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 냉전 해소로 종래의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국가들 사이에 교차 승인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이 흐름 속에서 남한도 거의 모든 ‘적성국’과 수교하게 되었는데, 그중 중요한 상대가 물론 소련과 중국이었다. 그런데 북한은 이 흐름을 제대로 타지 못했다. 미국 및 일본과 수교에 실패한 것이 결정적 좌절이었다.

 

중국과 소련에게는 남한과의 수교가 새로운 세계정세 앞에서 외면할 수 없는 과제였다. 무엇보다도 남한과의 교역이 두 나라의 경제활동에서 큰 비중을 차지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반면 북한과의 수교는 미국과 일본에게 그만큼 절박한 과제가 아니었다.

 

북한 개방은 경제적으로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더라도 정치적으로는 상당히 큰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고립 상태를 벗어나 국제사회에 들어오게 하는 것이 세계평화를 위해 바람직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북한의 고립 상태 유지는 남한까지 불안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개방의 필요가 큰 나라였다.

 

그럼에도 북한이 고립 상태에 머물러 있게 된 책임이 북한 자신에게 있다는 선전이 우리 사회에서 많이 유행했다. 주체사상이라는 유사종교에 주민을 묶어놓고 변화를 거부하면서 지배집단의 권력 유지에만 집착해 왔다는 선전. 남한, 미국과 일본이 아무리 개방의 기회를 줘도 지배집단의 이해관계에만 매달려 주민을 도탄에 빠트려 왔다는 선전.

 

이런 선전이 몽땅 거짓말이라고 단정하지 않는다. 북한 지도부가 저지른 잘못이(잘못된 믿음에 의해서든, 잘못된 판단에 의해서든) 상당히 크다고 생각한다. 아마 외부의 다른 어느 주체보다도 더 큰 책임이 북한 지도부에 있을 것으로 짐작한다.

 

그러나 모든 책임이 북한 지도부에게 있다는 선전은 분명 과장된 것이다. 그 선전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북한의 연착륙은 불가능한 것이고, 유일한 변화의 길은 붕괴뿐이다. 붕괴와 흡수통일을 바람직한 길로 생각하는 세력이 미국과 남한에서 큰 힘을 갖고 있고, 그 세력이 과장된 선전을 지나치게 열심히 퍼트려 온 것으로 나는 본다. 보다 평화로운 다른 변화의 길을 찾기 위해서는 북한 지도부의 책임이 어떤 한계를 가진 것이고 미국과 남한의 책임은 어떤 것이 있는지 엄밀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몇 해 후에 겪을 ‘고난의 행군’ 상황이 1991년 시점에서도 분명히 내다보이고 있었다. 소련과 중국이 오랫동안 시행해 온 시혜적 교역방법을 경화결제로 바꾸면서 북한 경제는 발전은커녕 유지가 불가능한 상황에 빠져들고 있었다.

 

남북한 유엔가입,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한반도 비핵화 선언 등 1991년 후반에 이뤄진 일련의 성과는 분명히 한반도에서도 북한 개방과 냉전 해소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 방향을 향해 여러 나라의 노력이 합쳐졌고, 그중 북한의 노력도 적지 않았다.

 

1992년 연초의 팀스피릿 훈련 중단 방침 발표는 남한과 미국도 이 방향에 적극 협력하겠다는 신호였다. 그런데 9개월 후 이 신호가 뒤집혔다. 10월 8일 한미연례안보협의회의에서 팀스피릿 재개 방침을 서둘러 발표하자 북한은 즉각 남북대화 중단과 핵사찰 거부 방침을 경고했고, 결국 1993년 3월 12일 NPT 탈퇴선언에 이르게 된다.

 

과연 그 9개월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인가. 일단 미국 쪽 사정을 국무성 관리 케네스 퀴노네스의 회고록 <2평 빵집에서 결정된 한반도 운명>(노순옥 옮김, 중앙 M&B 펴냄, 이하 “<한반도 운명>”)에서 꽤 소상하게 살펴볼 수 있다. 퀴노네스는 1964년 주한미군 근무 이래 한국 관련 연구와 관직에 종사해 왔고 1990년대에 국무부 코리아데스크를 담당하면서 13회에 걸쳐 북한을 방문하는 등 북한문제 전문가로 활동한 인물이다. 비한국계 미국인으로는 한국어에 가장 능통한 사람의 하나이기도 하다.

