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남북정상회담의 주체는 물론 남한과 북한 정부였지만, 3의 주체로 정주영 명예회장이 이끌던 현대그룹을 또한 꼽아야 할 것이다. 정부의 정책결정과 활동 내용에 비해 기업의 역할은 공개되지 않는 것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대그룹과 북한 정부의 방대한 협력사업계획이나 소떼방북, 금강산관광 같은 엄청난 여론 조성 작업 등 겉으로 나타난 지표만 보더라도 제3의 주체로서 현대그룹의 역할은 분명하다.

몇 해 후 어느 대통령이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토로하기도 하는데, 재벌의 권력 강화는 1987년 이후 남한체제의 가장 중요한 변화의 하나였다. 1997년 소위 ‘IMF사태를 초래한 원인의 하나로 재벌에 대한 국가의 통제력이 약화된 상황이 꼽힌다. 군사 권력이 물러선 공백을 재벌이 채우면서 1990년대 남한의 재벌은 국내의 정치적 조건에 구애받지 않는 발전전략을 독자적으로 개발, 추진하고 있었다.

재벌의 초국가적 위상을 앞장서서 구축하고 있던 것이 현대-삼성-대우의 소위 ‘3대 재벌이었다. 가까운 곳에 있는 꽤 큰 경제주체와의 전면적 관계 변화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던 북한과의 관계에 이들 재벌이 주목하지 않았다면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현대와 대우가 대북관계에 큰 노력을 기울인 반면 삼성은 당시만이 아니라 지금까지도 북한 관계 사업에 큰 관심을 보인 일이 없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현대와 대우의 창업자가 이북 출신이어서 커넥션을 쉽게 확보할 수 있었다든가, 소비재산업의 비중이 큰 삼성이 다른 두 재벌보다 대북관계에 투자할 동기가 약했다든가 하는 설명이 있기는 하지만, 삼성이 대북사업을 외면해 온 일관성은 그 위상에 비추어볼 때 아무래도 이해하기 힘들다.

연재를 시작할 때 19929월 남북고위급회담을 파탄에 몰아넣은 훈령 조작사건을 살피면서 그 주범인 이동복이 1988년까지 6년간 삼성그룹의 회장 고문 등 임원을 지낸 사실을 눈여겨보았다. 6년간 삼성에서 그가 한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가 1990년대까지 삼성을 위해 일한 것이 있는지 나는 파악할 수 없다. 그러나 짐작은 할 수 있다. 삼성그룹의 발전전략에 남북관계를 어떻게 고려할 것인지 의견을 제출하는 것이 그의 기본 역할이었으리라는 것을.

삼성그룹이 대북 비협력 노선을 이미 작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동복 같은 대결주의자를 채용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그런 대결주의자를 고문으로 끌어들였기 때문에 북한을 바라보지 않게 된 것인지는 따질 생각 없다. 닭과 달걀의 관계 같은 것 아닐까? 삼성그룹이 이동복을 포용한 사실과 북한을 무시하는 발전전략을 취한 사실이 서로 무관한 것이 아니라는 정도로 이해해둔다.

대우그룹이 1999년 여름에 무너지자 현대가 대북사업의 강력한 선두주자가 되었다. 남북관계 개선이 현대에게 유리한 사업 기회를 보장해 줄 전망이 분명했기 때문에 정상회담 추진에도 앞장서 나섰던 것이다. 정상회담은 남북관계 확대의 결정적 계기가 될 것이었고, 일단 그 고비를 넘기고 나면 관계가 공식화되어 비밀공작의 비중이 줄어들게 되어 있었다. 현대로서는 그 고비를 넘기기 전에 그때까지의 노력 성과를 최대한 공식화해 놓을 필요가 있었다. 화장실 가기 전과 다녀온 뒤의 마음이 다르다는 말대로, 남한 정부의 현대의 역할 존중은 정상회담 실현 이전이라야 더욱 확실할 것이었다.

지난 회에 소개한 대로 현대가 북한과 ‘7대 경협사업의 독점권에 합의한 사실이 20005월 초 정부 측에 알려졌다. 6월 중순 정상회담 개최 방침이 410일에 발표되어 있었다. 그 시점에서 북한과의 합의에 대한 남한 정부의 보장을 받아놓으려는 의도였다. 이에 대해 김대중 대통령이 대단히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임동원은 전한다.

