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제도는 문명의 발생과 함께 나타났다. 생산력 증가에 따른 사회분화의 일환이었다. 고대문명이 번영한 곳마다 노예제도가 운영되었고, 그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로마의 경우다.

 

로마제국의 노예제는 동로마제국에서 계속되었고 그와 대치하고 있던 페르시아의 사산제국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은 노예제가 시행되었다. 7세기 이후 이슬람권의 노예제도는 두 제국의 유산을 아우른 것이었다.

 

서로마제국 멸망 이후 서유럽 기독교권에도 노예제도가 있었으나 동방에 비해 그 역할이 작았다. 로마제국의 고전문명이 서유럽 지역에 잘 전승되지 못한 하나의 측면이었다. 동로마제국이나 이슬람권에 비해 서유럽은 사회분화가 부진한 단계였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노예제의 전통이 미약했던 서유럽

 

프랑스에서는 루이 10세가 노예제 금지령(1315)을 내린 것으로 전해진다. 엄밀히 말하면 재정 확충을 위해 농노가 속전(贖錢)을 내고 자유민이 되도록 한 것인데, 노예제가 부각된 후세에는 노예에게 적용되었다. 문호 알렉상드르 뒤마의 아버지는 카리브해의 생도맹그에서 노예로 태어났다가 이 제도에 따라 프랑스인이 되고 최초의 흑인 군사령관이 될 수 있었다.

 

1315년의 금지령이 오랫동안 유지된 것은 프랑스에서 노예제가 심각한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국에도 노예제가 법제화되어 있지 않았다. 두 나라에 노예 비슷한 신분이 없지는 않았어도 법률로 뒷받침할 필요까지는 없는 사소한 요소였다. 18세기 후반 계몽사상의 유행과 함께 노예제 비판이 일어날 때 문제가 된 것은 유럽 내의 노예제 시행이 아니라 식민지와 관련된 노예무역이었다.

 

15세기에 유럽인은 마데이라, 아조레스 등 아열대지역 섬들을 점령한 후 플랜테이션에 노예를 대거 활용하기 시작했다. 아메리카 발견 후 카리브지역으로 플랜테이션이 확장되었고, 17세기 이후에는 북아메리카 본토에 노예제 플랜테이션이 늘어났다.

 

유럽인의 식민지 노예제는 이슬람권에서 널리 시행돼 온 노예제와 달랐다. 이슬람권에서 노예의 역할은 가사노동에서 군대까지 다양했기 때문에 노예와 일반인의 접촉면이 넓었는데 16세기 이후 플랜테이션과 광산 등 집단노동에 동원된 유럽인의 식민지 노예들은 일반사회로부터 단절되어 있었다. 사회와 격리된 위치 때문에 노예를 인간 아닌 존재로 보는 경향이 극단으로 흐르게 되었다.

 

노예의 실제 모습은 사회마다 달랐다. 본국에 비해 식민지 노예제는 억압이 강했다. 식민지라도 프랑스령 퀘벡이나 스페인령 플로리다에서 억압이 덜했던 것은 집단노동의 비중이 영국령 아메리카처럼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국령 아메리카 내에서도 플랜테이션이 적은 북부 식민지 주민들의 노예제에 대한 태도는 남부와 달랐다.

 

 

노예 없는 식민지로 출발했던 조지아주

 

제임스 오글소프(1696-1785)조지아 실험(Georgia Experiment)’이 노예제를 둘러싼 영국 본국과 식민지의 분위기 변화를 보여준다. 조지아는 미국 13주가 될 식민지 중 제일 늦게(1732) 남쪽 끝에 설치된 식민지였다. 박애주의자로서 군인이자 정치가였던 오글소프는 캐롤라이나 남쪽에 노예 없는 식민지를 만들 것을 국왕에게 청원해서 인가를 받았다.

 

이 청원이 인가를 받은 것은 스페인령 플로리다와의 사이에 완충지가 필요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플로리다에도 노예제가 있었으나 기독교에 입교하거나 군대에 입대하면 쉽게 자유민으로 풀어주는 개방적 운영이었다. 스페인과 사이에 긴장이 일어날 때마다 노예들에 대한 스페인 측 선동이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영국 정부는 버지니아와 캐롤라이나를 이 위협으로부터 지켜주는 역할을 조지아에 바란 것이다.

