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혁명 이후 인류가 자연과의 관계에서 긴장감을 잃은 결과 지속가능성이 없는 자본주의체제로 세상을 바꿔 온 것이 이제 한계에 이르러 전면적인 체제 변화를 필요로 하는 지점에 도달했다는 것이 문명사 공부를 통해 내가 얻은 관점이다. 그 관점 위에서 떠올린 한국사회의 몇 가지 과제들에 대한 생각을 지금까지 적었다.

이 생각 중에는 일반 독자들에게 엉뚱하게 보이는 것이 많을 것이다. 내가 소개하는 관점 중에 우리에게 오랫동안 익숙하던 세상의 이치를 벗어나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끝으로 참정권에 관한 생각을 적는 것은, 엉뚱하게 보이는 주장도 선입견 없이 따져보면 타당성을 생각할 여지가 많다는 사실을 보여주기에 적당한 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린이참정권생각을 처음 떠올린 것은 201210, <해방일기> 작업 중의 일이었다.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서 19475월 제정한 보통선거법에서 선거권을 만 25세 이상으로 규정한 것을 보면서 선거권의 연령 제한이 보통선거의 원리에 어긋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위키피디아>를 들춰보고 데미니 투표권이란 이름의 아동투표권 운동이 자라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 쓴 글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우리 사회의 경우 아동 투표권 도입은 미성년자를 자녀로 둔 30대와 40대의 선거권을 대폭 늘려주는 결과가 될 것이니, 그 연령층에게 인기 없는 정당의 '결사반대'가 예상된다. 그러나 아동 투표권이 실행되는 광경은 상상만 해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갓난아이의 부모들이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그 아이의 장래를 위한 선택을 생각하는 모습. 초등학생의 부모들이 아이 자신의 선택을 분명히 해주기 위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이런 모습들이 들어갈 때 민주주의의 모습이 더 완벽해질 것이다.

 

그때는 어린이참정권이 있으면 없는 것보다 좋겠다는 정도 생각이었고, 이런 점도 생각할 여지가 있지 않냐는 글 하나 쓴 후 나도 잊어버리고 지냈다. 그러다 지난 봄 세월호 침몰과 그 뒤 이어지는 상황을 보며 절실한 생각이 들었다. 국가의 정책 여하가 어린이들의 행복은 물론 생명까지도 좌우하는 일이 많은데, 당사자가 미성년이라 해서 정책 결정에서 완전히 배제된다는 것이 타당한 일인가?

그래서 참정권에 관해 더 알아보고 더 생각해 보니 어린이참정권이 있으면 좋고 없어도 괜찮은 게 아니라 민주주의를 제대로 하려면 꼭 필요한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모두들 민주주의를 외치는 세상에서 그렇게 필수적인 제도를 지금까지 내버려두고 있는 까닭이 무엇일까? 근대민주주의의 역사적 조건에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국민주권의 원리도 보통선거의 원칙도 미성년자를 배제할 이유가 없다. 선거연령의 제한은 현실정치의 민주주의가 미숙하기 때문에 아직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결함이다.

백여 년 전 여성참정권은 지금 어린이참정권이 엉뚱하게 보이는 것 못지않게 엉뚱하게 보이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여성을 배제한 보통선거라는 것을 생각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여성참정권이 겪어온 길을 되돌아보면 어린이참정권이 걸어갈 길을 내다볼 수 있다.

 

여권운동과 평화운동의 결합을 보여준 자네트 랭킨

 

보통선거란 성별, 종족, 신분, 재산에 관계없이 모든 국민에게 공평한 참정권을 부여한다는 이념이다. 그런데 왜 연령이란 기준만은 국민의 참정권을 제한한단 말인가? 미성년자는 국민이 아니란 말인가?

19세기 중엽 보통선거권이 처음 거론될 때는 연령만이 아니라 성별의 기준도 무시되었다. 그 전에는 심지어 신분과 재산으로 투표권을 제한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기도 했다. 미국독립전쟁 때의 널리 알려진 구호 대표 없이 세금 없다!”를 생각해 보라. 참정권을 납세 의무와 연계한 것이니, 세금 내지 않는 사람에게는 선거권도 없다는 뜻이었다.

여성참정권이 널리 확립된 것은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겪으면서였다. 1913년 노르웨이에서 주권국가 최초로 채택될 때까지 여성참정권은 식민지나 지방정부에서만 실현되고 있었다. 덴마크와 아이슬란드(1915), 네덜란드와 소련(1917),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와 스웨덴(1918), 독일과 룩셈부르크(1919), 그리고 미국(1920)이 그 뒤를 따랐다. 민주주의의 본산인 영국과 프랑스에는 1928년과 1944년에야 도입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는 여성참정권이 민주주의제도의 세계적 표준이 되었고, 1952년에는 유엔총회에서 여성참정권 협약이 채택되기에 이른다.

20세기 전반기에, 특히 세계대전을 계기로 여성참정권이 확립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함께 작용했다. 가장 많이 지적되어 온 이유는 여성의 전쟁 노력 동원을 위해 참정권 확대의 약속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같은 이유가 식민지의 자치수준 향상이나 전쟁 후의 독립을 약속하는 데도 작용했다. 19482월혁명 후 프랑스 제2공화국에서 평민층까지 참정권을 확장한 최초의 보통선거도입의 이유도 이와 비슷한 데 있었다.

또 하나 큰 이유가 여권운동과 평화운동의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까지 여성참정권운동과 전쟁반대운동은 긴밀하게 맞물려 있었다. 당장 벌어진 전쟁만 끝나면 다시는 전쟁을 겪지 않을 평화정책으로 나아가겠다는 정부의 약속이 여성참정권 보장에 곁들여져 있었던 것이다. 여권운동과 평화운동 사이의 관계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람이 미국 최초의 여성 연방의원 자네트 랭킨(1880-1973)이었다.

랭킨은 미국에 여성참정권이 확립되기 4년 전인 1916년 몬태나에서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런데 그는 하원의원으로서 별로 할 수 없는 일이 없었다. 취임 직후의 세계대전 참전 표결에서 반대표를 던진 것이 치명적 악재였다. 당시 반대표를 던진 의원이 49명이었는데, 모두 비애국자로 몰려 정치적으로 매장되었다. 하물며 유일한 여성의원 랭킨은 의정활동조차 제대로 펼치지 못할 정도로 철저한 배척을 당했다.

