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한 선생이랑 알고 지낸 지 4년째다. 그 친구랑 사제관계로 엮이지 않고 동학(同學)으로 지내게 된 것이 내게는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다. 저 하고 싶은 대로 공부하는 모습을 구경만 할 뿐, 책임감을 느낄 일이 없으니 얼마나 편하고 재미나는 일인가.

내가 늘 글을 싣는 <프레시안>에 그의 연재가 올라올 때 눈에 띄었는데, 내가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이 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LA 체류 중이던 그와 메일을 주고받게 되었는데, 내 글을 많이 참조한다는 자백은 예상한 것이었지만, 내가 학위를 받은 같은 학교 같은 과에서 같은 전공분야로 논문을 준비 중이라는 사실에 깜짝 놀라기도 했다.

이 책에 담긴 그의 글에서 여러 가지 좋은 가치를 많이 찾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만고의 진리에 따라, 이 선생과 내가 공유하는 관점을 독자들께 설명 드리겠다.

오리엔탈리즘이란 말이 널리 퍼진 것이 내가 아직 학교에 있던 1980년대의 일이었다. 그때 내가 사이드의 글에 큰 공감과 함께 더 깊은 문제의식을 느낀 것은 동양의 학인으로서 문명사 공부를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동양인의 생각 내용만이 아니라 생각 방식까지도 서양의 틀에 포섭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1990년 학교를 떠난 후 혼자 공부하면서 나름대로 하나의 세계관을 떠올리게 되었다. 문명 발생 이래 인간사회에서 각양각색의 가치기준과 조직방법이 나타나 왔지만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도 줄곧 지켜져 온 어떤 범위의 원리가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산업혁명 이후의 근대세계는 이 원리 중 많은 것이 어긋나는 특이한 현상을 펼쳤고, 그 결과 오늘날의 세상에 많은 모순이 일어나게 된 것이라고 보게 되었다.

이 관점으로 인해 근대성문제에 집중하게 되었고, 근년 한국근현대사를 이 관점에 따라 새로 정리하는 작업을 해온 것은 그 문제의 전개 현장 확인을 위해서였다. <망국의 역사>, <해방일기>, <냉전 이후>가 그 작업으로 나온 책들이다.

그 작업 진행 중에 이병한 선생과 마주쳤는데, 근대성이 우리의 세계 인식에 가해 온 제약을 중시한다는 점이 내 관점과 겹치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 관점에 이르기까지 더듬어 온 공부의 길이 나와 판이하게 다르다는 점에서 그 관점의 타당성에 대한 자신감을 더욱 키울 수 있었다. 나는 중국고전 연구에서 출발해 문명사 검토를 거쳐 근대성 문제에 도달했는데, 그는 사회과학에서 출발해 현대사 연구를 통해 비슷한 문제의식에 이른 것이었다.

근대성의 반성을 중시하는 이 관점이 환경과 자원 문제에서 인구 구조, ()의 편중, 국제적 긴장에 이르기까지 현대세계의 많은 문제를 서로 관련시켜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런데 근대적 학문은 계몽적 가치관과 과학적 연구방법에 대한 지나친 집착 때문에 이런 관점에 접근하기 어려운 문제를 아직도 갖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패러다임 이론으로 보자면 전환(shift)의 필요성이 정상상태(normal state)의 관성에 묶여있는 것이다.

근대의 덫에서 벗어난 새로운 관점이 여러 방향에서 떠오르고 있다. 서양에서도 세계체제론을 비롯한 근대성의 검토가 활기를 더하고 있고, 중국에서도 전통의 재해석으로부터 담론의 새로운 틀이 빚어져 나오고 있다. 이 방향으로 새로운 세계관을 빚어내는 것이 세계의 변화에 발맞추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나는 이 관점을 한국근현대사의 흐름에 비추어보았다. 이병한 선생은 시야를 넓혀서 동아시아현대사, 나아가 유라시아 역사에 적용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책상머리에서 문헌에만 의지해 온 것과 달리, 그는 관심 가진 지역에 한두 해씩 체류하며 온몸으로 공부를 쌓아가고 있다. 일본, 중국, 미국, 베트남을 거쳐 지금은 인도에 있고, 앞으로 몇 해 유학(留學 아닌 遊學)을 더 계속하겠다고 한다.

