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2. 18. 13:46

 

박사학위논문을 심사받을 때 심사위원 5인 중 내 연구스타일을 부정적으로 본 위원이 두 분 있었다. 한 분은 정면으로 내 논문의 가치를 부정하지는 않으면서 기술적인 문제를 지적하는 정도였는데(내가 보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방식으로), 한 분은 회의 석상에서 감정까지 드러내며 내 논문과 나를 매도했다. 그중 적나라한 표현이 이런 것이었다. "이건 연구논문이 아니라 소설이에요!"

 

내 논문의 가치를 지지하던 한 분의 이 발언에 대한 반응이 재미있었다. "소설이라...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나는 전공분야가 먼 입장이라 심사 맡으면서 논문 읽을 일을 큰 고역으로 예상했는데, 막상 붙잡고서는 앉은 자리에서 다 읽을 수 있었어요. 참 쉽고 재미있게 썼습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어떻게 그 논문이 통과되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통과에는 심사위원의 전원 찬성이 필요한 건데... 심사위원 사이에 꽤나 심각한 갈등이 있었으리라는 것은 통과가 결정된 뒤, 은근히 반대해 온 분의 말씀에서 알아볼 수 있었다. "김 선생, 통과는 시켜주지만 이 논문은 완전한 게 아니니까 그대로 출판하거나 할 생각 하지 마시오." 어떻게 해야 완전하게 만들 수 있는지 알 수 없어서 아직까지 출판을 못하고 있다.

 

당시 나는 교수직에서 물러나 연구와 활동의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역사소설을 하나의 가능성으로 떠올리고 있었는데 학위논문을 소설로 보아주는 분이 있었다는 것이 참 고무적이었다. 그래서 가상편지 형식으로 습작 단편을 몇 편 만들어봤는데, 그중에 <역사비평>에 실은 것도 있다.

 

장편소설을 위한 구상도 해봤다. 초기 서학(西學)에 보유론(補儒論)에 입각한 경세(經世)적 경향과 신앙적 경향이 엇갈려 있었다는 사실을 19세기 전반 박해기 상황 속에서 부각시키는 작품이 그럴싸하게 생각되었다. '유방제(劉方濟)'란 이름으로 알려져 온 중국인 신부에게 초점을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산이 유방제 신부에게 선종했다는 대목이 달레 <교회사>에 있는데, 주문모(周文謨) 이후 조선에 온 두 번째 중국인 신부인 유방제는 프랑스(외방전교회) 신부들과의 갈등 때문에 쫓겨나다시피 조선을 떠나야 했던 사람이다. 유방제는 다산의 경세젹 경향에 통하는 사람이었고 신앙을 절대시하는 프랑스 신부들과 그 점에서 부딪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 차례 정리해서 <교회사연구>에 실은 글이 있다. 한중수교 이후 중국 자료에 접근이 쉬워지면서 유방제 신부의 정체가 밝혀졌는데, 내 추측이 합당했던 것 같다.

 

그런데 당시에는 장편소설의 시도가 벅차게 느껴졌다. 뼈대는 세울 수 있어도, 살 붙이는 일이 엄두가 안 났다. 숨을 불어넣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구상만 좀 해보다가 덮어놓고 말았다.

 

그러다가 다시 생각해볼 계기가 된 것이 지난 여름 제도권 연구프로젝트에 참여를 권유받은 일이다. 무척 반가운 일이라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다. 제도권 기준을 무시하고 내 방식대로 20년간 공부를 진행해 온 지금에 와서 그런 제안을 받는다는 데 내 공부의 가치를 인정받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후 차분히 생각해보면서, 반가운 제안이라 해서 무조건 받아들일 일인지 되씹어보게 되었다. 내 방식의 공부를 쌓아온 결과, 제도권 기준에 따른 학술논문 아닌 '에세이'라는 표현방식을 찾아냈다. 인세 수입이 빈약하기는 해도, 공부의 성과를 사회에 전하는 데는 그만하면 성공한 셈이다. 이제 나이도 나이인데, 공부를 더 넓히기보다 지금까지 빚어온 성과를 사회에 더 잘 전하는 길에 노력을 집중할 단계 아닐까? 연구지원비가 크다 해서 넓은 길로 나오던 내가 좁은 길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내 일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역행하는 것이 아닐까? 그 과제를 수행한다 해서 내가 아주 제도권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더 넓은 길에 대한 생각을 하다가 소설 생각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연구논문에서 에세이로 길을 넓혀 나왔지만, 에세이라도 나는 학술문헌의 한 형태로 활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설도 학술문헌의 한 형태로 활용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실제로 큰 가치를 인정받은 소설 중에는 그런 성격의 작품도 많이 있지 않은가.

 

20년 전 역사소설의 가능성을 가늠해 보던 때와 지금을 비교해 보면, 소설이란 표현방법을 취할 만한 자세가 이제 꽤 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예전에 얽매여 있던 많은 집착에서 벗어나 관조하는 자세로 옮겨왔기 때문에 '사람 이야기'를 펼치는 데 거리낌이나 얽매임이 별로 없을 것 같다. 얼마 전부터 전주에 격주로 다니면서 일상적 작업에서 벗어난 며칠간의 '휴가'를 갖게 되면서 이 생각을 집중적으로 굴려보게 되었다.

 

이번 주초에 다녀오는 동안 구체적인 구상이 떠올랐다. 꽤 그럴싸한 틀이 될 것 같다.

 

두 편의 소설로 연작을 이루는 것이다. 한 편은 역사소설 <1945>. 연합국의 승세가 굳어지는 단계에서 독일 항복, 일본 항복을 거쳐 모스크바외상회담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상황을 받아들이는 서양인들과 조선인들의 입장과 태도를 대비시켜 펼쳐 보이는 것이다. <해방일기> 작업으로 내용이 확보되어 있고, 재미있는 읽기를 통해 '해방'의 의미를 우리 사회에 깊이있게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든다.

 

또 한 편은 공상소설 <2045>. SF(science fiction)보다 PF(political fiction)로 생각한다. 제일 비근한 모델로는 헉슬리가 떠오른다. '자본주의 이후'에 대한 생각을 담고 싶다. 원자론적 원리가 퇴조하고 유기론적 원리가 득세하는 상황은 어떤 모습으로 펼쳐질 것인가. 종래의(근대세계의) 패권 교체 양상과 달리 인간세계의 복잡성이 있는 그대로 인정받기 때문에 퇴조하는 세력도 존재가 용납되는 상황을 그려보고 싶다.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한계를 놓고는 명쾌한 논설이 잘 나오고 있지만, 그 대안에 관한 담론은 무척 빈약하다. 그 중요한 이유 하나가 '보이는 것'에 얽매이는 근대학문의 성격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대안의 주된 내용이 지금까지 통용되는 연구방법으로 잘 포착되지 않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 그렇다면 소설 같은 표현방법에서 큰 역할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착수할 <서세동점의 끝>은 근현대사의 해석과 자본주의 이후에 대한 생각을 연결해서 정리하는 것이다. 반 년가량 그 작업을 하면서 그 뒤에 소설 집필에 착수할 수 있을지 궁리하고, 판단이 서면 준비를 시작해야겠다. 내 작업에 관심 가진 이웃들의 의견도 열심히 듣고자 하는 뜻에서 아직 설익은 생각을 여기 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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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남재희 선생과 조용히 앉아 이야기 나눈 일이 몇 해 전 꼭 한 차례 있다.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내가 청한 자리였는데, 막상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정작 부탁하려던 일은 꺼내봤자 잘 될 것 같지도 않아서 꺼내지도 않고, 잡담만 하다가 싱겁게 헤어졌다.

