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Southeast Asia)”란 말은 19세기 초부터 쓰였으나 그 가리키는 범위는 들쑥날쑥했다. 냉전 종식 후 아세안(ASEAN 동남아시아국가연합)의 역할이 자라남에 따라 아세안 10개국의 영역을 가리키는 뜻이 분명해졌다. 유엔 통계국에서 세계를 20개 남짓 지역으로 나누는 지역통계 기준(geoscheme)에도 그 무렵부터 자리 잡았다.

 

유엔 통계국 기준에는 아시아의 다섯 개 지역이 들어있다.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북아시아라 할 수 있는 시베리아는 유럽국 러시아의 영역이다.)

 

동아시아-한자문명, 남아시아-힌두문명, 서아시아-이슬람문명, 중앙아시아-유목문화가 바로 떠오르는 데 비해 동남아시아의 역사-문화적 통합성은 일견 분명하지 않다. 다른 어느 지역보다 많은 언어가 사용되고, 강력한 정치조직의 역사도 없고, 종교의 분포도 복잡하다.

 

 

중화제국의 확장, 바다로 이어지나?

 

동남아시아(이하 동남아”)는 중국(동아시아)과 인도(남아시아) 사이의 지역이다. 양쪽 모두 동남아보다 문명이 일찍 발달하고 인구가 많은 지역이었다. 그래서 인도차이나란 이름이 붙기도 했고, 16세기 서양인의 진출 전에 인도 및 중국과 접촉이 많았다.

 

10세기 이전의 중국이 동남아와 직접 마주친 것은 해안을 따라 이어지는 남월(南越, 북베트남)뿐이었다. 다른 곳에서는 교역을 원하는 세력이 조공 명목으로 보내는 공물이 쓸 만하면 받아들이는 일이 단속적으로 있었고, 중국 쪽에서는 사절을 보내지 않았다. 현지 사정을 정확하게 파악하려는 노력이 별로 없었다.

 

남송 때인 1225년에 나온 조여괄(趙汝适)<제번지(諸蕃志)>가 달라진 사정을 보여준다. 조여괄이 천주(泉州) 시박사(市舶司, 교역 감독 관서)를 담당하는 동안 모은 정보를 묶은 이 책에는 가까운 동남아는 물론, 이슬람세계 서쪽 끝 모로코에 관한 정보까지 들어있다. 중화제국이 대륙의 남해안까지 꽉꽉 채우고 바다로 넘쳐나가기 시작하는 모습이다.

 

원나라 때(1271-1368) 교역의 꾸준한 증가에 몽골제국의 구조 문제가 겹쳐져 해상활동이 크게 확대되었다. 원나라는 서쪽의 일칸국과 밀접한 관계였는데 육로가 적대세력의 위협을 받으면서 해로에 많이 의지하게 되었다. 마르코 폴로도 원나라를 떠날 때 일칸국으로 공주를 시집보내는 배를 탔다. 쿠빌라이칸의 일본(1274, 1281)과 자바(1291) 정복 시도도 있었다.

 

쿠빌라이칸 이후 원나라의 쇠퇴에 따라 국가사업으로서 해상활동의 발전은 막혔으나 민간 활동은 계속 확대된 사실을 15세기 초 정화(鄭和) 함대의 활동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중화제국의 확장이 해양 방면으로 이어질지 여부가 결정되는 고비였다.

 

 

해적의 이름으로 나타난 화교집단

 

정화 함대의 활동(1405-33)은 동남아에 관한 많은 새로운 기록을 남겼다. 그중 흥미로운 것 하나가 제1차 항해(1405-07)에 나타나는 수마트라섬 팔렘방(三佛齊)해적진조의(陳祖義)에 관한 것이다.

 

정화 함대가 나가는 길에 팔렘방에 들렀을 때는 진조의의 귀순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들어오는 길에 들렀을 때 그의 귀순이 거짓이라 판정해서 토벌하고, 그를 고발한 시진경(施進卿)을 선위사(宣慰使)에 임명했다. 시진경은 (그 아들딸까지) 현지에서 ()’ 노릇을 했다.

 

수백 척의 배로 넓은 해역을 누비면서 1만여 척 배를 덮쳤다느니, 토벌 때 5천 명을 죽였다느니, 진조의에 관한 기록에는 믿기 어려운 내용이 많다. 실상은 어떤 것이었을까?

 

상당수 중국인이 동남아 지역에 흘러나와 조직활동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광둥(廣東) 출신의 진조의나 항저우(杭州) 출신 시진경처럼 중국 남해안 출신이 많았다. 그리고 시진경이 무슬림이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동남아의 이슬람화가 진행되고 있을 때였다. 불교와 힌두교의 영향을 받은 토착종교가 내륙에는 널리 자리 잡고 있고 항구를 중심으로 해안지역에 이슬람교가 확산되고 있었다. 정화가 팔렘방에 두 번째 들렀을 때는 이슬람화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현지의 경쟁자 중 무슬림인 시진경을 밀어주는 쪽으로 마음을 바꾼 것 아닐까? (함대 간부 중에도 정화를 위시해서 무슬림이 많았다.)