여권운동계에서는 랭킨의 참전 반대가 여권운동에 찬물을 끼얹었다고 비판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랭킨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항변했다. “전쟁에 안 돼요.’ 말할 기회를 가진 첫 여성으로서 그 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의무감을 느꼈습니다.”

1940년 유럽에서 세계대전이 또 벌어진 상황에서 미국인들이 참전 여부를 놓고 첨예한 논쟁을 벌이고 있을 때, 랭킨은 참전 반대를 공약으로 다시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런데 1년 후 진주만 폭격 뒤의 참전 표결에서 반대표를 던진 의원은 랭킨 하나뿐이었다. 만장일치를 위해 뜻을 바꿔달라고 가까운 동료들이 부탁할 때 랭킨은 이렇게 대답했다. “여성인 나는 전쟁터에 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그리로 보내고 싶지 않습니다.”

정치인으로서 랭킨은 다시 매장되고 말았으나 20여 년 후 반전운동의 아이콘이 되었다. 87세의 나이로 다시 의사당 앞에 선 것이 1968115일의 일. ‘랭킨 부대’(Jeannette Rankin Brigade)를 자칭하는 5천 명의 시위대를 이끌고 하원 의장 존 매코맥에게 평화 청원을 제출하기 위해서였다.

 

20세기 여성이 투표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

 

20세기 전반부에 여성참정권이 확립된 또 하나의 이유는 사회경제적 조건의 변화에 있었다. 19세기 말까지 유럽에는 남성에게 의지하지 않고 독립생활을 하는 여성의 수가 극히 적었다. 보통선거의 원리는 가장들이 투표권을 갖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볼 수 있었다. 여성의 의사는 남편의 투표권을 통해 표출될 만큼 표출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여성참정권 운동에 대한 가장 큰 반대 이유는 전통적 가정질서에 대한 위협에 있었다. 아내가 남편과 별도의 투표권을 가진다는 사실 자체가 종래의 바람직한 부부관계를 해치는 것으로 흔히 인식되었다. 여권 운동가들은 공산주의자와 함께 파괴적 존재로 미움을 받았을 뿐 아니라 못 생기고 성질 나쁜 부적응자로 혐오의 대상이 되는 일이 많았다.

그런데 19세기 말 이래 여성참정권이 성장한 경로를 보면 식민지나 주변부가 앞장선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890년대에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 등 식민지에서 먼저 채택되기 시작하고 뒤이어 핀란드(1907, 당시에는 러시아 예하의 대공국이었음), 노르웨이 등 주변부 국가들로 이어진 까닭이 기존 사회질서의 저항이 비교적 약한 데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미국에서도 여성참정권을 먼저 채택한 지방정부는 와이오밍(1869), 유타(1870) 등 준주(territory, 새로 획득하여 아직 주로 만들지 못한 지역의 행정조직)였다.

식민지와 주변부에서는 본국이나 중심부에 비해 가족구조 등 사회경제적 변화가 먼저 진행되고 있었다. 1860년대 와이오밍이나 유타의 상황을 생각해 보자. 새로운 땅의 개간을 위해, 황금을 찾아, 철도건설에 종사하기 위해 서쪽으로 몰려든 사람들 중에는 가정을 갖지 않은 남성의 비율이 상당히 높았다. 그런 사람들은 투표나 선거에서 지역사회의 안정보다 투기 기회의 확대를 위해 표를 던지는 경향이 있었다. 여성참정권이 없는 상황에서 그런 사람들의 입장이 과잉대표되는 데 대해 여성뿐 아니라 가정을 가진 남성도 불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본국이나 중심부에 비해 근대문명이 새로 이식되는 개척지에서는 전통의 저항이 약했기 때문에 개인주의의 확산도 더 빨랐다. 정상적 가족생활이 이뤄지는 가정 안에서도 가부장적 권위가 전반적으로 약화되었다. 변동이 많은 생활조건 속에서 여성의 역할이 요리와 뜨개질에 국한될 수 없는 상황을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변화들을 본국과 중심부에서도 뒤따라 겪게 되었다. 성인 남성 대다수가 전쟁터에 나가야 하는 상황에서 주부들은 전에는 남자들이 맡던 많은 일을 맡게 되었다. 사회의 운영방향 결정을 위해 의견을 내는 일도 그중에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는 여성참정권을 그 10여 년 전처럼 엉뚱한 생각으로 보는 사회가 별로 없었다.

 

미래를 걱정하지 않는 정치를 멈춰야 한다.

 

백여 년 전 여성참정권 도입을 주장한 사람들은 물론 만인평등의 이념을 내세웠다. 그러나 그 실제 도입 과정을 살펴보면 이념보다 현실조건의 변화에 맞추기 위한 것이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사실 만인평등18세기 중엽 이후 계몽사상의 핵심 명제였고 미국독립전쟁과 프랑스대혁명의 구호였지만, 독립한 미국과 프랑스 제1공화국의 참정권에는 신분과 재산의 제한이 있었다. 그때의 만인은 후세의 만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개인주의가 19세기를 휩쓸었지만 여성은 개인이 아니었다. 여성은 가정의 부속물로서만 가치를 인정받는 존재였다. 개인주의의 시대에 개인이 아니었다는 것은 인간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근대 자본주의체제가 총체적 모순을 드러낼 때 여성의 역할이 부각되었다. 그 역할은 양면으로 나타났다. 한편으로는 모순된 체제를 연장하기 위해 여성의 동원이 필요했고, 또 한편으로는 체제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평화운동의 주체로 나타난 것이다.

여성참정권의 양면성은 지금까지도 여성의 정치활동에 그림자를 남기고 있다. 한편으로는 자애로운 어머니의 모습으로 살벌한 정글에서 벗어나는 길을 열어줄 희망을 풍기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남성 정치인이 따라오지 못할 불통의 철의 여인으로 체제의 모순을 굳건하게 지키기도 한다. 어느 쪽으로든 여성의 정치적 역할은 불가결한 것이 되어있다.

