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법률에 화교(華僑)’국외에 거주하는 중국 공민으로 규정되어 있다. (中华人民共和国归侨侨眷权益保护法 / 200010월 시행) 외국 국적을 가진 사람들은 외적화인(外籍華人)’으로 구별한다.

 

그러나 통용되는 화교의 개념은 국적을 막론하고 중국인의 사회적-문화적 정체성을 가진 모든 사람을 포괄한다. 국적이 생활과 활동의 현실적 조건인 만큼 그 취득 여부를 정체성 판단의 기준으로 삼기 어렵기 때문이다.

 

더구나 근대적 국적제도가 자리 잡기 이전 역사 속의 화교를 고찰하는 데는 국적의 기준이 의미가 없다. 사실 화교란 말이 널리 쓰이게 된 것은 19세기 말 이후의 일이다. 그 전에 중국 밖의 중국인은 흔히 당인(唐人)’이나 한인(漢人)’이란 이름으로 통했다.

 

 

우리가 아는 화교사회가 만들어지기까지

 

<바이두백과> “화교(华侨)‘ 조에는 화교 이주의 연혁이 4개 단계로 나뉘어 있다.

 

1: -송 시대(618-1270). 교역의 발전에 따라 동남아 각지에 중국인 거주집단이 형성되었다. 그 총인구는 10여만 명으로 추정된다.

2: --청 시대(1271-1840). 교역의 증가에 따라 더 많은 중국인이 해외로 진출, 여러 지역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총인구는 100여만 명으로 추정된다.

3: 아편전쟁 이후(1841-1949). 청 왕조가 혼란에 빠지면서 인구의 해외유출이 격증하는 가운데 동남아의 경제개발이 중요한 출구가 되었다. 화교 인구는 1천만 명을 넘어섰다.

4: 1949년 이후. 화교 인구는 4천만 명 선까지 늘어났고, 아직도 동남아의 비중이 크기는 하지만 미국, 캐나다, 유럽, 오스트레일리아 등 서양 지역의 비중도 크게 자라났다.

 

이 연혁에서 화교집단의 팽창 속도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1기와 제2기에는 화교집단의 규모가 10배로 커지는 데 6백 년 전후의 시간이 걸린 반면 제3기에는 백여 년에 불과했다는 사실이다. 1기와 제2기가 끝날 때 중국 인구에 대한 화교의 비율은 0.1~0.2% 수준이었는데 제3기가 끝날 때는 2%를 넘어서 있었고 지금은 3% 선에 도달해 있다.

 

2기까지(아편전쟁 이전) 동남아 화교 중 다수는 현지인과 결혼해 혼혈 자손을 남겼다. 현지 언어와 문화에 친숙한 이 후손 집단이 오랫동안 화교사회의 주축이었다. 19세기에 신규 이민이 격증하면서 경제적-문화적 주도권을 넘겨받았다. 서서히 약화해 오던 이주민사회의 중국성(中國性)’이 거꾸로 강화되는 계기였다.

 

중국의 수출품 중 상업적-정치적 가치가 가장 큰 것은 바로 사람들이다. 배마다 화물 외에 부지런한 일꾼 수백 명을 소중한 수입품으로 싣고 온다. 그들은 쿨리나 막노동으로 시작하지만 검소하게 살며 부지런히 일해 약간의 재산을 모은 다음 장사에 투자해 조심스레 키운다. 많은 사람이 나중에는 자기 사업을 가지고 상당한 금액을 중국의 친척들에게 매년 보낼 수 있게 된다.“(스탬포드 래플즈 <자바의 역사> . 필립 큔 <타인들 속의 중국인>에서 재인용)

 

싱가포르 창립자로 이름을 남긴 래플즈(1781-1826)1816년에 낸 책의 이런 대목을 보면 제3기 이주 양상은 <바이두백과>의 구획보다 훨씬 일찍 시작된 것 같다. 1819년 설립된 싱가포르가 화교의 나라로 발전하는 데는 영국인들의 이런 인식이 뒷받침이 되었을 것이다.

