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천만 겨레여 기억하라 단기4252년 기미 3월1일 이날은 배달민족의 대대손손이 영원토록 잊지 못할 기념의 날이다. 5천년 역사에 최대의 굴욕인 소위 한일병합의 오점을 우리의 피로써 씻기 시작한 날이요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세계만방에 선언한 날이다.

 

30년 전 이날 참담하던 제1차대전은 이미 끝나고 신세계 건설의 기본조건으로 성명한 미국대통령 윌슨 씨의 민족자결주의는 전 세계 피압박민족에게 전한 폭탄적 희보이었다. 우리의 생존권을 빼앗고 인권을 억압한 적의 밑에서 10년간을 와신상담한 우리의 민족적 의분은 드디어 폭발되어 용감하게도 비무장항쟁이 발작됨에 따라서 3천리 방방곡곡에 태극깃발을 휘날리며 3천만의 이구동성으로 울려나오는 고함소리는 태산을 움직일 듯 밀리는 조수같이 터지는 폭음같이 곳곳마다 수천수만 대중의 조국애의 불타는 시위의 행진의 행사는 전개되었다. 포악무도한 총칼에 맞아 기10만의 형제자매는 희생되었다. 우리 가슴 속에 서리어 있는 나라 망한 자의 슬픔은 3천리 산하에 넘쳤었다. 그리하여 내로는 전 민족독립 의식을 강하게 하고 외로는 만천하의 동정을 환기하였다.

 

민족해방의 동기는 기미 3월1일에 싹트고 잎 되기 시작하여 을유 8월15일에 그 열매를 맺게 되었으매 기미운동을 수인사(修人事)라 하면 을유해방은 대천명(待天命)의 격이었나니 전자는 인(因)이며 후자는 과(果)이었다. 만일 우리 민족으로서 이 운동이 없었다면 금일의 해방은 무의식적 의타적이라는 기록을 역사에 남기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제1차 대전의 독립선언과 제2차 대전의 독립획득은 오로지 민족혼의 지속적 활동을 표시한 것으로서 민족총의를 계속한 혁명선배들의 해외해내에서 악전고투한 결정이니 우리는 선열각위께 못내 사의를 표하는 바이다. 기미년 오늘의 의거는 우리 민족의 혈관 속에 언제나 약동하고 있는 민족적 성격이 한번 발현된 것이었나니 우리 민족의 의혈로써 이로 일 제단을 꾸미었던 것이며 민족자주의 정신은 이로써 더욱 진전되어 감을 영원히 기념하여야 할 것이다.

 

이에 우리는 모름지기 이 신성한 민족적 자립의 호국정신을 배양하여 실력으로써 국위를 세계에 선포하자. 그리고 항시 천은을 감사하며 일층 더욱 깊이 보우하심을 성심으로 기원할진저. (<조선일보> 1948년 3월 2일)

 

1948년 3월 1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기미독립선언 기념대회에서 발표된 “기미독립선언 기념문”이다. ‘독립선언’과 ‘독립획득’ 사이의 인과관계를 강조한 점이 눈에 띈다. 엄밀히 말하자면 1945년 8월 ‘해방’ 이후 31개월째 ‘독립’은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독립의 자격을 확인할 필요를 이 기념문 기초자는 의식했던 것 같다.

 

이 기념대회는 서울시 주최였고, 남조선과도정부 행정명령 제13호(1948년 2월 20일)에 의해 유일한 3-1절 기념대회로 규정된 행사였다. 해방 후 두 차례 3-1절 기념대회는 좌익과 우익 행사가 따로 열렸고, 그에 따른 시위대의 충돌이 있었다. 이번에는 그런 충돌을 없애기 위해 행정명령을 발포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이번 행사 역시 통합된 것이 못 되었다. 좌익이 외면한 것은 물론이고, 이승만과 함께 기념사를 맡을 예정이던 김구가 이 대회를 보이콧한 것이다. 한독당은 2월 25일 상무위원회에서 시 주최 기념대회에 불참하고 독자적으로 기념식을 갖기로 했다. (<동아일보> 1948년 2월 27일) 기념대회에 이어 ‘중앙정부 수립 결정안 축하대회’를 열기로 한 것이 걸림돌이 되었을 것이다.

