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북핵위기’의 빌미가 된 핵확산금지조약(NPT, Treaty on the Non-Proliferation of Nuclear Weapons)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살펴보겠다.

 

1968년 작성되어 1970년 3월 발효에 들어간 NPT는 이름 그대로 핵무기의 확산 금지에 목적을 둔 조약이다. 이 조약의 효력은 애초 25년간으로 규정되었다가 1995년의 총회 결정으로 무기한 연장되었다. 현재 189개국이 가입해 있는데, 가입했다가 탈퇴한 나라가 하나 있다. 북한이다. 유엔회원국으로서 가입하지 않고 있는 나라가 북한 외에 넷 있다. 인도, 파키스탄, 이스라엘과 남수단이다. 최근(2011년) 독립한 남수단은 NPT에도 곧 가입할 것이 예상되지만, 나머지 세 나라는 가입에 문제를 가진 나라들이다.

 

NPT는 한 마디로 불평등조약이다. 핵무기 제조능력을 이미 갖고 있는 나라들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고 그 밖의 미보유국은 핵능력을 갖지 못하게 하는 것이 조약 목적이다.(1970년 출범 때는 미국, 소련, 영국만이 핵보유국으로 인정받았고, 1992년 프랑스와 중국이 가입하면서 추가로 인정받았다.) 미보유국에게 현실을 받아들이도록 요구함으로써 현상유지를 꾀하는 이 조약이 확산금지의 효과를 어느 정도 발휘해 왔다는 사실은 인정된다. 출범 당시에는 향후 20년 후 25개국 이상이 핵능력을 갖게 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었으나 그 갑절의 기간이 지난 지금까지 핵무기 보유국은 10개 안쪽에 머물러 있다.

 

핵무기는 현대세계에서 군사력의 가장 중요한 요소다. 따라서 그 보유 여부는 정치-외교에도 엄청난 힘의 차이를 가져온다. 그런데도 미보유국이 보유국과의 힘의 격차를 감수하게 하려면 당연히 미보유국이 손해 보지 않게 해주는 반대급부가 필요하다. 가장 중요한 반대급부로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기술을 핵보유국이 적극적으로 제공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핵무기가 미보유국에 대한 군사적 위협에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두 가지 반대급부가 있다면 미보유국이 굳이 핵능력 확보를 위해 애를 쓸 필요가 없다. 이론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칼을 휘두르지 않기로 약속하더라도 실제로는 칼자루를 쥔 입장과 칼날을 쥔 입장이 다르다.

 

게다가 이 약속은 당연한 원칙으로 인식되면서도 아직 NPT 조문으로 명문화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원칙에 어긋나는 태도가 적지 않게 나타나는데도 제재가 되지 않는다. 북한에 대한 미국의 위협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2003년에 제프리 훈 영국 국방장관이 필요할 경우 이라크에 대한 핵공격에 찬성한다고 BBC 인터뷰에서 말한 일이 있고, 2006년에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이 프랑스에 대한 테러지원국의 권력 중심부를 파괴하기 위해 소규모 핵공격을 행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미국의 북한에 대한 핵공격 위협은 1976년 팀스피릿훈련 개시와 함께 일상화되었다.

 

월남 패망 후 미국은 안보에 대한 불안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있던 남한 정부를 달래준다는 명목 하에 경우에 따라 핵무기를 사용할 수도 있다며 공공연하게 북한을 위협했다. 1975년 6월 제임스 슐레진저 국무장관은 남한에 미제 핵탄두가 배치돼 있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시인하면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우리가 전술 핵무기를 반드시 사용해야 하는 상황이 전개된다면 (...) 실제 그 사용 여부를 고려하게 될 것이다.” 이어 그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미국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시험하는 것은 결코 현명치 못한 행동이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976년 2월 핵무기 탑재가 가능한 미군 전폭기 부대가 잠시나마 남한에 배치됐고 이 사실은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게다가 그해 6월 처음으로 실시된 팀스피릿 연례 합동 군사훈련의 일정도 대규모 병력 이동과 핵무기 사용 훈련으로 구성돼 있었다. (돈 오버도퍼 <두 개의 한국> 385쪽)

 

여기서 주의할 점은 실제 공격이 아닌 ‘위협’까지 NPT의 규제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전략무기’로서 핵무기의 특성 때문이다. 실제 공격을 통해서만 효과를 거두는 무기는 ‘전술무기’다. 위협만을 통해서도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이 전략무기의 특성이다. 북한이 핵능력을 가졌다는 사실만으로 ‘위기’를 구성하는 것도 이 특성 때문이다.

 

핵무기를 만들고 있다는 의미에서 ‘핵능력’을 가진 나라는 열 개 미만이다. 그러나 마음만 먹으면 단시일 내에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잠재적 핵능력’을 가진 나라는 그 몇 배 있다. ‘북핵위기’의 가장 큰 위험이 북한의 핵무기 보유가 남한, 일본, 대만 등 주변국의 핵무기 개발 의지를 촉발하는 데 있다.

 

NPT의 궁극적 목표는 핵무기의 완전 철폐에 있다. 미보유국의 핵무기 개발 의지를 원천적으로 없앨 수 있는 길이다. NPT 조문 제6조가 이 목표를 가리키는 것이다. 해석에 논란이 있는 조문이므로 <Wikipedia> "NPT"에서 원문을 옮겨놓는다.