 

 

본국과 부쩍 가까워진 근대 화교

 

화교사회의 변화 과정을 살펴보며 중력 법칙이 떠오르는 대목들이 있다. 우선, 두 물체 사이의 인력이 두 물체의 질량에 비례한다는 점. 화교사회의 중국성이 일반적으로 잘 지켜지는 것은 중국의 질량이 워낙 크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더 흥미로운 대목은 거리의 제곱에 따라 인력이 줄어드는 제곱 반비례(inverse square)’의 원리다. 중국과 동남아 사이의 실질적 거리가 국제정세의 변화와 교통-통신의 발달에 따라 줄어들면서 교민사회와 본국 사이의 인력이 커진 것이다.

 

19세기 초까지 동남아 화교 중 본국에 다니는 사람은 상인과 선원 등 소수에 불과했다. 그런데 19세기 중엽부터 사정이 바뀌었다. 태평천국의 난 등 전란으로 인한 집단이주가 늘어나고 중국의 개항에 따라 왕래가 쉬워졌다. 3(아편전쟁 이후)의 신규 이주자들은 앞선 이주자들에 비해 생활방식을 잘 바꾸지 않았고, 본국의 일에 관심도 많았다.

 

19세기 말까지 중국의 위기 심화에 따라 동남아 화교들도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국내에 비해 인력과 자금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쑨원(孫文, 1866-1925)이 혁명운동을 위한 지원을 화교사회에서 찾게 된 상황이다.

 

 

동남아 화교에게 유연성을 배운 쑨원(孫文)

 

위인전을 섭렵하던 어린 시절 전혀 위인답지 않아 보이던 인물 하나가 쑨원이었다. 과대망상증 환자처럼 보이기도 하고 기회주의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지금도 인간적 존경심은 느끼지 않는다. 다만 정치사상으로서 삼민주의(三民主義)의 가치는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

 

삼민주의도 보편타당성을 가진 정치사상은 아니고, 뜻이 명확하지 않은 내용이 많다. 예를 들어 민생(民生)’을 놓고 공산당 쪽에서는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뜻으로 해석해 왔으나 국민당 쪽에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민족사상도 만주족 배척 등 초기의 배타적 종족주의에서 중화민족건설의 대승적 차원으로 나아가기는 했지만 ‘5족협화(五族協和)’ 수준이었다. ‘다민족의 현실과는 거리가 있었다.

 

정치사상으로서 삼민주의의 가치는 그 완결성이 아니라 유연성에 있다. 그 유연성은 입력 소스가 다양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쑨원은 소년 시절을 하와이에서 지냈고 일본에서 여러 해 체류했으며, 미국과 유럽을 여행했고 동남아를 아홉 차례나 방문했다. 국내의 활동 지역도 변화가 가장 빠르던 광저우-홍콩 일대였다. 서로 다른 정치적 수요가 제기되고 있던 여러 곳에서 지원과 지지를 호소하는 동안 그 시대의 정치적 과제를 폭넓게 수렴한 결과가 삼민주의로 나타난 것이다.

 

민권사상에서 유연성이 두드러진다. 쑨원은 민권을 백성의 권리인 정권(政權)’과 국가의 권리인 치권(治權)’의 결합으로 보았다. ‘정권만을 내세우는 근대 민주주의 풍조와 달리 치권을 나란히 내세운 데서 서양에 맹종하지 않는 현실감각을 느낀다. ‘권위주의로 많은 비판을 받았던 싱가포르 지도자 리콴유도 여기서 배운 바가 있었을 것이다.

 

 

21세기의 화교는 중국에게 어떤 존재?

 

우리가 대개 떠올리는 화교의 모습은 19세기 후반에 빚어진 것이다. 그 이전의 해외 중국인들은 중국을 별로 의식하지 않고 살았다. 그들의 관심은 거대한 제국보다 자기 고향, 자기 친족에게만 쏠려 있었다.

 

중화제국은 국내에서든 해외에서든 노백성(老百姓)이 걱정해줄 필요가 없는 막강한 존재였다. 그 힘을 어떻게 피해가고 어떻게 이용할 지만이 노백성의 관심사였다. 그런데 19세기 들어 걱정해줄 필요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열강의 침략에 앞서 내부의 구조적 문제들이 궤도를 벗어난 것이다.

 

필립 큔은 <타인들 속의 중국인>(2008)에서 18-19세기 해외 이주의 급증을 그보다 더 큰 국내 이주의 증가에서 파생된 현상으로 해석한다. 쓰촨성 인구가 1722230만 명에서 1776660만 명으로 늘어나는 과정에서 340만 명의 이주민이 유입한 사실을 예로 든다. 여러 지역 출신 이주민들이 어울린 쓰촨에서는 비밀결사의 큰 역할 등 화교사회의 특징적 현상들이 앞서서 나타났다.

