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해방일기" 작업을 끝내며 내 몸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장기간의 집중 작업을 거치고도 특별한 문제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욕 감퇴나 가벼운 당뇨 증세 정도는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살아오는 동안 몸 아끼는 마음을 별로 일으키지 않고 혹사를 한 일이 많은데도 이만큼 내 존재를 뒷받침해주는 것이 고맙지 않을 수 없다.

 

일전에 말한 바 술과 안경을 멀리하게 된 것이 노년으로 접어드는 변화를 순탄하게 받아들이는 자세의 예시일 것 같다. 술을 억지로 삼가려 애쓴 것이 아닌데 일에 바쁘다 보니 저절로 줄게 되고, 그것이 몸 상태의 변화에도 맞는 방향이라서 그대로 습관이 된 셈이다.

 

안경을 안 쓰게 된 변화의 의미를 당장은 잘 몰랐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크게 느껴진다. 마음이 순해진다고 할까? 현대인에게는 외부의 현상을 적극적으로 파악할 필요가 일반적인 강박으로 작용한다. 그 파악의 가장 중요한 통로가 시각이다. 안경 안 끼고, 대충 보이는 대로 보면서 살려니 "왜 전에는 뭐든지 못 보면 안 되는 것처럼 악착같이 잘 보려고 애쓰며 살았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마침 근대문명에 관한 공부에서도 현대인의 강박에 관한 생각이 떠오르는 참인데, 생활습관의 변화가 강박을 벗어나는 방향이라면, 내 공부가 자연스러운 실천의 단계에 접어든 게 아닌가 하는 흐뭇한 마음까지 든다.

 

작년 건강검진 때 양쪽 시력이 1.0 전후로 나와서 깜짝 놀랐다. 중학생 때 흑판이 안 보이기 시작해서 양쪽 다 0.1로 측정을 받고 안경을 끼기 시작한 이래 시력이 다시 좋아질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데. 이 얘기를 듣고 듣기 싫은 소리 잘하는 한 친구는 "근시에서 원시로 넘어가는 과도기 현상일 거요." 했지만, 과도기면 어떤가? 그만큼 기간이 긴 과도기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지금의 건강 상태에 대체로 만족하면서, 이 만족스러운 상태를 잘 지켜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주치의를 잡은 것이 다연한의원 김형찬 원장이다. 그 전에도 두어 군데 한의원을 기웃거려 봤는데, 모두 믿음직한 분들이지만 김 원장은 각별히 편안한 분이다. 프레시안에 연재하는 글을 보고 그 미니멀리즘 취향이 마음에 들어 찾아간 건데, 실제 진료에 접해 보고 그의 "知行一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의사로서 그의 능력과 자세에 어떤 한계와 문제점이 있다 하더라도, "과잉진료"의 염려는 절대 할 필요가 없는 분이다.

 

욕심 줄이는 것을 퇴각 전략의 골자로 삼는데, 건강 욕심도 마찬가지다. 지금보다 기운이 늘어날 꿈은 꾸지도 말고 있는 기운이나 아껴서 쓸 생각이다. 억지로 기운을 일으키면 그만큼, 또는 그보다도 더 많은 보이지 않는 부담이 생길 것으로 믿는다. 사람들이 다 이런 믿음을 가진다면 망하는 사업이 많아서 국가경제가 흔들릴까?

 

작년 초가을에 어쩌다 일 욕심이 크게 일어나 김 원장에게 부탁한 일이 있다. "내가 건강에 크게 돈 쓰거나 힘 쓰는 마음이 없는 사람인 줄 아시겠지만, 모처럼 건강 증진을 위해 돈과 시간을 쓸 마음이 일어났으니 적극적인 처방을 한 차례 내주시겠습니까?" 기특해 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더니, 큰 처방을 내려면 얼마동안 면밀한 관찰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반년쯤 지난 뒤에 이르기를, "큰 문제 없는데, 그냥 그렇게 사시면 안 됩니까?" 그때쯤은 일시적으로 일어났던 욕심도 가라앉은 터라 그냥 그렇게 살기로 했다. 그 의사에 그 환자다.

 

근 30년 전,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아버지 일기에 접한 후 한 가지 정형화된 악몽에 꽤 시달린 일이 있다. 꿈속의 내가 갑자기 이승을 떠나 유령 신분으로 그 후에 벌어지는 일을 바라보는데, 내 살던 흔적이 사람들에게 드러나는 광경을 바라보며 엄청 쪽팔려 하는 꿈이다. (유령도 쪽팔림을 느낄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마흔 안 된 나이에 불시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의식하면서 내 어지러운 생활과 설익은 공부에 대한 자격지심이 나타난 꿈으로 생각한다. 10년 전 저술활동을 시작하면서 뜸해지기 시작해, 이제는 남의 꿈처럼 느껴진다.

 

앞으로 이 세상에 얼마동안이나 더 있게 될까? 내 맘대로 정할 수 없는 일인데, 절박한 마음이 들지 않아 다행이다. 몇 년이나 더 사나 하는 기간보다, 어떤 상태로 사나 하는 생존-생활 방식이 더 절실한 문제로 생각된다. 공부하고 발표하면서 오랫동안 살아온 방식이 오래도록 계속되기 바라지만, 그에 대한 집착도 줄여나가게 될 것 같다. 전에 비해 "멍 때리기"를 좋아하게 된 것은 좋은 징조다.