여성의 정치적 역할이 후기 자본주의사회에서 필요했던 것처럼 이제 말기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어린이의 정치적 역할이 부각되고 있다. 백여 년 전까지 여성이 그랬던 것처럼 어린이는 지금까지 정치적 주체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여성의 정치적 입장을 가장이 대표해 주는 것이 충분하다고 여겨진 것처럼, 어린이의 정치적 입장은 부모가 대표해 주는 것으로 충분한 것처럼 여겨져 왔다.

여성이 자기 입장을 스스로 내놓을 필요가 왜 생겼는지 생각해 보자. 가족의 입장을 배려하지 않는 성인 남성의 비율이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산업화 이전 사회에서는 주민의 대다수가 비슷한 구조의 가정 속에서 비슷한 방식의 가정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런데 산업화의 진척에 따라 가정의 구조도 달라지고 가정 내의 이해관계도 복잡해졌다. 그런 상황에서 남성만이 참정권을 가진다면 사회의 안정보다 맹목적 발전만 원하는 주장이 과잉대표되어 파국을 향하게 된다는 사실이 현실로 입증되었던 것이다.

지금 어린이참정권의 필요성도 사회의 노령화때문에 절실한 것이다. 중앙선거에서나 지방선거에서나 미래를 걱정하지 않고 당장의 풍요에만 집착하는 세력이 유리한 위치에 서는 까닭이 무엇인가. 30년 후 이 사회의 상황을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들의 입장이 과잉대표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문제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부채 증가 추세를 보라.

나는 근대문명의 지나친 개인주의 풍조를 우리가 겪어온, 그리고 겪고 있는 많은 문제의 중요한 원인으로 지적한다. 그러나 개인주의를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일방적 폭주를 멈추고 유기체론과 어울려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개인주의의 정합성을 완성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 정합성을 갖추지 못한 개인주의는 모든 개인을 존중하지 않고 특정 범위의 개인들에게 이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주의의 정합성을 위해서도 어린이참정권은 꼭 필요한 요소다.

 

국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

 

어린이참정권에 대한 생각을 들은 사람들이 흔히 일리는 있는데...” 수긍하면서도 선뜻 찬성하지 못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그중 하나가 직접투표의 원칙이다. 투표권에 연령제한을 두는 이유,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성장 과정에 있는 어린이에게 책임 있는 권리 행사를 맡길 수 없다는 데는 합리적 타당성이 있다. 모든 어린이에게 참정권을 부여하더라도 대부분의 경우 투표권 행사는 보호자가 대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직접투표의 원칙은 보통선거의 원리에 비해 부수적인 것이다. 미성년자의 재산권 행사나 학교 선택 등 꼭 필요한 법률적 행위를 보호자가 대행해 주지 않는가? 어린이의 정치적 입장을 직접 표현할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아예 무시해버리기보다는 보호자로 하여금 대신 표현하게 하는 것이 어린이 본인을 존중하고 정치의 대표성을 충실하게 하기 위해 더 바람직한 길이다.

직접투표와 비밀투표의 원칙은 주권자가 주권행사에 타인의 압력을 받지 않도록 해주는 방어 장치로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닌 모든 사람을 타인으로 규정해서 일체의 영향을 받지 않게 하는 것이 꼭 바람직한 일일까? 미성년자의 투표에 대리투표를 행하는 보호자(부모)의 의견이 본인 의견 대신 나타나는 것이 꼭 잘못된 일일까?

부모 중에 자녀 본인에게 해로운 선택인 줄 알면서 자기가 원하는 쪽으로 표를 던지는 사람이 아주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 부모는 자녀를 위해 좋은 것이 어느 쪽인지 성심껏 판단해서 그에 따라 투표를 할 것이다. 잘못된 투표는 어떤 완벽한 조건 속에서도 있기 마련이다. 부모의 대리투표와 건강이 안 좋은 노인들의 직접투표 중 어느 쪽에 잘못된 투표가 더 많을 것이라고 누가 장담할 것인가? 잘못된 투표가 더러 있더라도 자격 있는 사람의 모든 투표를 존중하는 것이 보통선거의 원리다.

국가 운영방법은 어린이까지 포함한 모든 국민에게 영향을 끼친다. 그런데 당장의 경기 부양만을 위한 규제 완화가 노년층의 집중적 지지를 받아 정책으로 채택되고 지금의 어린이들이 수십 년 후에 악화된 환경과 고갈된 자원, 그리고 빚더미에 올라앉은 국가를 물려받게 해도 되는 것인가? 어린이들이 가장 무력하게 당할 수밖에 없는 재난이 빈발하는 세상을 만들어도 되는 것인가?

19세기에 근대국가가 만들어질 때는 국민이 국가를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러나 지금은 국가가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는 복지국가의 이념이 표준이 되어있다. 복지정책의 핵심 요소인 기본소득에 대한 김종철의 관점은 참정권 문제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 기본소득을 단지 새로운 형태의 복지 프로그램으로 간주할 게 아니라 사회구성원 전원이 당연히 가져야 할 권리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즉 기본소득을 시민배당금으로 정의하자는 거죠. ‘배당금이라고 하면, 수급자를 선별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있을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주식회사의 주주들에게 배당금을 줄 때 누구는 주고, 누구는 배제한다는 식의 분배는 있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배당금은 모든 주주의 권리이기 때문에 지급하는 것이니까요. 기본소득도 한 사회, 한 공동체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을 주주로 간주하는 토대 위에서 시행하는 것도 가능하고, 그게 논리적으로 더 타당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지금 그렇게 시행하고 있는 곳이 있습니다. 알래스카에서 지난 30년 동안 해온 방식이 바로 그렇습니다. 알래스카에는 알래스카영구기금이라는 게 있는데, 그 기금을 이용해서 매년 알래스카 주민 전체에게 일정한 액수의 현금을 지급하고 있습니다. 이 영구기금은 대부분 알래스카에 있는 유전에서 나오는 석유생산 및 판매에 의한 수입금입니다. (...)