 

 

중세없이 근대를 맞은 동남아시아

 

15세기까지 동남아 지역의 수출품은 향료, 광물, 동식물 등 천연상품뿐이었다. 농업이 발달한 곳은 내륙의 강 유역 몇 곳에 불과했고 제조업도 빈약했다. 교역활동이 늘어나고 유럽인이 진출하면서 16세기에 항구도시들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규모가 작던 내륙의 농업지대도 해안의 상업지대에 식량 등 생필품을 공급하면서 생산력과 인구를 늘려나갔다.

 

확고한 중세적 체제가 자리 잡지 않은 상태에서 근대적 변화를 맞이했다는 점에서 동남아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유럽세력의 일방적 침략을 당한 아프리카와 달리 동남아에서는 여러 방면 문명세력이 엇갈리면서 매우 복잡한 양상이 전개되었다.

 

동남아의 변화는 외부의 작용에 대한 강력한 반작용이 되기도 했다. 중국사를 공부해 온 내게 화교사회의 성격과 역할이 들여다볼수록 흥미롭다. 근대중국의 진로에 영향을 끼친 존재로 서양에만 주목을 쏟아 왔지만 실제로는 남양(南洋)의 역할도 만만찮았다. 홍명희(1888-1968)가 청년 시절의 몇 해를(1914-17) 남양에서 지낸 데도 까닭이 있을 것이다.

 

중국인의 동남아 이주는 농업 방면과 상업 방면에서 이뤄졌다. 농민의 이주가 장기간에 걸쳐 눈에 띄지 않게 진행된 반면 상인들의 이주는 송나라 이후 빠르게 늘어나 조직활동으로 나타났다. 정화 함대는 팔렘방 외에도 여러 곳에서 이런 집단들을 찾아내 활용하려 하였으나 그 후 명나라가 원양항해를 포기하면서 이들은 밀무역의 주체가 되었다.

 

유럽인의 식민지배가 행해진 곳에서는 화교가 준-지배계층이 되기도 했다. 동남아에는 유럽인의 이주가 극히 적었기 때문에 화교들이 기술인력으로 활용되기도 했고 우수한 조직력으로 상업과 제조업에서 유리한 조건을 누리기도 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현지인과 유럽인 양쪽의 미움을 받는 일이 많아 종종 박해를 겪기도 했다.

 

아편전쟁 이후 청나라의 통제력 약화에 따라 화교사회의 역량이 본국에 영향을 끼치는 상황이 펼쳐졌다. 쑨원(孫文)의 민국혁명을 지원하고 개혁개방기 외자 유치에 호응하는 등 잘 알려진 일들도 있지만, -청대에 중국, 특히 남중국의 사회와 경제에 끼친 영향은 앞으로 밝혀질 것이 많다.

 

 

동남아시아는 세계화의 선진지역

 

동아시아에서 바라보는 내게는 동남아의 변화가 중국에 끼친 영향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남아시아, 서아시아, 유럽 등 다른 지역에도 그 영향이 적지 않았다. 근대라는 시대를 겪어내는 과정에서 여러 문명권의 흐름이 뒤얽혀 가장 다양한 현상을 빚어낸 현장이 동남아이기 때문이다.

 

세바스천 콘래드의 <‘글로벌 히스토리란 무엇인가?>(2016)를 읽고 있다. 콘래드는 글로벌의 의미가 연구의 대상(무엇을 바라보느냐?)보다 연구자의 시각(어떻게 바라보느냐?)에 있음을 역설한다. 종래의 월드 히스토리가 여러 지역 역사의 물리적 집합에 그친 것과 달리 글로벌 히스토리는 유기적 결합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월드 히스토리글로벌 히스토리를 우리말로 어떻게 옮길까 잠깐 고민하다가 둘 다 세계사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다만 세계를 물리적 집합체로 보느냐, 유기적 결합체로 보느냐 하는 세계관에 차이가 있는 것이다. 김호동은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2010)에서 라시드 앗 딘의 <집사>세계사의 출발점으로 꼽았지만 세계사는 사마천과 헤로도토스를 비롯해 역사학의 탄생 때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버전이 한 차례 바뀐 것일 뿐이다.

 

근대는 국가주의의 시대였다. ‘세계화의 첫 번째 의미가 국경의 힘이 줄어드는 데 있다. 동남아는 국경의 힘이 약했던 지역이라는 점에서 세계화의 선진지역이었다. 아세안이 유럽연합 버금가는 중요한 지역연합으로 일어설 수 있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동남아 역사의 연구가 종래 부진했던 것은 국가주의 때문이다. 근대 역사학에는 국가를 역사의 주체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고하고 연구 수행에 국가의 지원이 중요하다. 21세기 들어 새로운 연구 성과가 활발하게 나오기 시작한 것은 국가주의의 힘이 빠지고 세계화의 의미가 부각되기 때문이다. ‘세계사의 새 업그레이딩을 위해 동남아 역사 연구의 심화가 필요하다.

