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북핵위기의 실상은 어떤 것이었을까. 당시 북한이 핵무기 개발에 어떤 의지를 갖고 있었고, 어떤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을까.

 

핵무기와 관련된 중요한 정보는 어느 나라에서나 최고급 기밀로 취급한다.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1993년 시점 북한 핵무기 사업의 정확한 실상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 동안 밝혀진 사실도 적지 않고, 이를 근거로 대략의 실상은 파악할 수 있다. 당시 미국이 북한의 핵무기 개발 가능성을 세계평화에 대한 중대하고 긴박한 위협으로 간주하여 대화를 거부하는 극한적 제재 정책으로 나간 것이 현명하지 못하거나 또는 악의적인 과잉반응이었다는 사실 정도는 분명히 밝혀져 왔다.

 

북한은 1950년 이래 미국의 핵공격 위협을 계속해서 받아 왔다. 1980년대까지 북한의 재래식 군사력이 남한보다 우월하다는 평가가 미국과 남한에서 지배적이었고, 남한의 열세를 메우기 위해 미국 핵무기의 존재가 필요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남한에는 1957년 이래 다량의 미국 핵무기가 배치되어 있었던 반면 북한에는 소련 핵무기가 배치된 적이 없었다.

 

한반도 내에서 핵무기의 불균형 상태가 수십 년간 계속되었지만, 소련 붕괴 때까지는 미-소간의 핵균형 덕분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소련이 무너지자 문제가 심각해졌다. 소련의 수십 분의 1에 불과한 중국 핵능력으론 미국과의 핵균형이 불가능했다. 1990년대 들어서는 재래식 군사력에 있어서 남한의 열세 주장도 설득력이 없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 핵무기의 남한 배치는 누가 봐도 평화에 대한 위협이었다. 그래서 1991년 하반기에 남한 배치 핵무기를 철수하고 ‘한반도 비핵화 선언’이 나오게 된 것이다.

 

남한이나 북한이나 독자적 핵능력 확보 의지를 1970년대부터 드러냈다. 그러나 남한의 핵능력 확보를 누구보다 미국이 꺼렸고, 북한의 핵능력 확보를 누구보다 소련이 싫어했다. 종주국으로서의 통제력 상실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남한의 핵발전 기술을 제공하면서 핵무기 개발을 틀어막은 것처럼 소련은 1985년 북한의 핵발전 확장을 포함하는 경제기술협력협정을 맺으면서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가입을 요구했다.

 

1991년까지 소련은 북한에게 핵발전 기술과 핵우산을 제공하면서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가로막았다. 설령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그 기간에 추진했다 하더라도 소련의 눈을 피하면서 해야 했다. 그리고 두 나라의 가깝고 깊은 관계를 감안하면 소련의 눈을 피해 북한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남한이 미국의 눈을 피하면서 핵무기 개발을 할 수 없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이었다.

 

1991년 후반 소련 해체가 진행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소련은 더 이상 북한에게 핵우산을 제공하지 못하게 되었고,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감시하지도 못하게 되었다. 한편 미국에게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카자크스탄 등이 물려받은 소련 핵무기의 통제가 중대한 과제가 되었다. 소련 핵무기를 물려받은 여러 나라의 핵무기에 대한 집착을 누그러트리기 위해 전 세계에 배치했던 미국 핵무기를 철수할 필요가 있었고, 남한 배치 핵무기 철수는 그 일환이었다. 핵전쟁 수행을 핵심 내용으로 하는 팀스피릿 훈련의 1992년 중단도 이 맥락에서 필요한 일이었다.

 

1991년 하반기 중 남북한 동시 유엔 가입에서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한반도 비핵화선언으로 이어지는 한반도 해빙 현상의 배경에는 미국이 구 소련 핵무기의 통제를 위해 호전적 태도를 삼가야 했던 조건이 작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1년이 지나 소련 해체에 따른 제반 문제가 정리되고 나자 미국이 유일한 초강대국으로서 위세를 뽐내는 데 거리낄 것이 없게 되었다. 1992년 10월 이후 미국이 팀스피릿 재개 방침을 비롯해 북한에 대해 고압적 태도를 취하게 된 데는 1년 사이의 입장 변화가 작용한 것이었다.

