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머시 브루크가 <대국: 중국과 세계의 관계>(2019)에서 내놓은 참신한 관점 하나를 소개한 일이 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076444] 중화제국의 의미가 원나라 이후 크게 달라졌다는 것이다. 제국의 판도가 중화문명권에 한정되어 있던 종래 왕조들과 달리 원나라 이후 중화제국은 세계제국을 지향하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나는 이 주장에 찬성하지 않는다. 진 시황 이래 중화제국이 늘 갖고 있던 천하제국이념은 원래 세계제국이념과 통하는 것이었다. 원나라의 세계제국이념이 그 전 왕조들보다 강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정복왕조였던 몽골제국만의 특성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한족 왕조인 명나라에서는 세계제국이념이 도로 약해졌다.

 

결론에는 찬성하지 않지만 제시된 논점 중에는 수긍되는 것이 많다. 우리가 공부를 시작한 50년 전과 달라진 중국사의 틀을 새로 세우는 데 적절한 논점이 많다는 사실이 특히 반갑다.

 

 

송나라에서 바뀐 중화제국의 성격

 

중국의 왕조명은 진 시황 이래 송나라까지 왕조의 출신 지역 이름으로 하는 것이 상례였다. 뜻이 좋은 글자를 골라 국호로 삼은 것은 원나라부터였다. 원나라 이후 천하제국의 의미가 바뀌었다는 브루크의 관점을 뒷받침해 주는 변화다.

 

왕조 발상지 이름을 국호로 삼은 것은 발상지를 왕조의 보루로 여겼기 때문이다. 전국시대 이래의 정치사상은 지역 차별 없는 고른 통치[齊民]’를 지향했지만, 이론일 뿐이었다. 현실에서는 왕조와 이름을 함께하는 발상지가 특별한 존대를 받았고 조정에 큰 세력을 가진 명문세가의 출신지는 그에 버금가는 위치를 누렸다.

 

통일된 천하제국이라도 통치력이 구석구석까지 파고들기는 어려웠다. 현지 질서를 장악한 호족(豪族)과 중앙조정 사이의 협력과 견제를 통해 통치가 이뤄졌다. 큰 반란이 일어난 지방의 행정등급을 낮추는 제도에는 그 지방 호족 집단에 대한 처벌의 의미가 있었다.

 

지방행정에서 고른 통치의 원리는 송나라에서 크게 강화되었다. 독립적 군사세력을 억제한 군사적 통일정책과 나란히 지방에 대한 조정 통제를 강화하는 행정적 통일정책이 추진되었다. 과거제의 발전과 확장은 더 많은 관리를 지방에 파견해 호족의 역할을 넘겨받을 인력을 확보하는 과정이었다.

 

브루크가 중화제국 성격 변화의 결정적 계기를 송-원 사이에서 찾는 것은 대외관계 측면을 중시하는 관점이다. 내면적으로 나타나는 제국의 성격은 송나라 때 결정된 것이 많다. 송나라 때 바뀐 국가 성격이 원나라 때 대외관계에까지 투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수호전>이 보여주는 송나라의 약점

 

고른 통치의 원칙은 송나라에서 크게 발전했으나 원칙의 발전을 현실은 따라가지 못했다. <수호전>의 양산박은 산동성 한 모퉁이의 그리 크지 않은 소택지였다. 휘종(1100-26)의 치세는 혼란이 극심한 시기도 아니었다. 그런 시기 그런 장소에 산적들의 해방구가 자리 잡은 상황을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군사적 통일이 군사력의 약화를 가져온 것처럼 행정적 통일이 행정력의 약화를 가져온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양산박 호걸 중에는 지방관들과 다투고 밝은 세상을 등진 인물이 많다. 그 지방관 중에는 진짜 나쁜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조정 정책과 현지 질서의 충돌에 끼어 억울한 미움을 받는 일도 많았을 것이다.