 

어머니의 마지막 몇 해를 가까이 모신 것이 내 존재에 대한 생각과 느낌을 정리하는 데도 좋은 계기였다. 그분 성질로 도저히 견디지 못하실 것 같은 여러 조건을 태연히 견뎌내실 뿐 아니라 나름 즐기기까지 하시는 걸 보며, 사람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 중에 관념에 휩쓸리는 것이 많다는 생각을 했다. 그 후 내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에서도 "실존" 앞에서 꺼져버릴 거품을 미리 뺄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런저런 욕심이 줄게 된 것은 그 덕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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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연변 와서 1주일, 한국에서도 조용히 지내지만, 여기 오면 더 조용하다. 전화를 전혀 쓰지 않고 인터넷 접속도 훨씬 적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내가 어디에 서서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더 차분하게 살펴볼 수 있다.

 

덕분에 떠오른 큰 생각이, 내가 이 세상에서 물러나는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몇 년간 겪어온 변화들의 의미를 그 기준으로 되짚어보니, 따로따로 생각할 때보다 더 석연하다.

 

그 방향의 변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 환갑 나이에 시작한 3년간의 "해방일기" 작업을 하면서였던 것 같다. 그런 변화의 전체적 경향은 욕심이 줄어드는 것이다. 수십 년간 무엇보다 꾸준히 좋아했던 술이 저절로 멀어졌다. 체력 등 신체조건에 확연한 변화가 없는데 술 욕심이 모르는 사이에 사라진 사실이 당시에는 스스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안경도 끼지 않고 살게 되었다. 뭔가를 정확하게 보고 많이 봐야 한다는 강박이 사라지고, 그저 보이는 만큼만 보이는 대로 사는 게 편안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멍 때리기"를 좋아하게 되었다. 전에는 차에든 어디든 10분만 앉아있으려면 책을 꺼내 읽어야 했다. 버스가 흔들려 책을 읽을 수 없을 때는 짜증이 나곤 했다. 그런데 요즘은 생각에 잠기든지 주변을 둘러보며 시간 보내는 것이 별로 불편하지 않다.

 

최근 들어, 약 2년 전부터는 작업의 내용과 방식을 바꿀 생각이 많이 들었다. 당시에는 해온 일을 더 잘할 길을 찾는다는 생각이었는데, 이제 돌아보면 그게 아니었다. 공부하는 사람(學人)으로서 새로운 단계로 넘어가는 고비에 이른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 역시 욕심이 줄어드는 현상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일상생활에서도 욕심을 가급적 억제하지 않는 자세로 살아왔거니와, 욕심 중에도 공부 욕심은 욕하는 사람도 없으니 마음껏 키우고 펼쳐왔다. 남들이야 학자로서 어떻게 평가를 하든 신경쓰지 않고 내 공부 욕심만 채우는 것을 "위기지학(爲己之學)"으로 자임해 왔다.

 

10년 전 본격적 저술활동을 시작하고도 욕심을 절제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세우는 작업계획 하나하나가 공부를 키우는 데 첫째 목적을 두었다. 그렇게 3년 전의 "냉전 이후" 작업까지 하고 나니까 비로소 뭔가 "정리"에 중점을 두는 쪽으로 마음이 끌리기 시작했다.

 

저술활동을 "에세이" 중심으로 하게 된 것도 이제 생각하면 "완결성"에 얽매이지 않고 마음껏 공부를 키우려는 욕심 때문이었던 셈이다. 2년 전부터 소설도 생각해 보다가 지금은 학술연구로 마음이 쏠리게 된 것이, 이제는 공부를 더 키우기보다 키워놓은 공부를 완결성 있는 형태로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에 따른 변화 아니겠는가.

 

이미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뒤늦게 돌아보며 마음이 크게 불편하지 않다. 어떤 길이든 나아갈 때가 있으면 물러설 때도 있는 것 아닌가. 수십 년 동안 욕심껏 공부를 키우며 살다가 아직 기운 있을 때 거둬들이는 자세를 갖출 수 있다면 한 학인으로서 더 바랄 것이 없다. 병법에서 "진격을 잘하는 장수보다 퇴각을 잘하는 장수가 진짜 훌륭한 장수"라 했다는데, 이제부터의 작업이 지금까지의 성과를 제대로 살려내는 정말 중요한 단계라는 생각이 의욕을 북돋워준다. 퇴각의 길에 아픔은 있을지언정 쓸쓸함은 없을 것이다.

 

퇴각의 길에 접어든 것을 분명히 인식하면서 "퇴각 일기" 쓸 생각을 했다. 얼마나 자주 쓰게 될지는 몰라도, 1주일에 한 차례는 퇴각에 관한 생각을 정리하려 한다. 나 자신 퇴각의 길에 더 일찍 매진했더라면 인생이 더 행복했으리라는 아쉬움을 곰씹으며, 읽는 분들이 퇴각에 관한 생각을 더 많이 하도록 도와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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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62712

 

탈핵화 정책에 대한 반발이 쏟아져나오는 모양이다. 그런데 "값싼 원자력"이니 "산업경쟁력"이니 하는 말들을 앞세운다니, 참 한심한 마음이 든다. 원자력의 원가를 산정할 때 원자력 이용에 따르는 손해를 제대로 고려하고 하는 얘기들인가? 폐기된 원자로의 해체에 드는 비용도 제대로 산정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손해는 그것만이 아니다.

 

전기료 인상에 따른 산업경쟁력 약화를 걱정한다고 한다. 후대에 엄청난 부담을 남기면서 지금 당장의 산업경쟁력에만 목을 매자는 주장, 나이가 환갑 지난 사람들에게는 잘 먹힐지 모르지만, 앞으로 50년 이상 살아가야 할 청소년들, 그리고 아이들의 장래를 걱정하는 어버이들에게는 기가 막히는 이야기다. 판단력이 뛰어나고 말고를 떠나, 미래를 걱정할 동기가 약한 사람들의 의견이 과대평가되는 상황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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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