선거 지지를 그대로 묵살하고 김구 김규식 양 씨는 지난 2월 9일 유엔조위의 메논 의장에게 남북요인회담 알선을 탄원한 바 있었거니와 소식통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양 김 씨는 또다시 북조선 스티코프 장군에게 김일성 김두봉 양 씨와 함께 남조선에 내림하여 남북요인회담을 하여 달라는 서한을 발송하였었다는데 최근에 북조선에서는 이를 거부하는 서한을 남조선 양 김 씨에게 전달하였다고 한다.

 

그 이튿날 기자회견에서 김구는 편지 발송 사실을 시인했다. “편지는 보냈는데 아직 회답이 없다.”고 대답한 것이다. (<경향신문> 1948년 3월 9일) 그러나 편지 내용은 밝히지 않았다.

 

3월 25일 평양에서 남북협상을 공개적으로 제안하고 나오자 김구와 김규식은 3월 31일에 김일성, 김두봉으로부터 받은 편지와 함께 2월 16일자 편지의 요지를 공개했다. 김구는 김두봉 앞으로, 김규식은 김일성 앞으로 편지를 썼는데 형식은 달라도 내용은 같은 것이었다고 한다. 김규식이 보낸 편지의 요지는 이런 것으로 발표되었다.

 

1. 우리 민족의 영원 분열과 완전 통일을 판가리 하는 최후의 순간에 민족국가를 위하여 4, 50년간 분주치력(奔走致力)한 애국적 양심은 수수방관을 허하지 않는다는 것.

 

2. 아무리 외세의 제약을 받고 있는 우리의 현실일지라도 우리의 일은 우리가 하여야 할 것이라는 것.

 

3. 남북 정치지도자 간의 정치협상을 통하여 통일정부 수립과 새로운 민주국가의 건설에 관한 방안을 토의하자는 것.

 

4. 북쪽 여러 지도자께서도 가지실 줄 믿는 데서 위선 남쪽에 있어서 남북정치협상을 찬성하는 애국정당 대표회의를 소집하여 대표를 선출하려 한다는 것. (<남북협상 - 김규식의 길, 김구의 길> 135-136쪽)

 

강신주는 <벽초 홍명희 연구>(창작과비평사 펴냄) 503쪽에서 2월 16일자 편지를 보내는 데 홍명희의 역할도 있었음을 밝힌다. 남북협상 추진의 지지 기반이 남북을 통해 다각적으로 형성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볼 수 있다.

 

이처럼 김구-김규식과 같은 거물급 정치지도자들이 남북요인회담을 추진하게 된 이면에는 홍명희의 역할이 중요하게 작용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일련의 증언에 의하면 홍명희는 남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북의 지도자들과 직-간접적인 교섭을 누차 가졌다고 한다. 1947년 12월 김일성은 남한에서 활동 중이던 북조선노동당 정치공작원 성시백을 불러들여 남북합작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이에 따라 성시백은 홍명희를 만나 협의하는 한편 김구-김규식의 측근 인물들과도 연계를 시도했다는 것이다.

 

또한 민주독립당 서무책임위원으로 홍명희의 측근이던 유석현에 의하면, 1948년 2월경 비밀리에 남하한 백남운이 홍명희를 만나 남북협상을 통해 통일정부를 수립하도록 하자고 제의했다고 한다. 홍명희는 이러한 제의에 동조하여 김규식에게 연락을 취했으며, 김규식은 김일성-김두봉에게 남북요인회담을 제안하는 서한을 공동 명의로 보내는 데 대한 김구의 동의를 얻어냈다는 것이다.

 

김구-김규식의 서한을 받은 뒤 북조선노동당 측은 대남연락부장 임해를 서울에 급파하여 홍명희 등과 접촉하고 김구-김규식의 측근인물과도 만나 남북요인회담을 제안한 진의와 배경을 타진하게 했다고 한다. 귀환 후 임해는 김구-김규식의 남북회담 제의는 그들의 애국적 결단에 따른 것이며, 거기에는 민족자주연맹의 홍명희와 박건웅-권태양 등의 노력이 적지아니 작용한 것으로 보고했다고 전해진다.

 

김구와 김규식의 연합 제의에 대해 이북 지도부는 그 ‘진의와 배경’을 따져볼 필요가 있었다고 한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한 가지는 반공-반탁에 앞장서서 최근까지 이승만 노선을 지지하던 김구의 진의를 믿을 수 있느냐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이남 중간파를 무시해도 된다는 남로당 측 주장을 검증할 필요였다.

