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정청 정치 고문 윌리엄 랭던은 11월 20일 국무장관에게 보낸 전문에서 한국 신탁통치에 대한 반대 의사를 밝혔다. 맥아서 사령부와 주한 군정청 사이에 한국을 국제 관리에 맡기는 신탁통치보다 미국의 직접 영향력을 지키고 키우기 바라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온 것이 공식적으로 제기된 것이다. 요점은 이런 것이었다. (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480-481쪽에서 재인용)


(1) 사령관은 김구로 하여금 군정 내에 몇몇 정치 그룹을 대표하는 회의(council)를 조직하게 해서 조선의 정부 형태를 연구-준비하게 하며, 정무위원회(Governing Commission)를 조직하라고 지시한다. 군정은 이 위원회에 시설과 조언, 활동자금을 제공한다.

(2) 정무위원회는 군정(현재 전한국의 조직으로 급속히 수립되고 있음)과 통합한다.

(3) 정무위원회는 과도정부로 군정을 승계하며, 사령관은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미국인 감독관과 고문들에 대한 임명권과 거부권을 보유한다.

(4) 정무위원회는 국가의 수반을 선거한다. [주] 위 계획에 앞서 소련 측에 통보해야만 하며, 회의(council)는 정무위원회의 구성원으로 지명한 소련 지역 내 인사들이 서울에 오게 해 정무위원회를 강화할 수 있도록 소련 측을 초청해야 한다. 그러나 소련 측의 참여가 준비되지 않는다면, 계획은 38도 이남의 한국에서만 실행되어야 한다.


미국의 대외정책 분위기는 다변주의(국제주의)에서 일방주의(국가주의)로 옮겨가고 있었다. 다변주의 원리에 입각한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이 ‘랭던 제안’은 분명한 일방주의 기조를 보여준다. (4)항의 [주]에서 소련 측에 “통보”한다고 한 점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원칙적으로 한국의 국가 건설 방침은 점령군의 소관이 아니라 연합국 회의에서 결정할 일이었다. 포츠담회담에서 일본 항복 후의 사태 처리를 위해 3국의 외상회담을 열기로 결정했었고, 이에 따라 12월 16일 모스크바 3상회담이 열릴 참이었다. 설령 어느 정도 준비사항을 점령군이 결정한다 하더라도 두 나라 점령군이 ‘협의’할 일이지, 한 쪽에서 결정해 다른 쪽에 ‘통보’할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 랭던 제안은 과도정부 수립 방법을 미국이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소련에 통보해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미군 점령지역 안에서 실행하자고 주장한 것이다. 실질적 ‘분단 건국’의 기본 방침이 공식적으로 제기된 것이다.


(1)항에서 “김구로 하여금”이라 하여 임정 아닌 김구 개인을 명시한 뜻이 무엇일까. 미군정은 군정청 외의 한국 내 정부조직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밝혀 왔다. 그러나 임정 환국이 박두한 이 시점에서 미군정이 원하는 과도정부 수립에 임정을 활용하고는 싶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임정의 조직이 과도정부의 조직으로 연결되는 것은 바라지 않은 것이다.


여기에서도 이승만의 냄새를 맡는 것은 내가 그를 너무 용하게 보는 탓일까? 임정에 대한 이승만의 태도에는 모순되는 면이 있었다. 그는 독립운동가로서의 명망을 임정에 의지하고 있으면서도 임정 활동을 지속하지 못한 데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다. 그래서 임정의 권위는 떨치되 임정의 실력이 살아나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며칠 후 김구가 입국해 처음 만난 사람이 이승만이었다는 사실에서도 이승만이 군정청과 임정 사이의 관계에 어느 정도 통제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아볼 수 있다. 군정청은 임정 요인들의 귀국을 일체 비밀로 했기 때문에 그들이 경교장에 들어가 앉을 때까지 기자들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알고 있었던 것은 군정 당국자들과 이승만 뿐, 아마 한민당 요인들도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이 시점까지 이승만보다 임정에 더 큰 기대를 걸고 있었으므로 알았다면 바로 뛰어왔을 것이다.


