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국가의 경찰이 일원적 조직으로 되어 있다는 데는 '경찰국가'의 위험이 있다. 한국에서는 검찰의 기소권 독점이 전체주의체제의 더 강력한 조건이기 때문에 그에 가려져 있었지만, 일원적 체제의 경찰은 지팡이 노릇보다 몽동이 노릇에 더 적합하게 되어 있다.

 

한국 경찰을 '국가경찰'로 만든 것은 미군정이었다. 일본 항복 후 이남 지역을 점령하러 들어온 미군은 한국에 대한 정보를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았다. 수만 명 미군 중에 한국어를 하는 사람이 선교사의 아들로 한국에서 태어나 자라난 윌리엄스 대위 하나뿐이었다.

 

한국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니 한국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었고, 지내면서 조금씩 알게 되어도 미국의 국익이나 미군의 '軍益'을 위해 묵살하게 되기가 십상이었다. 그러니 민심을 얻을 생각은 않고 힘으로만 억누르는 통치 방침에 매달리게 되었다. 총독부를 그대로 두고 군정청으로 이름만 바꾸는 등 일본의 통치 수단과 방법을 그대로 물려받으면서, 그나마 일본인만큼의 이해력도 없었기 때문에 힘에 더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군 점령지역의 경찰 인원은 첫 1년 동안 두 배로 늘어났다. 일본 통치에 앞장섰던 '친일파'의 순도가 제일 높은 집단이 경찰인데, 해방 후 처단이 두려워 도망쳤던 경찰관들까지 다 불러모아 간부로 삼았다. 윌리엄스 대위의 어릴 적 친구인 조병옥을 경찰청장에 앉히고 일제시대에도 있던 지방경찰을 폐지하고 일원적 조직으로 만들었다.

 

조병옥은 1960년 대통령 선거에 이승만의 대항마로 나서서 "반 독재"의 상징처럼 알려지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민족의식도 민주의식도 박약한 인물이었다. 경찰은 임명권자에 충성해야 한다며 조선인이 아니라 미군정을 위해 복무해야 한다고 공언하기까지 했다. 1946년 10월의 대구사태, 1948년 4월의 제주사태 등은 미군정 경찰이 일으킨 수많은 분란 중 두드러진 사례들일 뿐이다.

 

이승만 정권은 철저한 경찰국가였다. 또 하나의 무력집단인 군대는 정부 수립 초기에 워낙 허약한 존재여서 경찰에게 구박받던 풍조가 여순 사태의 배경이 되기도 했고, 전쟁을 통해 덩치가 커진 뒤에도 미국의 실제적 통제 아래 있었기 때문에 국내 정치에서 역할이 자라나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이 무너질 때까지 정부 각료 중 가장 힘있는 자리가 경찰을 장악하는 내무장관이었다.

 

5-16 후 군부정권은 중앙정보부와 검찰을 국가폭력의 핵심부로 만들면서 경찰은 뒷전으로 물러나게 되었지만 현장 동원의 수단으로 남겨두었다. 권력의 주변부로 물러나면서 경찰은 서서히 사회를 위한 '봉사'라는 건전한 역할을 향해 옮겨가기 시작했고 1987년 이후 그 변화가 더 빨라졌지만, '권력의 주구' 역할에 대한 집착도 끈질기게 이어져 왔다.

 

'봉사경찰'과 '주구경찰'의 성향이 엇갈리다 보니 형편에 따라 다른 측면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상황에 와 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아래서는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을 거리낌없이 자행하던 경찰이 촛불사태 앞에서 진중한 모습을 보인 차이가 이런 상황을 보여준다.

 

불리한 경찰력 집행에 마주친 자유한국당에서 "자치경찰" 얘기 꺼내는 걸 보며 실소를 금할 수 없다. 홍준표와 김성태의 헛발질 앞에서 표정관리에 바쁜 여권 인사들 심정이 이해가 간다. 주제를 살피지도 못하고 터뜨린 헛소리라도, 이 얘기는 진지하게 받아주고 싶다. 한국사회의 거대한 짐 '국가경찰'을 처리하는 계기가 되기 바란다.