 

2월 8일자 일기에서 남로당의 ‘2-7 구국투쟁’을 설명할 때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하>(중앙일보사 펴냄)에 수록된 노동당 간부 출신 박병엽의 증언을 소개했다. 1947년 12월 초와 1948년 1월 말의 남북노동당연석회의에서 박헌영과 이승엽이 “남로당의 힘이 강하기 때문에 유엔한국위원회의 활동을 파탄시킬 수 있다.”, “남한에서의 단정 반대 세력과의 연합은 현 단계에서는 필요 없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같은 책 326-327쪽에는 남북협상 제의 서한을 둘러싼 북로당의 논의 내용에 대한 박병엽의 증언이 실려 있다.

 

김구-김규식의 남북협상 제의 서한은 외교경로와 소련군 대표부를 통해 북한에 공식적으로 전달됐습니다. 그러나 북로당은 민련의 2월 4일 결의, 김구의 성명, 심지어 김구-김규식의 편지내용까지 미리 입수했어요.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는 정치공작원 성시백이 민련과 한독당에 끈을 대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동향은 북로당 중앙에 무전으로 즉각 타전됐습니다. (...)

 

북로당은 2월 18~20일 이례적으로 사흘간 남측의 협상 제의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의했습니다. 지도부의 관심은 민련이 대북 서한을 띄우기로 한 결정이 빨리 나온 배경이 무엇이냐에 쏠렸습니다.

 

허가이 등 소련파는 김규식의 협상 제의를 당시 고조되고 있던 남북협상 움직임을 깨려는 미군정의 ‘입김’이라고 주장했어요. 이들은 그 근거로 “미군정 사령관 하지의 정치고문들이 뻔질나게 김규식의 사무실을 들랑거렸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이에 맞서 김두봉-최창익 등 연안파는 “미국의 작용을 무시할 수는 없겠으나 김구-김규식의 애국적 결단이라는 측면도 중요하게 봐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김일성-김책 등 빨찌산파도 연안파를 지지하는 입장을 폈습니다. 갑론을박을 계속한 결과 대세는 김구-김규식의 제의에 호응하자는 쪽으로 기울어졌지만 마지막 날까지도 결론을 내지 못했어요. (...)

 

[2월 22일 서울에 파견되었던] 임해는 귀환 직후 2월 24일부터 재개된 정치위원회 확대회의에서 서울 사정에 대해 간략히 보고를 했습니다. 그는 김구-김규식의 남북협상 제의는 그들의 애국적 결단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어요. 그리고 여기에는 민련의 홍명희-박건웅-권태양 등의 노력이 적지 않게 작용했다고 덧붙였습니다.

 

임해의 보고가 끝난 다음날 김일성은 남한 우익 지도자들의 애국주의를 높이 평가하고 환영함으로써 이들과 연합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여운형이 비워놓은 자리로 다시 눈이 간다. 왜 이제야 남북협상인가? 유엔위원단이 들어와 있어야 남북협상이 필요한 것이고 가능한 것인가? 여운형은 좌우합작의 궁극적 목표를 남북합작에 두고, 북로당 지도부와의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환갑의 몸을 끌고 38선을 십여 차례나 넘어 다녔다. 좌우합작의 쌍두마차로 여운형과 함께 김규식을 일컫지만, 좌우합작의 연장선 위에서 남북합작을 추진할 인물은 단연 여운형이었다.

 

 

Posted by 문천

 

유엔조선위원단은 소련의 북조선 입경 거부에 직면하자 “총선거를 통한 조선 국민정부 수립”이라는 사명을 제대로 달성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소총회에 보고하여 활동방향에 대한 지침을 받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메논 의장이 2월 19일 소총회에 조선 상황을 보고하면서 조선위원단에서 고려한 세 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가) 조선위원은 그 사업을 추진시켜 미군이 점령하고 있는 남조선에만 선거를 실시하고 남조선에 조선 전체를 위한 정부를 수립할 수도 있다.

(나) 조선위원은 남조선에 남조선을 위한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남조선 선거를 실시할 수도 있다.

(다) 또 조선위원은 남북조선을 통일할 다른 가능성도 강구할 수 있다.

 

지금까지 ‘분단건국’이란 말을 써 왔는데, 그 의미를 엄밀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위의 (가), (나)안을 비교한다면 (나)를 ‘분단건국’으로, (가)는 ‘단독건국’으로 표현하는 것이 정확하다고 할 수도 있다. (가)안은 남조선 선거만으로 조선 전체의 국가를 세운다는 것이고, (나)안은 남조선 선거를 통해 남조선만의 정부를 세운다는 것이니까.

