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경제침략의 주역이던 동양척식을 1945년 11월 11일 군정청이 ‘신조선회사’로 개편할 때 한국인들은 식민지시대 탈피의 기대감에 부풀었다. 개편 방향은 아직 막연했지만, 10월 5일 최고소작료를 3분의 1로 제한한 법령 제9호에서 농업 부문의 모순을 해결하려는 의지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십년이란 긴 동안 우리 농민의 피를 빼앗고 살을 깎아 오던 동양척식회사도 해방과 함께 착취기관으로서의 기능과 성격을 완전히 씻어버리고 명칭도 新朝鮮會社라고 변경하여 조선농촌의 재건과 조선을 복리시키는 기관으로 새 출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 회사의 전 재산은 군정청 관리로 되어 일본인 직원 967명도 전부 파면하고 조선사람의 손으로 강력하고 자유로운 독립 신조선을 건설하는데 전력을 경주할 터이라고 한다. (<중앙신문>, <매일신보> 1945년 11월 11일, 12일자)
그러나 백여 일이 지난 1946년 2월 21일 법령 제52호로 신조선회사를 ‘신한공사’로 바꿀 때는 동양척식의 구조와 기능에 근본적 변화를 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났다. 일본인의 동양척식 지배를 미군정이 대치할 뿐이었다.
이북에서는 임시인민위원회가 세워져 토지개혁의 막바지 준비가 진행되고 있을 때, 이남에서는 일본인 소유 토지의 군정청에 의한 관리가 강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인과 일본기관 소유 농지는 토지개혁의 첫 번째 과녁이었다. 사회주의적 토지소유 원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농민의 참상을 전면적으로 개선할 필요에는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일본인 소유 농지는 내국인의 사유재산권을 침해하지 않고도 이 필요에 부응할 수 있는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한민당조차 1945년 9월 16일 결당식에서 발표한 정책 8개항 중에 “토지제도의 합리적 재편성”을 넣고 있었다.
농촌문제의 구조적 개선을 위한 미군정의 유일한 조치가 법령 제9호의 소작료 제한이었다. 그러나 이 조치에도 실효성이 없었다. 식민지시대 말기 소작료가 8할을 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6할 정도였다. 3분의 1로 제한한다 하더라도 강력한 시행으로 뒷받침하지 않으면 지주가 강자이고 소작인이 약자인 현지 실정에서 엄격히 지켜질 수 없었고, 지켜진다 하더라도 수리(水利) 등 제 비용이 경작자에게 전가되어 실질적인 소작료 차이가 크지 않았다. 게다가 공산품 가격이 치솟는 가운데 쌀의 자유로운 판매를 가로막다가 미곡수집령에 이르게 되면 이남 농민들의 경제적 상황은 식민지시대보다도 더욱 악화되어 있었다.
이북에서 1946년 3월 시행된 토지개혁은 새로운 정치체제의 확립을 위한 계기에 앞서 대다수 주민들에게 식민지시대를 벗어난 ‘새 세상’의 실현이었다. 구체적이고도 획기적인 현실 변화를 겪으며 이북 주민들은 개혁에 대한 자신감과 지도체제에 대한 신뢰를 얻게 되었다. 독립 건국을 위한 최대의 인프라였다.
동양척식을 신한공사로 연결시키는 단계에서 미군정은 토지개혁에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토지개혁을 향한 안팎의 압력이 늘어났다. 이북의 개혁을 본 이남 주민들의 요구가 갈수록 강해졌을 뿐 아니라, 미 국무부도 일본과 중국 등의 상황을 보며 토지개혁의 필요성을 심각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그래서 1946년 말부터는 토지개혁이 미군정의 중요한 과제가 된다.
이북의 토지개혁과 이남의 개혁 논의 과정은 앞으로 진행에 따라 설명해 나가겠거니와, 지금은 토지개혁의 필요가 어떤 상황에서 제기되고 있었는지 한 차례 개관해 둔다. 통계자료 등 기본적 사실은 따로 표시하지 않는 경우 황한식의 “미군정하 농업과 토지개혁정책”(<해방전후사의 인식 2> 284-329쪽)을 참고로 하는 것이다.
농가호수 중 소작농의 비율은 1919년의 37.6%에서 1942년의 53.8%까지 늘어나 있었다. 약간의 자기 농지를 가진 자소작농 비율은 같은 기간 동안 39.2%에서 23.9%까지 떨어졌고, 자작농 및 일부 농지를 소작인에게 맡기는 자작지주의 비율은 22.5%에서 17.3%로 떨어졌다. 그 동안 농지 중 소작지 비율은 50.8%에서 58.3%로 늘어났다. 남쪽의 토지집중이 더 심해서 1945년 말에는 이남 지역 논의 70%와 밭의 56%, 평균해서 농지의 63.4%가 소작지였다.
