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제주에 다녀왔다. 10년 가까이 살면서 추억도 정도 많이 남은 곳인데, 어쩌다 보니 이제는 한 번 다녀오기도 힘든 곳이 되었다. 강연이라도 불러주는 데가 있으면 핑계삼아 가보고 싶어 눈치보고 있다가, 도저히 못 참고 틈 내서 2박3일로 다녀왔다. 격주로 다니던 전주를 이번에는 제주로 대신한 셈이다.

 

무엇보다 두 분 친구 못 보고 지내는 것이 생각날 때마다 마음에 걸리곤 했다. 그곳에서 정 나누던 다른 친구들이 보면 조금 섭섭하겠지만, 대개 이해는 해줄 거다. 이 두 분은 교감이 깊고 넓을 뿐 아니라, 내가 제주 떠날 무렵까지 생활 태도가 어지러웠기 때문에, 건강을 제대로 유지할 것인지부터 마음이 놓이지 않는 친구들이기 때문이다.

 

도착하자마자 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10여 년 전 마지막 볼 때는 휴대전화를 피차 안 쓸 때였기 때문에 지역전화번호를 돌리려니, 통화가 될지도 자신이 없었다. 용케 두어 번째 시도에서 전화를 받았다. 화실에 있고, 외출할 일도 없다 하기에 찾아가겠다고 했다. 이 친구는 유명인사다. 강요배 화백. 20여 년 전 내가 제주로 건너갈 무렵 이 친구도 귀향했고, 내가 광령리 살 때 멀지 않은 하귀리에 있어서 자주 보며 지냈다. 내가 제주 떠나기 조금 전 귀덕리에 화실을 지어 옮겨갔다.

 

제주 있을 때는 씽씽 차 몰고 찾아가던 곳에 이번에는 걷고, 버스 타고, 또 걷고 해서 두 시간 반이나 걸렸다. 골목 입구에 마중나온 모습을 저만큼서 바라보니 예전 모습 그대로다. 일단 마음이 놓인다.

 

화실 터는 길에서 두 길 정도 내려가는 냇가다. 집 곁에 가서 보니 살림칸이 들어 있는 원래의 화실 건물보다 더 튼실해 보이는 건물 한 채가 더 들어서 있다. 창고와 대형작품 작업실로 쓰려고 지었단다. 그래서 수선화 안부부터 물었다. 그가 애초에 이 터를 고른 까닭이 수선화 잘 자라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새 건물 자리가 원래 수선화밭이었다. 쓴웃음을 지으며, 많이 분양해 줬다고 대답한다.

 

제주 날씨로는 드물게 추운 날씨였다. 대충 둘러보고 자리에 앉자마자 제사고기와 막걸리를 내온다. 최근에 제사가 있었던 모양이고, 막걸리와의 막역한 관계가 그대로임을 알아보겠다. 이 친구, 막걸리 사랑하는 까닭을 묻는 사람에게 대답하곤 하던 생각이 난다. "편하잖아요? 술 속에 안주까지 들어 있으니까."

 

초저녁부터 막걸리잔을 나누기 시작하면서 일정이 걱정되기 시작한다. 그런데 가만 생각하니 오늘 꼭 만나기로 마음먹은 사람은 한라일보 강만생 사장 하난데, 강 사장과 강 화백도 보통 넘게 가까운 사이 아닌가? 강 사장에게 전화해서 당신도 이리 오시지~ 청했더니 그도 강화백을 한 번 보고 싶던 참이라며 바로 응해준다. 옆에서 강 화백 시키는 대로 막걸리도 몇 병 가져오라고 부탁했다. 고등학교 선배에게 술 심부름 시키는 버릇도 예전 그대로다.

 

강 사장이 오자 16년 전의 별난 자리를 회상하는 이야기가 오고갔다. 당시 편집국장이던 강 사장이 주필이던 송상일 선생과 함께 꾸민 '신년대담'이었는데, 2000년 1월 1일자로 나갈 참이니 '새천년대담'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보통 신년대담은 60대 이상 원로들을 모시는 자리인데, 두 분이 파격적으로 40대를 출연시키기로 했던 것이다. 강 화백과 나, 그리고 유시민 선생이 나섰다. 강 화백은 '제주민', 나는 '제주 손님', 그리고 유 선생은 '제주 사위' 자격으로 나선 셈이다.

