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16日發 SF國際] 미 국무성은 16일 조선 문제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성명을 공표하여 북위 38도선 분할 及 진주 이래의 정치행정 등 各般의 정세를 설명하였다.

연합군병력을 배치하는데 있어서 맥아더대장을 통하여 일본정부에 지시한 연합군 일반명령 제1호는 북위 38도 이북의 재조선일본군은 소련군에 이남의 일본군은 미군에게 항복하도록 명령하였다. 이 분할선은 일시적인 것으로써 단지 일반명령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하여 책임을 명확히 하는데 필요하도록 결정하였음에 불과하였으나 조선의 근본적 통일을 기함에 있어서는 그 영향하는 바 있을 것이 인정되게 되었다.

(...) 허다한 명사 또는 다수한 조선인 중에는 일본에 의한 점령의 결과로 그 고국으로부터 자발적으로 망명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국외에 추방되어 그 일부는 미국으로 갔다. 그들이 떠난 뒤에는 강력 且 보편적인 지방운동자가 남아 있었는데 일본은 이를 절멸시킬 수 없었다. 此等 망명가는 조선의 민주주의적 이상을 대표하는 것으로 재조선미군당국은 교통의 곤란을 극복하여 될 수 있는 대로 속히 그들이 귀국하여 조선 국내지도자와 함께 정치적 통일에 협력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일본의 압박이 별안간에 소멸되었기 때문에 새로 부여된 언론의 자유를 이용하여 다수한 정당의 발생을 보았다. 신국가 건설에 當하여 此等 정당 등에는 허다한 의견의 상위가 있고 일부정당에서는 당파와 정치활동뿐만 아니라 재조직된 정부정책에 대하여도 비난하는 자가 있다. 미국정부는 소련과 협의하여 조선 사태를 개선하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다.

남북조선간의 교통교역과 개인의 통행은 불원한 장래에 재개될 것이며 독립 且 통일된 조선국의 종국적 건설이 용이하게 되도록 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

자유신문 1945년 11월 19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1945년 7월 26일에서 8월 2일까지 열린 포츠담회담은 제2차 세계대전 처리를 위한 연합국 정상회담이었다. UN에서 안보리 상임이사국 자리를 차지할 5대 연합국 가운데 프랑스와 중국은 실제 종전 시점에서 타력으로 해방받는 입장이었고, 연합국의 실세는 포츠담회담에 참가한 미국, 소련, 영국의 3개국이었다.


3개국은 일본이 항복해 전쟁이 완전히 끝난 후 외상회담을 열어 전쟁 처리의 나머지 사안들, 특히 일본과 관련된 사안들을 결정하기로 했다. 12월 16일부터 25일까지 열릴 모스크바 3상회의는 이 목적을 위해 열리게 된다.


포츠담회담이 독일 항복 후 3개월이 지나지 않아 열린 데 비해 3상회의는 일본 항복 후 4개월이 지나서야 열린다.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린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일본의 항복이 예상보다 빨랐기 때문에 각국의 입장이 덜 준비되어 있었다는 점. 둘째는 미국과 소련 사이의 긴장관계 심화로 각국 간의 입장 조정이 더 어려워졌다는 점.


11월 16일 미 국무성이 한국 상황에 관한 성명을 발표한 것은 일본 항복 후 3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3상회의를 앞두고 점령국의 입장을 밝힐 필요를 느낀 것으로 보인다. 대체로 원론적인 내용인데, 해외 망명자들의 역할을 부각시킨 점이 눈에 띤다. 미 국무성 입장에서 중국이나 소련 망명자보다 미국 망명자를 중시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미국 망명자를 대표하던 이승만이 국무성에서는 별로 달가운 존재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역시 미국 망명자라는 점에서는 최소한의 옹호를 받는 위치에 있었던 것 같다.