 

https://en.wikipedia.org/wiki/Southeast_Asia#/media/File:Masjid_Tua_Wapauwe.jpg 인도네시아는 세계에서 이슬람 인구가 제일 많은(23천만 명) 나라지만 13세기에야 전파되기 시작했다. 말루쿠섬의 와파우웨 모스크(1414)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모스크다.

https://en.wikipedia.org/wiki/Southeast_Asia#/media/File:Sultan_Omar_Ali_Saifuddin_Mosque_02.jpg 1959년에 완공된 브루네이의 오마르 알리 사우푸딘 모스크

 

https://en.wikipedia.org/wiki/Buddhism_in_Southeast_Asia#/media/File:Maitreya_Komering_Srivijaya_Side.JPG 수마트라섬에서 출토된 스리비자야 시대의 미륵불상. 당나라 승려 의정(義淨)은 인도에서 십여 년 체류한 후 귀로에 스리비자야에서 8년간 불경을 번역했다. 7세기 말 인도, 동남아, 중국 사이의 교류 상황을 그의 행적에서 알아볼 수 있다.

 

https://en.wikipedia.org/wiki/Sangley#/media/File:Ming2.jpg 1590년경의 그림에 남아있는 필리핀의 중국인(Sangley) 모습.

https://en.wikipedia.org/wiki/Sangley#/media/File:Sangelys,_detail_from_Carta_Hydrographica_y_Chorographica_de_las_Yslas_Filipinas_(1734).jpg 1734년의 그림에 남아있는 필리핀의 중국인 모습.

https://en.wikipedia.org/wiki/Sangley#/media/File:Mestizos_Sangley_y_Chino_by_Justiano_Asuncion.jpg 1841년경의 그림에 남아있는 필리핀의 중국인 모습.

 

 
Posted by 문천

 

 

 

이스파뇰라는 카리브해에서 면적은 쿠바 다음으로 크고 인구는 제일 많은 섬이다. 동쪽의 도미니카, 서쪽의 아이티, 두 나라가 자리 잡고 있다. 콜럼버스 이래 백여 년간 카리브 해역은 스페인의 텃밭이었지만 17세기에 영국과 프랑스의 활동이 늘어나 1697년 스페인이 이 섬의 서쪽 절반을 생도밍그 식민지로 프랑스에 떼어주기에 이른다.

 

아이티는 찬란한 역사를 가진 나라다. 인류 역사상 노예 반란으로 세워진 유일한 국가이고, 최초의 근대적 공화국 중 하나다. 그러나 이 역사는 영광보다 더 큰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다.

 

아이티는 근대세계사의 물결이 가장 격렬하게 솟구친 현장의 하나다. 근대세계의 모순이 생생하게 드러난 장면들이 그 역사에 겹겹이 포개져 있어서, 그 나라의 역사를 넘어 근대세계사의 흐름을 살펴보는 좋은 창문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청산되지 못한 과거가 사회를 억누르는 힘이 얼마나 큰 것인지 생생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자유와 평등을 꿈도 꾸지 못하던...

 

1789년 프랑스혁명 발발 당시 50여만 명으로 추정되던 생도밍그 인구는 세 개 계급으로 분류된다. 4만 명의 백인, 3만 명의 유색(자유), 그리고 90% 가까운 노예. 유색인은 혼혈인(물라토)과 해방흑인으로 구성되었다.

 

노예 중 현지 출생은 3분의 1이 안 되고 대다수는 아프리카에서 실려왔다. 18세기 중 생도밍그의 노예 수입은 1백만 명에 달했다. 그런데 1789년에 흑인 인구가 50만 명 이하였다는 사실은 높은 사망률을 말해준다. 노예의 생활조건을 개선해 주기보다 죽을 놈들 죽게 놔두고 더 많이 사 오는 것이 노예주에게 경제적선택이었다.

 

17898만인의 자유와 평등을 규정한 인권선언이 파리에서 나오고 17918월 생도밍그 노예들이 자유와 평등을 향한 조직적 투쟁을 시작했다. 2년이나 걸렸을까?

 

인간 이하의 상황에 놓여 있던 노예들은 자유고 평등이고 꿈도 꾸지 못하고 있었다. 본국의 혁명에 먼저 자극받은 것은 노예주와 노예의 중간 위치에 있던 유색인이었다. 그들은 보편적 자유와 평등이 아니라 자기네 자유와 자기네 평등(백인과의)을 늘리는 기회로 혁명을 받아들였다.

 

중간계층이 노예를 외면한 경향을 집단이기주의로 비난하는 것은 시대착오의 함정이다.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내세우는 시대였지만 정작 인간이 누구인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았다. 당대의 진보적 사상가 중에도 흑인노예를 인간으로 인정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왕당파-혁명파의 대립, 유색인의 동요 등 어지러운 상황이 진행되는 가운데 노예들에게도 우리는?” 하는 생각이 서서히 떠오른 것이다.

 

 

이념에 투철했던 지도자 루베르튀르

 

아이티혁명(1791-1804)의 의미를 널리 알린 책이 C L R 제임스의 <블랙 자코뱅>(1938)이다. 아이티 국부(國父)” 투생 루베르튀르(1743-1803)를 중심에 둔 책이다.

