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조선의 민심을 받치는 두 개의 큰 기둥이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였다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군국주의 일본의 통치에 대한 반발은 기회 있을 때마다 민주주의와 민족주의로 표출되어 왔고 여기에는 아무런 이의 제기도 없었다.

정족(鼎足)을 이루는 데는 또 하나의 기둥이 필요하다. 당시의 조선인은 새 국가의 경제체제에 대해 어떤 이념을 갖고 있었을까? 해방공간이 좌우대립의 장()이었다고 보는 시각에서는 좌익과 우익 이념이 팽팽하게 맞섰던 것처럼 본다. 과연 그랬을까?

1946813일자 여러 신문에 실린 군정청 여론국의 여론조사 결과 중에 흥미로운 문항이 하나 있다. 해방 1주년을 맞아 8,45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해방공간 최대의 여론조사였다. “귀하의 찬성하는 것은 어느 것입니까?” 질문의 응답이 아래와 같았다.

 

() 자본주의 1,189(14%)

() 사회주의 6,037(70%)

() 공산주의 574(7%)

() 모릅니다 633(8%)

 

사회주의를 선택한 6,037인을 좌익으로 본다면 팽팽하게 맞선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을 좌익의 압도적 우세로 바로 해석할 수는 없다. 그들에게 당신은 좌익입니까?” 물었다면 그렇다고 대답한 사람이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의 좌익에서는 사회주의를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넘어가는 중간단계로 본 레닌의 관점이 지배적이었다. 진정한(당시의 좌익 주류에서 인정받는) 좌익이라면 위 질문에 공산주의라고 대답해야 옳았다. 그러나 사회주의응답자의 대다수는 레닌의 정의를 들어본 적 없는 일반인이었다.

사회주의 찬성 70%’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찬성자들이 사회주의를 무엇으로 생각했는지 알아야 한다. 그들의 생각을 직접 정확하게 알려주는 자료는 없다. 그러나 그들이 사회주의를 선택한 까닭을 통해 대충 추측할 수 있다.

그들은 스스로가 좌익도 우익도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좌익이라면 선택할 공산주의도, 우익이라면 선택할 자본주의도 선택하지 않은 것이다. 그들에게(적어도 대다수에게) 사회주의는 좌익의 이념도 우익의 이념도 아니었던 것이다.

이것이 중간파의 입장이었다. 흔히 중간파, 또는 중도파라 하면 좌익도 우익도 아닌 어정쩡한 입장, 주견 없는 태도를 떠올린다. 그런 것이 아니었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를 모두 배척하는 중간파의 입장도 분명한 주견에 입각한 것이었다. 소유권을 절대시하는 자본주의, 전면 부정하는 공산주의, 두 극단을 거부하면서 제한된 범위의 사유권을 인정하는 절충적 이념이 당시 대다수 조선인이 선택한 사회주의였다.

조선인의 사회주의 염원은 해방 전부터 형성되어 있던 것이다. 식민지시대 후기의 항일운동이 사회주의운동의 형태로 흔히 나타났는데, 코민테른과 연계된 공산주의운동은 그중 작은 일부에 불과했다. 기본적으로는 민족주의운동인데 일본제국의 자본주의와 군국주의에 대한 반감이 겹쳐진 것이었고, 반제국주의운동에 대한 소련의 지원 때문에 그 측면이 더 부각되기도 했다. 그리고 일본 통치자들 또한 민족주의 문제가 이미 해결되었다는 선전을 위해 민족주의운동에 좌익의 이름을 붙이는 경향이 있었다.

 

사회주의를 지향한 좌우합작의 토지개혁안

 

해방 당시의 민족주의자들도 민주주의 민족국가 건설을 지상 과제로 삼고, 경제체제 선택은 부차적인 과제로 여기거나 극단적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모두 배격하는 절충적 이념으로서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것이 일반적 태도였다. 이것이 중간파가 공유하게 되는 입장이고 194610월 좌우합작위원회의 합작 7원칙의 바탕이 된 것이다. 7원칙 중 경제체제에 관한 내용은 제3조에 들어 있었다.

 

토지개혁에 있어 몰수, 유조건 몰수, 체감매상 등으로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여하여 시가지의 기지 및 대건물을 적정 처리하며, 중요 산업을 국유화하여 사회 노동법령 및 정치적 자유를 기본으로 지방자치제의 확립을 속히 실시하며, 통화 및 민생 문제 들을 급속히 처리하여 민주주의 건국 과업 완수에 매진할 것.

 

이북에서는 이에 앞서 19463월 토지개혁을 실시, 100만여 정보의 토지를 몰수해 70여만 가구에 분배해 놓고 있었다. 몰수 대상 토지는 일본인과 친일파의 소유 토지, 부재지주와 종교단체의 토지, 그리고 자작지주의 토지 중 5정보를 넘는 초과분이었다.

