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 어제 기자회견 중 선생님의 민정장관 사임설 질문에 “항간에 본인의 사임설이 상당이 유포되고 있는 모양이나 나로서는 사임원을 제출한 일도 없고 또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는 관계로 묵묵히 직무를 수행하고 있을 따름”이라고 대답하셨죠.(<조선일보> 1948년 3월 4일) 요즘 선생님 사임설이 부쩍 떠도는 모양입니다. 그럴 만한 이유라도?

 

안재홍: 내 사임설이야 1년 전 취임 때부터 떠돌지 않은 적이 있나요? 내가 그만두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는 이상 사임설은 떠도는 건데, 부쩍 많이 떠돈다는 건 내 사임을 바라는 그 사람들 마음이 부쩍 간절해진 거라고 보면 되겠죠.

 

민정장관 역할에 있어서는 무능하다는 비판을 각오한 지 오랩니다. 내 주견을 내세울 생각을 버렸어요. 주어진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일 따름입니다. 작년 7월 웨드마이어 특사가 왔을 때 과도정부정무위원회에서 작성한 ‘시국대책요강’이 큰 파문을 일으켰지만, 정무위원장인 내 뜻과 관계없이 다수 정무위원들의 주장에 따라 만든 것임은 김 선생도 짐작했겠죠.

 

요즘의 사임설 유행은 남북협상 운동 때문이겠죠. 나는 민정장관 직에 있는 한 업무 외의 일에 관여를 최대한 삼가고 있지만 남북협상을 지지하는 내 뜻은 좌우합작 추진 때부터 드러나 있는 것이니까요. 남조선 조기 총선거를 추진하는 쪽에서 남북협상 운동에 신경을 곤두세우다 보니 내 존재가 새삼스레 눈에 거슬리는 모양입니다.

 

김기협: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이 공창(公娼) 폐지 연기 로비 관계로 선생님을 소환 조사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계시죠? 포주들이 정-관계 인사들에게 7백만 원을 뇌물로 제공했다는 사건 말입니다.

 

오늘 딘 군정장관이 기자회견에서 “장 수도경찰청장은 안 민정장관 소환에 대하여 언급하였는데 장관 견해 여하?”하는 질문에 “완전한 조사가 끝나기 전에 정부고관들은 어떠한 형사사건에 관련시킨다는 것은 현명한 일이라 할 수 없으며 또 모든 관계자에 대하여 불공평한 것”이라고 대답했죠. 이렇게 물의가 일어나니까 장택상이 내일(3월 5일) 그에 관한 담화문까지 발표합니다. 제가 담화문 내용을 입수했는데 보여드릴게요.

 

“작일 군정장관 기자회견석상에서 한성일보 기자 조모가 수도청장이 안재홍 민정장관을 피의자로 소환하였다고 경찰이 고관을 소환함은 직권남용이니 남조선경찰의 독재적 반영이니 하고 질문하였다. 경찰은 수사기관인 만큼 관등과 계급을 막론하고 누구든지 소환하여 취조할 수 있다. 본관은 사법경찰관으로 일 피의자를 부른 것이지 민정장관을 부른 것은 아니다. 또 안재홍 씨는 기간 모 군정조사기관에 수차 조사를 받았다. 어째서 조선경찰이 소환함은 독재적이요 직권남용이며 모 조사기관이 취조함은 독재적이 아니며 직권남용이 아니냐? 법률은 관등도 없고 계급도 없고 법률 앞에는 누구든지 다 평등이다. 일 형사가 사법경찰관의 자격으로 검찰관의 명령에 의하여 수도청장을 일 피의자로 조사할 수 있다. 기관의 차별을 감행함은 구 일제시대의 일진회원의 재판이라고 나는 타기한다.” (<서울신문> 1948년 3월 6일)

 

수사 중인 사건 내용을 수사관계자가 고의적으로 흘림으로써 피의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을 요즘 세상에서는 ‘빨대질’이라 해서 하더라도 아주 조심스럽게 합니다. 그런데 장택상은 빨대질을 아주 당당하게 하네요. 그가 한 말 중에 사실이 더러 있습니까?

 

안재홍: “모 군정조사기관에 수차 조사를 받았다”는 게 그의 발언 중 알맹이인데, 조사에 협조한 일은 있죠. 피의자 입장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떠도는 소문, 특히 경찰 언저리에서 떠도는 소문 중에 나에 대한 터무니없는 모략이 많다는 사실을 미군 간부들도 다 알아요.

 

민정장관을 맡기 전, 1946년 말의 조미공위 때 경찰 개혁을 강하게 요구한 것, 특히 조병옥 장택상 양 씨의 경질을 제안한 것 때문에 그들이 나를 적대하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인데, 조병옥 씨는 그래도 취하는 방법에 절도가 있어요. 반면 장택상 씨는 듣는 사람 낯이 화끈거릴 소리를 거침없이 하고 다니니, 정말 체통이 말이 아닙니다. 내 체통 말고 그 사람 체통 말이에요.

