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4일 서울을 떠난 유엔조선위원단의 메논 의장과 호세택 사무국장은 16일 뉴욕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의 도착 소식에 뜻밖의 이야기 하나가 얹혀서 전해졌다. 이북에 단독정부가 세워졌다는 소식을 메논이 들었다고 하는 것이다.

 

“조선인은 통일 달성 열망, 북조선 괴뢰정권은 독립에 타격 - 뉴욕에서 메논 씨 담”

 

[뉴욕 18일 발 UP 조선] 국련조선위원단 의장 인도대표 K. P. S. 메논 씨와 동 위원단 사무총장 호세택 박사는 16일 조선에서 당지에 도착하였는데 메논 씨는 조선 사정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19일에 국련에 대하여 총회의 조선독립결의안 실시에 있어 봉착한 난관에 관하여 보고할 것이다. 북조선에 소련의 괴뢰정부가 수립되었다는 보도는 놀라운 것이다. 조선인은 그들이 수백 년에 걸쳐 통일되어 있으며 통일을 유지하기를 열망하고 있다. 만약 이상 보도가 사실이라면 이는 우리가 회피하기를 절망(切望)하는 바의 협정 위반이다. 미소 양군의 당초의 점령목적은 일본군대를 철퇴시키는 것이었다. 여차한 괴뢰정부는 우리가 조선독립을 위하여 행하고 있는 노력에 중대 타격이 되는 것이다. 조선인에게는 여차한 정부를 전복시킬 힘이 없으며 이는 실력문제이다. 나는 북조선을 방문할 수 없었다. 나는 국련에 대하여 조선의 현하 정치상태를 보고할 터이다.” (<경향신문> 1948년 2월 19일)

 

이북의 국가 수립 소식을 메논이 “조선에 있는 미국 관리의 한 사람”으로부터 들었다고 전한 기사도 있다.(<조선일보> 1948년 2월 18일) 그 관리란 아마 하지 사령관의 정치고문 조지프 제이콥스였을 것 같다. 1947년 6월에 사령관 고문 겸 미소공위 대표로 조선에 온 제이콥스는 1947년 11월 중순부터 워싱턴에 가 있다가 1월 하순에 서울에 돌아왔는데 이제 또 메논, 호세택과 같은 비행기로 뉴욕에 갔다. 미군정에서 유엔 대책에 관한 중요한 책임을 가진 인물이었는데, 메논은 비행기에서 이북 소식을 들은 모양이다.

 

“각원(閣員) 20명, 국기는 소련식 모방 - 북조선인민공화국 구성내각”

 

[주 서울 AP 특파원 로버츠 씨 18일 제공 합동] 평양으로부터의 방송에 의하면 북조선에서 기초하고 있다는 ‘민주조선인민공화국’ 헌법의 내용은 대략 여좌한 것이라 한다.

 

1. 내각구성: 수상 1명. 수상대리 1명. 국가기획위원회 위원장 1명. 기타 17명의 국무상.

 

2. 도·군·시·면·촌 등은 선출된 인민위원회가 이를 통치함.

 

3. 대심원(大審院)은 인민회의가 선정함. 지방법원은 인민위원회가 선정함.

 

4. 국가문장: ‘민주주의조선인민공화국’이란 문자와 벼이삭과 철공업을 상징하는 도안에다 적성(赤星) 및 해머, 낫의 도안을 가함.

 

5. 기타: 농업 및 모든 중요산업을 국관(國管) 하에 두는 것을 규정하고 있다. (<경향신문> 1948년 2월 19일)

 

하루 전 <경향신문>에도 로버츠 특파원이 제공한 기사가 실려 있었다. 그 기사에는 “자기 명의로 발표하지 않을 것을 전제”로 한 미군 당국 모 고급관변의 발언을 인용, “헌법, 군대, 국기 등을 갖춘 소련 괴뢰정권”이 수립되었다고 주장했다. “북조선 수립은 UN조선위원단이 소총회에 업무를 보고하고 신 지령을 받으려는 것과 때를 같이 하고 있다”는 말도 인용되어 있고, 아래와 같은 김일성의 평양방송 연설 내용도 소개되어 있다.