 

북한은 이런 상황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었을까.

 

북한은 1948년 건국 당시부터 정통성에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해방 때 조선 인민이 갖고 있던 민족 독립과 민주주의, 사회주의에 대한 염원을 제대로 실현시키는 건국의 길을 걸었다고 자부했으며, 같은 길을 걷지 못한 남한을 ‘해방’ 대상으로 여겼다. 그래서 ‘해방전쟁’을 일으켰던 것이고, 전쟁 후에도 ‘하나의 조선’을 일관되게 주장했다.

 

‘하나의 조선’ 주장을 보류한 유엔 동시가입은 분단 후 남한에 대해 가장 유연한 태도를 보인 것이다. 건국 이래 최대의 동맹국이었던 소련의 몰락을 현실로 받아들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중국에게는 핵우산을 비롯한 소련의 보호자 노릇을 대신해줄 역량이 없었다. 유일한 초강대국이 된 미국이 제시하는 조건에 따라 새로운 국제질서에 적응하는 길밖에 다른 선택이 없었다. 그 길을 거부할 경우 군사적 안전이 보장되지 않음은 물론, 경제의 어려움도 ‘고난의 행군’을 예상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북한은 1991년 10월 김일성의 중국 방문 이후 이 길을 따라 움직였다. 유엔 가입에 이어 남북대화를 통해 기본합의서를 도출했다. 그해 연말 남북 핵협정이 체결되던 상황을 돈 오버도퍼는 이렇게 서술했다.

 

김일성의 지시 때문이었는지 북측 대표단은 평소와는 다르게 순순히 타협에 응했다. 남한측 대표단은 협상 결과에 매우 만족했지만 훗날 남한의 일부 관리들은 당시 북한을 너무 심하게 몰아붙였던 것이 오히려 화근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품었다. 12월 가조인된 후 2개월이 지나 핵협정을 발표시키는 조인식을 마치고 평양에서 개성으로 향하는 승용차 안에서 북한의 김영철 소장은 남한의 박용옥 소장에게 협정 문안의 90%가 남한측 주장에 따라 작성된 것인 만큼 “이것은 당신네 협정이지 우리 협정이 아니다”라고 불평했다. 그 순간 박용옥은 북한이 협상 과정에서 양보한 사항들을 과연 실제로 이행할 것인지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남한 대표의 불안감과는 달리 김일성은 그믐날 조인된 남북 핵협정을 위대한 승리라고 평가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기쁨에 젖어있는지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헬리콥터를 판문점에 보내 협상 대표단을 개선장군 모시듯 평양으로 데려왔다. (<두 개의 한국> 394-395쪽)

 

북한에게는 40여 년간 미국 군사력, 특히 핵무기가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였다. 소련 해체가 진행되고 있던 시점에서 남한 배치 핵무기의 철수는 오랜 공포로부터 벗어날 희망을 보여주었다. 남한 쪽이 보기에도 무리한 조건을 북한 대표들이 순순히 받아들이고, 그것을 김일성이 기뻐한 것은 핵무기의 위협에서 벗어난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이 희망을 꺼트릴 짓을 할 생각이 이 시점에서 북한 측에 없었을 것이 분명하다.

 

북한은 1992년 5월초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최초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보고서가 정직하지 못한 것이라는 의혹을 미국이 제기함으로써 한반도 상공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고, 5개월 후 팀스피릿 재개 방침이 나오면서 사태가 마구 악화되기 시작했다. 북한의 IAEA 보고서에는 어떤 문제가 있었던 것인가?

 

문제의 초점은 최초보고서 중 플루토늄 90그램을 추출해 놓았다는 내용이었다. 북한은 보고서 제출 직후 방문한 IAEA 시찰단에게 이 90그램을 내놓았다. 미국에게 모든 정보를 의존하던 IAEA는 미국의 요구에 따라 이 90그램의 추출방법과 경위를 완벽하게 파악하려고 했다. 그리고 실험실에서 추출했다고 하는 북한 측 설명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 90g의 플루토늄은 핵무기 1기를 제조하기 위한 4-7kg에는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다. 그러나 이미 플루토늄 생산에 성공했다면 어느 정도 생산됐는지 과학적 확인이 어렵기 때문에 은닉 가능성이 대두됐다.