 

오글소프는 채무죄인(dept prisoners) 등 본국의 빈민을 데려와 소규모 자영농으로 재활의 기회를 주고자 했다. 그래서 노예 소유를 금지하고 한 가구에 50에이커(6만 평) 한도의 땅을 나눠주는 정책을 취했다. 노예 소유와 함께 음주를 금지한 데서도 조지아 실험의 도덕주의를 알아볼 수 있다.

 

그러나 도덕이 밥을 먹여주지 못한다. 자영농을 바라보는 빈민만으로는 플로리다 방면의 위협에 대응할 경제력과 군사력을 키울 수 없었기 때문에 10명 이하의 노예를 데려오는 이주민에게 500에이커까지 땅을 제공하는 타협적 방식을 병행하게 되었다. 이 방식으로 합류한 노예제 농장주들은 조지아 실험 전복을 위해 본국 의회에 로비활동을 벌였다.

 

오글소프가 1743년 조지아를 떠나며 조지아 실험은 힘을 잃고, 조지아 노예 금지령은 1750년 영국 하원에서 폐기되었다. 1776년까지 조지아의 노예 인구비율은 다른 남부 식민지들과 비슷한 45%까지 늘어났다.

 

 

수세에 몰린 노예제 지역의 피해의식

 

미국 독립전쟁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평등사상은 확장되고 있었고, 독립의 명분 또한 인권에 대한 각성을 촉진했다. 독립은 노예제 지역인 남부와 비-노예제 지역인 북부의 합작으로 이뤄졌으나 독립 후의 정책 결정에서는 남북 간의 입장이 갈라졌다. 노예제 해소를 향한 시대적 조류 앞에서 남부는 수세에 처해 있었다.

 

영토 확장 때마다 남북 간의 입장 차이가 불거졌다. 1803년 루이지애나 매입과 1846-48년 멕시코 전쟁으로 획득한 영토의 노예제 시행 여부를 놓고 정치적 위기가 거듭되었다. ‘미주리 대타협’(1820)‘1850 대타협등 고식책으로 봉합해 나가다가 남북전쟁에 이르렀다.

 

186011월 링컨의 대통령 당선 후 남부 여러 주가 연방 탈퇴를 선언하는 가운데 또 하나 대타협의 제안이 나왔다. 헌법 개정을 통해 남부의 노예제 유지를 보장하자는 취지였지만, 새 영토의 노예제 채택 범위에 대한 합의 도출에 실패했다. 노예지역의 확장을 막음으로써 노예제의 고사(枯死)를 획책한다는 남부의 피해의식이 걸림돌이었다.

 

18613월 링컨 취임 전에 남부 7개 주가 연방에서 탈퇴해 남부연합을 결성하고 있었다. 링컨 정부가 이에 대해 바로 적대행위를 취하지 않은 것은 15개 노예주 중 거취를 결정하지 않고 있던 8개 경계주(border states)를 회유하기 위해서였다. 412일 전쟁이 터지자 경계주들은 4개씩 갈라져 남북으로 붙었다. 18631월의 노예해방선언에서도 북부에 가담한 메릴랜드, 델라웨어, 켄터키, 미주리의 노예제는 예외로 남겨졌다. (전쟁 후의 헌법개정으로 곧 사라질 예외였다.)

 

 

노예해방이 인종차별을 없애지 못한 까닭

 

전쟁이 끝난 후 남부연합 지역은 재건(Reconstruction)’이란 이름의 계엄통치에 들어갔다. 1877년 연방군이 남부에서 철수하고 지방정치가 재개되자 노예제를 금지한 13차 수정헌법을 적대시하는 분위기가 남부를 휩쓸었다. 헌법이 보장하는 평등을 각 주의 입법과 사법, 그리고 민간의 폭력으로 거부한 짐 크라우(Jim Crow)’ 시대가 1960년대까지 이어졌다.

 

남부의 반동적 분위기를 격화시킨 것은 공화당 정권의 정치실패였다. 극심한 부패로 민심을 잃은 공화당은 1876년 대통령선거에서 위기에 몰렸다. 개표가 끝나갈 시점에서 민주당 틸든 후보는 184인 선거인단을 확보해 놓고 1명만 더하면 당선이 확정되는 상황이었다. 이때 남부 출신 민주당 의원들이 재건을 서둘러 끝내주는 대가로 의회에서 확정할 남은 20명을 모두 공화당 헤이즈 후보에게 몰아주었다. 그래서 총투표에서 3% 뒤진 헤이즈가 선거인단투표에서 한 표 이기는 결과가 되었다.