같은 날 미군정 군정장관실에서도 “미군정의 현재와 장래에 대한 제반문제”에 대한 가장 상세한 논평이 나왔다. 국무성의 성명과 보조를 맞추도록 조율된 듯, 원고지 40매가 넘는 분량의 논평이 <중앙신문> 11월 17일자와 18일자에 나누어 게재되었다. 이런 서문으로 시작된다.


민주주의의 근본적 요건의 하나는 국가의 인민이 그 정부가 어떠한 일을 하고 있는지를 항상 알아야 한 것이라는 것이다. 조선을 점령하는데 있어서 일본정권을 가급적으로 속히 교체시킬 필요가 있었다. 장기에 亘한 朝鮮민족의 압박과 전반적으로 조선인을 정부의 고급지위에 배치하지 않은 결과로 미국 점령군은 정부운영에 참여할 조선인의 재능에 관하여 전연 알지 못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미국조선주둔군정부는 단기간이나마 조선을 점령하고 조선인과 접촉하는 경험을 얻기까지는 확정한 정책과 정부조직에 관한 방법을 세울 수가 없었다. 과거 6旬에 亘하여 조선민족과 접촉한 결과 우리는 조선인이 정직하고 성실하고 평화를 애호하며 재질 있는 민족임을 알았지만 그들이 정치의 경험 또는 훈련이 없었던 것을 발견하였다. 이러한 사정으로 조선인의 인내심에 應報하고 조선군정의 현재기구와 장래계획을 발표하여 모든 사람이 신생한 민주주의조선을 건설하고 있는 정부를 알고 그와 협력하여 주게 한 시기가 온 것이다. 이에 우리는 신중하게 그 해결책에 관하여 검토를 하려고 한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이하 8개항 논평 내용으로부터 그 시점에서 미군정 당국자들의 상황 인식을 살펴볼 수 있다. 어느 지역, 어떤 상황에나 적용될 원론적 내용은 제쳐놓고, 인식의 특이점을 보여주는 부분을 발췌하며 그에 대한 내 논평을 붙인다. (자료 출처는 모두 위와 같음)


1) 조선군정의 일반원칙과 정책

“일본의 제국주의적 압박 하에 다년 신음한 조선민족은 자유행사의 책임과 자제와 관한 경험과 훈련을 얻을 기회가 없었고 그런 고로 그들은 민주주의적 행동과 현명하게 자유를 행사할 모든 남녀의 필연 심각한 개인적 책임에 관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 진실한 민주주의 행사와 책임은 학교에서 또는 경험 있는 미국인의 지도하에 대중에게 가르쳐야 한다.”


하지 개인의 민주주의관은 미국식 자본주의를 뜻한다는 사실이 여러 번 확인되었다. “일반원칙”으로 받드는 ‘민주주의’가 하지의 민주주의관에 입각한 것이기 쉽다는 사실을 “경험 있는 미국인의 지도”라는 말에서 알아볼 수 있다.


2) 조선정부 수립에 관한 일반문제

“유능하고 충실한 인원을 발견하는 것은 극도로 곤란하다. 그리고 가장 중대한 문제의 하나는 일본정부와 협력한 조선인의 임용이다. (...) 생존하고 있는 전 조선인이 어느 정도까지 일본인과 협력한 이상 일본과의 협동협력은 정도 문제라고 인정한다. (...) 각 부문에 봉사할 유능하고 우수한 사람이 극히 부족한 고로 조선인은 이러한 협력자로 하여금 그 국가에 봉사하고 전 민족의 이익을 위하여 그들이 일본인에게서 습득한 지식과 기능을 이제 조선에 반납시킬 적당한 방도를 강구하여야 할 것이다.”


‘협력’ 또는 ‘친일’에 대한 관점으로, 일면의 타당성을 가진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민심이 극도로 민감했던 당시 상황에서 이 일면의 타당성에 지나친 비중을 둘 수 없었다. 미군정의 자본주의 편향성과 친일에 대한 무감각에 가까운 관용은 민족정기의 확립과 사회주의 원리의 일부 적용을 원하는 일반 민심에 정면으로 역행하는 것이었고, 그에 대한 반감을 극좌 세력이 이용하는 조건을 만들어주었다.