 

한독당의 기념식은 조촐하게나마 경교장에서 열렸다. 그만해도 대접을 받은 셈이다. 근민당도 당사 안에서 기념식을 열려고 했는데 경찰에게 해산당했다.

 

“3-1절 행사 금지로 근민당서 담화 발표”

 

근민당 대변인은 2일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3·1절 기념행사에 대하여 옥외 집회는 관제로써 독점하고 실내는 자유라는 행정명령에 의하여 본당에서는 당본부 회의실에서 당원만으로 기념행사를 하려고 관계 당국에 전일 통지하였는데 기념당일 정오 식을 거행하려할 때 돌연 해산을 요구하며 때마침 고 여 당수 추모주회까지도 불허하게 되었으니 이날의 혁명적 의의로 보아 중대한 모독이다.” (<경향신문> 1948년 3월 3일)

 

행사와 관계없이, ‘3영수’의 기념사는 2월 29일자 도하 각 신문에 실렸다.

 

“3-1절 맞아 3거두 기념사”

 

3-1절을 당하여 이승만 박사 김구 씨 김규식 박사는 29년 전 조선 자주독립을 절규하며 악독한 왜적과 피투성이의 투쟁을 한 열렬한 애국정신을 회고하며 UN소총회에서 가능한 지역의 선거를 결의한 이때 조국광복의 열의에 넘친 다음과 같은 기념사를 각각 발표하였다.

 

“통일국권 회복” 이 박사: “오늘은 29년 만에 처음으로 특색을 가진 기미운동의 경축일이다. 세계 우방의 협조로 총선거를 진행하여 정권 수립을 결정할 것이다. 기미년에 시작한 대업이 오늘 성공되는 것이다. 지금은 세계대세가 일변하여 강권주의를 제지하고 공의로써 세계평화를 유지하자는 정신이 표명되는 시기이므로 이 대운(大運)에 순응하여 애국남녀가 3·1정신을 다시 발휘하여 우리 4천년 영광스러운 역사를 다시 전개하여 기미년 목적을 완성하리니 이번 총선거로 세우는 정부는 기미년 한성에서 세운 임시정부의 계통으로 통일국권을 회복하는 것이다.”

 

“자주독립 결심” 김구: “우리는 해방이 되었다는 조국의 통일과 독립을 보지 못한 채 또 3-1절을 맞게 되었다. 동맹군은 우리 국토를 무기한으로 점령하고 말았다. 소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나 남에서 떠드는 중앙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은 모두가 우리의 조국을 영원히 양분시키며 도탄에 빠진 동포를 아주 사지에 넣는 것밖에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우리의 살 길은 자주독립의 한 길뿐이다. 주저 말고 유혹되지도 말고 앞만 향하여 매진하자. 내가 비록 불초할지라도 이 길을 개척하고 나가는 데는 앞에 서서 나갈 각오와 용기를 가지고 있다. 3-1절을 지킬 때에 3-1절의 역사와 또 거기서 얻은 교훈을 다시 한 번 새롭게 인식하고 일심일덕(一心一德)으로써 자주독립의 길만 향하여 나가기를 다시 결심하자.”

 

“목적달성 맹서” 김 박사: “오늘 이 기념에 있어서 오직 한 가지 바라는 것은 1919년 3·1운동을 개시할 때와 같이 계급이나 지방이나 종교나 사상이나 이념의 분별없이 동심협력하여 세계의 여하한 변동의 유무를 불구하고 우리 3천만은 완전한 자유와 독립을 얻고 한 나라의 한 민족이 되어 우리의 목적하고 바라던 바를 완전히 달성한 쾌락의 기념으로 이 다음 기념을 맞이하게 되기를 맹서하여 바라마지 않는다.” (<경향신문> 1948년 2월 29일)

 