 

루베르튀르는 현지에서 노예로 태어났다가 자유를 얻은 사람이었다. 현지 출생 노예 크레올은 아프리카에서 실려 온 노예보다 지배자의 문화에 길들여 있어서 현장감독과 가사노동 등 비교적 중요한 역할을 맡다가 자유민으로 풀려나는 일이 많았다.

 

제임스가 루베르튀르를 흑인 자코뱅이라 부르는 것은 혁명이념에 투철했던 인물로 보기 때문이다. 50세 가까운 나이에 혁명을 맞은 루베르튀르는 지배계층의 타도보다 실력 배양에 힘쓰고 파괴와 살상을 최소화하는 전략-전술을 꾸준히 택했다. 그리고 많은 혁명군 지도자들이 자기 소속집단의(물라토, 해방노예, 크레올, 수입 노예) 이해득실에 따라 움직인 것과 달리 광범한 피지배층 전체의 해방을 확실한 목표로 삼았다. 이런 태도가 만인의 자유와 평등이념에 부합하는 것으로 제임스는 해석했다.

 

17942월 프랑스 혁명정부가 식민지까지 포함하는 노예제 전면 철폐를 선포하자 영국과 스페인에 의지해서 본국에 대항하던 반란군이 자유와 평등의 프랑스에 귀순해서 영국과 스페인을 물리쳤다. 그러나 1801년 생도밍그 혁명세력이 자치헌법 제정 등 독립성을 강화하는 움직임을 보이자 나폴레옹이 대규모 병력을 파견해서 루베르튀르를 체포, 본국으로 압송했다. 이어진 독립전쟁에서 프랑스군이 패퇴한 후 180411일 아이티 독립이 선포되었다.

 

 

아이티 혁명사의 발굴과 재발굴

 

C L R 제임스(1901-89)는 카리브해의 다른 섬(영국령 트리니다드) 출신이다. 그가 아이티 혁명사를 쓴 것은 당시까지 민족주의 사관에 묶여 있던 아이티 역사에서 노예 해방운동의 주체성을 찾아 카리브해 지역 전체의 역사로 공유한 것이다.

 

그리고 근 60년이 지나 아이티혁명의 의미를 새로 밝히는 책이 나왔다. 미셸-롤프 트루이요(1949-2012)<침묵에 묻히는 과거 Silencing the Past>(1995). 아이티 출신으로 19세에 뒤발리에 독재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가 인류학자가 된 트루이요는 아이티 사회의 여러 성분이 역사 속에서 뒤얽히는 실제 모습을 그려냈다.

 

민족주의 사관에서는 국민으로, 사회주의 사관에서는 민중으로 뭉뚱그려졌던 사회 구성요소들을 분석함으로써 트루이요는 독립 후에도 계속된 아이티 역사의 비극성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역사의 짐이 될 과도한 폭력성의 원인이 어디에 있었던 것인가?

 

대표적 사례가 독립선언 직후 백인과 물라토 수천 명을 죽인 대학살이었다. 이 학살로 신생국 아이티는 국제사회의 외면을 받게 되었고 20년 후 고립을 못 견뎌 구걸하듯 프랑스의 승인을 받기 위해 막대한 배상금을 약속해야 했다. 아이티가 프랑스에게 배상금을 내야 한다니! 이 배상금은 오래도록 아이티의 멍에가 되었다. (애초의 15천만 프랑이 1838년에 9천만 프랑으로 조정되었지만 그 가치는 지금의 3백억 달러에 달한다. 2003년 아이티 정부가 1943년까지 지불된 배상금을 반환하라며 210억 달러를 프랑스에 요구했으나 이듬해 아리스티드 대통령이 쿠데타로 축출된 후 이 요구를 취소했다. 2016년 프랑스 의회는 이 배상금의 근거가 되었던 1825년 조례를 폐기하는 상징적 조치를 취했다.)

 

이 학살은 독립선언 후 황제가 된 장-자크 데살린의 소행이었다. 여러 해 동안 루베르튀르 휘하에서 활동한 데살린은 18024월에 프랑스군 쪽으로 넘어갔고, 6월 루베르튀르 체포에 앞장서거나 협력했다는 의심을 받는다. 그리고 10월에 다시 항전으로 돌아서서 독립전쟁을 지휘하고 황제가 되었다. 변절과 배신에 대한 의심을 피하고 선명성을 과시하기 위해 무자비한 학살을 명령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따른다.

 

 

승리 아닌 생존을 위해 쓰는 역사

 

트루이요는 역사학계를 가리켜 길드(guild)”란 말을 많이 쓴다. 내부 원리에 따라 행동양식이 결정되는 폐쇄적 조직이라는 뜻이다. 역사로부터 목소리를 빼앗는 힘이 사회의 여러 층위에서 여러 방향으로 일어나는 현상을 그는 지적하는데, 대다수 역사학자는 그 힘에 저항하기보다 그 하수인 노릇을 하는 것으로 그는 본다.

 

약으로 쓸 쓴소리로 받아들여야겠다. 사실 이 책은 미국에서 역사학 입문 교재로 널리 쓰이게 되었다. 내용에 담긴 아이티 역사나 노예해방 역사에 앞서 역사학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많은 역사학 교수들이 환영하는 것이다.

