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파뇰라는 카리브해에서 면적은 쿠바 다음으로 크고 인구는 제일 많은 섬이다. 동쪽의 도미니카, 서쪽의 아이티, 두 나라가 자리 잡고 있다. 콜럼버스 이래 백여 년간 카리브 해역은 스페인의 텃밭이었지만 17세기에 영국과 프랑스의 활동이 늘어나 1697년 스페인이 이 섬의 서쪽 절반을 생도밍그 식민지로 프랑스에 떼어주기에 이른다.

 

아이티는 찬란한 역사를 가진 나라다. 인류 역사상 노예 반란으로 세워진 유일한 국가이고, 최초의 근대적 공화국 중 하나다. 그러나 이 역사는 영광보다 더 큰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다.

 

아이티는 근대세계사의 물결이 가장 격렬하게 솟구친 현장의 하나다. 근대세계의 모순이 생생하게 드러난 장면들이 그 역사에 겹겹이 포개져 있어서, 그 나라의 역사를 넘어 근대세계사의 흐름을 살펴보는 좋은 창문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청산되지 못한 과거가 사회를 억누르는 힘이 얼마나 큰 것인지 생생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자유와 평등을 꿈도 꾸지 못하던...

 

1789년 프랑스혁명 발발 당시 50여만 명으로 추정되던 생도밍그 인구는 세 개 계급으로 분류된다. 4만 명의 백인, 3만 명의 유색(자유), 그리고 90% 가까운 노예. 유색인은 혼혈인(물라토)과 해방흑인으로 구성되었다.

 

노예 중 현지 출생은 3분의 1이 안 되고 대다수는 아프리카에서 실려왔다. 18세기 중 생도밍그의 노예 수입은 1백만 명에 달했다. 그런데 1789년에 흑인 인구가 50만 명 이하였다는 사실은 높은 사망률을 말해준다. 노예의 생활조건을 개선해 주기보다 죽을 놈들 죽게 놔두고 더 많이 사 오는 것이 노예주에게 경제적선택이었다.

 

17898만인의 자유와 평등을 규정한 인권선언이 파리에서 나오고 17918월 생도밍그 노예들이 자유와 평등을 향한 조직적 투쟁을 시작했다. 2년이나 걸렸을까?

 

인간 이하의 상황에 놓여 있던 노예들은 자유고 평등이고 꿈도 꾸지 못하고 있었다. 본국의 혁명에 먼저 자극받은 것은 노예주와 노예의 중간 위치에 있던 유색인이었다. 그들은 보편적 자유와 평등이 아니라 자기네 자유와 자기네 평등(백인과의)을 늘리는 기회로 혁명을 받아들였다.

 

중간계층이 노예를 외면한 경향을 집단이기주의로 비난하는 것은 시대착오의 함정이다.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내세우는 시대였지만 정작 인간이 누구인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았다. 당대의 진보적 사상가 중에도 흑인노예를 인간으로 인정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왕당파-혁명파의 대립, 유색인의 동요 등 어지러운 상황이 진행되는 가운데 노예들에게도 우리는?” 하는 생각이 서서히 떠오른 것이다.

 

 

이념에 투철했던 지도자 루베르튀르

 

아이티혁명(1791-1804)의 의미를 널리 알린 책이 C L R 제임스의 <블랙 자코뱅>(1938)이다. 아이티 국부(國父)” 투생 루베르튀르(1743-1803)를 중심에 둔 책이다.

 

루베르튀르는 현지에서 노예로 태어났다가 자유를 얻은 사람이었다. 현지 출생 노예 크레올은 아프리카에서 실려 온 노예보다 지배자의 문화에 길들여 있어서 현장감독과 가사노동 등 비교적 중요한 역할을 맡다가 자유민으로 풀려나는 일이 많았다.

 

제임스가 루베르튀르를 흑인 자코뱅이라 부르는 것은 혁명이념에 투철했던 인물로 보기 때문이다. 50세 가까운 나이에 혁명을 맞은 루베르튀르는 지배계층의 타도보다 실력 배양에 힘쓰고 파괴와 살상을 최소화하는 전략-전술을 꾸준히 택했다. 그리고 많은 혁명군 지도자들이 자기 소속집단의(물라토, 해방노예, 크레올, 수입 노예) 이해득실에 따라 움직인 것과 달리 광범한 피지배층 전체의 해방을 확실한 목표로 삼았다. 이런 태도가 만인의 자유와 평등이념에 부합하는 것으로 제임스는 해석했다.

 

17942월 프랑스 혁명정부가 식민지까지 포함하는 노예제 전면 철폐를 선포하자 영국과 스페인에 의지해서 본국에 대항하던 반란군이 자유와 평등의 프랑스에 귀순해서 영국과 스페인을 물리쳤다. 그러나 1801년 생도밍그 혁명세력이 자치헌법 제정 등 독립성을 강화하는 움직임을 보이자 나폴레옹이 대규모 병력을 파견해서 루베르튀르를 체포, 본국으로 압송했다. 이어진 독립전쟁에서 프랑스군이 패퇴한 후 180411일 아이티 독립이 선포되었다.