3) 전반적 정부교체계획

“일본정부에 필적할 수 있는 군정을 조직하여 미국군장교로서 고급 일본인관리를 즉시 완전히 교체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하였다. 이 계획은 총독부에 실시된 것이다. 그러나 교체방법은 이전 조선 관리와 특수지식과 경험이 많은 일본인 관리를 그들이 군정 관리와 신임된 조선인에게 各局 部기능의 세목과 기타 귀중한 정보를 전달하기까지 직무에 유임할 것을 요하였다. (...) 이 계획은 또 다시 정부의 全 활동에 충분히 조선인이 참여할 정책을 수립 유지하여 군정장관과 각 국장에 대한 조선인고문위원의 임명함을 요구하였다.”


“일본정부에 필적할 수 있는” 길을 미군정은 추구했던 것이다! 이 점에서 미군정은 일본인에게 아무 손색없는 제국주의자들이었다. 11월 3일에 언급한 마이클 셰리의 책 <전쟁의 그림자 속에>가 생각난다.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힘을 키운 미국 군부가 정책노선을 끌고 간다는 의미에서 ‘군국주의’ 국가가 되었다는 얘기다. 해방공간의 한국은 미국의 군국화가 진행된 하나의 중요한 현장이었다.


4) 중앙정부

“책임 있는 관직에 있는 모든 미국장교는 임시적으로 임명된 충실한 조선인의 보조를 받고 있다. 이러한 조선인 보좌원은 조선인의 지도자가 선택하고 추천한 바이다. (...) 모든 임명은 신중히 조사하고 15명 내지 20명의 덕망 있는 지도자와 상의한 후에 된 것이다. 최초에 군정장관 고문과 각 局 고문을 선출한 후에는 모든 임명을 이 조선인 고문의 의견을 기초로 해서 된 것이다.”


한민당 위주의 고문단을 누가 어떤 기준에 따라 “덕망 있는 지도자”로 정의해 주었는가? 10월 10일 ‘아놀드 망언’에서 여운형을 표적으로 한 비열한 언사는 바로 이 “덕망 있는 지도자”들에게 배운 것이 분명하다. 그로부터 한 달 남짓 지나는 동안 그 언사가 적절한 것이 아니었음은 군정 당국자들도 깨우치고 있었다. 그런 파시스트 선전의 허구를 깨닫고도 “덕망 있는 지도자”들에 대한 존경심이 변하지 않았다면 그들 자신이 파시스트 성향이었을 것이다.


5) 道廳

“이상과 같이 전 일본인 及 협력자관리를 충실 유능한 조선인으로 점차 교체시키는 계획은 각 도청을 보유하기 위하여 채용되고 있다. (...) 조선인 임명은 가장 신중히 선출하고 임명 전에 各者를 조사하여 덕망이 있고 충실유능한 시민인 것을 발견하여야 될 것임으로 즉시 실행할 수는 없는 것이다.”


미군정 목표가 ‘판갈이’ 아닌 ‘물갈이’에 있었다는 사실은 지방행정 방침에서도 나타난다. 판갈이만이 정의로운 길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현실적으로 타당한 길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식민통치가 종식되는 상황에서 통치체제를 그대로 두고 사람만 바꾼다는 것은 누구를 위해서도(이해관계가 직접 걸린 극히 일부 사람들 외에) 바람직하지 않고, 또한 현실적으로도 무리한 방침이었다.


6) 조선 경제상태

“현재의 비상사태는 중대한 통화팽창, 물품원료 부족과 이기적이고 개인적 야심가이고 조선의 행복에 대하여 충실치 못한 일부 조선인이 새로 획득한 자유를 不分別하고 때로는 고의로 악용하는 것으로 인하여 생기는 것이다. 다수 무책임한 조선인 단체가 치안의 명의 하에 일본인이 파괴치 못하고 지출하지 않는 재산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가옥, 공장, 물자 기타 재산을 비합법적으로 무리하게 관리하고 있다. 이러한 단체는 물자 及 일본인재산을 약탈하고 이렇게 획득한 물품을 암시장에서 판매하는 일도 드물지 않는 것이다.