 

그런데 (나)안은 사실 ‘건국’까지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북에 세워져 있던 북조선인민위원회를 북조선 인민을 대표하는 북조선 임시정부로 보고 그에 상응하는 남조선 임시정부를 세워서 완전한 건국은 양쪽 임시정부가 주체가 되어 진행해 나가도록 한다는 것이다. 유엔의 역할은 건국 작업의 기반조건을 만들어주는 데 그치고 진짜 건국은 조선인 손에 맡기는 결과가 될 것이었다.

 

한편 (가)안은 유엔의 손으로 조선 건국을 완성한다는 것이다. 조선 전체의 국가를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분단건국’이 아니라고 그 지지자들은 주장하지만, 3분의 2 주민의 선거만으로 전체를 위한 국가를 만든다는 이념적 문제가 있었고, 그와 똑같은 논리로 이북에서도 조선 전체의 국가를 만들 형편이 분명했다는 점에서 현실적 문제가 있었다. 이것이 진정한 ‘분단건국’ 방안이었다고 할 수 있다.

 

메논은 보고연설에서 위원단의 다수 의견이 (나)안을 지지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런데도 2월 25일 소총회에서 미국대표는 (가)안을 소총회 결의안으로 제안했다. 미국대표 필립 제섭은 전날 회의 발언에서 제안 취지를 설명했는데, 그 요지를 서울 주재 미국무성대표 랭든이 군정청 공보부를 통해 성명서로 발표했다. 성명서 전문이 2월 26-27일자 <경향신문>에 게재되었는데, 중요한 내용이 담긴 뒷부분만을 옮겨놓는다.

 

조선위원단은 그들을 원조하고 있는 점령당국과 협의하여 선거법 및 그 세칙을 제정하며 적령자 선거권을 기초로 비밀투표에 의한 선거를 실시하기 위하여 투표지역 혹은 지대를 규정하고 선거일자를 결정하도록 그 조치를 강구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전 지역 혹은 지대에서 동시에 선거를 실시하는 것을 감시하기 위하여는 동 위원단의 인원수는 불충분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므로 동 위원단은 수 지역 혹은 지대에서 순차로 선거를 감시할 것 즉 조선의 남부 도로부터 실시하여 그 도가 완료되면 점차로 북쪽으로 이동 실시하도록 한다는 것을 발표하여야 할 것이다. 또 위원단은 총선거의 목적은 동 위원단이 조선국민의 자유 및 독립의 긴급 달성에 관하여 협의할 수 있는 대표자 즉 국민의회를 구성하여 조선중앙정부를 수립할 수 있는 대표자들을 선출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즉시 발표하여야 할 것이다.

 

국련조선위원단은 그들이 발표한 계획에 따라 마땅히 총선거 감시의 업무를 추진시켜야 할 것이다. 우리는 동위원단이 38선에 도착하여 그들의 중대한 사명인 남북조선 통일선거 감시를 이행함에 있어서 추호라도 저지되는 일이 없이 국련총회에서 부여된 정당한 권리를 당당히 행사하여 주기를 충심으로 바라는 바이다. 만약 불행히도 동 위원단이 소련당국의 방해로 인하여 38이북지국의 총선거감시의 업무를 계속 추진시킬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한다 할지라도 그 결과는 조선국민의 3분지 2이상이 그의 해당한 조선 국민의회의 대표를 선출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조선국민의 3분지 1은 동 의회에 그들의 대표를 참석시킬 기회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또 조선국민은 물론 전 세계의 모든 국민은 이러한 기회를 그 누구가 거부하였는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조선 국민의회는 성립될 것이다. 좌석이 다 차지 않더라도 성립될 것이다. 그리고 동 의회는 그가 원한다면 국련총회의 결정에 명시된 바와 같이 조선 국민정부 수립에 관하여 동 위원과 협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또한 동 의회가 북조선의 인민들과 그들이 국민정부에 참여할 것을 협의하는 데 성공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이와 같이 국련총회 의결 중 나머지 조항을 실천하는 데 관하여 동 위원단과 협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간단히 말하면 미국의 입장으로서는 동 위원단이 소총회에 제출한 제1안을 시인 채택하여야 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제2제안에 대하여는 답변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소총회에 배부하여 달라고 서기국에 대기한 결의안 중에 우리의 의견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미국에 관한 한 미국대표는 총회의 결의안의 제 조항을 이행함에 있어서 미국의 협력을 이에 서약하는 바이다.

 

여기서 “조선 국민의회(Korean National Parliament)”라 한 것이 전 조선인을 대표하는 정치기구로써 “조선 국민정부(Korean National Government)”를 세우는 주체로 제안되는 것이다. 요점은 ‘가능지역 선거’를 통해 통일국가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설명에는 요점 외의 다른 내용이 들어있다. 결의안 주문에는 들어가지도 않고 실제로 실행되지도 않을 내용이다. 선거를 한꺼번에 실시하는 것이 아니라 남쪽 끝에서 시작해 도 하나씩 차례로 선거를 실시하며 북쪽으로 올라오게 한다는 것이다.

