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9. 27. 15:48

 

몇 해 전 박 선생님이 전주에 자리 잡은 후부터 내게도 전주 이사를 권해 왔다. 나도 솔깃했다. 수도권을 떠나 자연을 더 가까이에서 누리며 살고 싶은 마음은 있어도 '깡촌'에 갈 용기는 없다. 자연을 많이 누리려면 그에 따르는 부담도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제주도에서 40대를 보낼 때 확인했다. 중소도시가 내 분수에 맞겠는데, 전주는 겪어본 경험이 없이도 매력적으로 여겨지는 곳이었다.

 

그래서 1년에 두어 번씩 틈 나면 전주에 놀러 가 어떤 곳인지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다 금년 들어 부쩍 현실적인 전망이 떠올랐다. 아이필드 유 대표가 전주로 이사간다는 소식 덕분이었다. 나를 잘 이해해 주는 분이 가까이 있다는 것이 이사를 위한 큰 조건인데, 이해해 주는 분 중에도 나이 젊은 분이 우선이다. 도움이 필요할 때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전주 방문 빈도가 높아졌는데, 호재가 거듭거듭 나타났다. 전주대 오 교수와 원광대 이 교수는 원래 가까이 지내던 이들이 아닌데, 전주로 향하는 내 마음을 반기며 힘껏 도와줄 뜻을 표해주었다. 결정적인 호재는 7월 초에 나타났다. 전북대 신 교수가 일산까지 찾아와 자신이 운영하는 연구프로젝트에 참여를 권해준 것이다.

 

덕분에 전주 방문이 더 잦아지고 아내의 이사 방침 승인까지 받았다. 치과, 내과, 한의원까지 전주에 확보했다. 이사를 언제 실행할 수 있을지 아직 불확실하지만, 그때까지 격주로 전주를 왕래할 방침을 정했다. 아내도, <해방일기> 작업 이래 내 생활이 너무 움츠러들어 있던 데서 조금 폭을 넓히는 편이 좋겠다고 지지해 준다. 솔직히 말해서 매주 평균 18회 이상 밥상을 차려주는 데 좀 싫증도 났을 것이다. 전주에서 살면 외식이 지금보다 훨씬 잦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고 보니 전주 가서 묵을 곳을 따로 마련해 놓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두 달마다 전주 갈 때는 박 선생님 아파트 건너칸의 서재에 묵었는데, 격주로 다닌다면 피차 불편하다. 그런데 그 대책도 박 선생님이 마련해 주셨다. 서재로 쓰려다가 빈 채로 놔두고 있는 오피스텔을 쓰라고 권해준 것이다.

 

지난 월요일(21일) 전주에 내려가 이튿날 오피스텔에 입주했다. 박 선생님이 필요 없는 물건 중 오피스텔에서 당장 쓸 만한 물건을 기증해 주는데, 포터 한 차가 무색하지 않다.(나는 이 물건들을 각별히 아낄 마음으로 박 선생님 돌림자를 따서 이름을 붙여주었다. 영탁이, 영식이, 영의, 영걸이, 영고, 영란이, 영장이, 영대... 이름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상상에 맡긴다.)

 

이사와 짐 정리가 끝나고 박 선생님과 늦은 저녁식사를 함께 할 때 오피스텔 입주 소감을 묻기에 "조반 독립이 무엇보다 기쁩니다." 대답했다. 모처럼 집을 떠나와도 박 선생님 서재에서 묵으면 아침에 살림칸으로 건너가 아침식사를 대접받는 것이 관례였다. 이제 내 공간에서, 아내가 싸준 밑반찬을 영고에서 꺼내 누룽지죽과 함께 먹으며 하루를 시작하는 기분... "독립 만세!"다.

 

내 인생의 행적을 보며 나를 '자유주의자'로 보는 이들이 많지만 나는 결코 자유주의자가 아니다. 계몽사상의 자유 관념에 허상이 크다고 생각할 뿐 아니라 생활에서도 그리 큰 자유를 찾지 않는다. 다만, 생활과 일의 본질을 확보하기 위한 '최소한의 자유'에 대해 단호한 태도를 취할 뿐이다. 그 약간의 자유도 절대 공짜로 여기지 않는다. 값을 제대로 치르기 때문에 알뜰하게 누릴 수 있다. 지난 몇 해 동안 일에 매달려 감옥살이 같은 생활을 자청해 왔다. 이제 생활의 자유를 요만큼 늘리는 것이 장기적 전망에서 바람직하다고 보는 것이다.

