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랭이 담배 피우던 시절 얘기다. '笑話'라기에는 좀 안 맞지만.

 

7형제를 키운 홀어머니가 있었다. 아들들이 모두 건장하게 자라나면서 홀로 키워준 어머니의 노고를 깊이 새겨 효심도 깊었다. 열심히 일해서 어머니를 배부르고 등 따습게 모셨다. 어머니의 편안한 모습을 보는 것이 그들에게는 무엇보다 큰 행복이었다.

 

그런데도 어느 해 날씨가 추워지면서 한 가지 아들들 마음에 걸리는 일이 생겼다. 어머니가 새벽녘 잠결에 진저리를 치며 "엇, 차거!" 잠꼬대를 하는 버릇이 생긴 것이었다. 방이 차지 않도록 불을 넉넉히 때는데 왜 저러실까, 어머니가 괴로움을 나타내는 그 일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아들들은 열심히 궁리했다.

 

어느 날 한밤중에 막내가 군불 지피러 아궁이에 내려가 있는데 문 여는 소리가 들리더니 어머니가 마당으로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 밤중에 큰 볼일이 있으신가? 어리둥절해서 바라보고 있는데 어머니는 측간 곁을 지나쳐 밭고랑으로 내려가신다. 궁금증이 일어나 기척하지 않고 따라가 보니 개울가로 내려가 신을 벗어들고는 앝은 개울을 건너신다. 그리고 개울 건너편 불이 켜져 있는 오두막으로 다가가 "계시우?" 하신다. 안에서 "오셨수?" 소리와 함께 홀아비 영감님이 나와 어머니를 맞아들인다.

 

막내가 바라보고 있으려니 두 노인네가 번갈아가며 서로 등을 긁어주는 모습이 호롱불빛으로 장지문에 비쳐지고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는 소리가 새어나온다. 한 식경이 지나자 어머니가 영감님의 배웅을 받으며 나와 개울가로 향하신다. 신을 벗고 개울물에 발을 담글 때 진저리를 치며 "엇, 차거!" 하시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새 버릇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 막내는 알 수 있었다.

 

이튿날 막내가 보고 들은 일을 형들에게 말해주니 흥미롭게 듣다가 노인네들이 서로 등 긁어주는 대목에서 모두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개울가에서 "엇, 차거!" 하는 대목에 이르자 걱정스러운 눈빛을 나눴다. 이야기가 끝난 후 7형제는 바윗돌 하나씩을 굴려 개울가로 가서 징검다리를 놓았다. 어머니가 발 적실 필요 없이 영감님을 밀회하러 갈 수 있도록.

 

그 날 밤 어머니가 개울가로 내려가 신을 벗으려다 보니 징검다리가 놓여 있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기뻐하며 그 자리에서 신명님께 빌었다. "이 다리를 놓아주신 고마운 분들이 저 세상에 갔을 때 모두 하늘의 별님이 되게 해 주소서!" 몇 십 년 후 하늘에 징검다리 모양의 새 별자리가 하나 생겼다. 그 별자리를 사람들은 북두칠성이라고 불렀다.

 

Posted by 문천

 

1830년대에 출간된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1780-1831)의 <전쟁론>은 지금까지도 전쟁에 관한 뛰어난 저술로 중시되고 있다.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장(延長)”이란 말은 나처럼 그 책을 읽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클라우제비츠의 동년배 중 전쟁에 관한 글로 오랫동안 더 큰 명성을 누린 사람이 하나 있다. 앙투안-앙리 조미니(1779-1969). 조미니의 글은 19세기 후반 내내 각국 사관생도들의 가장 중요한 참고서 노릇을 했다. 그런데 오늘날 조미니의 이름은 거의 잊어진 반면 클라우제비츠의 이름은 아직도 쟁쟁하다. 이 역전 현상을 린 몬트로스는 <War through the Ages>(1960년)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이렇게 된 결과는 (...) 조미니가 전쟁의 체계를 세운 반면 크라우제비츠는 전쟁의 철학을 세운 것이라는 사실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조미니의 업적이 새로운 무기의 출현으로 인해 퇴색된 반면 클라우제비츠의 사상은 그 무기의 뒤에서 작동하는 전략에 계속해서 영향을 끼치고 있다.” (<Wikipedia> "Carl von Klausewitz")

