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동아시아 근현대사의 흐름

 

1793년 조지 매카트니가 영국왕의 사절로 중국에 왔을 때 황제에게 고두(叩頭, kowtow)의 예를 거부해서 국교 수립을 거절당했다고 하는 것은 낭설이다. 이듬해 베이징에 온 네덜란드 사절단은 고두의 예를 행했지만 역시 국교 수립에 실패했다. 청나라 황제와 조정은 중국이 오랫동안 외국을 대해 온 방식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건륭제가 매카트니에게 들려 영국왕에게 보낸 국서에는 이런 대목이 있었다.

그대 나라 사람 하나를 천조(天朝)에 보내 그대 나라를 대표하게 하고 그대 나라와의 교역을 감독하게 해달라는 그대의 요청은 모든 관습에 어긋나는 것이고 들어줄 수 없는 것이오. 천조에 봉사하는 유럽인들이 북경에 살도록 허락받아 온 것은 사실이오. 그러나 그들은 중국 복장을 입어야 하고 지정된 장소에서만 활동할 수 있으며 제 나라로 돌아갈 허락을 받는 일이 없소. 그대도 관습을 잘 알 것이오. 그대가 보내려 하는 사절에게 북경의 유럽인 관리들과 같은 위치를 부여할 수도 없으며, 자유로운 활동이나 본국과의 연락을 허용할 수 없소. 그러니 그가 이곳에 있더라도 그대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을 것이오.

내가 뜻을 두는 것은 오직 훌륭한 통치를 행하고 천자의 직무를 잘 수행하는 것뿐이오. 진기한 물건이나 값비싼 물건에는 관심이 없소. 그대가 보내온 공물을 내가 가납하는 것은 머나먼 곳에서 그것을 보내온 그대의 마음을 생각해서일 뿐이오. 이 왕조의 크나큰 덕은 하늘 아래 어디에도 미치지 않는 곳이 없어서 모든 왕과 부족들이 육로와 수로를 통해 귀한 공물을 보내오고 있소. 그대의 사신이 직접 보는 것처럼, 우리에게는 없는 물건이 없소. 나는 기이하고 별난 물건에 관심이 없으며 그대 나라 출산품을 필요로 하는 것이 없소.

16세기 초 동양항로 개척 이래 유럽 전체가 중국과의 교역에서 심각한 무역 역조를 겪어왔다. 아메리카 신대륙에서 채굴한 막대한 양의 은이 유럽인의 손을 거쳐 중국으로 흘러들었다. 더 이상 은의 채굴을 늘리기 어려워진 18세기 말에 이르러 영국 등 산업혁명의 성과를 거두기 시작한 유럽국들은 공산품의 수출로 이 역조를 메울 방도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무역 확대를 위해서는 국교 수립이 필요했기 때문에 사절단을 보냈지만, 중국 측에게는 종래의 관습과 제도를 바꿀 뜻이 없었다.

19세기 들어 나폴레옹전쟁에 승리, 헤게모니를 확보한 영국은 대 중국 무역 역조를 극복하기 위해 아편 수출정책을 추진했다. 마약인 아편에 정부가 직접 손댈 수는 없었다. 인도를 지배하던 동인도회사가 아편을 대량생산해서 콜카타에서 경매로 팔면, 중국의 금령을 뚫고 가져가 파는 것은 상인들의 몫이었다. 아편 사업은 대박이었다. 18세기 말 연간 약 1천 상자(한 상자는 60kg 남짓)에서 1830년대에는 연간 3만 상자까지 늘어나, 중국의 가장 큰 수출 품목인 차의 수입액과 맞먹게 되었다. 여기에 제1차 중영전쟁(1840-42)의 원인이 있었기 때문에 아편전쟁이란 이름이 붙은 것이다.

 

아편전쟁은 물론 중국에 큰 충격을 안겼다. 그러나 제2차 중영전쟁(1856-1860)의 충격만은 못했다. 오랑캐가 변경을 침범해서 국토 일부를 유린하는 정도의 사태는 역사상 꽤 자주 있던 일이었다. 그러나 수도를 점령당하는 사태는 그와 차원이 다르다.

그래서 동아시아의 서세동점현상은 제2차 중영전쟁을 계기로 본격적 단계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중국에서 서양 문물을 적극 도입하는 양무(洋務)운동이 일어났을 뿐 아니라 조선과 일본에도 그 여파가 크게 일어났다.

1853년 페리 제독의 무력시위에 따라 이듬해 일-미 화친조약을 맺음으로써 일본의 개항이 이뤄진 것으로 흔히 알려져 있다. 그러나 1854년의 화친조약은(시모다와 하코다테, 두 항구를 미국 선박의 피난 정박과 필수품 공급지로 개방한다는 내용으로, 일본은 이 해에 러시아, 영국과도 같은 내용의 협약을 맺었다.) 최소한의 개항일 뿐, 쇄국정책의 폐기가 아니었다. 진정한 개항은 1858년 미국-네덜란드-러시아-영국-프랑스 5국과의 수호통상조약으로 이뤄졌다.