 

왜 실행하지도 않을 이런 방법을 설명한 것일까? 각국 대표들이 메논의 보고에서 당연히 품게 되었을 의혹을 무마하기 위해서였다. 의혹은 두 가지였다. 남북을 포괄하는 진짜 ‘총선거’를 이렇게 쉽게 포기해도 되는 걸까? 조선인 사이의 큰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유엔위원단의 역량으로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가 과연 가능할까?

 

소총회는 이전 총회에서 1년간 설치를 결정한 기구였다. 안보리에서 다룰 안건들이 소련의 거부권 때문에 막히는 것을 피하기 위해 미국이 제안해서 만든 편법기구였고, 극히 제한된 기능만을 가진 기구였다. 총회와 안보리에서 위임한 안건만을 다룰 수 있었고 어떤 결정에든 출석회원 3분의 2 찬성이 필요했고, 가맹국에 대해 권고를 직접 행할 권한도 없었다. 지금 조선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도 1947년 11월 14일의 총회 결의안에서 조선위원단이 “필요한 일이 있을 경우 소총회와 협의할 것”을 규정해 놓았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제한된 기능의 임시기구로 만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총회에서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였다. 공산국가 아닌 나라라 해서 미국 주장을 무조건 지지해주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미국 주장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찬성하는 ‘괴뢰국가’들도 몇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 국가는 주체적 입장을 지키고 싶어 했다. 그중 일부는 미국이 원조 등 정책수단을 통해 지지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미국이 꼭 마음먹은 제안은 통과시킬 수 있었지만 비용이 들었다. 억지스러운 제안일수록 비용이 많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948년 2월 하순의 소총회에서 미국은 조선의 단독건국 방안을 꼭 관철시키고 싶었다. 그래서 2월 26일 회의에서 찬성 31, 반대 2, 기권 11이라는 결과를 얻어냈다. 당시 출석상황에서 미국 제안의 통과를 위해서는 30표의 찬성이 필요했다. 공산권 6개국이 참석했다면 34표의 찬성이 필요했을 것이다. 소총회 설치에 찬성한 나라들도 소련 주장처럼 소총회를 미국의 허수아비로 만들어준 것은 아니었다. 보이콧을 하지 않았다면 1948년 2월 26일의 조선 관계 결의안 같은 억지스러운 결의안의 통과는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앞서 밝힌 것처럼 반대한 나라는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였다. 소련을 쉽게 편들어줄 나라들이 아니다. 기권한 나라는 아프가니스탄, 콜럼비아, 덴마크, 이집트, 이라크, 노르웨이, 파나마, 사우디아라비아, 스웨덴, 시리아 및 베네주엘라였다. 기권도 미국 제안의 통과를 가로막는 효과에 있어서는 반대와 마찬가지였다.(한 나라의 반대나 기권을 상쇄하기 위해서는 두 나라의 찬성이 필요하다.) 불출석은 소극적으로 도와주는 효과를 가진 것이었다. 2월 28일자 <동아일보>의 한 기사에서는(“찬성과 기권국”) “이 나라들은 소련과의 인접한 나라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팔레스타인 분할안에 만족을 느끼지 아니하는 회교도가 많은 나라들”이란 해석을 붙이기도 했다.

 

같은 날 <동아일보>의 다른 기사에서는(“정부 수립에 자유 협의 - 국의 권한의 각서”)에는 소총회에서 여러 나라 대표의 발언이 소개되어 있다. 찬성한 대표들 중에도 미국 제안을 흔쾌하게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사실을 알아볼 수 있다.

 

인도대표이며 조위위원 의장인 메논 박사는 미국의 각서는 ‘유익한 지침’이라고는 보나 이는 위원단을 구속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였다. 메논 씨는 또한 조선으로부터 협의 목적을 위한 선거계획 이외의 여하한 계획도 국련이 고려치 않는 데 실망을 표명한 수십 통의 전보를 수취하였다고 발표하였다.

 

뉴질랜드 대표 제임슨 손 씨는 미국안을 지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에 대한 유일한 대안은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는 것인데 무위는 남조선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조선인에게는 독립이 약속되었다. 국련은 그 자체의 헌장을 실시하는 데 단호한 태도를 취하여야 한다. 위원단에 대한 위탁사항이 총회에 의하여 변경되지 않는 한 위원단은 모든 가능한 수단에 의하여 그를 추진시켜야 할 것이다. 만약 방해가 계속된다면 위원단은 가능한 곳에서만 선거를 진행시킬 수밖에 없을 것이다.”

