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어진 세상보다 더 좋은 세상을 바라는 꿈은 문명발생과 함께 시작되었다. 종교는 이 꿈을 많은 사람이 공유한 현상이다. 기독교의 낙원, 불교의 극락세계를 비롯해서 종교마다 초월의 세계를 향한 꿈이 있다.

 

이미 낙원의 꿈을 갖고 있던 기독교세계에 유토피아라는 또 하나의 꿈이 나타난 것은 특이한 일이다. 토머스 모어(1478-1535)1516년 책 제목에서 나온 이름이다. 종교개혁이 진행되고 있던 유럽에서 종교에 의지하지 않는 새로운 형태의 꿈이 자라난 것이다.

 

<국가의 최선의 형태와 새 섬 유토피아에 관하여>(De optimo rei publicae statu deque nova insula Utopia)는 제목 그대로 정치적 이상을 그린 책이다. 정치형태의 선택이 매우 중요한 일이 된 근대유럽에서 오래된 낙원대신 유토피아가 새로운 꿈의 이름이 되었다.

 

 

없는 곳에서 좋은 곳을 찾아

 

모어의 유토피아는 대륙에(브라질의 어느 곳으로 설정되어 있다.) 거의 붙어있는 직경 200마일가량의 섬으로 6천 가구의 도시 54개가 있다. 30가구에서 하나씩 뽑힌 대표 2백 명이 비밀투표로 도시의 통치자를 선출한다.

 

사유재산도 없고 직업의 구분도 없다. 농사가 모두에게 주업이고, 직조, 석공, 목수 등 부업을 각자 하나씩 가진다. 생활방식이 소박해서 부업에 높은 수준 기술이 필요 없고 하루에 대여섯 시간씩만 일하면 된다. 단 하나 특별한 직업은 종교와 행정을 담당하는 학자들로, 어린 나이에 소질에 따라 선발된다.

 

모어는 유토피아를 내부완결성을 가진 사회로 그리려 했으나 그 성립과 유지를 위해 최소한의 외부타자를 설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외부로서 대륙이 있었다. 섬 인구의 안정된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인구가 늘어날 때는 대륙의 식민지로 내보내고 줄어들 때는 식민지 주민을 불러들인다고 했다.

 

타자로서는 노예가 있었다. 한 가구에 두 명씩 배당되는 노예는 전쟁포로 등 외부에서 획득하기도 하고 내부의 범죄자로 충당하기도 한다. 전쟁을 하되 적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포획하는 데 목적을 둔다. 유혈을 통한 승리를 부끄럽게 여긴다.

 

후세사람들은 유토피아이상향(理想鄕)”의 뜻으로 대개 받아들이지만 모어 자신은 라틴어로 쓴 이 책에서 희랍어 ουτόπία”(없는 곳)을 어원으로 내놓았다. “Ευτόπία”(좋은 곳)이 아니다. 실제 내용은 좋은 곳에 관한 상상을 담고 있는데, 굳이 없는 곳이라고 이름붙인 까닭이 무엇일까?

 

 

두 교회의 성인(聖人)이 된 토머스 모어

 

오늘날 휴머니즘은 별 고민 없이 쓰이는 말이다. 인간의 존엄성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 속의 휴머니즘에는 어려운 문제가 있었다. 인간의 존엄성을 그 자체로 인정한다면, 교회와 신앙의 역할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따른다. 휴머니즘의 역사는 종교와의 갈등을 통해 진행되었다.

 

14~16세기 르네상스 휴머니즘은 인간 이성을 중시한 그리스철학의 재발견으로 시작되었다. 신학 중심의 스콜라철학을 넘어서는 새로운 학문의 길을 열었지만, 아직 종교와 대립하는 단계는 아니었다.