1858년의 수호통상조약이 미국 영사 타운젠트 해리스의 설득에 따른 것으로 한 때는 알려졌지만 근래의 연구를 통해 도쿠가와 막부 내에서 1857년 초부터 개국정책이 검토되고 있었던 사실이 밝혀졌다. 1854년의 조약은 페리 함대의 위협 앞에서 당장 전쟁을 피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였다. 그런데 3년 후 더 적극적인 개방 정책을 스스로 모색하게 된 원인이 무엇이었을까? 2차 중영전쟁이 불러일으킨 위기의식을 배제할 수 없다.

조선에서는 1863년 고종의 즉위와 대원군의 집정이 세도정치의 양상을 바꾼 원인에 대한 고찰이 아직도 미흡하다. 안동 김 씨의 세도는 당시 절정에 올라 있고 쇠퇴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때 정국 운영에 어려움을 느껴 대원군을 전면에 내세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안동 김 씨는 헌종 때도 실력을 지키고 있는 채로 풍양 조 씨를 전면에 내세운 일이 있었다. 내우외환 때문에 정국 운영에 어려움을 느꼈다면, 서양 세력이 중국을 꺾고 동아시아 지역 진출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것이 원인의 일부일 수 있다.

1861년 초, 열하(熱河)로 피신한 황제가 아직 돌아오지 않은 북경에 사행으로 갔던 박규수(1807-1877)가 귀국 직후 박원양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전쟁의 충격을 줄여서 보려는 기색이 역력하다.

서양 오랑캐가 요구하는 바는 곧 배상금 독촉과 시장 개방 등의 일에 불과했다. (...) 군주란 멀리 도피해서는 안 되는 법이지만 어쩔 수 없이 주화파에게 이끌려 잠시 그 예봉을 피하면서, 한편으로 화의를 허락하고 조약 체결을 허락한 것이다. 그러자 오랑캐가 곧 철군하여 모두 떠나가고, 남아 있는 자들은 약간의 상인 무리이다.

북경 체류 중 비변사에 보낸 장계에서도 서양 오랑캐는 그 의도가 토지에 있지 않으며, 통상과 포교에 전력할 따름이라 하여 위기의식을 축소하는 논조였다. 그러나 그 후 그가 청나라의 양무운동을 도입하는 데 힘을 쏟아 개화파의 영수 역할을 맡은 것을 보면 그의 낙관적 견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일찍이 <해국도지>를 살펴보며 정세 변화에 민감하던 그가 사행에 참가한 것도 중국 사정을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고, 서양 오랑캐의 북경 유린이라는 경천동지할 사태가 조선 민심에 너무 큰 충격을 주지 않도록 애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대원군, 하면 조건반사처럼 떠오르는 말이 쇄국정책이다. 일본에서 많이 쓰인 이 말을 그대로 옮겨 쓰는 데는 문제가 많다. 대원군 집정기의 대외정책은 아편전쟁 전의 청나라와 마찬가지로 전통적 대외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일본과도 종래의 통신사 관계를 지키려 했다. ‘만국공법의 기준으로 봤을 때 쇄국인 것이고, 만국공법에 따른 대외관계, 개항의 압력이 발생했기 때문에 쇄국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일본이 일찍 자발적으로 개화에 나서서 근대화-산업화에 성공한 반면 중국과 조선은 개화를 거부하고 있다가 열등한 위치에 빠졌다는 통설이 있다. 큰 의미가 없는 비교다. 같은 평면 위에서 비교할 사안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선과 일본을 우선 비교한다면, 일본은 서양세력이 접근하기 쉬운 위치에 있었다. 같은 이유 때문에 일본은 개항 전에도 은의 수출 등 서양세력이 주도하는 교역체제에 깊숙이 들어가 있었다. 19세기 중엽 대형 증기선으로 해군력을 확장한 서양세력이 일본 개항에 나선 것은 일본의 전략적 가치가 어느 정도 확인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반면 조선에 대해서는 병인양요(1866), 신미양요(1871) 등 소규모 도발이 만족스러운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을 때도 대규모 함대를 동원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일본이 함포외교에 굴복해 형식적 개항을 한 후에도 메이지유신(1868)으로 본격적 개화에 나서기까지 15년의 시간이 걸렸다. 15년간 일본 내에서 온갖 곡절이 일어나는 동안 적극적으로 개입할 강한 동기를 느끼는 서양 열강이 없었다. 반면 조선은 강한 진출의지를 가진 일본에게 개항을 당했고, 일본은 자기네가 누린 시간 여유를 조선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중국과 일본의 비교에서는 고려할 사항이 매우 많은데, 서양 열강들에게 동양 침략의 궁극적 대상이 일본 아닌 중국이었다는 점을 무엇보다 지적하고 싶다. 서양인이 16세기 중엽 동아시아 교역에 끼어든 이래 중국은 그들이 원하는 온갖 재화를 무궁무진하게 공급할 엘도라도였다. 일본은 중국 침략을 위한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서양 열강들 중에 득실을 계산해서 도와주는 나라가 있을 수 있었다. 반면 중국의 저항력을 약화시키는 데는 모든 열강이 이해를 함께 했다. 청일전쟁(1894-95) 시점에서 일본은 서양 열강의 사냥개 역할이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친 제국주의 경쟁에서 열강의 최대 표적은 중국이었다. 러시아가 아관파천(1896)으로 조선에서 유리한 기회를 쥐고도 일본에게 양보한 것은 중국으로 진출할 통로인 만주에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러일전쟁(1904-05)은 일본이 만주의 러시아 독점권에 도전한 결과였다. 전쟁의 표적은 조선이 아니라 만주였다.