 

시험실에서 소량의 플루토늄을 추출하는 것이 가능하기는 했지만 IAEA 전문가들은 북한이 생산과정 점검을 위해 실험공장을 만들지 않고 엄청난 건설비가 드는 거대한 공장부터 세우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북한은 파일럿 플랜트의 존재를 계속해서 부인했고 의혹은 점점 커져갔다. (돈 오버도퍼 <두 개의 한국> 401-402쪽)

 

북한이 제출한 플루토늄의 정밀분석 결과 89년, 90년, 91년 세 차례에 걸쳐 추출작업이 행해진 사실을 확인했는데도 북한측은 90년 한 차례 추출한 것이라는 주장을 계속했기 때문에 불신의 근거가 되었다. 이 점에서 북한은 사실의 일부를 감춘 것으로 보인다. 왜 그랬을까?

 

북한이 미국이 요구하는 개방의 길로 나설 결정을 내리기는 했으나 반세기 가까이 적대적으로 대해 오던 미국의 ‘선의’를 무조건 믿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1992년 1월 뉴욕회담에서도 미국이 북한을 냉랭하게 대한 사실을 앞 회에서 설명했다. 모든 요구에 응할 자세를 성의껏 보여줬는데도 불구하고 그처럼 냉랭하게 대한다면 미국의 진정성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긴박하게 진행 중인 소련 해체에 대응하기 위해 점잖은 시늉을 하는 게 저 정도라면, 그런 시늉을 할 필요가 없어진 뒤에는 어떤 태도로 나올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북한은 IAEA가 요구하는 공개를 하고 사찰을 받아들이되 종래 IAEA 활동의 관행에 비추어 최소한의 공개만을 할 방침을 세운 것으로 생각된다. 모든 나라들이 받아들이는 기준에 따라 공개할 것을 공개하면서 그 기준 밖의 활동내용을 비밀로 남겨두는 것을 최소한의 주권 수호를 위해 필요한 일로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IAEA의 사찰 기준이 바로 이 시점에서 바뀌고 있었다는 데 있었다. 소련의 견제가 사라진 이제 미국은 IAEA를 자기네 산하기관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라크의 핵무기 개발 작업을 IAEA가 파악하지 못한 사실이 걸프전 때 밝혀지면서 권위가 실추된 IAEA는 완전히 미국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말았다.

 

평양은 아마도 이러한 핵사찰의 성격을 걸프전 이전 IAEA에서 근무했으며 92년 북한 원자력부 안전 연락사무소 소장으로 부임했던 한 인사의 제한된 경험으로만 판단했을 것이다. 하이노넨은 걸프전 이후 과학 기술의 괄목할 만한 발전과 미세한 방사성 물질 시료에서 정확한 분석 결과를 이끌어 낸 쾌거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그들은 핵사찰 기술이 이처럼 놀라운 발전을 계속했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말했다. 당시 북한핵 사찰팀의 책임자였던 빌리 타이스는 이렇게 말했다. “북한은 IAEA의 분석 능력을 터무니없이 과소평가했다. (...) 우리가 동위원소 분석까지 실시하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북한은 우리가 그 사실들을 어떻게 알아냈는지를 도통 이해할 수 없었으므로 모순되는 사항을 하나하나 지적했을 때 미처 그럴듯한 설명을 준비하지 못한 듯 보였다. 발견된 사실을 하나씩 알려줄 때에도 북한은 사전에 숙지한 획일적인 대답만 되풀이했다. 몰래 옳지 않은 행동을 하고 있더라도 우리에게는 그것을 명백하게 밝혀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기 위해 보다 강경한 태도를 보여야만 했다. (돈 오버도퍼 <두 개의 한국> 403-404쪽)

 