 

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할 헌법은 북조선인민회의에 제출되었다. 이는 3월 중순경에야 최종적으로 가결될 것이다. 그리고 북조선 인민군의 수립 목적은 결코 일부 반동층이 악의적으로 선전하고 있는 바와 같은 내란을 전개하려는 것이 아니다. 인민군은 민족을 분할하고 살육시키려는 일부 반동층의 책동에 기선을 제하려 하는 것이다. 헌법 초안은 인민회의에서 4차 회의를 통과한 것이다. 그러나 인민의 토의를 거친 후에 3월 중순경 특별회의에서 최종적 가결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금반 우리가 수립할 신 정권은 타일 전 조선을 포섭하게 될 것이며 서울이 수도가 될 것이다. 통일 달성까지는 평양에 본부를 두게 될 것이다.

 

이북에서 헌법 제정 작업은 1947년 11월부터 공개적으로 진행되어 온 것이다. 이제 한 차례 초안이 마련된 것을 갖고 국가가 탄생한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것이야말로 위에 인용한 것처럼 조선위원단의 소총회 보고에 때를 맞춘 선전활동일 것이다. 이북의 헌법 초안은 2월 9일 인민회의 제4차 회의에서 통과되어 이튿날 발표되었고, 최종 가결되는 것은 남북연석회의 뒤인 4월 말의 일이다.

 

노동당 간부 출신 박병엽의 회고에 따르면 이 헌법 초안은 소련식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조선 실정에 맞춘 측면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소련에서 나온 사람들은 권력구조와 공민의 기본적 권리 의무 등에서 ‘소련헌법의 틀’을 고집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소련에서 체험한 스탈린헌법을 염두에 둔 겁니다. 이에 반해 최용달, 유원식 등 국내파는 국내 실정을 중시했어요. 그러다보니 논란이 뒤따른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요.

 

소련파는 소련헌법 말고는 잘 몰랐던 게 사실입니다. 반면에 국내파는 공산주의자로서 소련헌법을 이미 접해 본 것은 물론 일제 때 각국의 부르주아 헌법을 공부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때문에 여러 모로 융통성이 있었고 “현실에 맞는 헌법이 요구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최고 주권기관과 중앙 집행기관 등 권력구조에 대해서는 쉽사리 의견 접근을 볼 수 있었으나 토지 소유 제한 폭, 중소 상공업 허용 여부 등 헌법의 근본 원칙과 공민의 기본적 권리, 의무를 둘러싸고 논쟁을 벌였지요.

 

소련파는 소련에서의 부농 청산 경험을 예로 들며 “부르주아가 다시 등장할 소지를 애초부터 없애야 한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이들은 “농촌에는 부농, 도시에는 중소 상공업자를 그대로 둔 채 나라를 세운다면 결국 부르주아 공화국을 만들자는 게 아니냐”며 항변했어요.

 

그러나 국내파와 빨치산파들의 주장은 이들과 사뭇 달랐습니다. “소련은 부르주아를 청산하는 사회주의혁명 단계에 있지만 조선의 현실은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숙청하고 봉건제도의 유습을 청산해 진정한 민주주의 제도를 정착시켜야 하는 단계”라는 게 국내파와 빨치산파의 논리였습니다.”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하>(중앙일보사 펴냄) 300-301쪽)

 

조선인민군의 창설도 이 무렵 1948년 2월 8일의 일이었다. 이북에서는 헌법 제정도 군대 창설도 모두 ‘북조선’ 단독건국을 위한 것이 아니라 ‘통일조선’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형편 닿는 대로 건국의 준비를 하는 것이라고 했다.