그 때 부탁하고 싶었던 것이 옛날이야기를 좀 체계적으로 해달라는 것이었다. <해방일기> 집필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면서 그를 이을 대한민국 실록작업을 구상하게 되었다. 구상하다 보니 문헌으로 구할 수 있는 자료를 넘어 기억에 의거한 구술 자료를 얻고 싶은 마음이 들었고, 그 대상으로 남 선생이 떠오른 것이었다.

남 선생은 중요한 일을 아주 많이 아는 사람이다. 1950년대에서 90년대에 걸쳐 언론인과 정치인으로서 오랜 경력이 일단 두드러진다. 그리고 그것만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겪는 일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성찰을 하면서 겪어온 사람이다. 그래서 사회를 상대로 자기 지식과 경험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설명할 능력을 가졌다는 점에서 귀중한 사람이다.

그런 남 선생에게 회고록 작성을 권하고 싶었다. 앞서 냈던 <정치-언론 풍속사>(민음사 펴냄)의 미시적 시각을 뛰어넘어 대한민국사의 거시적 시각에서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한 차례 정리할 것을 권하고 싶었다. 역사학자인 내가 문헌 조사나 관점 정리를 도와드린다면 의욕을 일으키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가 좋은 회고록을 쓰도록 도와드릴 수 있다면 내가 혼자 작업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성과를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체계적인 회고록 작성을 권하는 말씀을 조금 꺼내보다가, 반응이 시원찮아서 내가 도와드리고 싶다는 구체적인 이야기까지는 꺼내지도 않고 말았다. 그런데 그는 나름의 회고 작업을 꾸준히 해서 작년 초에 <통 큰 사람들>(리더스하우스 펴냄)을 내고 이번에 이 책 <진보 열전>을 낸다. 그리고 이번 책에 붙일 글을 내게 청해보라고 출판사에 권했다는 것이다.

왜 그런 청탁을 권했을까? 쓴 소리를 듣고 싶은 것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물이 절반 채워진 컵을 놓고 절반이나 있네.” 하는 사람도 있고, “절반밖에 없네.” 하는 사람도 있다. 이 책 내용의 재미와 가치를 높이 평가해서 저자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독자가 많겠지만, 나는 불만이 먼저 떠오른다. “이런 좋은 밑천, 시원하게 좀 풀어놓으시지.”

 

이 책에 담긴 내용을 <프레시안>에서 읽을 때는 이런 불만이 내 마음속에 깔려있었다. 그런데 편집자가 모아준 원고 전체를 보면서는 뭔가 새로운 느낌이 든다. 그래서 연재로만 읽었던 <통 큰 사람들>도 책을 구해서 봤다. 그러자 두 권의 책이 10년 전의 <정치-언론 풍속사>와 다른 점을 알아볼 수 있었다.

<정치-언론 풍속사>나의 문주(文酒) 40이란 부제처럼 개인적 에피소드를 생각나는 대로 적은 글이다. 그 직후에 나온 <아주 사적인 정치비망록>(민음사 펴냄)도 마찬가지다. 공적(公的)인 책임감을 묻지 말아달라고 사적(私的)’이란 말을 앞세우기까지 했다.

그런데 최근의 두 책에는 공적 가치를 바라보는 뜻이 겉으로 드러난다. 가벼운 인물스케치내지 휴먼 스토리를 표방하는 스타일이지만 인물 선정에서부터 공적 기준이 분명하다. 두 책 중 이번 책이 그 점에서 더 적극적이다. <통 큰 사람들>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인물들을 다루고 대중이 쉽게 흥미를 느낄 만한 측면을 서술한 데 비해 이번 책에서는 저자가 중요하게 여기는 인물의 보여주고 싶은 측면을 서술하는 쪽으로 비중을 옮겼다. 저자의 주관을 앞세운 것이다.

<진보 열전>에는 두 그룹의 사람들이 소개된다. 1남북관계에 얽힌 사람들2혁신정당에 매진한 사람들에 실린 여덟 사람은(1그룹) 저자가 언론인 입장에서 취재 대상으로 바라보던 사람들이다. 한편 3바른 언론을 위해 애쓴 사람들4언론인의 귀감이 된 거목들의 여섯 사람은(2그룹) 저자의 동료 언론인들이고, 그중에는 정치계에서도 함께 활동한 사람들이 들어 있다.

2그룹 인물들에 대해서도 남 선생 아니면 포착하기 힘든 시각이 많이 나타나 있지만, 그들이 활동한 언론과 문필 분야는 때와 장소에 관계없이 어느 사회에서나 주목받는 영역이다. 반면 제1그룹 인물들의 활동 영역은 20세기 후반의 대한민국에서 독특한 의미를 가진 분야다. 같은 사회의 바로 아래 세대인 우리도 맥락을 정확히 이해하기 어려운 영역인 만큼, 눈 밝은 그 세대 관찰자의 해설이 귀중한 것이다.

저자가 직접 겪어본 경험에 바탕을 둔 해설이기 때문에 공식적 정보에만 입각한 관점과 다른 점이 있다. 이 점을 저자 자신도 의식하고 있다.

좀 가혹한가. 거듭 말하지만 장 교수는 객관적이었고, 주최 측이 일종의 축하 행사에 인선을 잘못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나는 장 교수의 평가에 이의를 제기할 뜻은 없다. 다만 장 교수는 김철 씨를 직접 알지 못했고, 기록에 의지하여 평가한 것이라면, 김철 씨와 30여 년에 걸쳐 가끔 만나고 지냈던 나의 평가는 약간 다를 수밖에 없다.”

김철 씨 추모행사의 세미나에 발표자로 나선 장상환 씨의 엄격한 평가에 대한 소감이다. 기록에만 의지한 장 씨의 평가와 개인적 접촉을 가졌던 자신의 평가에 차이가 있다면, 더 넓은 근거를 가진 자신의 평가가 가진 의미에 자부심을 가졌을 것이다.

그런데 이 개인적 접촉이 관찰의 객관성을 저해하는 측면도 있지 않을까? 인정에 끌려 모진 비판을 삼가고 확실치 않은 가치를 너무 적극적으로 인정해 주는 경향도 있지 않을까? 저자 자신도 객관성에 그리 집착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는 대목이 많다.