 

피의자? 무슨 혐의가 있고 무슨 증거가 있다고 그런 소리를? 그래도 나는 신분이 있어서 그런 소리가 ‘소리’에 그치고 말지만, 꼼짝 못하고 당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김기협: 문제가 된 공창 폐지 연기 청원에 입법의원 의원 십여 명과 과도정부 정무위원 몇이 연루되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지난 8월 8일의 공창폐지법 의결은 입법의원의 업적 중 가장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의 하나입니다. 이 법이 10월 말 군정장관의 인준을 받고 지난 2월 14일 발효했습니다.

 

그런데 이 조치가 제대로 시행되려면 필요한 부대조치가 많지요. 입법의원 통과 직후 <경향신문> “여적”란에(1947년 8월 13일) 이런 지적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전번에 인신매매가 금지되어 그 다음 순서로 공창 폐지가 당연히 예상되었거니와 그러면 이에 따라 실업하게 되는 창기 수가 얼마이고 그들을 어떻게 구제해 나가겠다는 선후책이 서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악법은 물론 폐지하여야 하지만 이 같은 악법필폐(惡法必廢)의 논(論)에만 철저하여 그 폐지에 따르는 모든 폐해에 대한 대책을 강구치 않는 것은 때로는 그 폐해가 클 때가 많다. 공창 폐지에 따르는 사창의 발호, 화류병의 만연 등의 문제도 소홀히 할 수 없는 한 개 사회문제인 것을 생각할 것.

 

그런데 반년이 지나 시행 단계에 이르도록 선후책이 제대로 세워지지 못했습니다. 1948년 2월 14일자 <경향신문>의 “사회각층의 말과 창기의 말” 기사에 창기 두 사람의 소감이 실렸습니다.

 

“빚 갚을 게 걱정” 창부 김매자 담: “빚 때문에 큰일 났습니다. 최소 1, 2만원의 빚은 지고 있어요. 우리들은 나쁜 년이라고들 합니다만 누가 자원해서 이런 곳에 왔겠습니까. 앞으로 지낼 일이 야단입니다. 내 이름을 써보라고요? 글자를 알면 내가 이런 데서 이렇게 있겠습니까.”

 

“장기 없는 게 한(恨)” 창부 이미향 담: “이 집에서 나가야 할 형편이라면 어디로든지 방 한 칸 빌려서 무슨 일이든지 하는 수밖에 없을 테지요. 배운 것도 없고 다른 장기가 무엇 있어야지요. 공장 같은데요? 누가 일을 시켜주겠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달라 속에 울화증이 있어서 그런 손일 같은 것은 생각해보지도 못합니다.”

 

지난 1월 21일 선생님이 민정장관으로 이런 말씀을 했죠. “서울에만 2천여 명의 공창이 있는 모양인데 그들의 구호책에 대해서는 부녀국에서 열심히 연구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을 그냥 해방시켜준다 하더라도 지금까지의 생활환경으로 인하여 자주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을 것으로 이들을 일정한 기간 수용하여 성병도 치료하고 독립한 경제생활을 할 수 있도록 훈련시켜 근로역작하는 정신을 함양해야 하므로 지금 이러한 견지에서 그 대책안을 세우고 있다.” (<경향신문> 1948년 1월 22일) 시행을 불과 보름 앞두고 대책을 “연구”하고 있다니 딱한 일 아닙니까.

 

그런 형편에 1월 27일 입법의원에서 제기되었다가 부결된 시행 3개월 연기안도 나름 일리 있는 제안이었죠. 실제로 시행 직후 신문 보도를 보더라도 시행 준비가 제대로 되지 못한 것은 분명합니다.

 

14일로 공창제도는 폐지되어 일제가 이 땅에 남겨 놓고 간 악습의 일단이 없어졌거니와 해방되었다는 그들 창기들의 그 후의 귀추는 어떻게 되었는가? 공창제가 폐지된 지도 이미 3일이 된 오늘도 묵정동 전 유곽에는 해방되었다는 창기들이 갈 곳이 없어 그냥 그대로 주저앉고 있다. 현재까지 묵정동에서 떠난 전 창기는 불과 5·6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며 돈을 벌지 못하는 그들에게 밥을 그대로 먹여줄 수 없다는 포주도 벌써 나타나고 있어 갈 곳 없는 창기들은 당국이 누차 언명한 후생대책이 어찌되었느냐고 창기연맹 대표가 16일 시청에 나타나 항의를 제출하였다. 더욱 이들의 부채문제는 현상으로는 아무 해결의 방도가 없어 채귀(債鬼)에게 시달리고 있는 창기들도 많다고 하며 결국 사창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한편 서울시청에 나타난 창기연맹대표 3명은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악담을 퍼부으면서 김 시장을 비롯한 시청 당국자를 비난하면서 입으로 약속한 후생대책은 도대체 어떻게 되었느냐고 맹렬한 항의를 하였다. 이에 대하여 시 당국자는 지난번 창기를 수용하기로 결정한 적산가옥 6동으로 오늘 저녁부터라도 온다면 밥만은 먹여주겠다고 격분한 창기들을 무마하였는데 공창폐지는 벌써 초입에서 난관에 봉착한 감을 주고 있어 당국의 미봉책이 드러나고 있다. (<서울신문>, <조선일보> 1948년 2월 17일)