합작 7원칙의 토지개혁안은 몰수를 특수한 경우에 한정하고 체감매상을 위주로 한 유상매수 무상분배의 원칙이었다. 중소지주의 작은 초과분은 시세에 가까운 값으로 정부가 매수하고 대지주의 큰 초과분은 몰수에 가까운 싼 값으로 매수한다는 것이었다. 이북의 무상몰수 무상분배에 비해 중소지주 보호의 의미를 가미한 원칙이었다.

이북의 토지개혁은 공산주의 원칙을 따른 것이었다. 그리고 1949년에 실시된 이남의 토지개혁은 대지주의 이익을 최대한 보호했다는 점에서 자본주의 원칙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합작 7원칙의 토지개혁안은 대지주의 희생을 요구하며 무산층의 권익을 옹호하되 중소지주를 보호한다는 점에서 사회주의 원칙으로 풀이할 수 있다.

해방 당시의 조선은 생산인구의 대다수가 농업에 종사하는 농업사회였다. 그런데 국가 기강이 해이하던 조선 말기에서 농업경영의 자본주의화를 추진한 식민지시대를 거치는 동안 토지 소유의 집중이 너무 심해졌다. 식민지시대를 통해 경작할 땅을 잃은 5백만 명의 농업인구가 해외로 나가고도 국내 농민의 대다수가 자기 땅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경자무전(耕者無田)’은 해방 당시 조선에서 누구도 외면할 수 없는 문제였다. ‘지주당으로 불린 한민당조차 창당 때부터 토지 소유의 합리적 개혁을 기본 정책의 하나로 내걸고 있었다.

합작 7원칙은 이후 좌우대립의 주체가 될 좌익과 우익 세력이 뚜렷이 형성되는 촉매 노릇을 했다. 인민 대다수가 합리적 정책으로 인정할 만한 방안을 배척했다는 점에서 이때 형성된 좌익과 우익 세력을 극좌와 극우로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좌익의 분화가 먼저 나타났다. 좌익 정당 중 여운형의 인민당은 107일의 7원칙 발표 전날 확대위원회를 열어 7원칙 지지를 당론으로 정했다. 신진당과 사민당도 지지와 천성의 뜻을 밝혔다. 그런데 민전 사무국장대리 박문규가 반대 의사를 밝히고 나선 것은 박헌영 등 공산당 주류(간부파) 입장을 대변한 것이었다.

극좌 세력은 이북의 무상몰수 무상분배토지개혁이 정당한 것이었으며 이남의 토지개혁도 그 원칙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당하다는 것은 공산주의 이념을 기준으로 한 판단이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조선 현실에 맞는 타당성에 있었다. 이북 내에서는 극좌적 토지개혁이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그러나 그 무리한 극단성에서 파생된 문제의 하나가 이남 반공체제의 기반이 된 1백만 월남민이었다.(1948년 초에 이남 반공세력에서는 월남민 수가 460만 명이라고 주장했다.)

합작 7원칙이 나올 무렵에는 남조선노동당(남로당) 설립을 목표로 이남 좌익세력의 통합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주요 통합 주체인 공산당, 인민당, 신민당이 모두 분해되어 남로당과 사회노동당(사로당)을 향한 두 개의 흐름으로 재편되었다. 남로당 측은 좌우합작에 반대하거나 냉담한 입장이었고, 사로당 측은 좌우합작을 적극적으로 지향했다.

 

민족주의를 벗어던지고 극우의 본산이 된 한민당

 

뒤이어 우익의 분화 현상이 한민당에서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7원칙 발표 직후 한민당 성명서에서는 정면으로 반대하지 못하고 모호한 점이 있다며 다소 애매한 태도를 보였지만 7원칙의 토지개혁안에 반대하는 내용은 분명했다.

 

3조에서 토지제도를 개혁하여 경작 농민에게 분배하는 것은 본당의 원래부터 주장하는 바이나 유가 매수한 토지를 무상 분여한다는 것은 국가의 재정적 파탄을 초래할 것이요, 이 재정적 파탄을 면하려면 부득이 농민에게 중세를 과하게 될 것이며, 또 무상 분여한 토지는 결국 경작권만을 인정하고 농민의 소유권을 부정하는 결과가 되고 말지니, 이는 농민에 대한 일시 기만책이 됨을 불면할 것이다. 이에 본당은 단호 반대하는 바이다.