한편으로 후생가외(後生可畏)를 절감하면서 한편으로 이 선생에게 큰 고마움을 느낀다. 그는 물론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지만, 그중의 많은 부분은 바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대신 해주는 것이다. 실제로, 그가 하는 일과 공부의 내용을 알게 된 후 내가 마음속으로 해야겠다고 여기던 일을 , 이런 건 그 친구가 해줄 거니까,” 하는 생각으로 접을 수 있는 것이 꽤 있었다. 내 인생을 편하게 만들어준 분이다.

이제 그의 첫 책을 반갑게 받아본다. 연재로 본 글이라도 책으로 묶여 나온 것을 보는 맛은 다르다. 그리고 이 책에는 연재 글이 많이 다듬어져 있다. 앞으로 더 좋은 책도 계속 나올 것을 기대하지만, 이병한 선생의 성장을 그 출발부터 살펴볼 것을 독자들께 권한다. 즐겁고도 보람 있는 글 읽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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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1945년 8월 일본 지배가 끝날 때 조선인의 지상과제는 '독립'이었다. 이민족 지배를 받지 않던 조선시대라 해서 한반도가 아무런 불의도 존재하지 않던 지상낙원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민족 지배는 있던 문제를 더 크게 만들고 없던 문제를 새로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산업사회를 향한 세계적 변화에 말 맞춰야 하는 시대적 과제 앞에서 민족사회의 주체적 대응이 일본제국의 국익을 위한 식민정책에 가로막혀, 오늘날의 '헬조선'보다도 더 심한 참혹한 상태에 민족사회가 빠져 있었다.

 

일본의 몰락이 한민족 독립의 충분조건은 아니었다. 당시의 조선 민족사회는 중환자 상태에 있었다. 일본 지배기 동안 농촌사회는 심하게 파괴되었고, 산업 건설은 일본제국의 수요에 따라 배치되어 자생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마지막 전쟁기의 극심한 착취와 파괴가 있었고, 해외로 유랑하던 수백만 인구의 귀환에 따라 식량부터 자급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경제면에서부터 외부의 원조 없이 지탱이 되지 않는 사회가 어찌 독립을 장담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일본의 패퇴가 한민족 독립을 위한 첫 번째 필요조건이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당시의 민족사회가 안고 있던 모든 문제가 식민지배에 기인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최소한 식민지배를 통해 구현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문제라도 이제부터 제대로 대처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은 문제를 그때까지 만들고 키워온 일본의 역할이 배제된 덕분이었다. 일본의 지배 하에서는 '독립'을 민족사회의 과제로 세울 수조차 없었다. 이제 그 과제를 세워놓고 경제문제든 사회문제든 그 기준에 따라 풀어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독립'의 과제가 성격을 바꾸게 된다. 해방 전의 독립운동에서는 일본제국의 타도라는 당면과제가 다른 모든 과제를 압도했다. 예컨대 일제시대의 '산업 진흥' 운동은 식민지배 체제를 고착시킨다는 의미에서 '개량주의'라는 이름으로 경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일본제국이 이미 타도된 이제는 특정 외세를 배척하는 것보다 민족사회의 자생력을 키우는 노력이 더 중요한 독립의 과제가 된 것이다.

 

독립의 과제가 성격을 바꾸는 데 따라 민족주의의 역할도 바뀌게 된다. '신민족주의'라는 이름을 내건 민족주의 논설로는 안재홍의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1945년 9월)가 대표적인 것인데, 여기서 안재홍은 경쟁과 갈등보다 조화와 협력의 국제관계를 전제로 한 민족주의노선의 조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피해자 입장에서 항의하는 자세보다 국제질서의 한 주체로서 책임있는 자세가 필요하게 된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해방에서 정부 수립에 이르는 3년간의 과정에서 민족주의의 역할이 계속 움츠러든 결과, 남북에 세워진 두 국가에서는 민족주의가 탈색되어 있었다. 정부 수립으로부터 불과 2년 후 동족상잔의 전쟁을 벌이게 된 것이 그 결과였다. 한반도의 독립을 수십 년간 막아온 일본 지배가 끝났을 때 민족국가 수립에 실패한 한민족은 이후 수십 년간 냉전의 첨병 역할에 내몰리게 된 것이었다.