산업화 수준이 아직 낮은 단계에 있으면서 근대화 열망이 높은 일본은 유럽의 1류 열강들에게 하위 파트너로서 인기 있는 존재였다. 세계체제론에서 말하는 반()주변부에 있던 일본은 1류 열강과 합작할 때 상호보완적인 역할을 맡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최대 표적인 중국 가까이 있어서 중국 침략을 염두에 둔 동맹의 가치도 컸다.

1차 세계대전에서도 일본은 연합국의 하위 파트너로 참여해 중국에서 독일의 이권을 넘겨받는 등 이익을 챙겼다. 이때까지 일본의 상위 파트너 역할을 주로 맡은 것은 영국이었다. 그런데 1차 대전을 계기로 국력이 급성장한 미국이 일본의 길을 가로막는 위치에 섰다. 태평양 건너편을 바라보는 미국의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은 일본과 상호보완적인 관계로 어울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1차 대전이 유럽대전에 그친 반면 제2차 세계대전에는 태평양전쟁이 겹쳐져 있었다. 동아시아-태평양 지역을 놓고 미국과 일본이 격돌한 것이다. 유럽의 기존 열강들이 뒤얽혀 기력을 소진하는 동안 태평양 양안의 두 신흥 강국이 태평양시대의 주도권을 놓고 부딪친 이 싸움이 미국의 승리로 끝났을 때, 미국은 일본이 자기 하위 파트너 역할을 맡도록 개조했다.

 

2차 대전을 통해 제국주의체제가 냉전체제로 바뀌었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래의 자본주의 세계체제는 근본적 변화를 겪지 않은 것으로 본다.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세계체계론)에서 냉전시대의 공산주의체제를 자본주의체제의 하위체제로 보는 데 나는 동의한다. 소련의 진영 내 헤게모니는 미국의 헤게모니가 세계를 이끌어 가는 틀 속에서 부속적인 역할을 맡은 것으로 보는 것이다.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모순이 제국주의체제에서 민족 모순의 형태로 불거지는 동안 계급 모순이 자라나 냉전체제의 배경이 되었다. 민족 모순은 산업화 이전 시대에서 유래하는 것이므로 먼저 나타난 반면 산업화의 진전에 따라 심화되는 계급 모순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격화될 것이 예상되었다. 2차 대전은 표면상 민족 모순을 둘러싸고 진행되었지만 바닥에는 계급 모순을 둘러싼 대립이 잠재해 있었다. 따라서 미국과 영국에게 공식적인 적은 일본과 독일이었어도 숨겨진 더 큰 적은 소련이었다. 전쟁이 끝나자 이 잠재적 적대관계가 표면화되어 냉전체제를 빚어낸다.

2차 대전이 끝나자 한--3국은 냉전체제에 바로 편입되었다. 일본은 미국 점령 하에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교두보로 개편되었고 한국은 남북으로 쪼개져 냉전의 첨병이 되었다. 중국은 공산화되어 동아시아는 자본주의진영의 일본-남한과 공산주의진영의 중국-북한으로 갈라졌다. 겉보기로는 완전한 대칭 상황이었지만, 일본과 중국의 위치에 차이가 있었다.

일본은 모든 면에서 완전히 미국에 예속되었다. 반면 중국의 소련에 대한 종속은 확실하지 않았다. 전쟁 후 소련은 동유럽의 공산권 구축에 전념하면서 중국 공산당을 지원하지 않았고, 중국 공산당은 자력으로 대륙을 석권했다. 초기의 공산중국은 소련의 도움을 필요로 했지만, 정권이 안정되자마자 소련에 대한 종속관계에서 벗어났다.

이 차이가 1970년대 데탕트 상황에서 한층 더 분명히 드러났다. 소련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의도에 편승해 중국이 국제무대로 복귀하면서 냉전체제의 중요한 변수로 부각된 것이다. 중국이 겪은 정치적 곡절을 나는 세밀히 알지 못하지만, 소련 해체와 공산권 붕괴에 휩쓸리지 않고 오히려 수십 년에 걸쳐 큰 국력 신장을 이룬 배경을 냉전기 중국의 독자적 정책 추진에서 찾는 원톄쥔(<백년의 급진>)의 관점을 그럴싸하게 받아들인다.