 

천하 통일 후의 진나라가 군현제(郡縣制)를 시도했다가 실패하고 한나라는 봉건제(封建制)를 병행하면서 서서히 군현제를 강화했다. 그러나 한나라 군현제는 지방 권력이 조정에 맞설 위험을 없앨 수준이었을 뿐,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그리 강하지 않았다. 지방 질서는 각지 호족세력이 맡고 있었고, 조정의 힘이 약해질 때는 군벌로 자라나기도 했다.

 

근대화 과정에서 중국이 서양의 영향을 받기만 한 것이 아니라 서양이 중국 영향을 받은 측면도 크다는 주장이 있다. 과거제를 포함한 보편적 행정체제가 대표적 내용이다. 19세기 유럽에서 나타날 근대국가의 특성이 중국에서는 송나라 때 이뤄진 것이다. 재정국가로의 전환도 보편적 행정체제를 통한 조세 수취율 확대 덕분에 이뤄진 것이다.

 

휘종이 천하를 잃어버린 까닭은 요-금 교체 단계의 정세 오판에 있었고 오판의 바닥에는 방대한 금군(禁軍)의 규모에 대한 과신이 있었다. 군사적 통일이 군사력의 저하를 가져오고 행정적 통일이 행정력의 약화를 불러온 역설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대외적으로나 내부적으로나 무리한 강경정책으로 없던 위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국가-인민 관계의 변화

 

<수호전>14세기 중엽 시내암(施耐庵)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견도 있다. 이 작품에 대한 명확한 언급이 1524년에야 처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불온한작품을 16세기 초에 쓴 사람이 탄압을 피하기 위해 옛날 작가의 이름을 붙였을 것이란 추측이 나온다. 실제로 <수호전>은 숭정제(1627-1644) 때 금서가 되었다.

 

금서가 된 까닭은 제국의 권위에 대한 풍자 때문이다. 이 작품의 탄생이 14세기 중엽이든 16세기 초든 질서가 어지러울 때였기 때문에 시대의 혼란을 풍자하기 위해 양산박을 그린 것이란 해석이 따른다.

 

시대의 혼란이란 어떤 것인가? 공자는 이름이 바르지 못한(名不正)” 문제가 여러 층위를 거쳐 백성이 손발 놀릴 길이 없는(民無所措手足)” 지경에 이른다고 했다. 이름이 바르기 위해서는 임금이 임금 노릇 하고 신하가 신하 노릇 해야(君君臣臣)” 한다. 임금-신하의 관계는 곧 국가-인민의 관계다.

 

송나라의 중앙집권 강화는 국가의 권한과 함께 책임도 늘린 것이다. 국가-인민의 관계에 변화가 일어나는데, 어느 쪽도 새로운 관계에 익숙하지 못했다. 그 중간에 있던 사람들, 지방 실력자들과 조정에서 파견된 관리들 사이에 끊임없이 마찰이 일어났다. 이 마찰이 <수호전>의 주요 내용이기도 하다.

 

지방의 실력자들이 국가-사회의 구조에서 중간계층이다. 당 이전의 중간계층은 무력을 앞세운 호족이 대표적 형태였는데 송 이후에는 재력을 앞세운 진신(縉紳)’이 되었다. 역할의 중요성에 비해 전통적 역사서술에서 조명을 덜 받은 이 중간계층의 실제 모습을 밝히는 것이 중국사의 지평을 넓히기 위한 중요한 과제가 되어 있다.

 

 

조선 선비가 경탄한 남중국의 번영

 

이 과제를 위해 문학작품 등 종래에 사료로 인식되지 않던 많은 자료들이 검토되고 있다. 그런 중에 눈에 띄는 하나가 최부(崔溥, 1454-1504)<표해록(漂海錄)>이다. 최부는 1488년 초 부친상 때문에 출장 가 있던 제주에서 서둘러 배를 탔다가 풍랑을 만나 43명 일행과 함께 중국으로 표류했다. 태주(台州) 부근에 상륙한 일행은 곡절 끝에 항주(杭州)와 북경을 거쳐 5개월 만에 귀국했고, 최부는 성종의 어명으로 <표해록>을 지었다.