내가 남 선생을 찾아뵌 것은 그를 한국현대사에 관한 귀중한 자료를 많이 생산해 낼 수 있는, 잠재적 사료(史料)공장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 책 원고를 비롯해 그의 글을 읽는 데도, 지금 이 글을 쓰는 데도 사료로서의 가치를 앞세워서 본다. 그와 그의 글을 다른 각도에서 평가하고 음미하는 독자들이 많겠지만, “제 눈의 안경이라 하지 않는가.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사료로서의 측면이다.

그를 만날 때 내가 청하고 싶었던 것이 바로 사료로서 객관성을 확충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그런 쪽으로 큰 흥미를 보이지 않았고, 주관적인 서술을 계속해 왔다. 나로서는 실망해 마땅한 일이다. 그런데 이제 그의 글에서 오히려 더 큰 만족감을 얻는다.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두 그룹의 인물들에 대한 서술 기조에서 온도 차이를 느낀다. 2그룹 인물들에 대해서도 애정과 유대감을 느끼는 대목이 많지만 전체적으로는 객관성을 유지하는 편인데, 1그룹 인물들을 놓고는 개인적 경험에 입각한 주관적 견해의 비중이 크다. 2그룹 인물들은 도중에 고생을 했건 뭐를 했건 나름대로 뜻을 펴는 데 성공한 이들인 반면, 1그룹 인물들은 역사의 표면에 제대로 나서지 못하고 그야말로 파묻혀버린데 대한 연민의 정이 느껴진다.

정치에서는 흔히 성공했다고 하는 사람만이 훌륭한 사람은 아니다. 실패한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 가운데도 훌륭한 사람이 많다. (...) 그러므로 세속적 기준에서는 비록 실패했다 하더라도 진정한 인재를 알아보고 그 훌륭함을 인정하는 데 인간의 구제가 있고, 역사의 올바름이 있는 게 아니겠는가. 나는 실패한 정치인 가운데서 오히려 자주 진실한 정치인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들 가운데서 오히려 인간적인 면을 느끼기도 하고, 인간의 길을 보기도 한다.”

너무 냉소적인지 모르지만, 한국 정치에서는 성공하지 못한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나는 갖고 있다. 성공한 사람 중에도 훌륭한 사람이 아주 없지는 않지만, 그것은 우연한 일일 뿐이라는 생각이다. 성공의 조건은 훌륭한 인품이 아니라 다른 데 있었다는 말이다.

해방공간을 들여다보면서 굳어진 생각이다. 민족사회의 주체적 발전을 바라본 민족주의자들에게, 민족주의자라는 사실이 바로 좌절의 조건이었다. 김규식 선생을 보라. 미군정의 신뢰를 누구 못지않게 얻은 인물인데도 민족주의를 등지지 못해서 경륜을 펼칠 수 없었다. 여운형 선생을 보라. 좌익을 넘어서는 광범위한 여망을 모은 사람인데도 외세 의존을 거부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외세에 등 대고 그들을 배제한 사람들이 권력을 쥐고, 그 입맛에 맞는 사람들만 승승장구하는 세상이 되었다. 좋은 뜻을 가진 이들은 바로 그 사실 때문에 권력에 가까이 갈 수 없는 풍토가 오랫동안 펼쳐졌다.

김규식과 여운형을 비롯한 소위 중간파가 곧 민족주의 진영이었다. 외세에 의존하는 극우와 극좌 세력이 현실을 장악했기 때문에 그 틈바구니에 끼어 중간파라는 초라한 이름으로 불리게 된 사실 자체가 민족주의의 설 땅이 없던 당시 상황을 보여준다.

이북에서는 민족주의가 힘을 쓰지 못하면서도 명목상의 존중은 받은 반면, 이남에서는 분단건국이 가시화되면서 노골적인 탄압을 받았다. 그런 상황에서 중간파 주요 지도자 일부가 정부 수립을 전후해 이북으로 넘어갔고(월북), 또 일부는 전쟁 때 북쪽으로 모셔졌다(납북).

남 선생 자신이 진보 열전이란 제목에 다소 불만을 느낄 것 같다. ‘진보’, 너무 대중없이 쓰이는 말 아닌가. 1그룹만 놓고는 혁신 열전이란 제목도 생각해 보았음직하다. 하지만 혁신도 한국에서 고생이 많았던 말의 하나다. 어느 방향의 혁신이란 말인가? 굵직한 지도자들이 거의 다 사라져버린 1950년대 남한에서 남아있는 중간파가 제대로 표현의 길을 찾지 못해 혁신계란 이름으로 낙착된 것도 서글픈 사실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의 요즘 혁신 핑퐁을 보며 더욱 서글퍼진다.

혁신계의 유래가 해방공간의 중간파에 있기는 하지만 1950년대 이후 혁신계의 정체성에는 애매한 점이 많다. 이 책 속에도 고정훈 씨를 놓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혹시 정보기관의 끄나풀로 의심을 받았다느니, 박진목 씨를 놓고 혹시 에이전트가 아니냐, 정계교란자가 아니냐 하는 오해를 샀다느니 하는 대목이 있거니와, 진보당사건 이후 현실적 근거를 잃은 혁신계는 그 존재 자체가 의혹의 대상이 되었다.

혁신계는 한국 정치사에서 매우 큰 의미를 가진 존재다. 독재정권과 보수야당의 양당체제에 수용되지 않는 넓은 영역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영역이 넓은데다 현실적 근거가 없기 때문에 정체성을 명확히 밝히기 어렵다. 의미가 큰데도 정체성이 명확치 않은 존재를 놓고는 객관적 서술보다 주관적 서술이 그 존재를 더 잘 드러낼 수도 있다. 존재가 어느 정도 드러난 뒤라야 객관적 파악의 시도가 가능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남 선생의 주관적 서술이 큰 만족감을 주는 것 아닐까.

 

근년 근대성의 의미에 생각을 모으다 보니 역사학을 포함한 근대적 학문의 일반적 특성을 생각해보게 되었는데, ‘보이는 것에 집착해 보이지 않는 것을 놓치는 경향도 중요한 특성의 하나로 떠올랐다. 19세기 중엽에 나온 어느 글 제목에 접했을 때 떠오른 생각이다. 그 생각을 이렇게 적은 일이 있다.

