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 시절 한국사에 마음을 두고도 동양사로 전공을 택한 것은 사상사를 넓게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중국과학사를 중심으로 공부를 계속해 나가다가 박사논문 주제를 동서교섭사로 잡았고, 그 후에는 문명사로 공부 범위를 넓혔다.
50대에 접어든 뒤에 한국사로 돌아오게 됐다. 문명사 공부를 배경으로 한국사, 동양사, 세계사를 각각 개관하는 책을 쓸 생각이었는데, 제일 먼저 한국사를 다룬 <밖에서 본 한국사>(돌베개, 2008)가 예상외의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한국사, 그중에서도 근현대사를 정리하는 작업에 여러 해 몰두하게 되었다.
2009년에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돌베개, 2010) 집필을 시작했다. 식민지로 전락한 지 100년이 되는 지금까지도 망국의 원인에 대한 냉철한 판단이 이 사회에 아쉽다는 생각에서였다. 이 작업에서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상황을 부각시켰다. 선악(善惡), 충간(忠奸)의 차원을 넘어 ‘문명의 위기’라는 거시적 배경을 설명하는 데 중점을 둔 것이다.
2010년 7월 망국 100주년에 맞춰 이 작업을 끝내면서 작업을 시작할 때보다도 더 큰 아쉬움을 느꼈다. 망국의 상황을 설명했는데, 그로부터 백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복국(復國)이 제대로 되어 있지 못한 상황을 설명할 필요가 더 크게 느껴진 것이다. 그래서 바로 <해방일기>(10책, 너머북스, 2011~2015) 집필 작업을 시작했다.
식민지로 전락한 지 35년 만에 ‘광복’을 맞았다고 하는데, 민족국가를 회복하지 못한 까닭이 무엇인가? 왜 분단건국과 전쟁이라는 최악의 진로로 접어들게 되었는가? 망국 자체보다도 더 설명하기 힘든 문제다. 그래서 1945년 8월에서 1948년 8월까지 3년간의 ‘해방공간’을 일기 형태로 면밀하게 복원하는 작업을 2010년 8월부터 2013년 8월까지 3년간 진행했다.
<해방일기> 작업에서 해방의 상황이 망국의 상황과 ‘서세동점’이란 점에서 본질적으로 같은 것임을 확인했다. 망국 당시에도 해방 당시에도 우리 민족사회에서는 사회의 보호와 발전을 위해 어느 사회에 못지않은 노력이 있었다. 매국노-반역자의 준동 역시 어느 때 어느 사회에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사회의 건전한 노력이 빛을 보지 못하고 매국노-반역자의 책동에 휩쓸리게 된 것은 외세의 힘이 압도적이던 서세동점의 상황 때문이었다. 망국 때나 해방 때나 조선사회를 불행의 길로 몰고 간 것은 매국노-반역자의 힘이 아니라 그들이 등에 없은 외세 때문이었다.
역사 해석의 틀을 외인론과 내인론으로 갈라서 본다면 나는 한국근현대사에서 외인론에 큰 비중을 둔다. 주체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내인론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가치관에 얽매이지 않는 냉철한 입장에서는 사회 내부의 노력이 외세의 야욕 앞에서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는 상황을 놓고 내인론에 집착할 일이 아니다. 무리하게 내인론에 집착하면 내부의 작은 허물에 얽매여 사회의 총화(總和)를 해칠 수 있다. 예컨대 외인론에 선 내 관점에서는 해방 당시 이북에서 이뤄진 가혹한 지주-친일파 숙청-탄압보다 이남 중간파의 포용적 자세가 더 합당한 것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해방일기>에 이어 <냉전 이후>(서해문집, 출판 준비 중) 집필 작업을 진행했다. 1990년을 전후한 공산권 붕괴는 분단건국 이후 냉전의 첨병 노릇에 묶여 있던 한민족에게 민족의 진로를 다시 세울 반세기 만의 기회였다. 2000년 6월의 남북정상회담은 민족사의 큰 전환점이 될 것 같은 분위기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10여 년이 지난 이제 당시의 희망은 사그러지고 냉전시대 못지않은 긴장상태로 돌아와 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냉전 이후> 작업에서 나는 1990년대 10년 동안 남북관계를 되돌아보았다. 2000년의 정상회담이 10년 전 공산권 붕괴의 자연스러운 결과였다면 그 후의 진행이 순조로워야 했다. 실제로 이 10년 동안 일어난 일을 되짚어보면, 민족사회의 복원(復元)이라는 대세를 가로막는 장애물을 도처에서 발견하게 된다. 그 장애물은 지금도 작용하고 있다.