 

공화당 정권의 타락은 전쟁의 명분까지 퇴색시켰다. 북부의 야욕만 부각되면서 남부에서는 빼앗긴 정의(Lost Cause)’에 대한 아쉬움이 넘쳐흘렀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6)에 깔려있는 옛 남부(Old South)’에 대한 그리움은 끈질긴 흑백차별의 동력원이기도 했다.

 

노예 해방이라는 명분이 편의적인 구호에 그친 사실은 흑인의 군사적 역할이 약소했던 데서도 알아볼 수 있다. 긴박한 전세에도 불구하고 흑인의 입대는 많지 않아서 종전 때까지 북군에서 흑인 비율이 10분의 1에 그쳤다. 명예훈장(Medal of Honor) 수여 통계도 이 전쟁이 흑인의, 흑인에 의한, 흑인을 위한전쟁과 얼마나 거리가 먼 것이었는지 보여준다. 남북전쟁 관련 서훈자 1500여 명 중 흑인은 불과 32명이었다. 여성은 단 1명이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Slavery_in_the_United_States#/media/File:Ashley's_Sack_(Slave_Sack_c._mid-19th_century).jpg 애슐리의 헝겊가방’. 아홉 살의 애슐리가 팔려갈 때 어머니 로즈는 이 가방에 낡은 드레스 한 벌, 자기 머리카락 한 다발, 피캔 세 줌을 넣어 딸에게 주며 영원한 사랑을 가득 담아준다고 했다. 애슐리의 손녀 루스가 후에 그 사연을 가방에 적어놓았다. 20년 전 내슈빌의 벼룩시장에서 발견된 이 가방이 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고, 로즈와 애슐리, 루스의 행적을 밝힌 연구도 나왔다.

 

https://en.wikipedia.org/wiki/American_Civil_War#/media/File:US_Secession_map_1861.svg 남북으로 갈린 미국. 8개 경계주 중 넷은 북부에(노란색), 넷은 남부에(주황색) 가담했다. 회색은 주로 편제되지 않은 준주(Territory).

 

https://en.wikipedia.org/wiki/Jefferson_Davis#/media/File:Jefferson_Davis_by_Vannerson,_1859.jpg 남부연합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1808-89). 만년의 회고록(1884)에서 남부 보수주의자들의 빼앗긴 정의(Lost Cause)’ 관점을 대변했다.

 

https://en.wikipedia.org/wiki/Abraham_Lincoln#/media/File:Abraham_Lincoln_O-55,_1861-crop.jpg 대통령 취임 당시의 링컨. 노예제에 대한 온건하면서도 확고한입장이 그의 정치적 성공을 뒷받침한 것으로 평가된다.

 

https://en.wikipedia.org/wiki/American_Civil_War#/media/File:Soldiers_White_Black_1861.jpg 북군은 1863년부터 해방노예의 모병을 시작해서 종전 당시에는 병력의 10분의 1에 이르렀지만 그 역할은 크지 않았다.

 

https://en.wikipedia.org/wiki/Slavery_in_the_United_States#/media/File:Slavery_map.jpg 1790년과 1860년의 노예 분포도. 점 하나가 노예 200명을 나타낸다.

 

https://en.wikipedia.org/wiki/James_Oglethorpe#/media/File:Flickr_-_USCapitol_-_Oglethorpe_and_the_Indians.jpg 원주민과 원만한 관계를 위해 애쓰던 오글소프의 모습이 미 의사당 장식에 남아있다.

 

https://en.wikipedia.org/wiki/Province_of_Georgia#/media/File:Gacolony.png 조지아 식민지의 위치와 영역.

 

https://en.wikipedia.org/wiki/Plantation_economy#/media/File:Slaves_cutting_the_sugar_cane_-_Ten_Views_in_the_Island_of_Antigua_(1823),_plate_IV_-_BL.jpg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광경.