 

 

아이티 혁명사의 발굴과 재발굴

 

C L R 제임스(1901-89)는 카리브해의 다른 섬(영국령 트리니다드) 출신이다. 그가 아이티 혁명사를 쓴 것은 당시까지 민족주의 사관에 묶여 있던 아이티 역사에서 노예 해방운동의 주체성을 찾아 카리브해 지역 전체의 역사로 공유한 것이다.

 

그리고 근 60년이 지나 아이티혁명의 의미를 새로 밝히는 책이 나왔다. 미셸-롤프 트루이요(1949-2012)<침묵에 묻히는 과거 Silencing the Past>(1995). 아이티 출신으로 19세에 뒤발리에 독재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가 인류학자가 된 트루이요는 아이티 사회의 여러 성분이 역사 속에서 뒤얽히는 실제 모습을 그려냈다.

 

민족주의 사관에서는 국민으로, 사회주의 사관에서는 민중으로 뭉뚱그려졌던 사회 구성요소들을 분석함으로써 트루이요는 독립 후에도 계속된 아이티 역사의 비극성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역사의 짐이 될 과도한 폭력성의 원인이 어디에 있었던 것인가?

 

대표적 사례가 독립선언 직후 백인과 물라토 수천 명을 죽인 대학살이었다. 이 학살로 신생국 아이티는 국제사회의 외면을 받게 되었고 20년 후 고립을 못 견뎌 구걸하듯 프랑스의 승인을 받기 위해 막대한 배상금을 약속해야 했다. 아이티가 프랑스에게 배상금을 내야 한다니! 이 배상금은 오래도록 아이티의 멍에가 되었다. (애초의 15천만 프랑이 1838년에 9천만 프랑으로 조정되었지만 그 가치는 지금의 3백억 달러에 달한다. 2003년 아이티 정부가 1943년까지 지불된 배상금을 반환하라며 210억 달러를 프랑스에 요구했으나 이듬해 아리스티드 대통령이 쿠데타로 축출된 후 이 요구를 취소했다. 2016년 프랑스 의회는 이 배상금의 근거가 되었던 1825년 조례를 폐기하는 상징적 조치를 취했다.)

 

이 학살은 독립선언 후 황제가 된 장-자크 데살린의 소행이었다. 여러 해 동안 루베르튀르 휘하에서 활동한 데살린은 18024월에 프랑스군 쪽으로 넘어갔고, 6월 루베르튀르 체포에 앞장서거나 협력했다는 의심을 받는다. 그리고 10월에 다시 항전으로 돌아서서 독립전쟁을 지휘하고 황제가 되었다. 변절과 배신에 대한 의심을 피하고 선명성을 과시하기 위해 무자비한 학살을 명령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따른다.

 

 

승리 아닌 생존을 위해 쓰는 역사

 

트루이요는 역사학계를 가리켜 길드(guild)”란 말을 많이 쓴다. 내부 원리에 따라 행동양식이 결정되는 폐쇄적 조직이라는 뜻이다. 역사로부터 목소리를 빼앗는 힘이 사회의 여러 층위에서 여러 방향으로 일어나는 현상을 그는 지적하는데, 대다수 역사학자는 그 힘에 저항하기보다 그 하수인 노릇을 하는 것으로 그는 본다.

 

약으로 쓸 쓴소리로 받아들여야겠다. 사실 이 책은 미국에서 역사학 입문 교재로 널리 쓰이게 되었다. 내용에 담긴 아이티 역사나 노예해방 역사에 앞서 역사학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많은 역사학 교수들이 환영하는 것이다.

 

역사는 승리자가 쓰는 것이란 말이 있다. 맞는 말이다. 역사 쓰는 수단을 승리자가 가지니까. 집권세력이 민족주의에 쏠릴 때는 민족주의 사관이, 민중주의에 쏠릴 때는 민중주의 사관이 이용된다. 공격 대상을 찾는 손쉬운 역사관은 동어반복을 벗어나지 못한다. 트루이요는 아마 역사는 생존자가 쓰는 것이라고 고쳐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역사를 쓰는 것은 승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서라고.

 

아이티는 부러워할 사람이 없는 나라다. 2010년의 끔찍한 대지진 외에도 태풍, 유행병 등 재해가 끊임없는 데는 정치가 어지러운 탓도 있을 것이다. 1990아이티 최초의 제대로 된 선거로 당선된 아리스티드 대통령이 2004년 재차 축출된 후 안정된 정권이 다시 나타나지 않고 있다. 20217월 암살당한 모이즈 대통령의 후임자조차 아직도 선출되지 못하고 있다.

 

지구 반대편의 이런 나라 역사에서 많은 교훈을 얻게 된 사실이 놀랍다. 일본과의 화해를 서두르는 한국인들에게 아이티의 프랑스와의 1825화해는 어떤 가르침을 줄까. 제임스와 트루이요 같은 걸출한 학자들의 노력 덕분이기도 하지만, 대다수 인류가 비슷한 문제들을 마주하게 하는 세계화의 힘을 새삼 절감한다.