 

그런데 2월 17일 입법의원에서 “공창제도를 연장하여 달라는 운동비 7백만 원을 포주가 입법관에 제공하였다는 사건”을 조사하자는 서우석 의원의 긴급동의가 채택되면서 불법로비 문제가 일어난 건데요. 1월 말 연기안을 제출한 의원들에 대한 정치적 공세가 아닌가 하는 의혹도 듭니다. 실제로 뇌물 수수가 있었던 것 같습니까?

 

안재홍: 의원 중에 별별 사람이 다 있으니 그런 일이 없었다고 장담은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거론되는 의원 중 절대 뇌물 받고 그런 짓 했을 리가 없다고 내가 확신하는 사람은 몇몇 있어요. 사법당국에서 조사 중인 사건이니 결과를 기다려보겠습니다.

 

공창 폐지 문제는 참 여러 모로 생각할 점이 많은 일입니다. 매춘의 관행은 인간사회 어디에나 있던 것인데 이것을 제도화한 ‘공창(公娼)’은 일본제국의 비인간적 측면을 여실히 보여준 것에 틀림없습니다. 당연히 폐지해야 할 것이지만, 아무 대책 없는 폐지는 문제의 해결이 아니지요. 지난 달 입법의원에서 시행 연기안을 지지한 의원들 중에는 대책을 더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올바른 뜻을 가진 분들이 많았습니다.

 

공창 폐지 같은 좋은 일의 연기를 주장한 것은 나쁜 놈들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올바른 정치가 아닙니다. 나도 대책 강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이런저런 기회에 밝힌 것이 지금 장택상 씨에게 피의자로 몰리는 빌미가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 그렇다면 이번 뇌물사건이라는 것이 특정 의원들에 대한 정치공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김기협: 장택상에게 “피의자” 소리 듣는 거야 도척이네 개가 짖는 정도로 생각할 수 있는 일인데, 잘못하다가 물려죽는 수도 있지 않나 걱정되는 일이 있어요. 엊그제 열린 장덕수 살해사건 제1회 공판에서 선생님 이름이 여러 차례 나온 것은 뜻밖의 일이었습니다. 어제 <경향신문> “고 장 씨 살해사건 작 2일 군사재판 개정” 기사 중 이런 내용이 있군요.

 

1947년 8월 중순경 경원호텔 15호실에서 김석황, 조상항, 신일준, 손정수 등 4명은 독립운동의 반역자를 암살할 것을 밀회한 후 장덕수 안재홍 배은희 등 3씨를 살해 지목자로 결정하였는데 그 이유로는 당시 개회 중에 있던 미소공위에 참가 협력할 것과 국의와 민대의 합동을 전기 3씨는 민대의 간부로 적극 반대하였기 때문이었다.

 

9월 초순경에는 장덕수 살해의 하수자 박광옥과 배희범을 선생님 담당으로 정했다가 10월 하순에 담당이 바뀌었다는 얘기도 나옵니다. 그 친구들 실행능력으로 봐서, 담당이 바뀌지 않았더라면 장덕수보다 선생님이 먼저 당할 수도 있는 일 아니었나요?

 

지목된 암살 대상 세 사람 중 두 사람은 분단건국 추진세력의 핵심인물인데 그 사이에 선생님이 끼어 있는 것도 이색지네요. 김구 선생 추종자들에게 선생님이 그 정도까지 ‘찍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선생님은 목숨의 위협을 느끼지 않았습니까?

 

안재홍: 몇 주일 전 그 얘기를 처음 듣고 좀 섬뜩하기는 했지만, 그 후 곰곰이 생각하니 위협을 느낄 만큼 현실적인 계획은 아니었다고 생각됩니다. 한독당을 같이 할 때 그들에게 미움을 많이 받기는 했죠. 그리고 현직 민정장관이라는 신분 때문에 표적으로 삼을 생각이 더러 들 수는 있겠죠. 하지만 그쪽 사람들도 막상 실행하려면 나 같은 사람 손을 대서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한독당 쪽 사람들 소행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 같은데, 김구 선생의 연루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입니다. 나는 애초에 그분의 연루 가능성을 믿지도 않거니와, 내가 표적으로 거론되었다는 얘기를 들으며 더욱 확신이 갑니다.

 

그분이 아시는 일이었다면 잠정적인 계획에서라도 내가 거론될 수가 없어요. 장덕수, 배은희 두 사람에 대해 그분이 나쁜 생각을 하셨다면 그것은 민족을 등지는 자들이라고 생각해서이지, 그분 자신의 득실에 따른 것일 수 없습니다. 내게 대해서는 아무리 못마땅하게 여기시더라도, 내가 얼마나 알량한 민족주의자인지는 그분이 누구보다 잘 아십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