그런데 알래스카의 경우에 가장 중요한 점은 석유라는 자원을 알래스카 주민 전체의 공유자원으로 인식하고, 거기서 나오는 수입을 구성원 전원에게 배당금으로 고르게 배분해야 한다는 발상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알래스카가 30년이 넘게 꾸준히 이 제도를 운영하고 있는 것은 석유 덕분이라고 생각하기 쉽죠. 물론 그 점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석유자원이 있는 지역, 국가라고 해서 다 알래스카처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잘 압니다. (“근대문명의 반생명성, 민낯을 드러내다” <말과 활> 2014. 5-6, 52-53)

 

Posted by 문천

 

20여 년 전 세계화란 말이 부각되면서 국가민족을 낡은 개념으로 보는 풍조가 일어났다. 세계화는 거스를 수 없는 변화의 추세이며, 이에 저해되는 국가와 민족의 틀을 얼른 벗어나는 것이 이 변화 속에서 성공을 거두는 길이라는 인식을 많은 사람들이 갖게 되었다. 그래서 자기가 속한 사회를 아끼는 마음을 가진 양심적 지식인들 중에도 탈 민족을 바람직한 진보를 위한 과제로 여기는 이들이 나타났다.

상상의 공동체”, “발명된 전통같은 말이 유행했다. 1983년 출간된 두 권의 책에서 나온 말이다.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 Imagined Communities>와 에릭 홉스봄, 테렌스 레인저가 엮은 <전통의 발명 The Invention of Tradition>이다.

이들의 민족주의 비판은 중요한 담론이다. 우리가 민족주의를 생각할 때도 꼭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비판의 대상과 논점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받아들일 경우 폐단이 클 수 있다. 이들 서양 학자들의 비판이 서양 민족주의를 대상으로 한 것이라는 사실을 무엇보다 먼저 생각해야겠다.

근대 이전의 유럽에서는 민족에 큰 의미가 없었다. ‘국가라 할 만한 대형 정치조직은 봉건적 계약관계로 맺어진 것이어서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는 민족과 별 관계가 없었다. 한 왕실이 여러 언어 쓰는 여러 민족을 지배하는 것도, 같은 언어 쓰는 같은 민족이 서로 다른 왕실의 지배를 받는 것도 중세유럽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민족보다는 기독교인이란 정체성이 더 중시되었다.

그런데 17세기 이후 국민국가의 급속한 발달에 따라 각 민족의 문화와 전통을 급히 정비할 필요가 일어났다. 국가권력이 이 정비작업을 서둘러 이끌어가는 과정에서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발명에 비슷한 무리한 작업이 진행되었다. 무리하게 빚어진 민족주의가 제국주의시대에 들어와 많은 갈등의 촉매가 되고 심지어 유태인 대학살 같은 비인도적 현상까지 일으키자 그에 대한 반성으로 민족주의 비판이 일어나게 되었다.

우리 민족의 역사와 전통은 이와 크게 다르다. 정복자 윌리엄이 잉글랜드로 건너갈 무렵 한반도에는 민족국가 고려가 자리 잡고 있었고, 이 민족국가가 천년 가까이 한반도 전역에 안정된 질서를 유지했다. 한민족은 세계에서 가장 길고 튼튼한 민족국가의 역사를 가진 민족이다.

이 민족국가의 존재가 민족문화의 발전을 뒷받침해 주었다. 무엇보다도 15세기 초의 한글 창제에 깊은 뜻이 담겨 있었다. 나는 한글이 세계에서 가장 일찍 만들어진 근대적 민족문자라고 생각한다. 인구의 대다수가 문자를 향유하게 한다는 점에서 근대적인 것이고 민족문화를 담는 민족 고유의 문자라는 점에서 민족문자라고 하는 것이다.

한민족의 문화는 민족문화로서 뚜렷함과 단단함이 매우 뛰어난 문화다. 근대에 들어와 갑자기 발명된 전통이 아니고, 이 문화를 공유하는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가 아니다. 오래된 전통이고 실존의 공동체다.

 

경쟁의 민족주의와 협력의 민족주의

 

하지만 그렇다 해서 한민족의 민족주의에 대한 반성이 전혀 필요 없는 것은 아니다. <전통의 발명>에 다뤄진 메이지시대 일본의 사례를 살펴보면, 오랜 전통인 신도(神道)가 국가신도로 변형되는 과정에 분명히 발명의 의미가 있었다. 신도는 오래된 전통이지만 서양에게 배운 일본 내셔널리즘의 주축이 된 국가신도는 전통 신도와 크게 다른 것이다. 메이지시대 이후 국가주의 형태로 표현되어 온 일본인의 민족의식에는 유럽인의 내셔널리즘과 마찬가지로 조작되거나 과장된 점이 있었다.

한민족의 민족의식도 마찬가지다. 물고기가 물을 의식하지 않고 사는 것처럼 민족의 의미를 크게 의식하지 않고 살던 한민족의 민족의식이 일본 내셔널리즘의 침략에 자극받아 갑자기 강렬한 표현의 필요를 느끼면서 근대 내셔널리즘의 형태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근대 내셔널리즘은 정상적 민족의식에 비해 현실을 왜곡하고 과장하는 특성을 가지는데, 조선에서는 침략당하는 입장의 피해의식 때문에 그 특성이 더욱 강했다.

근대 내셔널리즘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경쟁지향성이었다. 근대 이전 사람들은 인근의 다른 민족을 우리와 다른 사람들로 인식하면 됐지, 우리보다 열등한 존재로 볼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근대 내셔널리스트는 다른 민족을 우리보다 우월한 존재나 열등한 존재로 규정해야만 직성이 풀린다. ‘우승열패의 근대적 인간관이 민족의식에도 적용된 것이다.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될 때 식민지시대의 민족주의와는 다른 형태의 민족주의가 필요하게 되었다는 인식으로 신민족주의이야기가 나왔다. 안재홍이 19459월에 발표한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가 대표적인 논설이었다. ‘경쟁정복의 민족주의에서 협력공존의 민족주의로 나아간다는 지향성이 이 글에 나타났다.

그러나 반도 남북에 독재정권이 자리 잡음에 따라 민족주의의 자연스러운 발전이 다시 막혔다. 독재정권이 이용하기에는 편협하고 배타적인 민족주의가 편리했고, 그 때문에 한국 민족주의는 시대상황의 변화에 맞춰 발전하지 못했다. 그 결과 한국사회의 민족주의에는 상상의 공동체발명된 전통으로 반성할 요소들이 아직도 남아있다. 남북 어느 쪽이나 마찬가지다.