 

Posted by 문천

 

제럴드 혼은 <1776 반동혁명: 노예 저항과 아메리카합중국의 기원>(2014)에서 미국 독립전쟁이 하나의 반동혁명(counter-revolution)’이었다고 규정한다.

 

혼은 인종차별의 극복에 사명감을 갖고 수많은 저작을 발표해온 역사학자다. 그 열성이 편향성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가 타파하고자 하는 종래 역사서술의 편향성에 비교한다면 장래 역사서술의 방향을 찾는 데 훌륭한 공헌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18세기 후반 유럽에서는 노예제 철폐의 움직임이 자라나고 있었다. 그런데 영국의 아메리카식민지는 노예제에 의존도가 높은 상황이었고, 독립전쟁에 이르는 본국과의 갈등에 노예제를 둘러싼 요인이 많았다. 노예제의 지속이 미국 독립운동의 중요한 동기였다고 보는 혼의 관점에는 수긍할 만한 측면이 크다.

 

 

1619 프로젝트 - “미국의 역사는 흑인의 역사

 

<뉴욕타임스매거진> 20198월호에 “1619 프로젝트가 대형 특집으로 실렸다. 미국 역사에서 흑인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밝히자는 취지다. 버지니아식민지에 첫 흑인 노예가 도착한 4백 주년에 맞춰 기획된 이 프로젝트는 주류 역사학계에서 위험한 수정주의란 비판도 받았으나 이듬해 퓰리처상(비평 부문)을 받으며 그 주장이 확산되고 있다.

 

2020년 가을 캘리포니아주에서 이 프로젝트의 취지를 교육과정에 반영할 움직임을 보이자 트럼프 당시 대통령은 반대 담론을 일으키기 위해 ‘1776 위원회라는 자문위원회를 만들었다. 역사학자의 참여가 전혀 없던 이 위원회는 2021118일 첫 보고서를 내고 이틀 후 해산되었다.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 당일 제일 먼저 취한 조치의 하나였다.

 

애초의 특집 내용에는 약간의 오버가 있었다. 그런데 트럼프의 큰 오버가 특집의 작은 오버를 덮어준 셈이다. 예를 들어 아메리카식민지들이 독립에 나선 주된 동기가 노예제의 존속에 있었다는 단정적 서술은 애초 많은 비판을 받았는데, “많은 식민지의 상당히 중요한 동기가 노예제의 존속에 있었다는 정도 취지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독립 당시에도 북부에는 노예제 폐지 분위기가 강했으나 남부와의 연대를 위해 노예제 언급을 피했다. 헌법 조문에도 각 주의 하원의원 정원과 조세 할당의 기준으로 인구를 산정하기 위해 정해진 기간 노동 의무를 가지는 자를 포함한 모든 자유인의 숫자에 조세 대상이 아닌 인디언은 넣지 않고 그밖의 모든 사람 숫자의 5분의 3을 더한다는 대목에 노예란 말을 굳이 피한 사실이 보인다. 북부의 몇 주는 독립 직후 노예제를 폐지했다.

 

독립전쟁 자체를 반동혁명으로 보는 혼의 관점에 부분적으로 동의한다. 상공업 방면에서 본국과 경쟁하는 북부가 노예제 플랜테이션에 의존하는 남부와 결탁한 것이었고, 그 결탁이 파국에 이른 결과가 남북전쟁이었다. 그 과정에서 노예제가 미국의 진로를 결정한 가장 중요한 지표의 하나였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역사상 노예의 다양한 모습

 

근대 이전 예속적 신분을 가리키는 말로 노예(slave)’농노(serf)’가 많이 쓰인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말로 누군가가 주목받은 일이 있는데, 이것이 노예와 농노의 차이를 정확하게 가리키는 표현이다. 노예는 사람에게 충성하는 존재다.