중국이 독자적 정치노선을 펼치는 동안 일본은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뤘고, 그 효과가 남한을 비롯한 동아시아-동남아시아 여러 국가로 확산되었다. 서양에서 만들어진 냉전체제의 제약 안에서 동양인은 나름대로 역량을 발휘한 것이다. 그 결과 아시아적 가치논의가 1990년대에 일각에서 나오기도 했다. 20세기 말까지 서세동점의 상황이 틀을 지켰지만, 19세기 중엽에서 20세기 후반까지 서양세력이 보인 압도적인 힘은 이제 상대적 위치로 물러서 있었다.

 

Posted by 문천

 

 

 

(1) 한국인의 경험

 

1970, 학부 3학년 때 국사연구실에서 동양사연구실로 자리를 옮겼다. 서울대 사학과’ 68학번은 세 학과로 나눠지기 전의 마지막 학번이어서 임의로 전공을 택할 수 있었다. 나는 한국사에 마음이 있었지만, 사상사를 폭넓게 공부할 생각으로 동양사를 선택한 것이다.

중국과학사 중심으로 공부를 이어가다가 1980년대 말 박사학위논문 주제를 마테오 리치의 선교활동으로 잡은 후 동서교섭사를 중심으로 문명사 공부를 진행했다. 그러다가 2008년에 이르러 한국사를 개관하는 책 <밖에서 본 한국사>를 내게 되었다.

<밖에서 본 한국사>는 그 동안 문명사 공부의 소득을 한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 보태도록 제안하는 의미로 쓴 것이다. 그 책에 이어 동양사와 세계사를 개관하는 책들을 시도할 생각이었고, 한국사에 깊이 들어갈 마음이 없었다. 그런데 당시 고개를 들고 있던 뉴라이트역사관을 알게 되면서 이를 반박할 필요에서 한국근현대사를 몇 해 동안 들여다보게 되었다.

2009<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 작업을 시작해 20107월에 냈다. 식민지로 전락한 지 100년이 되는 지금까지도 망국의 원인에 대한 냉철한 판단이 이 사회에 아쉽다는 생각에서였다. 이 작업에서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상황을 부각시켰다. 선악(善惡), 충간(忠奸)의 차원을 넘어 문명의 위기라는 거시적 배경을 설명하는 데 중점을 둔 것이다.

역사 해석의 틀을 외인론과 내인론으로 갈라서 본다면 나는 한국근현대사에서 외인론에 큰 비중을 둔다. 주체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내인론으로 치우치기도 하는데, 사회 내부의 노력이 외세의 야욕 앞에서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는 상황을 놓고 내인론에 집착할 일이 아니다.

조선의 망국에는 (1) 왕조의 멸망, (2) 이민족 지배, (3) 전통의 단절, 세 개 층위가 겹쳐져 있다. 조선 왕조의 멸망을 위한 조건은 내인론으로 대충 설명된다. 그러나 내부의 왕조 교체에 그치지 않고 이민족 지배를 받게 된 이유는 내인론으로 부족하다. 나아가 전통의 단절이란 민족사 초유의 상황은 거의 전적으로 외부 조건에 따른 것이었다. 그런데 망국의 세 개 충위 중 백년이 지난 지금까지 가장 여파가 큰 것이 바로 전통의 단절이다. 그래서 외인론에 더 큰 비중을 둘 필요를 느낀 것이다.

 

<망국의 역사> 작업을 끝내면서 작업을 시작할 때보다도 더 큰 아쉬움을 느꼈다. 망국의 상황을 설명했는데, 그로부터 백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복국(復國)이 제대로 되어 있지 못한 상황을 설명할 필요가 더 크게 느껴진 것이다. 그래서 바로 <해방일기> 집필 작업을 시작했다.

식민지로 전락한 지 35년 만에 광복을 맞았다고 하는데, 민족국가를 회복하지 못한 까닭이 무엇인가? 왜 분단건국과 전쟁이라는 최악의 진로로 접어들게 되었는가? 망국 자체보다도 더 설명하기 힘든 문제다. 그래서 19458월에서 19488월까지 3년간의 해방공간을 일기 형태로 면밀하게 복원하는 작업을 20108월부터 20138월까지 3년간 진행했다.

<해방일기> 작업에서 해방의 상황이 망국의 상황과 서세동점이란 점에서 본질적으로 같은 것임을 확인했다. 서세동점이란 19세기 중-후반에 걸쳐 산업혁명을 통해 새로운 차원의 부국강병을 이룩한 서양 열강의 압도적인 위세 앞에 동양의 전통사회가 굴복이냐, 파괴냐의 양자택일에 몰린 역사적 상황을 가리키는 말이다. 20세기 들어 일본이 열강의 대열에 진입한 상황에서는 서세동점이 일단락된 것으로 흔히 본다.