 

토머스 모어는 목숨으로 신앙을 지킨 사람이다. 헨리 8세가 이혼과 재혼을 위해 잉글랜드 국교회를 만들고 그 수장을 맡는 데 동의하지 않다가 반역죄로 처형당했다. 1935년에 가톨릭교회에서 성인으로 선포되었을 뿐 아니라 그가 맞섰던 국교회의 후신 성공회에도 1980년에 순교자로 등록되었다. 그의 죽음이 양쪽 교회에서 모두 순교로 인정받는 것은 교리에 앞서는 양심의 권리에 목숨을 바쳤기 때문이다.

 

모어는 시대 변화의 중간에 서 있던 사람이다. 휴머니즘과 종교신앙 사이를 연결한 사람이었다. 영국 역사학자 휴 트레버-로퍼의 논평이 이 연결성을 잘 보여준다. “(모어는) 휴머니스트 가운데 가장 거룩한 사람이며 성인 중에 가장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신대륙 식민지의 유토피아 실험

 

유토피아없는 곳이란 이름을 붙인 것도 중간 위치에서 나온 입장이다. 초월자의 도움 없이 인간의 능력과 노력으로 좋은 곳을 만드는 길을 바라보았지만, 만들 수 있다고 장담하지 않았다. “없는 곳에 대한 상상일 뿐이라고 했다.

 

모어 시대 이후 학문의 발달에 따라 인간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 늘어나면서 유토피아“(인간의 힘으로 만드는) 좋은 곳의 뜻이 되었다. 유토피아의 실현을 위한 노력은 신대륙의 식민지에서 종종 나타났다. 모어가 상상한 이상사회에도 식민을 위한 공간이 필요했다. 대항해시대를 통한 공간의 확장이 유토피아의 무대를 만들어주었다.

 

1730년대 제임스 오글소프의 조지아 실험은 극단적 도덕주의로 눈길을 끈 사례였거니와, 그에 앞서 1660년대 캐롤라이나 식민지 설치 과정의 그랜드 모델(Grand Model)’에도 유토피아의 꿈이 나타났다. 이 모델의 작성에 존 로크(1632-1704)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알려져 더욱 눈길을 끈다.

 

캐롤라이나 모델에는 정치조직의 합리성을 강조한 진보적 측면이 있었으나 귀족제와 노예제를 옹호하는 등 봉건적측면도 지적된다. 사회계약론으로 정치사상의 새 지평을 연 로크가 이 모델의 작성에서 맡은 역할에 대해 많은 논란이 일어난 것은 그 때문이다. 젊은 나이였던 로크의 역할이 실무자에 그쳤던 점도 있었겠지만, 국왕의 처형(1649)과 공화정 시도(1649-60)라는 정치실험 실패의 배경 위에서 이해할 일이기도 하다.

 

식민지 획득은 착취의 공간과 함께 실험의 공간도 만들어주었다. “없는 곳에 만들어질 좋은 곳을 향한 모어의 꿈은 다음 시대의 이상주의자들에게 이어졌다. 유럽인의 식민활동은 인간사회의 모순을 여러 측면에서 심화시켰지만, 한편으로는 모순 극복의 새로운 길을 찾는 실험실이 되기도 했다.

 

 

유토피아의 귀착점이 된 사회주의

 

유토피아 사상은 19세기에 활짝 꽃을 피웠다. 알퐁스 드 라마르틴(1790-1869)유토피아란 때를 아직 만나지 못한 진실이라고 했고, 오스카 와일드(1854-1900)진보란 유토피아의 실현을 위한 과정이라고 했다. 자연과학과 정치사상의 발전에 힘입어 모어의 꿈이 이제 현실에 가까이 느껴지게 된 것이다.

 

유토피아 사상의 유행은 거꾸로 유토피아의 의미를 희화화하는 결과도 가져왔다. 엥겔스와 마르크스가 말한 유토피아적 사회주의(utopian socialism)’란 말이 그렇다. 이 말이 공상적 사회주의로 번역되는 것은 자기네 과학적 사회주의와 대비하여 종래의 사회주의를 깎아내렸다는 뜻이다.