 

“The states undertake to pursue negotiations in good faith on effective measures relating to cessation of the nuclear arms race at an early date and to nuclear disarmament, and towards a treaty on general and complete disarmament under strict and effective international control.(조약국은 조속한 시일 내의 핵군비경쟁 종식과 핵무장 해제의 효과적 수단을 강구하기 위한 회담에 성의를 가지고 임해야 하며 엄격하고 효과적인 국제통제 하의 보편적이고 완전한 핵무장 해제조약 체결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미보유국들은 이 조문을 엄격하게 해석해서 보유국들이 이 조문을 어겨 왔다고 주장하는 반면 보유국들은 느슨하게 해석하면서 이 조문의 요구에 부응해 왔다고 주장한다. 한편 인도는 이 조문이 충분히 엄격하지 못해서 조약 자체가 불공정하다는 것을 NPT 가입거부 이유로 내세운다. 2007년에 인도 외무장관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Wikipedia> “NPT”)

 

“인도가 NPT에 가입하지 않는 이유는 핵확산 금지에 성의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 조약에 결함이 있고 보편적, 무차별적 확인과 처리의 필요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NPT는 앞서 말했듯, 불평등조약이다. 출범 당시 25년의 조약기간을 정한 것은 그 동안에 핵무기를 전면 철폐함으로써 이런 불평등조약의 필요성을 없애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25년이 된 1995년에는 핵군비경쟁의 주역이던 소련이 사라졌으므로 이 목표의 실현에 접근한 상황이었다. 핵무기의 전면 철폐를 위한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런데 미국은 NPT의 무기한 연장을 주장하고 총회에서 관철시켰다.

 

NPT의 목적 달성을 방해하는 것으로 가장 많은 비판을 받아 온 나라가 미국이다. 가장 큰 비난을 모은 것이 미국 핵무기의 NATO 배치였다. 남한 배치 핵무기와 달리 독일, 이탈리아, 터키 등 NATO 소속 여러 미보유국에 배치된 핵무기는 유사시에 배치되어 있는 국가의 통제를 받게 되어 있다.

 

이것이 핵무기와 관련 기술의 양여와 수령을 금지하는 NPT 제1조와 제2조의 위반이라는 비판이 일찍부터 제기되어 왔다. 이에 대해 미국과 NATO의 해명은 이렇다. 평상시에는 핵무기가 미국의 통제 하에 있으므로 양여된 것이 아니고, 유사시, 즉 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NPT가 이미 깨어진 상황이므로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판자들은 평상시에도 핵무기 운반과 작동훈련 등 관련 기술이 양여된 것임을 지적한다.

 

NPT가 금지한다는 ‘핵확산’은 기술보유국에서 미보유국으로의 무기와 기술 이전을 말하는 것이다. 가입하지 않은 나라의 독자적 핵무기 개발에 대한 직접 제재는 없다.(그런 제재는 유엔 안보리의 할일이다.) 다만, 조약에 가입하고 준수하는 미보유국에 주어지는 혜택, 즉 평화적 핵기술의 양여와 선제핵공격의 금지가 적용되지 않을 뿐이다.

 

그런데 이런 기준도 지켜지지 않는다. 미국은 2006년에 ‘미국-인도 평화원자력협조법’을 제정했다. 그리고 2008년 여러 나라의 반대를 무릅쓰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인도 안전기준 협정’ 승인을 받아냈다. 원자력기술과 원전을 인도에 마음 놓고 팔아먹게 된 것이다.

 

이런 조치를 끌어내기 위해 인도는 22개 핵발전소 중 14개를 ‘민간용’으로 지정, IAEA의 사찰 대상으로 내놓았다. 이에 모하메드 엘바라데이 IAEA 사무총장은 인도를 “비확산 체제의 중요한 파트너”라고 치켜세웠다. 북한에 요구한 엄격한 사찰과는 천양지판이다.

 

1974년 핵실험에 성공했던 인도의 앙숙 파키스탄은 1998년에야 핵실험에 성공했으나 1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약 100기를 비축, 인도와 대등한 핵군비를 갖춘 것으로 알려졌다. 파키스탄의 핵무기 개발은 알카에다 상대의 동맹관계로 미국의 관용을 얻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알카에다 자체도, 후세인의 이라크도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통해 군사력을 키웠던 사실에 비춰보면, 미국은 참으로 세계평화를 막기 위해 꾸준히 애써 온 나라다. 근년 알카에다에 대한 파키스탄의 애매한 태도가 문제가 되면서야 파키스탄이 인도와 같은 식의 안전기준 협정을 맺는 것을 미국이 가로막고 나섰다.

 

미국의 세계평화 위협에 대한 비판이 모이는 또 하나의 초점이 이스라엘 옹호다. 이스라엘이 1958년 이래 핵무기를 개발해 왔다는 것은 ‘공개된 비밀’을 넘어 ‘공개된 사실’이 되어 있는데도 미국은 IAEA의 개입을 가로막아 왔다. 2009년에야 IAEA 총회에서 이스라엘의 사찰 수용과 NPT 조약 가입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는데, 너무나도 당연한 내용의 이 결의안이 찬성 49 대 반대 45(기권 16)로 겨우 통과되었다고 한다.