 

조미니와 클라우제비츠가 전쟁의 성격을 논한 것은 나폴레옹전쟁의 경험 위에서였다. 전쟁은 인류가 문명 초기부터 벌여 온 오래된 활동이었지만, 19세기 초엽의 나폴레옹전쟁을 계기로 그 실제 성격이 크게 바뀌었다. 두 사람이 청년기에 겪은(한 사람은 프랑스군에서, 또 한 사람은 프러시아군에서) 전쟁의 성격은 그들이 소년기까지 듣던 것과 크게 다른 것이었기 때문에 이 새로운 전쟁의 성격을 논하는 일에 나선 것이었다.

 

나폴레옹전쟁으로 시작된 ‘근대적 전쟁’의 특성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조미니가 천착한 전술적 특성은 약 1백 년간, 제1차 세계대전 때까지 큰 틀을 지켰다. 한편 클라우제비츠가 정리한 전략적 내지 철학적 특성은 아직까지도 상당한 유효성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근대적 전쟁의 가장 큰 특성은 대량살상이다. 중세의 전쟁에서는 전투원, 즉 군인이 전쟁의 주체였다. 전쟁은 전투원끼리 상대방을 쓰러트리고 자신이 쓰러지지 않으려는 노력을 통해 진행되었다. 그런데 근대적 전쟁에서는 적군 전투원이 아니라 적군이 존재하는 공간이 공격 대상이 되었고, 전투원은 전쟁의 주체가 아닌 객체가 되었다. 근대의 군인은 적과 맞서는 ‘전사(戰士)’가 아니라 지휘관이 원하는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도구가 된 것이다.

 

대량살상, 대량파괴는 대량생산과 짝을 이루는 근대문명의 특성이다. 생산과 파괴가 서로 반대인 것 같지만, 사실 대량생산은 자연파괴를 전제로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파괴적 성격이 서로 이어진 것이다.

 

폭약과 대포 등 군사기술의 발달에 따라 이 특성은 갈수록 더욱 심화되었다. 폭약의 발달은 결국 핵무기에 이르고 대포의 발달은 미사일에 이르렀다. 오늘날에 와서는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누군가의 손가락이 버튼을 누르는 데 따라 한 도시가 통째로 파괴되고 그 안의 모든 생명이 소멸할 수 있는 지경에 와 있다.

 

인간 사이의 다툼은 문명 발생 이전부터 있었던 것이다. 무리지어 사는 동물은 같은 종 내에서 서로 죽이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하는 학설이 맞는 것이라면 다툼이 의도적인 살상을 수반하게 된 것은 문명 발생에 따른 현상이라고 볼 수 있겠다. 아무튼 전쟁의 잔혹성이 문명 발달에 따라 심해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근대문명에서 전쟁의 잔혹성이 극도에 이른 것이 그 귀결이다. 인도주의를 근대문명의 특성 중 좋은 것으로 꼽는데, 근대문명의 잔혹성이 거울에 비쳐진 그림자일 뿐이다. 가장 대표적인 인도주의 운동인 적십자운동은 1859년 솔페리노전투의 참상에 앙리 뒤낭이 충격을 받은 데서 시작한 것이다. 부상자가 전면적으로 버려지거나 학살당하는 잔혹성이 근대 이전 전쟁의 역사에 없던 것이기 때문에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인간 존중의 정신이 짓밟히는 일은 언제나 있던 것이지만 근대 이전에는 그런 일이 개별적인 사건일 뿐이었는데, 근대 들어 인간 파괴가 일반적 현상이 되어버리는 데 대한 반동으로 인도주의가 일어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제1차 세계대전과 다른 점 하나가 적군의 ‘악마화’에 있었다. 일본은 연합군을 ‘귀축(鬼畜)’이라 불렀고, 연합군은 독일군과 일본군의 비인간적 만행에 치를 떨었다. 이 악마화는 극도로 잔혹해진 전쟁 수행방법을 정당화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이다. 핵무기 개발이라는, 그야말로 악마적인 작업이 그런 분위기 속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전쟁이 끝날 무렵에 열린 포츠담회담에서 원자폭탄이 모습을 나타냈다. 회담 개막 전날인 1945년 7월 16일 미국의 시험 폭발이 성공했던 것이다. 원자폭탄이 일본을 항복시키기 위해서보다도 미-소 대결의 도구로 더 큰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는 사실을 회담 진행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트루먼은 도착 직후 시험 폭발 사실을 처칠에게 알린 반면 스탈린에게는 7월 25일에야 밝혔다. 소련을 압박하는 무기로 원자폭탄을 내놓은 것이다.