오늘날 세계정세의 변화 추세에 비추어볼 때 근대 내셔널리즘의 경쟁적-독선적 세계관을 벗어날 필요는 분명하다. 이 측면이 1970년대 이후 많이 이야기되어 왔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근대적 개인주의를 넘어설 필요가 있으며, 민족주의와 같은 네트워크 속의 소속감확충이 그를 위해 좋은 방도라는 점을 나는 생각하게 되었다. 요컨대 근대 내셔널리즘의 거품을 빼면서 자연스러운 수준의 민족주의를 살려내는 것을 진행 중인 세계적 변화 앞에서 우리 사회의 중요한 과제로 보는 것이다.

 

본딩(bonding)’ 조직력과 브리징(bridging)’ 조직력

 

앞으로 변화의 방향과 방법을 모색함에 있어서 자연스러움이라는 기준을 중시할 필요가 있다. 인간사회는 긴 역사를 통해 온갖 변화를 겪어오는 동안 변화의 고통을 최소화하면서 변화의 혜택을 최대화하는 방법을 체득해 왔다. 그 방법에 적합한 태도를 일반인은 자연스럽게느낀다. 물론 사회가 겪는 변화에는 언제나 새로운 것이 있기 마련이고, 그런 요소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자연스러운 태도에서 벗어날 필요도 일어난다. 하지만 자연스러운 태도를 기본으로 하고 꼭 필요한 범위 내에서 태도를 바꾸는 것이 안전하고도 효과적인 적응방법일 것이다. 문명 초기부터 인간이 역사를 공부해 온 중요한 목적 하나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산업혁명 이후의 근대문명은 자연스러움을 원천적으로 거부했다. 극단적인 경우 이전의 문명상태를 모두 야만으로 규정하고 새로 나타난 산업문명만이 제대로 된 문명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철 지난 이 주장을 지금 우리사회에서는 뉴라이트가 내놓고 있다.

인간을 이기적 존재로 규정하려는 뉴라이트의 주장이 그 연장선 위에 있다. 이기심은 인간의 속성 중 하나다.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크게 나타나기도 하고 작게 나타나기도 하지만 이기심 하나에 의해서만 행동이 결정되는 사람은 병원에(또는 교도소에) 보내야 한다. 자본주의체제가 원래 이기심의 역할을 키우려는 경향을 가진 것이기는 하지만 이기심 외의 다른 인간성을 완전히 무시하려 드는 것은 지나친 극단이고, 신자유주의가 자본주의체제의 막장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자본주의체제는 일체의 전통을 야만봉건이란 이름으로 타기했다. 그 체제에 더 이상 의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전통의 가치를 다시 음미할 필요가 있다. 전통 중에는 물론 더 이상 복원이 불가능하거나 바람직하지 않은 요소들도 있다. 그러나 농업문명 단계에서 자연조건이 주는 제약과 그 제약에서 비롯되는 인간 사이의 억압을 가능한 한 가볍고 편안하게 받아들이려는 노력이 전통 속에 담겨 있다. 이제 산업사회의 정상상태를 바라보기 위해서는 농업사회의 정상상태를 참고로 할 필요가 있다. ‘정상상태라는 공통점 위에서 전환기와의 차이점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정부 체제는 지금까지의 근대국가처럼 하나의 정부가 모든 국민을 개인으로 상대하는 체제가 아닐 것이다. 지지와 보호를 교환하는 계약관계가 중층적으로 맺어지는 봉건제처럼 유기적 관계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 유기적 관계 속에서는 파편화된 개인으로 존재하는 구성원보다 안정된 공동체를 가진 구성원들이 유리한 조건을 누릴 것이다.

공동체의 가치가 자본주의체제 안에서도 부각되기 시작하는 추세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자본의 네 가지 형태로 토지, 건물, 기계와 함께 인간 자본을 꼽았다. 이 인간 자본이 인간 자체가 아니라 생산에 공헌하는 인간의 능력, 즉 그 물질적 측면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오랫동안 해석되어 왔는데, 근년의 사회적 자본탐구는 인간 자본의 의미를 점점 더 넓게 바라보고 있다.

로버트 퍼트넘의 <나 홀로 볼링 Bowling Alone>은 사회적 자본으로서 네트워크의 중요성을 부각시킨 책이다. 인간관계의 형태를 '본딩(bonding)''브리징(bridging)'으로 구분한 점이 이 책에서 특히 주목을 끈다. 본딩은 동질적 집단 내의 유대감이고, 브리징은 이질적 집단들 사이의 연대감이다. 대표적인 본딩 조직은 조폭이고, 브리징 조직은 자원 봉사나 취미 활동 등 금전적 이익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단체에서 나타난다.

두 가지 조직력의 적절한 배합이 사회적 자본의 확충을 위해 바람직한 것이라고 퍼트넘은 설명한다. 각 집단 내에 적정 수준의 본딩 조직력을 가지면서 다른 집단들 사이에도 집단이기주의를 뛰어넘는 브리징 조직력을 가지는 것이 개인, 집단, 사회의 이해관계를 잘 조화시킬 수 있는 조건이며, 또한 경제 발전을 순조롭게 해주는 조건이라는 것이다.

어느 집단이든 조직력을 가진다는 것은 구성원들이 조직의 목적을 위해 희생과 양보를 할 때 가능한 것이다. 그 희생과 양보의 중요한 내용이 개인의 자유와 권리다. 유기론적 세계체제 안에서는 여러 층위에서 맺어지는 이런 관계가 네트워크를 이루게 될 텐데, 그 기본 원리의 한 모퉁이를 퍼트넘이 보여준 것이다. 자본주의체제 자체도 이런 방향의 변화를 내다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임을 여기서 알아볼 수 있다.

 

근대인에 대한 개인주의의 지배력

 

근대는 개인주의의 시대였다. 사회가 독립적 개인으로 구성된다는 생각은 물질이 독립된 원자로 구성된다는 물리학의 원자론을 빌려온 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물리학에서는 원자론이 자취를 감췄는데도 사회에 대한 개인주의 관점은 강고하게 남아있다.

개인주의(individualism)’란 말과 대칭되는 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개인주의의 위력을 확인할 수 있다. 전체주의? 사회주의? 어느 말도 개인주의처럼 보편적 원리의 표현으로 쓰이지 못해 왔다. 영어에서는 ‘corporatism’이 제일 비슷하게 쓰이는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조차 분명치 않다. 북한체제의 특징을 ‘corporate state’라고 한 브루스 커밍스의 글을 옮긴 두 권의 책에서 이 말이 기업국가로 번역된 것을 보았다. 우리 사회에는 이 말에 대한 인식이 없다시피 한 것이다. 나는 유기체론이라고 옮겨서 쓰겠다.