프레데리크 바스티아가 1850년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Ce qu'on voit et ce qu'on ne voit pas)이란 글에서 이 우화의 허점을 지적했다. 유리창이 깨지지 않았다면 빵집 주인이 그 돈을 얼마든지 다른 소비행위에 쓸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유리가게 주인의 이득이 빵집 주인의 손실보다 작기 때문에 사회 전체의 손해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바스티아의 글 제목에서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근대 학문에는 분야를 막론하고 보이는 것에 너무 집착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무시하거나 소홀히 하는 일반적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경제학에서는 바스티아의 지적을 바탕으로 기회비용개념이 보완되었는데, ‘보이지 않는 것을 소홀히 해 왔기 때문에 그런 보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보완이 어쩌다가 단편적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을 소홀히 하는 일반적 경향을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한다.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67622)

이제 남 선생의 새 책 원고를 앞에 놓고 3년 전의 만남을 떠올리며, 나 자신 보이는 것에만 매달렸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를 사료(史料)공장으로 여기고 생산성을 높일 생각에 몰두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내놓는 사료는 공장제품이 아니라 수공예품이다. 작가의 마음속에서 여백이 어우러진 모습을 그려낸 작품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한 실마리가 남아있다.

만년의 한우근(1915-99) 선생님께 20여 년 전 얻은 가르침 하나가 생각난다. 나는 그때 데이터베이스 기술이 한문 자료에 적용될 경우 역사학계에 일어날 변화의 전망을 떠올리고 있었는데, 그에 관한 내 생각을 듣다가 당신의 경험을 말씀해주셨던 것이다.

그분이 중년에 하버드옌징연구소에 1년간 체류할 때, 욕심나는 자료는 많은데 복사비가 비싸서 갖고 돌아온 자료 대부분이 손으로 베껴 쓴 것이었다고 한다. 마음껏 복사해 가져오지 못한 것이 무척 아쉬웠는데, 수십 년 지나는 동안 생각이 바뀌었다며 은근한 미소를 띠고 하신 말씀이 귓가에 남아있다. “욕심껏 복사해서 잔뜩 가져왔다면 베껴 온 자료를 그 동안 활용한 만큼 알뜰하게 활용하지 못했을 거야.”

사료에 대한 갈망은 역사학도에게 숙명이다. 더 많은 자료를 바라는 욕심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식욕이 숙명인 인간도 나이가 드는 데 따라 양()에 대한 집착에서 질()로 마음이 넘어가는 것처럼, 역사학자도 성숙에 따라 자료의 질을 가리게 되는 것이 아닐까?

남 선생은 유신 말기에 언론계에서 정치계로 옮긴 후 17년간 집권당 소속으로 노동부장관, 당 정책위의장 등 현직(顯職)을 많이 맡았다. 그런데도 그를 양지쪽만 찾아다니는 해바라기로 보는 사람은 없고, 오히려 진흙 속의 연꽃으로 아끼는 사람이 많다.

정치에 깊은 관심이 없는 나로서는 그의 정치적 역할에 대한 평가를 할 생각이 없다. 그가 스스로 정치를 마치 학문하는 것처럼 했다고 한 말을 어디서 본 듯한데, 내게는 그가 정치계에서 문화 활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궁중의 광대(joker)처럼. 권력 가까이 있으면서도 권력을 직접 만지지는 않고 초연한 위치에서 예술의 형태로 논평을 내놓는 역할.

20세기 후반 한국의 역사에서 큰 의미를 가졌으면서도 명확한 형태를 갖추지 못한 주제가 혁신계만이 아닐 것이다. 남 선생이 개인적 관계에 입각해서 그려주는 혁신계의 모습은 독특한 방식으로 우리 시야를 밝혀준다. 사실화 아닌 추상화의 가치를 음미할 줄 아는 경지로 나아가고 싶은 의욕을 역사학도에게 키워주는 글이다. 이제 공장(工場)’ 아닌 공방(工房)’의 역할을 그에게 기대한다.

 

Posted by 문천

 

(3) 어떻게 달라질까?

 

전쟁이 정치가 된 까닭

 

전쟁의 의미에 관해 가장 많이 인용되는 말이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1780-1831)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장(延長)”이란 말이다. 이 말의 의미를 요즘 다시 생각해보고 있다.

전쟁의 원래 목적은 약탈이었다. 재화나 영토를 빼앗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인민을 포획해 노예로 삼는 것도 인적자원의 약탈이라고 할 수 있다. 로마의 카르타고 정벌처럼 화끈한 사례는 말할 나위도 없고 십자군전쟁에서 장미전쟁까지, 모든 전쟁에는 손익계산서가 붙었다.

전쟁에는 파괴가 따르므로 승자의 이득이 패자의 손실보다 작은 것이 정상이다. 중세사 연구가 잘 되어 있는 잉글랜드 경우를 보면, 전쟁 때문에 왕권이 흔들리는 일이 많았다. 전쟁 비용을 영주들에게 빌렸다가 전리품을 충분히 얻지 못했을 때 왕의 직할지를 떼어 갚는 일이 다반사였다. 중세 유럽에서 전반적으로 왕권 신장이 어려웠던 한 가지 이유다.

그런데 산업혁명기에 전쟁의 성격에 변화가 일어났다. 전쟁이 수지맞는 사업이 된 것이다. 프레데릭 바스티아의 1850년 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Ce qu'on voit et ce qu'on ne voit pas)”에 나오는 깨진 유리창이야기가 이 변화를 보여준다.

빵집 유리창을 주인 아들이 실수로 깨뜨렸을 때, 사회 전체를 봐서는 나쁜 일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당시 유행했던 모양이다. 유리가게 주인에게 일거리가 생겨 수입을 얻고, 그가 그 돈을 다시 소비하고, 경제의 활성화에 보탬이 되는 행위가 이로부터 연쇄적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바스티아는 이런 관점이 "보이는 것"에만 얽매여 "보이지 않는 것"을 놓치는 오류라고 지적했다. 유리가 안 깨졌으면 빵집 주인이 유리 값으로 쓸 돈을 뭐든 다른 곳에 써서 어차피 비슷한 경제 활성화 현상을 일으켰을 것이고, 유리가게 주인이 번 돈은 빵집 주인이 쓴 돈보다 작으니, 사회 전체에게는 분명한 손실이라는 지적이었다.

산업혁명이 몰고 온 대량생산-대량소비 구조에서는 전쟁의 파괴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파괴로 인한 수요의 증대가 오히려 경제 활성화를 부채질하는 것이 크게 보인다. “보이지 않는곳에서 더 큰 손실이 발생하더라도 대량생산체제가 확장되는 단계에서는 문제로 인식되지 않았다. 바스티아가 말한 "보이지 않는 것"20세기 들어와서야 경제학에서 '기회비용'이란 개념으로 채택되었다.

전쟁이 약탈행위에 그친다면 그 정치적 의미가 제한된다. 이길 자신이 있으면 전쟁을 걸고, 자신이 없으면 피할 뿐이다. 그런데 19세기 유럽에서는 소득이 큰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정치적 수단으로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클라우제비츠는 시대 상황에 따른 전쟁의 의미 변화를 깨달았던 것이다.