 

초기 농업사회에서 하층민은 땅에 충성하는 존재였다. 주어진 땅을 경작하는 것밖에 살길이 없었으니 농민과 농노의 경계가 애매했다. 왕이 귀족에게 영지를 하사하면 농민은 그 땅에 묻어서 영주에게 귀속되었다. 고대 중국에서는 하사하는 영지의 크기를 농민의 호수(戶數)로 표시하기도 했다.

 

권력자들에게는 땅에 매인 농민 외에 사람에 충성하는 일꾼들도 필요했다. 가사노동과 수공업이 필요하고 권력이 커지면 행정업무와 무력(武力)이 필요하게 된다. 장거리 교역의 발전에도 권력자를 위해 외지의 물자를 구해주는 사람들의 역할이 컸다. 이런 일을 맡는 사람들은 권력자에게 절대적 충성을 요구받았고, 실제로 노예가 흔히 활용되었다.

 

노예가 권력자에 가까운 위치 때문에 평민보다 우월한 조건을 누린 일도 많았다. 이집트에서는 노예집단 맘루크(Mamluk)가 정권을 장기간 장악한 일도 있었고, 오스만제국의 친위대 예니체리(Janissary)도 특권적 신분을 누렸다. 청나라에서 만주족 관료들이 황제에 대해 노재(奴才)’를 자칭한 것도 비슷한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현대인은 노예라면 <엉클톰스캐빈>의 미국 남부 목화밭을 쉽게 떠올린다. 역사상 노예의 실제 모습은 훨씬 더 다양한 것이었다. 16-19세기의 아메리카 노예는 근대세계사의 전개에서 특이한 역할을 맡았다. 그 역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노예집단의 실제 모습을 정확히 알아볼 필요가 있다.

 

 

죽음만이 출구였던 미국 남부의 노예

 

지중해 연안의 선진지역으로 배후지역의 노예를 공급하는 노예시장의 거대한 틀이 로마제국시대에 만들어졌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노예 공급을 그만둔 지역들도 있었으나 1천년 넘게 노예 공급원으로 남아있던 곳들도 있었다. 동유럽과 서아프리카가 그런 예다.

 

서아프리카는 8세기 이후 이슬람문명의 경계지역이었다. 이슬람을 받아들인 세력들이 주변 주민을 포획해서 지중해 연안으로 수출하는 노예시장이 활발했다. 15세기 중엽부터 유럽인도 기존 노예시장에 끼어들기 시작하다가 16세기 들어 아메리카의 노동력 수요 발생에 따라 노예시장을 더 크게 키워 오랫동안 지속시키는 큰손이 되었다.

 

16-19세기에 걸쳐 약 1200만 명의 아프리카인 노예가 아메리카로 수송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메리카로 끌려간 노예들은 지중해 연안으로 팔려간 노예들과도 달리 고향과 완전히 단절된, ‘뿌리뽑힌 존재가 되었다.

 

뿌리를 잃은 노예에게도 좁으나마 출구가 있었다. 유럽인 중에는 노예를 기독교에 입교시켰다가 일정 기간 후 해방시키는 관습도 있었다. 노예들이 도망해 무리를 짓고 오지에서 살길을 찾기도 했다. ‘마룬(Maroon)’이라 불리는 탈주노예의 집단이 커지자 식민당국이 그 존재를 인정하고 더 이상의 탈주를 막도록 협정을 맺기도 했다.

 

영국의 아메리카식민지는 노예에게 주어진 출구가 가장 좁은 곳이었다. 기독교를 받아들여도 인간 대접을 받지 못했고, 노예의 자식은 자동적으로 노예가 되었다. 그 지역 노예에게는 죽음만이 거의 유일한 출구였다. 노예 신분 때문에 참혹한 삶을 산 사례는 역사의 구석구석에 있었지만, 수백만 인구집단이 수백 년에 걸쳐 이렇게 묶여 지낸 일은 따로 없었다.

 

 

영국의 7년전쟁 승리는 껍데기뿐

 

영국령 아메리카 노예들의 억압이 특히 심했던 첫 번째 까닭은 주민들의 불안감에 있었다. 북쪽의 프랑스령 퀘벡과 남쪽의 스페인령 플로리다의 노예들에게는 훨씬 넓은 출구가 주어져 있었다. 퀘벡과 플로리다로의 노예 탈주는 일상적 걱정거리였고, 노예들이 적대세력에 호응하는 것은 최악의 공포였다.

