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까지 수십 년 동안 조선은 일본의 절대적 영향 아래 놓여 있었다. 일본의 항복으로 사정이 갑자기 달라졌다. 미국과 소련의 점령군이 큰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으나 일본의 영향력을 대체할 만한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고, 한국인 자신의 노력이 한국의 장래를 스스로 결정할 여지가 식민지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이 커졌다.


해방공간에서 한국의 진로가 결정되어 나가는 데는 미국과 소련의 작용, 그리고 한국인들의 행위가 주된 변수로 인식되어 왔다. 이 인식에는 이론의 여지가 별로 없는 듯하다. 하지만 일본의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일까? 오랫동안 절대적 영향력을 가졌던 일본의 존재가 주변적 요소로라도 작용을 계속했을 듯한데, 지금까지 한국인의 인식에서는 너무 무시되어 온 감이 있다.


일본 정부는 1945년 9월부터 1952년 4월까지 맥아더가 이끄는 연합군사령부(GHQ)의 통제 아래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GHQ가 일본 정부 역할을 맡고 있었다. GHQ의 역할과 그에 뒷받침된 일본의 변화에 대한 고찰은 냉전적 사고에 제약받아 오다가 냉전 해소 후 새로운 차원에서 전개되기 시작했다.


그런 작업의 성과인 1999년 존 다우어의 <패배를 껴안고>(최은석 옮김, 민음사 펴냄)와 2000년 허버트 빅스의 <히로히토 평전>(오현숙 옮김, 삼인 펴냄)을 보며, 우리 해방공간의 고찰에도 같은 시기 일본의 사정을 감안할 여지가 꽤 많다는 생각을 한다.


일차적으로 GHQ의 일본 정책이 한국 미군정에 끼친 영향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GHQ는 원래 미국 한 나라가 아니라 여러 연합국을 대리하는 기관이었지만 실제로는 ‘미국의, 미국에 의한, 미국을 위한’ 기관으로 기능했다. 그러면서도 현실적으로는 일본의 필요를 총족시키는 ‘일본 정부’의 역할도 겸한 것이었다. GHQ의 정책 결정이란 기본적으로 일본의 필요와 미국의 이익을 맞추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남한을 점령한 미육군 24군단은 GHQ의 예하부대였다. 그리고 24군단 하지 사령관은 맥아더와의 관계를 연합군이 아닌 미군 지휘계통 내의 상하관계로 인식하고 있었다. 맥아더는 남한에서 정책과 조치에 대한 하지의 지시 요청에 일률적으로 “귀관의 판단을 믿고 맡긴다.”며 일임했지만, 하지는 맥아더의 의중에 맞추는 것을 언제나 판단의 첫째 기준으로 삼았다. GHQ와 남한 군정청의 관계는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 사이의 관계를 이어받은 것이었다.


GHQ가 일본 정부를 그대로 두고 ‘지령’으로 통제하는 간접통치 방식을 취한 반면 남한 점령군은 직접 군정을 시행했다. 정병준은 <한국전쟁>(돌베개 펴냄) 134쪽에서 “군정 실시가 당연시되었던 일본에는 기존의 통치조직을 활용하는 간접통치 방식이 적용된 반면, 준 우호국민으로 간주한다던 남한에만 철두철미한 군정이 실시된 정확한 이유는 분명치 않다.”고 의문을 표했다.


편의에 따른 결정으로밖에 생각할 길이 없다. 일본을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끌고 가느냐 하는 것이 맥아더에게 중요한 문제였고, 한국의 진로는 훨씬 부차적인 문제였다. 미육군 군정학교는 1944년 6월부터 1945년 10월까지 총 1,650명의 장교를 훈련시켰는데, 훈련생들은 7개월 반에 걸쳐 일본어와 지역 사정을 집중적으로 학습했다. 그러나 일본 진주 후 군정 불실시 방침이 결정되자 필요 없게 된 많은 요원들이 남한 군정 요원으로 배치되었다. 군정학교의 성과를 무위로 돌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남한의 군정 실시가 필요했던 것 같다. (정병준 위 책 135-137쪽)


기존의 조치를 정당화하려는 동기는 관료주의화된 조직에서 흔히 나타난다. 군정학교 성과의 활용 정도보다 훨씬 더 심각한 사례를 빅스는 일본의 전후 처리 과정에서 지적한다.


