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2. 12. 11:42

 

 

1644년 만주족의 청()나라가 명()나라를 대신한 뒤에도 조선에는 청나라를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가 오래 남아있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도와준 은혜와 청나라의 침략을 당한 병자호란의 원한도 있었지만, 청나라가 오랑캐 출신이라는 명분론도 크게 작용했다. 일부에선 2백년 후까지 명나라 마지막 연호 숭정(崇禎)을 쓰며 자존심을 달래기도 했다.

 

이웃 조선에서 이럴진대 만주족 지배를 받는 한족의 울분은 더했다. 1729년 증정(曾靜)의 모역 사건은 그런 울분의 표출이었다. 당시 옹정(雍正)황제는 드러난 사건의 처벌에 그치지 않고 반청(反淸)감정의 근본적 해소를 위해 대의각미록(大義覺迷錄)’을 반포했다. 청나라는 멸망한 명나라 대신 천하 인민을 돌봐주러 중국에 들어온 것이며, 중화(中華)와 오랑캐의 구분은 종족이나 출신지가 아니라 천명(天命)에 달려있다는 주장을 담은 책이었다.

 

대다수 중국인은 이런 실용주의적 화이관(華夷觀)에 승복했다. 그래서 19세기에 중국에 온 서양인들은 자기네와 같은 민족주의가 중국에 없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다. 종족의 정체성보다 문명의 정체성에 대한 의식을 보이는 중국인의 자기인식 패턴이 민족과 국가를 동일시하던 당시 서양인들에게는 쉽게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

 

돌이켜 생각하면 서양 측의 강렬한 민족주의가 역사적으로 더 특이한 현상이었다. ‘민족국가는 근세 초부터 제국주의시대까지 유럽문명 발전의 강력한 무기였다. 20세기에 들어와 두 차례 세계대전이 일어난 것은 극단에 이른 민족주의가 상호갈등을 일으킨 결과라 해석할 수 있다.

 

1차대전 후 국제연맹을, 그리고 2차대전 후 국제연합을 만든 움직임은 이 갈등을 뛰어넘으려는 노력이었다. 그러나 민족주의의 극복에 보다 실질적 효과를 가져온 것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확산이었다. 전세계 프롤레타리아의 단결을 외친 공산주의와 전 세계의 자본시장 통합을 추구한 자본주의는 민족국가의 역할을 축소시키는 데 힘을 합쳤다.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힘을 쓰는 곳에서는 소련과 유고연방 등 다민족국가의 성립과 유지가 가능했다. 공산권 붕괴 후 이들 지역의 구석구석에서 민족분쟁이 꼬리를 무는 것은 이데올로기의 실종 때문이다.

 

코소보 사태를 둘러싸고 유엔과 나토의 관계전개가 눈길을 끈다. 전 세계 모든 국가를 회원으로 하는 유엔은 이데올로기에 초연한 기구인 반면 나토는 자본주의국가들의 연합체다. ‘자본주의 세계화라는 천명을 내세워 유엔의 권위를 찬탈하려는 자는 나토일까, 미국일까. 199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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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한국은 아시아에 속한다. 그러나 해방 후 50여 년간 아시아는 한국에게 가깝고도 먼 곳이었다. 이웃의 일본과 중국은 식민지 경험과 6-25전쟁 때문에 적대감의 표적이 되었다. 타이완을 비롯한 자유우방들과는 미국의 지도력을 사이에 두고 맺어진 관계였으며, 경제발전에 따라 수출시장의 가차없는 경쟁상대가 되었다. 대규모 파병을 통해 이례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은 베트남에게도 한국은 기분좋은 이웃이 되지 못했다.

 

60년대까지 한국과 아시아의 관계를 규정한 것은 군사논리였다. 70년대부터 이에 겹치기 시작한 경제논리는 90년대 냉전 해소로 군사논리가 흐려짐에 따라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세계화에 따른 경제관계의 확대가 분쟁의 소지를 줄임으로써 세계평화에 공헌할 것이라는 전망이 있다. 이론(異論)도 없지 않은 전망이지만, 적어도 경제논리가 군사논리보다 평화적 관계의 근거가 될 수 있음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그러나 경제논리 역시 상대를 객체화하는 배타적 논리다. 이웃의 정()을 배제하고 분석적 합리성만을 추구하는 경제논리는 서양인이 만든 근대성의 특징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대()아시아 관계는 메이지(明治)시대 일본이 좇던 탈아입구(脫亞入歐) 꿈의 연장선 위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막상 유럽인들은 서로 미워하면서도 그리워하는 끈끈한 정으로 공동체를 이뤄 가는 데 비해 우리는 삭막한 세상을 살아 왔다.

 

지진에 시달리는 타이완에 구호대를 보낸 데 이어 동()티모르 평화유지군 참여는 아시아 속의 한국의 새 위치를 만들어줄 것 같다. 소말리아 평화유지군 참여나 터키 지진 구호대 파견은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생각해 구색 맞추는 수준일 뿐, 적극적 공헌에는 이르지 못했다.

 

이에 비해 타이완과 동티모르에 대한 우리의 도움은 적극적이고도 실질적인 것이 될 것 같다. 타이완은 깊은 유대관계를 가진 나라인 데다가 이번 재해로 우리 산업의 여러 부문이 호황을 바라보는 형편이니 이웃으로서 미안한 마음을 곡진하게 나타내지 않을 수 없다. 동티모르 평화유지군에도 아시아국가들의 참여를 인도네시아 정부가 특히 지목해서 희망하는 사정이니 우리의 참여는 참으로 이웃의 정에 부합하는 것이다.