 

 

https://en.wikipedia.org/wiki/History_of_Haiti#/media/File:D072-_une_sucrerie_%C3%A0_saint-domingue_-_Liv3-Ch16.png 아이티의 사탕수수 농장. 자본주의체제 구축 과정에서 설탕의 역할은 에릭 윌리엄스의 <자본주의와 노예제>(1944)로 밝혀지고 시드니 민츠의 <설탕과 권력>(1986)으로 널리 알려졌다. 18세기의 생도밍그는 프랑스 식민지 중 경제적 가치가 가장 큰 곳이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Toussaint_Louverture#/media/File:Toussaint_au_Fort_de_Joux.jpg 18026월 프랑스로 압송된 투생 루베르튀르는 감금 상태에서 이듬해 4월에 죽었다. 그의 지도력이 제거된 사실을 제임스는 <블랙 자코뱅>에서 아쉬워해 마지않는다.

 

https://en.wikipedia.org/wiki/Jean-Jacques_Dessalines#/media/File:Jean_Jacques_Dessalines_holding_a_mutiliated_Saint_Dominican_woman's_head.046.jpg 백인 학살에 나선 장-자크 데살린(1758-1806). 1802년 루베르튀르를 배신한 의심을 받은 그는 4년 후 휘하 장군들의 배신으로 암살당했다.

 

https://en.wikipedia.org/wiki/Jean-Pierre_Boyer#/media/File:President_Jean-Pierre_Boyer_of_Haiti_(Hispaniola_Unification_Regime)_Portrait.jpg 가장 오래(1818-1843) 대통령을 지낸 장-피에르 부와이예(1776-1850)는 전임자 알렉상드르 페숑(1770-1818)과 함께 물라토 출신으로 혁명기간 중 반동적 입장에 서 있다가 독립전쟁 막바지에 전향해서 권력을 쥐었다. 민심의 지지가 약한 그는 프랑스와 굴욕적 조건으로 수교를 맺었다(1825).

 

https://en.wikipedia.org/wiki/History_of_Haiti#/media/File:Citadelle_Laferri%C3%A8re_Aerial_View.jpg 앙리 크리스토프(1767-1820)가 세운 라페리에르 요새는 아메리카대륙에서 가장 큰 요새다. 남부의 페숑과 맞서 북부에서 앙리 1세로 군림하는 동안(1811-20) 이런 요새와 궁전들을 열심히 지은 데서도 당시 아이티 권력자들의 불안한 심리를 엿볼 수 있다.

 

https://en.wikipedia.org/wiki/Jean-Bertrand_Aristide#/media/File:DD-SD-99-03743.jpg 1990년 취임 8개월 만에 쿠데타로 축출된 아리스티드 대통령은 1994년 미국의 지원으로 귀국하고 2000년 다시 당선되었으나 2004년에 또다시 쿠데타로 축출되었다. 아리스티드 측은 미국의 신자유주의 노선에 반대하는 그의 해방신학 때문에 미국이 은연중에 쿠데타를 유도한 것으로 의심한다.

 

 
Posted by 문천

 

밖에서 보면 하나의 조그만 성곽이고, 안에 들어가 보면 큰 마당을 둘러싼 다세대주택이다. 진흙으로 쌓은 투러우(土樓)는 복건, 광동, 강서, 3성이 만나는 영남(嶺南)지역에 지난 수백 년간 지어져 수천 채가 남아있고 200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모양만 봐도 방어용 구조물이다. 혼란의 시대에 비적(匪賊)의 습격을 막기 위해 지었다고들 한다. 그런데 투러우는 평화 시기에도 많이 지어졌다. 방어 대상이 전형적인 비적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여러 인구집단 사이의 긴장관계를 이 보루형 건축형태의 배경으로 본다. 영남지역의 동부 복건-광동 일대에는 소수민족이 (서부의 광서-운남-귀주에 비해) 적은 반면 한족 중 언어-풍속-산업의 전통을 달리하는 여러 갈래 민계(民系)가 오랫동안 뒤얽혀 있었다.

 

중국에 뒤늦게 편입된 영남지역

 

회하를 기준으로 북중국과 남중국을 가르는데, 장강 유역이 오랫동안 남중국의 본체였다. 더 남쪽 남해안 일대 영남지역은 12세기에 송나라가 남쪽으로 밀려 내려오면서 남방 개발이 가속될 때까지 생산력도 약하고 인구도 적은 변방이었다.

 

춘추시대부터 시작된 중국 농업문명 확장의 가장 큰 방향이 남쪽이었다. 고온다습한 남방 환경이 초창기 농업에는 맞지 않아도 기술 수준 향상에 따라 더 큰 생산력을 바라볼 수 있는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북방에서 남방으로 인구 이동이 끊임없이 진행되었고, 남북조시대나 남송시대처럼 북방의 압력이 강한 시기에는 그 흐름이 불쑥불쑥 커지곤 했다.

 

영남지역 방언들은 우리 한자 발음과 비슷한 편이다. 내 이름을 광동어로 깜끼힙!” 부르면 관화(官話)진지셰보다 알아듣기 쉽다. 중국 중심부에서 발음체계가 꾸준히 변해오는 동안 주변부에서는 당-송 시대에 전해진 발음체계가 크게 바뀌지 않은 결과다. (어휘도 마찬가지다. 학까어에서 먹고 마시는 것을 옛날대로 ’, ‘이라 하고 지금 관화에서 그 뜻으로 쓰이는 는 말을 더듬는다는 뜻, 목마르다는 뜻으로 쓴다.)