 

노예 인구의 급속한 팽창이 노예주들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17세기 후반 이후 영국령 아메리카는 노예 인구 증가가 가장 빠른 지역이었다. 통제력 한계에 대한 공포심 때문에 노예제 운영도 공포심에만 의존하게 되었다.

 

7년전쟁(1756-63)으로 영국은 프랑스와 스페인을 따돌렸다. 북아메리카에서는 퀘벡과 플로리다를 탈취하여 오랜 위협을 제거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영국의 승리가 껍데기뿐이었다. 퀘벡과 플로리다의 위협이 사라지자 식민지 주민들이 오히려 프랑스, 스페인과 손을 잡고 본국을 등지고 나선 것이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인지(印紙)조례(Stamp Act, 1765)를 둘러싼 식민지와 본국 사이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본국 입장에서는 식민지의 안보 비용을 주민들도 분담해야 한다는 취지였지만 식민지 주민들은 대표 없이 조세 없다는 명분으로 저항했다.

 

1772년의 서머셋사건(Somerset's Case)이 독립 분위기에 기름을 부었다. 보스턴에서 노예로 구입되어 자메이카로 옮겨지던 중의 한 아프리카인이 영국 땅에서 탈주했다가 붙잡혔을 때 노예제 폐지론자들이 법원에 그 석방을 요청한 사건이다.

 

제임스 서머셋의 석방 판결은 식민지의 노예제와 무관한 것인데도 노예제 폐지론이 자라나고 있던 상황 때문에 식민지에서 큰 경각심을 일으켰다. 4년 후의 독립선언에 이 판결이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보는 사람들은 미국 독립을 노예제를 지키기 위한 반동혁명으로 본다.

 

 

https://en.wikipedia.org/wiki/Union_(American_Civil_War)#/media/File:US_map_1864_Civil_War_divisions.svg 남북전쟁의 남부(Confederacy)와 북부(Union). 자유주(청색)와 노예주(적색) 사이의 옅은 색깔 5개 주는 노예주면서 북부에 참여했다. 전쟁의 이유는 노예제 폐지가 아니라 노예주의 서쪽으로의 확장 문제였다.

 

https://en.wikipedia.org/wiki/Seven_Years%27_War#/media/File:Nouvelle-France_map-en.svg 1750년경 북아메리카의 유럽세력 분포. 영국령 아메리카식민지의 북쪽에는 프랑스령 퀘벡이, 남쪽에는 스페인령 플로리다가 있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Seven_Years%27_War#/media/File:NorthAmerica1762-83.png 7년전쟁(1756-63)을 통한 북아메리카의 영토 변화.

 

https://en.wikipedia.org/wiki/Dido_Elizabeth_Belle#/media/File:Dido_Elizabeth_Belle.jpg 서머셋사건의 재판관 맨스필드 경이 저택 켄우드하우스에서 키운 두 명의 조카손녀 중에는 서인도제도의 노예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디도 벨(1761-1804)이 있었다. 영국 귀부인으로 자라난 디도의 빼어난 교양과 매력에 주변사람들이 감명받은 일화가 많이 전해진다.

 

https://en.wikipedia.org/wiki/The_1619_Project#/media/File:AfricansatJamestown1619.jpg 1619년 버지니아의 첫 노예 도착을 그린 1901년의 삽화.

 

https://en.wikipedia.org/wiki/Mamluk_Sultanate#/media/File:Three_Mamelukes_with_lances_on_horseback.jpg 맘루크 전사들의 16세기 동판화. 이집트의 노예전사들은 맘루크술탄국(1250-1517)을 세우고 몽골군의 진격을 중동지역에서 저지했다.

 

https://en.wikipedia.org/wiki/Janissary#/media/File:Lambert_Wyts_-_Agha_of_the_Janissaries_and_a_B%C3%B6l%C3%BCk_of_the_Janissaries.jpg 오스만제국의 친위대 예니체리의 노예전사들.