 

군대는 몰라도 헌법 준비에 대해서는 이 주장에 일리가 있다. 이남의 입법의원은 선출과정에서 대표성에 문제가 있을 뿐 아니라, 당파적 입장에 얽매여 건국 준비를 제대로 못해온 문제가 있다. 보통선거법이라고 만들면서 선거 자격을 25세 이상으로 만들어놨다가 미군정 측에서 되돌려 보내는 바람에 겨우 23세로 낮추는 꼴을 보라. 헌법 제정은 몰라도 초안 정도는 어느 정도 대표성을 가진 북조선인민회의에서 준비해 준다면 고마운 일이다.

 

명분에 일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도, 이북의 건국 준비가 실제로는 단독건국을 준비한 것으로 봐야 할 측면이 더 크다. 예컨대 1946년 3월의 토지개혁 같은 것을 보라. 시급한 과제이기 때문에 서두르지 않을 수 없다는 주장은 옳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서두른다면 방법과 기준이 온건해야 했다. 민족통일국가가 성립된 후에 합의에 따라 제2차 토지개혁을 시행할 여지를 남겨놔야 했다. 최대한 과격하고 급진적인 개혁을 즉각 시행한 것은 통일건국에 대한 배려가 없었던 일이다.

 

박명림은 이북의 단독건국 작업이 이남보다 앞서 진행되었다는 견해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2>(나남출판 펴냄) 325-326쪽에서 밝혔다.

 

북한은 48년 1월 22일 소련대표의 선거 거부와 동시에 공식적인 정부 수립작업에 착수하였다. 최초의 단계는 가장 중요한 헌법에 관한 토론이었는데 이는 1948년 2월 북조선인민회의 제4차 회의 때부터 본격화되었다. 헌법에 관한 논의가 의미하는 바는 1월에 유엔한위가 들어오자 곧 헌법 작성에 착수하였다는 소리였다. 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의 실시는 늦었지만 헌법 작성의 시작은 남한보다도 훨씬 더 일렀던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헌법 제정에 관한 문제는 일찍이 47년 11월에 소집된 북조선인민회의 제3차 회의 때부터 제기되었었다. 이 시점은 유엔에서 미국의 주장이 통과된 직후였다. 이후 48년 9월까지의 기간은 남한이 먼저 정부를 수립하게 만들어 비난의 근거를 확보하겠다는 기다림의 기간이었던 것이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이미 국가를 수립해놓은 상태에서 서두를 것이 없었다는 현실적 이유와, 단정으로 먼저 갔다는 대남 공격의 명분을 쌓기 위해서였다.

 

통일건국을 위한 것이든 분단건국을 위한 것이든 건국 준비가 이북에서 더 잘 진행되어 온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이남에서 미군정이 총독부의 통치 기능을 그대로 물려받아 국가 기능을 독점하고 있는 동안 소련군은 진주 직후부터 점령군의 역할을 최소화하며 인민위원회의 역할을 키워줬다.

 

1946년 2월에 수립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이남의 미군정에 상응하는 과도행정부 역할을 수행했고, 1년 후 선거를 통해 조직된 북조선인민위원회는 과도정부의 위상을 제대로 갖춘 것이었다. 명목상의 부서장만 조선인으로 앉힌 ‘남조선과도정부’나 선출에도 대표성이 없고 입법 권한도 제대로 못 가진 ‘남조선과도입법의원’과 차원이 다른 자치조직이었다.

 

북쪽에서 건국 준비에 앞서가고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인데, 과연 그 목적이 명분대로 통일건국에 기여하는 데 있었던 것인지 분단건국의 속셈이 있었던 것인지는 그 뱃속에 들어가 봐야 알 일이다. 아마 이북 지도부 안에도 자기네 식을 관철할 수 없다면 분단건국이라도 불사한다는 패권주의 성향과 통일건국 명분을 진심으로 추구하는 민족주의 성향이 혼재해 있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이남 사정이 분단건국 쪽으로 쏠리는 데 따라 이북 지도부 안에서도 패권주의 성향이 힘을 더해갈 것이 예상된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