 

남중국의 대부분 민계들은 정착 지역의 이름을 내세운다. 각 지역의 주류집단이 된 이들을 뿐띠(本地, Punti)‘라 하는데, 이와 대비되는 외래인이란 뜻의 학까(客家, Hakka)‘가 있다. 학까계는 넓은 지역에서 비주류로 존재해 왔다. 오랜 기간에 걸쳐 북방의 다양한 지역에서 이주해 온 것은 마찬가지인데 왜 뿐띠와 학까의 차이가 생겼을까.

 

한족의 남방 이주 과정에 어떤 메커니즘이 지속적으로 작용한 것 같다. 각 지역 주류사회가 자리 잡은 후에 유입된 집단 중 순조롭게 편입되지 못하는 집단들이 학까의 범주를 이루게 된 것으로 보인다. 주류사회에 비해 이동성이 큰 이 집단들이 영남지역 전체를 무대로 하나의 문화적 정체성을 세우게 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민간의 독자적 방위력, 왜 필요했나?

 

학까계와 주변세력 사이의 갈등이 가장 크게 폭발한 사례가 뿐띠-학까 전쟁(1855-67)이다. 학까계가 주동이 된 태평천국의 난(1850-64)의 여파로 일어난 이 참혹한 전쟁에서 백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그 후 학까계를 둘러싼 갈등이 가장 널리 드러나 온 곳은 타이완이다. 타이완의 한족 집단은 일본 점령기 이전부터 거주한 본성인(本省人)과 해방 후에 국민당을 따라 들어온 외성인(外省人)으로 구분되고, 본성인 중 민난(閩南)계가 주류고 학까계가 다음으로 큰 집단이다. 두 집단 모두 가까운 복건성에서 건너온 것이다.

 

타이완에서 두 집단의 적대관계는 대륙에서부터 이어진 것이다. 학까계와 민난계의 대립은 복건 지역에서 장기간에 걸친 광범한 현상이었다. 지금 대륙보다 타이완에서 그 대립이 더 분명히 드러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대륙에서 민계 간 갈등 자체가 완화된 것이고, 또 하나는 갈등을 감추려 드는 대륙의 정치 분위기다.

 

<춘추>에는 규모가 법도를 넘는 대부(大夫)들의 성곽을 제후(諸侯)의 명령으로 무너뜨린 일들이 적혀 있다.(대부는 제후의 신하였다.) 대부의 성곽이 너무 튼튼하면 외부 침공만이 아니라 여차하면 제후에게도 맞설 근거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민간의 독자적 방위력 제한은 치안의 기본 원칙이었다.

 

치안력이 약한 곳에는 성벽을 두른 ()’가 널리 지어졌다. 치안력이 약하다 함은 외부의 위협만이 아니라 민간의 세력경쟁을 국가가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도 가리키는 것이다. 학까계가 발전시킨 투러우 건축형태는 국가의 보호가 부족한 지역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노력을 보여준다.

 

국가의 힘이 압도적이지 않은 상황

 

이런 상황의 이해에 도움이 되는 책 하나가 제임스 스코트의 <통치를 피하는 재간(The Art of Not Being Governed)>(2009)이다. 중국 서남단에서 인도 동북단에 이르는 동남아시아 산악지대에서 지형조건이 정치조직의 전개 과정에 끼친 영향을 분석한 책이다.

 

많은 농민의 일률적 통제가 가능한 평야에는 국가가 쉽게 세워진다. 국가의 존재는 주변에 압력을 가한다. 이 압력에 저항하거나 회피하는 과정에서 산악지대 주민들의 존재방식에 일어나는 온갖 형태의 변화를 스코트는 그려낸다.

 

스코트는 역사발전의 법칙에 대한 과신을 버릴 것을 권한다. 정착농경에서 화전민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대규모 정치조직을 풀고 씨족사회로 돌아가기도 한다. 심지어 문자를 사용하다가 버리는 사회들도 있다. 소수의 사람들이 어쩌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겪는 일이 아니라 오랜 기간에 걸쳐 널리 이뤄진 선택이라는 것이다.

 

법칙성의 과신은 근대인의 약점이다. 변화의 추세를 개인이나 소수집단이 거스르기 힘든 것이 근대적 상황의 특성이다. 역사를 살필 때는 법칙성을 섣불리 적용하기보다 있는 그대로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어쩌면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법칙성도 특수한 상황조건에 국한된 것으로 판명될 수는 없는 것인지 역사의 거울에 비쳐보는 것이다. (자연과학의 반증가능성(refutability)‘ 확인과 같은 과정이 역사학에도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동남아시아가 중심이지만 중국의 서남쪽 모퉁이도 시야에 들어 있다. 그 연장선 위에서 중국의 영남지역 전체를 바라보는 것도 가능하다. 영남지역의 자연조건은 스코트가 조미아(Zomia)‘라 부르는 산악지대와 비슷한 곳이 많다. 조미아에서 나타난 것과 비슷한 현상들이 그에 앞서 광동-복건의 산악지대에서도 많이 나타났을 것 같다. 광서-운남-귀주에 비해 광동-복건에 소수민족이 적은 것은 한화(漢化) 과정이 더 먼저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엉치가 가벼웠던학까계의 활약상

 

남북조시대 이후 영남지역은 중국인에게 신대륙이었다. 우월한 생산기술과 전투기술을 가진 이주민 앞에서 원주민들은 동화하거나 소멸하거나 험하고 외진 곳으로 옮겨가야 했다. 동화한 원주민은 이주민의 언어와 문화를 받아들여 이주민사회에 편입되었다.