 

현대가 정상회담 개최를 이용해서 북측과 미리 합의해놓고 정부를 물고 들어가려는 것 아닙니까! 이런 식으로 하면 우리가 정상회담을 둔 주고 사는 것으로 오해받을 수 있다는 것을 그 사람들은 왜 모른답니까! 현대가 사업을 제대로 추진하려면 경쟁기업들과의 국제적인 협력도 필수적일 텐데 이런 식으로 해서 과연 협조를 얻을 수나 있겠습니까! 게다가 현대측의 처사는 대통령과 국민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않습니까. 정상회담 후에 순리에 따라 국민과 세계의 축복을 받아가며 당당하게 추진할 수도 있는 일을 가지고 왜 북측에 끌려다니며 굳이 정상회담 전에 합의하려고 서두는 것입니까!”(<피스메이커> 44)

 

여기서 대통령과 국민에 대한 예의란 말에 생각이 잠깐 머문다. ‘예의란 특정한 관계를 전제로 성립하는 것이다. 현대가 외국기업이라면 대한민국 대통령이나 국민에게 특별히 예의를 갖출 필요가 없다. 현대를 대한민국 기업으로 보기 때문에 예의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그룹과 대한민국의 관계에 대한 정주영의 생각도 과연 그랬을까? 1992년 정주영이 국민당을 만들어 대통령후보로 나섬으로써 대한민국 정치계와 맞장뜬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현대그룹이 잘 되어야 대한민국이 잘 된다는 믿음을 그는 가졌고, 김영삼이 정부를 이끌어서는 그 길이 잘 열릴 것 같지 않아서 후보로 나선 것으로 나는 이해한다. 북한 개방을 현대그룹의 활로로 여겼다는 전제 아래 일리 있는 판단이었다.

이 도전에서 실패한 뒤에도 그는 물밑에서(김영삼 정권의 견제를 무릅쓰고) 대북관계에 노력을 쏟아온 결과 남북관계 개선의 여건을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맡게 되었다. 적어도 대북사업에 관한 한 현대그룹이 대한민국 정부의 당당한 파트너라고 그가 생각했을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다.

‘7대 경협사업의 독점권을 가진다는 것은 북한 경제개발에 있어서 북한 정부의 제1파트너가 된다는 뜻이었다. 늦춰진 개혁개방을 서두르는 북한 정권에게는 남북관계 개선을 통한 남한과의 협력보다 현대그룹의 도움이 더 급하게 필요한 측면이 있었다. 그래서 정상회담 추진의 역할을 현대에게 맡김으로써 현대가 남한 정부에 대해 발언권을 갖도록 배려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현대는 남한 대통령과 국민에 대한 예의에 크게 얽매일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북한 경제개발사업이 궤도에 오른다면 현대 혼자서 자금 조달과 운영을 도맡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국내외 기업을 모아 컨소시엄을 만들고 그 주도권을 확보할 계획이었다.

현대의 이러한 움직임을 삼성그룹 지도부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재계의 동향을 나는 잘 알지 못하지만, 남북관계가 경색되어 있던 김영삼 정권 5년 동안 ‘3대 재벌중 대북사업에 투자를 많이 했던 현대와 대우에 비해 삼성이 상대적으로 유리한 조건을 누렸을 것은 짐작이 간다. 그런데 이제 살아남은 현대가 초국가적 규모의 사업에서 주도권을 쥐게 된다면 그 위상 변화가 삼성의 1주의를 무너트리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겠는가?

삼성 비자금이니 삼성 로비삼성 엑스파일이니 하는 말들이 많이 나돌았는데, 나는 그 실상은커녕 떠도는 소문이 어떤 것이 있는지도 잘 모른다. 삼성은 대단한 로비력을 갖고 있으며 그에 관한 억측을 함부로 내놓다가는 다치기 쉽다는 인상을 나는 갖고 있을 뿐이다. 이 시대 이 사회의 많은 보통사람들이 가진 인상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도 억측을 좀 내놓아야겠다. 남북관계의 곡절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한도 내에서.

