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10월 16일 각 정당 시국대책간담회가 결성된 일이 있었다. 당시의 주요 정당 중 남로당(준비위)과 한민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이 여기 참여했다. 대구에서 시작된 전국적 소요사태에 대한 정치계의 대응을 위한 집결이었다.

 

1년이 지나 또 하나의 위기 앞에 이남의 여러 정당이 모여 정당협의회(정협)를 구성했다. 이번 위기는 조선 문제의 유엔 이관에 따른 분단건국의 위협이었다. 정협은 1947년 11월 5일부터 17일까지 여섯 차례 회의를 열고 ‘12정당 공동담화’를 내놓았다. (1947년 11월 19일 일기) 11월 14일 유엔총회 결의에 대한 입장을 밝힌 것이었다.

 

이 담화문에서 정협은 유엔총회 결의에 대해 다음 몇 가지 문제를 지적했다.

 

(1) 총선거의 시행 주체가 조선민족이라는 명백한 표시가 없는 것.

(2) 인도 대표의 남북통일 선거안이 채택되었다 함에 불구하고 의연 지대별 선거방법을 취한 것.

(3) 선거에 있어 조선의 민주화를 위한 정치적 자유의 보장이 없는 것.

(4) 일제잔재 숙청규정이 없는 것.

(5) 결의문 제3항에 총선거에 의한 국민의회가 민족자결적으로 자신의 정부를 조직하지 못하고 국련위원회의 협의에 의한다는 것은 민족총선거로 발현하는 자주자결의 민주주의가 무시되는 것.(본문 제2절 참조)

(6) 결의문 제4항에 철병문제에 관하여 정부수립 후에 ‘실행 가능한 한도로 운운’한 것은 철병을 지연시킬 우려가 있는 것.

(7) 결의문 제5항에 국련위원회의 존속기한을 규정치 아니하고 사태발전에 비추어 운운한 것은 국련위원회가 우리 주권행사의 협의기구로 장기 존속할 우려가 있는 것.

 

담화문의 결론은 “남북통일이 없이는 자주통일정부수립과 도탄에 빠진 민생구제를 실현할 수 없으며 외병의 점령 하에서는 주권을 확립할 수 없으므로” “민족자주적 입장에서 미소양군의 조속철퇴를 요구하며 그의 대책으로 남북정당대표회의를 구성”함으로써 “남북분열을 초래할 우려”를 불식하자는 것이었다. 겉으로는 ‘남북총선거’를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점령지역의 단독선거를 추진하던 미국 정책에 대한 남조선 정계의 첫 조직적 저항이었다.

 

정협의 지적과 주장에는 타당한 점이 많다. 그런데 “미소양군의 조속철퇴”란 소련 주장에 너무 기울어졌다는 문제가 있었다. 미국 주장에 정면으로 맞선 것이 소련이었으니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지만, 남북정당대표회의 같은 더 중요한 과제보다 앞세운 것은 지나친 감이 있다. 정협 참가 세력은 중간파에서 좌익에 걸쳐 있었다. 중간파는 남북회담에 치중하고 좌익은 조기 철병에 중점을 뒀을 것 같다.

 