 

독일 항복 직전인 1945년 3월 15일 독일 동부 오라니엔부르크의 한 공장에 미군이 엄청난 폭격을 퍼부은 일이 있다. 1506톤의 고성능폭탄과 178톤의 소이탄으로 철저하게 파괴했다고 한다. 우라늄 정제공장이었다. 소련군의 그 지역 진주가 임박하자 그 탈취를 가로막기 위해 이례적인 집중폭격을 행한 것이다. 핵무기 개발은 독일에서 1939년 제일 먼저 시작되었는데 급박한 전쟁 상황 때문에 잘 진척되지 못하고 있다가 전쟁 막바지에 연합군의 경쟁적 탈취 대상이 되고 말았다. 미-소 핵 경쟁은 여기에서 시작된 것이다.

 

미국이 원자폭탄 제작에 먼저 성공한 것은 프랑스와 영국의 기술을 전수받은 위에 독일의 핵기술을 더 많이 탈취하고, 막강한 경제력이 뒷받침했기 때문이다. 원자폭탄은 전쟁의 개념을 바꿔놓는 무기였다. 미국이 시험 폭발 성공을 공표한 이튿날 발표한 포츠담선언은 “신속하고 철저한 파괴(prompt and utter destruction)”의 위협 아래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다. 뒤이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폭탄의 위력을 과시하자 소련은 군사적 열세를 자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49년 가을 시험 폭발에 성공할 때까지 소련은 모든 분쟁 현장에서 미국에 밀리게 되었다.

 

냉전기를 통해 핵무기는 미-소 대결의 도구로서 일차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미-소의 엄청난 보유량 앞에서 다른 나라들의 핵무기에는 큰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분량이라도 핵무기 보유는 전략적 입장의 대칭성을 보장해준다. 대량파괴에 대한 보복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도 여기에 목적이 있는 것이다.

 

1968년의 핵확산금지조약(NPT)의 실제 목적은 핵무기 보유국의 전략적 우위를 보장하는 것이다. 조항 중에는 모든 가입국이 궁극적인 핵무기 전면 폐기를 위해 “성의를 다해 협상에 임할” 의무를 명시한 곳이 있지만 보유국들이 구속력을 인정하는 기색이 전혀 없다. 보유국 스스로 핵무기를 폐기한 사례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아파르트헤이트 철폐와 유엔 복귀에 임해 시행한 것 하나뿐이다.

 

미-소 대결의 종식에 따라 핵무기 대량보유의 필요성도 소멸했다. 그러나 핵무기 철폐가 바로 이뤄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1차적 장애는 미국인의 집착이다. “핵무기 없는 세계”를 제창한 오바마 대통령의 2009년 프라하선언 이후에도 미국인의 여론은 반반으로 갈려 있다고 한다. (<Wikipedia> "Nuclear Weapons")

 

핵무기에 대한 집착을 정당화해주는 논리도 개발되어 왔다. 핵무기의 존재가 잠재적 파괴세력에 대한 억지력으로 평화를 보장해준다는 ‘핵 평화(nuclear peace) 이론’ 같은 것이다. 최근에는 더 세련된 ‘안정-불안정 패러독스(stability-instability paradox) 이론’도 나왔다. 핵무기 보유국 간의 갈등이 전면적 대결로 터질 위험을 줄인다는 면에서 ‘안정’의 효과를 갖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소규모 충돌은 더 쉽게 일어나기 때문에 ‘불안정’의 측면을 갖는다는 것이다. 한반도 상황과 관련해 이 이론에서 주목할 점은 보유국과 미보유국 간의 갈등이 핵무기의 존재 때문에 증폭되는 경향을 가진다고 하는 것이다.