이 서술에는 오해가 있는 것 같다. “걸프전 이후 기술의 괄목한 만한 발전”이라 하는데, 한두 해 사이에 무슨 대단한 기술 발전이 있었겠는가. 걸프전 이후 바뀐 것은 기술이 아니라 IAEA의 정책이다. 동위원소 분석이 새로 개발된 기술이겠는가. 소련의 견제가 있던 시절에는 미국이 IAEA를 냉대했기 때문에 동위원소 분석을 할 예산이 없었을 것이다. 이제 IAEA를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게 되자 미국이 예산도 제공하고 정보도 제공하면서 사찰을 엄격하게 하도록 몰아붙인 것이다. 걸프전 이전의 관행과 전혀 다른 엄격한 사찰 기준에 첫 번째로 걸려든 것이 바로 북한이었다.

 

북한은 힘들더라도 IAEA 사찰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런 중에 팀스피릿 재개 방침이 나왔다. 그렇게 노력하는데도 미국과 남한이 거꾸로 가고 있으니 어쩌란 말인가. 팀스피릿을 재개할 경우 자기네도 더 이상 협력할 수 없다고 북한은 여러 차례에 걸쳐 경고했다. 그리고 팀스피릿이 재개되자 NPT 탈퇴를 선언했다.

 

1993년 NPT 탈퇴 당시에 북한의 핵기술이 핵무기 제조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히 밝혀져 왔다. 북한의 국제질서 진입 노력을 그 시점에서 미국이 도와줬다면 북한이 핵무기 개발 시도를 포기할 가능성이 컸으리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으리라고 믿는다. 그런데 미국은 도와주지 않았고, 그 결과 북한은 참혹한 ‘고난의 행군’ 시기를 겪어내며 핵무기를 만들어냈다. 미국은 이런 결과를 예측하지 못했던 것일까, 아니면 예측했기 때문에 그런 정책을 폈던 것일까? 다음 회에 살펴보겠다.

 

 

Posted by 문천

 

한세실업과 예스24의 김동녕 회장은 마주치면 "형님"으로 대하는 분이지만, 자주 보는 사이는 아니다. 그분 어머님과 우리 어머니가 이화여전 시절부터 친구로 이화여대에서 정년까지 함께 봉직한 사이라서 집안끼리 가까이 지냈기 때문에 중고등학교 4년 선배인 그분을 어려서부터 형님으로 대해 왔다. 그분이 사업가로 나선 뒤로는 별로 만날 일 없이 지내게 되었는데, 워낙 어려서부터 정이 든 사이라서 그런지 10년을 안 만나다가 마주쳐도 그냥 '형님'으로 느껴지는 분이다.

 

마음 한 구석에 늘 자리 잡고 있는 분이라서 안 보고 지내는 중에도 글에 올릴 때가 있다. 이 블로그의 글 중에도 두 차례 그분을 언급한 일이 있다.

 

이윤재 선생님께 보내는 책에는 사인 위에 "동녕 형을 부러워하며"라고 써넣었다. 그 아드님, 우리 큰형보다 한 살 밑인 김동녕 선배는 큰형 못지 않게 모범생에 효자로 내가 보는 이다. 이 선생님께 전화드릴 때 정정하신 것을 치하드리느라고 "저는 동녕 형이 부러워요~" 하곤 하는데, 사실 어머니가 요새만큼 몸과 마음이 편안하시기만 하다면 동녕 형도 별로 부럽지 않다.

 

<어머니> 카테고리의 08년 12월 15일자다. 진짜 모범생에 효자다. 나는 수십 년 불효자 노릇 하다가 잠깐 효자 노릇 한 것 갖고 티를 무척 냈는데, 동녕 형님은 티 하나 안 내면서 한결같다. 내가 그 형님 부러워한 것보다 우리 어머니가 그 어머님을 수백 배 부러워했을 거다.

 

예스24 김 회장님은 저도 잘 아는 분이지만 한국 기업가로서는 이례적이라 할 만큼 공익 마인드가 강한 분이죠. 형님이 이 사회에 공헌할 역량을 가진 분이라고 그분이 여겼기에 사회를 위하는 마음에서 형님에게 돈 쓸 생각도 하셨겠죠. 그런데 형님이 검소한 생활 자세를 지키고 있다면 김 회장님의 제안이 있더라도 공익을 위해 직접 쓰는 길을 권해드릴 수 있었을 겁니다. 형님, 월 434만 원씩 받으면서 그 밥값을 하셨다고 정말 생각하세요?