 

역사는 승리자가 쓰는 것이란 말이 있다. 맞는 말이다. 역사 쓰는 수단을 승리자가 가지니까. 집권세력이 민족주의에 쏠릴 때는 민족주의 사관이, 민중주의에 쏠릴 때는 민중주의 사관이 이용된다. 공격 대상을 찾는 손쉬운 역사관은 동어반복을 벗어나지 못한다. 트루이요는 아마 역사는 생존자가 쓰는 것이라고 고쳐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역사를 쓰는 것은 승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서라고.

 

아이티는 부러워할 사람이 없는 나라다. 2010년의 끔찍한 대지진 외에도 태풍, 유행병 등 재해가 끊임없는 데는 정치가 어지러운 탓도 있을 것이다. 1990아이티 최초의 제대로 된 선거로 당선된 아리스티드 대통령이 2004년 재차 축출된 후 안정된 정권이 다시 나타나지 않고 있다. 20217월 암살당한 모이즈 대통령의 후임자조차 아직도 선출되지 못하고 있다.

 

지구 반대편의 이런 나라 역사에서 많은 교훈을 얻게 된 사실이 놀랍다. 일본과의 화해를 서두르는 한국인들에게 아이티의 프랑스와의 1825화해는 어떤 가르침을 줄까. 제임스와 트루이요 같은 걸출한 학자들의 노력 덕분이기도 하지만, 대다수 인류가 비슷한 문제들을 마주하게 하는 세계화의 힘을 새삼 절감한다.

 

 

https://en.wikipedia.org/wiki/History_of_Haiti#/media/File:D072-_une_sucrerie_%C3%A0_saint-domingue_-_Liv3-Ch16.png 아이티의 사탕수수 농장. 자본주의체제 구축 과정에서 설탕의 역할은 에릭 윌리엄스의 <자본주의와 노예제>(1944)로 밝혀지고 시드니 민츠의 <설탕과 권력>(1986)으로 널리 알려졌다. 18세기의 생도밍그는 프랑스 식민지 중 경제적 가치가 가장 큰 곳이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Toussaint_Louverture#/media/File:Toussaint_au_Fort_de_Joux.jpg 18026월 프랑스로 압송된 투생 루베르튀르는 감금 상태에서 이듬해 4월에 죽었다. 그의 지도력이 제거된 사실을 제임스는 <블랙 자코뱅>에서 아쉬워해 마지않는다.

 

https://en.wikipedia.org/wiki/Jean-Jacques_Dessalines#/media/File:Jean_Jacques_Dessalines_holding_a_mutiliated_Saint_Dominican_woman's_head.046.jpg 백인 학살에 나선 장-자크 데살린(1758-1806). 1802년 루베르튀르를 배신한 의심을 받은 그는 4년 후 휘하 장군들의 배신으로 암살당했다.

 

https://en.wikipedia.org/wiki/Jean-Pierre_Boyer#/media/File:President_Jean-Pierre_Boyer_of_Haiti_(Hispaniola_Unification_Regime)_Portrait.jpg 가장 오래(1818-1843) 대통령을 지낸 장-피에르 부와이예(1776-1850)는 전임자 알렉상드르 페숑(1770-1818)과 함께 물라토 출신으로 혁명기간 중 반동적 입장에 서 있다가 독립전쟁 막바지에 전향해서 권력을 쥐었다. 민심의 지지가 약한 그는 프랑스와 굴욕적 조건으로 수교를 맺었다(1825).

 

https://en.wikipedia.org/wiki/History_of_Haiti#/media/File:Citadelle_Laferri%C3%A8re_Aerial_View.jpg 앙리 크리스토프(1767-1820)가 세운 라페리에르 요새는 아메리카대륙에서 가장 큰 요새다. 남부의 페숑과 맞서 북부에서 앙리 1세로 군림하는 동안(1811-20) 이런 요새와 궁전들을 열심히 지은 데서도 당시 아이티 권력자들의 불안한 심리를 엿볼 수 있다.

 

https://en.wikipedia.org/wiki/Jean-Bertrand_Aristide#/media/File:DD-SD-99-03743.jpg 1990년 취임 8개월 만에 쿠데타로 축출된 아리스티드 대통령은 1994년 미국의 지원으로 귀국하고 2000년 다시 당선되었으나 2004년에 또다시 쿠데타로 축출되었다. 아리스티드 측은 미국의 신자유주의 노선에 반대하는 그의 해방신학 때문에 미국이 은연중에 쿠데타를 유도한 것으로 의심한다.

 

 
Posted by 문천

 

밖에서 보면 하나의 조그만 성곽이고, 안에 들어가 보면 큰 마당을 둘러싼 다세대주택이다. 진흙으로 쌓은 투러우(土樓)는 복건, 광동, 강서, 3성이 만나는 영남(嶺南)지역에 지난 수백 년간 지어져 수천 채가 남아있고 200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모양만 봐도 방어용 구조물이다. 혼란의 시대에 비적(匪賊)의 습격을 막기 위해 지었다고들 한다. 그런데 투러우는 평화 시기에도 많이 지어졌다. 방어 대상이 전형적인 비적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여러 인구집단 사이의 긴장관계를 이 보루형 건축형태의 배경으로 본다. 영남지역의 동부 복건-광동 일대에는 소수민족이 (서부의 광서-운남-귀주에 비해) 적은 반면 한족 중 언어-풍속-산업의 전통을 달리하는 여러 갈래 민계(民系)가 오랫동안 뒤얽혀 있었다.