극우파와 미국 측이 조기 철병을 반대하는 이유로 이북에 대규모 군대가 조직되어 있다고 주장한 것은 거짓 핑계였지만, 군대의 존재가 아니더라도 미소 양군이 물러나면 이북 쪽이 유리하게 되어 있었다. 이북의 인민위원회 체제가 상당히 안정되어 있었던 반면 이남은 점령군의 무력으로 버티는 억압체제였기 때문이다. 양군이 철수할 경우 이북이 무력 아닌 정치력으로 이남을 압도할 것이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정협에서는 좌익이 상당한 주도권을 쥐고 있었고, 이것을 ‘5당 캄파’라 불렀다. 5당이란 신진당, 근민당, 사민당, 민주한독당과 민중동맹을 가리킨 것인데, 이 정당들이 전적으로 소련 주장을 지지한 것도 아니다. 좌익을 비교적 많이 포옹한 정당들이어서 남로당에 동조하는 당원들이 있었고, 미국이 주도한 유엔결의안에 반대하는 상황에서 그들의 목소리가 크게 나타난 정도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아무튼 정협이 5당 캄파에 휘둘린다는 이야기가 많이 떠돌았고, 한독당이 정협을 외면하는 데도 이 문제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김규식은 정협 불참여를 공개적으로 표명하고(<경향신문> 1947년 11월 22일) 좌우합작위를 발판으로 민족자주연맹(민련)을 구성했다. 좌익 책동으로 혼선을 일으킬 수 있는 정협을 피해 중간파가 확고한 주도권을 가진 활동기구를 만든 것이다. 유엔위원단과의 협의과정에서 김구가 남북협상론에 가담하면서 민련이 단독선거 반대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정협에 참여했던 중간파도 민련 쪽으로 돌아서면서 정협의 좌익 책동이 더 두드러지게 되었다. 5당 캄파의 일원으로 지목되던 신진당조차 정협 명의로 유엔위원단에 제출된 의견서가 지나친 “친소편좌(親蘇偏左) 척미배우(斥美排右)”라 비난하며 신진당이 그 작성에 참여하지 않았음을 밝혔다. (<동아일보> 1948년 2월 3일)

 

중간파가 정협을 떠나자 정협에는 책동분자들만 남게 되었다. 2월 들어 정협 이름으로 김구-김규식의 의견서에 대한 비판 성명이 나온 것, 양군철퇴자주독립협의회를 연 것 등은 모두 이 책동분자의 소행으로 보인다. 밖에서 보기에는 민련과 정협이 단독선거 반대라는 같은 취지 운동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하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이었다. 이 문제를 <경향신문>은 2월 24일자 1면 톱기사로 크게 다뤘다.

 

“정협, 각당에 침투 - 도처 파란을 야기 - 미로(迷路)에서 우왕좌왕 - 정국은 어디로”

 

22일 오후 1시부터 시천교강당에서 소위 양군철퇴 민주통일자주독립정부수립 촉진협의회를 개최하였다. 그런데 일반에서는 동 협의회가 민련에서 주동이 된 것 같은 감을 줄 뿐만 아니라 2월 11일 민련상위에서 언급되었던 남북통일촉진국민대회와 혼동되어 있기 쉽기 때문에 동 협의회의 정체를 밝힐 필요가 적지 않다. 구랍 12월 초에 대두되었던 각 정당협의회는 일반이 주지하는 바와 같이 결국은 근민 민주한독 사민 신진 민중동맹 등 5당 캄파의 원형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 5당이 정협이란 명칭 하에 수차에 긍하여 극좌를 대변하는 듯한 성명과 UN위원단에 건의서를 제출하는 등의 태도를 표명함에 따라 소위 정협을 구성하고 있는 각 정당이 참가하고 있는 민족자주연맹과의 관계가 노선 상으로 중대한 상극이 연출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지난 2월 17일 소위 정협 성명에 있어서 양 김씨 노선과 정협 노선 간에 근본적인 차위점을 발표하자 사민당에서는 이것이 2·3인의 독단적 모략적인 성명에 불과하며 민련 노선 및 양 김씨 노선과 배치된다고 하여 18일 탈퇴성명을 발표하였다. 신진당에서도 금명간에 이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리라 하며 민련상위에서도 유명무실한 정협 명칭 하에 현재 중·좌·우단체 통일기운이 결실되어 가는 정계를 교란 분열한다 하여 과거의 무시무관(無視無觀)한 태도를 일변 순수한 중간좌우를 포섭하고 좌우의 침투를 방지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 한다.