 

파키스탄대표 마이스파하니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미국안은 이상적도 완전하지 않다. 그러나 적어도 이는 평화를 저해하거나 조선인 자신에 해를 끼칠 가능성이 가장 적은 것이다. 특별총회를 소집한다 하여도 이는 어느 파의 심경을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이다. 문제 처리를 더욱 지연시키고 조선 내 분열을 그동안 심화시킬 것이다. 이 총회는 모 국가의 방해를 예견하였던 것이며 위원단이 소련군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하여 업무를 진행시킬 것을 희망하였다.”

 

호주대표 레이프 하리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용 빠져 있음]

 

필리핀대표 로물로는 25일 미국안이 모종 위험성을 띠운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이 위험성은 중대한 것이며 우리는 이를 무릅쓰고 나갈 권한이 없는 것이다. 나는 협의목적만을 위한 선거를 희망하는 바이며 중간에 있어 미소간 교섭재개를 요청하는 바이다.”

 

칠리대표 죠아킨 라라인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호주, 카나다, 스칸디나비아 제국은 우리가 염려할 만한 제점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여차한 우려는 행동을 방해하여서는 안 된다. 국련은 그가 특수한 정책을 갖고 있는 때에 체념상 침묵을 할 수 없다. 그는 지체없이 행동노선을 따라서 나아가야 한다. 나는 미국안에 찬성하는 바이다.”

 

덴마크대표 워리엄 보르베르그 씨는 소련이 결석하고 있으므로 기권하겠다고 말하고,

 

스웨덴대표 군나르 학그로프 씨는 “신사태 발전이 화해에 의하여서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실증하였으므로 미소 교섭을 재개하거나 불연이면 5대국의 협의 또는 특별 국련총회 소집을 원한다.”고 말하였다.

 

에콰도르대표 호메로 비테리-라프론테 씨는 미국안을 지지하면서 이는 남북조선에 대립하는 정부를 출현시킬 위험이 있는데 만약 쌍방이 다 국련에 신청한다면 국련은 어느 정부를 승인할 것인가를 질의하였다.

 

이집트대표 마무드 베이 파우 씨는 위원단이 미국결의안을 실시할 실력이 없으므로 기권하여야 한다고 말하였다.

 

캐나다 대표 레스터 피어슨 씨는 선거가 불법이라고 경고하였으며,

 

레바논대표 카림 아쓰쿨 씨는 조선인만이 결정할 수 있는 문제 결정의 기회를 조선인에 주는 것이라 하여 미국안을 지지하였다.

 

우루과이대표 유레스크 로드리게스 씨는 선거 직전 및 후에 더욱 화해를 목적한 교섭을 추진시키라고 말하였다.

 

노르웨이대표 핀 모 씨는 미국안은 총회 계획을 이탈하는 것이며 이의 채택은 국제법을 위험하게 개혁하는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Posted by 문천

 

2월 19일 입법의원 제205차 본회의에서 격렬한 사태가 벌어졌다. 설립 후 14개월 만에 가장 격렬한 사태였던 것 같다.

 

19일 입의의 205차 본회의에서는 서상일 의원으로부터 우리나라의 총선거와 독립정부 수립을 돕기 위하여 내조한 UN위원단을 맞이하고 있는 역사적 이 순간에 있어 민의의 대표기관인 입의로서 아무 태도를 표명치 아니하였음은 유감이다. 그러므로 “UN위원단은 우선 가능한 지역만의 총선거 실시를 감시하고 법적 자주독립 통일정부 수립을 협조할 귀 위원단의 신속한 임무 완수를 간청함”이라는 주문의 결의를 요구하는 신익희, 서상일, 김도연, 김법린, 백관수 각 의원 이하 43명의 연서로 된 긴급동의안을 계출하는 동시에 설명을 하자, 장내는 긴장한 가운데에 엄우룡 의원으로부터 “이것은 너무 중대한 문제이니 검토할 시간을 주기 위하여 금일은 보고형식에만 그치자”고 하였으나 서 의원으로부터 “시급한 문제인 만큼 본 회의에서 단호하게 결의 통과할 것을 요망한다”고 주장, 이에 대하여 김학배 의원은 흥분된 어조로 “UN조위는 아직까지 남한만의 선거 운운은 말하지 않는데 우리가 먼저 남한만의 선거를 주장함은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일이며 이러한 불순한 안은 더러워서 상대치 못하겠다”고 모욕적 언사를 던지고 퇴장하자, 저놈을 빨리 잡으라는 등 장내는 아연 소란하여지며 일시 혼란 무질서상태에 빠졌었으나 얼마 후 진정됨을 기다려 신기언, 박건웅 의원으로부터 “UN의 목적은 남북통일 총선거에 있는 것인데 가능한 지역만의 선거는 무엇이며 남에서 이렇게 한다면 북에서도 이와 같은 조치를 할 것이 아닌가. 여하간 이 안은 질문 토의의 가치가 안 된다”고 공박하자, 서 의원으로부터 “소련이 거부한 이상 가능한 지역만이라도 UN은 선거를 할 권한이 있다”는 등 맹렬한 논전이 있은 후, 여운홍 의원으로부터 이 안을 검토할 시간을 가지기 위하여 휴회하기를 동의하였으나, 성립되지 않고 서우석 의원으로부터 계속 토의하자고 응수 동의를 하는 등, 또다시 장내는 혼란상태에 빠지게 되었으므로 윤기섭 의장대리는 이 안 토의는 다음 회의로 미룬다고 한 후 4시반경 휴회를 선언하였다.