 

미국인들의 집착에도 불구하고 냉전 종식은 핵무기 철폐로 여론이 돌아서는 계기가 되었다. 헨리 키신저나 조지 슐츠 같은 냉전시대의 대결주의자들이 좋은 예다. 키신저는 이런 말을 했다.

 

“억지력의 고전적 정의는 도발자와 악한들이 행위의 결과를 두려워하게 만드는 것이다. 자살폭탄이 횡행하는 세계에서는 그런 계산이 통하지 않는다.”

 

슐츠는 이런 말을 했다.

 

“어떤 자들이 자살공격에 나서는지 생각해 보라. 그리고 그런 자들 손에 핵무기가 들어간다고 생각해 보라. ‘억지력’이란 개념이 성립할 여지가 없다.”

 

전략적 비대칭성을 고착시키는 NPT가 최소한의 효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미보유국에 대한 보상 조항이 있기 때문이다. 보유국이 미보유국에 대해 핵무기 사용의 위협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용’은커녕 ‘위협’도 못 하게 하는 것은 위협만으로도 치명적 효과를 일으킬 수 있는 핵무기의 특성 때문이다. 보유국끼리는 위협을 통해 억지력을 작동시킬 수도 있겠지만, 미보유국이 위협을 받는 것은 그 자체로 극한상황을 구성하게 된다.

 

존재하지 않는 핵무기 개발 혐의로 일으킨 이라크전쟁은 NPT와 IAEA(국제원자력기구)의 신뢰를 크게 손상했다. 미국의 패권주의 앞에 국제질서가 유린당하는 상황이 적나라하게 펼쳐진 것이다. 북핵문제 해결이 어려운 중요한 원인 하나가 이런 상황에 있다.

 

총기 소유가 자유롭고 총기사건을 많이 겪는 미국 사회에 이런 우스개가 있다. “총기사건 피해자가 피해를 입는 두 번째 큰 이유는?” 답은 “본인이 총을 안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가장 큰 이유를 물을 차례다. 그 답은 “본인이 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냉전 종식 이후 북한의 국제사회 진입에 가장 큰 걸림돌 노릇을 해온 것이 핵무기 문제다. 북한은 주권 수호를 위해 핵무기를 개발해 왔다고 주장한다. 그런 주장을 할 만한 근거가 전혀 없지도 않다. 이라크전쟁을 앞둔 시점에서 부시 미국 대통령의 “악의 축” 주장은 그런 근거를 부각시켜주기도 했다. 핵무기 문제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북한과 미국의 정책을 나란히 놓고 상대적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란 클라우제비츠의 말을 다시 생각해본다. 주권국가들의 각축으로 국제정치가 형성되고 있던 19세기 초반의 클라우제비츠에게는 약탈적 성격의 종래 전쟁과 달리 국가 목적의 합리적 추구방법으로서 근대전쟁의 새로운 모습이 놀랍게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180년이 지난 지금 세상에서는 전쟁이 너무나 일상적인 상황이 되어버린 것일까? 64년 전에 시작된 전쟁을 아직도 종결짓지 못하고 있는 한반도에서는 거꾸로 “정치가 전쟁의 연장”이 되어버린 것 같다.

 

 

Posted by 문천

 

1990년 10월에서 1992년 10월까지 8차에 걸친 남북고위급회담이 열리는 동안 북한은 또 하나 일련의 중요한 회담에 임하고 있었다. 1991년 1월에서 1992년 11월 사이에 열린 일본과의 수교회담이었다. 북한과 일본의 관계 정상화에 해방 후 가장 가까이 간 접촉이다.