 

오늘날 민족주의는 한국 정치에서 큰 역할을 맡지 못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민족주의가 퇴조한 세계적 흐름에 부합하는 변화로 볼 수도 있는 것이지만, 민족주의가 제 역할을 한 뒤에 퇴조하는 것과 그러지 않은 채 퇴조하는 것은 다르다. 민족주의가 역할을 제대로 한 사회에서는 민족주의를 중심으로 형성된 정치적 질서가 어느 수준 이상으로 자리 잡혀 있어서 민족주의 퇴조 후에도 큰 혼란을 겪지 않는다. 반면 한국에서는 외부에서 수입된 정치제도가 아직도 안정되지 못한 채 사회의 갈등이 증폭되기만 하는 상황을 오랫동안 겪고 있다.

 

민족주의 퇴조가 현대사회의 필연적 현상인지 의문도 떠오르고 있다. 20세기 후반 자본세력의 세계적 권력화에 따라 세계 각지의 민족주의가 억압되어 왔고, 냉전 해소와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한계 봉착에 따라 민족주의 정치 원리가 다시 각광받기 시작하고 있다. 세계질서 변화의 중심부에 위치한 한국은 일상적 대외정책에서 민족주의 원리를 고려해야 할 필요가 늘어나고 있다. 게다가 북한과의 향후 관계 전개에서 큰 필요가 제기되고 있다.

 

이런 필요에 입각해서 한국의 민족주의가 위축된 까닭을 살펴보려면 1945년 8월 이후 3년간의 '해방공간'을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다. 해방 당시의 민심은 단연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에 쏠려 있었다. 민족주의를 반대하거나(친일파) 경시하는(공산주의) 세력은 당시 조선사회에서 극소수였다. 그런데 이 극소수 세력이 남북 정부 수립의 주도권을 쥐게 된 것은 무슨 까닭이었는가?

 

외세의 힘이었다. 일본을 대신해서 조선을 점령한 미국과 소련은 당시의 압도적 강대국이었고, 점령 지역에 자기네 말 잘 듣는 정권을 세우고 싶어했다. 그래서 조선 내의 친일파와 공산주의자들에게 힘을 실어줬다. 일본의 통치 아래 있던 조선인에게는 군사력도 없고 경제력도 없고 아무 힘이 없었다. 맨손의 민족주의자들은 공산주의자들의 조직력과 친일파의 자금력을 당해낼 수 없었다.

 

민족주의자들은 처음에 좌우익으로 갈라져 각기 공산주의 세력과 친일파 세력을 포섭하려 했다. 그러나 소련과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은 극좌와 극우가 형성되자 민족주의자들이 협공당하는 형세가 되었다. 양극의 진영논리 앞에서 민족주의자들은 회색분자, 기회주의자로 몰렸다. 1946년 초여름부터 민족주의자들은 '중간파'를 형성, '좌우합작'을 제창했다. 일단 민족국가 수립에 힘을 모으고, 수립된 국가 내에서 정책 경쟁을 하자는 것이었다.

 

극좌와 극우는 단일민족국가 수립을 기피했다. 단일국가가 성립되면 그 안에서 민족주의자들이 큰 역할을 맡을 것이고, 그에 따라 공산주의자들은 소수파가 될 것이고 친일파는 처단 대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점에서 친일파의 분단건국 의지가 더 강했고, 이북의 공산세력은 이에 편승했다. 1947년 가을 분단건국 전망이 가시화되자 중간파는 '남북협상'을 제창하고 나섰다. 이남의 친일파는 중간파의 노력을 봉쇄하려 들었고 이북의 공산세력은 이용하려 들었다. 그 결과 1948년 4월 평양에서 남북협상이 열렸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조선의 좌우합작 실패는 오스트리아의 경우와 대비된다. 오스트리아는 조선과 마찬가지로 연합국에 분할점령된 나라였고, 조선보다 참혹한 좌우항쟁의 배경을 가진 곳이었다. 그런데 오스트리아인은 좌우합작 정부를 구성해서 조선보다 더 긴 10년의 신탁통치를 받고, 신탁통치 종료와 함께 영세중립국으로 독립했다. 왜 오스트리아인은 해낸 일을 조선인은 해내지 못한 것일까?

 

한 마디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그러나 큰 이유 하나는 짚어둘 수 있다. 유럽의 중심부, 즉 당시 '문명세계'의 중심부에 있던 오스트리아에서는 어느 점령국의 어떤 조치도 국제여론의 관심 대상이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누구도 할 수 없던 짓이 해방공간에서는 마음껏 자행되었다. "주먹은 가깝고 법은 멀다"는 말이 있거니와, 오스트리아에서는 국제법이 꽤 가까이 있었다.