 

https://en.wikipedia.org/wiki/Uncle_Tom%27s_Cabin#/media/File:UncleTomsCabinCover.jpg <엉클톰스캐빈> 초판(1852) 1권 표지에 그려져 있는 흑인 노예의 생활상.

 

https://en.wikipedia.org/wiki/Maroons#/media/File:Tropenmuseum_Royal_Tropical_Institute_Objectnumber_10024950_Portret_van_drie_Marron_mannen_en_een.jpg 20세기 초까지 수리남에 남아있던 마룬의 모습.

 

 
Posted by 문천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오세아니아, 세 대륙은 신대륙(New World)’.으로 불린다.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의 구대륙(Old World)’과 대비되는 것이다.

 

아메리카가 15세기 말에, 오세아니아가 17세기에 발견되었다는 사실에는 이론의 여지가 있다. 사람이 살던 곳이고 더러는 고도의 문명을 꽃피우기도 하던 곳인데, 꼭 유럽인의 눈에 들어와야만 그 존재가 시작된 것처럼 볼 수 있는가.

 

그러나 역사의 큰 흐름에 비추어서는 이들을 신대륙으로 보는 데 의미가 없지 않다. 고유의 문명과 문화가 철저하게 파괴되거나 무시되고 구대륙에서 퍼져나온 역사의 흐름에 휘말려 들어가면서 피동적인 역할을 강요당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신대륙,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16세기 이후 신대륙은 유럽인에게 막대한 자원을 제공함으로써 서방의 흥기를 뒷받침해 주었다. 자원 착취의 기지로 만들어진 식민지가 자라나 20세기에는 서방 패권을 연장시키며 그 주역을 맡기도 했다. ‘발견이후 신대륙의 역사는 세계사의 전개에서 중요한 축이 되었다.

 

서방 패권을 당연시하던 유럽중심주의가 근년 퇴조하면서 신대륙의 역사적 역할이 새로운 조명을 받고 있다. 그런데 신대륙으로 눈길을 돌리기 전에 먼저 살펴보고 싶은 곳이 있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Sub-Saharan Africa)’15세기 유럽인의 진출을 계기로 세계사 전개에 피동적 역할을 강요당했다는 점에서 신대륙과 같은 입장에 놓였던 곳이다.

 

사하라 이남이란 이름 자체가 외부의 인식이 빈약했던 사정을 보여준다. 이집트에서 모로코까지 지중해 연안 지역은 일찍부터 지중해문명권의 일부로 유럽인에게 잘 알려진 곳이었다. 그 남쪽은 알려진 것이 극히 적었기 때문에 사하라 이남으로 퉁쳐서 부른 것이다.

 

사하라사막 남쪽에도 기후와 생태가 확연히 서로 다르고, 따라서 역사와 문화도 서로 크게 다른 여러 지역이 있었다. 그중에 제일 먼저 살펴볼 곳이 서아프리카다. 15세기 중엽 이후 유럽인의 활동이 가장 많았고, 아메리카로의 노예 반출도 가장 많았던 곳이다.

 

유럽인 진출 이전에도 서아프리카의 중심적 역할을 보여주는 것이 반투 팽창(Bantu Expansion)’ 가설이다. 서아프리카 지역에는 니제르-콩고어파(語派)의 여러 언어들이 뒤얽혀 있는데, 그 동쪽 끝에서 출발한 반투어군(語群)이 기원전 10-5세기부터 동쪽과 남쪽으로 퍼져 나가 대륙의 중-남부를 뒤덮게 되었다는 것이다. 농업 발생, 철기 사용 등 기술 발전을 발판으로 서아프리카 문화가 확장되어 나갔다는 관점을 함축하는 가설이다.

 

 

노예의 대거 반출이 불러온 역사의 단절

 

서아프리카의 역사는 일찍부터 지중해권과의 교섭을 축으로 진행됐다. 장거리 교역이 사하라사막을 가로질렀고, 4세기부터 낙타의 도입으로 더욱 확대됐다. 지중해권의 일환으로 선진문명이 보급된 북아프리카에 대해 서아프리카는 자원을 공급하는 배후지 역할을 했다.