 

중국에 뒤늦게 편입된 영남지역

 

회하를 기준으로 북중국과 남중국을 가르는데, 장강 유역이 오랫동안 남중국의 본체였다. 더 남쪽 남해안 일대 영남지역은 12세기에 송나라가 남쪽으로 밀려 내려오면서 남방 개발이 가속될 때까지 생산력도 약하고 인구도 적은 변방이었다.

 

춘추시대부터 시작된 중국 농업문명 확장의 가장 큰 방향이 남쪽이었다. 고온다습한 남방 환경이 초창기 농업에는 맞지 않아도 기술 수준 향상에 따라 더 큰 생산력을 바라볼 수 있는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북방에서 남방으로 인구 이동이 끊임없이 진행되었고, 남북조시대나 남송시대처럼 북방의 압력이 강한 시기에는 그 흐름이 불쑥불쑥 커지곤 했다.

 

영남지역 방언들은 우리 한자 발음과 비슷한 편이다. 내 이름을 광동어로 깜끼힙!” 부르면 관화(官話)진지셰보다 알아듣기 쉽다. 중국 중심부에서 발음체계가 꾸준히 변해오는 동안 주변부에서는 당-송 시대에 전해진 발음체계가 크게 바뀌지 않은 결과다. (어휘도 마찬가지다. 학까어에서 먹고 마시는 것을 옛날대로 ’, ‘이라 하고 지금 관화에서 그 뜻으로 쓰이는 는 말을 더듬는다는 뜻, 목마르다는 뜻으로 쓴다.)

 

남중국의 대부분 민계들은 정착 지역의 이름을 내세운다. 각 지역의 주류집단이 된 이들을 뿐띠(本地, Punti)‘라 하는데, 이와 대비되는 외래인이란 뜻의 학까(客家, Hakka)‘가 있다. 학까계는 넓은 지역에서 비주류로 존재해 왔다. 오랜 기간에 걸쳐 북방의 다양한 지역에서 이주해 온 것은 마찬가지인데 왜 뿐띠와 학까의 차이가 생겼을까.

 

한족의 남방 이주 과정에 어떤 메커니즘이 지속적으로 작용한 것 같다. 각 지역 주류사회가 자리 잡은 후에 유입된 집단 중 순조롭게 편입되지 못하는 집단들이 학까의 범주를 이루게 된 것으로 보인다. 주류사회에 비해 이동성이 큰 이 집단들이 영남지역 전체를 무대로 하나의 문화적 정체성을 세우게 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민간의 독자적 방위력, 왜 필요했나?

 

학까계와 주변세력 사이의 갈등이 가장 크게 폭발한 사례가 뿐띠-학까 전쟁(1855-67)이다. 학까계가 주동이 된 태평천국의 난(1850-64)의 여파로 일어난 이 참혹한 전쟁에서 백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그 후 학까계를 둘러싼 갈등이 가장 널리 드러나 온 곳은 타이완이다. 타이완의 한족 집단은 일본 점령기 이전부터 거주한 본성인(本省人)과 해방 후에 국민당을 따라 들어온 외성인(外省人)으로 구분되고, 본성인 중 민난(閩南)계가 주류고 학까계가 다음으로 큰 집단이다. 두 집단 모두 가까운 복건성에서 건너온 것이다.

 

타이완에서 두 집단의 적대관계는 대륙에서부터 이어진 것이다. 학까계와 민난계의 대립은 복건 지역에서 장기간에 걸친 광범한 현상이었다. 지금 대륙보다 타이완에서 그 대립이 더 분명히 드러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대륙에서 민계 간 갈등 자체가 완화된 것이고, 또 하나는 갈등을 감추려 드는 대륙의 정치 분위기다.

 

<춘추>에는 규모가 법도를 넘는 대부(大夫)들의 성곽을 제후(諸侯)의 명령으로 무너뜨린 일들이 적혀 있다.(대부는 제후의 신하였다.) 대부의 성곽이 너무 튼튼하면 외부 침공만이 아니라 여차하면 제후에게도 맞설 근거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민간의 독자적 방위력 제한은 치안의 기본 원칙이었다.

 

치안력이 약한 곳에는 성벽을 두른 ()’가 널리 지어졌다. 치안력이 약하다 함은 외부의 위협만이 아니라 민간의 세력경쟁을 국가가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도 가리키는 것이다. 학까계가 발전시킨 투러우 건축형태는 국가의 보호가 부족한 지역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노력을 보여준다.