 

70년 전과 지금의 한반도 상황을 비교하면, 문명세계의 외곽이었던 이곳이 지금은 중심부 가까운 곳이 되어 있다는 데 가장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이제 조선의 민심을 억누르고 짓밟는 짓을 어느 강대국도 70년 전처럼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문제는 오히려 사회 내부에 있다. 민심을 짓밟는 외세가 국가사회 내부에 내면화되어 있는 것이다. 최근 몇 달 동안 드러난 것과 같은 대외정책의 혼란은 이 '내면화된 외세'가 초래한 것이다. 이것을 정리하기 위해 민족주의 원리를 깊이 새겨볼 필요가 있다.

 

 

Posted by 문천

 

 

<베이징 컨센서스>(황핑, 레이모, 윌리엄슨 등 지음, 김진공, 류준필 옮김, 소명출판)

 

2005년에 나온 <중국과 글로벌화-워싱턴 컨센서스인가 베이징 컨센서스인가(中國與全球化-華盛頓共識還是北京共識)>2006년에 나온 <중국모델과 베이징 컨센서스-워싱턴 컨센서스를 넘어서(中國模式與北京共識-超越華盛頓共識)> 두 권의 책에서 뽑은 글을 엮어 옮긴 책이다. 시사적인 주제인데 원서 출간 후 10년이 지나서야 나왔다는 사실이 아쉽기는 하지만, 원서보다 짜임새가 낫다. 그리고 베이징 컨센서스’, 또는 중국모델이라는 주제의 의미가 지난 10년 동안 더 커지고 강해졌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우리 사회에 소개되는 것이 반갑다.

 

워싱턴 컨센서스의 퇴조

 

이 주제가 갑자기 세계적으로 부각되는 계기는 20045월 영국의 외교정책센터에 발표된 조슈아 쿠퍼 레이모의 보고서 베이징 컨센서스에 있었다. 15년간 강력한 힘을 행사해 온 워싱턴 컨센서스의 대항마로 이 개념이 주목을 받은 것이다. 베이징 컨센서스의 의미에 접근하려면 워싱턴 컨센서스가 어떤 것이었는지 먼저 살펴보는 것이 좋겠는데, 1989년에 워싱턴 컨센서스란 말을 퍼뜨린 당사자 존 윌리엄슨이 20049월의 어느 학회에서 발표한 글 워싱턴 컨센서스의 역사가 이 책에 실려 있다.

 

국제경제연구소가 개최한 한 학회에서 발표한 논문을 통해 나는 이 개념을 처음 사용했다. OECD가 타당하다고 여겨온 일련의 관점이, 1950년대부터 라틴아메리카의 경제정책을 주도해온 개발경제학의 낡은 관점을 얼마나 대체할 수 있을지 따져보기 위해서였다. 논문이 다루는 내용을 공통의 관심사에 집중시키기 위해, 당시 나는 워싱턴에서 모두가 동의할 것 같고 라틴아메리카 어느 곳에서나 필요할 것 같은 10가지 정책의 목록을 만들어서 워싱턴 컨센서스라고 이름을 붙였다. (139)

 

이 글에서 윌리엄슨은 자신이 신자유주의자임을 감추지 않는다. 자신이 라틴아메리카를 겨냥해서 제기한 개념이 1990년대 미국의 세계정책에서 화려한 각광을 받을 때 어떤 득의를 느꼈는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2000년대 들어 워싱턴 컨센서스가 전 세계적 비판과 비난의 표적이 된 데 대한 억울함이 이 글을 채우고 있다. 그는 이 비판이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워싱턴 컨센서스의 내용을 둘러싼 논쟁은, 종종 그 명칭 때문에 발생하는 분노로 말미암아 뒷전으로 밀리게 된다. (...) 이 명칭 때문에, 개혁이 자기 국가에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자주적으로 행동을 취한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의 강제에 따라 수동적으로 움직였다는 인상을 주게 된다는 것이다. (...) 특히 부시가 만들어놓은 세계 질서 속에서 그것은 끔찍한 것이었다. 워싱턴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상, 미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에서 지지를 얻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구식 좌파들에게 안성맞춤의 선전용 선물이었다. (150)

 

