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의 페리스코프 <6>
기사입력 2002-07-17 오전 9:04:45
유럽연합이 미국에게 화가 났다. 얼마 전 크리스 패튼 집행위원은 "유럽연합은 절대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했고 하비에르 솔라나 외교안보 담당관도 "유럽은 미국을 대체할 각오가 돼 있다"고 말했다. 해외파견 미군의 면책특권을 요구하며 보스니아 평화유지활동 참여를 거부하겠다는 미국의 위협에 대한 반발이다.
백주대로상, 그것도 얌전히 갓길로 피해 걷다가 장갑차에 깔려 죽고, 그리고도 주권 상실 수준의 주둔군지위협정(SOFA) 때문에 재판까지 미군이 알아서 하라고 맡겨놓고 있는 한국이나, 온 나라를 쑥밭으로 만든 전쟁이 그나마 끝났다는 상황에서 결혼식 하객들이 집중폭격의 대상이 되는 아프가니스탄이 아니더라도 미국과 미군의 일방주의와 횡포는 전세계의 지탄을 받고 있다.
그런데도 미국은 늠름하고 뻔뻔하기만 하다. 유엔 안보리에서 1년간의 한시적 면책특권을 부여받고도 이 특권이 항구적인 것이 아니라 해서 불평을 늘어놓는 것이 미국 분위기다. 국제형사재판소의 권위가 미국의 오만 앞에 당장 깨어지지 않도록 겨우 시간을 벌어놓은 유럽국가들 입장에서는 여간 속상하는 꼴이 아니다.
자존심 강한 유럽국가들이 미국의 오만에 정면으로 맞서지 못하는 것은 무엇보다 돈 때문이다. 당장 문제가 된 보스니아 평화유지군에 미군 병력은 몇백 명 되지 않는다. 그런데 평화유지군 장비와 시설에 미국 돈은 몇천만 달러가 깔려 있고 운영비용으로도 매년 1천만 달러 가량을 기대하고 있다. 유럽국가들이 병력은 채울 수 있어도 이 돈은 당장 채울 길이 없다.
이 상황에서도 단적으로 볼 수 있듯이, 미국의 군사력은 경제력에 근거를 둔 것이다. 소련과의 냉전기, 특히 레이건 시대부터 미국은 소모전, 인력소모전이 아닌 재력소모전을 기본전략으로 키워 왔다. 세계 인구의 5%도 못되는 미국이 다른 모든 나라를 합친 것보다 많은 재력을 군사분야에 쏟고 있기 때문에 그 군사력에 대적할 자가 없는 것이다.
막강한 군사력의 배경이 되는 미국의 막강한 경제력에 흠집을 보이는 상징적 상황이 이번 주에 벌어지고 있다. 유로화와 달러의 환율이 29개월만에 역전된 것이다. 유로화는 1999년 1월 1.1667달러의 가치로 출범했으나 2000년 2월 1달러 밑으로 떨어져 2000년 12월에는 0.82달러까지 내려갔었다. 그러나 지난 15일 주요 외환시장에서 유로화의 가치는 1달러선을 넘어서면서 달러화와의 위치가 역전되고 있다. 유로화 가치가 최저치를 기록했던 지난 2000년 12월에 비하면 무려 22%나 상승한 것이다.
워낙 덩치가 큰 미국경제인 만큼 치명적인 타격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미국경제는 근래 없던 큰 문제를 겪고 있다. 문제의 성격을 살피는 데는 여러 가지 시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중 흥미롭게 두드러져 보이는 것은 미국의 일방주의가 가져온 부작용들이다.
첫째로 눈에 띄는 것은 테러전쟁의 부담이다. 9·11 테러를 유발한 원인의 적어도 일부는 미국의 일방주의적 대외정책에 있으며, 이에서 비롯된 미국사회의 분위기 위축은 경제활동에도 상당한 원가상승 요인을 가져왔다. 그리고 합리적 기준을 도외시한 테러전쟁의 선포와 수행은 엄청난 비용을 유발, 미국의 산업구조에 무리한 왜곡을 가져왔다는 비판을 받는다.
다음으로 눈에 띄는 것이 신뢰체계의 붕괴다.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일방주의 분위기에 편승해 정권을 장악한 부시와 공화당 정권은 엔론 사태 이래 도덕적 지도력에 파탄을 보이고 있다. 대통령, 부통령을 위시한 정권 핵심인물들이 하나같이 석연치 못한 기업활동의 이력을 드러내고 있는 상황에서 신뢰체계 회복을 위한 정부의 기능이 마비되어 있는 것이다. 미 국민들은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겨놓았음을 깨닫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에 일방적 폭격을 퍼부은 부시 정권이 이제 일방적 폭격에 노출되고 있다. 핵심인물들의 과거 비리 의혹이 연일 언론의 맹폭을 받고 있는 가운데 야당인 민주당이 부시 정권의 대외정책에 비판의 칼날을 세우고 있다. 아프간 전쟁, 팔레스타인 정책, 동맹국과의 관계 등 일방주의 원리에 입각한 모든 정책들이 비판의 범위에 포함된다. "외부의 적 앞에 우리는 하나"라는 초당적 협력의 분위기가 이제는 사라졌다는 상황분석이 나오고 있다.
경제력에서나 군사력에서나 유일한 초강대국인 미국의 파멸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소위 이슬람 원리주의자들만이 아니다. 미국 대외정책의 오만과 무감각에 환멸을 거듭해 온 필자 같은 보통사람들도 미국의 오만이 통쾌하게 깨지는 꼴을 보고 싶어하는 마음을 얼마큼씩 가지고 있다.
그러나 냉정하게 생각하면 미국이 그 힘을 가지고 지금까지보다 더 나쁜 짓을 할 여지도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그 힘을 지금의 방식대로라도 써옴으로써 세계가 더 나쁜 상황을 피할 수 있게 해준 측면도 상당히 있다. 앞으로 초강대국으로서, 그리고 지구촌 일원으로서 책임과 역할을 잘 깨우쳐 일방주의 같은 미련한 정책에서는 좀 벗어나 주기를 바랄 뿐이다.
10년 전, 20년 전에 비한다면 우리 사회도 미국의 각성을 촉구할 능력을 훨씬 많이 갖추게 되었다. 국회의원들이 부시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하는 서한을 보내는 것, 법무부가 미군의 재판권 포기를 요청하는 것, 아주 흡족하지는 않지만 바람직한 변화를 보여주는 조치들이다.
어린 소녀들의 어처구니없는 희생에 분노하고 안타까워하는 우리 마음은 아프가니스탄과 팔레스타인의 희생자들로부터 유럽과 미국내의 양심세력까지 맺어져 미국이 일방주의의 꿈에서 깨어나기를 촉구하고 있다. 그 속에서 우리의 분명한 몫은 미국, 그리고 주한미군과 떳떳한 관계를 맺는 일이다. 이것은 우리의 국가주권일 뿐 아니라 세계평화를 위한 우리의 책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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