(...) 陶器工, 銀工, 眞鍮工, 木工, 籠編工과 같은 가내공업의 모든 숙련공은 즉시 재료획득과 시장에 판매하기 위하여 如上한 물품제조에 착수하는 것이 가장 필요하다. 가내공업 재료를 구하지 못하는 때에는 숙련공은 농상국 또는 지방장관으로부터 이 재료의 공급을 신청할 수 있다.”


산업에 대한 인식이 몇 개 공예 분야에 한정되어 있는 반면 경제 불안의 책임을 “무책임한 조선인 단체”에 뒤집어씌운 것을 보며 21세기의 한국인만이 아니라 당시의 미 국무성 관리들도 한숨을 쉬었을 것이다. 미군정 당국자들이 이 “무책임한 조선인 단체”를 좌익으로 보고 적대시하는 기색이 역력한데, 원래의 ‘자주관리 운동’은 노동조합 운동의 폭넓은 가능성을 품고 있는 것이었다. 미군정이 이 운동을 섣불리 배척해 합법적 발전의 길을 가로막았기 때문에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가 공산당 쪽으로 기울게 된 것이었다.


7) 장래의 계획

“군정청 지도하에 우수하고 안정된 조선정부가 수립된 후에는 두 가지 중요한 시책을 쓸 것이다. 조선 지도자의 유력한 단체가 현재 이러한 시책을 완성하기 위하여 필요한 재료와 방법을 연구기획하고 있다. 그 하나는 미국의 원조를 받을 목적으로 조선과 미국 간에 긴밀한 민간관계를 형성할 것이다. (...) 제2는 또 최후의 단계는 군정하의 조선정부를 어떻게 하여서 참된 조선의 민주주의 정부로 발전시키느냐는 문제가 남았다. 이 계획은 조선의 민주주의 구성을 위한 조선사람의 계획이라야 하고 또 조선의 지도자는 여사한 목적을 위하여 이미 활동을 개시하고 있다.”


아직 한국의 분단을 확실한 목표로 명언하지는 않고 있지만, 이 ‘계획’의 두 가지 방향은 모두 실질적으로 그 길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원조’에 의지하는, 그리고 ‘참된 민주주의’, 즉 미국식 자본주의를 받아들이는 국가에 소련군이 점령하고 있던 북한 지역까지 끌어들인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바라볼 수 없는 길이었으니까.


위에서 말한 “조선 지도자의 유력한 단체”가 한민당을 가리키고, 이미 활동을 개시했다고 밑에서 말한 “조선의 지도자”가 이승만을 가리킨 것임은 굳이 설명이 필요 없다. 그들에 대한 미군정의 의존도는 그들의 자격이나 도덕성과 별개로, 의존도 자체로서 편파성의 문제를 가진 것이었다.


8) 각자가 자기의 정부를 위하여 할 수 있는 사항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면 조선에 봉사할 기회가 없다고 우려할 필요가 없다. 정부와 학교와 일반직장의 모든 중요한 지위가 이전에는 일본인들이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하여야 한다. 일본인이 나가고 빈 자리를 조선사람으로 채우면 여러분에게 기회는 너무나 많을 것이다.”


“일본인이 나가고 빈 자리를 조선사람으로 채운다.” 이것이 당시 한국인의 민족주의에 부응하는 길이라고 미군정 당국자들은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식민통치 체제가 어떤 문제를 가진 것이었는지 아무 인식이 없고, 그 지배자가 미국인이 아니라 일본인이었다는 사실만이 잘못된 것이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일본인 대신 미국인이 지배해 주면서 높은 자리를 과거보다 많이 주기만 하면 한국인들이 만족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조관자의 논문 “‘민족의 힘’을 열망한 ‘친일 내셔널리스트’ 이광수”에서 ‘친미 내셔널리스트’의 탄생을 그린 대목이 떠오른다.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1> 554쪽)


