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의 '페리스코프'] 보수주의자의 한국 근·현대사 ⑦

기사입력 2008-12-11 오전 8:31:00

어제(10일) <경향신문> 칼럼 "뉴라이트식 '대안 교과서' 읽기"에서 이만열 교수가 매우 요긴한 시각을 제시했다. (☞관련 기사 : "뉴라이트식 '대안 교과서' 읽기")

독립운동과 관련해 기존 교과서보다 전향적 서술이 꽤 있다는 것이다. 독립운동에 공산주의자들이 공헌한 몫이 컸다는 점, 미국의 임시정부 승인 거부에 이승만을 둘러싼 갈등이 작용한 점, 해방 당시 미국이 한국을 바로 독립시키지 않을 방침이었다는 점 등을 밝히고 김일성의 역할을 드러낸 사실 등을 예로 들었다.

학계에서는 상식으로 통하는 내용들이다. 그런데 '좌편향'이라는 기존 교과서들이 이런 내용을 담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역사 교육의 안정성을 위해서다. 반공 독재 시대에 학계의 상식을 교과서에 반영하지 못한 내용은 수없이 많다.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방향으로 교과서 내용이 바뀌어 왔다. 그러나 일거에 뒤집어 놓지 않고 공감대의 확장과 확산에 따라 점진적으로 바꿔 오늘에 이르렀고, 위의 내용들도 앞으로 차차 바꿔질 것을 바라보고 있는 참이다.

이만열 교수는 묻는다. 이런 내용들이 기존 교과서에 실려 있었다면 뉴라이트와 현 정권에서 뭐라 했겠느냐고. '친북 좌파', '국부 모독', 반미주의 등 안 하는 욕이 없었을 것이 뻔하다. 어느 기존 교과서를 "북한 교과서를 베낀 것"이라고 몰아붙인 정두언 의원은 <대안 교과서>를 읽어보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읽었다면 "북한 교과서가 베껴갈 책"이란 논평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현 정권의 핵심적 문제점을 '소통 불능'으로 지적하는 이들이 많거니와, 뉴라이트 담론의 특색이 바로 '소통 거부'에 있다. 편 가르기에만 골몰할 뿐, 다른 생각 하는 이들을 설득하려는 노력이 없다. 현행 교육 과정을 존중하며 서서히 개선을 바라보고 있는 기존 교과서의 사소한 문제들을 침소봉대해 붉은 색깔을 뒤집어씌우면서 자기네는 교육 과정을 무시한 튀는 소리를 멋대로 내뱉지만, 자기 눈의 들보는 보려 하지 않는다.

밑에 붙이는 내 글 "밥과 주체성"은 한국 경제 성장의 의미를 되새겨본 것이다. 뭐니뭐니 해도 경제 성장은 한국 현대사의 큰 축이다. 60년 전과 다른 '오늘의 한국'을 만드는 데 가장 큰 작용을 한 요소의 하나다. 좋고 싫음을 떠나 현실로 받아들이며 그 득실을 차분히 살펴보려 노력했다.

<대안 교과서>에는 이와 관련된 내용이 4~6부에 걸쳐 여러 항목에 서술되어 있다. 경제 성장을 극도로 중시하는 뉴라이트인 만큼 서술 분량이 매우 많다. 그 소소한 내용을 따지기 전에 내용 전체를 덮어씌우는 '보편적 가치'란 관념이 길을 막는다.

가치 체계는 문명과 문화의 중심축이고 가치관은 사상의 알맹이다. 한 인간의 정신 활동은 안정된 가치관의 추구를 중심으로 이뤄진다. 가치관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널리 통용되는 가치, 즉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게 된다. 그러나 절대적 보편성을 가진 가치는 신앙 속에만 존재할 뿐,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편적 가치'에 묶인 획일적 가치관을 구성원들에게 강요하는 사회를 전체주의 사회라 한다. 사상의 자유가 없는 사회다.