이승만은 11월 19일 기자회견에서 이런 담화를 발표했다.


중경 임시정부의 환국 문제로 소란한 모양이나 하지 중장에게 반드시 연락이 있을 터이고 나도 알게 될 터이므로 책임 있는 발표가 있을 때까지 환영 소동은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

獨立促成中央協議會는 착착 진행되어 가는 중으로 지방적으로(例하면 慶南과 富平) 지방조직이 점차 결성되어 감으로 觀하고 있다. 국제적으로 문제가 되었던 소위 신탁통치 문제는 점차로 식어가는 모양으로 조선에 대하여 신탁통치 운운은 아마 꼬리를 감추는 것 같다. 38도 문제도 조만간 해결될 것으로 볼 수 있다. 미소 양국의 진주군사령관 사이의 협의가 진행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관계국 정부 사이에 해결책이 진행되든지 좌우간 협의를 진행시켜 해결을 하려고 그들이 노력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때에 우리는 더욱 힘을 합치고 일을 모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마디 부탁할 것은 儒敎, 佛敎 등의 종교단체가 활발히 움직이는데 기독교들만이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알 수 없다. 3·1운동 당시보다도 더 활발한 움직임이 있기를 바란다.

자유신문 1945년 11월 20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환영 소동은 그만두어야 할 것”이라고 그가 말했고, 군정청은 환영 소동이 없도록 조치를 취했다. 23일 김구가 상해에서 비행기를 타기까지 이승만이 미군정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얼마나 과시했는지 모르지만, 도착 후 경교장에 들어앉아 이승만의 방문을 맞을 때까지 누구도 자기 도착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승만의 도움 없이는 아무 일도 해나가기 어렵겠다는 인상을 받지 않았을까.


랭던 제안이 나오기 전날 이승만은 “신탁통치 운운은 아마 꼬리를 감추는 것 같다.”며 연합국 회담보다 점령군의 역할을 더 기대하는 태도를 보였다. 형식적으로는 소련군도 포함하는 점령군이지만, 실제로 그가 역할을 기대한 것은 물론 미군이었다. 10월 중순 귀국 길에 도쿄에서 맥아더, 하지, 애치슨과 만났을 때부터 일방주의 노선은 설정되어 있었고, 이 노선이 랭던 제안으로 표출되기까지의 과정에서 이승만의 역할은 이 담화문으로도 짐작되는 것이다.


미국의 임정 불인정은 전쟁 중부터 계속되어 온 방침이었다. 그 중요한 이유의 하나는 소련과의 관계에서 균형을 유지하려는 데 있었다. “1942년 4월 헐 미 국무장관은 루즈벨트 미 대통령에게 제출한 각서에서 임시정부를 승인할 겨우, 소련은 이데올로기적으로 밀접한 관계가 있는 한국의 여타 독립운동단체를 지원할 가능성이 있음을 지적하였다.”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181쪽)


1945년 11월 시점에서 일방주의 정책노선을 제안하는 미군정 입장에서는 더 이상 고려할 필요가 없는 이유였다. 당시의 임정이 1942년 이래 어느 정도 좌우합작을 이루어 좌익을 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군정 당국자들의 마음에 다소 걸렸을 수 있지만, 진주 이래 접해 온 한민당 인사들의 보장으로 그런 의혹은 충분히 불식되었을 것이다. 귀국 자체는 개인 자격으로 하더라도, 과도정부 수립 과정에서 임정 조직을 일부 활용하는 것은 미군정 입장에서 꺼릴 필요가 없는 방안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랭던의 전문에 임정 아닌 김구 개인이 명시된 것은 첫 단계에 만들 회의체로 이승만이 주도하는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를 고려하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0월 중순 맥아더와 함께 하지를 만난 이래 군정 당국자들의 이승만 존중은 극진한 것이었다. 12월 중순 모스크바 3상회담 전까지 독촉을 통해 이 회의체를 만들려는 이승만의 노력은 군정청의 전폭적 지지를 받았다. 신탁통치의 대안으로 자치조직을 서둘러 만들려는 군정 당국자들의 욕심과 김구를 제치고 주역을 맡으려는 이승만의 의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