그러나 나는 제2차 세계대전 종료 후의 상황을 살펴보면서 서세동점의 의미를 넓혀 볼 필요를 느꼈다. 일본의 열강 진입은 동양의 한 모퉁이에 서세가 내면화한 결과로, 서세동점의 큰 틀이 바뀐 것이 아니었다. 제국주의 일본은 서세의 한 부분이 되어 동점현상을 더욱 격화시키는 첨병 노릇을 맡았던 것이다. 일본의 러일전쟁(1904-05) 승리에 안중근 같은 조선 식자들이 환호한 것은 일본을 서세동점에 대한 저항의 주체로 본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변질을 알아보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1907년에 고종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보냈고 1919년에 임시정부는 파리 평화회담에 대표단을 보냈다. 그러나 두 번 다 참석 자격을 얻는 데 실패했다. 서세동점의 구조적 받침대인 제국주의체제는 지속되었고, ‘민족자결원칙은 패전국의 영토와 식민지에만 적용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 치열하게 진행 중이던 194311월 미--중 정상회담에서 나온 카이로선언이 조선 독립에 대한 첫 국제적 지지였다. 그러나 이것은 조선인의 진정한 해방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략적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직전에 나온 모스크바선언의 오스트리아 독립 방침과 함께 카이로선언의 조선 독립 방침은 독일제국과 일본제국의 분열에 뜻을 둔 것이었다. 종전 후 두 나라의 독립에 10년과 5년의 신탁통치를 부과한 데는 두 나라가 연합국의 의도에 부응하지 못한 데 대한 벌칙의 의미가 있었다.

일본 항복 후 연합국은 카이로선언에 따라 조선 독립을 추진했지만, 독립 자체보다 일본제국의 약화를 위한 부수적 조치였을 뿐이다. 따라서 진정한 독립을 도와주기보다는 점령국인 미국과 소련의 국익을 확보하는 데 더 급급했다. 그 결과가 분단건국과 내전이었다.

여기서 나는 다시 외인론에 치중할 필요를 느낀다. 망국 당시에도 해방 당시에도 이 사회에서는 사회의 보호와 발전을 위해 어느 사회에 못지않은 노력이 있었다. 매국노-반역자의 준동 역시 어느 때 어느 사회에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사회의 건전한 노력이 빛을 보지 못하고 매국노-반역자의 책동에 휩쓸리게 된 것은 외세의 힘이 압도적이던 서세동점의 상황 때문이었다. 망국 때나 해방 때나 조선사회를 불행의 길로 몰고 간 것은 매국노-반역자의 힘이 아니라 그들이 등에 업은 외세 때문이었다.

<해방일기>에 이어 <냉전 이후> 집필 작업을 진행했다. 1990년을 전후한 공산권 붕괴는 분단건국 이후 냉전의 첨병 노릇에 묶여 있던 한민족에게 민족의 진로를 다시 세울 반세기 만의 기회였다. 20006월의 남북정상회담은 민족사의 큰 전환점이 될 것 같은 분위기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10여 년이 지난 이제 당시의 희망은 사그라지고 냉전시대 못지않은 긴장상태로 돌아와 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냉전 이후> 작업에서 나는 1990년대 10년 동안 남북관계를 되돌아보았다. 2000년의 정상회담이 10년 전 공산권 붕괴의 자연스러운 결과였다면 그 후의 진행이 순조로워야 했다. 실제로 이 10년 동안 일어난 일을 되짚어보면, 민족사회의 복원(復元)이라는 대세를 가로막는 장애물을 도처에서 발견하게 된다. 그 장애물은 지금도 작용하고 있다.

1990년대 남북관계 전개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뒤얽혀 나타났지만, ‘서세동점이라는 기반조건이 아직도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100년 전의 망국 단계나 50년 전의 해방 단계와 다른 점은 서세가 남한 사회에 깊숙이 내면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남한 사회 내에 외세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100년 전이나 50년 전에 비해 민족사회의 의미에 대한 사회의 인식이 퇴화되어 있는 것은 이 내부의 외세때문이다.

70년 전 해방때 해방의 주체는 분명했다. 조선 인민의 대다수는 일본 통치자들이 강요한 근대화에 물들지 않고 있었다. 새로운 활동방식과 생활방식을 마지못해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이 좋다는 생각이 별로 없고, 왜놈들에게서 언제고 해방이 되기만 하면 원래 방식으로 돌아갈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새로운 방식을 이롭게 받아들인 사람들은 소수였고, 그들에게는 친일파의 딱지가 붙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런 친일파 중에 진짜 악질분자는 극소수였다. 대다수는 보통사람들이었다. 친일파로 몰린 지주들 입장을 보면, 일본 통치에 따른 소유권 절대화가 그들에게 이득이 되는 것이었다. 소작인의 권리를 무시하고 지주의 이익 극대화를 보장해준 이 제도는 농업사회를 파괴해 인구의 3분의 1을 유랑의 길로 몰아넣었지만 대다수 지주들은 그로부터 이득을 취하는 것을 자기 권리를 지키고 행사하는 것으로 여겨 아무 죄의식 없이 이에 호응했다. 잘못된 정치가 보통사람들을 반사회적 행동으로 이끈 것이다. 일본인 통치자들은 조선사회의 장래보다 목전의 이익을 중시했기 때문에 이런 잘못된 정치를 조선에서 행할 수 있었다.