 

합작위에 참여했던 한민당 총무(지금의 최고위원에 해당하는 자리) 원세훈은 이 성명을 보고 바로 탈당계를 냈다. 그의 탈당 성명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토지의 체감매상과 무상분여 등에 대하여 국가재정의 부담이 과중할까 우려함은 애국자적 견지에서 그럴 듯도 하나 애국자적 지주들이 국가재정을 위하여 토지를 희사하는 분들이 없으리라고 할 수 없고, 유상매상 무상분여를 국가재정의 파탄이라고 하는 한민당이 국가재정을 위하여 토지의 무상몰수 무상분여를 주장할 용기는 어찌하여 없는가? 입법기관에서 토지문제를 신중 토의할 것이지만 조선에서 사유재산제를 채용할 것은 확정적인즉 모든 소작인에게 응분의 토지를 분여하고 소유권을 허여하고 일반적 세제에 의하여 징세한다면 그 무엇이 과중 부담일 것이며 기만될 것인가?

 

한민당 중앙위원 150인 중 16인이 같은 날 원세훈을 따라 탈당을 발표했다. 이들을 대표한 청년부장 박명환의 성명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이러한 견지에서 한 당에 구속됨 없이 전체적 입장에서 미력을 다하기 위하여 탈당한 것이다. 원세훈 씨를 비롯한 우리의 탈당을 가리켜 한민당의 분열보다는 좌우합작의 성립을 계기로 한 국내 정국의 일대 분해 재편성 과정이라고 본다. 현재로서는 신당 조직의 의사는 없으나 반드시 지식층 기타 대중의 적극 지지할 일대 세력에 집중될 시기가 올 것만은 확신한다.

 

사흘 후 김병로의 좌우합작 지지 성명이 나왔다. 한민당 핵심 지도자였던 김병로는 몇 달 전 군정청 사법부장에 취임하면서 당적을 떠나 있었는데, 이제 김성수 중심의 한민당과 결별을 선언한 것이다. 1021일까지 한민당 탈당자 중에는 중앙위원 80명이 있었다. 중앙위원의 과반수가 좌우합작을 지지하며 떠나가고 한민당은 지주당의 본색이 분명해졌다.

합작 7원칙은 1946년 여름에 시작된 좌우합작 노력의 첫 성과였고, 이를 계기로 종래의 좌익과 우익에서 극단파와 중간파가 갈라지게 되었다. 그 결과 남로당과 한민당이 극좌와 극우의 거점이 되었다. 그 시점까지 극단파와 중간파가 동거하는 가운데 좌우합작 노력이 늦어지고 있었던 까닭이 무엇일까?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원회(건준)의 상황에서 좌우익의 형성 과정을 살필 수 있다. 건준을 이끌던 여운형 위원장과 안재홍 부위원장은 둘 다 나중에 중간파로 나설 사람들이었고, 건준에서부터 좌우합작을 시도했다. 그들은 좌익과 우익을 모두 건준에 끌어들이려 했는데 동아일보 계열을 중심으로 한 일부 우익은 건준을 외면하고 한민당을 만들었으며, 박헌영 중심의 일부 좌익은 건준에 몰려들어와 조직을 장악했다. 그 바람에 출범 보름도 안돼 안재홍은 건준을 떠나고 여운형의 지도력은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극좌와 극우의 핵심이 될 동아일보 세력과 박헌영 세력은 건준을 둘러싸고 이미 좌우합작 거부 자세를 드러냈던 것이다. 그러나 후에 중간파를 형성할 민족주의자들은 좌우익 내에서 설득을 통해 좌우합작을 추진할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원세훈과 김병로를 비롯한 투철한 민족주의자들이 한민당에도 많이 참여하고, 여운형의 인민당과 백남운의 신민당 등 민족주의 성향의 좌익 정당들도 공산당과의 협력을 추구했던 것이다.

그런데 1946년 봄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미소공위)가 결렬되면서 좌우합작의 필요성이 절박해졌다. 좌우익 내에서 지나친 대결주의를 견제하는 데 진력하고 있던 중도적 민족주의자들이 진영 밖으로 나와 좌우합작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된 것이었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따른 조선 독립을 실현하기 위해 좌우합작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분명해진 것이었다.

 

조선과 오스트리아에 부과된 신탁통치의 의미

 

건국을 위한 좌우합작의 필요성은 비슷한 처지에 있던 오스트리아에서 확인된다. 오스트리아는 세계대전 발발 직전인 1938년 독일에 합병되었는데, 1943년 카이로회담에서 조선 독립 방침이 정해지기 직전 오스트리아 독립 방침도 연합국 외상회담에서 결정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오스트리아는 미---4개국의 분할점령에 놓였고, 독립 전 10년의 신탁통치 방침이 연합국 사이에 결정되었다.

오스트리아는 원래 좌우대립이 극심한 나라였다. 1934년에는 내전까지 겪은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 4개국 분할점령 하에서 좌우대립이 재연된다면? 소련과 서방국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고 갈등의 현장이 될 오스트리아의 장래는... 어떤 혼란을 겪을지 오스트리아 지도자들은 투철히 인식했다. 그래서 우익의 인민당(OVP)과 좌익의 사회민주당(SPO)을 중심으로 합작정부를 세워 신탁통치 10년을 견뎌내고 영세중립국으로 독립하기에 이른다. 이 합작이 얼마나 탄탄한 것이었는지, 독립 후에도 10년 이상 계속되었다.