농업국가에서 농지 소유의 과도한 집중은 체제의 지속성을 위협한다. 1919년의 농지 소유 분포는 이미 농업국가 유지가 어려운 과집중 상태였다. 농민이 전통시대보다도 열악한 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식민지시대 동안 상태가 더욱 악화되었다. 악화된 상태를 폭력적인 공권력으로 지탱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어떤 부문보다 농업 부문에서 저항운동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농촌사회의 이러한 극심한 억압상태를 흔히 ‘식민지반(半)봉건성’으로 설명한다. 제대로 된 근대화라면 중세적 봉건성을 극복해야 할 것인데, 주체적 근대화의 길이 가로막힌 식민지 상황에서는 봉건성 중 지배자에게 편리한 요소들이 악용됨으로써 봉건성의 극복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다. 식민지 조선의 농업 분야에서는 농민의 예속상태라는 봉건성이 쌀의 증산이라는 식민지배자의 필요에 맞춰 온존되고 심화된 점을 지적한다.
그런데 ‘반봉건성’이란 말이 ‘오용’은 아니라도 ‘남용’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중세적 봉건성을 부정적으로만 보던 근대 초기의 진보주의 관념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아서다. 식민지 상태가 독립 상태보다는 못해도 전근대 상태보다는 좋아진 것 아니냐고 하는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의 주장도 이 관념에 근거를 둔 것이다. 이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는 식민지시대 모순의 심도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중세적 봉건성에는 피지배자에게 유리한 측면도 있었다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진보주의 관념에는 전근대인 대다수를 인간 이하의 존재로 보는 문제가 있다. 극소수 지배자에게만 유리한 체제를 수백 년 내지 천여 년씩 바꾸지 못하고 당하며 살아온 못난 존재들.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깨달음으로써 근대인이 비로소 인간다운 인간이 되었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제 그런 자기도취가 깨어졌기 때문에 ‘탈근대’ 얘기가 나오는 것이고, 전근대 사회를 무조건 깔보던 자세도 반성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 백성 대다수가 근대적 의미의 ‘공민’으로서 권리를 누리지는 않았어도 지금 대한민국의 대다수 국민보다 국가와 사회의 보호를 더 잘 받고 살았으며 조선 왕조가 대부분 기간을 통해 빈약한 다수를 부강한 소수의 폭력으로부터 보호하는 데 지금의 대한민국보다 더 나은 기능을 발휘했다고 나는 본다.
자유가 존재하는 사회에는 부와 권력이 소수에게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이 경향을 억제하는 것이 중세국가의 기본 기능이었다. 과도한 집중이 한편으로 국가의 재정 기반과 동원 능력을 잠식하고 다른 한편으로 정부에 대항할 세력을 키워내기 때문에 이 기능은 국가의 자기보호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이 기능이 실패한 상황이 고려 말기에 나타났었다.
향촌의 가난하고 약한 백성도 중세적 ‘사회안전망’의 보호 대상이었다. 부유하고 세력 있는 자들은 자기 세력권 안의 백성이 생존권을 위협받지 않도록 보호할 책임을 가지고 있었다. 이 책임은 기본적으로 도덕적인 것이었지만 상당 범위까지 법적인 것이기도 했다.
소작관계에서 지주의 소유권을 절대화하지 못한 것도 그런 책임 때문이다. 소작료를 마음대로 올리지 못하는 것도, 소작인을 마음대로 바꾸지 못하는 것도, 정도가 약할 때는 손가락질의 대상이 되고 심할 때는 관부의 단속을 받았다. 지주는 소작인에게 가부장적으로 군림하는 대신 가부장적인 보호책임도 가졌다.
식민지시대 소작료가 6할을 보통 넘기고 8할 넘게 치솟기까지 한 것은 소유권 절대화로 ‘소민(小民) 보호’의 봉건적 기제가 제거된 결과였다. 가부장적 권위의 억압 측면만 남고 보호 측면이 사라진 것이니 ‘반(半)봉건’이란 말이 ‘오용’은 아니다. 그러나 ‘반봉건’은 봉건의 폐해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는 인상을 준다. ‘반봉건’은 봉건이 아니었다. 사이비 봉건이었다.
식민지배의 모순이 가장 심각하고도 광범하게 나타난 것이 해방 당시의 토지소유관계였다. 시장 원리에 맡겨둘 수 없는, 국가의 개입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이념 이전에,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 방치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우익을 자처하는 정당들, 심지어 한민당까지도 외면할 수 없는 것이 토지개혁의 필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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