윌리엄슨은 비판의 대상이 된 워싱턴 컨센서스의 통념이 자신의 원래 제안을 왜곡한 것이라고 불평하는데, 별로 설득력이 없는 주장이다. 금융시장 공개, 무역 자유화, 민영화 추진 등 통념의 핵심 내용은 그의 최초 제안에 들어있었던 것이다. 그가 주장하는 차이는 정책의 본질이 아니라 주변적인 방법상의 문제들뿐이다. 2004년 시점에서 워싱턴 컨센서스는 퇴조하는 정도가 아니라 배척의 대상이 되어 있었고, 윌리엄슨의 주장은 기술적 보완을 통해 그 유효성을 늘리려는 것이지만 이미 시대의 흐름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조셉 스티글리츠는 같은 자리에서 발표한 워싱턴 컨센서스 이후의 컨센서스앞머리에서 워싱턴 컨센서스가 아무런 해답도 제공하지 못했다는 점에 대한 컨센서스가 그 시점에서 빈곤 국가들의 발전 촉진 전략에 관한 유일한 컨센서스라고 비꼬았다. 그는 여러 층위에서 워싱턴 컨센서스를 비판했는데, IMF사태를 겪은 우리에게 가장 절실하게 들리는 것은 수단과 목표 사이의 혼동이다.

 

사유화(민영화)와 자유화는 종종 그것이 수단이 아니라 목표 그 자체인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다보니 오히려 발전의 궁극적인 목표가 퇴색되곤 한다. 급속한 사유화를 추구한 구소련의 경우, 그 결과는 엄청난 불공정의 확산이었고, 사유재산권의 합법성에는 심각한 균열이 생겼다. (...) 자본시장의 자유화는 더 빠른 성장을 보장하는 대신에 더 큰 불안정만을 조장할 뿐이다. (185)

 

추이즈위안(崔之元)1994년 글 제도혁신과 제2차 사상해방이 들어 있는 것은 그가 이 책의 저본 중 하나인 <중국과 글로벌화>의 엮은이이기 때문인데, ‘베이징 컨센서스가 나오기 10년 전의 이 글에서 그 의미의 실마리를 살필 수 있다. 1994년이라면 소련 해체, 동유럽 공산권 붕괴, 톈안먼 사태의 여파가 아직 가시지 않고, 워싱턴 컨센서스의 위세가 당당할 때였다. 중국에서 발생한 담론이 외부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것은 물론, 중국 내 담론 유통도 원활하지 않을 때였다. 중국이 발전은커녕 생존에 급급한 것으로 보이던 이 무렵에 쓰인 이 글에서 중국 발전 전략 논의의 향후 진행방향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글에서 추이즈위안은 ()진화론’, ‘분석적 마르크스주의’, ‘비판법학등 새로운 학문이론으로부터 사상해방의 영감을 얻을 것을 제안했다. 이 이론들의 적용이 타당한지 여부는 차치하고, 그 시점에서 사상해방을 제기한 사실 자체가 흥미롭다. 종래의 통념으로부터 벗어나자는 것이다. 글의 결론부에서는 제도 물신주의를 배척할 것을 주장했다. 제도 물신주의라 함은 제도의 기획과 운영에 현실적 목적보다 추상적 이념을 앞세우는 경향을 지적하는 것으로, 추이즈위안의 주장은 수단과 목표의 혼동에 대한 스티글리츠의 지적과도 통하는 것이다. 예컨대 ‘11의 조합 원리와 ‘11의 주식회사 원리를 결합한 주식합작제의 제도적 가치를 인정하는 데 추상적 이념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1987년에 시작된 제1사상해방운동은 두 가지 절대 긍정[兩個凡是]’ 노선의 과오를 바로잡는 데 중요한 역사적 공헌을 했다. 그런데 현재 개혁개방은 또 다시 새로운 전환점에 이르렀다. (...) 우리에게는 제2차 사상해방 운동이 필요하다. 그것은 더 이상 보수파를 단순히 부정하는 데 중점을 두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제도 혁신의 상상력이 발휘될 공간을 확대하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 그것은 이거냐 저거냐라는 식의 이분법을 벗어나서, 경제적 민주와 정치적 민주를 지도적 사상으로 삼아 제도 혁신의 여러 기회를 확보하는 것이어야 한다. (209)

 

1994년 시점에서 추이즈위안의 주장은 외부에서 들어온 관념에 맹목적으로 휩쓸리지 말자는 것인데, 당시 위세를 떨치고 있던 워싱턴 컨센서스에 대한 굴복을 거부하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 몇 해 후의 세계적 금융위기에 중국이 큰 타격을 받지 않은 것은 그의 주장이 정책에 어느 정도 반영되었기 때문일 것으로 짐작이 된다. 그래서 2004년경에는 중국 정책의 독자성이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특히 저개발 국가들의 선망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베이징 컨센서스라는 말이 큰 힘을 갖고 나타나게 된 것이다.