연합국이 조선과 오스트리아의 전후 독립 방침을 결정한 것은 전황을 수세에서 공세로 돌리려고 안간힘을 쓸 때였다. 두 나라의 독립 방침은 일본제국과 독일제국에 균열을 일으키려는 전략적 동기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두 나라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연합국이 바라던 수준의 저항을 일으키지 못했다. (임시정부와 광복군이 연합국의 공식 승인을 받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전쟁이 끝났을 때 연합국은 일본과 독일의 약화를 위해 두 나라의 독립 방침을 지키기는 지켰지만, 5, 10년의 신탁통치 부과에는 스스로 독립의 의지를 보여 일본과 독일에 저항하지 못한 데 대한 징벌의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오스트리아 지도자들은 이런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고 독립의 과제 앞에서 이념 갈등을 접어놓은 반면, 조선에서는 반탁운동이 거세게 일어난 결과 미소공위가 좌초하고 분단과 전쟁을 겪게 되었다. 조선 지도자들이 세계정세를 모르고 있었던 것일까?

1945년 말 모스크바 3상회담 직후 거족적 반탁운동이 결성될 때는 모르고 있었던 것이 맞다. <동아일보>의 고의적 오보로 인해 신탁통치 결정이 소련의 고집에 따른 것이고 미국은 즉각 독립을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조선의 민의를 보여주기만 하면 신탁통치 없는 즉각 독립이 가능할 것이라는 환상을 심어준 오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지도자들이 반탁운동에 참여했다. 박헌영이 이끌던 공산당조차 며칠 후 모스크바의 지령을 받기 전까지는 반탁의 입장을 밝히고 있었다.

그로부터 몇 주일 시간이 지나는 동안 3상회담의 실제 상황이 알려지면서 민족운동으로서 반탁운동은 의미를 잃었다. 그 후의 반탁은 3상회담 결정 반대와 미소공위 방해를 위한 극우세력의 정략적 구호로 이용되었을 뿐이다. 진정한 민족주의자들은 반탁 대열을 떠나 미소공위를 지지하는 입장으로 돌아섰고, 1차 미소공위가 실패하자 그 재개를 위해 좌우합작에 나섬으로써 중간파 노선을 출범시킨 것이었다.

진정한 민족주의자들이 반탁 대열을 떠났다고 했는데, 그러면 반탁운동을 계속한 김구는 진정한 민족주의자가 아니었단 말인가? <해방일기> 작업을 통해 나는 김구에게 민족주의자로서의 면모와 극우정객의 면모가 포개져 있었다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 민족주의자이기는 하지만, 중간파 노선에 나선 김규식, 여운형, 홍명희, 안재홍, 원세훈 같은 순수한 민족주의자들과는 차이가 있었다는 생각이다.

조선의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오스트리아 지도자들과 같은 정세 인식을 했기 때문에 좌우합작을 위한 중간파 노선에 나선 것이었다. 그 대열에는 당대의 저명한 지도자급 인물들이 망라되어 있었다. 조선과 오스트리아의 진로가 갈라진 이유는 지도층 주류의 인식 차이가 아니라 이에 대한 방해세력의 강약 차이에 있었던 것으로 나는 본다.

조선에서 좌우합작의 방해세력은 극좌와 극우의 이름으로 나타났다. 양쪽 세력은 각각 두 점령국의 지원 아래 힘을 키웠다. 이북에서는 소련의 우호정권 수립목적이 조선인의 민심에 배치되지 않았기 때문에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가 힘을 합쳐 행정권을 장악했고 극우 요소는 이남으로 대거 넘어갔기 때문에 큰 갈등이 없었다. 반면 이남에서는 복잡한 양상이 전개되었다.

이남의 극좌파는 이북에서 실권을 쥔 공산세력의 지원을 받아 온건파를 몰아내고 남로당을 장악했다. 한편 공산주의는 물론,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까지도 싫어하는 친일파 집단을 중심으로 극우파가 형성되었다. 명망 높은 민족주의자들은 중간파에 집중되어 있었다. 극우파는 민족진영을 자칭하고 이승만과 김구가 그 간판 노릇을 했는데, 친일파 세력이 쥐고 있던 막대한 자금력과 행정력, 경찰력을 이용하기 위해 그들과 손을 잡은 것이었다.