 

건국과정에서 북한은 남한과 달리 친일파 처단을 철저히 했기 때문에 일본에 적대적 태도를 취한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보는 통념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일본에 접근할 일이 있을 때 북한의 ‘국민감정’이 결정적 장애가 되는 일이 없었다. 오히려 일본 쪽의 국민감정이 문제가 되곤 했다. 1991-1992년의 수교회담 파탄에도 ‘이인혜 문제’가 크게 작용했다.

 

일본과의 관계를 놓고 남북을 비교해 본다면, 남한의 국민감정이 훨씬 더 두드러진다. 이것은 남한의 친일파 처단이 미흡한 데 이유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친일파와 그 후손들이 남한에서 부와 권세를 누려온 데 대한 일반인의 불만감이 일본과의 사이에 갈등이 일어날 때마다 그 위에 겹쳐져 작용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일본 측의 망언에 대해 대통령이 단호한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면, 대통령이 친일파거나 친일파 후예이기 때문이라는 의심이 바로 떠오르는 것이다.

 

이에 비해 북한은 실용적 기준으로 일본을 대해 온 셈이다. 그 차이가 가장 두드러졌던 것은 친일파를 정권의 축으로 삼으면서 정략적 ‘반일’을 내세운 이승만 시절이었다. 이승만 정권은 일본과의 협력을 거부한다는 핑계로 재일동포를 내팽개쳤다. 반면 북한은 재일동포 지원 사업을 꾸준히 펼쳤기 때문에 1955년 5월 결성된 친 북한 성향의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에 재일동포의 80%가 가입하기에 이른다.

 

1959년 12월 시작된 재일동포 ‘귀환’사업을 통해 약 8만8000명의 재일동포가 북한으로 건너가기도 했다. ‘귀환’에 따옴표를 친 것은 그 의미가 엄밀하지 못한 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 대다수는 남한 지역에 고향을 둔 사람들이었다. 이 북송사업을 다룬 책 <북한행 엑서더스>(한철호 옮김, 서해문집 펴냄) 머리말에 테사 모리스-스즈키는 이렇게 적었다.

 

<북한행 엑서더스>를 집필하면서, 나는 ‘귀국(repatriation)’이라는 어휘에 대해 심사숙고했다. ‘귀국’은 조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재일조선인들에게 북한은 물론 ‘조국(fatherland)’ 한국의 일부분이었지만, 그들 대다수가 태어난 땅은 아니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그들은 자신들이게 친숙한 조상의 도시와 마을로 '돌아가는 것(returning)'이 아니라 매우 낯선 사회를 향해 떠나는 것이었다.

 

북송 재일동포 중 90% 이상이 남한지역 출신으로 추정된다. 재일동포 중에 남한지역 출신이 원래 압도적으로 많다. 식민지시대에 살 길을 찾아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북한지역에서는 만주 방면으로, 그리고 남한지역에서는 일본으로 대부분 향했기 때문이다. 해방 후 남한지역으로 돌아온 재일동포 중에는 일본으로 도로 밀항해 간 사람들이 많았다. 전쟁 후의 일본도 살기 힘든 곳이었지만 남한지역은 그보다도 더 힘들고 위험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4-3항쟁기의 제주도에서 일본으로 돌아간 사람들이 많았다. 그렇게 돌아간 사람들 중에 많은 수가 10년 후 북송선에 올랐다.

 

김일성이 1957년 9월 최고인민회의 연설에서 일본과의 수교가 양국 간 호혜와 아시아의 평화에 이바지할 것임을 역설했다고 한다.(김계동 <북한의 외교정책과 대외관계> 346쪽) 당시의 이승만 정권보다 전향적인 태도였는데, 역시 ‘친일파 콤플렉스’의 유무에 따른 차이일 것이다. 물론 일본은 미국의 허락 없이 ‘침략자’ 북한과 수교할 수 없는 입장이었지만 정경분리의 원칙을 내세워 북한과의 교역을 늘려나갔다. 그래서 냉전기 동안 자유진영 국가 중 북한의 가장 큰 교역상대국이 되었다. 특히 1971년 1월 ‘일-조 무역촉진에 관한 합의서’ 채택 후로는 미수교 상태라도 상당히 안정된 관계가 대체로 유지되었다.