20006월의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남북관계의 급속한 발전이 이뤄지는 상황 속에서 현대그룹의 비약적 위상 변화가 예상될 때, 삼성이 구경만 하고 있었을까? 반도체사업의 성공에 따른 삼성의 발전이 산술적 평면 위에 있는 것이라면, 예상되는 현대의 발전은 기하급수적인 것이었다. ‘대한민국 대표기업이라는 전략적 가치가 걸려있는 일이었다.

내가 삼성그룹 지도부에 있는 사람이었다면 2000년을 전후한 남북관계의 전개 방향을 바꾸기 위해 갖고 있는 모든 로비력을 발휘할 동기를 가졌을 것이다. 이 동기가 2003년의 대북송금 특검 사태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 내 억측이다.

남북관계 발전에 제동을 걸고자 하는 동기를 가진 것은 물론 삼성그룹만이 아니었다. 한국사회의 기득권세력 중에는 남북관계의 급속한 발전을 원하지 않는 집단들이 상당한 비중을 갖고 있었다. 이 집단들의 힘이 합쳐져 특검 사태를 몰고 왔고, 삼성도 그 집단의 하나였으리라고 짐작하는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퇴임 직전인 2003214국민에 드리는 말씀방송에서 현대의 대북송금 문제를 둘러싼 논란으로 국민 여러분에게 심려를 끼치게 되어 참으로 죄송하다는 전제 아래 이렇게 해명했다.

 

국민의 정부는 남북정상회담 추진과정에서, 이미 북한 당국과 많은 접촉이 있던 현대측의 협력을 받았다. 현대는 대북송금의 대가로 북측으로부터 철도, 통신, 관광, 개성공단 등 7대 사업권을 얻었으며, 정부는 그것이 평화와 국가이익에 크게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실정법상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수용했다.”(<피스메이커> 716-717)

 

10여 일 후, 노무현 대통령 취임 이튿날인 226일 민주당이 불참한 가운데 한나라당과 자민련 의원만으로 열린 국회에서 한나라당이 제안한 대북 비밀송금사건 관련 특별검사 임명 등에 관한 법률안이 통과되었다. 1야당과 협의를 거치지 않은 법안이라는 점만으로도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명분이 있었다.

그런데 노무현은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고, 6월 하순까지 진행된 특검을 통해 임동원, 박지원을 비롯한 몇 사람이 구속되었다가 유죄판결을 받기에 이른다. 개인적 이익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 인정되어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가 곧 사면-복권을 받기는 했으나 현대 정몽헌 회장이 자살하는 등 종래의 남북관계 발전이 좌절되고 만 것을 임동원은 아쉬워했다.

 

이 특검 사건이 우리에게 남긴 상처는 대단히 깊었다. 민족문제와 남북관계에 대한 올바른 철학과 비전이 결여된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초부터 첫단추를 잘못 끼움으로써 남북관계를 경색케 하고 국론을 분열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는 남북 화해협력과 통일문제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과 흥미를 감퇴시키고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추동력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피스메이커> 719)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231-232쪽에 이 상황에 대한 회고가 적혀 있다.

 

거부권을 행사하면 특검은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검찰 수사까지 막기는 어려웠다. 검찰수사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논거는 통치행위론이었다. 나는 법률가로서 이 이론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옳다고 우기면서 검찰이 수사를 하지 못하도록 지시하고 정면으로 부딪칠 수는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김대중 대통령께서 나서주셔야 했다. “남북관계를 열기 위해 내가 특단의 조처를 취한 것이다. 실정법 위반이 혹시 있었다고 해도 역사 앞에 부끄럼이 없다. 법 위반은 작은 것이고 남북관계는 큰 것 아니냐.” 이렇게 말하면 나도 통치행위론을 내세워 검찰 수사를 막을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매우 신뢰할 만한 사람을 보내 이런 뜻을 말씀드렸다. 그런데 내 노력이 부족했는지 소통이 잘못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마지막 기자회견에서 4억 달러 문제를 사전에 보고받지 않아 몰랐다고 하셨다. 대통령이 한 일이 아니라고 했으니 통치행위론을 내세우는 데 논리적 근거가 사라져 버렸다. 참모가 대통령 모르게 한 일까지 통치행위론으로 덮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내가 노빠로 알려진 사람이지만, 이건 말이 안 된다. 위에 인용한 214일 연설에서 실정법상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수용했다고 하지 않았나? 막 물러난 전임 대통령에게 그보다 더 나아간 어떤 표현을 요구한단 말인가?