요즘 클라우제비츠의 말을 다시 생각하는 것은 산업혁명기 전쟁의 목표가 단순한 자원 획득을 넘어 자본주의체제 확장을 바라보게 된 점을 염두에 둔 것이다. 자본주의체제는 그 지속을 위해 시장 확대를 필요로 한다는 세계체제론의 지적에서 떠오른 생각이다. 지금 존재하는 자원을 탈취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자본주의체제의 주변부로 끌어들여 지속적으로 착취하는 목표로 바뀐 것이 아닌가. 함포외교의 첫 번째 요구가 개항이었다는 사실도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서세동점의 척후병 동인도회사

 

1600년 영국 동인도회사가 설립될 때는 유럽인의 해상활동이 약탈 단계에 있을 때였다. 특히 영국인의 해상활동은 프랜시스 드레이크(1540-1596)의 경우에서 보듯, 해적행위와 구분이 잘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와의 해전에 부사령관으로 나선 드레이크는 스페인왕이 거금의 현상금을 걸어놓은 해적이었다.

1588년의 승리를 발판으로 15913척의 영국 선단이 처음으로 동양무역에 나서서 3년 만에 귀항했다. 그러나 1596년 출항한 제2차 선단은 실종되고 말았다. 3차 선단을 준비하기 위해 자본을 모은 상인들은 1599년 이 사업의 독점 보장 등 국왕의 보호를 청원하기로 했다. 이 청원에 따라 1년 후 흠정 헌장이 내려짐으로써 동인도회사(EIC)가 성립되었다.

초기의 동인도회사는 하나의 벤처기업이었다. 그런데 17세기 중엽의 내전 후 왕정복고 때 동인도회사의 위상에 변화가 일어났다. 1670년경의 5개 법령을 통해 독자적 영토 획득과 그 영토 내의 사법권과 화폐주조권, 군대를 보유하고 전쟁을 선포할 수 있는 군사주권 등을 갖게 된 것이다. 영국의 해외 확장을 위한 하청(下請)국가가 만들어진 셈이다.

군대 보유권을 갖고도 동인도회사의 병력은 수십 년 동안 수백 명의 경비병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가 18세기 중엽 크게 늘어나기 시작하고, 특히 프랑스와의 7년전쟁 동안 급증해서 전쟁이 끝난 1763년에는 26천 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그 후 미소레 왕국과의 전쟁(1767-69, 1780-84, 1789-92, 1799), 마라타 제국과의 전쟁(1775-82, 1803-05, 1817-18) 등을 통해 동인도회사의 인도 지배가 확장되는 동안 수십만 대군으로 확대되었다. 동인도회사는 세포이반란(1857) 때까지 인도 지배의 주체였고 중국과의 무역도 독점했다. 자본주의세계에서 자본이 국가를 조종한다는 지적이 있거니와, 1757-1858 백년 동안 동인도회사는 실제로 국가 노릇을 했던 것이다. 아편전쟁의 원인도 동인도회사의 활동에 있었다.

서세동점의 가장 강력한 주체로 활동하던 동인도회사가 세포이반란을 계기로 1858년 인도 통치권을 국왕에게 넘기고 1874년 해산에 이르게 된 것은 영국 제국주의가 궤도에 오른 결과였다. 17세기 영국의 해외 활동은 약탈단계를 크게 벗어나 있지 않았고 본국 정치와 별개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하청업체가 필요했다. 그런데 19세기에 와서는 산업혁명의 진전에 따라 약탈보다 시장 확대를 중시하게 되었고, 식민지 경영도 본국 정치와 긴밀한 연관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국가 간 경쟁의 심화 때문에 국가가 해외 활동에 직접 나설 필요도 있었다. 한편 영국 의회가 넓은 범위의 자본세력을 대표하게 되었으므로 회사와 관계된 좁은 범위의 특권세력이 배제되기에 이른 것으로 볼 측면도 있다.

동인도회사의 퇴진으로 본격적인 대영제국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영국의 인도 지배 목적은 재화 약탈에서 자원 획득을 거쳐 체제 확장으로 그 동안 바뀌어 왔다. 인도는 주변부에서 반주변부로 접근해 왔고, 그에 따라 대영제국의 국가체제 안에 더 깊이 편입된 것이다. 이 무렵, 19세기 중엽에는 산업혁명의 성과가 쌓여 열강의 해외활동 목적이 자본주의체제 확장에 집중되고, 동아시아 지역에 대한 개항요구가 강화되기에 이른다.

 

슬픈 학문의 시대

 

1990년경의 공산권 붕괴 앞에서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공산주의체제 실패의 필연성을 논한 대목을 면밀히 읽어보면, 자본주의체제에도 적용될 수 있는 내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전체주의 국가의 경우, 그 근저에는 인간생활 전체를 포괄하는 명확한 이데올로기가 있다. 전체주의는 시민사회의 완전한 파괴를 시도했으며, 시민생활의 완전한 관리를 목표로 했다. 1917년에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한 이래 소련은 반대당, 신문, 노동조합, 사기업, 교회 등 러시아 사회에서 권력에 맞설 가능성이 있는 모든 조직을 탄압해 왔다. 1930년 말에도 이러한 조직 중 몇 개는 여전히 존속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모두 옛정신의 골자는 모두 빠져 버리고, 국가에 의해 철두철미하게 통제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주민 하나하나는 원자(原子) 상태에 놓여, 전능한 정부 이외의 모든 중간조직으로부터 동떨어진 존재로 남겨졌다.

전체주의 국가 소비에트는 보도관리나 교육, 정치선전을 통해서 개인의 신념이나 가치관 그 자체의 골격을 바꾸고, 그것에 의해 소비에트 인간 자체를 변화시키려고 했다. 이러한 시도는 인간에게 있어 가장 개인적이고 가까운 관계인 가족관계에까지 미쳤다. (...)

사회가 체계적으로, 조직적으로 분화되어감에 따라, 사회를 구성하고 있던 여러 가지 인간관계 - 가족, 종교, 역사적 사실, 언어 - 가 공격 목표가 된다. 그리고 개개인의 밀접한 관계는, 그 당사자를 위해서 할당되어지는 국가로부터 인정받은 다른 인간관계에 의해 대치된다.” (<역사의 종말>(이상훈 옮김, 한마음사 펴냄) 57, 필자 밑줄)

자본주의사회에서도 똑같이 일어난 일 아닌가? 파괴, 탄압, 통제, 조작 등 행위의 주체로 후쿠야마는 국가를 지목하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주체는 당()이고 국가는 도구다. 자본주의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국가를 도구로 같은 행위를 행하는 세력이 있다. 자본주의사회의 자본세력은 공산주의체제의 당처럼 명확한 형태를 취하지 않기 때문에 그 행위를 확인하고 증명할 수 있는 범위에 차이가 있지만, 장기간에 걸쳐 나타난 경향은 그 존재를 분명히 보여준다.