 

1998년 11월에 쓴 글 하나가 오늘의 주제에 맞는 것이 있어 붙여놓는다.

 

“궁구막추(窮寇莫追)”

 

이스라엘이 핵무기를 갖고 있다는 것은 비밀 아닌 비밀이다. 이스라엘은 건국 초부터 ‘디모나’란 암호명의 핵무기 개발계획을 추진, 1970년경 성공을 거뒀다. 여기에 참여한 기술자 한 명이 영국 반전주의자들에게 기밀을 누설했다고 1986년 본국으로 납치돼 국제적 물의를 빚은 일이 있다. 바누누란 이름의 이 죄수는 간첩죄로 12년간 독방에서 면회조차 못하고 지내다가 몇 달 전 겨우 산책을 허락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핵무기 보유에 대해 이스라엘은 긍정도 부정도 않고 버틴다. 긍정했다가는 서방세계, 특히 미국의 여론이 악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핵무기 통제 압력이 들어올 뿐 아니라 미국의 군사-경제원조도 끊길 염려가 있다. 그래서 밖에서 자기네 핵무기를 갖고 무슨 소리를 하든 아무 대꾸가 없다. 주변 아랍국들은 이스라엘 핵무기에 국제규제를 가해야 한다고 야단이지만 미국이 주도권을 가진 국제기구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고립된 나라는 핵무기에 매력을 느낀다. 남한도 70년대 말 핵무기 개발을 추진했다는 통설이 얼마큼 확인되고 있는데, 이때는 월남 패망과 주한미군 철수 시작으로 안보위기감이 높은 때였다. 북한이 공산권 붕괴 후 핵무기 개발에 나선 것도 소련이란 방패가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소련 해체로 북한은 천애고아 같은 신세가 됐다. 군사-경제 양면에서 소련은 절대적 의지의 대상이었다. 무기 사올 돈이 없는 북한의 군사력은 몇 년 안 가 장비의 낙후로 제풀에 무너질 전망이다. 개방으로 산업경제를 일으킬 길도 열심히 알아봐 왔지만 미국의 경제제재가 움직이지 않고 있다.

 

4년 전 제네바에서 합의된 4개항 중 하나는 북한과 미국의 관계정상화였다. “합의 후 3개월 내 양측은 통신 및 금융거래에 대한 제한을 포함한 무역 및 투자제한을 완화시켜 나감”이란 대목은 6-25 이래의 경제제재를 풀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합의 몇 주일 후 공화당이 미국 선거에서 대승, 의회를 장악한 후 미국 측 의무 이행을 늦춰오고 있다.

 

도적을 쫓아도 막다른 골목으로는 쫓지 않는 것이 옛사람들의 지혜였다. 북한이 무기개발에 매달리는 것은 막다른 골목으로 뛰어드는 짓이다. 외화획득도, 자기방어도 그 길밖에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번 한미정상회담에서 한국 측 햇볕정책을 미국 측이 수긍하고 금창리 핵 의혹 문제에서도 한 발 물러선 것은 남북관계의 큰 진전이다. 상대방을 비난만 하기보다 내 할 도리를 잘 살펴야 싸움을 피할 수 있다.

 

 

Posted by 문천

 

남북 간의 화해 전망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장면은 2000년과 2007년의 정상회담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가장 긴밀한 접촉이 이뤄진 것은 1990년 9월에서 1992년 9월 사이에 3박4일씩 여덟 차례 열린 고위급회담이었다. 남북 총리를 수석대표로 하는 대규모 대표단이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2년간 회담을 이어간 것은 남북 간의 화해와 관계 발전을 위한 양측의 노력이 최대한 서로 어울린 일이었다.

 

이 노력의 결과 1991년 12월 제5차 회담에서 기본합의서(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가 채택되었다. 한반도 평화를 위해, 그리고 민족 재통일의 희망을 위해 남북의 정권이 이뤄낸 최고최대의 성과였다. 기본합의서 채택 후에는 그 실행을 위한 노력이 이어졌다. 그러나 1992년 9월 중순의 제8차 회담 이후 고위급회담이 중단되고 기본합의서의 실행 노력도 중단되고 말았다.

 

비록 바로 실행되지는 못했으나 이 기본합의서는 이후 남북관계 전개를 위한 하나의 지표 노릇을 해왔다. 양측 정권이 협력을 거부하는 상황에서는 합의서가 무시되었지만, 협력을 지향하는 상황이 오면 이 합의서를 재출발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아직까지도 남북 간 화해와 협력을 위한 ‘기본’ 원칙을 가장 포괄적으로 담은 문서로서 가치를 갖고 있다. 이 합의가 이뤄진 과정을 더듬어봄으로써 그 가치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자 한다.

 

김해원은 <북한의 남북정치협상 연구>(선인 펴냄) 129쪽에서 “1988년 12월 28일 강영훈 국무총리가 북한 정무원총리 연형묵에게 ‘남북고위당국자회담’을 제의한데 대해 북한이 이를 변칙 수용함으로써 이루어졌다.”고 고위급회담의 출발점을 설명한다. 남북관계 자료와 연구물 중에는 남측의 주도권을 강조하면서 북측의 행위를 가려놓아 균형 잡힌 이해에 어려움을 주는 것이 많다. 강영훈의 제의는 40여 일 전인 11월 16일 연형묵의 부총리급 고위급 정치군사회담 제안에 대한 대응으로 나온 것이었다.