 

북-일 관계는 남한이 1980년대 중반까지 소련 및 중국과 거의 아무런 관계도 갖지 않고 지낸 것과 다른 양상이었다. 기본적인 이유는 북한이 일본의 자본과 기술을 필요로 하는 데 있었다. 미국과 일본에 부속된 남한 경제와 달리 북한 경제는 소련과 중국의 지원만으로 지탱하기 힘들었다. 특히 1950년대에는 식민지시대에 일본이 건설한 중공업시설 운영을 위해 기술과 부품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한편 일본은 정치-군사적으로는 미국에 예속되어 있으면서도 경제면에서는 자신의 헤게모니를 추구하면서 정경분리 원칙을 내세웠다.

 

1990년을 전후한 냉전 종식 단계에서 남한이 ‘전 방위 외교’에 나설 때 공산국가의 남한 수교를 더 이상 가로막을 길이 없는 북한으로서는 스스로 전 방위 외교에 따라 나설 수밖에 없었다. 남한이 수교하고자 하는 공산국가들(특히 중국)은 종래의 동맹국 북한에 대한 체면 때문에라도 남북 화해 노력을 조건으로 내거는 일이 많았다. 서울올림픽 직전의 7-7선언에는 공산국들의 남한 접근에 걸림돌을 제거하는 의미가 있었다. 노태우 대통령은 7-7선언에서 남북 간의 교류 증진과 함께 북한이 미국, 일본 등 남한의 우방과 관계 개선을 원할 경우 적극 협력하겠다고 제안했다.

 

북한은 7-7선언에 대해 ‘두 개의 한국’ 획책이라며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그 직후에 헝가리가 남한과의 수교 방침을 발표하자 격렬한 항의와 비난을 퍼부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특히 1990년 한-소 수교에 임해서는 남한의 북방정책 성공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고, 새로운 대응방법을 강구하게 되었다. 그래서 미국과의 대화를 시도하면서 일본과의 수교를 추진하게 된 것이다.

 

북-일 수교 추진의 출발점이 된 것은 1990년 9월 하순 일본 자민당과 사회당 의원단의 평양 방문 때 조선로동당과 함께 발표한 3당 공동선언이었다. 주요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1. 식민지 지배 35년 및 전후 45년에 대한 보상

2.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국교관계 수립

3. 교류협력 발전과 위성통신 이용, 직항로 개설

4. 재일 조선인의 법적 지위 존중

5. 조선은 하나, 남북대화에 의한 평화통일 인정

6. 핵 위협 제거

7. 국교수립 실현을 위한 정부간 교섭 권고

8. 상호 당적 관계 강화 및 협조 발전(김계동 위 책 349쪽)

 

그 후 연말까지 베이징에서의 예비회담을 거쳐 1991년 1월 30일 평양에서 개막된 수교회담의 의제도 대략 이 범위의 것이었다. 3월에는 도쿄에서 제2차 회담이 열렸고, 제3차에서 제8차까지의 회담은 1992년 11월 초순까지 베이징에서 열렸다.

 

1991년 8월의 제4차 회담에서 11월의 제5차 회담까지는 회담의 성공 전망이 밝았다. 북한이 유엔 가입과 핵안전협정 서명 방침을 밝힌 시점이었다. 북한이 배상 대상에서 전후 45년을 제외하고 식민지배 36년으로 한정하는 데 동의한 것도 성공을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후 진행이 지지부진하다가 결국 북핵문제 앞에서 좌초하고 말았다. 수교회담은 2000년 4월에 재개될 때까지 7년 반 동안 중단되었다. 1991-1992년 수교회담에서 북-일 간 입장 차이를 김계동은 이렇게 정리했다. (위 책 351쪽, 해설 12-2)

 

8차례의 수교회담을 통해 북한과 일본은 주요 현안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견 차이를 노정하였다.

 

첫째, 기본문제인 구한말 조약(을사보호조약 등)과 합병조약의 유-무효 문제에 대하여 북한은 한반도에서의 정통성 확보 및 보상범위의 확대를 위하여 구 조약의 무효를 주장했으나 일본은 한-일 기본조약의 해석 틀 내에서 보상방식을 찾았다.

