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0년대에 출간된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1780-1831)의 <전쟁론>은 지금까지도 전쟁에 관한 뛰어난 저술로 중시되고 있다.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장(延長)”이란 말은 나처럼 그 책을 읽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클라우제비츠의 동년배 중 전쟁에 관한 글로 오랫동안 더 큰 명성을 누린 사람이 하나 있다. 앙투안-앙리 조미니(1779-1969). 조미니의 글은 19세기 후반 내내 각국 사관생도들의 가장 중요한 참고서 노릇을 했다. 그런데 오늘날 조미니의 이름은 거의 잊어진 반면 클라우제비츠의 이름은 아직도 쟁쟁하다. 이 역전 현상을 린 몬트로스는 <War through the Ages>(1960년)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이렇게 된 결과는 (...) 조미니가 전쟁의 체계를 세운 반면 크라우제비츠는 전쟁의 철학을 세운 것이라는 사실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조미니의 업적이 새로운 무기의 출현으로 인해 퇴색된 반면 클라우제비츠의 사상은 그 무기의 뒤에서 작동하는 전략에 계속해서 영향을 끼치고 있다.” (<Wikipedia> "Carl von Klausewitz")

 

조미니와 클라우제비츠가 전쟁의 성격을 논한 것은 나폴레옹전쟁의 경험 위에서였다. 전쟁은 인류가 문명 초기부터 벌여 온 오래된 활동이었지만, 19세기 초엽의 나폴레옹전쟁을 계기로 그 실제 성격이 크게 바뀌었다. 두 사람이 청년기에 겪은(한 사람은 프랑스군에서, 또 한 사람은 프러시아군에서) 전쟁의 성격은 그들이 소년기까지 듣던 것과 크게 다른 것이었기 때문에 이 새로운 전쟁의 성격을 논하는 일에 나선 것이었다.

 

나폴레옹전쟁으로 시작된 ‘근대적 전쟁’의 특성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조미니가 천착한 전술적 특성은 약 1백 년간, 제1차 세계대전 때까지 큰 틀을 지켰다. 한편 클라우제비츠가 정리한 전략적 내지 철학적 특성은 아직까지도 상당한 유효성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근대적 전쟁의 가장 큰 특성은 대량살상이다. 중세의 전쟁에서는 전투원, 즉 군인이 전쟁의 주체였다. 전쟁은 전투원끼리 상대방을 쓰러트리고 자신이 쓰러지지 않으려는 노력을 통해 진행되었다. 그런데 근대적 전쟁에서는 적군 전투원이 아니라 적군이 존재하는 공간이 공격 대상이 되었고, 전투원은 전쟁의 주체가 아닌 객체가 되었다. 근대의 군인은 적과 맞서는 ‘전사(戰士)’가 아니라 지휘관이 원하는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도구가 된 것이다.

 

대량살상, 대량파괴는 대량생산과 짝을 이루는 근대문명의 특성이다. 생산과 파괴가 서로 반대인 것 같지만, 사실 대량생산은 자연파괴를 전제로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파괴적 성격이 서로 이어진 것이다.

 

폭약과 대포 등 군사기술의 발달에 따라 이 특성은 갈수록 더욱 심화되었다. 폭약의 발달은 결국 핵무기에 이르고 대포의 발달은 미사일에 이르렀다. 오늘날에 와서는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누군가의 손가락이 버튼을 누르는 데 따라 한 도시가 통째로 파괴되고 그 안의 모든 생명이 소멸할 수 있는 지경에 와 있다.

 