이광수는 미군정이 친일 내셔널리즘을 배제하지 않고 반공주의 국가를 준비하는 것에 안도한다. 미국을 적대시하던 ‘친일’에서 ‘친미’로 돌변한 모습을 보고 그를 ‘변절의 천재’인 것처럼 비난하는 것은 오히려 어리석다. 적어도 이광수는 거짓말을 하지 않고 자기의 신념에 충실했다. 강자의 문명과 패권을 욕망하는 ‘친일 내셔널리즘’이 ‘민족주의적’인가, ‘친일적’인가, ‘친미적’인가 하는 문제는 상황 변수에 불과하다.


Posted by 문천


조선공산당 총비서 박헌영은 13일 아놀드 군정장관과 회견하고 15일 하지 사령관과 회견했다. 하지와는 10월 27일 첫 만남 이후 두 번째 회견이었다. 박은 15일의 회견 내용을 이튿날 기자회견에서 밝혔다.


朝鮮共産黨 대표 朴憲永은 15일 하지 중장, 아놀드 군정장관과 회견하고 중요 협의를 거듭한 바 있었는데 일반이 궁금히 여기는 이 회의의 내용을 16일 朴憲永은 신문기자단에게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하지 중장과 아놀드 장관은 나에게 두 가지 요구를 제출하였다.

1) 남부조선에 있는 미국군정의 목적은 무엇보다도 건전한 경제 기초 위에서 조선독립을 보장하려는데 있다. 이러한 본의를 양해하고 앞으로 더욱 군정에 협력해 주기를 바란다.

2) 조선독립은 연합국의 호의 특히 미국의 지원이 필요한 줄 안다. 미국은 모든 방면으로 더욱 경제적으로 조선을 협조할 만한 힘과 지위에 있으니 조선은 기쁨으로 친선관계를 맺어 나가야 하며 앞으로 독립국가로 완성되는 때에는 미국과 통상관계를 가지는 것이 필요할 줄 안다.

이상 두 가지 점에 대하여 朴憲永은 찬성의 의사를 표명하고 ‘朝鮮共産黨은 군정에 협력을 아끼지 않는다’는 뜻을 밝혀 말한 뒤에 그러나 ‘협력은 하되 군정이 잘못되는 방향으로 나가는 경우에는 共産黨에서는 비판할 자유를 가졌고 또한 우리의 의견을 건의하겠다’고 말하니 이 점에 대하여 하지 중장은 찬성의 뜻을 표하고 회담을 마치었다.”

자유신문 1945년 11월 17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9월 11일 재건된 조선공산당(공산당) 총비서로 선임되고 9월 20일 중앙위원회에서 8월 테제가 채택됨으로써 박헌영은 공산당의 조직과 노선을 장악했다. 그가 공산당의 장악력을 더욱 집중하려 애쓴 사실은 10월 8일 김일성과의 개성 회담에서 북조선분국의 설치를 승인하지 않으려 한 데서도 알아볼 수 있다. 그가 이를 결국 승인한 것은 동석했던 소련군 민정사령관 로마넨코의 권유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산당의 성세는 11월 5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의 결성으로 크게 떨쳤다. 사실 전평은 현장 노동자들의 자발적 운동으로 이뤄진 것이고, 그 조직 과정에 공산당의 개입은 별로 없었다. 10월 초 박헌영이 노동조합운동 지도자 7명과 회견했을 때 이렇게 당부했다고 한다.


“당으로서는 노조운동에 대한 아직 구체안을 갖지 못했다. 지금 직접 노동운동에 관계한 동무와 종래에 그 경험을 가진 동무만을 초청하여 이 사업을 부탁하니, 허성택-김대봉-박세영 3동지를 중심으로 가급적 빠른 기간 내에 운동을 성공시켜 주기 바란다.” (임경석, <이정 박헌영 일대기>(역사비평사 펴냄) 220쪽)


전평이 비록 공산당의 지도로 조직된 것은 아니지만, 그 간부 중에 공산주의자가 많이 있었고, 노동조합 전국조직으로서 유일한 좌익 정당인 공산당에서 정치적 배경을 찾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전평 결성대회에서 박헌영은 레온치오(세계노동회의 대표), 모택동, 김일성과 함께 명예의장으로 추대되었다. 이후 전평은 공산당을 지지하는 가장 강력한 전국조직이 되었다.