 

남한 정부는 서울올림픽을 무사히 치러낸 후 그 시점까지 큰 성과를 거둬온 ‘북방정책’의 초점을 남북대화에 옮겨 맞출 단계에 와 있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북한이 고위급회담에 나선 뜻이 어디에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적절한 설명을 아직 찾아보지 못했다. 국제관계에서 수세에 몰린 북한이 하나의 돌파구를 모색한 것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부총리급이든 총리급이든 고위급회담을 열자는 데 남북의 뜻이 맞았지만, 실제로 회담을 여는 데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1989년 2월 8일 첫 예비회담으로부터 1년 반이 지난 1990년 7월 26일 제8차 예비회담에 이르러서야 겨우 ‘남북고위급회담 개최에 관한 합의서’가 이뤄지고 이에 따라 1990년 9월 4일 첫 본회담이 열리게 된다.

 

왜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렸을까? 여러 가지 요인이 얽혀서 작용했을 텐데, 한 가지 분명한 요인이 있었다. 팀스피릿훈련이다. 예비회담만이 아니라 본회담에서도 팀스피릿은 계속 지연 요소로 작용했다. 예비회담과 본회담의 날짜만 살펴봐도 이 점이 분명하다.

 

제1차 예비회담 1989. 2. 8

제2차 예비회담 1989. 3. 2

제3차 예비회담 1989. 10. 12

제4차 예비회담 1989. 11. 15

제5차 예비회담 1989. 12. 20

제6차 예비회담 1990. 1. 31

제7차 예비회담 1990. 7. 3

제8차 예비회담 1990. 7. 26

 

제1차 본회담(서울) 1990. 9. 4~7

제2차 본회담(평양) 1990. 10 17~20

제3차 본회담(서울) 1990. 12. 11~14

제4차 본회담(평양) 1991. 10. 22~25

제5차 본회담(서울) 1991. 12. 10~13

제6차 본회담(평양) 1992. 2. 18~21

제7차 본회담(서울) 1992. 5. 5~8

제8차 본회담(평양) 1992. 9. 15~18

 

해마다 봄이 오면 대화가 중단되는 것이다. 그랬다가 1989년에는 10월에, 1990년에는 7월에, 1991년에는 10월에야 회담이 재개되었다. 1992년에만 봄을 타지 않았다. 그 해에는 팀스피릿훈련이 없었다는 사실을 독자들은 기억할 것이다.

 

대화 중단과 재개가 거듭되는 상황을 김해원은 이렇게 설명했다.

 

‘팀스피릿’훈련과 관련한 치열한 공방에도 불구하고 남북 쌍방은 차기 회담을 1989년 4월 12일 개최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북측이 회담 개최에 임박하여 회담연기를 제의하는 바람에 결국 제3차 예비회담은 7개월 뒤인 1989년 10월 12일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공개리에 진행되었다. 남측 송한호 수석대표는 지난 1, 2차 예비회담에서 팀스피릿훈련 문제를 들고 나와 회담의 진전을 가로막고 회담을 일방적으로 장기간 공전시킨 데 대해 북측에게 책임을 추궁하면서 온당치 못한 대화 자세의 시정을 요구하였다.(<북한의 남북정치협상 연구> 135쪽)

 

남북한은 1990년 1월 31일 개최된 제6차 예비회담에서 제7차 회담일자를 3월 7일 개최키로 합의한 바 있으나 북측은 2월 7일 남북체육회담 제7차 본회담을 끝으로 2월 8일 이른바 남북국회회담 준비접촉-남북고위급회담 예비회담-남북적십자 실무대표접촉 북측 대표단 명의의 연합성명을 발표, 모든 대화를 중단하였다. (...) 남측은 6월 25일 대북전통문을 통해 남북고위급회담 제7차 예비회담을 7월 3일에 개최하자고 수정제의하였으며, 이에 북측이 동의해 옴으로써 5개월 만에 남북대화가 다시 열리게 되었다.(같은 책 140-141쪽)

 

북측은 책임연락관 접촉을 연기시킨 후 곧이어 제4차 남북고위급회담의 개최를 연기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북한은 1991년 2월 18일 평양방송을 통해 발표된 남북고위급회담 북측 대표단 성명에서, 남측의 걸프전쟁과 관련한 경계태세와 팀스피릿 합동군사연습 실시로 25일 평양에서 개최될 예정인 제4차 남북고위급회담이 예정대로 열릴 수 없게 되었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하였다. 북측은 성명에서 남측이 “남조선 전역에 비상전시체제를 선포하고 사상 유례 없는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고 사실과 다른 주장을 했는가 하면 팀스피릿 합동군사훈련에 대해서도 “위험한 전쟁접경에로 끌어가고 있다”고 비난하였다.(같은 책 147쪽)

 

김해원이 대화 중단의 책임을 북측에 씌우고 싶어 한다는 사실은 마지막 인용문에서 특히 분명하게 드러난다. 남한 정부는 한반도 평화를 위해 대화를 추구하는데 북한이 별 것 아닌 꼬투리를 잡아 대화를 회피한다는 것이다.