잘못된 정치가 보통사람들을 반사회적인 길로 이끄는 상황은 해방 후 남한에서 계속되었고, 이 흐름에 휩쓸리는 범위가 크게 넓어졌다. 해방 전의 외세였던 일본에서는 1백만 명 가까운 군인, 관리와 민간인이 건너와 통치체제의 수혜자 자리를 차지한 반면 해방 후의 외세인 미국에서는 건너온 사람이 적었고 직접 수탈의 필요도 없었기 때문에 더 많은 한국인이 특권층에 편입될 수 있게 되었고, 일반 대중의 물질적 혜택도 커진 것이다.

해방 1년 후인 19468월 미군정이 실시한 여론조사 중 원하는 체제를 묻는 문항에 대해 응답자의 70%사회주의를 택했다. ‘공산주의7%, ‘자본주의14%였다. 70%의 응답자가 사회주의를 좌익으로 생각해서 선택한 것은 아닐 것이다. 소유권을 절대시하는 자본주의나 전면 부정하는 공산주의보다 제한된 범위의 소유권을 존중하는 체제로 사회주의를 생각하고 지지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1990년대에 남한 민심은 자본주의에 압도적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1980년대를 전후한 경제발전과 그에 따른 물질적 풍요에 국민 대다수가 도취해 있었다. 자본과 권력을 쥔 기득권층만이 아니라 일반 대중도 자유민주주의체제에 철석같은 믿음을 갖고 있었다.

이 믿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베트남전 참전의 문제점에 대한 사회의 무감각이었다. “잘 살아보기위한 어떤 행동도 정당화하는 풍조가 윤리의식과 정의감을 압도하는 사회였다. 다른 민족의 고통에 무감각한 사회가 내부의 고통에 민감할 수 없다. 1990년대 남한 사회에는 자본주의에서 파생된 개인주의와 배금주의가 팽배해 있어서 북한 봉쇄정책을 주장하는 미국 네오콘 세력이 큰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해방 후 50여 년간 자본주의정신을 꾸준히 내재화해 온 남한 사회에 뚜렷한 의식 변화가 시작된 계기는 1997-98년의 IMF 사태였다. 무한한 경제성장의 꿈에 금이 가고 다수 국민이 풍요 속의 빈곤을 경험하게 되면서 그 동안 무뎌졌던 다양한 가치의식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IMF 사태 이후 10년간 기득권층의 권력 독점이 얼마간 풀어진 동안 개인주의와 배금주의에서 벗어나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났다.

21세기 들어 남한 정치의 쟁점이 민주화산업화의 단순대결 양상에서 벗어난 것도 국민의 의식 확장에 따른 것이다. 진취적 정치활동이 평화, 환경, 복지, 안전 등 종래 경시되어 온 가치를 중심으로 확대되었다. 수십 년간 민주화간판에만 매달려 온 제1야당이 2010년대 들어 지리멸렬한 양상에 빠져 있는 데서 이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이 변화는 외부 정세의 변화로 촉발되는 측면이 크다. 대표적인 예가 중국과의 관계 확대다. 수십 년간 중공 오랑캐로 욕하며 멀리하던 중국을 갈수록 가까이 하고 더 잘 알게 되면서 냉전시대의 반공의식은 소수 노인네들의 전유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미국 패권의 퇴화 현상도 갈수록 분명해지고 있다. 이라크전쟁 실패에 이어 2008년의 금융공황으로 미국이 이끄는 세계체제의 파탄이 모든 방면에서 드러났다. 이에 따라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문제점과 한계를 논하는 세계체제론이 각광을 받으며 발전해 나가고 있다.

1970년대 이래 심각하게 제기되어 온 자원, 환경, 경제구조, 정치구조 등 여러 방면의 문제들이 21세기 들어와서는 가능성이 아닌 현실의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이 문제들을 개별적으로 파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종합해서 변화의 큰 흐름을 떠올릴 단계에 와 있다. 나는 이 흐름의 한 측면이 150년간 지속해 온 서세동점현상의 해소라고 본다.

근대화가 절대적 과제로 제기된 개항기 이래 사람들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해온 사실과 가치들을 다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150년간 익숙하던 상식만으로는 장래를 내다보는 데 심각한 한계가 있는 상황이다. 망국과 분단과 대립을 강요해 온 서세가 가라앉거나 물러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모든 꾀와 힘을 다해 생각해 봐야겠다.

 

 

Posted by 문천
2015. 11. 10. 10:30

 

  국정교과서 집필진을 공모한다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부터 "응모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특별히 용감한 사람이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겁은 좀 없는 편이고, 재미있는 일은 무척 좋아한다. 그리고 흑백론을 싫어하기 때문에, 무슨 나쁜 일이 있어도 그냥 반대만 하기보다 더 깊이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이 앞선다. 교과서 국정화가 나쁜 일인 것은 분명한데, 이 나라 정부가 싸매고 하는 일이라면 그 일에 정말 어떤 의미가 있는지 힘껏 살펴보고 따져봐야 극복을 하더라도 제대로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지난 주 전라도와 강원도 단풍 구경을 한 바퀴 돌고 금요일에 돌아와 보니 공모 마감이 임박해 있다. 누구랑 차분히 의논할 겨를도 없고, 혼자 앉아 궁리해도 판단이 잘 서지 않는다. 응모하면 재미는 톡톡할 것 같은데, 너무 험한 판 아닐까? 내지른 책임을 지려면 하려는 다른 일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말려들 위험이 있는 건 아닐까?