조직 원리로서 개인주의는 유동성이 크고 점성(粘性)이 약한 원리다. 개인주의 사회의 구성원은 주변사람들로부터 구속을 받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유롭지만, 그 대신 그들의 보호와 도움도 받지 못한다. 그래서 자본권력의 침해에 대한 저항력이 약하다. 한편 봉건이란 말로 흔히 표현되는 중세의 유기체론 질서는 점성이 강하다. 구성원들이 서로 구속과 도움을 주고받기 때문에 초월적 권력의 침해에 대해 강한 저항력을 가지는 것이다.

머레이 북친의 말처럼, 인간의 지배와 자연의 지배는 같은 틀에서 나온다. 점성이 약한 사회의 파편화된 개인을 손쉽게 지배하는 초월적 권력은 지배의 수단인 빵과 서커스를 제공하기 위해 자연을 무절제하게 착취하려 든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모순, 인간과 자연 사이의 모순이 나란히 드러나는 것이다.

근대인은 봉건이란 말에 경멸감부터 품었다. 독립된 개인의 인격에 제약을 가하는 인신 예속의 조건 속에 살았던 조상들을 가엾게 여겼다. 그러나 이런 오만은 인간의 존재가 자원의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은 환상에서 나온 것이었다. 인간은 아득한 옛날부터 늘 자원 부족을 걱정하며 살아왔다. 그 걱정을 잊어버린 근대인이 비정상이었다. 자연이 아낌없이 주는너그러운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지 않으면 파국이 멀지 않다.

인간과 자연 사이의 긴장관계에 대한 깨달음은 개인주의를 후퇴시키고 유기체론의 비중을 늘리게 될 것이다. 물론 중세의 봉건질서가 그대로 복원될 수는 없다. 극단으로 치달았던 변화의 길을 되돌아오다가 지금의 문명단계에 맞는 자리를 찾게 될 것이다.(유기체론이 파시즘에 이용된 것은 관성에 의해 반대쪽 극단으로 넘어간 것이라 할 수 있다.) 몽땅 내버렸던 유기체론 원리를 어느 정도 회복시킬 것이다.

전 세계적 질서에도 유기체론의 원리가 적용될 것이다. 19세기 동아시아인에게 만국공법이란 이름으로 강요되었던 근대 국제법체계는 개인주의 원리를 세계질서에 적용한 것이었다. 이 원리에 따라 만들어져 있는 국민국가들이 물론 일거에 사라질 것은 아니지만, ‘국가주권의 대내외적 우선권은 줄어들 것이다. 개인과 가족에서 시작해 세계정부에 이르기까지 양파껍질 같은 공동체의 중층(重層) 속에서 국가는 꺼풀의 하나가 될 것이다.

유기체론의 원리에 따른 중층적 질서 속에서 개인의 생활과 활동 조건은 어떤 공동체들 속에 자리 잡느냐에 크게 좌우될 것이다. 튼튼한 민족국가의 존재는 그 구성원들에게 많은 혜택을 보장할 것이다. 이런 상황 속의 민족국가는 다른 층위의 공동체들, 그리고 같은 층위의 국가들과 경쟁보다 협력을 얼마나 잘하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결정될 것이다.

민족국가의 이념으로서 민족주의는 19-20세기에 유행한 근대 민족주의처럼 경쟁과 대결을 위한 선전수단이 아니라 협력의 주체로서 국가의 역할을 뒷받침해주는 방향으로 발전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위(sollen)’로서의 국가보다 존재(sein)’로서의 민족이 민족주의의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발전에 대한 희망을 나는 <밖에서 본 한국사>를 맺는 말 끝에 이렇게 적었다.

 

남을 깔보지 않으면서도 우리 뿌리에서 아낄 만한 미덕을 찾고, 이웃을 존중하면서도 우리의 떳떳함을 잃지 않는 교양의 정신을 이 책에 담고자 했다. 이웃 간의 경쟁보다 협력이 더 중요한 시대가 오고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투쟁의 무기보다 교양의 샘을 역사에서 찾으려는 것이다.

 

Posted by 문천

 

임동원은 19982월 김대중 정부 출범 때부터 외교안보수석보좌관으로 일하다가 19995월말 통일부장관으로 취임했다. 대통령의 그늘에서 정책을 기획, 입안하던 위치에서 집행하는 위치로 나온 것이다. 그 동안 햇볕정책의 구체적 추진방향도 세워져 있었고 미국 등 주요 관계국과의 정책 조율도 어느 정도 이뤄져 있었다.

그런데 임동원은 불과 7개월 후인 1999년 연말에 국가정보원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대북관계에서 정상회담 추진이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남한 정부의 대북관계 업무를 맡는 핵심부서로 통일부와 국정원이 있었는데, 통일부는 보이는 일에, 국정원은 보이지 않는 일에 중점을 두는 것이었다.

임동원은 회고록 <피스메이커>에서 국정원장 취임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1223일 갑자기 대통령에게 불려가 이튿날 국정원장으로 부임하라는 뜻밖의지시를 받았다고 한다. 자신이 적임자가 아니라고 단호히고사했으나 대통령의 결심을 바꿀 수 없었다고 한다.

어떤 회고록이든 글 쓰는 목적에 따라 서술에 굴절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 목적이 사사로운 이익에 있다면 참고 가치가 크게 떨어진다. 임동원의 회고록은 공익을 목적으로 하는 것으로 내게는 보이는데, 그래도 이런 대목에서는 의아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직책 변경은 개인의 일이 아니라 대북정책의 틀이 걸려있는 일이다. 그런 중요한 일을 본인 모르게 대통령이 확정해놓을 수 있었을까?

남북정상회담의 추진과정에 대해 한나라당을 중심으로 한 수구세력이 집요하게 의혹을 제기했고, 그에 따라 특검 조사와 관계자 처벌이 있었다. 공방이 치열했던 문제이기 때문에 그 과정의 서술에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밝히기 어려운 점도 있으리라 생각된다. 김대중과 임동원의 회고 양쪽에 모두 정부의 정상회담 검토가 20001월말 이후에 시작된 것으로 되어 있다.