 

https://en.wikipedia.org/wiki/Gone_with_the_Wind_(novel)#/media/File:Gone_with_the_Wind_cover.jpg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836)의 높은 인기에는 옛 남부(Old South)’빼앗긴 정의(Lost Cause)’에 대한 폭넓은 공감도 한몫했다.

 

 

 
Posted by 문천

 

한 국가의 경찰이 일원적 조직으로 되어 있다는 데는 '경찰국가'의 위험이 있다. 한국에서는 검찰의 기소권 독점이 전체주의체제의 더 강력한 조건이기 때문에 그에 가려져 있었지만, 일원적 체제의 경찰은 지팡이 노릇보다 몽동이 노릇에 더 적합하게 되어 있다.

 

한국 경찰을 '국가경찰'로 만든 것은 미군정이었다. 일본 항복 후 이남 지역을 점령하러 들어온 미군은 한국에 대한 정보를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았다. 수만 명 미군 중에 한국어를 하는 사람이 선교사의 아들로 한국에서 태어나 자라난 윌리엄스 대위 하나뿐이었다.

 

한국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니 한국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었고, 지내면서 조금씩 알게 되어도 미국의 국익이나 미군의 '軍益'을 위해 묵살하게 되기가 십상이었다. 그러니 민심을 얻을 생각은 않고 힘으로만 억누르는 통치 방침에 매달리게 되었다. 총독부를 그대로 두고 군정청으로 이름만 바꾸는 등 일본의 통치 수단과 방법을 그대로 물려받으면서, 그나마 일본인만큼의 이해력도 없었기 때문에 힘에 더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군 점령지역의 경찰 인원은 첫 1년 동안 두 배로 늘어났다. 일본 통치에 앞장섰던 '친일파'의 순도가 제일 높은 집단이 경찰인데, 해방 후 처단이 두려워 도망쳤던 경찰관들까지 다 불러모아 간부로 삼았다. 윌리엄스 대위의 어릴 적 친구인 조병옥을 경찰청장에 앉히고 일제시대에도 있던 지방경찰을 폐지하고 일원적 조직으로 만들었다.

 

조병옥은 1960년 대통령 선거에 이승만의 대항마로 나서서 "반 독재"의 상징처럼 알려지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민족의식도 민주의식도 박약한 인물이었다. 경찰은 임명권자에 충성해야 한다며 조선인이 아니라 미군정을 위해 복무해야 한다고 공언하기까지 했다. 1946년 10월의 대구사태, 1948년 4월의 제주사태 등은 미군정 경찰이 일으킨 수많은 분란 중 두드러진 사례들일 뿐이다.

 

이승만 정권은 철저한 경찰국가였다. 또 하나의 무력집단인 군대는 정부 수립 초기에 워낙 허약한 존재여서 경찰에게 구박받던 풍조가 여순 사태의 배경이 되기도 했고, 전쟁을 통해 덩치가 커진 뒤에도 미국의 실제적 통제 아래 있었기 때문에 국내 정치에서 역할이 자라나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이 무너질 때까지 정부 각료 중 가장 힘있는 자리가 경찰을 장악하는 내무장관이었다.

 

5-16 후 군부정권은 중앙정보부와 검찰을 국가폭력의 핵심부로 만들면서 경찰은 뒷전으로 물러나게 되었지만 현장 동원의 수단으로 남겨두었다. 권력의 주변부로 물러나면서 경찰은 서서히 사회를 위한 '봉사'라는 건전한 역할을 향해 옮겨가기 시작했고 1987년 이후 그 변화가 더 빨라졌지만, '권력의 주구' 역할에 대한 집착도 끈질기게 이어져 왔다.

 

'봉사경찰'과 '주구경찰'의 성향이 엇갈리다 보니 형편에 따라 다른 측면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상황에 와 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아래서는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을 거리낌없이 자행하던 경찰이 촛불사태 앞에서 진중한 모습을 보인 차이가 이런 상황을 보여준다.

 

불리한 경찰력 집행에 마주친 자유한국당에서 "자치경찰" 얘기 꺼내는 걸 보며 실소를 금할 수 없다. 홍준표와 김성태의 헛발질 앞에서 표정관리에 바쁜 여권 인사들 심정이 이해가 간다. 주제를 살피지도 못하고 터뜨린 헛소리라도, 이 얘기는 진지하게 받아주고 싶다. 한국사회의 거대한 짐 '국가경찰'을 처리하는 계기가 되기 바란다.