 

서아프리카 몇 개 지역에 상아해안’, ‘노예해안’, ‘황금해안의 이름을 붙인 것은 그 전통적 수출품을 표시한 것이다. 상아건 노예건 황금이건 서아프리카의 자원 착취는 15세기에 유럽인이 시작한 것이 아니다. 육로를 거쳐 북아프리카로 나가던 것이 해로를 통해 유럽과 아메리카로 향하게 된 것이다. 유럽인이 직접 원주민을 노예로 사냥한 일은 거의 없었다. 지역에 존재하던 노예시장에서 구매했다. 이따금 유럽인의 노예 포획 시도에 현지 권력자들이 격렬하게 저항한 것은 자기네 밥그릇이었기 때문이다.

 

16-18세기 아메리카로의 노예 반출이 1200만 명 전후로 추정되는 한편 10-17세기 중 이슬람세계로의 노예 반출을 1100-1700만 명 범위 안에서 많은 학자들이 추정한다. 서아프리카의 노예 수출(?)이 유럽인의 활동으로 종래보다 줄잡아 3~5배 늘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어느 문명권에 대해서도 배후지는 노예를 비롯한 자원을 공급하는 역할을 맡는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배후지의 문명수준 상승으로 노예의 반출이 줄어든다. 15세기 이전 수백 년 동안 서아프리카의 문명수준 상승은 이슬람화의 틀에 따라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유럽인의 출현으로 노예 수요가 급증하면서 이슬람화 과정이 교란되고 심지어 이슬람을 받아들인 사회까지 노예사냥의 대상이 된 일이 많았다. “역사의 단절이라 할 수 있는 현상이다.

 

 

알렉스 헤일리 <뿌리>의 표절 시비

 

사하라 이남 출신으로 가장 유명한 사람 하나가 쿤타 킨테다. 알렉스 헤일리(1921-1992)의 소설 <뿌리>(1976)는 쿤타 킨테가 1767년에 감비아 지역에서 노예사냥꾼들에게 포획된 후 그 7대손인 작가 자신에게 이어지는 한 집안의 역사를 그린 작품이다. 역사상 가장 많은 관심을 모은 소설의 하나가 되었다.

 

<뿌리>의 가치는 그 예술성보다 문제의식에 있다. 미국의 노예해방 후 백여 년이 지나도록 차별이 극복되지 못한 상황에서 노예들도 뿌리를 가진 사회적 존재였다는 사실을 보여준 이 작품이 큰 반향을 일으킨 것이다.

 

이 작품의 표절 문제가 흥미롭다. 인류학자이며 소설가 해럴드 쿨랜더(1908-1996)가 자기 소설 <아프리카인>(1967)을 표절했다며 소송을 냈다. 헤일리는 그런 소설이 있는지도 몰랐다고 우겼지만 쿨랜더의 주장을 지지하는 전문가 의견서가 나온 후 쿨랜더와 합의를 봤다. 65만 달러 보상금과 함께 알렉스 헤일리는 해럴드 쿨랜더의 <아프리카인>의 여러 내용이 자기 작품 <뿌리>에 들어간 사실을 인정하고 유감을 표한다,”는 성명을 발표하는 조건이었다. 그 후 스키드모어대학의 한 교수는 1970년에 헤일리가 학교로 찾아왔을 때 <아프리카인> 읽기를 권하고, 흥미를 보이기에 집에 가서 그 책을 가져와 주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사실성에도 문제가 제기되었다. 헤일리 자신 사실과 창작이 겹쳐진 팩션(faction)’의 성격을 표방했고, 독자들도 <뿌리>를 소설보다 넌픽션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쿤타 킨테의 출발점에 대한 증인으로 헤일리가 내세운 감비아 그리오(griot: 서아프리카에서 음악과 이야기를 통해 과거의 일을 전파하는 사람)가 진짜 그리오가 아니라고 그 지역 연구자들이 지적하고 나섰다. 헤일리가 조사하러 다니면서 조사 대상자들에게 자신의 추측을 이야기한 내용이 그 사람들의 진술을 유도해낸 순환제보(circular reporting)’의 함정에 빠진 것으로 보는 것이다.