 

특히 4일부터 열린 민련상위서 연일 토의하여 남북통일촉진 국민대회를 개최할 것을 언급하여 15일부터 수3차에 긍한 9개 정당 회합(사실상으로 회합한 정당은 4·5당에 불과)을 열었으나 소위 정협 노선을 주장하는 수개인의 주장으로 인하여 드디어 또 좌절되고 말았다고 한다. 즉 동 회합에 참가하기로 되었던 한독당은 초회합부터 불참 방관적 태도를 취하고 있으며 민독당도 양 김씨 노선을 추진 고집하고 노력하여 정협이 표면으로 나오지 않기를 원하였으며 이 운동이 몇몇 정당의 중심으로 계획 추진된다면 결국은 과거의 정협의 재판이 될 우려가 있다 하여 어느 당파에든지 기울어지지 않는 통일운동이 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한다.

 

사민당 민주한독당 신진당에서도 내부에 의견 차이는 있으나 대체로 민독당과 동일한 의견을 주장하는 형세이다. 그리고 정협은 동당에 내분과 분열을 초래시키는 것이라 하여 비난이 자자하며 차후 회합에 있어서도 정협과는 행동을 같이 할 수 없다고 동당 간부 모씨는 말하고 있다. 한편 근민당에서도 내부적으로 정협 및 국민대회 개최에 관하여 복잡 미묘한 공기를 자아내고 있으며 과거에 정협에 대한 동당 대표인 손두환·김성숙 양씨는 전연 정협 및 국민대회에 관하여 표면적으로는 무관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

 

9정당 회합에는 개인자격인 정백 씨가 활약하고 있는 데 대하여 동당 일부 간부 측에서는 정백은 동당 대표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정협은 기회만 있으면 각 정당 단체에 침투하여 분규를 야기시켜 혼란을 일으키고 있으므로 민련 및 중간 좌우 정당에서는 소위 정협 침투에 위협을 느끼고 방지에 부심하고 있으며 금반 국민대회 준비 각 정당 회합에서도 정협과의 대립이 첨예화하여 민독 사민 대표는 근민의 정백 씨와 격론 끝에 퇴장하게 되었으므로 결국 근민의 정백 신진의 김충규 민동(民同)의 정승규 등 3씨가 주동이 되어 양군철퇴자주독립협의회를 개최하게 된 것이라 한다.

 

긴 기사를 옮겨놓은 것은 중간파 노선의 어려움을 잘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간파에 대해 극우파의 공격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었다. 반면 극좌파는 침투를 통해 교묘한 책동을 벌이는 것이었다. 1947년 11월부터 ‘5당 캄파’란 말이 극우파의 정협 비판에 널리 쓰였는데, 이 기사를 보면 5당 모두 주류는 지나친 친소 노선을 삼가고 있었다. 친소 노선은 5당 내 일부 인사들이 제창한 것일 뿐이었다.

 

정협이 단독선거 반대에 앞장서고 있는데도 김규식이 따로 민련을 추진한 것은 극좌파의 프락치작전을 피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민련이 김구-김규식 노선을 확립하자 정협을 친소 노선으로 몰고 가던 소수 좌익 인사들의 정체가 드러나 버렸다. 중간파에게는 양쪽에 적이 있다. 오른쪽 적은 드러난 방식으로 공격해 오지만 왼쪽 적은 오른쪽 적과의 공동투쟁을 빙자해 내부에 침투해서 자기네 노선으로 몰고 가려 한다.

 

위 기사 중 2월 11일 민련 상임위에서 ‘남북통일촉진국민대회’ 논의가 있었다고 했다. 김구와 김규식을 중심으로 진용을 정비하면서 세력의 과시와 확장을 위해 대중 집회 논의가 나온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이 대회는 추진되지 않았다. 그 이유로 “우익이 이미 총선거국민대회를 한 이상 지금 다시 남북통일총선거국민대회를 한다면 중간정당이 공산당의 앞잡이라고 지목을 받고 있는 때인 만큼” 그 대회 때문에 공산파로 지목당할 우려가 있다는 일부의 반대가 있었다고 2월 17일자 <동아일보>는 보도했다. 중간파가 좌익으로 몰리지 않으려고 몹시 조심했다는 것이다.