 

Posted by 문천

 

제럴드 혼은 <1776 반동혁명: 노예 저항과 아메리카합중국의 기원>(2014)에서 미국 독립전쟁이 하나의 반동혁명(counter-revolution)’이었다고 규정한다.

 

혼은 인종차별의 극복에 사명감을 갖고 수많은 저작을 발표해온 역사학자다. 그 열성이 편향성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가 타파하고자 하는 종래 역사서술의 편향성에 비교한다면 장래 역사서술의 방향을 찾는 데 훌륭한 공헌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18세기 후반 유럽에서는 노예제 철폐의 움직임이 자라나고 있었다. 그런데 영국의 아메리카식민지는 노예제에 의존도가 높은 상황이었고, 독립전쟁에 이르는 본국과의 갈등에 노예제를 둘러싼 요인이 많았다. 노예제의 지속이 미국 독립운동의 중요한 동기였다고 보는 혼의 관점에는 수긍할 만한 측면이 크다.

 

 

1619 프로젝트 - “미국의 역사는 흑인의 역사

 

<뉴욕타임스매거진> 20198월호에 “1619 프로젝트가 대형 특집으로 실렸다. 미국 역사에서 흑인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밝히자는 취지다. 버지니아식민지에 첫 흑인 노예가 도착한 4백 주년에 맞춰 기획된 이 프로젝트는 주류 역사학계에서 위험한 수정주의란 비판도 받았으나 이듬해 퓰리처상(비평 부문)을 받으며 그 주장이 확산되고 있다.

 

2020년 가을 캘리포니아주에서 이 프로젝트의 취지를 교육과정에 반영할 움직임을 보이자 트럼프 당시 대통령은 반대 담론을 일으키기 위해 ‘1776 위원회라는 자문위원회를 만들었다. 역사학자의 참여가 전혀 없던 이 위원회는 2021118일 첫 보고서를 내고 이틀 후 해산되었다.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 당일 제일 먼저 취한 조치의 하나였다.

 

애초의 특집 내용에는 약간의 오버가 있었다. 그런데 트럼프의 큰 오버가 특집의 작은 오버를 덮어준 셈이다. 예를 들어 아메리카식민지들이 독립에 나선 주된 동기가 노예제의 존속에 있었다는 단정적 서술은 애초 많은 비판을 받았는데, “많은 식민지의 상당히 중요한 동기가 노예제의 존속에 있었다는 정도 취지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독립 당시에도 북부에는 노예제 폐지 분위기가 강했으나 남부와의 연대를 위해 노예제 언급을 피했다. 헌법 조문에도 각 주의 하원의원 정원과 조세 할당의 기준으로 인구를 산정하기 위해 정해진 기간 노동 의무를 가지는 자를 포함한 모든 자유인의 숫자에 조세 대상이 아닌 인디언은 넣지 않고 그밖의 모든 사람 숫자의 5분의 3을 더한다는 대목에 노예란 말을 굳이 피한 사실이 보인다. 북부의 몇 주는 독립 직후 노예제를 폐지했다.

 

독립전쟁 자체를 반동혁명으로 보는 혼의 관점에 부분적으로 동의한다. 상공업 방면에서 본국과 경쟁하는 북부가 노예제 플랜테이션에 의존하는 남부와 결탁한 것이었고, 그 결탁이 파국에 이른 결과가 남북전쟁이었다. 그 과정에서 노예제가 미국의 진로를 결정한 가장 중요한 지표의 하나였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역사상 노예의 다양한 모습

 

근대 이전 예속적 신분을 가리키는 말로 노예(slave)’농노(serf)’가 많이 쓰인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말로 누군가가 주목받은 일이 있는데, 이것이 노예와 농노의 차이를 정확하게 가리키는 표현이다. 노예는 사람에게 충성하는 존재다.

 

초기 농업사회에서 하층민은 땅에 충성하는 존재였다. 주어진 땅을 경작하는 것밖에 살길이 없었으니 농민과 농노의 경계가 애매했다. 왕이 귀족에게 영지를 하사하면 농민은 그 땅에 묻어서 영주에게 귀속되었다. 고대 중국에서는 하사하는 영지의 크기를 농민의 호수(戶數)로 표시하기도 했다.