절대적 가치로서의 '보편적 가치'는 침략의 도구로도 애용되어 왔다. 근대 이전에는 관습과 종교를 달리하는 이웃 사회를 정복하는 이유가 되었고, 근대에 와서는 개인주의, 자유주의, 자본주의를 각지의 전통사회에 강요하는 근거가 되었다. 오늘날까지 '북한 인권'이나 '중국 인권'이 호전적 정책의 빌미로 활용되고 있는 것도 강자의 잣대로 약자를 재단하는 오랜 관행에 따른 것이다. (노파심에서 덧붙인다. 북한과 중국의 인권을 무시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그 사회의 역사의 흐름과 상황을 묵살하고 외부인의 기준을 기계적으로 적용시키는 짓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뉴라이트 논객들이 미사여구로 포장해 내놓는 '보편적 가치'란 것이 결국은 자본주의 가치관이다. 그 가치관으로는 일제의 식민 통치까지도 정당화되고 미화된다. 하물며 개발 독재야….
▲ '기적의 역사'로 '상식의 역사'를 덮어버리겠다는 것인가? 뉴라이트 세계관이 유사종교 수준의 자본주의 신앙임을 이렇게까지 드러내야 하나? 이젠 정말 더 놀랄 일이 없을 것 같다. 자본주의 신전에 대한민국을 봉헌하는 행사가 어느 날 열리더라도. ⓒ프레시안

밥과 주체성

  1960년 4월 이승만이 축출될 때까지 남한은 국가의 틀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북한이 소련과 중국에서 받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원조를 미국에서 받고 있었지만 밑 빠진 독이었다. 권력자는 이권을 대가로 충성을 모으기 바빴다. 야당도 부정불의를 줄이자는 정도의 주장을 내놓을 뿐, 근본적 대안을 제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1961년 5월 남한을 장악한 군사정권은 반공과 경제 개발의 필요성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둘 다 절실한 과제였다. 아직 냉전의 초창기였던 당시 상황에서 국가 존립의 필수조건인 미국의 후원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반공의 깃발이 필요했다. 그리고 경제적 자립은 진정한 독립을 위해 가장 요긴한 조건이었다.

경제 발전은 반공의 맥락에서도 중요한 문제였다. 전쟁 후 남북 대결은 군사 대결에서 경제 대결로 옮겨가고 있었다. 그런데 1950년 남한의 군사력 열세가 10년 후에는 경제력 열세로 되풀이되고 있었다. 전쟁 파괴는 북한이 더 심했다. 그러나 북한이 회복과 발전을 위해 노력을 쌓는 동안 남한은 원조의 단물만 빨아먹으며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다.

남한의 서민 생활은 일제 말기와 큰 차이 없는 열악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일부 특권층의 치부는 상대적 박탈감을 더 심하게 만들었다. 또한 미국 등 서방 국가들과의 접촉을 통해 경제 선진국을 선망하는 풍조가 팽배했다.

박정희에게는 이승만처럼 국부(國父) 시늉을 할 밑천이 없었다. 그래서 집권을 정당화할 구호가 필요했다. 그런데 반공은 이미 써먹을 대로 써먹은 구호였기 때문에 국민의 지지를 새로 모을 힘이 없었다. 박정희 정권의 가장 유용한 깃발은 경제 개발이었다.

한 가지 짚어둘 것이 있다. 군사정권에게 반공이 절실한 과제였다고 앞에서 말했는데, 이것은 상당 기간의 국가 발전을 위한 여건 마련에 필요한 것이었다는 말이지, 정치적·도덕적인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아니다. 쿠데타 전에 민족주의에 입각해 반공주의를 비판하던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세계정세에 비추어 보면 이 움직임의 의미는 상징적인 차원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군사정권에게는 일본의 돈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군사정권에게 반공은 채찍이고 경제 개발은 당근이었다. 반공은 쓴맛이 알려진 약이었고 경제 개발은 달콤한 새 약속이었다. 이 약속에 군사정권은 명운을 걸었다. 미국의 지시도 국민의 지지도 없이 일으킨 쿠데타였다. 미국에게 전폭적 신뢰를 받을 근거가 없던 군사정권에게는 국민의 지지를 불러일으켜 자생력을 키울 필요가 있었고, 그 수단이 경제 개발이었다. "우리도 한 번 잘살아 보세!" 당시 한국인들에게 더없이 매력적인 구호였다.