 

조선의 좌우합작을 가로막은 외세의 힘

 

조선과 오스트리아 지도층 주류의 좌우합작 필요성 인식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파시스트와의 전쟁이 끝난 이제 세계적 긴장은 공산주의 소련과 자본주의 서방 사이에 형성될 전망이었다. 소련과 서방국 군대의 분할점령 아래 놓인 상황에서 좌우대립은 소련과 서방국 사이에 갈등을 일으킬 것이고, 점령국들의 합의체제가 무너지면 피점령국의 장래는 험난해지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세계대전 중 맺어진 소련과 서방국 사이의 합의가 이행되는 것이 5년이 걸리든 10년이 걸리든 피점령국의 안전한 독립을 보장하는 길이었다.

두 나라의 진로 차이는 외세의 개입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문명세계중심부에 있던 오스트리아에서는 소련과 미국 어느 쪽도 처신을 조심해야 했다. 반면 변방 조선에서는 점령국이 무슨 짓을 저질러도 세계여론의 지탄을 받을 염려가 적었다.

조선의 두 점령국 중 더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미국이었다. 동유럽 공산권 구축에 여념이 없던 소련은 동아시아 형세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중국과 베트남에서 진행된 자발적 공산화에도 별 도움을 주지 않았다. 조선에는 적대적 정권이 들어서지 않기만을 소련은 바랐고, 조선인의 민심에 따라 건국이 진행되는 데 불만이 없었다. 전쟁으로 인한 국력 피폐도 소련의 적극적 외부 개입을 가로막는 큰 조건이었다.

반면 전쟁 피해가 적고 군사력과 경제력이 넘쳐나고 있던 미국은 세계패권을 노리거나 세계적 긴장 고조를 바라는 입장이었다. 무엇보다 경쟁자 일본을 물리친 태평양을 장악하고 세력권을 동아시아 지역까지 확장하는 것이 전쟁 후 미국의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그래서 일본 점령에 덤으로 조선의 분할점령에 나선 것이었다.

당시의 모든 제3세계 지역과 마찬가지로 조선의 사회경제적 상황은 자본주의 시행에 적합지 않았다. 그런데 조선의 민심이 원하는 사회주의의 길로 나아갈 경우 친소-반미의 성향을 보일 것으로 미국은 걱정했다. 그래서 일본의 조선 통치와 똑같이 협력자 집단을 앞세운 무력통치 정책을 택하고 조선의 민심이 정치에 반영되는 길을 막았다. 이북에서 소군정 하에서도 인민위원회를 통한 주민자치가 발달하는 동안 이남의 미군정은 경찰력을 식민지시대보다 세 배나 늘려 경찰국가를 만들었다.

미국의 억압적 점령정책에 누구보다 적극 호응한 것이 친일파 집단이었다. 일본이 육성한 친일파는 소속사회의 파괴에 개의치 않고 외세에 영합해 사익을 꾀하는 매판적 집단이었다. 정상적인 사회 상황에서는 주변적 존재에 머무를 반사회적 성향의 집단이 식민지 상황에서 재력과 학력을 독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집단은 민족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를 원하는 민심과 겉돌면서, 이제 일본 대신 미국의 이해관계에 부응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이 집단에게는 민족국가건설을 꺼리는 경향까지 있었다. 민족주의자들은 친일파 처리를 해방에 따른 중요한 과제로 인식하고 있었고, 가혹한 숙청까지 바라지 않는 온건한 사람들도 일부 악질 친일파의 처단과 친일파 일반의 기득권 양보는 당연한 조치로 생각했다. 친일파 중에는 기득권을 양보하고 민족국가 건설에 동참할 생각을 가진 비교적 양심적인 사람들도 있었지만, 악질 친일파는 가혹한 숙청의 위험을 선전해서 한민당을 중심으로 민족주의에 저항하는 세력을 끌어 모았다. 이북의 엄격한 친일파 처리가 이 선전에 도움이 되었다.

 

이남 극우세력의 폭력을 키워준 미군정

 

미군정은 이 집단의 힘을 크게 키워주었다. 군정청 관리로 대거 등용하고 경찰력을 키워 이 집단에게 맡긴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일이거니와, 이 집단의 막강한 자금력 조성을 미군정이 도와준 사실을 나는 <해방일기> 작업 중 알게 되었다.

조선은행권의 발행고는 해방 직전까지 약 50억 원이었다. 그런데 미군정이 들어설 때까지 85억 원 선으로 늘어나 있었다. 해방 전에는 지폐를 일본에서 인쇄해 갖고 왔는데, 이때는 경성에서 마구 찍었다. 인쇄량이 너무 많아 민간의 몇 개 인쇄소까지 지폐 인쇄에 징발되었다. 이때 찍은 지폐는 인쇄 품질이 불량해서 상인들이 붉은 돈이라 부르며 받지 않으려 했다. 미군정은 이것을 화폐로 인정하고 은행에서 교환을 보장했다. (이때 징발된 인쇄소의 하나가 해방 후의 정판사였고, 유출된 원판으로 인해 공산당이 위조지폐를 발행했다는 정판사사건이 후에 일어나게 된다. 정판사에서 1천만 원대 위폐가 인쇄되었다는 미군정 측 주장도 신빙성이 없는 것이거니와, 총독부와 미군정의 합작으로 이뤄진 35억 원대 위폐 유통이 그 배경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다.)