 

19세기에 빚어진 화교의 모습이 지금 다시 바뀌고 있다. 이주 제4(1949년 이후)의 초기에는 중국의 국제적 고립 때문에 해외 이주가 극히 적었다. 1980년대 이후 해외 이주가 늘어나기 시작했고, 그 주요 대상지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이다. 미국의 중국인제외법(Chinese Exclusion Act, 1882) 19세기 말 이래 서방국의 중국 이민 거부 정책도 이 무렵까지는 철회되어 있었다.

 

새 이민집단의 주축도 재산가와 전문직 종사자들로 바뀌었다. 지금 중국 인구의 3% 수준인 화교의 문화적-경제적 역량은 인구 비율보다 훨씬 크다. 게다가 교통-통신 수단이 발전하고 중국어가 통일되어 있는 21세기 상황에서 화교에게는 중국의 진로에 큰 영향을 끼칠 잠재력이 있고, 현 정권을 맹목적으로 지지하지도 않는다. 1900년대에 쑨원의 혁명노선이 화교 민심의 수렴으로 성공을 거둔 것처럼, 지금의 중국 지도자들도 국내 민심 못지않게 화교 민심에 유의하지 않을 수 없다.

 

 

https://en.wikipedia.org/wiki/Overseas_Chinese#/media/File:Commercant_chinois_Hanoi_2.jpg 1885년경 하노이의 화교 상인. 중국 내 상인의 모습과 아무 차이가 없다.

 

https://en.wikipedia.org/wiki/Overseas_Chinese#/media/File:Old_Indonesian_Peng_family.jpg 후베이성 출신 화교 2-3세대의 가족사진(1967). 초기 화교는 노동력을 가진 남자들이 혼자 나가는 일이 많았던 반면 후기 화교는 온 가족이 함께 이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https://en.wikipedia.org/wiki/Arthur_Chung#/media/File:President_Arthur_Chung.jpg 1853-79년의 기간 중 영국령 기아나에 수송된 14,000명의 쿨리는 태평천국의 난을 피해 이동한 남중국 인구의 일부였다. 그 후손의 하나인 아서 충(1918-2008)은 기아나 독립 후 첫 대통령으로(1970-80) 아시아 밖의 첫 중국계 국가원수가 되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Overseas_Chinese#/media/File:Map_of_the_Chinese_Diaspora_in_the_World.svg

https://en.wikipedia.org/wiki/Overseas_Chinese#/media/File:Chinese_Diaspora_By_Country.png 국가별 중국계 인구 규모.

 

https://en.wikipedia.org/wiki/Chinatown#/media/File:Chinatown_manhattan_2009.JPG 뉴욕시의 9개 차이나타운 중 가장 큰 곳이 맨해튼에 있다.

 

https://en.wikipedia.org/wiki/Chinatown#/media/File:Lane_of_Chinatown_(6760133489).jpg 멜버른의 차이나타운. 1901년부터 중국인 이주를 봉쇄하던 오스트레일리아의 백호(白濠)주의정책은 1949-73년 기간 중 점진적으로 철회되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Sun_Yat-sen#/media/File:Sun_Yat-sen_and_Chiang_Kai-shek.jpg 쑨원과 장제스. 쑨원은 이 청년이 자기 동서가 될 줄 몰랐다.

 

https://en.wikipedia.org/wiki/Sun_Yat-sen#/media/File:Sun_and_Soong_in_Kobe.jpg 1924년 쑹칭링과 함께 일본 고베를 방문한 쑨원. 쑨원은 1905년 요코하마에서 결혼했던 오츠키 가오루(1888-1970)를 다시 찾지 않았으나 오츠키의 외손자가 2011년 우한에서 열린 신해혁명 백주년 기념식에 특별히 초대받았다.

 

 

 
Posted by 문천

 

풀란드와 러시아 국경 위에 한 마을이 있었다. 아직 '국가' 개념이 엄밀하지 않던 시절, 이 마을이 어느 나라에 속하는지 명확하지 않은 채로 긴 세월을 지냈다. 어느 날 두 나라 사이에 조약이 체결되고 정확한 국경을 획정하기 위해 측량기사들이 파견되었다. 작업을 하고 있는 기사들에게 마을사람들이 다가가 물었다.