무엇보다 밑줄 친 두 부분이 두 체제에 확실히 공유되는 것이다. “인간생활 전체를 포괄하는 명확한 이데올로기”, 자본주의체제 확장에서도 이것이 핵심적 요소였다. 이 이데올로기, 즉 배금주의 없이는 주변부 착취의 효율성에 한계가 있다. 피착취 사회나 계층의 자발적 호응 없이 착취자가 일일이 힘들여 빼앗아오는 것으로는 체제 작동이 제대로 안 된다.

주민 하나하나가 원자 상태에 놓이는것 또한 자본주의체제 성립을 위한 필요조건이다. 가족, 종교, 역사, 언어 등 이익관계 아닌 다른 원리에 입각한 모든 인간관계가 자본주의체제에서는 공격받거나 주변화된다. 자본주의체제의 가치체계 획일화에는 탄압보다 선전이 더 큰 몫을 맡았는데, 여기에는 근대적 학문이 적극 활용되었다. 노명우는 <사회학의 쓸모>(지그문트 바우만 외 지음, 서해문집 펴냄) “역자 후기에 이렇게 적었다.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쓸모없다고 박대당하고 있는 철학을 슬픈 학문이라고 불렀다. 사회학 역시 철학과 더불어 또 하나의 슬픈 학문의 모습을 하고 있다. 아도르노는 슬픈 학문의 마지막 희망을 철학이 방법론으로 변질된 이후 지성의 냉대를 받거나 자의적 경구에 머물다가 끝내는 잊히게 된 영역, 올바른 삶의 이론을 회복하는 데서 찾았다. 철학만큼이나 슬픈 학문인 사회학의 마지막 비상구 역시 거기에 있다.

제도화된 사회학은 방법론적 정교화에 몰입한 나머지 질문의 능력을 상실했다. 사회학적 질문은 질문을 위한 질문이 아니며, 사회학적 연구의 최종 목적지는 계량화된 연구 실적이 아니다. 질문을 위한 질문, 연구를 위한 연구와 같은 동어반복적 폐쇄회로의 저편에 놓여 있는, ‘올바른 삶을 위해 던지는 사회에 대한 질문, 사회학은 그러한 질문에 내재한 무궁무진한 가능성의 기회를 잃어버렸다. 질문의 힘을 잃어버린 사회학은 주어진 현재에 존재하는 사실을 설명하고 해석하는 데는 뛰어나지만, 무엇이 없어야 하고 무엇이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상상을 상실했다. ‘좋은 삶좋은 사회에 대한 상상을 키우는 질문의 힘을 잃어버린 사회학은 그저 세간의 눈으로는 쓸모없어 보인다.(245)

어느 분야의 학자라도 이 글을 읽으며 자기 분야도 또 하나의 슬픈 학문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학도 그렇다. 계몽주의시대에 발흥한 근대역사학이 이전 시대의 봉건제를 비판한 데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기 위한 정지작업의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근대적 가치체계가 자리 잡고 그 위에 자본주의체제가 세워진 후의 봉건제 비판은 반동적 행태일 뿐이다. 질문의 능력을 스스로 포기하면서 학문의 본질을 잃어버린 것이다.

 

근대 세계체제의 한계

 

인간생활 전체를 포괄하는 명확한 이데올로기’, 인간 하나하나를 원자 상태에 두는 조직방법, 둘 다 공산주의체제와 자본주의체제의 공통된 요소다. 그리고 이들은 두 체제의 형성기인 19세기의 과학 신앙에 뿌리를 둔 것이다.

자연은 인간에게 주어진 조건이다. 문명 발생 이후 인간은 자연에 대한 확실한 이해를 늘리려고 노력해 왔다. 그것은 인간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이해하려는 노력이기도 했다. 나는 이 노력에는 한계가 있다는, 자연과 자신에 대한 인간의 완전한 이해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만, 그것은 입증도 반증도 불가능한 명제다. 지금으로서는 완전한 이해가 아직까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만 일단 관심을 둔다.

인간은 이해가 부족한 영역을 종교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여 왔다. 그런데 자연에 대한 완전한 이해가 가능하다는 믿음이 17세기 이후 유럽에서 확장되어 19세기에는 과학 신앙현상에 이르렀다. 한편으로는 다른 문명권에 뒤져 있던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전, 또 한편으로는 해외 약탈활동을 통한 물질적 조건의 향상이 이 믿음을 뒷받침해 줬다. 그리고 산업혁명의 성과를 얻으면서 이 믿음이 사회를 지배하기에 이른 것이다.

자연과학의 성과를 발판으로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도 완성을 바라볼 수 있다는 믿음 위에 사회과학이 일어났다. 사회과학은 애초에 종교와 봉건관계에서 벗어난 신세계의 합리적 원리를 모색하는 사명을 갖고 태어났지만, 개척기가 지난 뒤에는 위에 인용한 노명우의 탄식처럼 제도의 덫속에서 특정 이데올로기에 복무하는 역할이 더 크게 된 것이다.

19세기를 풍미한 원자론이 이 신앙의 경전이 되었다. 19세기 벽두에 발표된 존 돌턴의 원자론은 한편으로는 자연의 완전한 이해에 이르는 지름길로 보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 평등 등 계몽주의적 관념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였다. 이에 따라 이런 관념을 이념을 넘어 진리 차원으로 받드는 이데올로기가 형성되어 사회 조직방법으로 채택되기에 이르렀다.

자연과학에서 원자론은 19세기가 다 지나가기도 전에 물질 탐구의 진전에 따라 힘을 잃기 시작해서 20세기 들어와서는 완전히 폐기되었다. 그러나 사회과학 여러 분야에서는 원자론에 입각한 제 원리가 백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상당한 힘을 지키고 있다. 원자론에서 파생된 이데올로기가 버티고 있어서 질문의 능력을 잃어버린 학문이 현실의 정당화에 동원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원자론이 그리스철학의 일각에서 나타난 일은 잘 알려져 있다. 그밖에도 여러 문명권에서 원자론과 비슷한 환원론적 세계관이 등장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근대 이전에는 어느 사회에서도 이런 세계관이 긴 시간에 걸쳐 강한 지배력을 가진 일이 없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일로 보인다. 원자론에서 도출되는 개인주의는 사회 조직방법으로서 지속가능성에 불리하다는 약점을 안고 있는 것이다. 과도한 경쟁과 사회안전망의 약화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원자론이 19세기 유럽을 풍미하고 오늘날까지 큰 힘을 발휘해 온 것은 산업사회로의 재편기라는, 지속가능성의 약점이 부각되지 않는 특수한 상황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중국에서도 전국시대에 원자론에 가까운 사조가 상당한 힘을 얻었던 것 역시 농업사회로의 재편기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이었을 것이다.

1970년대에 로마클럽보고서 <성장의 한계>가 나오고 오일쇼크가 겹쳐지면서 지속가능성 문제가 비로소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구조적 문제를 밝히는 세계체제론도 이 무렵에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뒤이어 문학계와 학술계의 관성적 현상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이 확산되었다.