 

그즈음 북쪽으로부터 의미 있는 신호가 왔다. 1월 말쯤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이 청와대 관저로 찾아와 뜻밖의 보고를 했다.

현대가 북측 인사를 접촉해 보니 남북 정상 회담이 가능할 것 같다고 합니다.”

나는 한참을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현대는 금강산 관광과 소떼 방북 등 북한과 교류해 왔기 때문에, 그동안의 북한과 현대의 관계로 볼 때 역할이 가능할 것입니다. 현대에 연락해서 한번 알아보시오.”

예감이 좋았다. 국정원의 주례 보고를 듣는 자리에서 임동원 원장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북한이 정상 회담 추진 의사를 밝혀 왔습니다.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이 현대 정몽헌 회장을 만났더니 북한이 정상 회담 추진 의사가 있다고 전했답니다. 국정원에서도 이 문제를 알아보고 검토하십시오.” (<김대중 자서전>(삼인 펴냄) 2: 235)

 

설 연휴를 하루 앞둔 200023일 목요일 오후, (...) 이날 보고를 마치자 김 대통령은 나에게 의외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북한이 정상회담 추진의사를 전해왔어요. 어제 박지원 문화관광부장관이 현대의 이익치 회장과 요시다라는 사람을 만나 북측의 정상회담 추진의사를 전달받았는데, 이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곧 제3국에서 박지원-송호경 접촉을 갖자는 제의도 받았다는군요. 그런데 이 제의가 신빙성이 있는 것인지, 또 실현가능성이 있는 것인지를 잘 모르겠어요. ”라며 국정원에서 이 문제를 자세히 검토하여 보고하라고 지시하는 것이었다.

나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국정원장으로 취임한 지 이제 한 달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렇듯 종요한 대북관계 정보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김 대통령은 대통령취임사에서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제의한 이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북측에 호응을 촉구해왔다. (<피스메이커> 25-26)

 

1970년대 초 중앙정보부 시절부터 북한과의 비밀접촉에는 국정원이 중요한 역할을 맡아왔다. 임동원의 국정원장 기용은 다른 무엇보다 남북정상회담 추진에 뜻이 있었을 것 같다. 그가 자리를 옮긴 한 달 후에 공교롭게 그 과제가 나타났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이 점에서는 임동원의 서술이 곧이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정상회담 추진과정에서 선의로 취한 조치까지도 시빗거리로 삼던 그 후의 상황을 감안하면 이런 의문 때문에 그의 회고에 대한 불신감이 들지는 않는다. 앞뒤 상황을 감안하고 읽을 필요를 느낄 뿐이다.

남북정상회담! 수십 년간 적대상태로 지내던 남북한이 정상회담을 연다는 데는 많은 뜻이 함축되어 있었다. 시늉만의 긴장 완화였던 1972년의 7-4공동성명은 제쳐놓고, 1980년대 말부터 긴장 완화의 추세가 분명히 나타났다.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비핵화선언이 나오고 유엔 동반 가입이 이뤄졌다. 그러나 휴전선의 군사대치는 계속되고 있었다. 이런 교착상태에서 한쪽 국가원수가 휴전선을 넘어가 상대방을 만난다면, 그 만남 자체가 휴전선의 의미를 크게 바꾸고 남북관계를 새로운 차원으로 가져가는 것이었다.

정상회담을 열 동기는 양쪽에 모두 있었다. ‘한반도 평화같은 원대한 목적 외에도 현실정치를 위한 구체적 동기가 있었다. 북한은 극심한 경제난을 겨우 벗어났다고는 하지만 고립상태를 벗어나지 않고는 장래를 바라볼 길이 없었다. 상당 수준의 경제발전을 이뤄놓은 남한에게는 군사적 긴장을 벗어나는 것이 초미의 과제가 되어 있었다.

양측의 동기를 굳이 비교한다면 북측의 동기가 더 절박하고 중대한 것이었다. 그런데 전두환 시절 이래 정상회담 논의가 간간이 나올 때마다 남측에서 매달리고 북측에서 튕기는 모습이 거듭되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하나는 경제상황으로 나타난 체제경쟁에서 북측이 불리하기 때문에 급격한 접촉 확대를 꺼린 것이다. 또 하나는 북측과 달리 남측에는 정권의 경쟁이 있기 때문에 정상회담 성사의 공로를 다투는 상황에 있었다. 노태우 정권은 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일부러 고위급회담의 진행을 늦췄다는 지적이 있고, 김영삼 정권은 정상회담 욕심 때문에 대북정책이 혼란스러웠다는 지적이 있다.

2000년 정상회담 추진과정에서 현대그룹이 큰 역할을 맡았다. 앞서 연재 8회에서 박철언의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 중 이런 대목을 인용한 일이 있다.

 

22, 정주영 회장이 귀국했다. 공항에서 동행을 요구하는 안기부 직원들을 따돌리고, 오후 150분경 바로 청와대의 내 사무실로 달려왔다. 정 회장은 허담 비서가 박 대표에게 정중한 안부를 전해달라고 당부하더군요. 허담 비서는 비방 방송의 중지 제의를 총리 회담 예비 회담에서 할 예정이라며, 팀스피리트 훈련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내가 정면으로 반박했습니다. 허 비서는 군비 축소도 주장했습니다라고 허담과의 대화 내용을 설명했다. (...)

그러나 정주영과 내가 구상-추진했던 금강산 관광-개발은 엄청난 역풍에 부닥쳐야 했다. 물론 9년 후인 199811월에야 역사적인 첫 금강산 관광이 이루어졌으나, 당초의 구상대로였다면 19897월에 첫 금강산 관광이 이루어지고 대북 경협도 10년은 빨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전향적인 대북 정책과 자주 세계 외교 시대를 향한 북방 정책에 대한 안팎의 비판과 견제가 너무 심했다.(257-58)

 

19892월 정주영이 평양 방문에서 돌아왔을 때의 일이다. 현대는 북한 관계 사업을 이미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영삼 정권 아래 막혀 있다가 김대중 정권의 햇볕정책을 만난 것이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했을 것이다. 북한이 햇볕정책에 아직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던 1998년에 소떼 방북과 금강산관광사업을 이룬 것을 보면, 정부가 가로막지만 않을 경우 독자적으로 사업을 추진할 길을 확보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현대로서는 남북 간의 정부 간 관계가 발전할수록 사업에 유리한 입장이었다. 그래서 대화 통로를 찾아주었을 뿐 아니라 이후의 교섭에서 남측 정부가 직접 충족시켜줄 수 없는 북측 요구를 대신 나서서 충족시켜주려고까지 했다. 남북정상회담 공동발표문은 세 차례 특사회담 끝에 200048일 합의가 이뤄져 410일 발표되었다. 합의 직전 김대중 대통령이 박지원 특사에게 내린 지시를 임동원은 이렇게 기록했다.