 

베이징 컨센서스의 내용

 

이제 베이징 컨센서스의 등장을 살펴볼 차례다. 이 말을 처음 무대에 올린 조슈아 쿠퍼 레이모의 2004년 글 베이징 컨센서스의 요점부터 정리해 본다.

중국의 힘을 설명하는 새로운 역학에 관해 논함이란 부제가 붙은 이 글의 도입부에서 레이모는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의 특이한 업적을 소개하고 만약 하늘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고 싶다면, 천체의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이동하는지에 관심을 기울이라는 말을 인용한다. 그 시점까지 중국의 변화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었다는 사실 앞에서, 기존의 이론에 얽매이지 않고 실제 현실에 주의를 집중해야 한다는 뜻이다.

레이모는 중국의 발전에 적용되는 세 가지 원리를 제시한다. 하나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실성의 원리. 중국의 변화가 너무 빨라서 통상적 의미의 정확한 관찰이 어렵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밀도의 원리라 하여 혁신의 총체성이 확보되어야 성공을 바라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에 비겨 녹색이면서 또한 투명한 고양이의 필요를 지적한 것이다.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90년대 이후로는 교체되어 왔다는 것이다.

베이징 컨센서스의 개념에 비판적인 아리프 딜릭의 글 베이징 컨센서스, 누구와 누구의 컨센서스이며, 목적은 무엇인가?”문제는 레이모의 역학에도 그의 정치경제학 못지않은 결함이 존재한다는 것이라는 대목이 있는데(223), 옮긴이들은 이것이 레이모가 제시한 두 번째 원리를 가리킨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 비유는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이런 비유였다.

 

세 개의 물체-원구, 속이 찬 원통, 속이 빈 원통-를 경사면의 꼭대기에 세워둔다. 그것들을 동시에 굴러 내려가게 한다면 어떤 순서로 바닥에 도달할 것인가? 원구가 첫 번째이고, 다음으로는 속이 찬 원통, 그리고 마지막으로 속이 빈 원통이다. 이는 물체의 질량의 밀도가 그 운동 속도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혁신은 중국 사회의 밀도를 증가시키는 길이다. 그것은 관계망을 통해서 사람들 사이의 연계를 더욱 긴밀하게 하고, 개혁의 기간을 단축시키며, 소통을 더욱 쉽고 빨라지게 한다. 혁신이 잘 될수록 밀도도 더 커지며, 발전도 더욱 빨라진다. (77)

 

피사의 사탑도 모르는 사람이 있었다니, 참 신기하다. 주장하려는 내용을 뒷받침해주는 적절한 다른 비유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이 단순실수 하나를 굳이 들춰내는 것은 이런 허점에도 불구하고 레이모의 제안이 큰 반향을 일으킨 사실을 음미하기 위해서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싶어 하는 방향을 잘 잡은 것이다.

마침 같은 책에 실린 윌리엄슨의 글과 비교하면, 정밀성만을 앞세우며 읽는 사람의 생각을 좁히려고만 드는 윌리엄슨과 달리 레이모의 글은 현실을 바라보는 시야를 넓혀준다. 이것이 바로 워싱턴 컨센서스와 베이징 컨센서스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워싱턴 컨센서스는 강대국과 거대자본의 입장에 어긋나는 관점과 정책을 억제하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인 반면, 베이징 컨센서스는 약자 입장에서 주체적인 자세를 세우는 길을 제시하는 것 아닌가.

 

베이징 컨센서스 이후

 

베이징 컨센서스를 발표한 18개월 후 <중국과 글로벌화>에 수록될 때 덧붙인 글 중국의 독자들에게에서 레이모는 그 동안 자기 글이 받아들여진 방식을 이렇게 관찰했다.

