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4. 11. 12:14

보슬비가 이제 걷히고 있다. 비엣남 도착 이래 만난 비가 모두 소나기였는데 오늘아침에는 캄캄한 새벽부터 옷 젖는 줄 모를 만한 보슬비가 내리고 있다. 날씨도 무척 선선하다. 창문을 닫아놓고 자는데도 새벽에 추워서 잠이 깼다.

 

그저께 호치민 떠나던 날 그곳 기온은 38도까지 올라갔다고 하는데 저녁무렵 하노이 도착을 앞두고 기내방송에서 하노이 기온은 24도라고 했다. 두 곳 사이의 기후 차이를 바로 실감할 수 있었다. 북위 21도의 하노이나 11도의 호치민이나 다 같은 아열대기후려니 생각했는데, 하노이는 그래도 온대기후에 가까운 모양이다. 겨울철에는 차이가 더 크다고 한다. 하노이에는 10도 아래쪽의 혹한(!)이 닥칠 때도 있다고 한다.

 

이번 여행은 아무런 예비조사도 없이 무턱대고 와서, 체계적 관찰을 하지 못하고 인상만 받아들이고 있다. 그중 중요한 인상을 받은 것이 하노이와 호치민 사이의 차이다. 호치민이 1975년까지 미국 영향 아래 있었다는 거야 천하가 아는 사실이거니와, 호치민을 비롯한 남부지방(코친차이나)이 근세 들어와서야 비엣남왕국에 편입된 지역이었다는 사실은 나도 근년에야 알았다. 이 역사적 차이가 오늘의 상황에도 여러 모로 비쳐보이는 것 같아 흥미롭다.

 

우선 길거리에서 사람들 생김새를 보더라도 호치민 시민들은 종족 배경이 복잡한 느낌을 준다. 비엣남은 인구의 87%를 점하는 비엣족(낀족) 외에 50여 개 소수민족을 포괄하는 다민족국가라 한다. 대부분 소수민족은 교통이 힘든 산악지대에 거주하고 있어서 일반 지역에서는 보기 힘들다고 한다.

 

그런데 비엣족 안에 편차가 큰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 표준문명을 어느 수준 이상 받아들이면 혈통에 관계없이 한족으로 규정된 것처럼 이곳에서도 주류사회에 편입되기만 하면 역사적 배경을 불문하고 비엣족으로 인정받은 것이 아닌지. 하노이나 호치민이나 인구 대다수가 비엣족이란 사실은 마찬가지인데, 호치민에서는 신체적 특성의 편차가 상당히 큰 것으로 보였다. 18세기까지도 비엣남왕국에게 정복 대상지였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또 하나 차이는 뭐랄까, 마음의 편안함 같은 것이다. 도착하던 날 공항에서 호텔로 가는 택시 안에서부터 우리 일행의 주목을 끈 것이다. 우리 기사도 서두르는 기색이 전혀 없고, 수많은 자동차와 오토바이 중에 남보다 앞서려고 튀는 움직임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호텔에서부터 사람들을 조금씩 마주쳐 볼 때, 뭐든 특별히 잘하려는 태도도 보이지 않고 마음먹고 상대방을 골탕먹이려는 태도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 그 사람의 미소는 좀체 잊어지지 않을 것 같다. 도착한 날 저녁에 맥주 한 잔 걸치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길을 건너다가 자전거와 부딪칠 뻔했다. 길마다 자전거와 오토바이가 가득하기 때문에 모두 끊임없이 약간의 주의를 기울이며 다녀야 한다. 내가 순간적으로 주의를 게을리했기 때문에 부딪칠 뻔한 것이고, 내가 그 사람 입장이라면 화가 났을 것이다. 그런데 이 중년 사내는 충돌을 겨우 모면한 다음 순간 얼굴을 밝은 웃음으로 채우며 나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내가 외국인인지 뭔지 살필 겨를도 없는 순간이었다. 위험을 피했다는 기쁨이 저절로 얼굴에 나타난 것이었다. 위험을 겪은 데 대한 분노보다 위험을 피한 기쁨을 더 잘 일으키는 마음!

 

호치민 인심도 크게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하노이에서 받은 강렬한 인상에 비하면 현대도시의 분위기가 그대로 드러난다. 우리 일행도 악질 택시기사를 두 차례 만난 일이 있고, 그곳 사람들끼리 어울리는 모습에서도 상당 수준의 긴장감이 느껴진다. 별난 곳은 하노이다. 오늘날 인구 수백만의 대도시에서 사람들이 그렇게 마음놓고 살 수 있다는 것이 어떻게 된 일일까.