 

<표해록>은 단기간의 견문을 적은 글이지만 당시 중국의 상황을 보여주는 자료로 중시된다. 일본에서도 여러 차례 간행되었고 1965년 영문판도 나왔다. <표해록>의 가치는 무엇보다 선입견 없는 공정한 시각에 있다. 압록강에서 북경까지 사신들이 다니던 지역 사정은 조선 사대부들에게 꽤 알려져 있었지만, 남중국은 새로운 세상이었다. 최부는 경이로운 현상들을 보이는 그대로 일기에 적었고, 그 내용을 정리해 <표해록>을 작성했다.

 

최부가 적은 현상 중 두 가지가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하나는 남중국의 경제적-문화적 번영이다. 항주와 소주(蘇州) 같은 도시의 풍경에는 풍요가 넘쳐난다. 저자의 눈에 남중국과 북중국은 서로 다른 세상처럼 보인 듯하다.

 

또 하나는 지방 ()질서의 현실을 보여주는 틈새다. 최부 일행은 태주 관헌에 이르기 전에 두 차례 해적의 위협을 받았다. 이들이 진짜 해적이었을까? 육지에 오를 때 마주쳤다가 겨우 피해낸 두 번째 집단은 정황으로 보아 지방 수군 같다. 관헌의 보호를 받게 된 후 진술에서 편의상 해적으로 지칭한 것일 수도 있겠다.

 

특별한 난세가 아니라도 제국의 질서는 일사불란한 것이 아니었다. 명나라는 오랜 기간 해금(海禁) 정책을 시행했으나 밀무역이 성행했고, 강남의 풍요가 여기서 나왔다. 강남의 지방세력은 조정의 고른 통치를 넘어 성장했고, 이후 역사의 진행에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다.

 

https://en.wikipedia.org/wiki/Song_Jiang#/media/File:Northern_Song_Uprisings.png 송 휘종 때 양산박과 방랍(方臘)의 반란 지역. 당시 중국의 중심부에 가까운 곳이었다. 귀순한 양산박 세력이 방랍 토벌에 동원된(1121) 상황은 몇 해 후의 항금(抗金) 의병들도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Water_Margin#/media/File:%E5%9D%90%E6%A5%BC%E6%9D%80%E6%83%9C142326.jpg

https://en.wikipedia.org/wiki/Song_Jiang#/media/File:Yan_Poxi's_Murder_Peking_Opera_3.jpg 송강(宋江)과 배은망덕한 염파석(閻婆惜). 경극(京劇)의 인기 소재가 되었다. 양산박의 주요 인물 중에는 송강, 임충(林沖) 같은 서리와 군관 출신이 많아서 중간계층의 향배가 예민한 문제였음을 보여준다. 송강의 지도력이 무예나 지략보다 인품과 행실에 바탕을 두었다는 사실에도 당시의 가치관이 엿보인다.

 

https://baike.baidu.com/pic/%E6%BC%82%E6%B5%B7%E5%BD%95/3273355/1/b03533fa828ba61ee49799744034970a304e596b?fr=lemma&fromModule=lemma_top-image&ct=single#aid=1&pic=b03533fa828ba61ee49799744034970a304e596b <표해록> 표지. 1488년 당시 중국의 모습을 보여주는 자료로 높은 평가를 받는다.

 

https://en.wikipedia.org/wiki/Suzhou#/media/File:The_Tonggui_bridge_at_Shentang_Street,_Suzhou.tif 소주 풍경. 항주에서 여러 날 지낸 뒤 북경으로 가는 길에 소주에서 하루 지낸 최부는 소주가 항주보다도 더 크고 화려한 곳이라고 찬탄해 마지않았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39607

 

[김기협의 근대화 뒤집기] 송나라 중앙·호족 갈등, 산적소굴 ‘양산박’ 낳다 | 중앙일보

제국의 판도가 중화문명권에 한정되어 있던 종래 왕조들과 달리 원나라 이후 중화제국은 ‘세계제국’을 지향하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송나라에서 바뀐 중화제국의 성격 중국의 왕조명은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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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