 

베이징 컨센서스에 관한 논쟁은 크게 두 진영으로 나뉘어 진행되는 듯하다. 한쪽 진영은 사실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들은 실제적으로 존재하며 발전하는 베이징 모델이라는 것이 정말 있는지, 그리고 이 모델이 중국과 기타 세계 각 지역에 미치는 영향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 탐구하려고 시도한다. 많은 흥미로운 사실들을 알게 해준 이런 논의들에 대해 매우 감사하게 생각한다. (...) 다른 진영은 감정적인 측면에 치중해 있다. 그들은 중국에 설령 어떤 발전 모델이 있을지라도 이미 발생한 상황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켜야 하며, ‘베이징 컨센서스워싱턴 컨센서스를 대체하려고 시도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59)

 

베이징 컨센서스에 대한 반대를 감정적인 측면이라고 표현했는데, 논쟁에서 바람직한 태도는 아니다. 그러나 중국의 성장과 영향력 증대를 논리고 나발이고무작정 반대하고 부정하는 경향이 일각에 존재하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일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베이징 컨센서스가 큰 성공을 거둔 첫 번째 이유는 강자의 논리로서 워싱턴 컨센서스가 널리 불러일으켜온 반감에 있다. 딜릭은 베이징 컨센서스란 말이 혼란스럽게 쓰여 온 상황을 비판하면서, 이 말이 큰 호응을 얻은 것이 국제 정치경제의 배경 속에서 그것이 담당한 역할, 즉 워싱턴의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이들을 끌어 모으는 깃발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223) 그리고 그 매력이 부시 행정부가 힘을 남용함으로써 미국의 국제적 위신이 추락한 데 따른 반사 효과의 측면이 강하며, 또한 미국으로 대표되는 세계화의 대안적 모델에 대한 강렬한 열망이 반영된 것이라고도 본다. (235)

딜릭은 레이모가 담론을 펼친 방법에 대해서는 불만이 많지만 그 담론을 통해 제시된 중국 모델이라는 주제는 환영해 마지않는다. 베이징 컨센서스의 개념이 현재의 세계정세에 대해 열어놓은 접근 방식에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겠다고 한다. 그가 설명을 찾는 현상은 이런 것이다.

 

지난 20년 동안 이런 목표를 추구하면서, 중국은 미국의 정치 경제적 헤게모니에 대한 대항자로 부상했다. (...) 앙드레 군더 프랑크, 조반니 아리기, 이매뉴얼 월러스틴 등 세계체제론을 제기한 학자들은 현재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중심이 동아시아로 이동하는 중이라고 주장한다. 위에서 언급한 현상들을 전제로 한다면, 베이징을 중심으로 한 재배치를 그런 이동의 분명한 증거라고 할 수도 있다. (...) 베이징은 현재 제3세계 또는 남반구의 새로운 무게중심으로 떠오르고 있고, 그 사실은 베이징 자신도 흔쾌히 받아들인다. 베이징은 이제 자본주의 세계화 시대의 반둥으로 다시금 등장했다. 단순히 식민주의 극복을 추구하거나 발전의 제3의 길을 찾는 데 그치지 않고, 그동안 식민주의적 현대화의 흐름에 휩쓸려올 수밖에 없었던 주변부 국가와 지역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반둥이 된 것이다. (232-233)

 

책의 앞머리에 실린 황핑(黃平)의 글은 담론으로서 베이징 컨센서스의 가치를 지지하는 것이다. 문자 그대로 컨센서스의 존재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시점까지 중국의 행로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담론 틀의 필요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20045월 런던의 포럼에서 레이모의 발표를 처음 들을 때 아래의 말을 인상적으로 들었다는 것은 새로운 설명의 필요를 절실하게 느꼈다는 뜻일 것이다.

 

“‘워싱턴 컨센서스를 무시한 두 나라-인도와 중국-가 괄목상대할 경제적 성과를 이루어내고 있는 반면 워싱턴 컨센서스를 충실하게 추종한 인도네시아와 아르헨티나는 막대한 사회적 및 경제적 대가를 치르고 있다.” (21)

 

황핑의 글에는 새로운 설명을 필요로 하는 중국 현대사의 맥락이 잘 그려져 있다. 중국에 관심 가진 사람들에게 대개 알려져 있는 사실들을 연결해서 중국 모델설정의 필요성을 설명한 것은 이 책에서 제일 깊은 공부가 되는 내용이다.