"우리 마을이 어느 나란가요?"

"국경에서 폴란드 쪽으로 백 미터쯤 들어와 있습니다."

그 말을 듣자 마을사람들이 기뻐하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기사들이 물었다.

"폴란드 쪽이 된 것이 어째서 그렇게 좋은가요?"

"아니, 몰라서 물어요? 이제 그 지긋지긋한 러시아 겨울을 겪지 않게 되었잖아요?"

 

데이비드 그레이버(1961-2020)가 <빚, 5천 년의 역사>(2011)에 폴란드 유대인 출신인 어머니에게 들은 우스개라고 적은 이야기다. 나는 '운동가'를 좀 미심쩍게 보는 경향이 있어서 '오큐파이 (월스트리트)' 운동(2011)의 주역으로 꼽히는 그의 책에 손이 잘 가지 않았는데, 유작인 <The Dawn of Everything> (2021, 데이비드 웽그로우와 공저)을 보고 매우 좋아하게 되었다. 참신한 관점을 탄탄하게 서술하는 자세가 마음에 들고, 유머감각도 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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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덩샤오핑 시대의 개혁개방에서 개방을 대표하는 것이 경제특구다. 1979년에 최초의 특구로 지정된 것은 선전(深圳), 주하이(珠海), 샤먼(廈門)과 산터우(汕頭)의 네 곳이었고, 상하이(上海), 톈진(天津) 14개 지역이 추가된 것은 5년 후의 일이다.

 

최초의 4개 특구 중 선전과 주하이는 홍콩, 마카오와 연계된 곳이다. 그런데 동남해안의 샤먼과 산터우는? 상하이나 톈진에 비해 중국의 산업구조에서 비중이 훨씬 작은 이 도시들이 먼저 특구로 지정된 까닭은 동남아 화교사회와의 관계에 있었다.

 

 

남해안에서 그친 중화제국의 확장

 

중국인의 동남아 이주는 오랜 기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초기에는 농업의 확장에 따른 이주였다. 황하 유역에서 출범한 중국의 농업문명은 춘추-전국시대에 장강 유역으로, 남북조시대 이후 중국 남해안으로 넓혀진 데 이어 10세기경부터 동남아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교역의 확장에 따른 이주도 10세기경 시작되었다. 이곳을 지나가는 남아시아(인도), 서남아시아(페르시아)와 중국 사이의 교역이 증가하면서 새로운 항로를 관리하는 시스템이 필요하게 되었고, 그 역할을 맡는 중국인 집단들이 나타난 것이다. 15세기 초 정화(鄭和)의 항해 때 이 집단들의 존재가 확인된다.

 

정화 함대는 남양(남중국해-인도양) 교역을 조공무역 형태로 정리하려 했다. 제국의 해양 방면 확장으로 이어질 수 있는 길이었다. 명나라가 이 길을 포기하자 교역은 밀무역 형태로 진행되었고, 그 확대에 따라 동남아 각지에 중국인 집단이 자리 잡았다.

 

16세기에 중국의 은() 수입이 늘어나면서 규모가 커진 밀무역은 왜구의 형태로 나타났고 타이완의 정성공(鄭成功) 세력으로 이어졌다. 1680년대 타이완 평정 후 밀무역 세력은 동남아 각지로 퍼져나갔다. 여러 가지로 나타난 동남아 중국인 집단의 모습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것이 18-19세기 보르네오의 공사공화국(公司共和國, Kongsi Republic)’이다.

 

공사회사의 뜻으로 지금은 쓰는 말이지만, 화교사회에서는 조직의 뜻으로 쓰였다. 혈연이나 지연의 모임을 회관(會館)’이라 했고 그중 규모가 큰 것을 공사라 했다.

 

 

유럽인을 놀라게 한 민주적 공사(公司)공화국

 

이슬람은 8세기부터 동남아 지역에 알려졌으나 이슬람 통치의 확산은 1400년경 말라카 술탄국 설립으로 시작되었다. 교역의 확대가 그 배경이었고, 대부분 술탄국은 항구도시를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정화 함대가 동남아 이슬람화를 촉진했다는 학설이 흥미롭다. 정화가 팔렘방에서 무슬림인 시진경(施進卿)에게 힘을 몰아준 일이 떠오른다.