 

이주민 집단 중에 자리를 차지하는 데 성공한 집단들은 정착 지역의 주인이 되었다. 아메리카 이주민이 아메리칸이 되고 남아프리카의 아프리카너가 아프리카인을 자처한 것처럼. 한편 평야에 자리 잡지 못한 집단들은 비주류로서 독특한 생활양식을 만들어냈다. 학까계는 비주류 집단들의 광역 네트워크였다.

 

할머니들은 민첩하고 부지런한 아이를 고 녀석 엉치가 가볍다고 놀리듯 칭찬했다. 정착성이 약했던 학까계는 엉치가 가벼웠고 새로운 일에 적극적이었다. 천지회(天地會), 삼합회(三合會) 등 비밀결사와 해외 이주에 앞장선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영남지역의 민간 역량을 키워낸 밀무역 등 법외(法外) 활동에서 역할도 앞으로 많이 밝혀질 것을 기대한다.

 

중국 인구의 3% 전후를 점하는 비율에 비해 현대사에서 학까계의 역할은 엄청나게 컸다. 태평천국(1850-64)과 장정(1934-35)의 주력이 모두 학까계였다. 장정 출발 당시 공산당 본부가 있던 루이진(瑞金)은 학까계 지역이었고 장정에 나선 공산군 86천여 명의 70%가 학까계였다. 주더(朱德), 예팅(葉挺), 예젠잉(葉劍英) 등 학까계 장군들이 두각을 나타낸 배경이다. 화교사회에서 학까계의 역할도 눈부시다.

 

학까계의 현재 모습도 흥미롭지만 그 과거가 더 궁금하다. 남중국의 근대 민간 질서를 밝히는 것은 중화제국의 실제 모습을 찾기 위한 중요한 과제다. 투러우 같은 건축형태가 필요했던 이유에서부터 생각을 시작해 본다.

 

https://en.wikipedia.org/wiki/Tulou#/media/File:Yanxiang_Lou_-_inside_-_DSCF3722.JPG

https://en.wikipedia.org/wiki/Fujian_tulou#/media/File:China_Fujian_Tulou_Gaobei_Qiaofulou.jpg 투러우의 내부

 

https://en.wikipedia.org/wiki/Fujian_tulou#/media/File:Zhenchenglou.JPG

https://en.wikipedia.org/wiki/Fujian_tulou#/media/File:Chengqilou.JPG 투러우의 외관

 

https://en.wikipedia.org/wiki/Fujian_tulou#/media/File:%E5%88%9D%E6%BA%AA%E5%9C%9F%E6%A5%BC%E7%BE%A4.jpg 투러우 군락

 

https://en.wikipedia.org/wiki/Hakka_people#/media/File:Indonesia_Hakka_Museum.JPG 세계 어디서나 학까인은 화교사회의 뼈대다. 투러우 형태의 자카르타 학까박물관.

 

https://en.wikipedia.org/wiki/Hakka_people#/media/File:5_historical_hakka_migrations.svg 학까인 이주의 다섯 단계. (1) 4세기: 516국의 압박으로. (2) 10세기: 당나라 말기의 혼란 속에서. (3) 12-13세기: 송나라의 남하와 멸망을 배경으로. (4) 17세기 후반: 청나라 지배의 확립 과정에서. (5) 19세기 후반: 태평천국의 난 이후 학까계 해외 이주의 급증.

 

https://www.amazon.com/Art-Not-Being-Governed-Anarchist/dp/0300169175/ref=sr_1_1?crid=34IMZEMUCSJMC&keywords=the+art+of+not+being+governed&qid=1677725439&sprefix=the%2520art%2520of%2520not%2520being%2520governed%2Caps%2C276&sr=8-1 동남아시아 고원지대의 무정부주의 역사란 부제가 붙은 제임스 스코트의 <통치를 피하는 재간>(2009)은 동남아시아 역사와 문화를 알고 싶은 이들에게 꼭 권하고 싶은 책이다.