 

권력자들에게는 땅에 매인 농민 외에 사람에 충성하는 일꾼들도 필요했다. 가사노동과 수공업이 필요하고 권력이 커지면 행정업무와 무력(武力)이 필요하게 된다. 장거리 교역의 발전에도 권력자를 위해 외지의 물자를 구해주는 사람들의 역할이 컸다. 이런 일을 맡는 사람들은 권력자에게 절대적 충성을 요구받았고, 실제로 노예가 흔히 활용되었다.

 

노예가 권력자에 가까운 위치 때문에 평민보다 우월한 조건을 누린 일도 많았다. 이집트에서는 노예집단 맘루크(Mamluk)가 정권을 장기간 장악한 일도 있었고, 오스만제국의 친위대 예니체리(Janissary)도 특권적 신분을 누렸다. 청나라에서 만주족 관료들이 황제에 대해 노재(奴才)’를 자칭한 것도 비슷한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현대인은 노예라면 <엉클톰스캐빈>의 미국 남부 목화밭을 쉽게 떠올린다. 역사상 노예의 실제 모습은 훨씬 더 다양한 것이었다. 16-19세기의 아메리카 노예는 근대세계사의 전개에서 특이한 역할을 맡았다. 그 역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노예집단의 실제 모습을 정확히 알아볼 필요가 있다.

 

 

죽음만이 출구였던 미국 남부의 노예

 

지중해 연안의 선진지역으로 배후지역의 노예를 공급하는 노예시장의 거대한 틀이 로마제국시대에 만들어졌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노예 공급을 그만둔 지역들도 있었으나 1천년 넘게 노예 공급원으로 남아있던 곳들도 있었다. 동유럽과 서아프리카가 그런 예다.

 

서아프리카는 8세기 이후 이슬람문명의 경계지역이었다. 이슬람을 받아들인 세력들이 주변 주민을 포획해서 지중해 연안으로 수출하는 노예시장이 활발했다. 15세기 중엽부터 유럽인도 기존 노예시장에 끼어들기 시작하다가 16세기 들어 아메리카의 노동력 수요 발생에 따라 노예시장을 더 크게 키워 오랫동안 지속시키는 큰손이 되었다.

 

16-19세기에 걸쳐 약 1200만 명의 아프리카인 노예가 아메리카로 수송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메리카로 끌려간 노예들은 지중해 연안으로 팔려간 노예들과도 달리 고향과 완전히 단절된, ‘뿌리뽑힌 존재가 되었다.

 

뿌리를 잃은 노예에게도 좁으나마 출구가 있었다. 유럽인 중에는 노예를 기독교에 입교시켰다가 일정 기간 후 해방시키는 관습도 있었다. 노예들이 도망해 무리를 짓고 오지에서 살길을 찾기도 했다. ‘마룬(Maroon)’이라 불리는 탈주노예의 집단이 커지자 식민당국이 그 존재를 인정하고 더 이상의 탈주를 막도록 협정을 맺기도 했다.

 

영국의 아메리카식민지는 노예에게 주어진 출구가 가장 좁은 곳이었다. 기독교를 받아들여도 인간 대접을 받지 못했고, 노예의 자식은 자동적으로 노예가 되었다. 그 지역 노예에게는 죽음만이 거의 유일한 출구였다. 노예 신분 때문에 참혹한 삶을 산 사례는 역사의 구석구석에 있었지만, 수백만 인구집단이 수백 년에 걸쳐 이렇게 묶여 지낸 일은 따로 없었다.

 

 

영국의 7년전쟁 승리는 껍데기뿐

 

영국령 아메리카 노예들의 억압이 특히 심했던 첫 번째 까닭은 주민들의 불안감에 있었다. 북쪽의 프랑스령 퀘벡과 남쪽의 스페인령 플로리다의 노예들에게는 훨씬 넓은 출구가 주어져 있었다. 퀘벡과 플로리다로의 노예 탈주는 일상적 걱정거리였고, 노예들이 적대세력에 호응하는 것은 최악의 공포였다.

 

노예 인구의 급속한 팽창이 노예주들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17세기 후반 이후 영국령 아메리카는 노예 인구 증가가 가장 빠른 지역이었다. 통제력 한계에 대한 공포심 때문에 노예제 운영도 공포심에만 의존하게 되었다.