 

국가의 힘이 압도적이지 않은 상황

 

이런 상황의 이해에 도움이 되는 책 하나가 제임스 스코트의 <통치를 피하는 재간(The Art of Not Being Governed)>(2009)이다. 중국 서남단에서 인도 동북단에 이르는 동남아시아 산악지대에서 지형조건이 정치조직의 전개 과정에 끼친 영향을 분석한 책이다.

 

많은 농민의 일률적 통제가 가능한 평야에는 국가가 쉽게 세워진다. 국가의 존재는 주변에 압력을 가한다. 이 압력에 저항하거나 회피하는 과정에서 산악지대 주민들의 존재방식에 일어나는 온갖 형태의 변화를 스코트는 그려낸다.

 

스코트는 역사발전의 법칙에 대한 과신을 버릴 것을 권한다. 정착농경에서 화전민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대규모 정치조직을 풀고 씨족사회로 돌아가기도 한다. 심지어 문자를 사용하다가 버리는 사회들도 있다. 소수의 사람들이 어쩌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겪는 일이 아니라 오랜 기간에 걸쳐 널리 이뤄진 선택이라는 것이다.

 

법칙성의 과신은 근대인의 약점이다. 변화의 추세를 개인이나 소수집단이 거스르기 힘든 것이 근대적 상황의 특성이다. 역사를 살필 때는 법칙성을 섣불리 적용하기보다 있는 그대로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어쩌면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법칙성도 특수한 상황조건에 국한된 것으로 판명될 수는 없는 것인지 역사의 거울에 비쳐보는 것이다. (자연과학의 반증가능성(refutability)‘ 확인과 같은 과정이 역사학에도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동남아시아가 중심이지만 중국의 서남쪽 모퉁이도 시야에 들어 있다. 그 연장선 위에서 중국의 영남지역 전체를 바라보는 것도 가능하다. 영남지역의 자연조건은 스코트가 조미아(Zomia)‘라 부르는 산악지대와 비슷한 곳이 많다. 조미아에서 나타난 것과 비슷한 현상들이 그에 앞서 광동-복건의 산악지대에서도 많이 나타났을 것 같다. 광서-운남-귀주에 비해 광동-복건에 소수민족이 적은 것은 한화(漢化) 과정이 더 먼저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엉치가 가벼웠던학까계의 활약상

 

남북조시대 이후 영남지역은 중국인에게 신대륙이었다. 우월한 생산기술과 전투기술을 가진 이주민 앞에서 원주민들은 동화하거나 소멸하거나 험하고 외진 곳으로 옮겨가야 했다. 동화한 원주민은 이주민의 언어와 문화를 받아들여 이주민사회에 편입되었다.

 

이주민 집단 중에 자리를 차지하는 데 성공한 집단들은 정착 지역의 주인이 되었다. 아메리카 이주민이 아메리칸이 되고 남아프리카의 아프리카너가 아프리카인을 자처한 것처럼. 한편 평야에 자리 잡지 못한 집단들은 비주류로서 독특한 생활양식을 만들어냈다. 학까계는 비주류 집단들의 광역 네트워크였다.

 

할머니들은 민첩하고 부지런한 아이를 고 녀석 엉치가 가볍다고 놀리듯 칭찬했다. 정착성이 약했던 학까계는 엉치가 가벼웠고 새로운 일에 적극적이었다. 천지회(天地會), 삼합회(三合會) 등 비밀결사와 해외 이주에 앞장선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영남지역의 민간 역량을 키워낸 밀무역 등 법외(法外) 활동에서 역할도 앞으로 많이 밝혀질 것을 기대한다.

 

중국 인구의 3% 전후를 점하는 비율에 비해 현대사에서 학까계의 역할은 엄청나게 컸다. 태평천국(1850-64)과 장정(1934-35)의 주력이 모두 학까계였다. 장정 출발 당시 공산당 본부가 있던 루이진(瑞金)은 학까계 지역이었고 장정에 나선 공산군 86천여 명의 70%가 학까계였다. 주더(朱德), 예팅(葉挺), 예젠잉(葉劍英) 등 학까계 장군들이 두각을 나타낸 배경이다. 화교사회에서 학까계의 역할도 눈부시다.

 

학까계의 현재 모습도 흥미롭지만 그 과거가 더 궁금하다. 남중국의 근대 민간 질서를 밝히는 것은 중화제국의 실제 모습을 찾기 위한 중요한 과제다. 투러우 같은 건축형태가 필요했던 이유에서부터 생각을 시작해 본다.

 

https://en.wikipedia.org/wiki/Tulou#/media/File:Yanxiang_Lou_-_inside_-_DSCF3722.JPG

https://en.wikipedia.org/wiki/Fujian_tulou#/media/File:China_Fujian_Tulou_Gaobei_Qiaofulou.jpg 투러우의 내부

 

https://en.wikipedia.org/wiki/Fujian_tulou#/media/File:Zhenchenglou.JPG

https://en.wikipedia.org/wiki/Fujian_tulou#/media/File:Chengqilou.JPG 투러우의 외관

 

https://en.wikipedia.org/wiki/Fujian_tulou#/media/File:%E5%88%9D%E6%BA%AA%E5%9C%9F%E6%A5%BC%E7%BE%A4.jpg 투러우 군락

 

https://en.wikipedia.org/wiki/Hakka_people#/media/File:Indonesia_Hakka_Museum.JPG 세계 어디서나 학까인은 화교사회의 뼈대다. 투러우 형태의 자카르타 학까박물관.