 

어제 두 차례 주택가를 산보했다. 중산층과 서민층이 같은 골목 안에 어울려 사는 모습을 보며 50년 전의 서울 풍경이 떠오르기도 했다. 집안이나 집밖이나 나무가 많고, 대부분 집이 거실까지 훤히 들여다보이도록 문을 열어놓고 살고 있다. 신기하고 궁금하다. 지금 세상을 어떻게들 저런 식으로 살 수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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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1992년 1월 22일 뉴욕의 유엔 미국대표부로 북한의 김용순 로동당 국제비서가 찾아가 캔터 국무부 차관을 만난 뉴욕회담은 당시 진행되고 있던 한반도 해빙의 흐름 속에서 이뤄진 일이었다. 그런데 이 회담에서 보인 미국의 경직된 태도가 이후 북핵문제의 난항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서울 불바다” 발언에까지 이르게 될 북핵문제의 난항에 물론 북한의 책임이 크다. 그러나 북한의 책임만은 아니다. 북한의 입장을 어렵게 만든 미국과 남한 정부의 책임을 살펴본 다음 그에 비추어 북한의 책임을 평가하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 지난 회에 이어 미국의 관리, 학자와 언론인의 진술을 통해 미국 입장의 문제점부터 살펴보겠다.

 

뉴욕회담 후 북한은 NPT 규정에 따른 IAEA 사찰을 받아들이는 일련의 조치를 취했다. 가장 중요한 조치가 5월 4일에 최초보고서를 제출한 것이었다. 이 보고서는 규정의 요구보다 훨씬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었고, 특히 90그램의 플루토늄을 추출해 놓았다는 것은 미국 정보기관이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놀라운 사실이었다.

 

북한의 이 적극적인 공개를 학자이자 언론인인 리언 시걸은 ‘보여주고 말하기(show and tell)’ 정책으로 해석한다. 자기네의 협상 의지를 입증할 만큼을 공개하고 나머지 정보는 협상수단으로 쓰기 위해 보류해 둔다는 것이다. (<미국은 협력하려 하지 않았다> 구갑우-김갑식-윤여령 옮김, 사회평론 펴냄> 61쪽) 그런데 대다수 미국 관리들은 북한의 전략을 ‘속이고 후퇴하는’ 것으로 오판했다고 시걸은 비판한다.

 

북한이 최초보고서에서 모든 진실을 말하지는 않았더라도 거짓을 말하지는 않았다고 하는 시걸의 관점이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미국 측은 거짓을 찾아내는 데만 몰두했고 최초보고서를 북핵문제 해결의 출발점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이 시점에서 미국 정부의 분위기를 시걸은 이렇게 설명했다.

 

부시 행정부의 정책은 일종의 ‘당근과 채찍’ 정책으로 표현된다. (...) 그러나 곧 완전한 채찍 정책으로 복귀하였다. 이것은 북한의 경제적 쇠퇴와 심화되는 정치적 고립을 이용하여 굴복을 강요하면서 북한의 핵 프로그램을 중단시키기 위한 사찰을 실시하여 IAEA와 남한 사찰단의 접근을 확보하려는 강압외교였다. 한 관리는 그 당시의 정책을 “계속 미소를 지으면서 북한을 압박하고 북한을 외길로 몰아가는 것”이라고 묘사했다. 캔터 국무차관은 행정부가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해서 북한에 어떠한 구체적인 유인책 또는 동기를 제공하거나 북한 관리와의 정치적 회담을 개최하는 것마저도 거부하는 강경노선”을 채택했다고 후일 밝혔다. (위 책 60쪽. 이 책은 번역과 편집에 아쉬운 점이 많아서 내 판단에 따라 글을 고쳐서 인용하며, 고친 곳을 일일이 표시하지 않는다.)

 

최초보고서 제출 이후 미국 측의 ‘트집 잡기’와 북한 측의 반발이 이어지는 가운데 팀스피릿 재개 문제가 제기된 상황을 시걸은 이렇게 설명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팀스피릿 문제는 한-미 연례안보협의회가 개최되기 바로 전에 주요한 현안으로 제기되었다. 한-미 연례안보협의회는 1992년 10월 8일 워싱턴에서 개최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서울이 회담 후에 발표할 성명의 초안을 제출했을 때 워싱턴은 이것을 놓고 부처 간 논쟁에 휩싸였다. 서울이 제안한 내용은 “(남북 간) 상호사찰체제의 완수를 위한 중대한 진전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팀스피릿을 재개하겠다는 것이다. 북한의 최대 관심사가 팀스피릿의 재개라고 생각하는 국무부 한국담당 부서는 그 결정을 격렬히 반대했다. 그리하여 성명의 문구를 완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또한 IAEA가 북한과 성과를 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준비 작업을 지연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체니 국방장관은 훈련의 재개를 원했다. 국무부 한국전문가는 팀스피릿이 군사적 채널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국방부가 미국 정부 내의 “문제들을 때려 부술 수 있는 쇠망치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은 팀스피릿을 위협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을 선호했고, 우리가 위협수단을 사용함으로써 한국의 요구를 만족시켰을 때 이익 또한 명백했다.” 그와 국무부의 여타 한국전문가들은 “우리는 위협수단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그랬다. 이러한 사실을 명백히 밝힌다면 북한은 반발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비교적 적은 수의 사람들이 이러한 주장을 이해했으나 다른 사람들을 설득할 수 없었다.” 카트만은 “사람들은 해결책이 아니라 위협수단을 찾고 있었다. 이것이 이곳의 사고방식이었다.”고 설명한다. “경고의 목소리는 그보다 낮았다.” 팀스피릿을 반대하는 고위관리인 그레그 주한 미대사는 이러한 결정을 미리 듣지 못했다고 말한다. (시걸 위 책 69-70쪽)