 

7년전쟁(1756-63)으로 영국은 프랑스와 스페인을 따돌렸다. 북아메리카에서는 퀘벡과 플로리다를 탈취하여 오랜 위협을 제거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영국의 승리가 껍데기뿐이었다. 퀘벡과 플로리다의 위협이 사라지자 식민지 주민들이 오히려 프랑스, 스페인과 손을 잡고 본국을 등지고 나선 것이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인지(印紙)조례(Stamp Act, 1765)를 둘러싼 식민지와 본국 사이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본국 입장에서는 식민지의 안보 비용을 주민들도 분담해야 한다는 취지였지만 식민지 주민들은 대표 없이 조세 없다는 명분으로 저항했다.

 

1772년의 서머셋사건(Somerset's Case)이 독립 분위기에 기름을 부었다. 보스턴에서 노예로 구입되어 자메이카로 옮겨지던 중의 한 아프리카인이 영국 땅에서 탈주했다가 붙잡혔을 때 노예제 폐지론자들이 법원에 그 석방을 요청한 사건이다.

 

제임스 서머셋의 석방 판결은 식민지의 노예제와 무관한 것인데도 노예제 폐지론이 자라나고 있던 상황 때문에 식민지에서 큰 경각심을 일으켰다. 4년 후의 독립선언에 이 판결이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보는 사람들은 미국 독립을 노예제를 지키기 위한 반동혁명으로 본다.

 

 

https://en.wikipedia.org/wiki/Union_(American_Civil_War)#/media/File:US_map_1864_Civil_War_divisions.svg 남북전쟁의 남부(Confederacy)와 북부(Union). 자유주(청색)와 노예주(적색) 사이의 옅은 색깔 5개 주는 노예주면서 북부에 참여했다. 전쟁의 이유는 노예제 폐지가 아니라 노예주의 서쪽으로의 확장 문제였다.

 

https://en.wikipedia.org/wiki/Seven_Years%27_War#/media/File:Nouvelle-France_map-en.svg 1750년경 북아메리카의 유럽세력 분포. 영국령 아메리카식민지의 북쪽에는 프랑스령 퀘벡이, 남쪽에는 스페인령 플로리다가 있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Seven_Years%27_War#/media/File:NorthAmerica1762-83.png 7년전쟁(1756-63)을 통한 북아메리카의 영토 변화.

 

https://en.wikipedia.org/wiki/Dido_Elizabeth_Belle#/media/File:Dido_Elizabeth_Belle.jpg 서머셋사건의 재판관 맨스필드 경이 저택 켄우드하우스에서 키운 두 명의 조카손녀 중에는 서인도제도의 노예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디도 벨(1761-1804)이 있었다. 영국 귀부인으로 자라난 디도의 빼어난 교양과 매력에 주변사람들이 감명받은 일화가 많이 전해진다.

 

https://en.wikipedia.org/wiki/The_1619_Project#/media/File:AfricansatJamestown1619.jpg 1619년 버지니아의 첫 노예 도착을 그린 1901년의 삽화.

 

https://en.wikipedia.org/wiki/Mamluk_Sultanate#/media/File:Three_Mamelukes_with_lances_on_horseback.jpg 맘루크 전사들의 16세기 동판화. 이집트의 노예전사들은 맘루크술탄국(1250-1517)을 세우고 몽골군의 진격을 중동지역에서 저지했다.

 

https://en.wikipedia.org/wiki/Janissary#/media/File:Lambert_Wyts_-_Agha_of_the_Janissaries_and_a_B%C3%B6l%C3%BCk_of_the_Janissaries.jpg 오스만제국의 친위대 예니체리의 노예전사들.

 

https://en.wikipedia.org/wiki/Uncle_Tom%27s_Cabin#/media/File:UncleTomsCabinCover.jpg <엉클톰스캐빈> 초판(1852) 1권 표지에 그려져 있는 흑인 노예의 생활상.

 

https://en.wikipedia.org/wiki/Maroons#/media/File:Tropenmuseum_Royal_Tropical_Institute_Objectnumber_10024950_Portret_van_drie_Marron_mannen_en_een.jpg 20세기 초까지 수리남에 남아있던 마룬의 모습.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