당시 제기된 특검법이 민주당의 동의 없이 통과되었다는 사실은 중대한 정치적 결함이었다. 국회를 다수결로 통과했다는 형식요건만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거부권이란 제도가 뭐에 쓰려고 만든 것이란 말인가? 노무현의 특검법 수용에는 대통령으로서 직무유기의 의미가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민주당의 동요에 따른 정치적 부담과는 별개의 문제다.

특검으로 밝혀진 사실은 현대가 ‘7대 경협사업독점권 대가로 4억 달러, 정부의 북한 지원금 1억 달러, 5억 달러를 북한에 제공하는 과정에서 현물 5천만 달러를 제외한 현금 45천만 달러를 송금하는 데 국가정보원 등 국가기관이 불법적 역할을 맡았다는 것이다. 그 시점까지 남북관계의 부진으로 송금 등 제도적 장치가 미비한 데 문제가 있었다고 본다면 김영삼 정권의 책임으로 돌려 마땅한 문제였다.

2000년 현대그룹의 분할에서 대북사업과 함께 그룹의 중심부를 이어받았던 정몽헌 회장의 자살은 많은 수수께끼를 남겼다. 검찰 수사 진행 중인 200384일 사무실에서 뛰어내린 것이다. 현대를 둘러싼 당시 남북관계의 이면에는 드러나지 않은 문제가 많이 남아있다는 짐작을 하게 된다. 1990년대 남북관계의 순탄치 못한 진로에서 파생된 문제가 현대의 역할에서 집약되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Posted by 문천

 

 

나이 60대로 접어들며 조그만 두 가지를 달고 살게 되었다. 당뇨와 목 디스크다. 증세를 깨닫고 처음에는 어떻게 고치나?” 생각부터 들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면서 더불어 살 생각으로 돌아섰다. 그러는 동안 건강에 대한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많은 보통사람들이 건강이란 것을 병 없는 상태로 생각한다. 나도 그랬다. 그런데 지금 생각으로는 너무 절대적인 관념이었던 것 같다. 살아있는 생명체에게 완벽한 건강 상태라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 현실 속의 어느 개체도 따져보면 무슨 문제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죽음에 이르는 것 아닌가. 각자가 자기 문제를 짊어지고도 자기 역할에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상대적 기준으로 건강을 생각하게 되었다.

내 몸의 건강에 대한 생각이 바뀌면서 사회의 건강에 대한 생각도 다시 짚어보게 되었다. 새삼스러운 생각도 아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사회의 질병을 걱정하고 건강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것이 정치의 본질이기도 하다. 정말 큰 의사는 천하의 질병을 다스리는 사람이라고 한 옛날 어느 명의의 말이 생각난다.

지금 한국사회의 문제가 대단히 심각하다는 사실이 2014년을 지내는 동안 분명해졌다. 조금 불편한 정도가 아니라 이대로 가다가는 사회가 무너져버리지 않을까 하는 위기의식이 넘쳐나고 있다. 걱정이 크고 깊은데도, 치유를 위한 노력은 혼란스럽다. 집권세력은 종북척결로 백퍼센트 대한민국을 만들면 된다고 하는데, 그것이 오히려 병을 도지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선무당 사람 잡는 짓을 말려야겠는데, 똑같이 목청만 높여서는 좋은 결과를 바랄 수 없다. 목청 큰 놈 이기는 줄만 알고 더 목청을 높일 테니 사회가 더 어지러워지기만 하겠다. 치료에 나서기 전에 진단을 확실히 하고 자신 있는 처방을 내놓아야 무당에게 홀려 있는 구경꾼을 돌려세울 수 있다.