 

팀스피릿 등 한-미 합동군사훈련이 안보에 대한 위협이라고 하는 북한 주장에 대해 남한과 미국은 군대 유지를 위한 훈련일 뿐이라고 아직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글을 보면 미국 관리들이 모두 팀스피릿을 북한에 대한 ‘위협수단’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군사기술에 내가 정통하지 못하지만 ‘세계 최대’라는 규모를 보더라도, 또 ‘월남 패망’ 직후 확대된 상황을 보더라도, 단순한 훈련을 넘어 정치적 의미를 가진 것은 분명한 일이다.

 

팀스피릿 재개 방침이 제기될 무렵 남한 정부의 입장에는 상당한 혼선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한의 외교-군사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냉전기의 대결의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고 전향적 북방정책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가 노태우 정권의 레임덕 현상에 따라 흔들리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1992년 10월의 한-미 연례안보협의회에서는 팀스피릿 재개 가능성이 조건부로 제기되었다. 그 후 두 나라의 대통령선거 기간에는 온건한 방향으로의 조정이 불가능했고, 두 나라에 들어선 새 정권 역시 온건한 정책을 앞세울 형편이 되지 못했다고 시걸은 본다.

 

팀스피릿 중단은 일단 계획이 개시되자, 처음에 그 계획에 반대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웠다. 한 가지 이유는 새로운 대통령들이 국방문제에 대해 온건해 보이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빌 클린턴과 마찬가지로 김영삼은 해외에서 풍파를 일으키기를 원치 않는 국내 개혁주의자였다. 더 중요한 것은 두 사람 모두 군부로부터 의심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김영삼은 군 수뇌부의 숙청에 몰두하고 있었으나 군부와 다른 충돌을 바라지 않았다. (...)

 

클린턴 행정부의 국방부 고위관리들은 팀스피릿이 군사적으로 불가결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북한의 적대적 대응을 우려했으나, 그보다는 중단에 대한 남한의 적대적 대응과 이로 인한 워싱턴에서의 정치적 불화가 중요했다. (시걸 위 책 72쪽)

 

팀스피릿을 재개하면 북한의 적대적 대응을, 재개하지 않으면 남한의 적대적 대응을 미국 정부는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영삼 정부가 ‘통미봉남(通美封南)’이라 하여 북-미 간 직접 대화를 몹시 꺼리던 상황을 생각하면 수긍이 가는 예상이다. 노태우 정권 말기-김영삼 정권 초기의 남한 정부의 입장과 태도는 나중에 살펴보겠다.

 

미국은 대외관계에 있어서 외교적 전통보다 군사적 전통이 강한 나라다. 그리고 국민의식 중에도 ‘미국예외주의’ 경향이 강해서 외부세계에 대한 이해력이 매우 빈약하기 때문에 정치계도 외교력보다 군사력을 앞세우는 경향이 있다. 외교관의 역할을 자임하는 국무부 관리들에게는 이런 경향이 크나큰 질곡으로 느껴질 수 있는 것이었다.

 

북한인들과 다시 한 번 회동을 하자는 방안도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가능성의 타진만 가지고도 워싱턴과 서울의 관료들은 두 파로 나뉘었다. 소위 온건파들은 외교 접촉 그 자체가 당근이나 채찍으로 쓰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오히려 그들은 이런 대화를 정치와 무관한 차원에서 보아야 한다고 믿었다. 즉, 두 정부간에 문제가 있으면 다른 수단을 쓰기 전에 우선 문제를 풀기 위해 서로 대화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게는 이것이 상식인 것 같았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 특히 국방부와 합동참모본부에서는 북한이 외교적 대화에 미국을 끌어들이기 위해 일부러 나쁜 짓을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이 상황을 두고 북한 외교관과 얘기를 하는 것 자체가 서울과 평양 모두에 양보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논리가 지속됐다. (퀴노네스 <한반도 운명> 120쪽)