11월 12일 여운형의 인민당이 결성됨으로써 수십 개 정당 중 4개당이 메이저리그를 형성하게 되었다. 중도 좌우익의 인민당과 국민당, 그리고 좌익의 공산당과 우익의 한민당이다. 중도파 정당과 극단파 정당의 차이가 이제 분명해지는 것 같다. 중도파 정당의 무기는 말과 글뿐인 데 반해 극단파 정당들은 더 현실적인 힘을 키워가고 있었다. 한민당은 돈과 경찰력을, 그리고 공산당은 대중 동원능력을.


11월 2일 독립촉성중앙협의회 회의에서 박헌영은 친일파 배격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 이튿날 따로 기자회견을 열어 이에 관한 이견을 강조하기까지 했다. 공산당의 실력에 자신감을 가지고 다른 정당과 보조 맞추는 데 신경 쓸 필요 없이 나의 길을 가겠다는 것이었다.


박헌영의 자신감은 11월 17일 중국 언론 중앙사 특파원 쩡언보(曾恩波)와의 인터뷰에서 유감없이 표출되었다. 조선 전체 인구의 6분의 1인 4백만 명이 공산당의 영향 아래 있다고 그는 주장했다.


조선공산당은 8월 15일 이후로는 표면에 나타난 대중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어 그 세력이 급격히 발전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현재는 조선을 통하여 당원 및 공산청년동맹원의 수효는 1만5천 명에 달하였으며, 노동조합전국평의회에 망라된 노조원의 수는 50만 명이나 된다. 그리고 농민조합원의 수효는 3백만 명이고, 기타 민주주의적 청년단체는 그 중앙기관만은 준비중이나 이미 그 조직된 인원은 70만 명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임경석 위 책 242쪽에서 재인용)


11월 20일에는 반도호텔의 하지 사령관 접견실에서 뉴욕타임즈 존스톤 기자와 인터뷰를 했다. 이듬해 1월 5일 그의 기자회견을 취재해서 “박헌영은 소련의 일국 신탁통치를 지지하며 언젠가 한국이 소련연방에 편입되기를 바란다”고 보도해 물의를 일으킨 그 존스톤이다. 이 인터뷰에서 중경 임시정부에 대한 조선공산당의 태도를 존스톤이 묻자 박헌영은 임시정부가 한국 민중과 아무런 실제 연관도 갖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정부로 인정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임경석 위 책 243쪽)


20일은 김구 일행의 귀국 사흘 전이었고, 조선인민공화국의 전국인민위원회대표자대회가 3일간의 회의를 개회하던 날이었다. 박헌영은 임시정부와의 정면 대결 태세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바로 사흘 전 쩡언보가 김구에 대한 생각을 물었을 때의 대답보다도 더 직설적인 것이었다. 쩡언보에게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가 진보주의자이기를 바란다. 국내 민중은 사상적으로 몹시 진보되어 있으므로 보수적 방법론만으로 수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체로 해외 민족주의자의 결함이란 보수적이요 반소-반공적이어서 진보적 민주주의의 실천자로서는 부족한 점이 적지 않다.”(같은 책 243쪽)


Posted by 문천
2010. 11. 13. 16:00

아내가 한 열흘 계속해서 12시간 근무를 하는 중에 하루 겨우 쉬는 날인데, 나는 오늘 아니면 또 여러 날 어머니 가 뵙기 힘들다. 혼자 다녀오려는데, 자기는 두 달 가까이 뵙지 못했다고 따라 나서 준다. 좀 쉬어야 하지 않냐 했더니 자기한테 운전만 시키지 않으면 된다고.