 

  생각 끝에 일단 응모를 전제로 출사표(出師表) 하나를 써보기로 했다. 응모하는 행위를 나 자신에게 최대한 정당화를 시도하는 것이다. 일요일 저녁에 이런 글을 뽑아보았다.

 

 

국정 역사교과서 집필진 공모에 응하며

 

나는 역사교과서의 국정화에 반대한다. 그리고 지금의 국정화 사업은 결국 실패하고 말 것으로 전망한다. 그러나 정부가 국정화 추진을 장담하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는 집필 능력을 가진 한 사람으로서, 집필진 참여를 시도할 책임감을 느낀다. 너무 나쁜 교과서가 나오지 않도록, 나아가 조금이라도 더 좋은 교과서가 나오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겠다는 마음이다.

이 응모가 어떤 결과를 이끌어낼지 예단할 수 없다. 상식적인 추측은 퇴짜 맞고 끝나는 것이다. 2008년에 낸 <뉴라이트 비판> 이래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 <해방일기>를 거쳐 <냉전 이후>에 이르기까지 내가 밝혀온 한국근현대사의 관점은 국정화 추진세력의 입맛에 맞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이 글로 공모에 응하는 입장을 밝히는 것도 그들의 비위에 거슬릴 것이다. 응모가 거부될 경우 내 역할은 쉽게 끝난다. 집필진 공모라고 진행하는 절차가 실제로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인지(그리고 갖지 않은 것인지) 더 분명해질 것이다.

이렇게 쉽게 끝나지 못하고 집필진에 참여하게 될 경우 내가 어떤 일을 해야 할지, 할 수 있을지, 지금으로서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할 일이 적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 ‘좋은 교과서가 되도록 애쓰는 데 앞서 나쁜 교과서가 나오지 않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다. 그보다도 더 앞서는 일은 편찬 과정이 합당하게 진행되는지 지켜보고, 잘못된 일이 있을 경우 관심 가진 이들이 문제를 잘 파악할 수 있도록 알리는 것이다.

 

국정화와 관련해 이름을 퍼뜨린 누구누구처럼 학자로서의 기본 자질 없이 학자 행세 하는 사람이 더러 있기는 하지만 역사 공부 한 사람이라면 국정화에 반대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 많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경로로 반대 의사를 밝히고 참여 거부를 선언하는 마당에 왜 유독 나는 공모에 응할 궁리를 하고 있는 것일까. 반성이 필요한 일이다.

공부를 본업으로 삼으면서도 20여 년간 언론계에 의지해 활동해 왔다는 점을 먼저 생각한다. 지금도 내가 가장 강한 소속감을 느끼는 것은 학교나 학회가 아니라 언론협동조합 <프레시안>이다. 따라서 이번 국정화 사태에 임해서도 학교나 학회를 통해서가 아니라 <프레시안>을 통해 이 사회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먼저 생각하게 된다. 학자로서 내 한 몸 지키기보다, 사태의 성격을 독자들이 더 잘 이해하도록 도와드릴 수 있는 길을 찾고 싶다.

그렇다고 잠입취재나 간첩활동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쁜 교과서를 막고 좋은 교과서를 만든다는 기본 목적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집필진에 들어가게 된다면 내 의견을 당당하게 개진하고 내 소신에 따라 집필할 것이다. 편찬 작업이 공정한 절차와 기준을 지키지 못하거나, 집필진 구성의 편향성 때문에 공론과 어긋나는 방향으로 진행될 때라야 여론에 호소할 필요를 느끼게 될 것이다.

국정화의 실패를 나는 예상하지만, 실패를 통해 이 사회가 얻는 것이 많기를 나는 바란다. 여론조사에 국정화 지지가 3분의 1 이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국정화가 실패로 돌아갔을 때, 그들이 실패의 이유를 반대편의 으로만 이해한다면 이 사회를 위해 불행한 일일 것이다. 나는 국정 역사교과서가 가능한 한 좋은 것이 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고, 그래야만 실패로 돌아갈 때 실패의 원인이 무엇인지 더 잘 드러날 것이다.

 

며칠째 이 일로 고심하다가 두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며 응모할 마음을 굳혔다. 하나는 안재홍 선생이다. 1947년 초 그가 민정장관으로 군정청에 들어갈 때 미군정 수뇌부는 조선의 민족주의를 무시하는 사람들이었고 조선인 간부들은 기득권층(지주-친일파 포함)을 철저하게 대변하는 분위기였다. 얼굴마담으로 민족주의자가 필요해서 교섭이 들어온 것이지만,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 그의 회고문 백범 정치투쟁사중 민정장관 취임 결정을 김구에게 알리는 장면에서 그의 고심을 알아볼 수 있다.