 

미국 관계와 정치계의 많은 사람들이 북한을 상대할 가치가 없는 존재로 여긴 데는 북한에 대한 증오심과 경멸감이 한 몫 한 것으로 보인다. 1950~53년 전쟁에서 체면 없이 물러난 후 많은 미국인들에게 북한을 거꾸러트려야 할 상대로 보는 시각이 남았다. 1990년을 전후한 공산권 붕괴에 임해 북한도 동유럽 공산국들과 마찬가지로 굴복할 것으로 기대하고, 북한이 굴복하지 않자 자멸할 것으로 보는 관점이 유행했다. 미국 언론계와 학계를 통틀어 최고의 북한 전문가로 명성을 누려온 셀리그 해리슨은 이렇게 말한다.

 

1996년 1월 21일 앤서니 레이크 백악관 안보 보좌관은 백악관 상황실에 나를 포함한 6명의 민간 전문가를 초청했다. 레이크는 남한 출장을 계획하고 있었다. 한반도 관련 업무를 다루는 관리 8명이 그 토론에 참석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북한이 독립된 국가로서 계속 생존해 나갈 것이라고 얘기했다. 레이크를 비롯한 관리들은 모두 나의 의견을 무시했다. 그들 대부분은 북한이 경제적 어려움과 붕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스스로 미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핵동결 합의에 따라 경제 제재를 완화하지 않으면 북한이 핵무기 프로그램을 재개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들은 나의 경고에 냉소를 보냈다.

 

(...) 김일성이 사망하고 기근이 오기 전에도, 소련이나 동구권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진 이래, 미국과 남한, 일본에서는 북한이 붕괴할 것이라는 예견이 한반도에 대한 사고를 지배하고 있었다. 손쉽게 북한을 동독과 비교하는 관행은 북한 역시 남한에 흡수되어 독일 통일 과정을 재현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광범위하게 퍼지게 했다. 그러나 그런 비교는 남북한이 동족상잔의 전쟁을 치렀다는 역사적 현실을 무시한 것이다.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는 ‘동방정책’을 시작할 때 그런 쓰라린 갈등의 역사를 극복하지 않아도 되었다. (<한반도 엔드게임>(이홍동-김태호-류재훈-이재훈 옮김, 삼인 펴냄) 45-46쪽)

 

대외관계에서 외교적 관점보다 군사적 관점을 앞세우는 경향이 북한에 대해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경향이 2000년대 부시(자식) 대통령 집권기에 특히 강하게 나타나는 데 환멸을 느낀 투철한 보수주의자 클라이드 프레스토위츠는 <깡패국가>(김성균 옮김, 한겨레신문사 펴냄)에서 미국이 “변덕스럽고 부주의하고 믿을 수 없고 이기적인 나라”가 된 이유 세 가지를 지적한다.

 

1. 도덕적 우월주의: 미국적 가치에 동조하는 국가는 우방으로, 반대하는 국가로 적으로 규정하는 것.

 

2. 패권적 일방주의: 입으로는 국제법과 규범의 준수를 외치면서도 실제로는 자국의 가치와 국익에 따라 일방적으로 행동하는 것.

 

3. 공세적 현실주의: 국제사회 안정의 기제인 주권 개념을 무시하고 잠재적 위협이 되는 국가들에 대해서는 선제공격을 통해 위협의 근원을 제거해야 한다는 입장. (13-14쪽 문정인의 “추천의 글”에 요약된 내용)

 

북한의 NPT 탈퇴선언이 팀스피릿 재개 방침에 대한 필연적 반응이었다는 점을 오버도퍼는 이렇게 설명했다.

 

놀라운 점은 양국의 국방장관이 연례 회담 자리를 빌어 팀스피리트 훈련을 재개하겠다는 폭발성을 지닌 내용을 발표하면서도 이에 앞서 워싱턴 정부의 부처 간 정책위원회에 통보나 조언을 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워싱턴의 한반도 전문가들이나 도널드 그레그 주한 미국 대사에게 이 예기치 않은 결정은 마른하늘에 날벼락과 같은 것이었다. 그레그 대사는 훗날 이 날의 발표가 자신의 재임 기간 중 저질러진 대한 정책의 “가장 중대한 실수”였다고 평했다.