 

핵공격을 핵심 내용으로 하는 세계 최대의 연례 군사훈련이 자신을 겨냥하여 벌어지는 것을 별 것 아닌 일로 볼 수 있을까? 고위급회담과 그 예비회담이 팀스피릿 계절마다 중단된 자취를 보며 북한이 얼마나 팀스피릿을 싫어하고 무서워했는지 새삼 실감이 난다. 김해원의 주장처럼 북한이 대화를 회피하는 자세였다면 왜 애당초 회담에 임했겠는가? 북한은 예비회담 재개를 앞둔 1990년 5월 31일 군축제안에서 팀스피릿 중단을 요구했다. 그 후의 회담에서 완전 중단이 어렵다면 일시적으로라도 중단해 달라고 요청한 것은 그야말로 ‘애걸’이었다. 팀스피릿 중단을 얼마나 간절히 원했는지 알아볼 수 있다.

 

북한은 제1차 본회담에 앞선 90년 5월 31일 ‘조선반도의 평화를 위한 군축제안’을 내놓았다. 전반적인 내용은 88년에 발표한 ‘포괄적 평화방안’과 흡사한 것이었지만, 10개항에 걸친 항목에서 직통전화 개설 및 비무장지대의 평화지대화 등 남북신뢰조성을 앞에 배치한 것이 주목되었다. 그러나 군사훈련에 대한 시각 차이는 현저했다. 남한은 군사훈련 실시를 전제로 상호 통보와 참관을 신뢰구축 조치로 제시한 반면에, 북한은 대규모의 군사훈련 실시 자체를 중단해야 한다고 맞섰다. 이는 한미연합군의 팀스피릿 훈련 중단을 겨냥한 것으로, 이에 따라 팀스피릿은 이후 기본합의서 협상은 물론이고 남북미 3자관계의 최대 변수로 등장했다.

 

북한은 90년 7월 8차 예비회담과 서울에서 열린 9월 1차 본회담에서 자신의 군축 제안을 바탕으로 군사문제를 풀자고 요구했다. 또한 팀스피릿 훈련을 영구히 중단하는 것이 어렵다면, 회담 활성화 차원에서 2-3년간이라도 중단해달라고 요구했다. 남한은 노태우 정부의 ‘민족공동체통일방안’에 기초한 8개항의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기본합의서(안)’을 제시하면서 교류협력과 신뢰구축 우선론을 제시했다. 그러자 북한은 남한측의 선 신뢰구축론에 대한 반박 논리를 내놓았다. 90년 12월에 열린 3차 본회담에서 북한은 남한의 제안이 극히 일반적인 방향만 밝힌 ‘신뢰조성 우선론’이라고 비판하면서 군축을 중심으로 한 군사 문제 해결을 요구했다. 91년 10월 4차 본회담에서도 군축을 신뢰구축 이후로 보는 것은 문제의 핵심을 피하는 소극적인 태도라고 비판했고, 91년 12월에 열린 5차 본회담에서도 남측이 제시한 신뢰구축 단계만도 10여년이 걸린 유럽식 경험을 적용하는 것은 한반도의 실정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정욱식-김종대 “한반도 군축과 군비통제의 새로운 접근"(진보신당 정책용역보고서, 2011) 35쪽)

 

북한은 ‘군비축소’의 선행을 요구한 반면 남한은 ‘신뢰구축’이 이뤄진 후에 군비축소가 가능하다고 맞섰다. 그래서 고위급회담의 1차 목표인 기본합의서에도 북한은 ‘불가침선언’을 꼭 넣자고 주장한 반면 남한은 ‘화해와 협력’만을 넣자고 주장했다. 남한이라 해서 군비축소를 반대할 입장은 아니었다. 그러나 군비축소가 북한에게 더 절박한 과제였기 때문에 군비축소를 가능한 한 뒷전으로 돌리려 한 것이었다.

 

1991년 12월에 채택된 기본합의서 이름에 화해, 불가침, 교류협력이 다 들어간 것은 양측 주장을 절충한 결과였다. 그보다 1년 전인 1990년 12월의 제3차 회담에서 이와 거의 같은 내용을 북측이 제안했다. 그런데 남측이 ‘불가침’을 넣으면 안 된다고 고집해서 타결이 1년 늦어진 사실을 임동원은 아쉬워한다.

 

한편 북측은 지난번 평양회담 2일차 회의에서 우리측이 수정제의한 바 있는 ‘남북 간의 화해와 협력을 위한 공동선언’과 북측이 제의한 ‘불가침선언’을 통합하여 ‘남북 불가침과 화해-협력에 관한 선언’이라는 하나의 문건으로 채택하자는 수정안을 제시했다. 사실 우리측의 관계개선 기본합의서 내용과 북측의 수정안 내용은 많이 근접해 있었다. 명칭도 나중에 채택된 문서명칭인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와 근사한 것이었다. 북측은 분명히 합의를 원했고, 우리측에서 협상할 의사만 있었다면 얼마든지 타결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정상회담 개최를 원했던 우리는 ‘불가침’을 문제삼아 지연 전술을 구사함으로써 협상 타결의 좋은 기회를 스스로 포기했다. 큰 실책을 범한 것이다. 결국 정상회담도 성사시키지 못한 채 기본합의서의 채택이 1년이나 지연되는 파행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됐다.