 

 

이 사회의 건강진단이 늦어진 이유

 

의사의 진단에서 중요한 요소의 하나가 병력(病歷)이다. 나타난 증세만 살펴서는 관찰이나 판단이 어려운 문제를 병력을 통해 밝혀낼 수 있다. 사회의 질병은 개체의 질병보다 복합적인 현상이므로 그 진단에서 병력의 비중이 더욱 크다. 어느 사회에서나 역사의 탐구가 중요한 활동인 이유가 여기 있다.

일본 식민통치자들이 제국주의 사관을 강요하고 대한민국 독재정권이 현대사 연구와 교육을 가로막은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이 사회의 문제점과 과제에 대한 진지한 인식이 식민통치와 독재정치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 시절의 한국사회는 의사 얼굴도 못 보는 환자 신세였다. 1987년의 민주화로 그 신세에서 겨우 벗어나게 되었고, 그 후 현대사 연구의 급속한 발전은 사회의 절실한 요구에 부응한 것이었다.

많은 연구자들의 노력 덕분에 이 사회의 병력이 많이 밝혀지게 되었다. 병력을 모를 때는 가난하나만을 문제로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는 빈곤 문제도 하나의 큰 병에서 파생된 여러 증세의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경제적 부() 외의 다른 가치도 함께 추구하는 노력이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진단의 혼란을 아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표적인 문제가 집권세력의 선무당질을 도와주는 뉴라이트 역사관이다. 경제적 부에만 가치를 두고 자본주의문명만을 유일한 문명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독재정치는 물론 식민통치까지도 근대화의 기준으로 정당화하는 주장이다.

뉴라이트 역사관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다. 경제력 집중을 심화시키는 정책노선을 뒷받침하려는 정략적 의도가 너무 빤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상당한 세력을 과시하는 것은 사람들의 믿음을 살 만한 확실한 진단이 따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믿을 만한 진단과 처방이 보인다면 어설픈 푸닥거리에 사람들이 꼬일 리가 없다.

나는 조선 망국 100주년을 맞으며 망국의 의미가 아직도 이 사회에서 충분히 새겨지지 못하고 있다는 데 안타까움을 느끼고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를 썼다. 그 뒤에는 1945년의 해방을 맞고도 민족독립을 이루지 못했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해방일기>를 썼다. 그리고 금년에는 냉전 종식 후에도 민족문제 해결의 길을 찾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반성하며 <냉전 이후>를 썼다. 그 일련의 작업을 통해 얻은 판단은 우리 민족사회가 개항기에 걸린 큰 병에서 지금까지도 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면역체계에 결함을 가진 사회

 

5년간의 작업을 통해 내가 진단한 질병에 이름을 붙이라면 근대병(近代病)’이라 하겠다. 1860~70년대 개항기에 서양 근대문명과의 접촉이 늘어나면서 처음에는 감기 증상처럼 시작했다. 그러다가 1880~90년대에 걸쳐 밖에서는 중국 중심의 천하체제가 무너지고 안에서는 전통질서가 해체되면서 열병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20세기 내내 여러 가지 증세를 보이며 이 사회를 휘어잡고 있었고 21세기에 접어든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이 병의 기본 증세는 면역력 결핍이다. 모든 생명체는 끊임없이 외부의 물질을 흡수한다. 흡수하는 물질 중에는 건강에 위협이 되는 것도 있다. 그 위협으로부터 건강을 지켜내는 능력이 면역력이다. 한 사회가 외부의 영향을 받을 때 그 내재적 기본질서를 지켜 구성원들이 큰 위협을 받지 않도록 보호하는 능력을 면역력에 비유할 수 있다.

면역력 중에는 모든 생명체가 타고나는 자연면역력(innate immunity)도 있지만 복잡한 환경 속에서 더 중요한 것은 경험을 통해 획득하는 적응면역력(adaptive immunity)이다. 1천 년간 한민족은 주로 중국문명과의 접촉을 통해 적응면역력을 키워왔다. 그런데 19세기 후반에 닥친 근대문명의 충격은 종래의 경험 범위를 벗어나는 너무나 이질적이고도 강한 것이었다. 이 충격 앞에서 면역체계 자체가 큰 손상을 입었다.