어찌 보면 근대 자본주의 세계체제(공산주의체제 포함)의 한계가 1970년대에 확인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대안이 없는 상황 때문에 신자유주의 반동노선이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 가운데 국제적으로, 그리고 각국 내부에서 모순이 심화되어 왔다. 21세기 들어 중국의 부상에서 대안을 찾으려는 움직임은 이 상황에서 나온 것이다.

 

중국의 굴기를 보는 시각

 

19987월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중국 방문에 공화당 우파와 민주당 좌파가 이례적으로 손잡고 반대했다. 자본주의에 정식으로 투항하지 않는 중국의 성장에 도움이 될 행동을 미국이 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우파의 주장이었고, 좌파의 주장은 미국사회가 요구하는 인권기준을 중국이 충족시키도록 압력을 넣기 위해 우호적인 행동을 아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시점까지도 미국인들이 중국을 얼마나 깔보고 있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 상황이다. 중국이 공산권 붕괴의 소용돌이를 용케 모면하기는 했지만 끝끝내 살아남기 위해서는 경제정책에서나 인권정책에서나 미국의 기준을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 동유럽의 구 공산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시장경제전면 도입도 시간문제로 보였다.

십여 년이 지난 지금은 중국에 대한 세계인의 인식이 전혀 다른 차원으로 옮겨져 있다. 중국이 초강대국이 될 것인가 여부가 아니라 어떤 성격의 초강대국이 될 것인가에 지금은 관심이 모이고 있다. 기존의 초강대국과 비슷한 성격이 될 것인가, 전혀 다른 성격이 될 것인가?

중국도 기존의 초강대국과 비슷한 성격의 패권국가가 되리라고 보는 관점은 기존 세계체제의 성격에 큰 변화가 없으리라는 점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관점은 관성에 휩쓸려 1970년대 이래 변화의 조짐과 추세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는 인상을 준다. 세계체제의 성격 변화라는 것은 매우 함의가 큰 현상이므로, 그 전망이 분명하지 않은 단계에서도 그 가능성을 가늠하는 데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 방향으로 참고할 만한 논설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중국의 성공이 널리 확인된 2008(베이징 올림픽과 미국의 금융공황이 있었던 해) 이후 담론 확산이 크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 직전에 나온 조반니 아리기(1937-2009)<베이징의 애덤 스미스>(강진아 옮김, 길 펴냄)가 이 방면 담론의 중요한 지표를 담은 것으로 본다.

아리기는 1970년대부터 이매뉴얼 월러스틴 등과 함께 세계체제론을 발전시켜 온 비교사회학자다. 1994<장기 20세기>20세기 미국의 헤게모니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전개 과정을 개관하고 미국 헤게모니의 말기 증상을 살펴본 그가 중국의 약진에 관심을 집중해서 그 특징적 현상에서 세계체제의 다음 단계를 내다보는 열쇠를 찾은 것이 이 책이다. 얼마 전까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중국의 급속한 발전에 대한 이 시점에서 가장 깊이 있는 이론적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 도입부에서 아리기는 제목에 애덤 스미스를 불러낸 이유를 설명한다. ‘자본주의의 시조로 알려진 스미스의 <국부론>(1776)에서 제시된 시장경제가 자본의 무제한적 축적을 지향하는 자본주의 원리와 다른 것이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중국의 비자본주의적 경제발전 방식이 자연스러운 경로라고 평가한 점을 상기시킨다. 자본주의 아닌 경제발전 방식이 가능하며 전통시대 중국의 경우를 그 구체적 사례로 검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의 경제발전 방식은 유럽 발 자본주의와 어떻게 다른 것인가. 아리기는 스기하라 가오루가 제기한 근면혁명(Industrious Revolution)’을 예시한다.

스기하라에 따르면, 경제적 향상을 추구하면서 비인적 자원보다 인적 자원을 동원하는 이 같은 성향은, 동아시아 국가들이 자국 경제 내에서 서구 기술을 통합하려고 하던 때에조차도, 계속해서 동아시아 발전 경로의 특징이 되었다. 그러므로 1880년대까지 일본 정부는, 일본이 토지와 자본 모두 부족하지만 노동은 풍부하고 상대적으로 질이 높다는 인식에 입각하여 산업화 전략을 채택하였다. 따라서 새로운 전략은 전통적인 노동 집약적 기술의 적극적 이용, 전통 산업의 근대화, 그리고 요소 부존량의 상이한 조건을 감안하여 서구 기술을 신중하게 적용하도록장려하였다. 스기하라는 이 이종 교배의 발전 경로를, “서구 경로보다 노동을 더 전면적으로 흡수하고 이용하면서 기계와 자본으로 노동을 대체하는 것에는 덜 의존한다는 의미에서 노동 집약적 산업화라고 불렀다.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 61)

원래 스기하라가 근면혁명 개념을 제기한 것은 메이지시대 일본의 발전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는데, 아리기는 이 개념이 전통시대의 중국에 또한 적용될 뿐 아니라 20세기 후반 이래 동아시아-동남아시아 지역의 급속한 경제발전에도 적용된다고 주장했다. 자본집약적 발전 원리인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노동집약적 발전 원리를 제시한 것이다.

전통시대 중국의 발전 원리가 오늘날의 상황에도 적용 가능하다는 아리기의 관점은 시사하는 바가 엄청나게 크다. 무엇보다 나는 근대문명의 원자론적 관점(atomic view)에 밀려난 여러 지역 전통문명의 유기론적 관점(organic view)의 부활 가능성을 여기에서 본다. ‘서세동점의 본질인 원자론적 관점의 극복에서 그 해소의 결정적 열쇠를 찾는 것이다.

 

사회주의가 좌익이 된 까닭

 

<해방일기> 작업 중 사회주의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앞에서 소개한 19468, 응답자의 70%가 바람직한 체제로 사회주의를 꼽았던 여론조사를 살펴보면서였다.

이 응답자들이 생각한 사회주의가 어떤 것이었을까? 나란히 제시된 다른 선택지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있었으니, 소유권을 절대시하는 자본주의나 전면 부정하는 공산주의와 다른 것, 즉 소유권을 제한된 범위에서 인정하는 체제로 사회주의를 생각한 것 같다.

이 무렵의 여론조사에 대해 피면접자들의 대표성도 의심스럽거니와 면접의 절차와 분위기가 과연 정확한 민심의 소재를 밝혀낼 정도로 적절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도 조심스러울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 연구자도 있다. (전상인 <고개 숙인 수정주의> 14) 여기 소개한 항목 같으면 응답자들이 과연 사회주의가 어떤 것인지 충분한 이해를 갖고 응답한 것인지도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회주의가 어떤 것인지는 1946년의 일반인만이 아니라 2015년의 연구자들도 명확하게 말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지난 2백 년 동안 이 말이 쓰여 온 폭이 너무 넓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말을 쓰는 데는 정치적 의지가 얹히는 일이 많아서 더욱 혼란스럽다.