 

그 후 부속합의서를 채택했을 때는 이미 노 대통령의 집권말기였고, 대통령 선거전이 본격적으로 불붙기 시작하자 우리 정부가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일련의 의욕적인 사업을 펼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전향적인 대북정책을 추진했던 노태우 정부는 남북합의사항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시간을 영영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피스메이커> 202-203쪽)

 

1년이 지난 후 남측은 ‘불가침’을 받아들였다. 1992년도 팀스피릿훈련 중단도 결정했다. 그리고 북한에게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인 남한 배치 핵무기 철수가 이뤄졌다. 유엔 동시가입, 기본합의서에 이어 연말에는 남북 핵협정까지, 일련의 한반도 긴장완화 조치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앞 회에 인용한 돈 오버도퍼의 핵협정 체결 상황에 대한 소감처럼, 북한은 남한 관리들이 놀랄 만큼 이 진행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1992년 1월 21일 김용순 로동당 국제비서와 아놀드 캔터 국무부 차관의 뉴욕회담에 북한은 어떤 기대를 걸고 있었을까. 미국과의 첫 고위급회담을 가지면서 유엔회원국이 된 보람을 느끼지 않았을까? 40년 전의 전쟁 이래 북한의 존재를 위협해 온 숙적을 상대로 시비를 따지기보다는 적대관계의 종식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으리라는 것을 반년 이상 이어지고 있던 북한의 행보에서 짐작할 수 있다. 소련의 붕괴와 중국의 노선 선회 등 동맹관계의 변화도 적대관계의 해소를 바라는 북한의 입장을 더욱 절박하게 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은 이 회담에서 극히 냉담한 입장을 보였고, 뒤이어 미국의 압도적 영향을 받는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북한에 대해 고압적이고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다. 보고서 내용에 대한 불신을 이유로 특별사찰을 요구한 것은 IAEA 역사상 없던 강압적 정책이고, 핵무기 미보유국의 불이익을 보상하는 NPT 조약정신과도 배치되는 조치였다. 이 문제가 제기되어 있는 상태에서 1992년 10월 팀스피릿 재개 방침 발표는 1년 남짓 계속되어 온 북한의 국제사회 진입 노력에 결정적인 타격이었다.

 

북한의 반발은 예견된 것이었다. 발표 수위는 점차 높아지면서도 거기에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 담겨 있었다. 10월 12일에는 한미 양국의 발표를 비난하면서 철회를 요구했고, 12일 후에는 팀스피릿 훈련 강행시 남북대화의 동결을 경고했다. 11월 2일에는 이 훈련 재개시 “핵안전조치협정 이행에 새로운 엄중한 난관이 조성되게 될 것”이라며 IAEA 사찰 거부를 경고했고, 11월 3일에는 남북공동위원회 제1차 회의 불참을 통보했다. 그러면서도 11월 말까지 팀스피릿 훈련 재개 방침을 철회하면 12월에 공동위원회 회의를 열 수 있다고 말했다. 11월이 지나도 한미 양국 입장에는 변함이 없자, 12월 15일을 새로운 시한으로 제안했고, 그래도 호응이 없자 이듬해 1월 29일 남북대화 중단을 선언하고 말았다.

 

급기야 북한은 1993년 3월 팀스피릿 훈련 재개 및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특별사찰 결의를 강력히 비난하면서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했다. 남북기본합의서와 그 부속 합의서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남북관계는 물론이고 한반도 핵위기가 전면화되고 만 것이다. (정욱식-김종대 “한반도 군축과 군비통제의 새로운 접근" 35-36쪽)

 

북한이 이 방침 철회를 위해 지극정성을 다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팀스피릿훈련을 무서워했는지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다. 북한은 NPT 탈퇴 이유로 IAEA의 특별사찰 요구를, 남북대화 중단 이유로 팀스피릿훈련 재개를 나란히 제시했지만, 그 과정을 살펴보면 팀스피릿 문제가 더 결정적인 것이었음을 알아볼 수 있다. 팀스피릿 재개 방침만 나오지 않았다면 특별사찰 요구에는 훨씬 더 끈기 있는 대응자세를 보였을 것이다.

 

 

Posted by 문천

 

시어더 포스톨(Theodore Postol)이란 사람이 있다. 1946년생으로 MIT에서 원자력공학 학위를 받은 후 연구소, 의회, 국방성을 거쳐 1980년대 말부터 스탠포드대학 등 학계에서 군사기술 관련 연구에 종사해 온 사람이다. 1992년 걸프전에서 패트리어트미사일 적중률에 대한 정부와 업계의 선전이 거짓된 것이라고 지적하고 나선 후 미국 미사일방어망(MD, Missile Defense)사업의 앙숙 노릇을 해왔다.