 

두 사람은 <공산당선언>(1848)에 이렇게 썼다. “계급투쟁이 발전하지 못한 상황과 그들 자신이 처한 환경 때문에 (...) 그들은 사회 전체의 변화를 제창하면서 계급의 차이를 무시하려 든다. 아니, 지배계급을 오히려 두둔한다. (...) 그래서 모든 정치적 행동, 특히 혁명적 행동을 거부한다.”

 

엥겔스와 마르크스 이전의 사회주의는 어떤 것이었나. 앙리 드 생시몽(1760-1825), 샤를 푸리에(1772-1837), 로버트 오언(1771-1858) 등이 알려져 있다. 그들의 주장 사이에도 상당한 편차가 있기는 하지만, <공산당선언>의 지적대로 계급투쟁의 필연성을 부정한 것이 그들의 공통점이다. 그래서 과학적이지 못하고 공상적이라는 것이다.

 

아메리카 독립과 프랑스대혁명 등 18세기 말의 정치적 격변이 새로운 조직원리를 통한 유토피아의 꿈을 키워주었다. 사유재산권의 토대인 개인주의(individualism)’의 극복을 바라본다는 점에서 그 꿈은 사회주의(socialism)’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도 같은 취지에서 사회주의를 표방했다. 다만 그들은 사유재산권의 결과물인 자본계급과의 투쟁에 집중하는 노선을 과학적 사회주의로 내걸면서 자기네 꿈은 꿈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인류에 대한 위협을 특정 계급의 악역보다 더 넓은 의미의 문명의 성격에서 찾게 된 21세기 상황에서, 표적을 좁히려 들던 과학적사회주의보다 밑바닥 원리를 탐구하던 공상적사회주의의 유산이 더 소중하게 여겨진다. 더 좋은 세상을 위한 꿈, 유토피아의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개인주의 극복이라는 과제를 다시 떠올려본다.

 

 

https://en.wikipedia.org/wiki/Utopia_(book)#/media/File:Utopia_Woodcut_(Holbein,_1518).jpg 1518년간 <유토피아>에 실린 암브로시우스 홀바인의 목판화.

 

https://en.wikipedia.org/wiki/Thomas_More#/media/File:History_of_the_great_reformation_in_Europe_in_the_times_of_Luther_and_Calvin.._(1870)_(14785678593).jpg 토머스 모어의 처형 장면.

 

https://en.wikipedia.org/wiki/John_Locke#/media/File:John_Locke.jpg 존 로크 초상. ‘정체성자아의 개념 확립으로 근대사상에 큰 영향을 끼친 초기 계몽주의자였다.

 

https://en.wikipedia.org/wiki/John_Locke#/media/File:John_Locke.jpg 찰스 1세의 처형(1649) 장면을 그린 작가 미상의 홀랜드 그림. 찰스 2세의 왕정복고(1660) 후 설치된 캐롤라이나 식민지는 찰스 1세의 이름을 딴 것이다.

 

 

 
Posted by 문천

 

노예제도는 문명의 발생과 함께 나타났다. 생산력 증가에 따른 사회분화의 일환이었다. 고대문명이 번영한 곳마다 노예제도가 운영되었고, 그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로마의 경우다.

 

로마제국의 노예제는 동로마제국에서 계속되었고 그와 대치하고 있던 페르시아의 사산제국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은 노예제가 시행되었다. 7세기 이후 이슬람권의 노예제도는 두 제국의 유산을 아우른 것이었다.

 

서로마제국 멸망 이후 서유럽 기독교권에도 노예제도가 있었으나 동방에 비해 그 역할이 작았다. 로마제국의 고전문명이 서유럽 지역에 잘 전승되지 못한 하나의 측면이었다. 동로마제국이나 이슬람권에 비해 서유럽은 사회분화가 부진한 단계였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노예제의 전통이 미약했던 서유럽

 

프랑스에서는 루이 10세가 노예제 금지령(1315)을 내린 것으로 전해진다. 엄밀히 말하면 재정 확충을 위해 농노가 속전(贖錢)을 내고 자유민이 되도록 한 것인데, 노예제가 부각된 후세에는 노예에게 적용되었다. 문호 알렉상드르 뒤마의 아버지는 카리브해의 생도맹그에서 노예로 태어났다가 이 제도에 따라 프랑스인이 되고 최초의 흑인 군사령관이 될 수 있었다.