 

학까계의 명사들

https://en.wikipedia.org/wiki/Hong_Xiuquan#/media/File:Hong_Xiuquan.jpg 홍수전(洪秀全, 1814-64). 학까계가 주도한 태평천국의 여파로 광동성에서는 참혹한 학까-뿐띠 전쟁(1855-67)이 일어났다.

https://en.wikipedia.org/wiki/Cheong_Fatt_Tze#/media/File:Zhang_Bishi.jpg 장비스(張弼士, 18401916)는 태평천국의 난을 피해 인도네시아로 갔다가 빈손으로 출발해 거상이 되었다. 1899년 이후 청 조정에 경제정책을 제출했고 신해혁명 후 상공회의소 회장을 맡았다.

https://en.wikipedia.org/wiki/Aw_Boon_Haw#/media/File:Hu_Wenhu2.jpg 버마 화교 출신인 오분호(胡文虎, 1882-1954)는 유명한 호랑이표연고로 거부가 되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Guo_Moruo#/media/File:Guo_Moruo.jpg 문필가이자 역사학자 궈모뤄(郭沫若, 1892-1978)1949년 중국과학원 창설 때부터 서거 때까지 원장을 맡았다.

https://en.wikipedia.org/wiki/Xue_Yue#/media/File:%E8%96%9B%E5%B2%B3.jpg 국민당 쪽에도 학까계 장군들이 많았다. 1926년 북벌에서 전신(戰神)“의 별명을 얻은 쉬에위에(薛岳, 1896-1998)1936년 서안사변 때 장제스(蔣介石, 1887-1975)의 미움을 샀지만 그 명망 때문에 위상을 지키고 더 오래 살았다.

https://en.wikipedia.org/wiki/Hu_Yaobang#/media/File:Hu_Yaobang's_Former_Residence_041.jpg 1980년대에 공산당 총서기를 지낸 후야오방(胡耀邦, 1915-89). 그의 장례가천안문사태의 기폭제가 되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Lee_Kuan_Yew#/media/File:Prime_Minister_Lee_Kuan_Yew_of_Singapore_Making_a_Toast_at_a_State_Dinner_Held_in_His_Honor,_1975.jpg 싱가포르의 리콴유(李光耀, 1923-2015)

https://en.wikipedia.org/wiki/Thaksin_Shinawatra#/media/File:Thaksin_DOD_20050915.jpg 타일란드 수상 탁신 시나와트라(丘達新, 1949- )

https://en.wikipedia.org/wiki/Lee_Teng-hui#/media/File:%E7%B8%BD%E7%B5%B1%E6%9D%8E%E7%99%BB%E8%BC%9D%E5%85%88%E7%94%9F%E7%8E%89%E7%85%A7_(%E5%9C%8B%E6%B0%91%E5%A4%A7%E6%9C%83%E5%AF%A6%E9%8C%84).jpg 타이완 총통 리덩후이(李登輝, 1923-2020)

https://en.wikipedia.org/wiki/Tsai_Ing-wen#/media/File:%E8%94%A1%E8%8B%B1%E6%96%87%E5%AE%98%E6%96%B9%E5%85%83%E9%A6%96%E8%82%96%E5%83%8F%E7%85%A7.png 타이완 총통 차이잉원(蔡英文, 1956- )

 

https://en.wikipedia.org/wiki/Austronesian_peoples#/media/File:Austronesia_with_hypothetical_greatest_expansion_extent_(Blench,_2009)_01.png 오스트로네시아어의 현재 분포지역(청색)과 추정되는 과거의 분포지역(녹색). 현존하는 오스트로네시아어 중 가장 오래된 형태가 타이완 원주민에게서 나타난다. 중국의 영남지역에서 이 언어가 발생해 타이완 등지로 전파된 후 영남지역에서는 한화(漢化)의 결과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Posted by 문천

 

티머시 브루크가 <대국: 중국과 세계의 관계>(2019)에서 내놓은 참신한 관점 하나를 소개한 일이 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076444] 중화제국의 의미가 원나라 이후 크게 달라졌다는 것이다. 제국의 판도가 중화문명권에 한정되어 있던 종래 왕조들과 달리 원나라 이후 중화제국은 세계제국을 지향하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나는 이 주장에 찬성하지 않는다. 진 시황 이래 중화제국이 늘 갖고 있던 천하제국이념은 원래 세계제국이념과 통하는 것이었다. 원나라의 세계제국이념이 그 전 왕조들보다 강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정복왕조였던 몽골제국만의 특성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한족 왕조인 명나라에서는 세계제국이념이 도로 약해졌다.

 

결론에는 찬성하지 않지만 제시된 논점 중에는 수긍되는 것이 많다. 우리가 공부를 시작한 50년 전과 달라진 중국사의 틀을 새로 세우는 데 적절한 논점이 많다는 사실이 특히 반갑다.

 

 

송나라에서 바뀐 중화제국의 성격

 

중국의 왕조명은 진 시황 이래 송나라까지 왕조의 출신 지역 이름으로 하는 것이 상례였다. 뜻이 좋은 글자를 골라 국호로 삼은 것은 원나라부터였다. 원나라 이후 천하제국의 의미가 바뀌었다는 브루크의 관점을 뒷받침해 주는 변화다.

 

왕조 발상지 이름을 국호로 삼은 것은 발상지를 왕조의 보루로 여겼기 때문이다. 전국시대 이래의 정치사상은 지역 차별 없는 고른 통치[齊民]’를 지향했지만, 이론일 뿐이었다. 현실에서는 왕조와 이름을 함께하는 발상지가 특별한 존대를 받았고 조정에 큰 세력을 가진 명문세가의 출신지는 그에 버금가는 위치를 누렸다.