 

원래 본 결의안은 법안이 아닌 이상 재적위원 과반수의 출석으로 과반수 찬성이 있다면 결의안이 성립되는 것으로 현재 재적의원 86명 중 과반수인 신익희 의원 이하 43의원의 연서로써 제출된 이상 본회의에 상정 토의하는 것은 형식에 불과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한편 의원의 결의로써 본안이 성립될 때에는 반대 제 의원은 총사직까지도 각오할 것이며 결국 입의의 존폐 문제까지 우려되는바 앞으로 의장의 직권으로서 회의소집을 중지하느냐 혹은 결의안을 통과함으로써 반대의원은 총사직하게 되느냐 라는 본 결의안을 위요하고 입의는 또다시 기로의 운명에 서게 된 바 20일의 본회의가 극히 주목되는 바이다. (<조선일보> 1948년 2월 21일)

 

애초의 민선의원 45인 중에는 한민당과 독촉 세력이 압도적이었고 관선의원 중에도 그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기 때문에 입법의원에서는 이승만 노선 추종자가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개원 초기에도 그 과반수를 이용해 반탁 결의안을 채택한 일이 있었는데 이제 총선거 결의안을 채택하려고 나선 것이다.

 

1946년 10월 전국적 소요사태 속에서 치러진 입법의원 선거는 자금력, 경찰력, 폭력을 독점한 극우반공세력의 독무대였다. 상황이 크게 바뀌지 않은 채 서둘러 총선거를 치른다면 전번 선거와 같은 결과를 얻을 것을 그 세력은 확신하고 있었다. 입법의원 구성 때 견제를 위해 중간파를 집중 투입했던 관선의원 제도도 이번에는 없을 것이므로, 이남 총선거를 통해 구성될 의회를 그들이 지배하게 될 것은 확실한 일이었다. 그래서 총선거 조기 실시에 입법의원의 이름을 걸고 나서려는 것이었다.

 

김규식이 20일 오전 하지 사령관 사무실을 방문한 것은 이 총선거 동의안 때문인 것으로 관측되었다. 19일 저녁 김구, 이승만과 함께 하지의 관저 경무대를 방문했는데(<동아일보> <경향신문> 1948년 2월 22일) 이튿날 아침 따로 다시 찾아갔기 때문이다.

 

20일 상오10시 입의 의장 김규식은 반도호텔로 하지 중장을 방문하여 요담한 바 있었는데 탐문한 바에 의하면 김 박사는 동 회담에 있어서 19일 입법의원에서 민선의원을 중심으로 하는 43명의 연명으로서 제출된 긴급동의안에 대하여 절대반대의 의견을 표명하였다 하며 만일 동안이 입의를 통과하는 때에는 자기는 즉시로 의장을 사임할 의사를 표명하였다 한다. (<서울신문> 1948년 2월 24일)

 

김구, 김규식, 이승만 3인을 가리키는 ‘3영수’란 말이 1947년 12월부터 부쩍 많이 쓰이고 있었다. 정치지도자로서 김규식의 위상이 크게 자라난 것이다. 엊그제 인용한 최영희의 글에(<격동의 해방3년> 450쪽) “미군정은 김규식을 초대대통령으로 밀 방침이었으며, 유엔한위 각국 대표들도 그에게 큰 비중을 두고 접촉하고 있었다.”란 대목이 있다. 1946년 여름 좌우합작 사업 지원을 시작하면서부터 미군정은 김규식의 역할을 중시했고, 단독건국 가능성이 떠오르는 데 따라 김규식이 미군정의 선택이라는 설이 파다하게 떠돌았다.