 

그리고는 수선화 이야기가 한참 펼쳐졌다. 강 사장이 나보다는 자연 가까이 사는 사람인지라 '수선화광(狂)' 강요배와 제법 응대가 되고, 나는 곁에서 듣고 앉았다. 얘기 끝에 화백이 탄식한다. "(수선화는 번식에 벌과 나비의 도움이 필요없는데) 왜 향기를 피우는 거지? 누구를 유혹하려고 향기를 피우는 거야?"

 

뭣도 모르고 앉아 있던 내가 이런 막막한 대목에서는 나서게 되어 있다. "지 성질 못이겨서 그런 거겠지, 뭐." 둘이 박장대소하며 격한 찬의를 표해준다. 향기 피우는 게 수선화 성질이라면 누가 말린단 말인가?

 

이야기 나누는 중에 누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려 "누가 오시나?" 했더니 화백이 "미인! 미인 발소리야." 한다. 부인이 전복을 쪄 와서 안주로 내놓았다. 내가 떠날 무렵 결혼 이야기가 있던 분인데 사실 당시에는 그리 믿음이 가지 않았다. 화백의 생활이 너무 멋대로인데다 성질이 너무 강해서 누구라도 견뎌낼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15년간 곁을 잘 지켜주었으니, 화백이 그 동안 세상 떠나지 않은 것부터 부인의 공로가 클 것이다. 원래 화실에 엉성한 살림칸을 붙여 놓았었는데, 이 분 온 뒤에는 마을 안에 살림다운 살림을 차려놓고 오가며 일한다고 한다.

 

얼굴만 기억날 만한 분과 인사 나눈 다음 화백에게 치하해줬다. "우리처럼 모시는 아내에게 의지해서 살아가는 신세에는 아첨 잘하는 게 제일 큰일이지. 당신이 발소리만 듣고 미인, 미인, 외치는 걸 보니 마음이 퍽 놓이는구먼. 그래도 아직 더 배울 여지가 있는 것 같아." 했더니 다들 웃고 내 강의를 듣자고 한다. 그래서 우리 지내는 이야기를 생각나는 대로 두어 가지 해주는데, 재미있게들 듣다가 어느 대목에 이르자 설마 하는 표정으로 "아니 그게 진짜 정말 실화란 말이오?" 묻는다. 어머니 누워계실 때 내가 어머니만 챙기고 자기는 쳐다보지도 않는다고 짐짓 앙탈하는 아내에게 "여보, 내가 지금 어머니께 충성하는 건 두고두고 당신께 충성하기 위한 연습이에요." 했다는 대목이다. 책에도 찍혀 나온 얘기라고 대답했더니 부인이 그 책 꼭 구해 보겠다고 한다.

 

이렇게 화기애애하던 자리가 갑자기 어색해진 장면이 있었다. 강 사장의 한 마디가 발단이었다. "내가 그 동안은 이래저래 그럴 형편이 못 되었는데, 이제 회사 일에서 풀려나 주변을 다시 둘러보며 강 화백 그림을 한 점 갖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네. 소품 하나 권해줄 만한 게 있으면 좋은 값은 못 돼도 제값 내고 사려네."

 

후배를 존경하고 아끼는 좋은 뜻에서 한 말임을 누가 알아듣지 못하겠는가. 더구나 강 사장은 지방 언론이라는 험한 동네에서도 평생 깨끗한 처신으로 온 제주가 알아주는 분이다. 그럼에도 강 화백이 그 뜻을 곱게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지 속이 꼬여서 때문이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자기 그림 갖고 싶으면 학고재(화랑) 가서 골라잡아 사라는 거다. 전속 계약을 맺었으니 자기 일은 그리는 것뿐이고 파는 일은 화랑 몫이다. 시스템이 다 정해져 있는 판에 자기한테 와서 공장도 가격(!)으로 사려는 것은 시스템을 파괴하는 부도덕한 상행위라고 마구 몰아붙인다. 내게는 자기 신세에 대한 푸념으로 들리는데, 당사자인 강 사장은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모른다.