 

47일 아침, 김 대통령은 제3차 실무접촉 결과를 보고받고, 박지원 특사에게 이튿날 베이징에 가서 최종 합의할 것을 지시했다. 그 자리에서 김 대통령은 박 특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잘사는 형이 가난한 동생네 집에 빈손으로 갈 수는 없지요.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는 마당에 식량난 등 북한주민들의 어려운 사정을 감안해주는 게 도리 아니겠습니까. 박 특사께서는 이번 정상회담 선물로 우리가 현금 1억 달러를 지원할 수 있다는 입장을 가지고 마지막 협상에 임하도록 하세요.”

사실 그동안 우리측에서는 1억 달러 규모의 식량이나 비료 등 물자를 선물로 제공할 것인가, 아니면 북측이 희망하는 현금을 제공할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줄곧 있어왔다. 그리고 3년 후 특검을 통해 밝혀졌지만, 사실상 이 1억 달러 현금 제공안은 실현되지 못했다. (<피스메이커> 34)

 

김대중, 임동원을 비롯해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킨 관계자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지만 이 발표의 타이밍은 참 고약했다. 총선 사흘 전이었던 것이다.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꼭 필요한 지원과 협력까지도 퍼주기로 손가락질하는 세력 앞에서 정상회담 발표의 이런 타이밍 결정은 너무 교활하거나, 아니면 너무 우둔한 것이었다. 이 타이밍에 북한이 보조를 맞춰주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대가를 지불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현금 1억 달러제공도 퍼주기논란의 빌미가 될 수 있는 것이었다. 앞으로 어려운 동포들을 위해 해줄 좋은 일을 회담장에 가서 약속하는 것은 좋지만, 만남 자체를 위해 거금을 공식적으로 건네준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결국 이 안이 실현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협상이 다급할 때 너무 무리한 제안을 했었다는 사실이 확인된 때문이 아니었을지.

북한과의 교섭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임동원은 총선 3주일 후에 알았다고 한다. 54일 박지원이 현대 측 인사들을 만났을 때 현대가 북측과 ‘7대 경협사업의 독점권에 합의했다는 사실을 들었다고 그 날 밤 전화로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임동원이 즉각 조사한 결과 합의 내용이 아래와 같이 파악되었다. 합의의 대가로 현대가 4억 달러를 미리 지불하기로 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피스메이커> 42-43)

 

* 북측은 모든 SOC와 기간산업시설에 대한 사업독점권을 현대에 30년간 부여한다.

* 이 중 경의선 철도연결 및 복선화사업을 비롯하여 서해안 산업공단 건설사업, 통신현대화사업, 발전시설사업 등 7개 사업을 조속히 추진한다.

* 현대는 국내외 기업과 관계기관을 망라한 컨소시엄을 구성하여 해당 사업을 추진한다.

* 북측은 토지 무상제공을 비롯하여 경제특구에 적용되는 모든 혜택을 현대에 보장한다.

 

가변성이 큰 현실 위에서 이런 포괄적이고 장기적인 계약은 투기성이 너무 큰 것이었다. 정상회담 추진 단계까지 현대는 남북관계 진전에 큰 동력을 제공하며 지저분한 일을 떠맡는 핸디 맨노릇을 했지만, 너무 큰 역할을 너무 오래 지킨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남북관계가 현대 사업에 좌우되는 기형적 상황을 생각할 수 있었다.

이 일이 대통령에게 보고되었을 때 반응과 조치 내용을 임동원은 이렇게 설명했다.

 

며칠 후 이기호 수석은 현대측과 협의한 결과를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이 자리에는 박지원과 내가 동석했다. 대통령은 현대와 북측의 처사에 대단히 불쾌하다는 태도로 반응했다. 현대가 정상회담 성사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하고 남북경제공동체 건설을 위해 정부와 한 배를 탄 것도 인정하지만 이렇듯 독단적인 행보는 옳지 않다는 것이었다. (...)

또한 김 대통령은 북측의 태도도 용인할 수 없다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남북관계의 특수성 때문에 이런 대규모 사업은 당국간 협조 없이는 절대 할 수 없는 것임을 잘 알 텐데 어떻게 이런 식으로 하려는 것인지 못마땅하다는 것이었다.

결국 김 대통령은 이기호 수석에게 책임지고 현대를 설득하여 바로잡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통일부는 현대의 사업승인요청을 서류 미비등의 이유로 접수를 거부한 상태였다. 그러나 현대가 이미 저질러놓은 일을 쉽사리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리 현대가 우리정부의 사전승인 없이 일방적으로 추진한 일이라 해도 북한과 이왕 합의한 이상 정부가 나서서 취소시킬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다. 3년 후 집권한 노무현 대통령이 특별검찰을 임명하여 조사하도록 했던 이른바 대북송금사건은 이렇게 잉태되었다. (같은 책 44-45)

 

2003년 특검을 통해 45000만 달러의 금액이 국정원 계좌를 통해 북한으로 송금된 사실이 확인되면서 여러 관계자들이 처벌받고 현대의 정몽헌 회장이 투신자살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된다. 이 흠집은 남북관계의 발전에도 큰 장애가 되었다. 1990년대 중엽의 남북관계 발전을 위한 좋은 여건을 잃어버린 결과 2000년의 정상회담 추진에 무리한 조건이 만들어졌고, 그로 인해 파생된 문제들을 실정법차원에서 까밝힘으로써 관계 발전의 동력을 잃어버린 과정을 보면 민족문제에 대한 남한 사회의 미숙한 인식이 남북관계 발전의 큰 걸림돌이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노무현의 정치철학을 전반적으로 높이 평가하는 내 관점으로도 2003년의 특검 진행은 이해할 수 없는 조치였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