 

북한 정부의 입장에서 92년의 팀스피리트 훈련 취소는 미국과의 관계 진전을 의미하는 가장 분명한 가시적인 증거였으며 그같은 미국의 양보는 북한 군부에 매우 유리하게 작용했다. 미국 정부는 한-미 양국의 연례 실전훈련을 자국의 안보에 대한 중대한 위협으로 간주하는 북한의 두려움에 냉소를 보냈다. 그러나 대규모 미군의 추가지원 병력의 해상과 공중을 통한 남한 도착, 핵무기 탑재능력을 갖춘 전폭기들의 비무장지대 인근 비행, 중무장한 한-미 지상군의 부대 이동 등은 북한에 강력한 위협을 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약 20년 전 팀스피리트 훈련을 구상한 사람들이 애초에 희망한 것이 바로 이런 효과였다. (...)

 

북한 정부는 한-미 양국의 팀스피리트 훈련 재개는 “북남 관계의 진전에 제동을 걸고 북남 대화를 위기로 몰고 가기 위해 획책된 범죄적 행위”라고 규정했다. 그로부터 몇 주 후 북한은 팀스피리트 훈련 재개를 이유로 들면서 공동핵통제위원회 회담을 제외한 모든 채널의 남북대화를 중단한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핵통제위원회 회담마저 중단했다. 북한은 팀스피리트 훈련 재개 결정이 “미국이 핵공격 위협을 포기하겠다고 한 약속을 저버리는 도발행위”라고 단언하며 IAEA 핵사찰을 거부할 수 있다고 처음으로 경고했다. (<두 개의 한국> 407-408쪽)

 

워싱턴포스트지 최고의 북한 전문가였던 셀리그 해리슨과 돈 오버도퍼, 제1차 북핵위기 당시 뉴욕타임스지 국제담당 논설위원이었던 리언 시걸과 국무부 코리아데스크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케네스 퀴노네스, 그리고 열렬한 공화당 지지자를 자처하는 클라이드 프레스토위츠의 진술을 오늘 인용했다. 결코 ‘종북’ 편향으로 고른 증인들이 아니다. 미국에서도 북한 문제에 진지한 관심을 가진 전문가들의 의견은 1990년대 초 ‘제1차 북핵 위기’에 미국의 책임이 크다는 쪽으로 모인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책이 한반도에 대해서는 물론, 미국 자신에 대해서도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오는 잘못된 방향으로 결정된 까닭이 무엇일까. 전문가들의 냉철한 판단이 정책결정자들에게 외면당한 이유가 무엇일까. 두 층위에서 문제를 찾을 수 있다. 하나는 미국의 군사산업이 정책 결정에 개입하는 메커니즘이고, 또 하나는 미국의 전통적인 ‘애국심(patriotism)’이다. 두 가지 문제는 그 동안에도 계속 작용해 왔고, 앞으로도 작용할 것이 예상되므로 더 치밀한 고찰을 필요로 한다.

 

 

Posted by 문천

 

미-소 냉전 해소로 종래의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국가들 사이에 교차 승인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이 흐름 속에서 남한도 거의 모든 ‘적성국’과 수교하게 되었는데, 그중 중요한 상대가 물론 소련과 중국이었다. 그런데 북한은 이 흐름을 제대로 타지 못했다. 미국 및 일본과 수교에 실패한 것이 결정적 좌절이었다.

 

중국과 소련에게는 남한과의 수교가 새로운 세계정세 앞에서 외면할 수 없는 과제였다. 무엇보다도 남한과의 교역이 두 나라의 경제활동에서 큰 비중을 차지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반면 북한과의 수교는 미국과 일본에게 그만큼 절박한 과제가 아니었다.

 

북한 개방은 경제적으로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더라도 정치적으로는 상당히 큰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고립 상태를 벗어나 국제사회에 들어오게 하는 것이 세계평화를 위해 바람직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북한의 고립 상태 유지는 남한까지 불안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개방의 필요가 큰 나라였다.

 

그럼에도 북한이 고립 상태에 머물러 있게 된 책임이 북한 자신에게 있다는 선전이 우리 사회에서 많이 유행했다. 주체사상이라는 유사종교에 주민을 묶어놓고 변화를 거부하면서 지배집단의 권력 유지에만 집착해 왔다는 선전. 남한, 미국과 일본이 아무리 개방의 기회를 줘도 지배집단의 이해관계에만 매달려 주민을 도탄에 빠트려 왔다는 선전.

 

이런 선전이 몽땅 거짓말이라고 단정하지 않는다. 북한 지도부가 저지른 잘못이(잘못된 믿음에 의해서든, 잘못된 판단에 의해서든) 상당히 크다고 생각한다. 아마 외부의 다른 어느 주체보다도 더 큰 책임이 북한 지도부에 있을 것으로 짐작한다.