마침 볕이 좋고 포근하기에 현관 앞 테라스에 모시고 나와 한 시간 가량 앉아 있었다. 직접 닿는 햇볕과 바람을 정말 좋아하신다. 순간순간을 즐기시는 기색이 역력하다. 말씀도 많이 안 하신다. 햇볕과 바람의 미묘한 변화에 따라 표정의 섬세한 변화를 일으키다가 한 마디씩 불쑥 꺼내거나 드리는 말씀에 대꾸하실 때는 말한다는 행위 자체도 즐거움으로 누리시는 듯하다.


잠깐 구름 끝자락이 해를 가렸을 때, “햇볕이 들어갔네요. 선선하지 않으세요? 이제 들어가실까요?” 했더니 “괜찮다. 이건 이것대로 좋구나.” 하며 편안한 웃음이 얼굴에 넘치신다. 해가 좀 기울고 나서 모시고 홀에 들어오니 텔레비전에 국악 공연이 나오고 있었다. 그것도 편안하게 구경하신다. “저게 어디냐?” 한 차례 물으시기에 “비원 같네요.” 하니까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관람을 즐기신다.


잠시 후 아내가 좀 쉬라고 권하기에 어머니 침대에 잠깐 눕는다고 누웠는데, 아내가 깨워 일어나 보니 저녁식사 시간이 다 되었다. 식탁에 앉아 계신 어머니께 인사드리고 나왔다. 오늘은 모시고 앉은 시간이 너무 짧아서인지 조금 서운한 기색을 보이셨지만, 나도 좀 아쉬운 마음이 있었지만, 눈 딱 감고 서둘러 떠났다. 아내도 나도 휴식이 필요하다.


너무 큰일을 벌여 놨다. <<프레시안>>에 <해방일기> 연재를 시작한 지 4개월째인데, 어떤 식으로 써 나갈지 아직도 생각할 점이 많다. 앞으로도 두 달 정도는 전력을 집중해야 좀 편안하게 일을 해나갈 틀이 잡힐 것 같다.


이곳에 모셔놓고 16개월간 찾아뵐 때마다 방문기를 적던 습관이 한 달 전에 끊어졌다. 10월 14일과 11월 3일 방문기를 쓰지 못했다. 책으로 묶어 낼 방침을 세운 것 때문에 생각이 복잡한 것도 한 이유지만, 더 큰 이유는 기력이 달리는 것이다. 만족스럽게 글을 풀어낼 만한 시간이 하루에 몇 시간 안 된다. 기운이 모자라면 문장 하나하나가 꼬여버린다.


정말로 제일 큰 이유는 방문기를 적을 동기가 이제 전처럼 절실하지 못한 데 있는 것이 아닐까? 2년 전 병원 계실 때 ‘시병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어머니가 예상외의 회복 기미를 보이시는 데 고무되어 미국의 형을 비롯한 주변사람들에게 어머니 모습을 전해드리기 위해서였다. 그 후 어머니께서 보여주시는 놀라운 회복에 찬탄하는 마음으로 글을 써 왔다. 출판 방침을 세우고 글을 모아보니 원고지 1,300매 분량이나 된다.


‘일기’는 우리 집 전통이 되었다. 아버지 전쟁일기가 <역사앞에서>로 출간되어 널리 알려졌지만, 어머니 ‘육아일기’도 오래 전에 조금 본 기억으로 가치가 큰 기록 같은데 쓰러지신 후 소지품 정리하면서 찾지 못했다. 내 ‘시병일기’가 그 전통을 잇는 셈인데, 게다가 역사평론 작업까지 <해방일기>란 이름으로 하고 있다.


‘일기’란 것이 원래 제 일기 자기가 쓰는 것인데, 육아일기는 아이들 일기를 어머니가 써주는 셈이고, 시병일기는 어버이 일기를 자식이 써드리는 셈이다. 독립된 삶을 살지 못하는 상대를 보살펴주면서 적는 기록이다. 아버지 전쟁일기도 그분 개인의 일기가 아니라 이 사회를 위한 기록이었는데, 전란에 휩쓸려 사회의 올바른 기록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는 상황 때문에 나서서 적으신 것이었다.