 

막상 전주로 이사하고 나면? 다음 단계 자유의 확장을 꿈꾸기 시작하고 있다. 집에서 3-40분이면 이를 수 있는 임실이나 진안의 산골, 산 경치 좋은 곳에 창고를 하나 빌리든지 터를 빌려 컨테이너를 놓든지 해서 서재를 꾸밀 생각이다. 앞으로 전주 다니면서 볼일의 하나가 그런 마음에 맞는 터를 찾아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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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일본의 집단자위권 확장 움직임이 많은 한국인을 걱정시키고 있다. 일본의 침략에 역사적 피해의식을 가진 한국인에게 일본의 평화헌법은 하나의 위안이었다. 70년 동안 현대일본의 존재양식을 규정해 온 이 평화헌법을 무력화시키는 요즈음의 변화가 걱정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정당성의 기준으로 원론적인 반대만 하고 있기에는 현실의 무게가 너무 크다. 일본 항복 70주년 시점에서 일본의 군사화 추세가 품는 의미를 다각적으로 살펴보고, 현실적 대응 방향을 궁리할 필요가 있다.

역사를 공부한 사람으로서, 평화헌법 제정 경위부터 살펴볼 생각이 든다. 존 다우어의 <패배를 껴안고>(최은석 옮김, 민음사 펴냄) 12-13(447-522)이 좋은 참고가 된다.

다우어는 일본 헌법이 실제적으로 19462월 초순의 1주일 동안 맥아더의 지침에 따라 점령군사령부(GHQ) 민정국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일본인이 스스로 작성한 것처럼 선전했지만 믿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36일 새 헌법 내용이 공표된 직후의 언론 상황을 다우어는 이렇게 그렸다.

 

GHQ가 헌법을 낳은 아버지란 것을 언론이 거론치 않도록 하는 임무는 GHQ 내의 민간 검열부에 할당되었다. “SCAP(연합국최고사령부)이 헌법을 기초한 데 대한 비판은 검열관이 검열 지침으로 삼은, 이른 바 키 로그의 한 분야로 정식으로 자리 잡았고, SCAP의 관여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일체 금지하도록 한다는 것이 명문화되었다. 그러나 저널리스트들은 초안의 이상한 일본어재미있는 표현에 주의가 기울어지도록 노력했다. 대담하게도 일본어판 헌법의 번역이 별로 좋지 않다고 적은 구절에는 검열관의 파란 줄이 그어졌다. 그러나 업무의 과부하에 시달리던 검열관들이 모든 구절을 점검할 수는 없었고, 대체로 헌법안을 지지하는 언론들도 사설 안에 조롱조의 말을 넣으려 했다. 예컨대 <아사히 신분>은 정부안을 어딘지 모르게 맞지 않는 빌려 입은 양복이라고 적었다. <지지 신포>는 부엌에서 풍겨 오는 냄새에 일본 음식을 떠올리다가 막상 식탁 위에 양식이 놓였을 때의 느낌 같다는 식으로 헌법안에 대한 첫인상을 적었다. 젓가락을 치우고 포크와 나이프를 들어야 했다. (위 책 500)

 

24일 민정국의 초안 작성 작업이 시작될 때의 상황과 이때 주어진 맥아더의 지침은 이런 것이었다고 한다.

 

이로써 민정국 사상 가장 유별난 일주일이 시작되었다. 민정국의 기밀회의록에 남겨진 바에 따르면 24일에 휘트니는 참모들을 소집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다음 주에 민정국은 제헌 의회가 될 것이다. 맥아더 장군께서 일본인을 위한 새 헌법 작성이라는 역사적 임무를 민정국에 부여하셨다.” 새 헌법은 맥아더가 핵심 사항으로 간주한 세 가지 원칙에 기반하는 것이어야 했다. 휘트니가 회의에 들고 간 간략한 메모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1. 천황은 국가의 수장이다. 왕위는 세습된다. 천황의 의무와 권력은 헌법이 규정하는 한도 내에서 행사될 것이며 거기에 규정된 인민의 기본 의지에 조응해야 한다.