 

그러나 모든 책임이 북한 지도부에게 있다는 선전은 분명 과장된 것이다. 그 선전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북한의 연착륙은 불가능한 것이고, 유일한 변화의 길은 붕괴뿐이다. 붕괴와 흡수통일을 바람직한 길로 생각하는 세력이 미국과 남한에서 큰 힘을 갖고 있고, 그 세력이 과장된 선전을 지나치게 열심히 퍼트려 온 것으로 나는 본다. 보다 평화로운 다른 변화의 길을 찾기 위해서는 북한 지도부의 책임이 어떤 한계를 가진 것이고 미국과 남한의 책임은 어떤 것이 있는지 엄밀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몇 해 후에 겪을 ‘고난의 행군’ 상황이 1991년 시점에서도 분명히 내다보이고 있었다. 소련과 중국이 오랫동안 시행해 온 시혜적 교역방법을 경화결제로 바꾸면서 북한 경제는 발전은커녕 유지가 불가능한 상황에 빠져들고 있었다.

 

남북한 유엔가입,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한반도 비핵화 선언 등 1991년 후반에 이뤄진 일련의 성과는 분명히 한반도에서도 북한 개방과 냉전 해소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 방향을 향해 여러 나라의 노력이 합쳐졌고, 그중 북한의 노력도 적지 않았다.

 

1992년 연초의 팀스피릿 훈련 중단 방침 발표는 남한과 미국도 이 방향에 적극 협력하겠다는 신호였다. 그런데 9개월 후 이 신호가 뒤집혔다. 10월 8일 한미연례안보협의회의에서 팀스피릿 재개 방침을 서둘러 발표하자 북한은 즉각 남북대화 중단과 핵사찰 거부 방침을 경고했고, 결국 1993년 3월 12일 NPT 탈퇴선언에 이르게 된다.

 

과연 그 9개월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인가. 일단 미국 쪽 사정을 국무성 관리 케네스 퀴노네스의 회고록 <2평 빵집에서 결정된 한반도 운명>(노순옥 옮김, 중앙 M&B 펴냄, 이하 “<한반도 운명>”)에서 꽤 소상하게 살펴볼 수 있다. 퀴노네스는 1964년 주한미군 근무 이래 한국 관련 연구와 관직에 종사해 왔고 1990년대에 국무부 코리아데스크를 담당하면서 13회에 걸쳐 북한을 방문하는 등 북한문제 전문가로 활동한 인물이다. 비한국계 미국인으로는 한국어에 가장 능통한 사람의 하나이기도 하다.

 

1990년을 전후해 남한과 소련-중국의 관계가 발전하는 동안 미국 정부는 북한에 대한 태도를 별로 바꾸지 않았다. 관리들의 북한인 접촉에도 엄격한 제한이 있었다는 사실을 <한반도 운명> 30-31쪽에서 알아볼 수 있다.

 

‘미소외교’는 정책의 변화라기보다는 전술적인 수정에 불과했다. 1982년 이전만 해도 미국 외교관이나 정부관리가 북한측 인사와 접촉하는 것은 금지돼 있었다. 그러다 1982년에 새로운 규칙이 도입됐다. 이제 미국 외교관은 북한 관리들이 참석할 것으로 예상되는 리셉션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다. 단, 주최측이 제3자인 경우, 즉 북한이나 미국 정부가 아닌 경우에 한해서였다. 기타 사소한 모임, 저녁식사와 같은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서도 국무부의 사전허가가 필요했다.

 

설사 사교모임에 참석해서도 미국 외교관들이 먼저 북한 사람들과 접촉을 시도할 수는 없었다. 북측 인사가 먼저 날씨나 건강 또는 그 비슷한 비정치적인 화제로 정중하게 접근해 오면 답례의 차원에서 응대할 수는 있었다. 다시 말해서 평양에서 온 미스터 김이 “워싱턴의 날씨는 어떻습니까?” 하고 물어 오면 워싱턴의 미스터 스미스는 “좋습니다” 하고 대답하는 식이었다. 그들이 미소를 띠고 물으면 우리도 미소를 지은 채 대답했다. 한국측 동료들이 우리가 미소외교의 한계를 벗어나는지 아닌지 눈을 부릅뜨고 감시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은 1982년에서 1992년까지 10년간 줄곧 똑같았다.

 

“한국 측 동료”란 남한 관리나 외교관을 말하는 것이다. 미국 관리들이 남한 관리들의 눈치를 보았다니, 기분좋아할 일인가? 미국 정부의 대 북한 접촉 제한 방침에 한국 정부의 입장이 전혀 작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겠지만, 결정적 요인일 수는 없다. 북한 따돌림은 미국 정부의 방침이었고, 외교계 기준으로 몰상식하다는 비판을 받을 그 방침을 변명하는 데 한국 입장이 이용된 것으로 보인다. 1982년 이전에는 북한인 앞에서 미소도 짓지 못하게 했다니, 미국 외교관들에게도 고역이었을 것이다.