1주일을 두고 고심한 나머지, 나는 취임 수락을 하여 놓고 비로소 백범께 그 수락 사유를 말씀하였더니, 그분은 예에 의하여 그 구수한 웃음을 띠면서 승낙을 이미 하였으면 도리가 없는 것이고, 승낙하기 전이라면 자기로서는 단연 민세의 민정장관 취임을 말라고 했겠다고 하시며, “금후 그대는 도로무공(徒勞無功)일 것이고, 결국 득담(得談)만 많이 할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이었다. 나는 의심없이 반대하실 것을 알고 있었던 까닭에, 그분께는 사후 양해의 의미로 승낙 직후 말씀하였던 것이었다.(<민세 안재홍 선집 2> 441-442)

김구는 안재홍이 가장 존중하던 상대였다. 그런데 그가 반대할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미군정이 조금이라도 더 조선 인민의 복리를 위해 운영되도록 애쓸 기회를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김구의 말대로 안재홍은 민정장관 위치에서 미군정의 정책에 큰 영향도 끼치지 못하면서 고생만 죽도록 했다. 그러나 비민족적-반민족적 인물이 민정장관 자리까지 차지하고 아무 견제 없이 비민족적-반민족적 정책을 추진했을 경우를 상상해 본다면 안재홍의 보이지 않는 공로를 무시할 수 없다.

 

또 하나 떠오르는 사람은 아버지다. 피난을 가지 못하고 인민군 점령 하의 서울에서 석 달을 지낸 사연이 그분 일기 <역사 앞에서>에 적혀 있다. 연말에는 1-4 후퇴를 앞두고 부산으로 피난했다. 5, 3, 1세의 세 아이를 데리고 무난히 피난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직전 전사편찬위원회에 상무위원으로 참여해 대령 급 문관 신분으로 차량을 제공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은 그 자리에 오래 있지 않았다. 19511-2월 두 달 동안 일기가 끊어졌다가 3월 들어 다시 시작할 때는 매우 곤궁한 형편에 몰려 있었다. 전사편찬위원회에 관한 일이 스스로 마음에 석연치 않아서인지 일기에 거의 나타나지 않는데,(19501119일자 끝에 전사편찬회 일을 보아달라는 교섭이 있었다.” 한 줄이 달랑 붙어있다.) 곁에서 일하던 강신항 선생의 설명으로 전후 사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위원회가 전쟁 중에는 자료 수집만 하지, 편찬에 착수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강하게 내세웠고, 상급자인 위원장과 부위원장이 이 원칙을 수락했기 때문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런데 부산에 자리 잡자마자 편찬에 착수하라는 지시가 떨어졌고, 이 지시를 위원장-부위원장이 막아내지 못하자 사표를 내고 나왔다는 것이 강 선생의 설명이다.

안재홍 선생과 아버지, 이 사회가 몹시 어렵던 시절에 식자인(識字人) 노릇 제대로 하려고 무척 고생하신 분들이다. 그때에 비하면 훨씬 편해진 세상을 살면서 그분들에게 부끄러움 덜 느낄 길을 찾다 보니 이 지경에 이르렀다. 아버지가 금융조합 과장직을 버리고 서울대 사학과 조수(조교)로 들어갔을 때의 일기 한 대목(1946416일자)이 떠오른다.

아침에 집을 나서서 법전(法專)에 가려고 산길을 향해 가니 모든 사람이 나와 반대 방향으로 걸어오고 있다. 그들은 시의 변두리에 사는 사람들로서 도심지대에 출근하러 나가는 길이고 나는 산을 넘어 시외에 있는 학교로 향하기 때문이다.

당연한 일이긴 하나 문득 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나는 만인(萬人)과 길을 달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좋은 지위와 많은 보수와 안정된 생활을 박차버리고 스스로 형극의 길을 가려 하는 나의 지향(志向)은 확실히 이 많은 사람들과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글을 써놓고 다시 생각을 굴려본 후 응모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교언영색(巧言令色)의 냄새 때문이다. 제갈량도 출사표를 써서 스스로 납득할 만한 문장이 나오지 않았다면 군사를 내지 않았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백성이 오래 시달린 상황에서 조()씨의 침공이 급박하지도 않은데 스스로 전쟁을 일으키려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크게 움직여야 했을 것이다.

 

떠올린 두 분의 처지를 갖다댄 데서 특히 냄새가 심하다. 내가 임한 상황은 그분들처럼 절박한 게 아니다. 재미 찾아 일 만들고 싶은 마음에 선인들의 어려움을 가리개로 삼으려는 술책이 내 눈에도 천박하다.

 

일할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 할 일을 충분히 찾지 못한 나이였다면 스스로 납득이 덜 되더라도 나설 생각을 더 많이 하겠다. 이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나선다면 더 잘 배울 수 있는 길이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대충 짐작하게 된 것으로 충분하다. 그 짐작을 사람들에게 설명해 주는 것만 해도 내 할 일이 넘친다.

 

  아버지 일기 1950년 1월 1일자에 적힌 "새해의 맹세" 중 "남의 잘못, 학설의 그릇됨을 타내지 말고 제 바른 행동과 제 깊은 공부로써 이를 휩싸버릴 것"이란 대목이 떠오른다. 재미 너무 찾지 말고 꾸준히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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