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항복 당시 연합국들은 한국에 신탁통치를 행한다는 합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 계획이 구체화되기 전에 일본이 항복했기 때문에 잠정적으로 미군과 소련군이 분할 점령하게 된 것이었다. 따라서 점령은 신탁통치를 준비하는 단계였다.


분할 점령 단계에서 지역 별로 정부 조직을 만드는 것은 점령군의 권한을 넘어서는 일이며, 분할을 분단으로 고착시키는 길이었다. 한국 분단의 책임을 놓고 미국과 소련 어느쪽이 점령지역의 단독정부 수립에 앞장섰느냐를 따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단독정부 못지않게 분단 고착을 지향하는 조치가 단독군대 설립이다. 미군정은 ‘경비대’라는 이름으로 남한의 군사조직을 만들었다. 1946년 초 하지가 김석원에게 경비대 참여를 권하면서 “경비대는 (...) 정부가 수립될 경우 국군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 (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234쪽) 이 “국군”이 통일국가의 국군을 말한 것인지, 분단국가의 국군을 말한 것인지 분명치 않지만, 일본군 장교 출신을 주축으로 경비대를 만든 것을 보면 민족국가의 국군을 지향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분단 건국 후 이 경비대에서 출발한 대한민국 군대는 미국의 영향력을 한국에 작용시키는 중요한 통로가 되었다. 그러나 미군정이 경비대를 만들 때는 그런 의미로 중시한 것이 아니었다. 경찰력으로 남한 사회의 통제가 충분치 못해서 그 보조수단으로 만든 것이었다.


북한에서 소련군이 질서 유지의 일선 책임을 인민위원회에 맡긴 반면 남한의 미군정은 경찰력에 의지하려 했다. 경찰을 지휘하는 일본인들의 역할을 미군이 넘겨받으면 해방 전과 같은 통제력을 확보할 수 있으리라고 상상한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해방 전 경찰의 간부직을 채우고 있던 수만 명 일본인의 역할을 대신할 능력이 미군에게 없었다.


뿐만 아니라 경찰의 권위가 땅에 떨어져 있었다. 경찰의 과거 역할에 대한 주민들의 반감 때문에 미군 진주 당시 한국인 경찰관의 80%가 출근하지 못하고 몸을 숨기고 있었다. 억지로 불러내고도 웬만한 자리에는 경찰관들을 보호하기 위해 미군이 동행해야 할 지경이었다. 미군을 보호하기 위해 한국 경찰이 동원되는 요즈음과는 반대 상황이었다.


미군 배치가 끝나지 않은 해방 후 몇 달 동안의 권력 공백 상태에서 자생적으로 나타난 치안조직 중에는 군사적 성격을 가진 것도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9월 17일 이혁기가 앞장서 만든 국군준비대였다. 10월 15일 경찰과 미군이 남원 인민위원회를 탄압할 때 국군준비대 지부가 항쟁 주체로 나선 일을 보면 국군준비대는 지방조직을 갖추고 인공과 연결되어 있던 단체였다.


11월 9일에는 기존 군사조직을 통합하는 ‘전국군사준비위원회’ 결성 발표가 있었다. 이름의 ‘준비’라는 말이나 부위원장 임시대리 이혁기의 이름으로 보아 국군준비대가 중심이 된 움직임 같다. 이 위원회의 이름은 다시 보이지 않고, 12월 26-27일 국군준비대 대회에는 재경 대원 약 300명과 지방 대표 161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9월 17일자, 11월 9일자, 12월 26일자 각 기사 참조)


이런 군사조직이 미군정에게는 당연히 눈엣가시였다. 하지는 10월 하순 경찰 총수로 내정되어 있던 조병옥에게 군사조직 해체를 지시했는데, 조병옥은 이 지시를 거부하며 미군정이 공식적 군사기구를 만들어 기존 군사조직들을 흡수하도록 건의했다. 11월 13일 28호 법령으로 군사국을 설치한 것은 조병옥의 건의가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인다.


법령 제28호

第1條 국방사령부의 설치

朝鮮의 종국의 독립을 준비하며 세계국가에 의하여 조선의 주권과 대권의 보호, 안전에 필요한 병력을 급속히 준비하며, 민관안녕의 유지와 민간의 무질서에 대하여 민권을 옹호하는 민간경찰기관의 보조 及 종교 언론의 자유, 재산권을 유지하며 필요한 육해군의 소집, 조직, 훈련, 준비를 시작하며, 국민의 정부혁명을 보호키 위하여 玆에 조선군정청국방사령부를 설치함.