 

우리가 해방될 무렵 아시아에는 독립국이 몇 되지 않았다.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역사의 곡절들을 뚫고 우리와 비슷하게 자라온 동아시아-동남아시아의 나라들이 이제 이웃끼리 새로운 관심을 나누고 있다. 새뮤얼 헌팅턴이 말한 문명의 충돌의 의미가 절실하게 느껴진다. 199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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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하나의 경제행위를 선택했을 때, 그 행위의 효용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다른 선택을 했을 경우 기대할 수 있었던 효용과 비교할 필요가 있다. 좋은 거문고를 만들 수도 있는 오동나무 재목으로 아무리 쓸 만한 절구통을 만들었다 하더라도 훌륭한 선택으로 평가받을 수 없는 것은 날려버린 기회비용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절구통은 보이는 것이다. 만들어지지 않은 거문고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바스티아는 깨진 유리창이론이 절구통만 보고 거문고는 생각지 않는 맹점을 가진 것이라고 지적했다. 지금 사람의 눈에는 너무나 당연한 지적이다.

기회비용 개념을 제창한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자들은 바스티아를 선구자로 지목했다. 바스티아의 영문판 <정치경제학 논문선(Selected Essays on Political Economy)>(1995)에는 프리드리히 하이에크(1899-1992)의 서문이 붙어 있다.

기회비용 개념을 이론화한 것은 하이에크의 스승인 프리드리히 폰 비저(1851-1926)였다. 그런데 폰 비저의 이론이 1914년에야, 바스티아의 개념 제기 후 60여 년이 지난 후에야 나왔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세기 경제학에서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할 이 개념이 이론화되는 데 그렇게 긴 시간이 걸린 이유가 무엇일까? 정말로 보이지 않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는 일이다.

20세기 초까지 이 개념이 주류 경제학계에서 중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론화가 늦어진 것으로 추정할 수밖에 없다. 왜 중시되지 않았을까? 여기에도 19세기 후반 유럽의 낙관주의가 한 몫을 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기회비용 이론은 자원의 희소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자원 공급이 무제한이라고 인식한다면 기회비용 같은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다. 예를 들어 온 산에 오동나무만 있고 다른 나무가 별로 없는 곳에서는 가야금 만들려고 오동나무 재목을 아낄 필요가 없다. 절구통 아니라 부지깽이, 밥주걱까지 전부 벽오동으로 만들 것이다.

19세기 후반 유럽의 정치가들에게 자원의 희소성은 걱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과학의 발달이 자원 공급을 무제한으로 열어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고, 당장의 수요는 식민지 개척이나 적국의 약탈로 충족시킬 길이 있었다. 획득하는 방법만 궁리하면 됐지, 아껴 쓰는 방법은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니 경제학계에도 자원의 희소성을 걱정할 동기가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19세기를 통해 사회주의, 공산주의와 제도주의가 사회조직방법의 대안으로 제기된 것은 자본주의체제의 낭비성이 인식된 결과로 볼 수 있다. 기술과 경제가 발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인민의 생활이 오히려 더 비참해지는 문제가 갈수록 분명해졌던 것이다.

이처럼 한쪽에서 위기의식이 자라나고 있는 동안에도 주류 경제학계는 무한 진보의 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폰 비저의 스승 카를 멩거(1840-1921)의 한계효용(marginal utility) 이론과 폰 비저의 기회비용 이론 등 초기 오스트리아학파의 활동은 경제학 연구를 냉엄한 현실조건에 접근시킨 것으로 평가받는다.

여기서 오스트리아학파의 역할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밀튼 프리드먼과 함께 신자유주의의 원흉으로 꼽히는 하이에크는 다음 세대 오스트리아학파의 대표적 인물이다. 그래서 오스트리아학파는 자유방임주의에 가까운 고전적 자유주의의 본산으로 흔히 인식된다.

신자유주의’(neoliberalism)란 말에 짚어둘 점이 있다. 1920~30년대에도 신자유주의란 말이 유행한 일이 있고 폰 비저가 그 대표적 인물의 하나로 꼽혔다. 그러나 이것은 1980년대 이후의 신자유주의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원래의 신자유주의는 고전적 자유주의의 한계를 깨닫고 사회주의 통제경제와의 절충을 시도한 중도적 입장이었다. 오늘날의 사회주의 시장경제와 비슷한 체제를 구상한 것이다.

멩거와 폰 비저 등 오스트리아학파의 초기 지도자들이 경제 영역에 대한 정부의 지나친 개입에 반대하고 자유시장의 효율성을 주장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이 반대한 것은 당시 제국주의시대의 지나친 국가 개입이었지, 후세의 신자유주의처럼 국가의 역할을 전면적으로 부정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계량화를 통해 경제학을 정밀과학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지상과제였고, 국가의 경제정책에 관심을 집중하지도 않았다. 제자들이 스승들의 기술만 배우고 정신은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학파의 역할이 이상하게 된 것 같다.

 

 

<자본주의 이후>에는 내 생각의 윤곽만 그려놓고 그 생각의 바탕을 거의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주석'의 형태로 관련된 생각을 더 정리해 보려 합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