예컨대 중국은 마땅히 인류를 위해 큰 공헌을 해야 한다1950년대 마오쩌둥의 말과 중국의 문제를 잘 해결하는 것이 인류에 대한 최대의 공헌이라는 1980년경 덩샤오핑의 말의 대비. 지금의 우리는 덩샤오핑의 말에 동의해 마지않는다. 자연조건의 제약 속에 그 많은 인구를 품고 가시밭길 근현대사를 걸어온 중국이 자기 문제를 잘 해결한다면 인류의 부담을 얼마나 줄여주는 일인가! , 그와 비슷하게 열악한 조건에 처해있는 세계 각지의 인민이 중국의 해결책을 배울 수 있다면 그 얼마나 고마운 일이겠는가! 과연 마오쩌둥도 같은 뜻으로 공헌이란 말을 쓴 것인지는 의문이지만, 부분적으로라도 이어지는 맥락은 있을 것이다. 그런 맥락을 찾는다는 것은 중국의 행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시각이다.

이 글을 쓰던 2005년에 중국은 빈곤상태를 탈피해서 온포(溫飽)의 상태에 도달했고, 초보적인 소강(小康)의 단계에 진입했다고 황핑은 말한다. 세계정세나 외부세력의 특별한 도움 없이 이른 그 자리에서 중국인은 장래의 진로에 대해서도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는 말이다.

 

중국이 지난 20여 년 동안 걸어온 길을 편견을 갖지 않고 본다면, 그것이 자신만의 독자적인 길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중국적 특색이라고 해도 좋고, ‘초급단계라고 이름 붙여도 무방하다. 어쨌든 기존의 그 어떤 모델도 따라가지 않았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이 사실을, 또는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이 실천을 우리의 사회과학은 아직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으며,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조차 내놓지 않고 있다. 현재의 소강사회조화로운 사회라는 개념은 학계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1930년대에 제기된 구체적인 실천’, ‘연안(延安)의 길등의 개념이나 개혁 이후에 제기된 중국적 특색’, ‘초급단계등의 개념과 마찬가지로 이 개념들도 일단 제기된 이상 단순히 정치적인 구호나 수사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이런 개념들은 학술적인 측면에서 보더라도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으며, 논의할 가치가 있다. 서구의 개념이나 모델을 단순하게 답습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이 개념들은 그저 현실을 서술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 현실 속에서 설득력과 생명력을 갖는 분석적 개념으로 자리 잡게 될 가능성이 크다. (39-40)

 

이 글들이 2005년 이전에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생각해 본다. 그 후 10년 동안에도 중국은 많은 변화를 겪어왔다. 그리고 그 변화에는 갈수록 세계 전체의 변화를 몰고 오는 의미가 커지고 있다.

중국이 미국 다음의 G-2로 올라섰다고 하는데, -소 양대 강국의 대립 체제와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미국과 소련이 상호 교류를 작게 하고 각각의 진영 사이에 장벽을 두었던 것과 달리 미국과 중국은 전면적 관계로 얽혀 있고 두 나라를 둘러싸고 전 세계가 온갖 방법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리고 두 나라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나머지 세계를 대하고 있다.

근년 중국은 종래의 패권국가들과 다른 형태의 대외관계를 활발하게 개발해 내고 있다. 아시아인프라개발은행(AIDB)이나 일대일로(一帶一路) 사업은 중국이 주도적 역할을 맡으면서도 패권국가들이 주도하던 국제기구보다는 상호적 측면이 강화된 것이다.

이런 측면은 지난 30여 년 중국 자체의 발전 전략의 연장선 위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국력이 약한 어려움을 근년까지 스스로 겪어온 중국에게는 자신이 실험해 온 발전 전략을 약한 상대들에게 권할 수 있는 여지가 많다. 그래서 국력이 강해진 지금에 와서도 약한 나라들의 자발적 호응을 이끌어내는 세계 전략을 쉽게 그려낼 수 있는 것이다.

책임대국, 화평굴기, 화해사회 등 종래의 패권국가들과 다른 유화적 표현을 중국이 쏟아내기 시작한 것도 베이징 컨센서스가 거론되던 무렵의 일이다. 그것이 단순한 립서비스인지, 세계평화를 위한 진심을 담은 것인지 아무도 확실히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중국의 강토 내에서 10여억 인민의 살 길을 찾아온 중국이 이 지구 위에서 70억 인류의 살 길을 찾기 위한 노력에 남들보다 앞서 있을 개연성은 분명하다. ‘중국모델이 학문적 타당성과 관계없이 인류의 새로운 길을 향한 지표로 관심을 모으는 까닭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