 

2. 국가 주권 행위로서의 전쟁은 폐지된다. 분쟁 해결, 심지어는 안전 보장을 위해서도 전쟁은 일본의 도구가 될 수 없음을 천명해야 한다. 일본은 스스로의 방위와 보호를 위해 오늘날 세계를 움직이고 있는 좀 더 숭고한 이상에 몸을 맡겨야 한다. 일본에서는 그 어떤 형태의 육군, 해군, 공군의 존재가 인정되지 않을 것이며, 그 어떤 형태의 교전권도 인정되지 않을 것이다.

 

3. 일본의 봉건제는 중단될 것이다. 황족을 제외한 그 어떤 이도 지금 현재 귀족인 자를 제외하면 앞으로는 귀족이 될 수 없다. 지금부터 귀족은 국민으로서나 시민으로서나 어떤 식으로든 특권을 누릴 수 없다. 영국식 예산 제도를 채용한다. (위 책 466-467)

 

맥아더의 3개 지침 중 제2항이 평화헌법의 방향을 규정한 것이다. 2항에 표현된 극단적 기준은 초안 작성위원회에서 다소 완화되었다고 한다.

 

초안 작성 위원회도 탈군사화에 대한 맥아더 명령의 격한 어조를 (심지어는 의도까지도) 약간 톤을 낮추어 표현했다. 이런 수정 작업에 대해 개인적으로 책임을 느끼도 있던 케이데스(대령, 법률가)설령 자위에 필요하다 할지라도... 국가의 주권 행위로서의 전쟁은 부정한다는 맥아더의 단호한 태도는 지나치게 단정적이라 보았다. 어떤 국가든지 외부의 위협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내부의 혼란에 대해서도 헌병, 경찰, 국경 수비대 등의 기구를 통해 주권을 지킬 권리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때문에 그는 전쟁 부정 조항의 첫 문단을 다음과 같이 단순한 형태로 수정했다. “국가의 주권 행위로서의 전쟁은 철폐된다. 분쟁 해결 수단으로 무력을 사용하거나 그 사용으로써 위협하는 것은 영원토록 이를 폐기한다.” 교전 상태의 존재를 부인하고 육해공군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 조항의 두 번째 문장에 관해서는 맥아더의 지시가 그대로 관철되었다. 케이데스는 의도적으로 자위를 위해어느 정도 재무장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두었으며, 그럼으로써 보수파 부활의 씨를 뿌린 셈이 되었다. (위 책 476-478)

 

이런 경위를 거쳐 194611월 공포된 헌법 제 9조는 이런 내용이 되었다.

 

일본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하는 국제 평화를 성실히 희구하고, 국권의 발동에 의거한 전쟁 및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영구히 이를 포기한다. 이러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육해공군 및 그 이외의 어떠한 전력도 보유하지 않는다. 국가의 교전권 역시 인정치 않는다.”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펴냄)

 

전쟁이 끝나고 강화조약을 맺을 때 패전국의 군사력에 제한을 가하는 것은 먼 옛날부터의 관행이었다. 일본의 비()군사화도 같은 맥락의 조건이었거니와, 제국주의시대가 끝나 가던 당시에는 전쟁 방기를 통한 평화의 이념이 널리 호소력을 갖고 있었다. 1928년의 켈로그-브리앙 조약, 전쟁 방기에 관한 일반 조약의 정신을 되살려 실현하려는 희망이 일본 평화헌법의 배경이기도 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이념이라 하더라도 승자의 강요에 따르는 것이라면 반감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다. 1951년 조인된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따라 1952428일 일본이 주권을 회복하던 날 <아사히신문>에는 7년 가까운 점령기가 일본인을 무책임하고 굴종적이고 조급한 심성으로 만들고... 세상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비뚤어진 시각을 갖게 만들었다고 비판하는 글이 실렸다. (<Wikipedia> "Occupation of Japan")

모든 일본인의 심성과 시각이 다 그렇게 비뚤어지지는 않았겠지만 그런 경향이 폭넓게 일어났으리라는 것은 정황으로 보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전쟁 상대였던 여러 나라 중 미국 한 나라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된 사실도 일본인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었을 것이다. 사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 과정에서 일본을 미국이 독점적으로 관리하게 된 것은 유별난 일이었다.