 

술탄국들도, 16세기부터 이 지역에 진출한 유럽인들도, 교역로에 관계되는 항구와 해안지대에만 관심을 쏟았다. 면적이 한반도의 세 배가 넘는 보르네오의 내륙은 늦게까지 오지로 남아있었다. 유럽인들은 이곳을 식인종이 우글대는 최악의 야만지대로 상상했다.

 

18세기에 보르네오 내륙의 금광과 주석광산이 개발되면서 지역 술탄들이 중국인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중국인들은 광산을 중심으로 농지를 개간해 경제적 자립성을 확보하면서 인근 술탄국과의 교섭을 통해 정치적 자립성도 키워나갔다. 이슬람의 통치개념은 영토가 아니라 인민을 대상으로 한 것이어서 술탄국의 양보가 어렵지 않았다.

 

19세기 들어 보르네오 내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유럽인들에게 이 공사들의 존재가 놀라운 현상이었다. 각급 지도자를 선거로 뽑는 민주적정치방식을 이 야만지대에서 발견한 것이 무엇보다 놀라운 일이었다. 그래서 공화국이란 이름으로 부른 것이다.

 

18세기 중엽에서 19세기 중엽 사이에 서부 보르네오에는 국가조직에 가까운 중국인 공사가 여럿 나타났다. 자료가 그중 잘 남아있는 란팡공사(蘭芳公司, 1777-1884)를 보면 정치 수준이 당시 어느 국가에 못지않았다. 란팡공사는 1822-24, 1850-54, 1884-85, 세 차례 전쟁 끝에 해체되고 네덜란드(동인도회사)의 보르네오(남부) 지배가 완성되었다.

 

 

교목을 휘감는 덩굴처럼

 

스털링 시그레이브는 <변방의 영주들>(1995)에서 화교사회의 특징 하나를 시선을 피하는 능력(invisibility)”으로 꼽는다. 16세기 이후 유럽인이 동남아에서 기존 세력을 격파하고 지배력을 넓히는 과정에서 화교사회를 큰 위협으로 인식하지 못했고 유럽세력의 통치 아래 화교사회는 계속해서 힘을 키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되놈이 번다는 우리 속담을 시그레이브가 들었다면 크게 공감했을 것 같다.

 

화교들은 교목을 휘감는 덩굴처럼 현지 정치권력을 둘러싸고 은밀히 실력을 키웠다. 정복하러 온 유럽인의 눈에는 쓰러트릴 대상으로 왕과 술탄들만 보였다. 화교들은 새 지배세력을 휘감고 자기네 생태를 이어갔다. 보르네오의 공사공화국들은 화교사회가 직접 정치권력을 운용한 예외적 사례다. 워낙 오지라서 휘감고 기댈 교목이 없었기 때문이다.

 

최초의 경제특구 중 푸젠성의 샤먼과 광둥-푸젠 경계의 산터우는 가장 많은 화교를 내보낸 지역의 중심도시다. 이 도시들이 자리한 동남해안 지역은 송나라 때 마치 식민지처럼 개발된 곳이었고, 서방 교역이 활발하던 원나라 때는 번영을 누리다가, -청 시대의 해금(海禁)정책으로 손발이 묶인 곳이다.

 

-청 시대에 동남 지역 사람들은 공식적 출세의 길이 좁았다.(조선시대 서북인과 비슷한 처지였다.) 그들은 역량을 밀무역 등 법외(法外)사업에 쏟았다. 국내에 살면서도 국가체제와 거리를 두고 자기네 질서체제를 병행했다. 해외에서 좋은 활동-생활 조건을 누릴 길이 있으면 주저없이 떠났다.

 

오랜 세월에 걸친 국가와의 불편한 관계 경험이 해외 화교에게 중요한 자산이 아니었나 생각이 든다. 무조건 충성하거나 목숨 걸고 저항하는 대신 이용할 기회를 찾되 손해의 위험을 피하는 냉정한 자세. 중화제국을 상대로 다듬어 온 이 유연한 자세가 동남아 화교가 현지 권력을(토착세력이든 식민세력이든) 상대하는 기본자세가 되었다.