 

우발적 접촉에 대해서도 이런 제한이 있었으니, 공식 접촉에 대해서는 말할 나위도 없다.

 

한반도 핵위기의 경우, 초기에 명확하게 제시된 유일한 정책이라고는 미국 외교관은 북한인과 얘기를 나누면 안 된다는 것뿐이었다. 북-미 간에는 대화 채널도, 상호 신뢰감도, 공통의 만남의 장도, 아무 것도 없었다. 그들은 우리를 미워했고 우리도 그들을 미워했다. 어쩌다가 우리가 북한인과 얘기라도 하면 미국 정부와 한국 정부는 우리를 마치 우방을 배반하고 적과 손을 잡으려는 수상쩍은 인물로 간주했다. (<한반도 운명> 11쪽)

 

미국 정부의 한반도 통일정책 역시 단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한국의 입장을 지지하고 북한을 외교 통상 면에서 고립시키며 북한과 대화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국무부 내에서는 그 방침에 아무도 반대를 할 수 없었다. 공식 입장에 반대한다는 것은 단순히 기분을 거스르는 차원이 아니라 ‘팀 플레이어’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받게 했으며, 상관의 화를 돋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관료조직에서 ‘팀 플레이어’가 아니라는 것보다 더 큰 죄악은 없다. (같은 책 30쪽)

 

1992년 1월 뉴욕에서 열린 북-미 고위급회담은 위와 같은 미국 정부의 기본 방침을 크게 뛰어넘은 것이었다. 1991년 하반기에 진행된 한반도 해빙 무드에 따라 이 회담이 열리게 되었지만, 후속회담 개최 가능성을 배제하는 등 미국은 결코 전향적인 태도가 아니었다. 당시 워싱턴포스트지 논설위원이었던 돈 오버도퍼는 이렇게 적었다.

 

92년 1월 21일 오전 10시 보좌관을 대동한 김용순 국제부장이 국무부 정무차관 아놀드 캔터가 이끄는 미국 대표단을 만나기 위해 리무진을 타고 주유엔 미국 대표부에 도착했다. 북한 사회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과 핵위협으로 인한 군사적 반감까지 겹친 전례없는 회담 성격으로 인해 미국 관료들은 회담 성사 여부는 물론 캔터 정무차관의 발언 범위를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캔터 차관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워싱턴 각료들이 마침내 합의에 도달한 결론은 ‘일단 회담을 개최한다. 그러나 캔터는 강경한 입장을 고수한다’였다.

 

캔터 ‘발언요지’는 사전에 부서 간 합동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작성됐고 남한과 일본 정부에도 회람 검토케 했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캔터는 미리 준비한 발언요지를 그대로 읽어 내려간 것이다. 그러나 기계적인 내용 전달을 최대한 우호적이고 유화적으로 표현한 것은 전적으로 캔터 자신의 뜻이었다. 준비된 발언요지에는 IAEA 핵사찰 허용과 핵무기 개발 계획 포기를 촉구하는 내용만 있었을 뿐 캔터에게는 이에 대한 대가로 북한이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지 언급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다. 특히 미국과의 관계를 ‘정상화’할 수 있다는 표현은 절대로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는 구체적인 지시까지 받은 터였다. 그는 북한에 대한 유인책으로 앞으로 양국의 대화 가능성에 대해 막연하게 시사했지만 앞서 말했듯 한국과의 사전 약속에 따라 후속회담 개최 가능성을 배제해야 했으므로 금번 회담이 ‘향후 전개될 북-미 협상 과정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짚고 넘어갔다.

 

(...) 장시간에 걸친 비공개 대화 끝에 김용순은 후속회담 재개를 위한 원칙적 합의나 그것이 불가하다면 최소한 회담을 마무리 짓는 공동성명서를 발표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캔터가 이 두 가지 요구를 모두 거절하자 김용순은 실망한 듯한 기색을 보였지만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로부터 1년 후 평양과 워싱턴 간의 긴장이 한층 고조됐을 때 김용순은 베이징의 외교 채널을 통해 캔터에게 문제 해결을 위한 회담을 가지자는 개인서한을 보냈지만 미 행정부는 이 것 역시 거절했다. (<두 개의 한국> 397-398쪽)

 

끝 문단에서 북한 대표가 “화를 내지는 않았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당연히 화를 낼 만한 일이었다는 말이다. 회담을 한다고 만나서 문제 해결을 못한 것은 물론, 해결을 위해 더 만나자는 것도 거절하고, 그렇다면 오늘 만나 어떤 얘기를 나눴다는 사실이라도 함께 발표하자는 요청까지 거절했다. “어쩌다 당신을 만나주고 있지만, 당신은 내 대화 상대가 못돼. 우리 뜻이 이런 거니까 전해 받아. 전해줄 뜻은 이것뿐이니까 그만 만나.” 미국 정부는 캔터 대표에게 이 메시지를 전달하고, 다른 아무 얘기도 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퀴노네스는 이 회담의 문제점을 이렇게 지적했다.