면역력 부족으로 인한 가장 일반적인 증상은 가치관의 혼란이다. 가치체계는 사회질서의 뼈대다. 개항기 이후 이 가치체계가 해체되는 한편 근대문명의 가치체계가 제대로 이식되지도 못했다. 근대적 가치관이 일부 들어왔지만 안정된 체계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가치관의 혼란을 제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엘리트계층의 향배다. 어느 사회에서나 힘을 많이 가지는 엘리트계층이 존재하기 마련이고 그 계층은 사회질서의 방어에 앞장서는 것이 정상이다. 기존 질서의 수호가 계층의 이익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일본 식민통치세력은 통치의 편의를 위해 기존 질서를 등지고 사익(私益)만을 추구하는 친일파를 육성했다. 남한에서는 해방과 건국을 거치면서도 친일파의 자세를 이어받은 집단이 사회의 주도권을 오늘날까지 지켜오고 있다. 이 집단은 지금도 외부세력의 이익을 위해 한반도 평화를 등질 정도로 극심한 외세의존성을 보이고 있다.

2014년이 많은 국민을 절망감에 빠트린 것은 면역력 결핍의 확인 때문이다. 4월에 겪은 참극 앞에서 뭔가 크게 잘못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각계각층의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분명해졌다. 그런데 사회의 움직임을 좌우하는 가장 강력한 주체인 국가는 연말을 앞둔 헌법재판소의 추태를 통해 이 사회의 회복을 위한 아무런 의지도 능력도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다. 1910년에 잃어버렸던 국가를 이 사회는 아직까지도 온전하게 되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근대병의 치료, 드디어 때가 되었다.

 

사이비 엘리트집단(힘만 갖고 도덕성을 갖지 않았다는 점에서)은 사회 내에서의 상대적 우위에 도취해서 사회의 문제점과 과제를 외면한다. 친일파의 속성 그대로다. 1987년까지는 독재권력의 그늘에 숨어있던 그들이 지난 30년 동안 국가기능을 장악하고 언론의 힘까지도 대부분을 수중에 넣으며 문민독재체제를 구축해 왔다.

식민통치 아래서는 민족독립에, 군사독재 아래서는 민주화에 희망을 걸어 왔던 이 사회가 지금 상황에서는 어디 희망을 걸어야 한단 말인가. 민주화가 미흡한 데 문제가 있다며 더욱 철저한 민주화만을 다짐하기에는 집권세력의 민주제도 이용방법이 너무나 교묘하다.

지금 이 사회의 문제의 뿌리가 150년 전 개항기부터 뻗어 내려온 것이라고 본다면 그 동안 떠올려 온 처방이 타당한 것이었는지 반성할 필요가 있다. 일본인 천황 아닌 한국인 대통령이 권력을 맡는 민족해방이 충분한 해결책이었는가? 11표의 다수결로 권력의 소재를 결정하는 민주화가 만족스러운 길이었는가?

민족독립도 민주화도 필요한 처방이기는 했지만 충분한 처방은 못 되었다. 당장의 증상을 다스리기 위한 대증(對症)요법에 불과한 것이었다. ‘근대병의 근본적 치료 없이는 목전의 증상이 가라앉아도 같은 병에서 파생되는 다른 증상이 나타날 것이다.

면역력 회복을 통한 근본적 치료를 위해서는 가치관의 전면적 재점검이 필요하다. 집권세력의 경제지상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자유나 인권처럼 그럴싸하게 보이는 가치들 중에도 지나친 절대화로 인해 가치체계 형성을 어렵게 만드는 것들이 있다. 계몽주의에서 유래하는 근대적 가치에는 모두 반성의 여지가 있다고 나는 본다.

이런 반성의 기준으로 나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우선 생각한다. 자연의 속박을 부정하는 것이 근대문명의 한 가지 특징이다. 그래서 천부인권을 말할 때 만물의 영장, 자연의 지배자로서 인간의 권리를 생각하는 것이다. 인간의 이런 오만은 인류 발생 이래 특이한 현상이었다.

지난 한 세기 반 동안 숱한 선현들의 노력으로도 어쩌지 못했던 문제를 이제 와서 우리가 바로잡을 수 있을까? 벅찬 느낌이 들 수 있다. 그래도 희망을 갖는 것은 근대병을 우리만 앓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이다. 증세에는 차이가 있어도 모든 인류사회가 이 병을 앓아 왔다. 이 병에 대한 인식이 이제 충분히 확산되어 여러 사회의 노력이 합쳐질 수 있는 단계를 바라보게 되었다.