 

1315년의 금지령이 오랫동안 유지된 것은 프랑스에서 노예제가 심각한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국에도 노예제가 법제화되어 있지 않았다. 두 나라에 노예 비슷한 신분이 없지는 않았어도 법률로 뒷받침할 필요까지는 없는 사소한 요소였다. 18세기 후반 계몽사상의 유행과 함께 노예제 비판이 일어날 때 문제가 된 것은 유럽 내의 노예제 시행이 아니라 식민지와 관련된 노예무역이었다.

 

15세기에 유럽인은 마데이라, 아조레스 등 아열대지역 섬들을 점령한 후 플랜테이션에 노예를 대거 활용하기 시작했다. 아메리카 발견 후 카리브지역으로 플랜테이션이 확장되었고, 17세기 이후에는 북아메리카 본토에 노예제 플랜테이션이 늘어났다.

 

유럽인의 식민지 노예제는 이슬람권에서 널리 시행돼 온 노예제와 달랐다. 이슬람권에서 노예의 역할은 가사노동에서 군대까지 다양했기 때문에 노예와 일반인의 접촉면이 넓었는데 16세기 이후 플랜테이션과 광산 등 집단노동에 동원된 유럽인의 식민지 노예들은 일반사회로부터 단절되어 있었다. 사회와 격리된 위치 때문에 노예를 인간 아닌 존재로 보는 경향이 극단으로 흐르게 되었다.

 

노예의 실제 모습은 사회마다 달랐다. 본국에 비해 식민지 노예제는 억압이 강했다. 식민지라도 프랑스령 퀘벡이나 스페인령 플로리다에서 억압이 덜했던 것은 집단노동의 비중이 영국령 아메리카처럼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국령 아메리카 내에서도 플랜테이션이 적은 북부 식민지 주민들의 노예제에 대한 태도는 남부와 달랐다.

 

 

노예 없는 식민지로 출발했던 조지아주

 

제임스 오글소프(1696-1785)조지아 실험(Georgia Experiment)’이 노예제를 둘러싼 영국 본국과 식민지의 분위기 변화를 보여준다. 조지아는 미국 13주가 될 식민지 중 제일 늦게(1732) 남쪽 끝에 설치된 식민지였다. 박애주의자로서 군인이자 정치가였던 오글소프는 캐롤라이나 남쪽에 노예 없는 식민지를 만들 것을 국왕에게 청원해서 인가를 받았다.

 

이 청원이 인가를 받은 것은 스페인령 플로리다와의 사이에 완충지가 필요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플로리다에도 노예제가 있었으나 기독교에 입교하거나 군대에 입대하면 쉽게 자유민으로 풀어주는 개방적 운영이었다. 스페인과 사이에 긴장이 일어날 때마다 노예들에 대한 스페인 측 선동이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영국 정부는 버지니아와 캐롤라이나를 이 위협으로부터 지켜주는 역할을 조지아에 바란 것이다.

 

오글소프는 채무죄인(dept prisoners) 등 본국의 빈민을 데려와 소규모 자영농으로 재활의 기회를 주고자 했다. 그래서 노예 소유를 금지하고 한 가구에 50에이커(6만 평) 한도의 땅을 나눠주는 정책을 취했다. 노예 소유와 함께 음주를 금지한 데서도 조지아 실험의 도덕주의를 알아볼 수 있다.

 

그러나 도덕이 밥을 먹여주지 못한다. 자영농을 바라보는 빈민만으로는 플로리다 방면의 위협에 대응할 경제력과 군사력을 키울 수 없었기 때문에 10명 이하의 노예를 데려오는 이주민에게 500에이커까지 땅을 제공하는 타협적 방식을 병행하게 되었다. 이 방식으로 합류한 노예제 농장주들은 조지아 실험 전복을 위해 본국 의회에 로비활동을 벌였다.