이승만과 김구는 제대로 붙었다. 그에 비해 김규식은 지금의 기념이 “쾌락의 기념”이 못 된다는 표현을 통해 유엔소총회 결정에 대한 불만의 뜻을 우회적으로 밝혔다. (김규식이 말한 “쾌락”은 중국어 ‘快樂’의 ‘즐거움’, ‘흥겨움’의 뜻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이승만의 “기미년 한성에서 세운 임시정부의 계통”이란 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한성임시정부’는 1919년 만세운동의 여파 속에 일어난 몇 갈래 임시정부 수립 운동의 하나였다. ‘운동’이란 말을 쓰는 것은 임시정부로서 실체를 갖추는 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 뚜렷한 실체를 갖췄던 상해임시정부로 통합된 것은 그 해 가을의 일이었다.

 

한성임시정부는 4월 하순에 수립을 선포했는데, 종이 위에 세워진 정부일 뿐이었다. 그런데 한성임시정부에서 이승만을 ‘집정관총재’로 추대했고, 이승만은 그로부터 ‘대통령’을 자칭하기 시작했다. 상해임정에서 그를 국무총리로 임명했는데, 그가 대통령직을 고집한 것은 한성임시정부에 기대어 대통령 자칭한 것을 발판으로 한 것이었다.

 

한성임시정부 관련 문건은 전해지는 것이 거의 없다. 이승만이 남긴 서류 중에서 발견된 것 하나가 주목을 받아 왔는데, 정병준은 <우남 이승만 연구>(역사비평사 펴냄) 193-195쪽에서 그 내용을 이승만이 바꿔서 선전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미주에 널리 알려진 한성정부 문건은 국내에서 제작된 목판 인쇄본의 내용이 아니라 1919년 7월 4일 이승만이 발표한 내용을 담은 “대한민쥬국대통령의 선언셔”였다. 최근 <우남이승만문서> 동문편(東文篇)에 원본이 공개되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한성정부 문건의 원문을 보지 못했다. 알려진 것은 이승만이 발표한 신문 보도뿐이었고, 이는 상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승만이 발표한 내용을 원래의 한성정부 포고문과 비교해보면 가장 결정적인 두 사람의 직책이 변경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국무총리총재인 이동휘가 국무총리총장으로 격하된 반면, 노동국총판이었던 안창호는 노동부총장으로 한 단계 격상된 것이다.

 

이런 변경이 이루어질 수 있는 첫 번째 가능성은 전사과정에서의 오류가 발생했을 경우이고, 두 번째 가능성은 이승만이 의도적으로 변경한 경우이다. 논리적으로 볼 때 이동휘가 국무총리총재로 알려질 경우, 이는 이승만의 ‘대통령’ 자임에 결정적인 장애가 될 것이 분명했다. 왜냐하면 이승만은 “당초에 한성에서 국한문으로 집정관총재라 하고 영문은 프레지던트”로 했으며, “內地에서 總裁라 거시 즉 統領이라 이 英文으로 President”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논리적으로 한성정부가 단일한 대통령-국무총리 제도라는 뜻이었다. 즉 이승만은 한성정부에서 집정관총재라고 발표했고, 이것이 AP-뉴욕타임즈 등을 통해 미국에 ‘president’로 알려졌으며 자신은 ‘president’라는 영문 단어를 사람들이 이해하기 쉬운 대통령으로 명명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승만은 ‘집정관총재=president=대통령’이며, 세 가지 명칭이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한성정부는 ‘총재=통령=president’의 체제가 아니었다. 총재는 이승만 한 명만이 아니라 이동휘까지 2명이었고, 한성정부는 2총재-8총장의 집단 지도 체제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 이승만은 자신의 최고 지도자로서의 권위를 위협할 수 있는 이동휘의 국무총리총재 직명을 격하시킴으로써 1집정관총재-9총장 체제, 혹은 대통령-국무총리-장관의 수직적인 권력 체제를 강조하려 했던 것이다.