 

미군정 전체는 몰라도 하지 사령관의 개인적 선택이 김규식이었을 것은 분명하다. 하지는 김구와도 이승만과도 사이가 대단히 나빴기 때문이다. 김규식은 입법의원 의장을 맡으면서 입법의원의 독립적 위상을 확보하기 위해 미군정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했는데 그 입장이 어느 정도 관철될 수 있었던 것은 하지의 각별한 신뢰 덕분이었을 것이다.

 

정용욱은 <존 하지와 미군 점령통치 3년>(중심 펴냄)에서 1947년 봄 미군정 수뇌부가 김규식을 ‘1인자’로 발탁하려 한 계획을 “기만적”이고 “그 자체가 모순에 가득 찬 것”으로 폄하하면서도 그 계획이 상당한 실체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미군정이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막후 작업을 계속하고 있을 때에도 우익진영의 반탁소요 기도가 꼬리를 물었다. 또 입법의원에서도 신익희 법안, 서상일 법안과 같이 한국인이 정권수립 문제에서 이니셔티브를 쥐려는 기도가 계속되었다. 이들은 입법의원에 각각 ‘행정조직법초안’, ‘남조선과도약헌’이라는 법안을 제출하였다. 이 법안들은 입법의원을 통해 행정권 또는 입법-행정-사법의 권한을 한국인에게 넘기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이와 같이 우익이 미군정의 통제 밖에서 정부를 수립하려는 기도를 계속하자 미군정은 이러한 기도를 제압하고 자신의 주도하에 과도정부 수립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확고한 조치의 하나로 김규식을 ‘1인자’로 지명하는 방안을 검토하기 시작하였다. 미군정은 ‘계획’의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김규식의 위상을 제고할 수 있는 일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 계획을 처음 제안한 것은 러치 군정장관이었다. 러치는 제안 이유를 밝히면서 “우리 앞에는 세 가지 대안이 있다. 그 중 하나만이 현재 우리의 목표와 일치한다. 신익희의 계획은 생각할 수 없다. 둘째는 한민당안(서상일 법안)이고, 셋째는 김규식을 대통령으로 하는 것이다. 셋째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 않는다면 우리는 입법의원이 행동에 옮기는 계획으로 우리의 계획을 교체해야 할 지경에 이를 것이고, 그 대안은 이승만이다.”라고 적고 있다.

 

러치와 브라운은 3월 초순 당시 워싱턴에 소환되어 있던 하지에게 이 계획의 실행을 속히 승인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하지도 이 계획을 원칙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았으나 그 실행을 자신의 귀임 때까지 미루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러치는 3월 하순에 하지가 돌아오면 이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는 전제하에 김규식에게 행정 수반으로 취임해 줄 것을 요청하는 서한의 초안까지 작성해 놓았다. (...)

 

이 서한에 의하면 군정장관의 권한으로 김규식을 보통선거에 의해 대통령이 선출될 때까지 대통령 대리로 임명하고, 이렇게 지명된 행정 수반은 군정장관이 행사하는 권한을 대부분 행사하지만 군정장관과 주한 미군사령관에게 거부권이 부여되어 있었다. 러치는 김규식이 대통령직을 받아들인다면 안재홍을 부통령으로, 정일형을 민정장관으로 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군정을 ‘남한과도정부’로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표시했다. 미군정은 김규식의 대통령 취임을 과도정부 수립계획의 완결로 이해하였다. (178-180쪽)

 

이 계획을 김규식이 거부한 것은 하지 사령관의 ‘임명’을 통해 미군정에 의존하는 조직의 대표를 맡을 경우 반탁세력의 집중공격 앞에 희생되고 말 것을 내다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민정장관을 맡은 안재홍이 바로 그런 상황에서 직무 수행에 어려움을 겪은 것을 보더라도 충분히 이해가 가는 걱정이다.

 

대신 김규식은 입법의원 운영에 전력을 기울였다. 선출-구성에 문제가 있는 조직이지만 명목상 민의 대변기관인 입법의원을 주어진 현실 속에서 최선을 다해 운영하는 것이 건국 준비를 위해 중요한 일로 여긴 것이다. 강만길-심지연의 <우사 김규식 생애와 사상 1: 항일 독립투쟁과 좌우합작>(한울 펴냄) 243-288쪽에 입법의원 개원 초기 김규식의 활동 내용이 서술되어 있는데, 정치인 김규식의 생각과 자세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서술이다.

 

김규식이 의장으로서 입법의원의 움직임에 가장 격렬하게 반대한 일은 1947년 1월 20일의 반탁 결의안 통과였다. 그의 비서로 있던 송남헌은 신탁통치에 대한 그의 입장을 이렇게 회고했다.