 

오글소프가 1743년 조지아를 떠나며 조지아 실험은 힘을 잃고, 조지아 노예 금지령은 1750년 영국 하원에서 폐기되었다. 1776년까지 조지아의 노예 인구비율은 다른 남부 식민지들과 비슷한 45%까지 늘어났다.

 

 

수세에 몰린 노예제 지역의 피해의식

 

미국 독립전쟁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평등사상은 확장되고 있었고, 독립의 명분 또한 인권에 대한 각성을 촉진했다. 독립은 노예제 지역인 남부와 비-노예제 지역인 북부의 합작으로 이뤄졌으나 독립 후의 정책 결정에서는 남북 간의 입장이 갈라졌다. 노예제 해소를 향한 시대적 조류 앞에서 남부는 수세에 처해 있었다.

 

영토 확장 때마다 남북 간의 입장 차이가 불거졌다. 1803년 루이지애나 매입과 1846-48년 멕시코 전쟁으로 획득한 영토의 노예제 시행 여부를 놓고 정치적 위기가 거듭되었다. ‘미주리 대타협’(1820)‘1850 대타협등 고식책으로 봉합해 나가다가 남북전쟁에 이르렀다.

 

186011월 링컨의 대통령 당선 후 남부 여러 주가 연방 탈퇴를 선언하는 가운데 또 하나 대타협의 제안이 나왔다. 헌법 개정을 통해 남부의 노예제 유지를 보장하자는 취지였지만, 새 영토의 노예제 채택 범위에 대한 합의 도출에 실패했다. 노예지역의 확장을 막음으로써 노예제의 고사(枯死)를 획책한다는 남부의 피해의식이 걸림돌이었다.

 

18613월 링컨 취임 전에 남부 7개 주가 연방에서 탈퇴해 남부연합을 결성하고 있었다. 링컨 정부가 이에 대해 바로 적대행위를 취하지 않은 것은 15개 노예주 중 거취를 결정하지 않고 있던 8개 경계주(border states)를 회유하기 위해서였다. 412일 전쟁이 터지자 경계주들은 4개씩 갈라져 남북으로 붙었다. 18631월의 노예해방선언에서도 북부에 가담한 메릴랜드, 델라웨어, 켄터키, 미주리의 노예제는 예외로 남겨졌다. (전쟁 후의 헌법개정으로 곧 사라질 예외였다.)

 

 

노예해방이 인종차별을 없애지 못한 까닭

 

전쟁이 끝난 후 남부연합 지역은 재건(Reconstruction)’이란 이름의 계엄통치에 들어갔다. 1877년 연방군이 남부에서 철수하고 지방정치가 재개되자 노예제를 금지한 13차 수정헌법을 적대시하는 분위기가 남부를 휩쓸었다. 헌법이 보장하는 평등을 각 주의 입법과 사법, 그리고 민간의 폭력으로 거부한 짐 크라우(Jim Crow)’ 시대가 1960년대까지 이어졌다.

 

남부의 반동적 분위기를 격화시킨 것은 공화당 정권의 정치실패였다. 극심한 부패로 민심을 잃은 공화당은 1876년 대통령선거에서 위기에 몰렸다. 개표가 끝나갈 시점에서 민주당 틸든 후보는 184인 선거인단을 확보해 놓고 1명만 더하면 당선이 확정되는 상황이었다. 이때 남부 출신 민주당 의원들이 재건을 서둘러 끝내주는 대가로 의회에서 확정할 남은 20명을 모두 공화당 헤이즈 후보에게 몰아주었다. 그래서 총투표에서 3% 뒤진 헤이즈가 선거인단투표에서 한 표 이기는 결과가 되었다.

 

공화당 정권의 타락은 전쟁의 명분까지 퇴색시켰다. 북부의 야욕만 부각되면서 남부에서는 빼앗긴 정의(Lost Cause)’에 대한 아쉬움이 넘쳐흘렀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6)에 깔려있는 옛 남부(Old South)’에 대한 그리움은 끈질긴 흑백차별의 동력원이기도 했다.