인간 사이의 다툼은 문명 발생 이전부터 있었던 것이다. 무리지어 사는 동물은 같은 종 내에서 서로 죽이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하는 학설이 맞는 것이라면 다툼이 의도적인 살상을 수반하게 된 것은 문명 발생에 따른 현상이라고 볼 수 있겠다. 아무튼 전쟁의 잔혹성이 문명 발달에 따라 심해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근대문명에서 전쟁의 잔혹성이 극도에 이른 것이 그 귀결이다. 인도주의를 근대문명의 특성 중 좋은 것으로 꼽는데, 근대문명의 잔혹성이 거울에 비쳐진 그림자일 뿐이다. 가장 대표적인 인도주의 운동인 적십자운동은 1859년 솔페리노전투의 참상에 앙리 뒤낭이 충격을 받은 데서 시작한 것이다. 부상자가 전면적으로 버려지거나 학살당하는 잔혹성이 근대 이전 전쟁의 역사에 없던 것이기 때문에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인간 존중의 정신이 짓밟히는 일은 언제나 있던 것이지만 근대 이전에는 그런 일이 개별적인 사건일 뿐이었는데, 근대 들어 인간 파괴가 일반적 현상이 되어버리는 데 대한 반동으로 인도주의가 일어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제1차 세계대전과 다른 점 하나가 적군의 ‘악마화’에 있었다. 일본은 연합군을 ‘귀축(鬼畜)’이라 불렀고, 연합군은 독일군과 일본군의 비인간적 만행에 치를 떨었다. 이 악마화는 극도로 잔혹해진 전쟁 수행방법을 정당화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이다. 핵무기 개발이라는, 그야말로 악마적인 작업이 그런 분위기 속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전쟁이 끝날 무렵에 열린 포츠담회담에서 원자폭탄이 모습을 나타냈다. 회담 개막 전날인 1945년 7월 16일 미국의 시험 폭발이 성공했던 것이다. 원자폭탄이 일본을 항복시키기 위해서보다도 미-소 대결의 도구로 더 큰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는 사실을 회담 진행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트루먼은 도착 직후 시험 폭발 사실을 처칠에게 알린 반면 스탈린에게는 7월 25일에야 밝혔다. 소련을 압박하는 무기로 원자폭탄을 내놓은 것이다.

 

독일 항복 직전인 1945년 3월 15일 독일 동부 오라니엔부르크의 한 공장에 미군이 엄청난 폭격을 퍼부은 일이 있다. 1506톤의 고성능폭탄과 178톤의 소이탄으로 철저하게 파괴했다고 한다. 우라늄 정제공장이었다. 소련군의 그 지역 진주가 임박하자 그 탈취를 가로막기 위해 이례적인 집중폭격을 행한 것이다. 핵무기 개발은 독일에서 1939년 제일 먼저 시작되었는데 급박한 전쟁 상황 때문에 잘 진척되지 못하고 있다가 전쟁 막바지에 연합군의 경쟁적 탈취 대상이 되고 말았다. 미-소 핵 경쟁은 여기에서 시작된 것이다.

 

미국이 원자폭탄 제작에 먼저 성공한 것은 프랑스와 영국의 기술을 전수받은 위에 독일의 핵기술을 더 많이 탈취하고, 막강한 경제력이 뒷받침했기 때문이다. 원자폭탄은 전쟁의 개념을 바꿔놓는 무기였다. 미국이 시험 폭발 성공을 공표한 이튿날 발표한 포츠담선언은 “신속하고 철저한 파괴(prompt and utter destruction)”의 위협 아래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다. 뒤이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폭탄의 위력을 과시하자 소련은 군사적 열세를 자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49년 가을 시험 폭발에 성공할 때까지 소련은 모든 분쟁 현장에서 미국에 밀리게 되었다.

 

냉전기를 통해 핵무기는 미-소 대결의 도구로서 일차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미-소의 엄청난 보유량 앞에서 다른 나라들의 핵무기에는 큰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분량이라도 핵무기 보유는 전략적 입장의 대칭성을 보장해준다. 대량파괴에 대한 보복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도 여기에 목적이 있는 것이다.

 

1968년의 핵확산금지조약(NPT)의 실제 목적은 핵무기 보유국의 전략적 우위를 보장하는 것이다. 조항 중에는 모든 가입국이 궁극적인 핵무기 전면 폐기를 위해 “성의를 다해 협상에 임할” 의무를 명시한 곳이 있지만 보유국들이 구속력을 인정하는 기색이 전혀 없다. 보유국 스스로 핵무기를 폐기한 사례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아파르트헤이트 철폐와 유엔 복귀에 임해 시행한 것 하나뿐이다.

