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문천   날짜 : 09-09-24 15:37   조회 : 104    

 

 

지난 주 오랫만에 부산을 다녀왔습니다. 중구 보수동에 있는 처조카 집에서 이틀밤 잤죠. 가던 날 송도에 저녁 먹으러 가며 생각하니, 부산에서도 부산역보다 남쪽으로 가본 것이 정말 모처럼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돐 전에 부산으로 피난 갔다가 서울로 돌아오던 다섯 살 때까지 동대신동에서 살던 시절 생각이 났습니다. 서대신동은 보수동 바로 옆 동네죠.

 

어머니 얘기로 이 방 도배질을 시작했는데, 이제 요양원에 모셔 놓으니까 자주 가 뵙지 않아서 사업에 지장이 있군요. 부산 다녀오면서 유년시절이 생각난 김에 이제 어머니 얘기보다 제 얘기로 때워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보다 보통 십여 세 이상 젊은 분들과 근래 어울려 놀다 보니, 저 자신에 대해서보다도 제가 살던 세상이 어떤 세상이었는지 보여드리고 싶은 생각입니다. 같은 시기라도 다른 세대로 살면 꽤 다르게 보였을 세상을 함께 되돌아볼 수 있기 바랍니다.

 

이 이야기가 하나의 자서전에 이르게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될 만한 조건도 꽤 갖춰져 있는 것 같습니다. 일단, 편향성을 가질 만한 특별한 동기가 없죠. 역사 공부해 온 사람으로서 내가 살아온 시대를 다음 세대에게 얘기해 주고 싶다는, 원론적인 동기만이 있을 뿐이죠. 자기미화 등 편향성도 웬만한 사람들보다 덜한 편일 겁니다. 제 삶이 특별히 성공적인 것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요. 성공에 대한 집착이 저만큼 약한 사람이 우리 또래에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그럼, 얘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일단 첫 꼭지는 무난하겠다고 생각해서 엄두를 냈습니다. 기억나는 게 별로 없으니까요. 생각나는 대로 써 나가다가 언제 중단할지 모릅니다. 너무 챙피해서. 하지만 다섯 살때까지는 챙피하고 뭐고 할 만큼 생각나는 게 없어요.

 

여러분은 다섯 살때 일 생각나는 게 얼마만큼 있나요? 저보단 많을 겁니다. 어렸을 때는 부산 시절 일도 이것 저것 기억을 꽤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은 몇 개 장면이 떠올라도 그 앞뒤가 꽉꽉 막힙니다. 이렇게 적을 계기를 가졌더라면 기억을 더 살릴 수 있었을 텐데... 여러분도 기록하는 습관을 가지면 인생 뒷쪽에 가서 보람 느낄 일이 많을 겁니다.

 

50년 12월에 부산으로 가던 길은 생후 10개월이던 제 기억에 물론 없는 거지만, 아버지 일기에 나와 있죠. 10개월 후 아버지 돌아가실 때의 일도 제겐 전혀 기억이 없고요. 지금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부산의 일은 세 개 장면밖에 떠오르지 않습니다.

 

하나는 길에서 놀고 있다가 (우리 집 앞의 골목을 나가면 밋밋한 비탈길이 있고, 비탈길을 백여 미터 내려가면 큰 길과 비스듬히 합치던 것 같습니다.) 외출에서 돌아오는 어머니를 보고 좋아하던 장면. 학교에서 (아버지 돌아가신 후 동아대학과 무학여고에 출강하기 시작하셨죠.) 퇴근하는 길이셨다는 사실은 더 철든 후에 짐작할 수 있게 되었을 겁니다.

 

또 하나는 자라가 없어져 애통해 하던 장면. 어느 때인가 얼마 동안인가 집에서 자라를 키운 적이 있어요. 눈만 뜨면 그 놈 들여다보고 지내던 것 같은데, 어느 날 없어졌고, 제가 한눈파는 사이에 없어진 것 같아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던지. 후에 생각해 보니 당시에 애완동물 키울 형편도 아니었고, 약으로 쓰려고 사다 놓은 김에 며칠이라도 애들이 데리고 놀게 했던 게 아니었을지. 그런데 애들이 너무 마음을 붙이니까 그거 잡아먹었다는 얘기를 못해주고 실종 처리 했던 게 아닌가 싶더군요.

 

그리고 드디어 동대신동을 떠나던 장면. 아마 생전 처음 택시를(당시에는 '하이야'라 했죠. 'hire'에서 나온 말이었던 듯.) 탄 것 같은데, 사람도 가뜩 타고 짐도 가뜩 실어서 터질 것 같은 느낌에 조마조마했죠. 기차를 타고 왔을 텐데 그 생각은 안 나고 하이야 생각만 납니다. 도와준 분들이 어느어느 분이었는지도 흐릿한데, 아마 고종사촌 기돈이 형(충남대 사학과 교수를 퇴직하고 몇 해 전 돌아가신 정기돈 교수)이 함께 왔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 이사란 게 참 볼 만한 행사였죠. 잔뜩 싸맨 짐 위에 바가지까지 매달아놓는 풍속은 전통시대부터 이어져 온 것이 1960년대까지 계속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큰 짐은 리야카(rear car? 손수레)로 역에 보내 화물로 부쳤겠지만, 운임 절약하느라고 사람이 이고 지고 갈 만한 짐은 최대한 가지고 다녔습니다.

 

아, 한 장면 또 생각난다! 유치원 갔던 일! 당시에 유치원 가는 건 대단한 호강이었지만 홀어머니가 일 나가시니 어떻게든 보내봤나 봅니다. 그런데 영 적응이 안 되던 생각이 나요. 이틀인가 다녀보고 그만뒀던 것 같습니다. 나중에 초등학교 들어간 뒤에도 학교에 따라왔던 외할머니가 "얘는 어떻게 된 애가 일어서라면 앉고, 앉으라면 일어서고, 손 들라면 내리고, 내리라면 들고, 꼭 한 박자씩 틀리더라." 하고 돌아가실 때까지(제가 대학생 때) 놀려먹으셨는데, 제가 조직활동에는 애초에 적성이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고 보니 또 한 장면! 어느 날 집에서 놀고 있는데, 얼굴 시커먼 노인이 서슴없이 들어서는 거예요. 등에는 큼직한 자루 하나 걸치고. 왜 그리 무서웠는지! 아마 부들부들 한참 떨고 있다가 얼마 후엔지 형 하나가 들어오면서 "외할아버지!" 하는 바람에 겨우 정신을 차렸던 것 같습니다. 외조부모님은 함께 피난 오셨다가 먼저 환도(피난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걸 그땐 그렇게 말했죠.)하셨는데, 오랫만에 다니러 오신 것을, 너무 어려 기억이 없던 저는 몰라뵌 거죠. 애 잡아가는 자루인 줄 알고 놀랐던 자루에는 땅콩이 가득 들어있었습니다. 기호식품을 원도 한도 없이 먹어본 것은 유년기를 통해 유일한 기억이죠.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벌써 나왔군요. 서울 와서는 정릉리에서 이분들 슬하에서 지내게 되는데, 그 생활 기억에 앞서 두 분 이야기를 다음 회에선 먼저 하고 싶네요.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