1820년대에 사회주의(socialism)’란 말이 처음 쓰인 것은 개인주의(individualism)에 대립되는 뜻이었다고 한다. 당시 원자론의 폭발적 유행으로 개인주의 풍조가 강화되는 데 대한 저항의 의미로 생각된다. 그런데 20여 년 후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선언>(1848)에서 사회주의를 () 자본주의의 뜻으로 쓰고 사회주의 중에도 제대로 된 사회주의, 과학적 사회주의공산주의로 지칭하면서 사회주의의 뜻이 굴절을 겪게 되었다.

반 개인주의의 뜻을 가진 사회주의를 반 자본주의로 정의하는 것은 일종의 범주착오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개인주의에 입각한 것인데, 자본주의에 반대한다는 공통점만을 근거로 사회주의를 동류(同類)로 끌어들인 데서 용어의 혼란이 시작되었다. 19세기 중엽에는 원자론이 유럽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원자론에 반대하는 사회주의가 입지를 잃고 공산주의에 휘말리게 된 것이라고 나는 본다. 유기론적 질서를 중시하던 초기 사회주의는 공상적 사회주의로 몰려 유럽 사상계에서 배제되었다.

20세기 들어 원자론과 개인주의의 지배가 확립되어 있지 않은 3세계에 서양 정치사상이 들어왔을 때 사회주의에 대해 어떤 반응이 일어났는지 궁금하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의해 오염되기 전의, ‘반 개인주의로서 원래의 사회주의를 찾는 경향도 나타나지 않았을까? 이 주제에 관한 연구 성과나 논설을 아직 접하지 못했는데, 관련 학계의 검토를 권하고 싶다.

19468월의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70%가 선택한 사회주의에는 반 개인주의의 의미가 어느 정도 얹혀 있었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당시 조선인의 대다수가 지키고 있거나 기억하고 있던 전통질서는 유기론적 원리에 따른 것이었고, 일본 통치자들이 제시한 새로운 사회 조직방법에 가장 강한 반발을 보인 것이 그 원자론적 원리였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후쿠야마의 글 또 한 대목에서 비슷한 상황을 읽을 수 있다.

전체주의의 가장 근본적 실패는 사상을 콘트롤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구 소련의 시민은, 지금에 와서야 알게 된 일이지만, 혼자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줄곧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부의 오랜기간 동안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그 정부가 자신들을 기만하고 있다는 것을 대부분의 시민은 알고 있었다. 스탈리니즘 이래 견뎌온 개인적인 고통에 대해서 사람들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갖고 있었다. 사실상 모든 가정이 농업집단화 과정에서, 또는 1930년대의 공포정치 하에서 육친이나 친구를 잃게 되었고, 전쟁에서 치른 희생은 스탈린의 외교정책의 실패로 인해 더더욱 크게 되었다. (...) 사람들은 말로는 계급이 없다는 자신들의 사회에서 새롭게 계급제도가 대두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역사의 종말> 65)

 

이름을 잃어버린 유기론적 원리를 찾아

 

2008년 가을 <뉴라이트 비판>을 쓸 때, 정치적 입장을 대충이라도 밝힐 필요를 느꼈다. 여러 모로 생각한 끝에 나 자신을 보수로 판정했다. 개별 사안을 놓고는 진보쪽 주장에 공감하는 것이 많았지만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나 세상에 대해서나 있는 그대로 대충 만족하는 사람이다. 물론 향상을 위한 노력은 필요하지만 점진적 향상을 바란다. 근본까지 바뀌거나 전혀 다른 차원으로 옮겨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몇 해 동안 이 판정에 스스로 만족하고 지냈다. 그런데 사회주의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이 판정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선택지가 진보보수둘뿐이라면 보수가 맞다. 그런데 이 양자택일이 과연 충분한 의미를 가진 선택일까?

몇 해 전까지 나 자신 그랬던 것처럼, 이 사회의 지식인들은 환원론적-원자론적 사고방식에 깊이 물들어 있어서 그 사고방식을 벗어나는 선택지를 떠올리기 힘들다. 원자론을 벗어난 원리에 따른 사회 조직방법이 가능하다면, 그 조직방법을 추구하는 정치적 입장을 설 길이 있는 것이라면, 나는 그 입장에 설 것이다. 그것을 사회주의란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것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사람이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데는 개인을 앞세워야 하는 측면도 있고 사회를 앞세워야 하는 측면도 있다. 개인을 앞세우는 개인주의와 사회를 앞세우는 사회주의는 꼭 이름을 붙이지 않고도 인간사회 속에서 서로 어울리며 작동해 왔다. 그런데 19세기 유럽에서 개인주의에 일방적으로 경도되는 풍조가 일어나 세계를 휩쓸고 오늘에 이르렀다.

개인주의에 대칭되는 원리는 이름조차 제대로 갖지 못하는 지경에 와있다. ‘사회주의외에도 전체주의(totalitarianism)’, ‘집체주의(collectivism)’ 등 개인주의에 맞설 만한 이름이 모두 특정한 정치체제에 이용당하다가 좁고 부정적인 의미에 갇히게 되었다. 유기론적 사회조직 원리는 근대 정치학에서 제대로 검토도 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쓴웃음을 금할 수 없는 한 가지 사례. 브루스 커밍스는 북한 체제를 ‘corporate state’로 표현하는데 이것을 기업국가로 번역한 책을 두 권 봤다. ‘corporatism’은 유기체론의 한 형태인데 이런 개념이 이 사회 정치학자들에게 얼마나 낯선 것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해방일기> 작업을 통해 해방공간에서 만난 민족주의자 대부분이 중간파의 길을 걸었다. 194610월에 그들이 빚어낸 좌우합작 7원칙 중 토지에 대한 체감(遞減)매상 무상분배원칙은 일견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원칙의 절충처럼 보인다. 그러나 거기에 당시 인민의 70%가 원하던 사회주의원칙이 반영된 것은 아니었을까? 그 후 수십 년간 환원론적-원자론적 사고방식에 길들여진 지금 사람들에 비해 그들은 유기론적 정치 원리에 대한 감각을 아직 지키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들을 좌절시킨 외세의 압력을 이겨낼 때, 이 사회가 그들이 서 있던 자리를 출발점으로 삼기 바란다.

서세동점의 해소가 바로 동세서점은 아닐 것이다. 동양 세력이 힘을 키워 서양 사회에 불평등조약을 강요하고 착취의 대상으로 삼는 광경만을 그려서는 진정한 해소를 바랄 수 없다. 서세동점의 본질적 요소들을 극복하는 데 목적을 두어야 한다. 나는 원자론적 조직방법과 사고방식을 그 핵심으로 본다. 유기론적 원리가 복원되어 원자론적 원리와 적절한 방법으로 어울리게 되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서세동점의 해소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