 

1990년을 전후해 남한과 소련-중국의 관계가 발전하는 동안 미국 정부는 북한에 대한 태도를 별로 바꾸지 않았다. 관리들의 북한인 접촉에도 엄격한 제한이 있었다는 사실을 <한반도 운명> 30-31쪽에서 알아볼 수 있다.

 

‘미소외교’는 정책의 변화라기보다는 전술적인 수정에 불과했다. 1982년 이전만 해도 미국 외교관이나 정부관리가 북한측 인사와 접촉하는 것은 금지돼 있었다. 그러다 1982년에 새로운 규칙이 도입됐다. 이제 미국 외교관은 북한 관리들이 참석할 것으로 예상되는 리셉션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다. 단, 주최측이 제3자인 경우, 즉 북한이나 미국 정부가 아닌 경우에 한해서였다. 기타 사소한 모임, 저녁식사와 같은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서도 국무부의 사전허가가 필요했다.

 

설사 사교모임에 참석해서도 미국 외교관들이 먼저 북한 사람들과 접촉을 시도할 수는 없었다. 북측 인사가 먼저 날씨나 건강 또는 그 비슷한 비정치적인 화제로 정중하게 접근해 오면 답례의 차원에서 응대할 수는 있었다. 다시 말해서 평양에서 온 미스터 김이 “워싱턴의 날씨는 어떻습니까?” 하고 물어 오면 워싱턴의 미스터 스미스는 “좋습니다” 하고 대답하는 식이었다. 그들이 미소를 띠고 물으면 우리도 미소를 지은 채 대답했다. 한국측 동료들이 우리가 미소외교의 한계를 벗어나는지 아닌지 눈을 부릅뜨고 감시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은 1982년에서 1992년까지 10년간 줄곧 똑같았다.

 

“한국 측 동료”란 남한 관리나 외교관을 말하는 것이다. 미국 관리들이 남한 관리들의 눈치를 보았다니, 기분좋아할 일인가? 미국 정부의 대 북한 접촉 제한 방침에 한국 정부의 입장이 전혀 작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겠지만, 결정적 요인일 수는 없다. 북한 따돌림은 미국 정부의 방침이었고, 외교계 기준으로 몰상식하다는 비판을 받을 그 방침을 변명하는 데 한국 입장이 이용된 것으로 보인다. 1982년 이전에는 북한인 앞에서 미소도 짓지 못하게 했다니, 미국 외교관들에게도 고역이었을 것이다.

 

우발적 접촉에 대해서도 이런 제한이 있었으니, 공식 접촉에 대해서는 말할 나위도 없다.

 

한반도 핵위기의 경우, 초기에 명확하게 제시된 유일한 정책이라고는 미국 외교관은 북한인과 얘기를 나누면 안 된다는 것뿐이었다. 북-미 간에는 대화 채널도, 상호 신뢰감도, 공통의 만남의 장도, 아무 것도 없었다. 그들은 우리를 미워했고 우리도 그들을 미워했다. 어쩌다가 우리가 북한인과 얘기라도 하면 미국 정부와 한국 정부는 우리를 마치 우방을 배반하고 적과 손을 잡으려는 수상쩍은 인물로 간주했다. (<한반도 운명> 11쪽)

 

미국 정부의 한반도 통일정책 역시 단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한국의 입장을 지지하고 북한을 외교 통상 면에서 고립시키며 북한과 대화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국무부 내에서는 그 방침에 아무도 반대를 할 수 없었다. 공식 입장에 반대한다는 것은 단순히 기분을 거스르는 차원이 아니라 ‘팀 플레이어’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받게 했으며, 상관의 화를 돋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관료조직에서 ‘팀 플레이어’가 아니라는 것보다 더 큰 죄악은 없다. (같은 책 30쪽)

 

1992년 1월 뉴욕에서 열린 북-미 고위급회담은 위와 같은 미국 정부의 기본 방침을 크게 뛰어넘은 것이었다. 1991년 하반기에 진행된 한반도 해빙 무드에 따라 이 회담이 열리게 되었지만, 후속회담 개최 가능성을 배제하는 등 미국은 결코 전향적인 태도가 아니었다. 당시 워싱턴포스트지 논설위원이었던 돈 오버도퍼는 이렇게 적었다.