 

MD란 적이 발사한 미사일을 요격하는 방어방법이다. 엄청난 속도로 비행하는 미사일을 요격한다는 것은 “총알로 총알을 맞추는” 것과 같이 어려운, 고도의 기술과 엄청난 비용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사업이 채택만 된다면 방위산업에게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고 정-관계에도 특급 떡고물이 쏟아질 수 있으므로 미국 집권세력에게는 대단히 유혹적인 사업이다. 개념도 명쾌해서 국민에게 선전하기도 쉽다. 누가 미국으로 미사일을 발사해도 MD로 막아주겠다는데, 세금 좀 잡아먹는다고 반대할 국민이 많겠는가.

 

MD에는 두 가지 중요한 문제점이 있다. 그 하나는 효과적인 MD가 만들어질 경우 군사적 균형이 근본적으로 무너져 세계평화에 위협이 된다는 점이다. 1949년 소련의 핵실험 성공 이후 세계가 핵전쟁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미-소간의 핵균형 덕분이다. 미국이 MD 구축에 성공해 보복의 위험을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된다면 외부의 적에게 마음 놓고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미국이 꼭 나쁜 나라라서 이런 걱정을 하는 게 아니다. 군사력의 비대칭 상태가 전쟁을 유발하기 쉽다는 것은 군사학의 기본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대다수 미국인은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 미국이 절대적인 힘을 가지는 것이 미국인에게 좋은 일이라고, 세계평화가 깨지든 말든 미국이 이기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니 미국 정치계에서도 이 문제가 무시되기 쉽다.

 

또 하나 문제는 이와 달리 미국인들이 심각하게 여기고 따라서 미국 정치계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세금을 쏟아 부어도 효과적인 MD 구축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포스톨 같은 MD 반대자들은 이 문제의 지적에 주력해 왔다.

 

걸프전쟁에서 이라크의 대표적 공격력이 스커드미사일이었다. 부시(애비) 대통령은 스커드 요격에 사용된 패트리어트미사일 제조업체 레이시언사 공장을 방문한 자리에서 요격 성공률이 97퍼센트를 상회했다고 자랑했고, 미 육군도 요격 성공률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80퍼센트, 이스라엘에서 50퍼센트에 달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그런데 포스톨은 의회의 한 위원회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이들 예비적 연구에서 나타난 증거에 따르면 요격 성공률은 10퍼센트에도 훨씬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0퍼센트일 가능성도 있다.”

 

나중에 의회 소위원회에서 채택한 보고서에는 이런 대목이 들어있었다.

 

“패트리어트미사일 체제는 걸프전에서 미국 국민들이 믿도록 오도된 것과 같은 대단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라크가 발사한 스커드미사일 중 패트리어트미사일로 요격에 성공한 것이 몇 개를 넘어선다고 볼 만한 증거가 거의 없고, 그 몇 개에조차 의문의 여지가 있다. 미국 국민과 의회는 전쟁 중부터 전쟁 후까지 행정부와 레이시언사를 대표하는 사람들의 일방적 성공 주장에 오도되어 왔다.”

 

미사일 요격이란 이론적으로는 가능한 것이다. 총알로 총알을 맞추는 것이 이론적으로 가능한 것과 같이. 그런데 공격미사일 발사에 비해 월등한 기술이 필요하고, 설령 그런 기술이 확보된다 하더라도 엄청난 비용이 드는 것이다. 아무리 충분한 기술을 갖추고 있다 하더라도 유의미한 성공률을 가진 요격미사일 발사에는 표적으로 하는 공격미사일 발사보다 최소한 백 배 이상의 비용이 든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상식이다.

 

이런 상식을 내가 파악한 것은 크레이그 아이젠드래스 등의 <미사일디펜스>(들녘 펴냄)를 번역한(천희상과 함께) 덕분이다. 2002년에 나온 책이지만 MD 사업의 기본 성격을 살피는 데는 충분히 도움이 된다. 이 책에 이런 대목이 있다.

 

미사일방어망의 역사를 뒤돌아보면, 각 시기는 분통이 터질 정도의 유사성으로 그 직전의 시기를 되풀이한다.

 

1. 첫째, 이러저러한 미사일방어망 개발에 참여하고 있는 과학자-무기연구소-방산업체-싱크탱크-정치인의 연합 그룹들이 있다. 이 연합 그룹들은 서로 반주를 맞춰가며 군사적 위협을 과장한다. 그러면서 개발 중인 미사일방어망의 조기 배치를 위해 비현실적인 주장들을 늘어놓는다. 그들은 종종 경쟁적으로 치열한 로비 활동을 벌여 백악관과 의회에서 자신들이 내세우는 미사일 방어망에 대해 어느 정도 지지를 얻어낸다.

 

2. 예산이 책정되고, 무기연구소. 방산업체와 대형 계약을 맺는다. 정치인들에게는 선거 운동 자금과 지역구 일자리가 약속된다. 계속 연구와 실험이 늘어나고, 무기 연구소와 방산업체는 그 결과들을 왜곡한다. 부정적인 연구 및 실험 결과는 정치적으로 은폐된다. 미사일 방어망이 배치 단계로 접근하면, 그로 인한 군축협정과 대외관계에 대한 잠재적 해악도 무시된다.

 

3. 옹호자들의 주장과 달리 그 미사일방어망이 기대 이하라는 것이 마침내 밝혀지고 예산이 대폭 삭감된다. 또다시 과학자-무기연구소-방산업체-정치인의 연합 그룹들에 의해 새로운 미사일방어망 아이디어가 제출된다. 그리고 이 역사의 새로운 시기가 다시 시작된다.