19452월 연합국의 승리가 확실해진 상황에서 열린 얄타회담에서도 일본은 독일과 마찬가지로 여러 연합국의 분할점령 대상이 될 전망이었다. 일본 항복을 목전에 두고 717일에서 82일까지 열린 포츠담회담에서도 일본 점령의 구체적 방침이 정해지지 않았다. 그런데 815일 트루먼 대통령이 맥아더를 연합군최고사령관(SCAP)에 임명하고 일본 본토를 연합군최고사령부 관할로 정함으로써 미국의 독점적 지위가 결정되었다.

소련은 홋카이도 점령을 원했다. 소련이 일본을 포기한 이유는 명확하지 않지만, 막 개발된 원자폭탄을 비롯한 미국의 군사적 우위에 원인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포츠담회담 개막 전날인 716일 원자폭탄 실험 성공에서 815일 일본의 항복까지 한 달 동안의 사태 진행에서 드러난 미국의 일본 장악 의지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얄타회담 때까지도 연합국 진영에서 소련의 역할이 압도적이었다. 유럽 전역에서 동부전선의 소련군 병력은 서부전선 연합군의 세 배가 넘었다. 서부전선에서 라인 강을 넘지 못하고 있는 동안 소련군은 베를린 동쪽 1km 거리까지 진격하고 있었다. 태평양전쟁의 병력 희생을 감당하기 힘들던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독일을 굴복시킨 후 소련군이 일본과의 전쟁에도 참여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스탈린은 독일 항복 3개월 후에 아시아 전역에도 참여할 것을 약속했다. 그래서 58일 독일 항복으로부터 3개월이 지난 88일에 대 일본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에 진격하게 되는 것이다.(극동 시간으로는 89)

얄타회담 5개월 후 포츠담회담이 열릴 때 소련에 대한 미국의 태도가 크게 달라져 있었다. 독일 항복 후 소련의 동구권 공산화 정책이 서방국의 반감을 자극, 파시스트와의 전쟁에 묻혀 있던 반공의식을 불러일으킨 결과였다. 때맞춰 완성된 원자폭탄이 미국의 반소 정책을 부채질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 목적이 일본의 굴복보다 소련에 대한 과시에 있었다는 관점이 있는데, 나는 이를 지지한다.

포츠담회담 중에 포츠담선언이 나왔지만, 회담 주체와 선언 주체는 서로 달랐다. 회담은 독일과 유럽 문제들을 다루기 위해 미--소 정상이 모인 것이었다.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선언은 미--중 정상의 이름으로 나온 것이었다. 소련이 선언에 빠진 것이 아직 일본과 교전 중이 아니기 때문이었다고 대개 이해하지만, 예정된 선전포고를 목전에 둔 시점의 이 선언에서 꼭 빠져야 할 이유라고 보기 힘들다.

포츠담선언의 말미에 일본이 항복 요구를 거부할 경우 신속하고 철저한 파괴를 당할 것이라고 위협한 대목이 원자폭탄 사용을 염두에 둔 것으로 해석된다. 일본은 86일까지 이 요구에 아무 응답을 하지 않았는데, 이 침묵을 거부의 의미를 띤 묵살로 해석해서 히로시마에 폭탄을 떨어뜨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 충격을 소화할 겨를도 없이 사흘 후 나가사키에 또 폭탄을 떨어뜨렸다. 일본은 나가사키 투하 다음날인 810일 포츠담선언의 조건부 수용 의사를 연합국에 전달했다.

적대감이 극도에 달해 있던 세계대전 말기가 아니었다면 원자폭탄처럼 극악한 무기의 실전 사용 기회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폭발실험의 첫 성공 3주일 후 실제 투하에 이르는 과정에서 미국은 이 기회를 활용하기 위해 최대한 서두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포츠담선언 자체도 원자폭탄 투하를 정당화하기 위한 요식행위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평화헌법 자체는 인류의 평화 이념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근 70년이 지나도록 이 이념은 확산되지 못한 채로 일본에만 묶여 있다. 그렇다면 퇴색해 버린 이념 측면보다 미국이 일본을 통제하는 기제로서의 측면에 더 큰 의미가 남아있는 셈이다. 어찌 보면 일본은 원자폭탄을 얻어맞고 미군 점령 하에서 국가체제를 새로 세운 이래 미국의 인질로 70년 세월을 지내 온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일본의 재()군사화가 일본을 보통국가로 만드는 것이라면 그를 둘러싼 동아시아 지역을 보통지역으로 만드는 의미도 거기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세계적 냉전이 끝나고도 냉전 식 긴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동아시아 지역의 특수 상황을 구성하는 하나의 큰 요소가 미국에 대한 일본의 안보 의존이다. 재군사화 자체는 반갑지 않은 일이라도 이것을 피할 수 없는 추세라고 본다면, 그를 통해 일-미 관계의 기반 조정을 기대할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진행 중인 일본의 재군사화는 미-일 동맹의 강화를 위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속된 말로 변소 가기 전과 다녀온 후의 마음은 다른 것 아닌가. 재군사화를 뒷받침하는 일본의 민심은 보통국가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 성취를 위해 지금 현실적으로 필요한 것이 미국의 승인과 지지다. 그 성취가 일단 이뤄져 미국에 대한 안보 의존 상태를 벗어난 뒤의 일본의 선택이 지금과 똑같은 것이 되리라고 누가 장담할 것인가?