 

노예 해방이라는 명분이 편의적인 구호에 그친 사실은 흑인의 군사적 역할이 약소했던 데서도 알아볼 수 있다. 긴박한 전세에도 불구하고 흑인의 입대는 많지 않아서 종전 때까지 북군에서 흑인 비율이 10분의 1에 그쳤다. 명예훈장(Medal of Honor) 수여 통계도 이 전쟁이 흑인의, 흑인에 의한, 흑인을 위한전쟁과 얼마나 거리가 먼 것이었는지 보여준다. 남북전쟁 관련 서훈자 1500여 명 중 흑인은 불과 32명이었다. 여성은 단 1명이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Slavery_in_the_United_States#/media/File:Ashley's_Sack_(Slave_Sack_c._mid-19th_century).jpg 애슐리의 헝겊가방’. 아홉 살의 애슐리가 팔려갈 때 어머니 로즈는 이 가방에 낡은 드레스 한 벌, 자기 머리카락 한 다발, 피캔 세 줌을 넣어 딸에게 주며 영원한 사랑을 가득 담아준다고 했다. 애슐리의 손녀 루스가 후에 그 사연을 가방에 적어놓았다. 20년 전 내슈빌의 벼룩시장에서 발견된 이 가방이 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고, 로즈와 애슐리, 루스의 행적을 밝힌 연구도 나왔다.

 

https://en.wikipedia.org/wiki/American_Civil_War#/media/File:US_Secession_map_1861.svg 남북으로 갈린 미국. 8개 경계주 중 넷은 북부에(노란색), 넷은 남부에(주황색) 가담했다. 회색은 주로 편제되지 않은 준주(Territory).

 

https://en.wikipedia.org/wiki/Jefferson_Davis#/media/File:Jefferson_Davis_by_Vannerson,_1859.jpg 남부연합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1808-89). 만년의 회고록(1884)에서 남부 보수주의자들의 빼앗긴 정의(Lost Cause)’ 관점을 대변했다.

 

https://en.wikipedia.org/wiki/Abraham_Lincoln#/media/File:Abraham_Lincoln_O-55,_1861-crop.jpg 대통령 취임 당시의 링컨. 노예제에 대한 온건하면서도 확고한입장이 그의 정치적 성공을 뒷받침한 것으로 평가된다.

 

https://en.wikipedia.org/wiki/American_Civil_War#/media/File:Soldiers_White_Black_1861.jpg 북군은 1863년부터 해방노예의 모병을 시작해서 종전 당시에는 병력의 10분의 1에 이르렀지만 그 역할은 크지 않았다.

 

https://en.wikipedia.org/wiki/Slavery_in_the_United_States#/media/File:Slavery_map.jpg 1790년과 1860년의 노예 분포도. 점 하나가 노예 200명을 나타낸다.

 

https://en.wikipedia.org/wiki/James_Oglethorpe#/media/File:Flickr_-_USCapitol_-_Oglethorpe_and_the_Indians.jpg 원주민과 원만한 관계를 위해 애쓰던 오글소프의 모습이 미 의사당 장식에 남아있다.

 

https://en.wikipedia.org/wiki/Province_of_Georgia#/media/File:Gacolony.png 조지아 식민지의 위치와 영역.

 

https://en.wikipedia.org/wiki/Plantation_economy#/media/File:Slaves_cutting_the_sugar_cane_-_Ten_Views_in_the_Island_of_Antigua_(1823),_plate_IV_-_BL.jpg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광경.

 

https://en.wikipedia.org/wiki/Gone_with_the_Wind_(novel)#/media/File:Gone_with_the_Wind_cover.jpg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836)의 높은 인기에는 옛 남부(Old South)’빼앗긴 정의(Lost Cause)’에 대한 폭넓은 공감도 한몫했다.