인류 차원에서 근대병의 대표적 증세는 자연과의 조화를 거부하는 오만이었다. 그런 오만한 이념을 가진 사회는 길게 못 가고 망해버리게 마련이다. 근대문명이 3백년이나 지속된 것은 획기적인 기술발전 덕분이었다. 이제 그 약효가 다 떨어져 환경과 자원 문제가 코앞에 닥쳐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자연의 속박을 부정하던 근대적 상황 속에서 빚어진 것이다. 인간사회의 조직원리를 전면적으로 재편하는 과제가 인류 앞에 닥쳐 있다. 우리 사회의 고유한 증세들을 다스리기 위한 노력과 함께 인류사회의 자기치유 노력에 동참하는 자세를 갖춤으로써 이 사회가 고통과 치욕의 역사를 벗어나기 바란다.

이 진단과 관련된 생각을 최근 <프레시안>자본주의 이후란 제목으로 8회에 걸쳐 올렸다. 1985년 동서교섭사 연구를 시작한 이래 30년간 문명사 공부를 통해 다듬어온 생각이다. 이 생각의 근거를 더 소상히 밝힘으로써 독자들이 믿고 참고할 수 있게 해드리는 것이 2015년의 내 할 일이다.

 

Posted by 문천

 

파충류와 포유류 사이의 제일 큰 차이는 기억력이라 한다. 파충류 동물은 먹이가 보이면 덮치고 위험이 느껴지면 피하는 등 생존과 번식을 위해 당장 주어진 조건에 즉물적(卽物的) 반응만을 보이지만, 포유류 동물은 과거의 기억을 바탕으로 주어진 상황을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포유류 중에서도 기억력을 가장 잘 활용하는 동물이 인류다. 가족관계로부터 출발한 사회조직, 도구사용에서 출발한 기술문명이 모두 기억력 활용에 근거를 둔 것이다. 기억력을 더욱더 확장하기 위해 인류는 언어와 문자를 만들고 제지술과 인쇄술을 발전시켰으며, 지금은 전자매체를 이용해 문명의 새로운 단계를 바라보고 있다.

 

과거의 기억은 문명의 유지와 발전을 위한 중요한 열쇠였고, 과거의 기억을 잘 모으고 정리하는 사람들이 문명초기부터 사회를 이끌어나가는 역할을 맡았다. 문자가 없던 시절 주술사(呪術師)들은 부족의 역사를 구연(口演)하는 푸닥거리로 구성원들을 결속시켰고, 문자시대의 통치계급은 역사를 통치의 거울로 삼았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민족국가 형성과 사회발전의 원리를 모색하는 학문으로 역사학이 발달했다.

 

역사학이 이처럼 인류의 지적활동 가운데 핵심적 역할을 맡아온 것은 문명의 본질인 기억의 활동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자매체의 등장으로 인류의 기억능력이 또 한 차례 폭발적 확장을 바라보는 시점에서 역사학자들은 걱정에 싸여 있다. 지난 금요일 역사학과 지식정보사회란 주제로 열린 전국역사학대회에서 많은 발표자들은 역사학의 위기를 지적했다.

 

세계화로 인한 국가기능의 쇠퇴, 학문적 엄밀성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전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제기됐지만, 가장 근본적인 위협은 사람들의 관심이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현상으로 지적됐다. 갈수록 치열해지는 현실경쟁에 유용한 정보의 생산과 유통이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는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역사의 가르침을 실용성이 별로 없는 가르침으로 여기게 돼가고 있다는 것이다.

 

인터넷을 비롯한 전자매체는 정보의 자유를 인간에게 가져다주고 있다. 그 자유는 인간을 과거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것일까. 오히려 인간을 현재에 묶어놓는 구속(拘束)의 의미를 간과할 수 없다는 지적도 있다. 기억력의 팽창이 기억력을 쓸모 없는 것으로 만들고 문명의 발달이 문명의 본질을 퇴화시키는 역설(逆說)의 시대를 역사학자들은 보고 있다00. 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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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