 

한성임시정부는 실체가 없는 기구였기 때문에 이승만이 자기 직책을 뭐라고 내놓든 지적할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 직함을 만드는 데 거침없이 이용되었던 것이다. 이제 그 한성임시정부를 이승만이 들고 나오는 것이 무엇 때문일까? 그는 귀국 후 상해임정의 대통령 경력을 발판으로 지도자 행세를 해왔다. 임정 주석 김구가 그를 인정해줬기 때문에 탄핵으로 물러난 문제도 덮어질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김구와 맞서게 된 마당에, 그는 상해(-중경)임정 아닌 한성임시정부에서 자기 권위의 근거를 내세우기로 한 것이다.

 

경교장의 한독당 기념식에서 김구는 이런 말을 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귀국 이래 이승만을 자신보다 앞세워 온 자세를 이제 거두겠다는 것이다.

 

“나는 귀국 후 지방을 시찰할 때 지방 민중에게 말하기를 자기는 아무 정권이나 지위에 대한 욕망을 가지지 않았으며 만약 조선이 독립된다면 자기는 농촌에 들어가 농군이 되기를 원하며 초대 대통령은 나의 숭배하는 선배인 이승만 박사를 추대할 것을 늘 주장하여 왔으며 민족통일노선으로 일로매진하여 온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조선문제가 급전환된 이때 모모 인사들이 나한테 이 박사와 제휴하고 나가는 것이 옳지 않은가 하고 권고하는 사람도 있으나 나의 생각으로는 38선을 그대로 두고는 우리 민족과 국토를 통일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민생문제를 도저히 해결할 수 없으므로 행동을 같이 할 수 없으며 남조선선거에 응할 수 없는 것이다.” (<조선일보> 1948년 3월 2일, <서울신문> 1948년 3월 3일)

 

한편 김구와 김규식이 불참한 서울운동장 기념대회에서 이승만은 연설 중 총선거 시행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그중 이런 이야기도 있었다.

 

“근자 풍설에 총선거는 도별로 순차 이동실시 하련다는 언론이 있었으나 이런 말은 UN결의안에도 없었던 것이요 따라서 탐지한 결과 다 허언으로 돌아가고 말았으니 조금도 염려할 게 없는 것이다.” (<동아일보> 1948년 3월 2일)

 

총선거의 도별 순차 실시는 유엔소총회에서 제섭 미국대표가 “가능지역 총선거” 제안의 설명 중 했던 이야기다. (제섭 연설의 요지를 군정청 공보과에서 성명서로 발표했고, 해당 내용을 2월 25일자 일기에 소개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소총회 결의안 주문에서 빠졌다. 이승만은 이를 빌미로 총선거 순차 실시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나선 것이다.

 

하지 사령부는 5월 9일 총선거 실시를 알리는 “조선인민대표의 선거에 관한 포고”를 3월 1일 발포했다. 이런 내용이었다.

 

조선인민에게 고함.

 

연합국총회는 연합국임시조선위원단을 설치하였으며 조선인민의 자유와 독립의 즉시 달성에 관하여 동 위원단이 협의할 대표 즉 국회를 구성하여 조선국가정부를 수립할 대표를 택하는 선거의 실시를 건의하였으므로 또 연합국 임시조선위원단은 연합국 소총회와 상의하였으므로 동 소총회는 총회의 결의에 규정한 프로그램을 동 위원단에게 가능한 부분의 조선에서 수행함이 연합국임시조선위원단의 의무라는 견해를 표명하였으므로 또 연합국임시조선위원단은 동 위원단에게 가능한 부분의 조선에서 여사한 선거를 감시하기로 결정하였으며 미국육군이 점령한 지역은 동 위원단에게 가능한 지역이므로 이제 본관은 재조선미국육군사령관으로서 부여된 권한에 의하여 자에 좌와 여히 포고함.

 

1. 조선인민대표의 선거는 연합국임시조선위원단의 감시 하에 본 사령부 관내지역에서 1948년 5월9일 차를 거행함.

 

2. 여사한 선거는 연합국임시조선위원단과 상의 후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개정을 가할 입법의원선거법(1947년 9월3일부 법률 제5호)의 조건과 규정에 의하여 차를 행함.

 

재조선미국육군사령관 미국육군중장 존 알 하지

 

군정청관보 포고 1948년 3월 1일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