 

캔터와 김용순 간의 회담은 어떤 진전을 기대하기에는 너무 많은 제약조건을 달고 있었다. 외교관들의 노력은 워싱턴의 관료주의를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즉, 이 회담은 베이징 접촉의 확대판에 불과했다. 협상은 없었다. 각자 본국의 상관이 미리 지시한 주문을 단순히 전달했을 뿐 양측이 달성한 것이라고는 의견 차이를 확인한 것밖에 없었다. (<한반도 운명> 35-36쪽)

 

미국의 국무성 관리와 언론인 모두 미국 정부가 대화 발전을 위한 아무런 의지 없이 ‘뉴욕회담’에 임했다는 사실을 증언한 것이다. 임동원은 이 회담에 관해 이런 기록을 남겼다.

 

이 회담이 끝나고 며칠 후 미 국무성 북한정보분석관 로버트 칼린과 주한미대사관 정무담당참사관이 통일원차관인 나를 집무실로 방문하여 회담결과를 설명해주었다. (...)

 

미국은 북한이 원칙적으로 국제사찰을 수용하는 정치적 결정을 내린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만 북미고위급회담의 개최에는 부정적인 것이 분명해 보였다. 또한 북한이 ‘지연전술’을 사용할 것이므로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피스메이커> 239-240쪽)

 

뉴욕회담 얼마 후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가 핵안전조치협정 체결을 승인하고(4월 9일) IAEA에 최초보고서를 제출한(5월 4일) 것을 보면 북한은 미국의 요구에 따라 핵문제를 해결하기로 정책을 결정해 놓았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미국은 ‘지연전술’을 의심하는 등 불합리한 이유로 북한의 대화 요청을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북한에 대한 미국의 ‘봉쇄정책’이 이 단계에서도 집요했다는 사실을 북한의 최초보고서 이후 사찰 과정을 받아들이는 태도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이 보고서의 내용 중 특히 놀라운 것은 “이미 약 90g의 플루토늄을 추출했다‘고 밝힌 사실이다. 미 정보기관조차 북한이 핵물질을 재처리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은 보고서의 내용에 주목하며 ”그렇다면 90g이 아니라 핵폭탄을 제조할 수 있는 kg 규모의 플루토늄을 이미 추출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해 5월 11일부터 16일까지 블릭스 IAEA사무총장 일행이 북한을 방문, 영변핵시설을 시찰했다. 블릭스 총장의 시찰결과보고는 (...) 결론적으로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다”고 밝혔다. (...)

 

그러나 미국은 “북한이 자진신고한 플루토늄 추출량을 분석한 결과 그것은 세 번에 걸쳐 재처리되었으며 총 148g으로 추정된다. 북한이 신고한 내용과는 ‘심각한 불일치’가 생겼다”고 주장하여 사태는 다시 악화되어갔다. 이에 북한은 미국에 대해 직접협상을 통해 해결하자고 요구했으나 미국은 이를 묵살했다.

 

당시 미국에서는 부시 대통령이 재출마한 대통령선거전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부시 행정부는 “핵확산방지조약의 국제적 의무를 이행하는 데 대한 ‘보상’이란 있을 수 없으며 투명성이 완전히 보장되기 전에는 미북 간 양자회담은 불가하다”는 강경자세를 견지했다. (<피스메이커> 241-242쪽)

 

전혀 의심하지 못하고 있던 플루토늄 추출 사실을 정직하게 신고했는데, 오히려 더 많이 추출한 게 아닌가 의심하고 나선다. 그리고 90g이 아니라 148g이니까 “심각한 불일치”라고 우긴다. 정확한 실상은 모르지만, 148g을 90g이라고 속일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 측정방법의 차이로 생긴 사소한 기술적 문제일 것 같은데 미국은 이것을 갖고 북한 보고서의 실효성을 문제 삼고 있으니, 이건 유치원 애들도 아니고...

 

임동원의 책에서는 미국 정책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직설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쓴 흔적이 도처에 보인다. 왜 그렇게 애쓴 건지 이해가 갈 듯도 하고 말 듯도 하다. 여기서도 대통령선거전 얘기를 불쑥 끼워 넣은 것이 억지스러운 미국의 대북정책에 대한 간접적 설명으로 이해된다. 1992년 중 미국 정부는 북한 봉쇄라는 대원칙에 맞춰 북핵문제에 대한 입장을 정한 것이라고 보는 내 견해를 임동원도 함께 가진 것이라고 짐작한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