 

https://en.wikipedia.org/wiki/Hakka_people#/media/File:5_historical_hakka_migrations.svg 학까인 이주의 다섯 단계. (1) 4세기: 516국의 압박으로. (2) 10세기: 당나라 말기의 혼란 속에서. (3) 12-13세기: 송나라의 남하와 멸망을 배경으로. (4) 17세기 후반: 청나라 지배의 확립 과정에서. (5) 19세기 후반: 태평천국의 난 이후 학까계 해외 이주의 급증.

 

https://www.amazon.com/Art-Not-Being-Governed-Anarchist/dp/0300169175/ref=sr_1_1?crid=34IMZEMUCSJMC&keywords=the+art+of+not+being+governed&qid=1677725439&sprefix=the%2520art%2520of%2520not%2520being%2520governed%2Caps%2C276&sr=8-1 동남아시아 고원지대의 무정부주의 역사란 부제가 붙은 제임스 스코트의 <통치를 피하는 재간>(2009)은 동남아시아 역사와 문화를 알고 싶은 이들에게 꼭 권하고 싶은 책이다.

 

학까계의 명사들

https://en.wikipedia.org/wiki/Hong_Xiuquan#/media/File:Hong_Xiuquan.jpg 홍수전(洪秀全, 1814-64). 학까계가 주도한 태평천국의 여파로 광동성에서는 참혹한 학까-뿐띠 전쟁(1855-67)이 일어났다.

https://en.wikipedia.org/wiki/Cheong_Fatt_Tze#/media/File:Zhang_Bishi.jpg 장비스(張弼士, 18401916)는 태평천국의 난을 피해 인도네시아로 갔다가 빈손으로 출발해 거상이 되었다. 1899년 이후 청 조정에 경제정책을 제출했고 신해혁명 후 상공회의소 회장을 맡았다.

https://en.wikipedia.org/wiki/Aw_Boon_Haw#/media/File:Hu_Wenhu2.jpg 버마 화교 출신인 오분호(胡文虎, 1882-1954)는 유명한 호랑이표연고로 거부가 되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Guo_Moruo#/media/File:Guo_Moruo.jpg 문필가이자 역사학자 궈모뤄(郭沫若, 1892-1978)1949년 중국과학원 창설 때부터 서거 때까지 원장을 맡았다.

https://en.wikipedia.org/wiki/Xue_Yue#/media/File:%E8%96%9B%E5%B2%B3.jpg 국민당 쪽에도 학까계 장군들이 많았다. 1926년 북벌에서 전신(戰神)“의 별명을 얻은 쉬에위에(薛岳, 1896-1998)1936년 서안사변 때 장제스(蔣介石, 1887-1975)의 미움을 샀지만 그 명망 때문에 위상을 지키고 더 오래 살았다.

https://en.wikipedia.org/wiki/Hu_Yaobang#/media/File:Hu_Yaobang's_Former_Residence_041.jpg 1980년대에 공산당 총서기를 지낸 후야오방(胡耀邦, 1915-89). 그의 장례가천안문사태의 기폭제가 되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Lee_Kuan_Yew#/media/File:Prime_Minister_Lee_Kuan_Yew_of_Singapore_Making_a_Toast_at_a_State_Dinner_Held_in_His_Honor,_1975.jpg 싱가포르의 리콴유(李光耀, 1923-2015)

https://en.wikipedia.org/wiki/Thaksin_Shinawatra#/media/File:Thaksin_DOD_20050915.jpg 타일란드 수상 탁신 시나와트라(丘達新, 1949- )

https://en.wikipedia.org/wiki/Lee_Teng-hui#/media/File:%E7%B8%BD%E7%B5%B1%E6%9D%8E%E7%99%BB%E8%BC%9D%E5%85%88%E7%94%9F%E7%8E%89%E7%85%A7_(%E5%9C%8B%E6%B0%91%E5%A4%A7%E6%9C%83%E5%AF%A6%E9%8C%84).jpg 타이완 총통 리덩후이(李登輝, 1923-2020)

https://en.wikipedia.org/wiki/Tsai_Ing-wen#/media/File:%E8%94%A1%E8%8B%B1%E6%96%87%E5%AE%98%E6%96%B9%E5%85%83%E9%A6%96%E8%82%96%E5%83%8F%E7%85%A7.png 타이완 총통 차이잉원(蔡英文, 1956- )

 

https://en.wikipedia.org/wiki/Austronesian_peoples#/media/File:Austronesia_with_hypothetical_greatest_expansion_extent_(Blench,_2009)_01.png 오스트로네시아어의 현재 분포지역(청색)과 추정되는 과거의 분포지역(녹색). 현존하는 오스트로네시아어 중 가장 오래된 형태가 타이완 원주민에게서 나타난다. 중국의 영남지역에서 이 언어가 발생해 타이완 등지로 전파된 후 영남지역에서는 한화(漢化)의 결과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