이건 09년 9월 정운찬 형님께 보낸 공개편지의 한 구절이다. 김 회장이 사업에 나서던 70년대는 요즘에 비해서도 기업가의 이미지가 좋지 않던 때였다. 사업을 하려면 온갖 더러운 짓을 다 해야 한다는 게 통념이었다. 훨씬 점잖은 진로를 얼마든지 찾아갈 수 있는 천하의 범생이가 사업에 나선다는 데 주변 어른들이 다 의아해 했다. 어머니 친구분들 함께 앉은 자리에서 어느 분이 "동녕이 걔가 뭘 잘못 먹어서 그런 생각을 하냐?" 하던 말씀도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 같다.

 

김 회장에 관한 생각을 적어놓을 생각이 불쑥 든 것은 이번 비엣남 여행 중 얻어먹은 일 때문이다. 누구에게든 내가 졸라서 대접받는 일이 좀체 없는데, 이번에는 한세 비엣남 공장을 구경하고 싶다고 연락드려서 일행과 함께 호치민 시 부근의 공장을 안내받고, 거기서 일하는 분들께 저녁 대접까지 잘 받았다. 안 하던 짓 하게 된 연유를 한 차례 짚어놓고 싶은 마음에서 적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니 친구분들 찾아뵙기는커녕 연락도 잘 드리지 않고 지내게 된다. 바쁘고 무심하고 게으른 탓도 있지만, 더러 생각이 나도 먼저 떠나신 친구분 기억을 떠올려 드리는 게 잘하는 짓인지 자신이 없다. 김 회장 어머님께도 1년에 한 번이나 겨우 문안 전화를 드리게 되었다.

 

비엣남 여행 계획을 세우면서 김 회장 생각이 났다. 비엣남 사업에 한국 기업 중 앞장서서 진출한 것이 한세실업이기 때문이다. 길이 달라 그분 사업에 관심 없이 지내 왔는데, 비엣남까지 가면서 모른 척 지나가기가 민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생각하니 비엣남을 처음 구경가면서 한국 기업의 비엣남 사업을 살펴보는 것도 그곳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공장 구경을 청할 생각을 하고 전화를 드렸다.

 

마침 해외 출장중이시라기에 전화 건 뜻을 비서에게 알렸다. 몇 시간 후 비서가 전화해서 견학을 주선해 드리라는 회장님 지시를 전화로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4월 7일에 한세 공장을 구경하게 되었다.

 

아침에 호텔까지 와서 우리를 픽업해준 김상률 차장이 비엣남어를 전공하고 비엣남에서 오랫동안 활동해 온 분이라서 한세 사업만이 아니라 비엣남에 관한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내게도 무척 실속 있는 오리엔테이션이었고, 일행 모두 만족해 했다.

 

모처럼 김치, 깍두기까지 곁들인 공장 식당의 점심식사까지 참 고마운 대접을 받았다. 그런데 아직까지 마음에 걸리는 게... 시내의 저녁식사 초대까지 덥썩 받아들인 것이다.

 

하노이 도착 직후 김 차장과 통화할 때 견학날 저녁식사까지 모시고 싶다는 뜻을 들었다. 일정이 확정되는 데 따라 응답하겠다고 당장은 대답했지만,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나누고 싶은 얘기는 점심때까지 다 나눌 수 있을 텐데 저녁식사를 따로 모신다는 것은 '향응' 범주에 들어가지 않겠는가. 공장 식당의 점심식사가 너무 검소하기 때문에 손님 맞는 입장에서는 제대로 된 식사를 대접하고 싶은 마음이겠지만, 회장님 아는 사이라 해서 그분들 저녁식사 시간까지 빼앗는다는 건 도리가 아니다. 말 듣자마자 바로 거절하기는 좀 그렇지만, 나중 연락할 때 바쁜 일정을 이유로 사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6일 호치민 도착하자 문제가 생겼다. 호치민 거주하는 분 한 분이 안내해 주겠다고 했었는데 급한 일로 갑자기 출장을 가버렸다. 하노이에서는 그런 대로 안내를 잘해 주던 이병한 선생마저 서울 처음 온 시골뜨기 꼴이다. 택시기사에게 두 번이나 '사기'를 당했다. 삥삥 돌아서 미터 올리는 것까지는 애교로 봐주겠는데, 엉뚱한 데다 내려놓으니 미칠 노릇이다. 식당에서도 계산서가 주문할 때의 예상보다 갑절이나 나오고...