 

92년 1월 21일 오전 10시 보좌관을 대동한 김용순 국제부장이 국무부 정무차관 아놀드 캔터가 이끄는 미국 대표단을 만나기 위해 리무진을 타고 주유엔 미국 대표부에 도착했다. 북한 사회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과 핵위협으로 인한 군사적 반감까지 겹친 전례없는 회담 성격으로 인해 미국 관료들은 회담 성사 여부는 물론 캔터 정무차관의 발언 범위를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캔터 차관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워싱턴 각료들이 마침내 합의에 도달한 결론은 ‘일단 회담을 개최한다. 그러나 캔터는 강경한 입장을 고수한다’였다.

 

캔터 ‘발언요지’는 사전에 부서 간 합동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작성됐고 남한과 일본 정부에도 회람 검토케 했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캔터는 미리 준비한 발언요지를 그대로 읽어 내려간 것이다. 그러나 기계적인 내용 전달을 최대한 우호적이고 유화적으로 표현한 것은 전적으로 캔터 자신의 뜻이었다. 준비된 발언요지에는 IAEA 핵사찰 허용과 핵무기 개발 계획 포기를 촉구하는 내용만 있었을 뿐 캔터에게는 이에 대한 대가로 북한이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지 언급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다. 특히 미국과의 관계를 ‘정상화’할 수 있다는 표현은 절대로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는 구체적인 지시까지 받은 터였다. 그는 북한에 대한 유인책으로 앞으로 양국의 대화 가능성에 대해 막연하게 시사했지만 앞서 말했듯 한국과의 사전 약속에 따라 후속회담 개최 가능성을 배제해야 했으므로 금번 회담이 ‘향후 전개될 북-미 협상 과정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짚고 넘어갔다.

 

(...) 장시간에 걸친 비공개 대화 끝에 김용순은 후속회담 재개를 위한 원칙적 합의나 그것이 불가하다면 최소한 회담을 마무리 짓는 공동성명서를 발표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캔터가 이 두 가지 요구를 모두 거절하자 김용순은 실망한 듯한 기색을 보였지만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로부터 1년 후 평양과 워싱턴 간의 긴장이 한층 고조됐을 때 김용순은 베이징의 외교 채널을 통해 캔터에게 문제 해결을 위한 회담을 가지자는 개인서한을 보냈지만 미 행정부는 이 것 역시 거절했다. (<두 개의 한국> 397-398쪽)

 

끝 문단에서 북한 대표가 “화를 내지는 않았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당연히 화를 낼 만한 일이었다는 말이다. 회담을 한다고 만나서 문제 해결을 못한 것은 물론, 해결을 위해 더 만나자는 것도 거절하고, 그렇다면 오늘 만나 어떤 얘기를 나눴다는 사실이라도 함께 발표하자는 요청까지 거절했다. “어쩌다 당신을 만나주고 있지만, 당신은 내 대화 상대가 못돼. 우리 뜻이 이런 거니까 전해 받아. 전해줄 뜻은 이것뿐이니까 그만 만나.” 미국 정부는 캔터 대표에게 이 메시지를 전달하고, 다른 아무 얘기도 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퀴노네스는 이 회담의 문제점을 이렇게 지적했다.