 

모스크바 3상 결정에 규정되어 있는 신탁통치문제에 대해 내가 알기로는 처음에 김 박사는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제주도에 정부를 세우더라도 신탁통치를 받지 않는 정부를 수립해야 하며 이런 정부가 수립된다면 이를 중앙정부, 또는 합법정부라고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김 박사의 이러한 견해는 3상회의 결정의 전문이 공개되고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면서, 3상 결정에 따라 정부를 수립하고 그 정부가 자주적으로 탁치문제를 결정하도록 한다는 것으로 바뀌게 된다.

 

3상 결정을 세밀하게 검토한 결과 김 박사는 3상 결정이 탁치의 실시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한반도에 통일임시정부 수립을 후원하며 이 정부가 자립하도록 도와준다는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는 1946년 1월 7일의 4당 공동 코뮤니케, 즉 3상 결정은 지지하나 탁치문제는 자주정신에 기초하여 결정한다는 것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생각이었기 때문에 김 박사는 3상 결정에 따라 소집되는 미소공위에 협조하여 임시정부의 수립부터 서둘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탁치문제는 수립된 정부가 자율적으로 판단하도록 하자고 강조한 김 박사는 반탁운동에 앞서 임시정부 수립문제를 앞세워야 한다는 원칙을 계속 견지했고 이것은 후일 좌우합작 7원칙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송남헌 회고록>(심지연 지음, 한울 펴냄) 72-73쪽)

 

김규식은 과도한 반탁운동이 3상회의 결정에 입각한 통일임시정부 수립의 길을 가로막을 것을 걱정했고, 입법의원의 반탁 결의안 채택은 건국 준비의 사명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보아서 반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때 그는 잠시 칩거했을 뿐, 의장직을 사퇴하지는 않았다. 그 자신 신탁통치 반대의 근본적 취지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었고, 입법의원이 아직 태동 단계였기 때문에 더 나은 운영의 길을 찾을 여지가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입법의원에서 조기 총선거를 위한 결의안 채택 움직임 앞에서는 퇴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조기 총선거 주장이 단독건국에 목적을 둔 것이라는 사실은 명백히 드러나 있었고, 입법의원의 활동도 마무리 단계에 와 있었으니까. 2월 20일 하지를 찾아간 것은 퇴진 계획을 알려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조기 총선거 추진 결의안은 2월 23일 이상한 모습으로 입법의원에서 채택되었다.

 

“총선거 추진안 가결로 입의 존폐 기로에 봉착 - 김 의장과 군정의 태도가 주목처”

 

입법의원에서는 지난 19일 서상일 의원 외 42의원이 연서로 제안한 남조선 총선거 실시를 요청하는 결의안 상정을 위요하고 관-민 양측이 대립되어 있다 함은 기보한 바이어니와 23일 개회된 206차 회의에서 의장 이하 주로 관선의원이 퇴장한 후 민선의원만으로써 동안을 다소 수정한 후 가결하였다 한다.

 

즉 23일의 입법회의 경과는 김규식 의장 이하 66의원 출석 하에 개회되어 처음에 의장은 비공식회의를 진행시키려 하였으나 여의치 못하여 이어서 김규식 의장은 “재적의원 3분지 2 이상 출석에 과반수 가결로 처리할 것”을 동의하였으나 이것도 부결되자 동안에 책임을 질 수 없다 하여 퇴장하자 동씨에 따라 관선의원 23인이 퇴장하였는데 민선 측에서는 그대로 회의를 진행하여 백관수 씨를 임시의장으로 선출 재석의원 42명으로 별항과 같이 제안 주문을 수정 통과시키고 하오 6시경 산회하였다 한다.

 

그리고 동 결의문은 24일 딘 군정장관 및 UN조위에 전달되었는데 관선 측 일부에서는 23일 회의 진행에 있어서 임시의장 선출은 재적의원 3분지 2 이상이 필요하다고 하여 동 회의를 위법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원법에는 이에 관한 의원수를 규정한 것이 없다고 한다.

 

주문: “UN조선위원단은 위선 가능한 지역에서 총선거 실시를 감시하여 조선국민정부로서 승인을 얻도록 하여 국제적 협력하에 조선의 완전통일을 기할 것을 요청함.”

 

한편 동안이 통과되면 의장 김규식 씨는 사직하겠다는 것을 지난 20일 하지 중장에게 표명하였다고 전문되는바 앞으로 동씨의 거취가 주목되는 터로 관선의원 측의 공동보조가 예상되어 바야흐로 입의는 존폐 기로에 봉착하게 되었는데 민선 측에서는 끝까지 강경한 태도로서 모 의원은 “이제 입의 해산 책임을 어느 편이 지는가 하는 문제밖에 남지 않았다.”고 말하였는데 미군정의 태도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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