 

미-소 대결의 종식에 따라 핵무기 대량보유의 필요성도 소멸했다. 그러나 핵무기 철폐가 바로 이뤄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1차적 장애는 미국인의 집착이다. “핵무기 없는 세계”를 제창한 오바마 대통령의 2009년 프라하선언 이후에도 미국인의 여론은 반반으로 갈려 있다고 한다. (<Wikipedia> "Nuclear Weapons")

 

핵무기에 대한 집착을 정당화해주는 논리도 개발되어 왔다. 핵무기의 존재가 잠재적 파괴세력에 대한 억지력으로 평화를 보장해준다는 ‘핵 평화(nuclear peace) 이론’ 같은 것이다. 최근에는 더 세련된 ‘안정-불안정 패러독스(stability-instability paradox) 이론’도 나왔다. 핵무기 보유국 간의 갈등이 전면적 대결로 터질 위험을 줄인다는 면에서 ‘안정’의 효과를 갖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소규모 충돌은 더 쉽게 일어나기 때문에 ‘불안정’의 측면을 갖는다는 것이다. 한반도 상황과 관련해 이 이론에서 주목할 점은 보유국과 미보유국 간의 갈등이 핵무기의 존재 때문에 증폭되는 경향을 가진다고 하는 것이다.

 

미국인들의 집착에도 불구하고 냉전 종식은 핵무기 철폐로 여론이 돌아서는 계기가 되었다. 헨리 키신저나 조지 슐츠 같은 냉전시대의 대결주의자들이 좋은 예다. 키신저는 이런 말을 했다.

 

“억지력의 고전적 정의는 도발자와 악한들이 행위의 결과를 두려워하게 만드는 것이다. 자살폭탄이 횡행하는 세계에서는 그런 계산이 통하지 않는다.”

 

슐츠는 이런 말을 했다.

 

“어떤 자들이 자살공격에 나서는지 생각해 보라. 그리고 그런 자들 손에 핵무기가 들어간다고 생각해 보라. ‘억지력’이란 개념이 성립할 여지가 없다.”

 

전략적 비대칭성을 고착시키는 NPT가 최소한의 효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미보유국에 대한 보상 조항이 있기 때문이다. 보유국이 미보유국에 대해 핵무기 사용의 위협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용’은커녕 ‘위협’도 못 하게 하는 것은 위협만으로도 치명적 효과를 일으킬 수 있는 핵무기의 특성 때문이다. 보유국끼리는 위협을 통해 억지력을 작동시킬 수도 있겠지만, 미보유국이 위협을 받는 것은 그 자체로 극한상황을 구성하게 된다.

 

존재하지 않는 핵무기 개발 혐의로 일으킨 이라크전쟁은 NPT와 IAEA(국제원자력기구)의 신뢰를 크게 손상했다. 미국의 패권주의 앞에 국제질서가 유린당하는 상황이 적나라하게 펼쳐진 것이다. 북핵문제 해결이 어려운 중요한 원인 하나가 이런 상황에 있다.

 

총기 소유가 자유롭고 총기사건을 많이 겪는 미국 사회에 이런 우스개가 있다. “총기사건 피해자가 피해를 입는 두 번째 큰 이유는?” 답은 “본인이 총을 안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가장 큰 이유를 물을 차례다. 그 답은 “본인이 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냉전 종식 이후 북한의 국제사회 진입에 가장 큰 걸림돌 노릇을 해온 것이 핵무기 문제다. 북한은 주권 수호를 위해 핵무기를 개발해 왔다고 주장한다. 그런 주장을 할 만한 근거가 전혀 없지도 않다. 이라크전쟁을 앞둔 시점에서 부시 미국 대통령의 “악의 축” 주장은 그런 근거를 부각시켜주기도 했다. 핵무기 문제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북한과 미국의 정책을 나란히 놓고 상대적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란 클라우제비츠의 말을 다시 생각해본다. 주권국가들의 각축으로 국제정치가 형성되고 있던 19세기 초반의 클라우제비츠에게는 약탈적 성격의 종래 전쟁과 달리 국가 목적의 합리적 추구방법으로서 근대전쟁의 새로운 모습이 놀랍게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180년이 지난 지금 세상에서는 전쟁이 너무나 일상적인 상황이 되어버린 것일까? 64년 전에 시작된 전쟁을 아직도 종결짓지 못하고 있는 한반도에서는 거꾸로 “정치가 전쟁의 연장”이 되어버린 것 같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