<서유기>에 긴고주(緊箍咒)란 것이 나온다. 손오공의 머리에 긴고란 테가 씌워져 있는데, 그가 말을 듣지 않으면 현장법사가 긴고주란 주문을 외워 엄청 괴롭힐 수 있기 때문에 통제할 수 있다. 평화헌법은 일본이 미국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긴고노릇을 해온 셈이다.

동아시아 지역의 변화에서 일본의 더 큰 역할을 미국이 바라기 때문에 긴고를 벗겨주는 셈이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흥미롭기도 하다. 미국은 과거에 목전의 이득을 위해 특정 세력을 키워줬다가 뒤통수 맞은 일이 거듭 있었다. 탈레반, 후세인, 오사마 빈 라덴... 그런 이력 때문에 보통국가 일본의 향배가 흥미로운 것이다.

 

 

Posted by 문천

 

이런 강의를 해보고 싶다... 하는 생각으로 강의계획을 구상해 보고 있습니다. 강단에 서는 강의가 아닌, 책을 통한 강의가 될 수도 있겠지요. 대학 강의를 염두에 두고 14개 장을 설정해 놓고, 하나하나의 장에 관한 기본적인 생각을 적어 나갑니다. 이 단계의 정리가 한 차례 되면 각 장의 내용에 대한 더 세밀한 생각으로 나아가려 합니다. 꽤 오래 걸릴 일 같으니 의견 있는 분들 붙여주시면 대단히 고맙겠습니다.

 

 

1. 자연과 문명

 

문명’(civilisation)이란 말은 상당한 폭의 의미를 갖고 쓰여 왔다. 18세기 후반 계몽주의시대 유럽에서 이 말이 처음 쓰일 때는 진보사관에 입각해서 사회 발전의 수준을 표시하는 뜻으로 쓰였다. 어원인 라틴어의 ‘civitas’(도시)가 보여주는 것처럼 농촌과 도시의 발전 수준 차이를 염두에 두고 근대사회의 도시적 특성을 가리킨 것이다.

이런 의미의 문명은 하나의 현상일 뿐이지, 여러 개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19세기를 통해 문명을 하나의 보통명사로 보는, 즉 여러 가지 문명이 시대마다 존재했고 한 시대에도 여러 문명이 나란히 존재할 수 있다는 관점이 확산되어 20세기에는 널리 통용되었다.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가 이 관점을 크게 유행시켰고,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도 이에 따른 것이다.

1850년대 진화론의 출현을 계기로 발생한 인류학이 20세기 들어 크게 발전하면서 문명에 관한 연구를 확장-심화하는 주체가 되었다. 인류학의 연구 대상인 인간의 정체성의 근거로 문명을 파악하게 된 결과였다. 문명을 자연과 대비시키는 이 관점은 문명의 정치적 가치를 벗겨내고 문명현상 전반에 대한 체계적 연구를 가능하게 해주었다.

인류학의 문명 연구를 넘어서는 문명학의 필요성이 21세기 들어 제기되고 있다. 근대문명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회의감이 고조되는 데 따라 문명을 외부에서 관찰하는 연구방법에 그치지 않고 그 내적 구조와 논리를 다각적으로 구명할 필요가 커진 때문이다. 이 강의는 이 필요에 부응하는 문명학의 관점을 예시하는 데 목적을 둔 것이다.

 

 

2. 농업과 문명

 

문명의 발생이 언제였는가 하는 문제는 문명의 정의(定義)에 달린 것이다. 자연 상태 속에서도 인간은 군집성을 가진 동물이었으므로 사회 조직방법, 의사 소통방법, 도구 사용 등의 발전을 꾸준히 이루고 있었다. 그런 제도와 기술이 어느 단계에 이른 것을 문명이라고 칭할 것인지는 자의적이고 애매한 문제다.