 

통일된 천하제국이라도 통치력이 구석구석까지 파고들기는 어려웠다. 현지 질서를 장악한 호족(豪族)과 중앙조정 사이의 협력과 견제를 통해 통치가 이뤄졌다. 큰 반란이 일어난 지방의 행정등급을 낮추는 제도에는 그 지방 호족 집단에 대한 처벌의 의미가 있었다.

 

지방행정에서 고른 통치의 원리는 송나라에서 크게 강화되었다. 독립적 군사세력을 억제한 군사적 통일정책과 나란히 지방에 대한 조정 통제를 강화하는 행정적 통일정책이 추진되었다. 과거제의 발전과 확장은 더 많은 관리를 지방에 파견해 호족의 역할을 넘겨받을 인력을 확보하는 과정이었다.

 

브루크가 중화제국 성격 변화의 결정적 계기를 송-원 사이에서 찾는 것은 대외관계 측면을 중시하는 관점이다. 내면적으로 나타나는 제국의 성격은 송나라 때 결정된 것이 많다. 송나라 때 바뀐 국가 성격이 원나라 때 대외관계에까지 투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수호전>이 보여주는 송나라의 약점

 

고른 통치의 원칙은 송나라에서 크게 발전했으나 원칙의 발전을 현실은 따라가지 못했다. <수호전>의 양산박은 산동성 한 모퉁이의 그리 크지 않은 소택지였다. 휘종(1100-26)의 치세는 혼란이 극심한 시기도 아니었다. 그런 시기 그런 장소에 산적들의 해방구가 자리 잡은 상황을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군사적 통일이 군사력의 약화를 가져온 것처럼 행정적 통일이 행정력의 약화를 가져온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양산박 호걸 중에는 지방관들과 다투고 밝은 세상을 등진 인물이 많다. 그 지방관 중에는 진짜 나쁜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조정 정책과 현지 질서의 충돌에 끼어 억울한 미움을 받는 일도 많았을 것이다.

 

천하 통일 후의 진나라가 군현제(郡縣制)를 시도했다가 실패하고 한나라는 봉건제(封建制)를 병행하면서 서서히 군현제를 강화했다. 그러나 한나라 군현제는 지방 권력이 조정에 맞설 위험을 없앨 수준이었을 뿐,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그리 강하지 않았다. 지방 질서는 각지 호족세력이 맡고 있었고, 조정의 힘이 약해질 때는 군벌로 자라나기도 했다.

 

근대화 과정에서 중국이 서양의 영향을 받기만 한 것이 아니라 서양이 중국 영향을 받은 측면도 크다는 주장이 있다. 과거제를 포함한 보편적 행정체제가 대표적 내용이다. 19세기 유럽에서 나타날 근대국가의 특성이 중국에서는 송나라 때 이뤄진 것이다. 재정국가로의 전환도 보편적 행정체제를 통한 조세 수취율 확대 덕분에 이뤄진 것이다.

 

휘종이 천하를 잃어버린 까닭은 요-금 교체 단계의 정세 오판에 있었고 오판의 바닥에는 방대한 금군(禁軍)의 규모에 대한 과신이 있었다. 군사적 통일이 군사력의 저하를 가져오고 행정적 통일이 행정력의 약화를 불러온 역설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대외적으로나 내부적으로나 무리한 강경정책으로 없던 위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국가-인민 관계의 변화

 

<수호전>14세기 중엽 시내암(施耐庵)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견도 있다. 이 작품에 대한 명확한 언급이 1524년에야 처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불온한작품을 16세기 초에 쓴 사람이 탄압을 피하기 위해 옛날 작가의 이름을 붙였을 것이란 추측이 나온다. 실제로 <수호전>은 숭정제(1627-1644) 때 금서가 되었다.

 

금서가 된 까닭은 제국의 권위에 대한 풍자 때문이다. 이 작품의 탄생이 14세기 중엽이든 16세기 초든 질서가 어지러울 때였기 때문에 시대의 혼란을 풍자하기 위해 양산박을 그린 것이란 해석이 따른다.

 

시대의 혼란이란 어떤 것인가? 공자는 이름이 바르지 못한(名不正)” 문제가 여러 층위를 거쳐 백성이 손발 놀릴 길이 없는(民無所措手足)” 지경에 이른다고 했다. 이름이 바르기 위해서는 임금이 임금 노릇 하고 신하가 신하 노릇 해야(君君臣臣)” 한다. 임금-신하의 관계는 곧 국가-인민의 관계다.

 

송나라의 중앙집권 강화는 국가의 권한과 함께 책임도 늘린 것이다. 국가-인민의 관계에 변화가 일어나는데, 어느 쪽도 새로운 관계에 익숙하지 못했다. 그 중간에 있던 사람들, 지방 실력자들과 조정에서 파견된 관리들 사이에 끊임없이 마찰이 일어났다. 이 마찰이 <수호전>의 주요 내용이기도 하다.