 

 

화교의 나라싱가포르 번영의 비결

 

싱가포르가 화교사회 번영의 대표적 현장이 된 것은 화교의 동남아 진출이 활발한 시기에 건설된 도시이기 때문이다. 적도 부근 말레이반도 끝의 이 섬에(서울과 비슷한 면적) 영국동인도회사 기지가 설립될 때(1819) 인구는 백여 명에 불과했다. 싱가포르를 둘러싼 말레이시아 인구의 중국계 비율이 약 22%인 데 비해 싱가포르는 약 75%화교의 나라.

 

영국 지배 아래 싱가포르의 성장은 이해할 만한 것이다. 교통의 요지라서 대영제국의 자원이 투입될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영국이 물러날 때 말라야연방에 참여했다가(1963) 2년 후 연방에서 쫓겨나 진짜 독립을 강요당한 후, 자원도 없고 배경도 없는 이 도시가 세계적 지상낙원으로 발전한 것은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다.

 

싱가포르 번영의 원인으로 빠트릴 수 없는 것 하나가 리콴유(1923-2015)의 지도력이다. 독립 전의 자치 단계부터 31년간(1959-90) 수상직을 지키는 동안 외부 평가가 크게 엇갈린 인물이다. 경제적 성공은 찬양을 받았지만 권위주의적통치방식은 많은 비판을 받았다.

 

바로 이 엇갈림 속에 성공의 진짜 원인이 있었던 것 아닐까. 리콴유의 노선은 화교사회의 실용주의를 대표한 것이었다. 민족주의든 민주주의든 특정 관념의 지배를 꺼리는 실용주의다. 독립 대신 말라야연방에 참여하려 애쓴 것도, 4개 공용어(중국어, 말레이어, 타밀어, 영어) 중 영어를 대표공용어로 삼은 것도, 모두 이 실용주의의 표현이다.

 

국가와의 불편한 관계 경험에서 우러나온 실용주의다. 마이클 소니가 중국 동남해안 지역의 사회사를 다룬 <통치를 받는 재간 The Art of Being Governed>(2017)은 제임스 스코트의 <통치를 피하는 재간 The Art of Not Being Governed>(2009)에 짝을 맞춘 제목이다. 두 책 모두 국가를 대하는 인민의 탄력적인 자세를 보여준다. 개혁개방기의 중국에 싱가포르가 준 도움에는 자본 유입만이 아니라 국가의 역할에 대한 실용주의적 가르침도 있었을 것 같다.

 

 

https://en.wikipedia.org/wiki/Dayak_people#/media/File:Tari_Hudoq.jpg 보르네오 원주민 다야크족의 탈춤.

 

https://en.wikipedia.org/wiki/Lee_Kuan_Yew#/media/File:Lee_Kuan_Yew_Cohen.jpg 윌리엄 코언 미 국무장관과 만나는 리콴유(2000). 1990년 수상직 퇴임 후 그의 명망이 더 높아진 것은 국가주의의 세계적인 약화 때문일 것 같다.

 

https://en.wikipedia.org/wiki/Jewel_Changi_Airport#/media/File:JewelSingaporeVortex1.jpg 싱가포르 창이공항의 시세이도 삼림계곡(2019 준공). 공간설계의 끝판왕이라 할 이 시설이 도시국가 싱가포르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https://en.wikipedia.org/wiki/Singapore#/media/File:KITLV_-_103763_-_Chinese_and_Malaysian_women_at_Singapore_-_circa_1890.tif 싱가포르의 중국인-말레이인-인도인 여성이 함께 찍은 1890년경의 사진. 싱가포르에서 721일은 종족 화합의 날이다.

 

https://www.amazon.com/Art-Not-Being-Governed-Anarchist/dp/0300169175/ref=sr_1_1?crid=2PU22679S55VL&keywords=being+governed&qid=1684117426&sprefix=being%2520governed%2Caps%2C265&sr=8-1

https://www.amazon.com/Art-Being-Governed-Everyday-Politics/dp/0691197245/ref=sr_1_2?crid=2PU22679S55VL&keywords=being+governed&qid=1684117487&sprefix=being%2520governed%2Caps%2C265&sr=8-2 <통치를 피하는 재간><통치를 받는 재간>. 국가의 역할에 관한 새로운 연구동향을 보여주는 책들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