기존 발행고의 70퍼센트에 달하는 거액이 불과 몇 주일 사이에 유통된 범위는 빤하다. 그 대부분이 친일파 집단의 손에 쥐어져 있었던 것 아니겠는가. 이 돈의 교환능력을 미군정이 보장해 준 데서 이 집단의 막강한 자금력이 확보된 것이다.

이 돈은 여기저기서 모습을 드러냈다. 미군 상대로 댄스홀 사업에 나선 김계조의 5백만 원, 대표적 친일파 사업가인 박흥식의 5천만 원이 형사사건을 통해 드러났고, 정치자금으로는 이승만을 둘러싼 경제보국회의 2천만 원, 귀국한 임시정부 인사들에게 제공된 7백만 원 등이 모습을 나타낸 일이 있다. 이것이 빙산의 일각이었음은 정황으로 보아 분명하다.

금품에 의한 대중 동원 사례도 194511월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식민지체제 붕괴로 대다수 인민이 생계가 막연한 상태에 빠져 있을 때 친일파 집단의 자금력이 엄청난 힘을 발휘하게 된 것이다. 이철승이 매일 김성수 등에게 아침인사를 드리며 용돈을 타 쓴 사례나 김두한이 돈을 세지 않고 한 웅큼씩 부하들에게 쥐어준 호방함을 과시한 사례에서 이 무렵 우익 청년운동의 본질을 알아볼 수 있다.

한민당은 19459월 출범 때 민심에 역행하는 본심을 감춘 채 민족주의의 상징인 임시정부를 받들고 합리적 토지개혁을 추진하겠다고 표방했다. 그러나 1년이 지나는 동안 군정청 간부직과 경찰 수뇌부를 독점해 미군정과 밀착관계를 맺는 한편 막강한 자금력으로 김구와 이승만을 포섭하고 대중 동원력을 확보했다. 194610월 좌우합작을 거부하면서 본색을 드러낸 것은 민심을 왜곡하거나 억누르기에 충분한 폭력에 자신감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그 폭력은 그 무렵의 총파업과 대구 사태 진압 과정에서 과시되었다.

조선과 오스트리아의 행로를 가른 결정적 요인이 미군정이 키워준 극우세력의 폭력이었다. 총독부가 막판에 찍은 붉은 돈처럼 변칙적으로 찍어낸 돈이 오스트리아에 있었다면 점령군이 합법화해 줄 수 없었을 것이다. 군정청 요직과 경찰력을 특정세력에게만 맡길 수도 없었을 것이다. 국제여론이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 민족주의자들의 좌우합작 노력은 오스트리아 지도자들과 같은 것이었다. 다만 조선에는 이 노력을 좌절시키려는 세력이 점령군의 비호를 받고 있었을 뿐이다. 그 세력은 중간파 언론과 집회의 봉쇄는 물론, 암살을 행하고도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보장을 받고 있었다. 그런 세력이 오스트리아에서 활개를 치고 있었다면 오스트리아의 좌우합작도 성공할 수 없었으리라고 나는 본다.

서양 세력이 동방으로 밀고 들어오는(西勢東漸) 추세는 제2차세계대전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1910년 일본의 조선 강점이 작게 보면 동쪽으로부터의 침략이었지만, 크게 보면 서양화된(脫亞入歐) 일본의 침략도 서세동점 현상의 일환이었다. 1945년의 해방이 사실에 있어서는 일본의 힘 대신 미국과 소련의 힘이 한반도를 휩쓸게 된 것일 뿐이고, 서세동점의 압력이 냉전의 형태로 더욱 강화되는 계기였다는 사실을 중간파의 좌절에서 읽을 수 있다.

 

때리는 극우, 말리는 극좌, 속셈은 서로 통했다.

 

1948년 들어 분단건국의 기미가 짙어질 때 중간파는 남북협상을 최후의 과제로 세웠다. 좌우합작에 반대하며 반탁운동에 매달려 있던 김구도 분단건국 추진세력과 손을 끊고 남북협상 대열에 합류했다. 친일파 집단 중심의 분단건국 추진세력에서 민족진영간판으로 이용해 온 김구와 이승만 두 사람 중 민족주의를 끝까지 버리지 않고 있던 김구가 이제는 이용가치보다 부담이 더 큰 존재가 되어버린 결과로 보인다.