1990년대 남북관계 전개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뒤얽혀 나타났지만, ‘서세동점’이라는 기반조건이 아직도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100년 전의 망국 단계에서나 50년 전의 해방 단계와 다른 점은 ‘서세’가 남한 사회에 깊숙이 내면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남한 사회 내에 ‘외세’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100년 전이나 50년 전에 비해 민족사회의 의미에 대한 사회의 인식이 퇴화되어 있는 것은 이 ‘내부의 외세’ 때문이다.
“민족이 밥 먹여주나?” 민족사회의 복원 없이도 얼마든지 대한민국 발전의 길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이 현실적 근거를 가진 것이라면 민족주의자 입장에서는 안타까운 일이라 하더라도 ‘민심’에 따라 이 사회의 진로를 찾아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반도를 둘러싼 지정학적 조건을 보더라도, 지금 세계가 움직이고 있는 방향을 보더라도, 민족사회의 의미를 경시하는 민심은 당장 주어진 조건에 미혹된 근거 없는 민심일 뿐이다. 역사와 시사(時事)를 깊이 살펴 민심을 정비할 필요가 있다.
이 필요에 입각해서 “서세동점의 끝” 집필을 구상하고 있다. 19세기 중엽부터 서세동점의 상황이 한반도를 덮쳐 왔다. 동아시아문명의 일원으로서 1천 년간 민족국가를 꾸려온 민족사회의 역사가 주체적 노력으로 헤쳐 나가기 힘든 역경을 맞은 것이다. 이 역경 때문에 식민지로 전락하기도 하고 분단과 대결의 상태를 겪기도 했으며, 지금까지도 사회의 양극화 속에 민족사회의 진로를 찾아 나가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 치욕과 고통의 역사를 초래한 원흉으로 나는 서세동점을 지목한다.
역사학계에서 서세동점이란 19세기 중-후반 산업혁명에 따른 부국강병을 이룬 서양세력이 세계를 휩쓴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나는 이 현상이 20세기 말까지 계속되었다고 본다. 20세기 후반의 냉전시대만 하더라도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양쪽 다 서양중심주의 틀에 따른 것으로서 그 대결 상황이 제3의 길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의 해방공간에서 민족주의자들이 극좌-극우의 ‘적대적 공생관계’에 봉쇄당한 것과 같은 틀이다.
21세기 들어와서 서세동점의 현상이 무너지고 있는 것으로 나는 본다. 가장 뚜렷한 근거를 제공하는 것은 이매뉴얼 월러스틴으로 대표되는 ‘세계체제론’(또는 ‘세계체계론’)이다. 1970년대 이래 근대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문제점과 한계를 지적해 온 세계체제론이 21세기 들어와 미국 헤게모니의 약화와 중국의 성장을 배경으로 힘을 키우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중국대안론’(또는 ‘동양대안론’)이 세계체제론을 발판으로 형성되고 있다. 자본주의-개인주의를 골간으로 하는 근대 세계체제가 한계에 부닥쳤다면 세계체제의 교체 또는 재편에 근대 이전의 전통문명이 중요한 참고가 될 것이고, 전통문명 중에서도 가장 고도의 안정성을 확보했던 중국-동아시아문명이 가장 큰 역할을 맡으리라는 것이다.
“서세동점의 끝”에서 나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한계에 관한 제반 담론의 정리에 주력하고자 한다. 지금 단계에서 확실한 결론을 도출할 주제는 아니더라도, 기존 체제에 집착하는 미국 중심의 세계관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있는 한국 사회에서 이 주제에 대한 관점을 확장할 필요는 분명하다. 개항기 이래 이 사회 지도층은 세계 사정의 변화에 수동적으로 대응하는 자세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 지금 진행 중인 변화의 의미를 능동적으로 파악하려는 노력의 필요가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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