 

이렇게 장님이 장님을 이끄는 꼴이다 보니 움직이기가 겁이 날 지경이었다. 8일에는 메콩강 데이투어 예정이고 9일에는 하노이로 돌아올 참이니 문제는 7일 점심때까지의 한세 견학 뒤였다. 저녁을 좀 괜찮은 곳에서 비엣남식으로 해야 할 텐데,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도 잡을 길이 없다. 그런데 저녁 초대를 사양하면서 초대한 분들에게 우리끼리 가서 먹을 식당을 추천해 달라고 할 수도 없는 것 아닌가. 그래서 7일 아침 공장으로 가는 차 안에서 김 차장에게 일행을 소개한 다음 이렇게 말했다. "우리 행색을 보고도 저녁 초대의 뜻이 바뀌지 않았다면 고맙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저녁 밥값을 한세실업에서 내준 거야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가볍게 생각할 수 있는데, 현지법인장과 김 차장 두 분의 저녁시간까지 뺏은 것은 미안한 마음을 지울 수 없다. 저녁식사를 하면서도 흥미로운 얘기를 더 들을 수 있었던 것이 우리 일행에게야 더욱더 고마운 일이었지만. 두 분께 고마운 마음과 함께 한세실업 잘 되기 비는 마음을 이렇게 적는 것밖에 보답할 길이 없다니... 저녁은 얻어먹으면 안 되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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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지난 수요일 하노이에 돌아온 후로는 별로 나다니지 않고 이 선생 집에서 책이나 읽다가 산보나 하며 지내고 있다. 기껏 움직이는 게 어제오늘 오후의 '버스 투어'. 5천 동(우리 돈 3백원 가량) 짜리 시내버스 타고 도시 반대편에 가서 산보하다가 쥬스나 커피 한 잔 마시고 돌아오는 서민형 투어다.

 

오늘 신시가지(한국인 몰려사는 동네. 한글 간판도 꽤 있다.) 가서 커피 한 잔 하고 돌아오는데, 정류장에 나 외에 수더분한 인상의 아주머니 하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가 와서 아주머니 먼저 타고 내가 탔는데, 빈 자리가 하나만 있었다. 이 아주머니가 아주 자연스럽게 나더러 앉으라고 손짓을 한다.

 

속으로 기특해 하면서 앉아 있는데, 한두 정류장 뒤에 할머니가 한 분 탔다. 그러자 차장이 (스무 살 전후의 청년들이 시내버스 차장을 한다.) 아주 자연스럽게 내 앞자리의 처녀 어깨를 툭툭 쳐 일어나게 하고는 할머니를 앉히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차장이 아는 처녀인가 했는데, 그 처녀 내릴 때까지 기색을 봐도 그런 게 아니다. 일으켜세우는 차장이나 일어나는 처녀나 아주 당연한 것처럼 행동한다.

 

외국 다니던 중에 이번처럼 현지인과 어울려보지 않고 지나가는 게 모처럼이다. 그런데 눈으로 보기만 하면서도 흥미롭게 보이는 구석이 많다. 말도 좀 배워서 다시 와보고 싶은 생각에 이곳과 관계된 일거리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밖에서 본 비엣남사"? 한국에도 훌륭한 비엣남 연구자들이 그 동안 여럿 자라나서 비엣남사를 잘 소개할 수 있게 되었지만, 동아시아를 배경으로 "밖에서 본 한국사"를 쓴 것처럼 동남아시아를 배경으로 "밖에서 본 비엣남사"를 쓴다면 전문 연구자들과는 다른 성격의 읽을거리를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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