그에 비해 농업 발생을 계기로 한 본격적문명의 출발은 확실히 알아볼 수 있는 현상이다. 농업 발생 전에도 식량 획득의 기술은 완만하게나마 발전해 왔는데, 곡물 재배의 기술이 확보되면서 한편으로는 생산력의 발전이 가속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의 축적이 가능하게 되었다.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식량생산 활동에서 풀려나는 인구의 비율이 늘어났다. 사회조직의 관리, 공업과 상업, 종교-문화 활동 등에 전문적으로 종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문명 발전의 에스컬레이션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에 본격적문명이라 하는 것이다.

농업의 발생과 비슷한 시기에 다른 식량 획득 기술에도 비슷한 발전이 일어났지만, 곡식은 장기간 보관이 가능하다는 특징 때문에 부의 축적 현상을 불러왔고, 이것이 문명 발전의 에스컬레이션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고대문명 중 어느 특정한 지역을 놓고 상업문명이란 말도 하는데, 농업문명을 기반으로 한 거대문명의 상부구조 일부를 가리키는 것으로 봐야겠다.

 

 

3. 문명과 경제

 

문명은 물질적 기반을 필요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문명이란 말 자체를 정신적 활동인 문화와 대비시켜 물질적 활동을 가리키는 뜻으로 쓰기도 한다. 정신의 절대가치를 신봉하는 입장인데, 이름을 무엇으로 하더라도 인간의 모든 지속적 활동에 물질적 기반이 필요하다는 관점에서는 본질적 의미가 없는 구분이다.

농업 발생 이후 잉여생산이 재화(財貨)로 축적되면서 재화를 주고받는 방법, 즉 경제활동의 양식이 인간관계와 사회조직의 기본 요소가 되었다. 경제활동은 어떤 형태로든 모든 문명사회에서 끊임없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문명현상의 고찰에 필수적인 요소다.

경제활동을 체계적으로 탐구하는 근대경제학은 자본주의체제가 확장되고 있던 시기에 발전하면서 인류의 경제활동 중 시장-상품경제 측면만을 중시하는 편향성을 보였다.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공산주의도 이 편향성은 마찬가지다. 21세기로 넘어오는 시점에서 공산권의 붕괴에 이어 자본주의체제의 한계와 문제점이 드러나면서 이 편향성이 부각되고 있다.

인류가 문명을 시작한 이래 영위해 온 경제활동의 모든 양상을 검토하는 것은 자본주의체제에 의지해 온 시대를 벗어나면서 장래의 경제체제를 모색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다. 근대경제학은 이 측면에서 심각한 한계를 갖고 있었다. 시장-상품경제와 대비되는 증여(선물)경제에 경제학자들이 관심을 키우고 있는 것은 인류학의 문명 연구로부터 얻은 선물이다.

 

 

4. 문명과 정치

 

문명의 지속성을 위해서는 사회조직의 질서가 필요하다. 구성원의 욕망을 어느 정도까지는 채워주면서 어느 정도 이상은 억제시키는 효과적인 체제를 갖추지 못하는 사회는 오래갈 수 없고, 그 사회에 깃든 문명도 지속성을 가질 수 없다.

구성원 사이의 각종 영향력을 적절히 통제하고 관리함으로써 바람직한 질서를 세우고 지키는 것이 정치다. 사회 규모가 커짐에 따라 애정, 존경심 같은 정신적 영향력보다 힘이나 꾀 같은 실용적 요소가 비중을 키우게 되고, 재화 축적이 시작된 이후 재화의 중요성도 계속 늘어나게 된다. 그러나 사회 규모가 어느 수준을 넘어서게 되면 실용적 요소만으로는 질서의 수립과 유지가 어렵게 되어 정신적 영향력을 새로운 차원에서 계발하는 노력이 일어나게 된다.

2천여 년 전 여러 곳에서 고전문명이 일어날 때 그 공통분모의 하나가 바로 이 이념 통치의 발전이었다. 종래의 사회조직과 다른 규모와 차원의 정치조직으로 국가가 이를 계기로 사회조직의 유력한 형태로 자리 잡게 되었다. 국가는 구성원 사이의 구체적 관계보다 추상적 이념을 통해 결속력을 확보하기 때문에 국가에는 국가주의가 따른다.