 

 

암흑대륙의 미래도 암흑일까?

 

쿨랜더의 소설을 읽기는커녕 그런 책이 있는 줄 알지도 못했다는 헤일리의 주장은 그의 인격을 의심케 한다. 그러나 쿤타 킨테의 출발점에 관한 고증 문제는 18세기 중엽의 서아프리카 상황을 밝히기 어려운 사정에 비추어 이해할 만한 것이다. ‘팩션이라 하더라도 팩트보다 픽션에 더 많이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영역이다.

 

오랫동안 통용돼 온 아프리카의 별명이 암흑대륙이다. 주민의 피부색보다도 과거를 밝히기 어렵다는 문제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15세기 이전의 문자 기록이 극히 적다는 점에서 구대륙보다 신대륙으로 보이는 지역이다. (물론 사하라 이남에 한정된 이야기다.)

 

아프리카 역사에 관한 책을 찾다 보니 아프리카에 관한 책보다 아프리카 출신 노예에 관한 책이 훨씬 더 많다. 일반 독자를 위한 출판물 중에는 아프리카 자체보다 노예에 대한 관심이 압도적인데, 전문적 역사 연구의 분량 자체도 노예 쪽으로 더 많이 쏠려 있는 것 같다.

 

지금까지 이뤄져 온 세계화의 진도에 비해 세계사의 인식이 크게 뒤져있다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된다. 3세기에 걸쳐 아메리카로 반출된 노예 1200만 명은 6000여만 명으로 추정되는 1700년경 아프리카 인구의 5분의 1 수준이다. 그런데 노예들은 지금까지 인식돼온 세계사의 전개에서 맡은 독특한 역할 때문에 집중적 관심을 받아온 것이다.

 

2018년도 아프리카 인구는 132100만 명, 세계 인구의 18.2%를 점하는 것으로 집계돼 있다. 2100년에는 392442만 명으로 세계 인구의 37.9%에 이를 전망이다. (<위키피디아> “Demographics of Africa”) 이 전망이 얼마나 정확할지는 모르나 인류의 미래에 아프리카의 역할이 어떤 의미로든 크게 늘어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지금도 인류의 위기를 가리키는 지표들이 아프리카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다. 그 대처를 위해 여러 면에서 인류의 협력이 필요하거니와, 아프리카의 역사를 제대로 밝히는 것도 하나의 과제일 것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North_Africa#/media/File:Population_density_of_Africa.jpg 아프리카 인구밀도 지도(2000). 북위 20-30도의 광대한 건조지대가 인구희박 지역으로 나타나 있다.

https://en.wikipedia.org/wiki/Bantu_languages#/media/File:Niger-Congo_map.png 니제르-콩고어계의 분포 지도.

https://en.wikipedia.org/wiki/Africa#/media/File:Political_Map_of_Africa.svg 서아프리카는 조그만 나라들로 쪼개져 있다.

https://en.wikipedia.org/wiki/Harold_Courlander#/media/File:Courlander1.jpg 해럴드 쿨랜더의 1955년 모습.

https://en.wikipedia.org/wiki/Alex_Haley#/media/File:Kunta_Kinte-Alex_Haley_Memorial.jpg 쿤타 킨테가 미국에 도착한 메릴랜드주 애너폴리스에 있는 알렉스 헤일리 기념물.

https://en.wikipedia.org/wiki/Atlantic_slave_trade#/media/File:Thomas-Clarkson-De-kreet-der-Afrikanen_MG_1315.tif 노예선의 표준 구조. 1781년에는 442명의 노예를 꽉꽉 눌러 실은 영국 배가 항로 착오로 식수 부족이 닥쳤을 때 142명 노예를 바다에 던져버려서 큰 파장을 일으킨 결과 노예무역의 금지를 앞당긴 일이 있었다. (Zong Massacre)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