펠러스는 일본인 전쟁 지도자 약 40명을 개인적으로 신문했다. 이중 여러 명이 나중에 핵심 A급 전범으로 고발되었다. 신문은 주로 도쿄의 스가모 구치소에서 1945년 9월 22일부터 1946년 3월 6일까지 5개월 넘게, 통역 두 명을 두고 이루어졌다. 펠러스의 활동은 주요 전범 용의자들 모두가 GHQ의 특별한 관심사에 촉각을 곤두세우게 했고, 그들은 천황이 기소를 면하도록 협심하여 각본을 짜게 되었다. 검찰관들이 이들을 재판할 때 사용할 증거를 수집하고 있을 때, 펠러스는 무심결에 용의자들을 도운 셈이었다. 검찰관들은 곧 기소된 전쟁 지도자들이 하나같이 사실상 똑같은 내용을 진술하는 것을 알았다. 곧 천황이 전쟁을 끝내려고 몸소 영단을 내리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야말로 (검찰관들은 몰랐으나) 대일 선전 활동의 효과를 실증해 보이려는 펠러스의 목적과 일치했다. (빅스 위 책 645쪽)


펠러스 준장은 맥아더의 참모로서 종전 직전에 전단 살포를 통한 심리전을 주도한 사람이었다. 전범 신문의 기회를 가진 그는 심리전의 효과를 뒷받침하는 증언을 유도하려 애썼다. 그 의도를 알아챈 전범들은 이에 편승해 천황의 무죄를 주장하는 증언을 엮어냈다. 심리전의 목적대로 항복을 원하는 민심이 일어났고, 천황이 이 민심에 입각해 전쟁을 끝내는 ‘성단(聖斷)’을 내렸다는 것이다. 전범들은 일본제국의 최후의 보루로 천황을 보호하고 싶었고, 펠러스의 도움으로 엮어낸 증언을 통해 그 뜻을 이뤘다.


GHQ의 일본 통치는 군국주의 근절을 최고의 목표로 한 것이었다. ‘평화헌법’은 그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과거 청산’ 작업은 최소한의 형식도 갖추지 못했다. 전범 재판은 엉망이 되었고, 군국주의의 알맹이 중의 알맹이 천황제와 히로히토는 자리를 지켰다. 제국주의의 본산 일본에서 과거와의 타협은 주변부인 한국에서 식민지 통치체제의 존속을 위한 배경이 되었다.


다우어가 본 GHQ 통치의 기본 속성은 남한 군정에서도 똑같이 나타난 것이었다. (다우어 위 책 21쪽)


1930년대 초부터 1952년에 이르기까지 일본은 여전히 기본적으로는 군부 통치 아래 놓여 있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 정신이 아무리 고상했을지라도 맥아더 장군을 비롯한 휘하 사령부는 새로이 손에 넣은 영토를 신식민지 군주 같은 태도로 지배했고, 어떠한 도전이나 비판도 용납하지 않았다. 이런 행태는 예전에 천황과 그 휘하 관리들이 보이던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미 점령군은 위계질서의 화신이었다. 이 위계질서는 단지 패전국 일본에 대해서만 적용된 것이 아니라 백인이 지배한다는 원칙과 더불어 계급으로 세분된 그들 조직 내부에도 엄연히 존재했던 것이다.

하지만 점령의 가장 악질적인 유산은 일본 제국주의의 최대 희생자인 아시아 인들의 존재가 패전한 일본 땅에서 철저히 무시되었다는 데 있다. 중국인, 조선인, 인도네시아 인, 필리핀 인들은 종전 후 일본에서 제대로 된 역할도, 제대로 된 영향력도 갖지 못한 채 그저 투명 인간 취급을 받았다. 제국 육해군을 패퇴시키는 데 아시아 인들이 수행한 역할은 ‘태평양 전쟁’에서의 승리의 영광을 독차지한 미국의 그늘 아래 감추어져 버렸다. 아시아 인들에게 돌아갈 영광이 공기 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처럼, 식민지화와 전쟁을 통해 그들에게 저질러진 갖가지 범죄들은 더더욱 쉽사리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5월에 독일이 항복할 때 미국은 자신을 연합국 중 하나로 여겼다. 혼자 힘으로 얻은 승리가 아님을 인정했다. 그러나 8월 일본의 항복은 다른 연합국에게 공로를 나눠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었다. 진주만 기습 이후 44개월에 걸친 ‘태평양전쟁’에서 일본 군사력을 꺾은 것이 미군이었고, 최후의 항복을 받아낸 것도 미국 원자탄이라고 맥아더와 휘하 장병들, 그리고 많은 미국인들이 생각했다.


그들에게는 승자의 아량도 승자의 오만도 미국만의 것이었다. 다른 연합국들은 미국의 실력과 공로를 존중하고 그 주역을 거들어주는 한도 내에서 의례적 대접을 받을 조연일 뿐이었다. 이 태도가 일본에서 통했다. 일본처럼 강한 적에게도 통하는 태도가 한국처럼 약한 나라에서 통하지 못할 리가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한국 사정을 세심하게 살필 필요도 느끼지 않고 군정에 임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