 

캔터와 김용순 간의 회담은 어떤 진전을 기대하기에는 너무 많은 제약조건을 달고 있었다. 외교관들의 노력은 워싱턴의 관료주의를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즉, 이 회담은 베이징 접촉의 확대판에 불과했다. 협상은 없었다. 각자 본국의 상관이 미리 지시한 주문을 단순히 전달했을 뿐 양측이 달성한 것이라고는 의견 차이를 확인한 것밖에 없었다. (<한반도 운명> 35-36쪽)

 

미국의 국무성 관리와 언론인 모두 미국 정부가 대화 발전을 위한 아무런 의지 없이 ‘뉴욕회담’에 임했다는 사실을 증언한 것이다. 임동원은 이 회담에 관해 이런 기록을 남겼다.

 

이 회담이 끝나고 며칠 후 미 국무성 북한정보분석관 로버트 칼린과 주한미대사관 정무담당참사관이 통일원차관인 나를 집무실로 방문하여 회담결과를 설명해주었다. (...)

 

미국은 북한이 원칙적으로 국제사찰을 수용하는 정치적 결정을 내린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만 북미고위급회담의 개최에는 부정적인 것이 분명해 보였다. 또한 북한이 ‘지연전술’을 사용할 것이므로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피스메이커> 239-240쪽)

 

뉴욕회담 얼마 후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가 핵안전조치협정 체결을 승인하고(4월 9일) IAEA에 최초보고서를 제출한(5월 4일) 것을 보면 북한은 미국의 요구에 따라 핵문제를 해결하기로 정책을 결정해 놓았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미국은 ‘지연전술’을 의심하는 등 불합리한 이유로 북한의 대화 요청을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북한에 대한 미국의 ‘봉쇄정책’이 이 단계에서도 집요했다는 사실을 북한의 최초보고서 이후 사찰 과정을 받아들이는 태도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이 보고서의 내용 중 특히 놀라운 것은 “이미 약 90g의 플루토늄을 추출했다‘고 밝힌 사실이다. 미 정보기관조차 북한이 핵물질을 재처리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은 보고서의 내용에 주목하며 ”그렇다면 90g이 아니라 핵폭탄을 제조할 수 있는 kg 규모의 플루토늄을 이미 추출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해 5월 11일부터 16일까지 블릭스 IAEA사무총장 일행이 북한을 방문, 영변핵시설을 시찰했다. 블릭스 총장의 시찰결과보고는 (...) 결론적으로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다”고 밝혔다. (...)

 

그러나 미국은 “북한이 자진신고한 플루토늄 추출량을 분석한 결과 그것은 세 번에 걸쳐 재처리되었으며 총 148g으로 추정된다. 북한이 신고한 내용과는 ‘심각한 불일치’가 생겼다”고 주장하여 사태는 다시 악화되어갔다. 이에 북한은 미국에 대해 직접협상을 통해 해결하자고 요구했으나 미국은 이를 묵살했다.

 

당시 미국에서는 부시 대통령이 재출마한 대통령선거전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부시 행정부는 “핵확산방지조약의 국제적 의무를 이행하는 데 대한 ‘보상’이란 있을 수 없으며 투명성이 완전히 보장되기 전에는 미북 간 양자회담은 불가하다”는 강경자세를 견지했다. (<피스메이커> 241-242쪽)

 

전혀 의심하지 못하고 있던 플루토늄 추출 사실을 정직하게 신고했는데, 오히려 더 많이 추출한 게 아닌가 의심하고 나선다. 그리고 90g이 아니라 148g이니까 “심각한 불일치”라고 우긴다. 정확한 실상은 모르지만, 148g을 90g이라고 속일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 측정방법의 차이로 생긴 사소한 기술적 문제일 것 같은데 미국은 이것을 갖고 북한 보고서의 실효성을 문제 삼고 있으니, 이건 유치원 애들도 아니고...

 

임동원의 책에서는 미국 정책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직설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쓴 흔적이 도처에 보인다. 왜 그렇게 애쓴 건지 이해가 갈 듯도 하고 말 듯도 하다. 여기서도 대통령선거전 얘기를 불쑥 끼워 넣은 것이 억지스러운 미국의 대북정책에 대한 간접적 설명으로 이해된다. 1992년 중 미국 정부는 북한 봉쇄라는 대원칙에 맞춰 북핵문제에 대한 입장을 정한 것이라고 보는 내 견해를 임동원도 함께 가진 것이라고 짐작한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