김구의 합류를 계기로 남북협상은 건국의 진로를 좌우하는 최후의 시금석이 되었다. 이남의 극우, 즉 분단건국 추진세력은 종래 좌우합작을 반대하던 노력을 남북협상 방해로 이어갔다. 그러나 남북협상 노력의 좌절에 더 결정적인 작용을 한 것은 이북 지도부였다.

김일성 중심의 이북 지도부가 남북협상에 보인 성의는 이남 극우세력에 대한 비교우위를 점하는 데 그쳤다. 실제 협상에서는 이남 협상파를 대등한 상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박헌영 중심의 이남 좌익에게도 이남 대표권의 절반 지분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북의 대표권은 자기네가 모두 갖고 이남 대표권을 좌익과 우익(협상파) 사이에 쪼갠다면 남북 좌익이 전체의 4분의 3 대표권을 가지는 구도가 되는 것이다.

이북 지도부에게 분단건국을 꼭 막아야겠다는 의지가 있었다면 그런 아전인수(我田引水) 격의 주장에 집착하지 말아야 했다. 인민위원회를 통한 정치 발전으로 민족주의를 포함한 인민의 염원을 하나의 지도부가 대변하게 된 것은 훌륭한 업적이다. 그러나 그런 발전을 이루지 못한 이남 인민과의 진정한 협상을 바란다면 일원화된 지도부가 인민에게 위임받은 대표권을 이남에 대한 헤게모니 장악에 이용하려는 자세를 삼가야 했다. 이남의 극우세력을 고립시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이북 지도부에게도 분단건국을 꼭 막으려는 의지가 없었던 것이다. 솔로몬의 판결이 떠오른다. 이남 극우세력은 진정한 민족국가의 건설을 가로막으려는 친일파 집단의 뜻을 반영하고 있었다. 가짜 어미가 분명하다. 그런데 또 하나 어미도 진짜가 아니었다. 상대가 우기는 데 따라 못 이기는 척하면서 반쪽이라도 차지하겠다는 배짱이었다.

이북에서 민주기지론이 어느 시점에 나타났는지 이론이 분분하다. 일각에서 나타난 것은 꽤 빠른 시점인 것 같지만, 지도부의 기본노선으로 채용된 것은 1947년 가을 제2차 미소공위가 결렬된 뒤의 일로 보인다. 한반도 전체를 아우르는 중도 노선의 통합건국보다 일부에라도 확실한 공산정권을 세우겠다는 민주기지론이 당시 극좌 노선의 핵심이었다.

극우에 비해 소극적인 태도였지만 함께 분단건국을 획책한 좌익세력이 있었고, 이것을 나는 극좌로 본다. 정상적인 좌익과 우익은 타협을 향한 정치에 나선다. 당장 백퍼센트 만족하지 못하더라도 다음 단계의 전진을 염두에 두고 판을 지키는 것이다. ‘정치를 포기하고 전투만을 바라보며 판을 깨는 것은 이런 정상적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므로 극우’, ‘극좌의 이름이 붙는 것이다. 인민의 절대적 염원인 남북통합의 민족국가 건설을 등지는 것이 당시로서는 판을 지키고 깨는 분명한 기준이었다.

극좌와 극우 사이에 적대적 공생관계가 가능한 것은 판을 깨려는 목적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양측은 민심의 정상적 표출을 가로막음으로써 중간파의 입지를 없애는 데 협력했다. 극좌의 극렬투쟁과 극우의 극한탄압이 어울려 상황논리가 세상을 휩쓰는 사태가 194610월 이후 지속적,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가운데 중간파는 양측으로부터 회색분자, 기회주의자로 매도당했다. 중간파 노선에 대한 민심의 지지가 드러날 기회를 얻지 못하는 동안에 분단건국을 향한 양측의 암묵적 협력은 거침없이 계속되었다.

 

아직도 표현의 길을 얻지 못한 해방 조선의 민심

 

끝내 막아내지 못한 분단건국이 닥치자 중간파 인사들은 통합건국을 바라던 모든 인민과 함께 스스로의 거취를 결정해야 했다. 당시 남북에서 형성되고 있던 권력의 성격을 굳이 비교하자면 이북 쪽이 민족주의자들에게 더 매력적이었다. 그래서 많은 민족주의자들이 건국을 전후해 이북으로 넘어가 정권에 참여했다. 그러나 남북전쟁 후 권력재편 과정에서 정치세력으로서의 위상을 잃어버리고 만다.

이남에 남은 중간파 인사 중 일부는 정치에 참여해 무소속’, 또는 소장파의 이름으로 소수세력을 만들었고, 1950년 선거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다. 분단건국이라는 잘못 끼워진 첫 단추를 시간이 걸리고 힘이 들더라도 바로잡아야겠다는 뜻이었다.