 

지방의 실력자들이 국가-사회의 구조에서 중간계층이다. 당 이전의 중간계층은 무력을 앞세운 호족이 대표적 형태였는데 송 이후에는 재력을 앞세운 진신(縉紳)’이 되었다. 역할의 중요성에 비해 전통적 역사서술에서 조명을 덜 받은 이 중간계층의 실제 모습을 밝히는 것이 중국사의 지평을 넓히기 위한 중요한 과제가 되어 있다.

 

 

조선 선비가 경탄한 남중국의 번영

 

이 과제를 위해 문학작품 등 종래에 사료로 인식되지 않던 많은 자료들이 검토되고 있다. 그런 중에 눈에 띄는 하나가 최부(崔溥, 1454-1504)<표해록(漂海錄)>이다. 최부는 1488년 초 부친상 때문에 출장 가 있던 제주에서 서둘러 배를 탔다가 풍랑을 만나 43명 일행과 함께 중국으로 표류했다. 태주(台州) 부근에 상륙한 일행은 곡절 끝에 항주(杭州)와 북경을 거쳐 5개월 만에 귀국했고, 최부는 성종의 어명으로 <표해록>을 지었다.

 

<표해록>은 단기간의 견문을 적은 글이지만 당시 중국의 상황을 보여주는 자료로 중시된다. 일본에서도 여러 차례 간행되었고 1965년 영문판도 나왔다. <표해록>의 가치는 무엇보다 선입견 없는 공정한 시각에 있다. 압록강에서 북경까지 사신들이 다니던 지역 사정은 조선 사대부들에게 꽤 알려져 있었지만, 남중국은 새로운 세상이었다. 최부는 경이로운 현상들을 보이는 그대로 일기에 적었고, 그 내용을 정리해 <표해록>을 작성했다.

 

최부가 적은 현상 중 두 가지가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하나는 남중국의 경제적-문화적 번영이다. 항주와 소주(蘇州) 같은 도시의 풍경에는 풍요가 넘쳐난다. 저자의 눈에 남중국과 북중국은 서로 다른 세상처럼 보인 듯하다.

 

또 하나는 지방 ()질서의 현실을 보여주는 틈새다. 최부 일행은 태주 관헌에 이르기 전에 두 차례 해적의 위협을 받았다. 이들이 진짜 해적이었을까? 육지에 오를 때 마주쳤다가 겨우 피해낸 두 번째 집단은 정황으로 보아 지방 수군 같다. 관헌의 보호를 받게 된 후 진술에서 편의상 해적으로 지칭한 것일 수도 있겠다.

 

특별한 난세가 아니라도 제국의 질서는 일사불란한 것이 아니었다. 명나라는 오랜 기간 해금(海禁) 정책을 시행했으나 밀무역이 성행했고, 강남의 풍요가 여기서 나왔다. 강남의 지방세력은 조정의 고른 통치를 넘어 성장했고, 이후 역사의 진행에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다.

 

https://en.wikipedia.org/wiki/Song_Jiang#/media/File:Northern_Song_Uprisings.png 송 휘종 때 양산박과 방랍(方臘)의 반란 지역. 당시 중국의 중심부에 가까운 곳이었다. 귀순한 양산박 세력이 방랍 토벌에 동원된(1121) 상황은 몇 해 후의 항금(抗金) 의병들도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Water_Margin#/media/File:%E5%9D%90%E6%A5%BC%E6%9D%80%E6%83%9C142326.jpg

https://en.wikipedia.org/wiki/Song_Jiang#/media/File:Yan_Poxi's_Murder_Peking_Opera_3.jpg 송강(宋江)과 배은망덕한 염파석(閻婆惜). 경극(京劇)의 인기 소재가 되었다. 양산박의 주요 인물 중에는 송강, 임충(林沖) 같은 서리와 군관 출신이 많아서 중간계층의 향배가 예민한 문제였음을 보여준다. 송강의 지도력이 무예나 지략보다 인품과 행실에 바탕을 두었다는 사실에도 당시의 가치관이 엿보인다.

 

https://baike.baidu.com/pic/%E6%BC%82%E6%B5%B7%E5%BD%95/3273355/1/b03533fa828ba61ee49799744034970a304e596b?fr=lemma&fromModule=lemma_top-image&ct=single#aid=1&pic=b03533fa828ba61ee49799744034970a304e596b <표해록> 표지. 1488년 당시 중국의 모습을 보여주는 자료로 높은 평가를 받는다.

 

https://en.wikipedia.org/wiki/Suzhou#/media/File:The_Tonggui_bridge_at_Shentang_Street,_Suzhou.tif 소주 풍경. 항주에서 여러 날 지낸 뒤 북경으로 가는 길에 소주에서 하루 지낸 최부는 소주가 항주보다도 더 크고 화려한 곳이라고 찬탄해 마지않았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39607

 

[김기협의 근대화 뒤집기] 송나라 중앙·호족 갈등, 산적소굴 ‘양산박’ 낳다 | 중앙일보

제국의 판도가 중화문명권에 한정되어 있던 종래 왕조들과 달리 원나라 이후 중화제국은 ‘세계제국’을 지향하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송나라에서 바뀐 중화제국의 성격 중국의 왕조명은 진

www.joongang.co.kr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