학교 들어가 자기 친구들과 어울려 자기 인생 사는 아이의 육아일기를 어머니가 써준다는 것은 잘 상상이 되지 않는 일이다. 시병일기도 어머니가 독립적인 생활을 못하시는 상황에서 적던 것이다. 요양원 가셔서도 생활능력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시병일기 쓰던 습관을 이어서 방문기를 계속 써 왔는데, 요즘 들어서는 좀 실없는 짓이란 느낌이 든다.


요즘도 어머니 모시고 있는 시간이 즐겁고 재미있다. 삶에 대한 생각과 느낌을 많이 확인받을 수 있고, 더러 새로운 깨우침도 얻는다. 그러면 됐지, 그걸 적어서 뭘 하나. 그분은 이제 내가 대변해 드리지 않아도 당신 마음을 충분히 표현하며 지내신다. 어머니 상황이 궁금하면 내 글 읽을 필요 없이 찾아가 뵈면 되고, 잘 아는 분들 같으면 전화만 드려도 된다.


2008년 11월 24일 시병일기를 시작하던 첫 대목을 다시 들여다본다.


“며칠 전부터 정신이 많이 맑아지신 것 같다. 영양상태, 혈액순환 등 건강의 기본조건이 안정되신 덕분인 것 같다. 그러나 큰 회복을 바랄 일은 아니라고 마음을 다잡는다. 두 달 되었나? MRI 뇌 촬영을 한 후 한 선생도 ‘뇌가 쪼그라드신다’는 표현으로, 뇌 세포의 신진대사가 거의 막힌 본격적 노쇠현상이니 이제 더 다른 검사를 해 드릴 필요도 없을 것이라고, 체념을 권했었다.


그래도 좋아지신 상태가 1주일 가까이 유지되니 반갑지 않을 수 없다. 지난 서너 달 동안 사람 못 알아보시는 것은 물론, 주변 상황을 어렴풋이나마 인식하는 상태를 반시간도 유지하지 못하시던 분이 눈알을 또록또록 움직이시고, 주변의 배려를 느낄 때는 입술을 오므려 웃음도 띠신다.”


그 시점에서 나는 어머니가 당신 인생을 다시 누리게 되리라는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다. 떠나실 날을 앞두고 괴로움이 덜하신 것, 조금이나마 마음을 표현하실 수 있는 것이 고맙고 반가울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침대와 휠체어를 떠나지 못하면서도 주변사람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베풀어주며 지내고 계시다. 세종너싱홈 직원들의 억지 공치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누구든 어머니 얼굴을 몇 초만 바라보면 알 수 있다.


생각하면, 떠날 날을 앞두지 않고 있는 인생이 어디 있겠나. 물이 절반 담긴 그릇을 보며 “절반 밖에 없군!” 할 수도 있고 “절반이나 있네!” 할 수도 있는 것이 사람이다. 떠날 날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 못할 때 “언제고 만회할 길이 있겠지.” 하는 생각으로 스스로 납득할 수 없는 짓을 저지르곤 했었다. 수십 년 동안 불효자 노릇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그래서였다.


그런데 어머니가 떠나실 날 앞두고 계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됐다. 어머니를 정성껏 모시게 되면서 다른 일도 생활도 정성껏 하게 되었다. 어머니만이 아니라 나 자신도 떠날 날 앞두고 있음을 깨우친 것이다. 청개구리 중에도 이 미련한 청개구리 깨우쳐주느라고, 참 수고 많으셨습니다, 어머니.


늘 좋아하시는 이 노래 오늘 불러드릴 때는 아주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계셨다.


“송아지, 송아지, 멍청송아지

엄마소도 멍청소, 엄마 닮았네.

강아지, 강아지, 신통강아지

엄마개도 신통개, 엄마 닮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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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