이승만 정권은 중간파의 뒤늦은 정치 참여를 큰 위협으로 여기고 출범 초기부터 탄압에 나섰다. 1949년 봄의 국회프락치사건과 뒤이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와해공작에서 민족주의 탄압 노선이 분명히 드러났다. 19506월 전쟁이 일어나자 전시 비상상황을 빙자하여 반공독재체제를 강화하는 가운데 중간파는 명맥이 끊길 지경에 이르렀다. 전쟁이 터졌을 때 이승만 정권은 중간파와 공감하던 이시영 부통령의 피난조차 도와주지 않고 도망가 버렸다. 김규식, 안재홍 등 중간파 지도자들은 서울에 묶여 있다가 북쪽으로 끌려갔다.

전쟁 후 남한에는 중간급 지도자들만 남아 혁신계란 낯선 이름의 주변적 존재가 되었다. 조봉암이 1956년 대통령선거에 평화통일등 중간파의 이념을 잇는 정책을 들고 나와 민심의 큰 호응을 받았으나 사법살인에 희생되었다. 1960년 봄 이승만 정권이 무너졌을 때도 분단건국 추진세력에 뿌리를 둔 민주당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혁신계는 큰 활동공간을 얻지 못했고, 이듬해 들어선 군사정권에게 다시 짓밟히고 말았다.

전쟁 후의 남북대결에는 적대적 공생관계가 계속된 측면이 있었다. 건국 전에 민심의 근거를 갖지 못한 이념대결이 민족국가 건설의 염원을 덮어버린 것처럼 체제대결이 남북 양쪽에서 민심을 억압하는 기제가 된 것이다. 남한의 경우 독재정권은 대결상황을 핑계로 민심을 억압했고, 이에 대한 저항은 미국식 민주화에 집중되었다. 한민당에서 출발한 제1야당이 이 저항의 성과를 독점하는 상황이 계속되는 동안 해방공간 이래 민심이 지향해 온 중간파 노선은 표현의 기회조차 제대로 얻지 못했다. 1987년 민주화의 성취로 정치적 자유가 형식적으로 성립되었지만 자본독재가 군사독재의 뒤를 이었기 때문에 실질적 민주화는 이뤄지지 못하고 사회주의와 민족주의는 정치의 장에 아직도 제대로 끼어들지 못하고 있다.

1990년대 소련과 동구공산권의 해체 이후 북한은 체제 존속이라는 절체절명의 과제 앞에서 정치 발전의 길을 찾을 여유가 없는 상태에 머물러 있다. 남한은 그에 비해 발전의 기본조건을 갖추고도 자본주의의 폐단이 극대화된 자본독재의 길로 빠져들어 왔다. 자본주의체제의 한계가 드러나고 있는 세계정세의 변화가 닥쳐오고 있는 지금까지도 남한의 정치에는 자본주의의 본질에 대한 성찰도, 소박한 민심의 염원도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고 있다.

닥쳐오고 있는 세계적 변화 속에서 주체적 진로를 찾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냉전체제에 파묻혀 있던 70년 전 조선 민심의 흐름을 무엇보다 먼저 되살릴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 민족주의, 그리고 사회주의를 향한 흐름이다. 그 사회주의는 레닌이나 어느 누가 규정한 의미의 사회주의가 아니라, 개인주의를 억제한다는 원초적 의미의 사회주의다. 그 민심은 70년이 지난 지금도 살아있지만 냉전의 이념대결이라는 그물에 걸려 제대로 표현되지 못하는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남북전쟁 발발 후 인민군에게 억류된 상태에서 중간파 지도자들은 최악의 좌절감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그들이 동원된 선전방송을 들은 한 역사학자의 소감을 통해 그들의 자세를 되새겨 본다.

 

아침저녁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군 총사령부의 보도를 듣고 또 자수자들의 전향성명도 방송으로 들을 수 있다. 모두들 원고를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전에 대한민국 내무장관을 지냈다는 김효석의 그 지나치게 비굴하고 치사스러운 주책덩어리의 내용에 비기어 안재홍, 조소앙 씨 등 소위 중립파들의 방송이 오히려 김효석보다는 대한민국을 덜 욕하고 인민공화국에 덜 아첨하여서 듣기 좋았다. 이는 그 개인의 인끔에 달린 문제이기도 하지만, 이래서 중립이란 귀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또 평소에 모씨는 자기에게 아첨하는 사람만을 쓴다는 풍설이 파다하였으니, A에게 아첨 잘하는 사람은 세상이 뒤바꾸면 또 B에게 아첨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김규식 박사의 방송은 그 어조조차 침통하였고, 또 그가 모씨를 못마땅해하는 말들은 일부러 어떤 편에 듣기 좋게 하려 하는 것이 아니고 폐부에서 우러나오는 불만의 폭발인 것 같아서 듣는이로 하여금 감개무량하게 하였다. (김성칠 <역사 앞에서> 1950727)

 

 

Posted by 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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