근대세계에서 국가가 정치의 최종 단위가 되어 현실정치에서도 정치철학에서도 초국가적 질서가 취약하다는 문제가 근대문명의 치명적 약점으로 부각되고 있다. 기후와 자원을 비롯한 초국가적 문제들 앞에서 중국의 천하체제 등 전통문명의 초국가적 질서를 참고할 필요가 고조되고 있다.

정치에 대한 현대인의 인식은 사회 내의 권력과 자원을 구성원 사이에 배분하는 일이다. ‘사회란 통상 국가를 가리킨다. 이 인식은 근대사회의 조건 속에서 굳어진 것이며 문명의 기본 요소로서 정치의 의미와는 상당한 거리를 가진 것이다. 문명의 지속가능성을 뒷받침한다는 정치의 본질적 의미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전통시대 정치사상의 재검토가 필요하다.

 

 

5. 문명과 종교

 

정치와 함께 사회조직의 질서를 확보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기제가 종교다. 종교와 정치 사이에는 상호 보완적인 측면이 있는데, 근대사회에서는 이 측면이 위축되고 정치가 종교를 대체하거나 종교와 정치가 대립하는 측면이 부각되어 있다.

오늘날 문명의 지속가능성 위기의 중요한 원인 하나가 정치과잉으로 나타나고 있다. 위기의 극복을 위해 종교의 역할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하다. 근대적 합리주의와 정치에 대한 환멸이 종교에 대한 맹목적 의존을 이끌어내는 현상을 통제할 필요가 시급하기 때문이다. ‘원리주의문제는 종교의 역할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긍정을 통해 해소될 수 있다.

 

 

6. 문명과 교육

 

가르치고 배우는 일은 문명 발생 이전부터 인간이 해온 것이다. 처음에는 모든 사람이 생활 속에서 하던 일인데, 문명 발전에 따라 가르치는 직업이 생겨나고 가르치는 방법도 체계화하는 추세가 나타났다. 한편으로는 전문적 교육이 필요한 복잡한 기술이 늘어났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규모가 커지는 사회의 결속력을 위해 추상적 이념의 계승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기술과 이념은 이후 교육 수요의 양대 측면이 되었다.

문명 초기에는 전문적 교육이 필요한 고급 기술의 범위가 좁았고 이념 교육도 지배계층 자제만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교육활동의 비중이 크지 않았다. 그러다가 기술 수준이 높아지고 정치 참여의 범위가 확장되면서 비중이 계속 커져서 오늘날에는 인류 활동의 상당한 퍼센티지를 제도교육이 차지하게 되었다.

문명의 흐름이 장차 어떤 곡절을 겪더라도 인간의 활동 중 교육의 비중은 계속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설령 제도교육에 투입되는 인력과 비용이 줄어든다 하더라도, 그에는 비제도적 교육의 더 큰 확장이 따를 것이다. 문명의 전면적 붕괴 외에는 이 추세를 바꿀 길이 없다.

근대사회의 거대한 제도교육은 경직과 공동(空洞) 현상에 빠져들고 있다. 19세기의 산업화와 국민국가 형성에 맞춰 팽창된 틀이 이후 수요의 변화에 충분히 부응하지 못한 탓이다. 한편으로는 기술의 세밀한 분화 발전에 맞추지 못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민국가체제를 넘어서는 발전에 공헌하기는커녕 오히려 걸림돌 노릇을 하게 되었다.

교육활동에는 문명의 위기를 심화시키는 측면도 있고 위기 극복의 수단이 되는 측면도 있다. 너무 덩치가 커져버린 근대 제도교육을 어느 정도까지 해체하면서 본질적 의미에 입각한 질적 발전을 통해 순기능을 키워내는 노력이 필요하다. 교육의 본질적 의미를 파악하는 데는 근대 이전 여러 지역의 전통사회에서 나타났던 교육의 여러 형태가 참고가 될 것이다.

 

7. 문명의 신진대사

 

8. 문명의 중심부와 주변부

 

9. 문명의 이질성과 동질성

 

10. 문명 간의 접촉 양상

 

11. 상공업의 발달에 따른 문명 성격의 변화

 

12. 유럽 근대문명의 탄생

 

13. 유럽 근대문명의 성쇠

 

14. 문명 전환의 전망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