 

둘째, 보상원칙 및 범위와 관련하여 북한은 교전국으로서의 보상, 식민지 지배에 대한 보상, 전후 45년의 피해와 손실에 대한 보상을 주장한 반면, 일본은 교전국으로서의 보상과 전후 보상에 대해 거부하는 한편 식민지 지배 보상도 재산청구권 문제로 취급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셋째, 기타 문제로서 북한이 제기한 재일 한국인의 법적 지위문제와 일본이 제기한 일본인 처의 본국 왕래문제 및 이은혜 문제가 있었으나, 수교회담의 본질적 장애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은 낮은 것으로 평가되었다.

 

이 글에서는 ‘일본인 처 본국 왕래 문제’와 ‘이인혜 문제’를 크게 중요하지 않은 주변적 문제로 보았지만, 당시 일본 언론에서는 크게 부각된 문제였다. 일본 정계에는 북한과의 관계정상화를 서두르자는 협상파와 이에 반대하는 강경파가 갈라져 있었는데, 강경파가 선정적인 방식으로 언론에 문제를 터뜨리는 경향이 있었다. 일본인 처란 1960년을 전후해 북송선에 탄 재일동포를 따라간 일본인 부인을 말하는 것이다. 당시에는 일본경제도 아직 어려울 때여서 경제 사정이 괜찮고 귀환 동포를 우대해 준다는 북한으로 따라간 일본인 부인이 많았다. 모국은 그 후의 경제발전으로 풍요로운 사회가 되었는데 남편을 따라간 새 조국에서 빈곤과 억압에 시달리게 된 이 여인들의 운명은 매우 특이한 것이다. 그리고 이인혜란 KAL기 폭파범 김현희가 납치된 일본 여성에게 일본어를 배웠다고 폭로한 인물로서,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을 대표하는 이름이 되었다.

 

근년 일본의 우경화라 하여 내외의 걱정을 모으는 현상의 초점이 헌법 개정운동에 있다. 패전 후 미국의 강압 아래 제정된 ‘평화헌법’을 바꿔 군사적 주권을 가진 ‘보통국가’가 되자는 움직임이다.

 

평화헌법을 폐지하자는 이 운동에 군국화 반복의 위험이 있고, 일본 군국주의의 피해국 입장에서는 전쟁범죄에 대한 반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걱정을 넘어 분노까지 일으킬 일이다. 그런데 가만 생각하면 저지른 지 70년이나 되는 전쟁범죄에 지금까지 매달려있다는 것도 뭔가 잘못된 일이다. 그리고 평화헌법이 일본의 군국주의에 대한 반성을 가로막는 가면이나 방패 역할을 해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평화헌법은 좋은 것이고 그것을 폐지하자는 것은 나쁜 짓이라는 흑백론을 넘어, 일본 전후체제의 구조적 문제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국의 일본현대사 연구자 존 다우어는 “샌프란시스코 체제 : 미-일-중 관계의 과거, 현재, 미래”[바로 가기]에서 전후 일본의 미국에 대한 예속성을 지적했다. 평화헌법이 표방하는 ‘평화국가’가 사실은 미국에 대한 군사적 예속을 전제로 한 ‘예속적 독립’을 뜻한다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미국이 일본 처리를 주도해서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만들었다. 일본과의 강화회담에 일본 군국주의의 가장 큰 피해자인 한국과 중국이(남한과 국민당정부까지도) 배제된 것을 다우어는 이 체제의 가장 치명적인 결함으로 지적한다. 일본의 비무장은 평화국가의 보장에 앞서 미국의 통제력 확보에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21세기의 새로운 상황 앞에서도 일본이 군사적 측면에 집착하는 것은 군사적 주권에 굶주려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주변 4대국 중 일본이 앞으로의 변화에 대해 가장 대결적 태도를 보일 것이 걱정스럽다. 냉전체제 구축에 맞춰 만들어진 샌프란시스코 체제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냉전의 후유증에 가장 깊이 시달리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