 

화백이 올릴 핏대 다 올리고 어색한 침묵이 시작될 때 내가 짐짓 부인 상대로 다른 얘기를 시작했다. 최근 몇 달 동안 글 발표가 적었는데, 그 사이에 남의 책에 붙여줄 글을 세 꼭지 쓴 것이 있다. 그 책의 그 위치와 역할에 맞춰 쓰려니 쓰기가 무척 힘들고 내 이름으로 독자를 찾아가지도 못하는 글이지만, 쓰고 나니 각별한 보람을 느낀다. 남의 책에 맞춰 쓸 수 있다는 데서 이 세상을 남들과 어울려 산다는 자신감도 느낄 수 있었다. 여기까지 그럴싸하게들 들어주고 있을 때 불쑥 반전으로 들어갔다. "이 몇 꼭지 글은 나 자신을 위해 쓴 게 아니라 내가 존중하는 저자들을 위해서 쓴 거라는 생각입니다. 원고료를 얼마 받기는 했지만, 진짜 가치는 그분들께 드리는 내 마음에 있었던 거죠. 아마 요배 형도 어느 날 수선화 향기를 맡다가 만생 형 생각이 나서 만생 형께 드릴 그림을 그릴 마음이 일어날 때가 있을 거라고 나는 믿어요." 가볍게 뒤집어씌워 버렸다. 실제로 나는 굳게 믿는다. 상품경제 싫어하고 선물(膳物)경제 좋아하는 원시인 기질이 강 화백보다 강한 사람 많지 않을 거다.

 

다시 이런저런 얘기 나누다가 화백이 엽서 크기의 작은 판넬 하나를 꺼내 보여준다. 작년에 그린 500호 그림인데 몹시 힘든 작업이었다고 한다. <무망도(無妄島)>란 제목의 그림 위쪽 4분의 3은 밤하늘이고 그 아래 해골이 널린 들판이 펼쳐져 있다. 두 강씨가 그림에 관한 이야기를 열심히 나누는 동안 나는 입닥치고 판넬만 한참 들여다보다가 툭 한 마디 했다. "당신은 시간을 그림에 담는 게 일이군."

 

제주 떠나기 전 자주 보고 지낼 때도 그의 그림에서 느끼는 '시간' 이야기를 하던 생각이 났다. 새(까마귀)를 종종 풍경 속에 그렸는데 그 까마귀에서 바람을 느끼고 바람을 통해 시간을 느끼곤 햇던 것이다. 그런데 이 그림의 밤하늘에서 느끼는 시간의 무게는 예전과 차원이 다르다. 백골이 진토 되도록 무심히 지나간 세월을 역시 무심히 채워온 밤하늘.

 

"시간" 한 마디에 화백이 바로 뿅 갔다. 석사논문 주제로 시간의 표현을 다룬 데서 시작해 예술론이 마구잡이로 쏟아져 나온다. 오랜만에 만나 친구 노릇 제대로 해줬다는 기분이 든다. 그림 이야기에 아는 척하고 나서지 않는 사람이 말을 아껴서 요점을 짚어주는 게 너무너무 신나는 모양이다. 하기야 역사학자인 내가 '시간'에는 권위자 아니겠는가. 그의 기쁨에 보답하기 위해 나도 욕심을 보여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판넬은 내가 가져갈게요."

 

강요배와의 술자리를 그가 뻗어버리기 전에 끝내는 것처럼 힘든 일도 세상에 많지 않다. 9시가 넘었을 때 6촌동생 기훈이에게 전화해서 데리러 와달라고 부탁했다. 택시로 돌아가려 하면 "택시는 좀 있다가 불러도 되니까," 하면서 한없이 붙잡는 걸 어떡하나. 옆에서 전화기에 대고 막걸리도 가져오라고 고함을 친다. 기훈이가 편의점을 탈탈 털어 가져온 7병까지 다 마시고 일어나니 1시가 지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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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