第2條 군무국의 창설 及 육해군부의 설치

조선정부군무국을 정부의 국으로서 창설함. 군무국내에 육군부 해군부를 設置함. 현존 경무국, 군무국은 국방군사령부의 감독지휘 하에 置함.

第3條 경찰군사기관의 금지

여하한 자와 단체라도 여하한 종류의 경찰, 육해군 군사활동의 소집, 훈련, 조직, 준비 及 경무, 군무국의 관할에 속하는 행동을 행사치 못함.

단 국방사령관 혹은 국방사령관이 인정한 其 권리부여 대행기관의 서면인가를 得할 시는 제외함.

第4條 벌칙

本令의 조규에 위반한 자는 군정재판에 의하여 처벌함.

第5條 시행기일

本令은 1945年 11月 13日 오전 0시부터 유효함.

1945年 11月 13日

재조선미국육군사령관의 지령에 의하여

조선군정장관

미국육군소장 A. B. 아놀드

군정청법령 제28호 1945년 11월 13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조병옥(1894~1960)은 당대의 대표적 친미파였다. 천안 출생으로 선교사 학교인 공주영명학교와 숭실-배재-연희를 거쳐 1914~1925년간 미국에 유학, 컬럼비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귀국 후 연희전문과 조선일보에 재직했고 두 차례 옥고를 겪었으며, 1940년대에는 광산업을 경영하며 창씨개명을 거부하는 등 일본 제국주의에 비협조의 길을 지켰다고 한다.


한민당 주류 세력으로는 비교적 깨끗한 이력서를 가진 데다 미국을 잘 알고, 마침 어린 시절 영명학교에서 함께 놀던 선교사 아들 윌리엄스 소령이 하지 사령관의 고문으로 있던 덕분에 미군정-한민당 유착관계의 핵심적 인물이 되었다. 그가 군정청 경무국장으로 정식 임명된 것은 이듬해 1월 13일의 일이지만, 10월 20일경부터 실질적으로 경무국장 역할을 맡은 것으로 보인다.


경무국장으로서 조병옥은 극단적 좌익 탄압을 주도했을 뿐 아니라 극도로 권위주의적인 기행(奇行)으로 많은 일화를 남겼다. 11월 14일 성북서 서장이 이승만이 머물던 돈암장 경호를 충실히 하지 않는다고 "공산당원인 까닭에 이박사의 사저를 경호하지 않았다"며 질책, 유치장에 넣으라고 호령해서 물의를 일으킨 것이 단적인 예의 하나다.


같은 날 더 재미있는 일도 하나 벌인 것이 있었다. 좌익과 싸우기도 바쁜 판에 식당 주인들에게까지 달려들었다가 성북서장 질책 사건까지 겹쳐 일시 군정청에서 파면까지 당했다.


경기도 趙경찰부장은 지난 14일 오후 1시 明月館, 國一館, 松竹園, 東明館의 각 경영자를 불러 놓고

1) 온돌을 마루방으로 고치고 탁자와 의자를 사용하여 조선식을 폐지하고 서양식으로 할 것

2) 요리 또한 재래식을 폐지하고 서양식으로 하되 고기 닭 스프 등 몇 종으로 간단히 할 것

3) 이상 두 가지를 3일 이내로 실시하라고 명령하여 요리업계에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데 이에 대하여 국일관 주인 金政勳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경찰부장으로부터 (略) 군들은 이상의 두 가지 명령에 절대 복종치 않으면 안 된다고 엄명을 받은 후 서로 협의하였으나 도저히 이행할 수 없는 고로 다음과 같은 결의문을 첨부하여 16일 정오경 경찰부장에게 제출하였다.

가) 10여 년간 장식 기구 기타 제반설비를 조선식 본위로 구성한 것이므로 급속한 개조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나) 요리도 조선식 본위로 하여 제반기구와 요리사 종업원까지 모두 이에 의하여 조직된 것이므로 시급히 서양요리를 만들 수 없다.

다) 손익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대중의 요망과 경향에 순응치 않을 수 없다.

라) 조선식 요리는 민족적 역사적 특징이다. 따라서 이를 발달시키는 데 우리의 사명도 있다.

마) 적당한 장소와 건물에서 새로이 서양식 요리를 만들라면 이 명령에 성심으로 응하겠다.”

자유신문 1945년 11월 17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군정기 극우파의 총아 조병옥이 이승만 경호를 위해 어떤 정성을 쏟았는지, 당대 최고의 요정들이 어떤 식으로 영업을 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는지 살펴봄으로써 당시 극우파의 속성에 대해 약간의 이해를 얻을 수 있는 것 같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