 

 

 
Posted by 문천

 

한 국가의 경찰이 일원적 조직으로 되어 있다는 데는 '경찰국가'의 위험이 있다. 한국에서는 검찰의 기소권 독점이 전체주의체제의 더 강력한 조건이기 때문에 그에 가려져 있었지만, 일원적 체제의 경찰은 지팡이 노릇보다 몽동이 노릇에 더 적합하게 되어 있다.

 

한국 경찰을 '국가경찰'로 만든 것은 미군정이었다. 일본 항복 후 이남 지역을 점령하러 들어온 미군은 한국에 대한 정보를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았다. 수만 명 미군 중에 한국어를 하는 사람이 선교사의 아들로 한국에서 태어나 자라난 윌리엄스 대위 하나뿐이었다.

 

한국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니 한국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었고, 지내면서 조금씩 알게 되어도 미국의 국익이나 미군의 '軍益'을 위해 묵살하게 되기가 십상이었다. 그러니 민심을 얻을 생각은 않고 힘으로만 억누르는 통치 방침에 매달리게 되었다. 총독부를 그대로 두고 군정청으로 이름만 바꾸는 등 일본의 통치 수단과 방법을 그대로 물려받으면서, 그나마 일본인만큼의 이해력도 없었기 때문에 힘에 더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군 점령지역의 경찰 인원은 첫 1년 동안 두 배로 늘어났다. 일본 통치에 앞장섰던 '친일파'의 순도가 제일 높은 집단이 경찰인데, 해방 후 처단이 두려워 도망쳤던 경찰관들까지 다 불러모아 간부로 삼았다. 윌리엄스 대위의 어릴 적 친구인 조병옥을 경찰청장에 앉히고 일제시대에도 있던 지방경찰을 폐지하고 일원적 조직으로 만들었다.

 

조병옥은 1960년 대통령 선거에 이승만의 대항마로 나서서 "반 독재"의 상징처럼 알려지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민족의식도 민주의식도 박약한 인물이었다. 경찰은 임명권자에 충성해야 한다며 조선인이 아니라 미군정을 위해 복무해야 한다고 공언하기까지 했다. 1946년 10월의 대구사태, 1948년 4월의 제주사태 등은 미군정 경찰이 일으킨 수많은 분란 중 두드러진 사례들일 뿐이다.

 

이승만 정권은 철저한 경찰국가였다. 또 하나의 무력집단인 군대는 정부 수립 초기에 워낙 허약한 존재여서 경찰에게 구박받던 풍조가 여순 사태의 배경이 되기도 했고, 전쟁을 통해 덩치가 커진 뒤에도 미국의 실제적 통제 아래 있었기 때문에 국내 정치에서 역할이 자라나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이 무너질 때까지 정부 각료 중 가장 힘있는 자리가 경찰을 장악하는 내무장관이었다.

 

5-16 후 군부정권은 중앙정보부와 검찰을 국가폭력의 핵심부로 만들면서 경찰은 뒷전으로 물러나게 되었지만 현장 동원의 수단으로 남겨두었다. 권력의 주변부로 물러나면서 경찰은 서서히 사회를 위한 '봉사'라는 건전한 역할을 향해 옮겨가기 시작했고 1987년 이후 그 변화가 더 빨라졌지만, '권력의 주구' 역할에 대한 집착도 끈질기게 이어져 왔다.

 

'봉사경찰'과 '주구경찰'의 성향이 엇갈리다 보니 형편에 따라 다른 측면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상황에 와 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아래서는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을 거리낌없이 자행하던 경찰이 촛불사태 앞에서 진중한 모습을 보인 차이가 이런 상황을 보여준다.

 

불리한 경찰력 집행에 마주친 자유한국당에서 "자치경찰" 얘기 꺼내는 걸 보며 실소를 금할 수 없다. 홍준표와 김성태의 헛발질 앞에서 표정관리에 바쁜 여권 인사들 심정이 이해가 간다. 주제를 살피지도 못하고 터뜨린 헛소리라도, 이 얘기는 진지하게 받아주고 싶다. 한국사회의 거대한 짐 '국가경찰'을 처리하는 계기가 되기 바란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