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은 13세이던 1887년부터 과거제가 폐지된 1894년까지 거의 해마다 과거에 응시했다. 그리고 1895년에 배재학당 영문부에 입학했다. 3살 때부터 서울에서 살아온 그가 21세가 되어서야 신교육을 향한 이유는 명백해 보인다. 그는 출세할 길을 찾았을 뿐이다.


유소년기에 형성된 이승만의 성격을 정병준은 이렇게 요약했다.


이승만은 어릴 적부터 5대 독자로 자란 데다 아버지가 방랑벽으로 오랫동안 집을 비움에 따라 집안의 유일한 남자로 어머니와 둘이서 외롭게 생활하면서 ‘수탉형’의 외향적 성격과 유아독존적 성격을 갖게 되었다. 이승만의 독선적 성격이 어머니를 통해 성장하는 과정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이 있지만, 이는 아버지의 권위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인 성격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했다. 유년기의 영향에서 출발한 가부장적 권위주의는 오랜 망명 생활 속에서 다져졌으며, 본능에서 우러나와 제2의 천성이 된 마키아벨리적 성격과 함께 그의 주된 자질이 되었다. (<우남 이승만 연구>(역사비평사 펴냄) 61-62쪽)


배재학당에 다니는 동안 여러 미국인 선교사들과 친분을 쌓은 이승만은 졸업하던 해인 1898년 내내 독립협회 활동에 적극 참가했다. 특히 11월의 독립협회 탄압 때 치열한 투쟁으로 주목을 받아 중추원 의관에 임명되기도 했다. 그러나 곧 박영효 쿠데타 음모에 연루되어 1899년 1월에 투옥되었고, 탈옥 시도에 실패한 후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25세 나이까지 그는 자기 현시욕이 강한 일개 출세주의자였다. 그런데 1904년 8월까지 5년 7개월의 감옥생활 동안 특이한 지도력의 기반을 닦아놓았다. 이 기간 동안 많은 책을 읽으며 서양 사정을 잘 알게 되었고, 1902년 말 기독교로 개종한 후 많은 동료 죄수들을 개종으로 인도했다. 후일의 중요한 지지자들 여럿이 이 죄수들 중에 있었다.


옥중에서 이승만이 큰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감옥 안에 그를 위해 도서실과 학교를 만들 정도의 특별대우 덕분이었다. 이 특별대우는 선교사들 덕분이었다. 정부는 서양 열강의 일본 견제를 원했기 때문에 선교사들을 극히 우대했고, 선교사들은 좋은 목사감으로 배재학당 시절부터 주목해 온 이 젊은이의 보호와 지원에 힘을 아끼지 않았다. 이승만은 옥중에서 선교사들의 기대에 유감없이 부응했다.


석방 3개월 후인 1904년 11월 이승만은 선교사들의 후원으로 미국 유학을 떠났다. 대한제국 정부의 외교적 사명으로 미국에 갔다는 그의 주장은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강화되는 일본의 압력 앞에서 고종이 밀사 외교 추진에 온갖 수단을 다 시도하는 와중에 그에게도 주변적 역할이 조금 떨어졌을 수는 있지만, 유학생으로 건너가는 길에 심부름을 맡은 정도였을 것이다. 그는 고종이 자기를 보자고 부른 것을 거절했다는 주장까지 했다.


그런 신분으로 미국 도착 8개월 만에 국무장관과 대통령을 면담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재간이다. 절에 가서 새우젓 얻어먹는 정도가 아니라 소를 잡아 잔치를 벌일 재간이다. 특히 1905년 8월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 면담에서 그의 기막힌 수완이 빛을 발했다. 그는 대한제국 정부나 황제의 명령에 따라서가 아니라 하와이의 한국계 주민 8천 명의 청원 대표 윤병구 목사를 수행해서 미국 대통령을 만난 것이었다. 이 면담 덕분에 많은 미국인들이 그를 대단한 인물로 여기게 되었다.


1905년 2월에서 1910년 7월까지 11 학기 동안 이승만은 학부에서 시작해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워낙 머리가 좋아서인지 ‘외교활동’ 틈틈이 공부를 한 것 같은데도 기록적인 단기간에 학업을 마친 것이다. 선교사들의 도움이 여기에도 큰 작용을 했다. 언더우드, 스크랜턴 등 서울의 선교사 여러 명이 미국 교회 지도자들에게 총 19통의 추천서를 써주었다고 한다. 한국의 교회 지도자로 육성될 인물로 추천된 이승만은 장학금을 얻는 것은 물론, 예외적인 단기 수학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그가 목사가 되기를 바란 선교사들의 후원과 추천 덕분에 얻은 학위를 그는 정치활동을 위한 밑천으로 삼았으니 일종의 배신이다. 그러나 그는 배신에도 뛰어난 재간을 가진 사람이었다. 배신한 상대에게 아주 등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배신의 결과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도록 상대를 설득해 계속해서 도움을 받는 것이었다.


이승만의 유학기간 중 향후 그의 정치노선을 짐작하게 할 만한 일이 하나 있었다. 1904년부터 일본에 고용되어 대한제국 외교고문으로 일하던 미국인 D W 스티븐스가 미국에 돌아가 기자회견에서 일본의 통감정치를 찬양하고 옹호하여 한국 교민들의 큰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1908년 3월 23일 두 명의 교민 장인환과 전명운이 각자 스티븐스를 살해하려고 샌프란시스코 부두에서 그를 공격, 살해한 ‘스티븐스 사건’이 일어났다. 교민사회 간부들은 영어를 잘하는 이승만에게 두 사람을 위한 통역을 부탁했는데, 그는 이것을 거부했다.


그는 학생 신분이며, 기독교인으로서 살인범을 도와줄 수 없다는 이유로 통역 일을 거절했다. 정치활동은 열심히 하는 사람이 학업에 전념하기 위해 다른 일에 나서지 못한다는 것도 웃기는 일이거니와, 기독교인 핑계는 해도 너무했다. 살인범에게 구원이 있을 수 없다는 믿음이라면 진정한 기독교인에게는 모욕이다.


핵심 문제는 장인환과 전명운의 행위의 정치적 의미를 주장하는 일을 이승만이 거부했다는 사실에 있다. 평화 노선을 주장하며 폭력 사용을 반대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미 끝난 행위의 동기가 민족적 울분에 있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은 폭력 사용에 동참하는 것과 다른 일이다.


목적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방법이 달라도 서로를 인정한다. 방법이 다르다는 이유로 다른 민족운동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자는 자기 방법에 대한 집착만 있을 뿐, 목적에 충실하지 않은 것이다. 이승만 ‘외교독립노선’의 성격은 스티븐스 사건에서 드러났다. 그는 언제나 현시욕이 강한 출세주의자였고, ‘외교독립노선’은 그를 위한 하나의 도구였을 뿐이다.


그렇게 보면 그가 임시정부 ‘대통령’의 직함을 걸고 미국의 신탁통치를 청원한 것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는 힘들여 독립운동을 벌일 생각이 없었다. 적당히 처신해서 직함을 따내고, 그 직함을 이용해 예속상태를 자기에게 유리한 다른 예속상태로 바꾸는 것이 그의 ‘사업’이었다. 해방 후까지도 그는 진정한 독립이 아니라 자기에게 유리한 예속상태를 계속 찾고 있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