 

1969년 시작된 미-소간의 제1차 전략무기제한회담(SALT I, Strategic Arms Limitation Talks I)에서 MD가 핵심적 의제가 된 것은 위에 말한 두 가지 문제점(군사적 불균형을 초래할 위험과 엄청난 비용) 때문이었다. 그래서 탄도탄요격미사일(ABM, Anti-Ballistic Missile) 조약이 1972년 두 나라 사이에 체결되었다.

 

ABM조약을 뒷받침한 원리는 MAD(Mutually Assured Destruction, ‘상호확증파괴’로 흔히 번역되는데 만족스럽지 못하다. ‘공멸의 공동인식’이 더 정확할 것 같다.)였다. 어느 쪽이 선손을 걸든 양쪽 다 감당할 수 없는 피해가 분명히 예상되기 때문에 억지력이 작동하는 군사력 균형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1970년대 초 데탕트 상황의 ABM조약 체결은 MAD가 평화 유지를 위한 최선의 현실적 원리라는 데 양측이 동의한 결과였다.

 

ABM조약의 적용 대상은 전략무기에 대한 요격기술이었다. 전술무기에 대한 요격기술은 그 제약을 받지 않았다. 1980년대 레이건 행정부가 들어섰을 때 힘을 숭상하는 레이건은 그때까지 우세해진 요격기술을 발판으로 전략방어계획(SDI, Strategic Defense Initiative)을 선포했다. ABM조약을 형식적으로만 존중하면서 실질적으로는 MD 개발을 통한 군사력 무한경쟁을 선언한 것이었다.

 

반대자들이 ‘별들의 전쟁’이라고 조롱한 SDI가 1983년 선포되었을 때 소련은 격렬하게 반대했다. SDI 폐기는 소련의 가장 중요한 외교목표가 되었다. 1986년 레이캬비크 정상회담에서 레이건이 고르바초프에게 SDI가 완성된 후 소련에게도 나눠줌으로써 불균형을 피할 생각이라고 말하자 고르바초프는 진지한 제안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대꾸했다.

 

미국이 냉전 해소 직후 일으킨 걸프전쟁(1991년)의 목적 하나가 군사기술 업그레이딩에 있었다고 보는 비판적 시각이 있다. 실제로 미국은 최신 군사기술의 과시에 큰 노력을 기울였고, 패트리어트 요격기술을 부각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포스톨을 비롯한 비판자들의 지적과 몇몇 관계자들의 내부고발로 인해 애초 주장했던 높은 성공률을 깎아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실패가 부시의 재선 실패에 일부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MD 사업에 냉담한 클린턴 행정부는 MD 사업을 축소하려 했다. MD 추진세력은 MD 사업의 현상 유지를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2001년 부시(자식) 행정부가 들어서자 MD 사업 부활의 길이 열렸다. 2001년 12월 부시는 ABM조약 폐기를 소련의 조약 승계국인 러시아, 벨로루시, 우크라이나와 카자흐스탄에 통보했고, 6개월 후 조약이 폐기되었다. 미국 역사에 극히 드문 일방적 조약 폐기 조치였다. 그 후 MD 사업은 거침없이 확장되었다.

 

1972년 ABM조약 협상에 참여했던 존 라인랜더는 이 조약의 폐기로 “이 세계가 핵확산의 효과적 억지를 위한 법적 장치를 상실했다.”고 한탄했다. ABM조약은 냉전기 군비경쟁 억제를 위한 가장 효과적인 장치였다. 그 폐기는 핵무기의 자유경쟁 선언이었다. 이 조치가 9-11테러 직후에 취해졌기 때문에 부시 정부가 뉴욕테러를 조작했다고 하는 음모론 중에는 ABM조약 파기가 테러 조작의 중요한 이유 중 하나라는 주장도 나왔다.

 

ABM조약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조약 파기가 핵군축 방침에 어긋나는 방향이라는 사실 정도는 알아보지 못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들을 무마하기 위해 부시 정부는 ‘불량국가(rogue states)’의 위협을 제시했다. 무책임한 국가나 테러세력의 핵위협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꼭 들어맞는 모델로 북한이 이용되었다.

 

1993년 제1차 ‘북핵위기’ 때 민주당은 백악관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의회에서는 열세였다. 어떤 정책의 추진을 위해서도 공화당의 전면적 반대를 피해야 했다. MD 사업을 마음대로 축소시키지 못하고 최소한 현상유지를 허용해야 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북한의 국제사회 진입을 도와주는 것이 세계평화를 위해 바람직하다는 인식이 클린턴 행정부 일각에 있었지만, 강한 힘을 갖지 못했다. 한편 세계평화를 바라지 않는 세력의 견제는 강했다. 북한과의 대화를 주장하는 국무부 관리들과 이에 반대하는 국방부 관리들 사이의 갈등 배경에는 미국의 군사정책에 대한 근본적 의견대립이 작용하고 있었다. 북한이 결국 국제사회 진입에 실패하고 ‘불량국가’의 대열에 들어선 것은 미국 군사주의의 승리였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