 

2월 말까지 정협 문제는 정리가 되었다. 그러나 민련 같은 연합조직에서 내부 갈등을 아주 없앨 수는 없는 것이다.

 

“선거 참가 문제로 민련 내 대립”

 

민련에 가입한 정당 사회단체 중 수개 정당에서는 지난 27일의 UN총회 결의안을 지지하여 앞으로 실시될 총선거에 참가하자는 파와 반대하는 파가 있어 일반의 이목을 끌고 있는데 이미 수개 정당단체에서는 참가하기로 결정하였다 한다. 이와 동시에 역시 이상과 같은 양론으로 분파(分派)되어 수일 내 긴급 상임위원회를 개최하고 참가여부를 결정하리라 하는데 그 결과가 매우 주목된다. (<동아일보> 1948년 3월 3일)

 

유엔소총회에서 실질적인 이남 단독선거를 결정해 놓은 이제 그 선거의 보이콧 여부가 문제로 떠올랐다. 잘못된 결정에 의한 잘못된 선거이니 참가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고, 잘못된 선거라도 참가함으로써 더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한독당은 당 차원에서 참가하지 않지만 개인의 참가는 막지 않는다는 절충적 결정을 내렸고, 민독당 대표 홍명희는 전면적 거부를 주장했다.

 

“한독당 계열 선거에 개인적 참가”

 

한독당에서는 지난 1일, 국민의회에서는 지난 29일 각각 상무위원회를 개최하고 총선거 여부에 관하여 결의하였다 하는데 김구 씨가 총선거 참가를 거부하고 있는 만큼 정식으로 당으로나 국의 측으로는 참가하지 않을지라도 개인 자격으로 참가하는 데 대하여서는 묵인하게 되었다 한다. 그리고 한독당서울시당부에서는 벌써 선거운동을 추진시키고 있다 한다. (<동아일보> 1948년 3월 3일)

 

“총선거에 불참, 민독당 홍명희 담”

 

민독당수 홍명희는 지난 29일 하오 2시 시천교회당에서 거행된 동당 종로지부 결성식에서 요지 다음과 같은 견해를 피력하였다.

“민독당이 당리(黨利)로 본다면 남조선총선거에 참가할 것이나 국토와 민족의 분렬을 방지하고 조국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전취하는 남북통일을 원함으로 불참한다. 민독당 일부 당원은 단선에 참가하여 그 안에서 투쟁 운운하나 이것은 굴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경향신문> 1948년 3월 3일)

 

1948년 2월 26일 유엔소총회 결정의 문제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가? 명목상으로 전 조선 총선거를 규정한 점은 1947년 11월 14일의 총회 결정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런데 “가능 지역 시행”이라는 단서를 통해 실질적으로 분단선거의 길을 열어준 것이다. 그리고 조선위원단에서는 가능 지역의 선거가 최종적 건국을 위한 것이 되지 않고 남조선 주민만을 대표하는 임시정부가 되게 하는 제2안과 조선인의 남북협상을 허용하는 제3안을 함께 내놓았는데 이를 묵살하고 최종적 건국을 위한 선거로 결정한 것이다.

 

이 소총회 결정에 반대하는 조선인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었는가? 한편으로는 남북협상을 서둘러 대다수 조선인의 주체적 합의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 있었고, 또 한편으로는 그 결정이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일이 있었다.

 

단독선거가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없다는 주장을 위해서는 참가를 거부하는 것이 효과적인 표현방법임에 틀림없었다. 후세 사람들은 남북협상을 제창한 민족주의자들이 명분에만 매이지 않고 선거에 참여했다면 친일파 집단을 토대로 한 이승만 독재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한다. 당시의 남북협상파도 그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원칙적 문제에 대한 태도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보이콧이 불가피했다.

 

5월 10일 선거 시행까지 남북협상파는 원칙론과 현실론 사이에서 시달릴 수밖에 없다. 그 모습을 이제부터 보게 될 것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