군사정권은 경제 개발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5개년 계획'은 소련에서 개발되어 공산권에 유행한 정책 구조였다. 권력자 아닌 사람이 '5개년 계획'을 제안했다면 반공법에 걸렸을 것이다.

베트남 파병은 미국의 환심을 사는 데도 물론 목적이 있었지만, 기본 목적은 역시 경제의 활로를 찾는 데 있었다. 민족사에 오점으로 남은 파병이지만 경제 활성화에는 역할을 했다. 다른 참전국에 비해 작은 봉급이라도 당시 경제 수준으로는 적지 않은 외화 수입이 되었고, 부수적 사업 기회도 당시 남한의 기술 수준으로는 파병 없이 얻기 어려운 것이었다.

군사정권 초기 정책으로 가장 큰 국민 반발을 불러일으킨 것이 일본과의 수교였다. 일본의 전면적 국가 범죄에 시달렸던 민족에게 군사정권의 수교 조건은 굴욕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군사정권에게는 일본의 돈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군사정권의 경제 개발 정책이 상당한 성과를 거두어 정권이 꽤 오래 지속될 수 있었던 데는 일본과의 관계가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정권이 국가를 제대로 대표하지 못하는 상황"

  1960년대 초 경제대국으로 성장하고 있던 일본에게 아쉬운 문제 하나는 입체적 경제 구조를 뒷받침해줄 배후지(背後地)가 없다는 것이었다. 제국주의에서는 식민지가 배후지 역할을 해준다. 서방 열강의 옛 식민지들은 대개 독립 후에도 배후지로서 경제적 역할을 계속했다. 그런데 일본의 옛 식민지들은 모두 일본으로부터 절연되어 있었다.

배후지의 역할은 인적·물적 자원을 제공하고 상품 소비에 가세하는 것이다. 국교 수립 후 남한은 일본 산업과 경제에 보완적인 방향으로 발전의 틈새를 찾았다. '신(新)식민지' 역할을 자청한 셈이었다.

일본과의 긴밀한 경제 관계는 공산권에 가로막혀 섬과 같은 위치에 있던 남한에게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관계에 임하는 자세가 협력적인 것인가 종속적인 것인가 따질 여지가 있는 것이다.

군사정권의 대 일본 자세가 당당한 것이 못된 것은 국교 수립 단계에서부터의 일이었다. 정권이 현금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식민지 시대의 피해에 대한 보상금을 형편없는 헐값으로 흥정해 버렸다.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정권이 국가를 제대로 대표하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이로 인해 외국과의 거래에서 손해를 감수한 것은 박정희 집권기 내내 거듭된 일이었다.

박정희를 비롯한 정권의 핵심 인물 몇이 해방 전 만주국에서 일한 경력 때문에 그들이 만주국을 한국 경제 개발의 모델로 삼은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제기되어 왔다. 합당한 추측이다. 만주국은 일본 관동군의 손으로 만들어지고 운영된 괴뢰국가였다. 군부가 국가 운영의 주체가 된다는 점에서부터 일본 경제에 종속적인 위치를 자청하는 구조까지, 군사정권의 경제 정책 방향은 우연으로 볼 수 없을 만큼 만주국의 틀을 따라갔다.

박정희 정권의 구체적 모델이 만주국이었다면 그 배경인 군국시대 일본이 궁극적 선망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국가와 재벌의 결탁, 그리고 노동운동의 철저한 탄압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지표들이다. 재벌 중심 산업·경제구조는 군사정권이 끝난 오랜 뒤까지도 후유증을 남기게 된다.

"군사정권 하의 정경유착은 구조적이고 지속적인 것이 되었다"

  재벌의 뿌리는 이승만 정권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1950년대 남한의 대자본가들은 재벌이라기보다 거상(巨商)의 모습이었다. 삼성그룹 창업자 이병철을 사람들은 '돈병철'이라고 불렀다. 돈 많은 사람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당시 자본가들은 돈 냄새를 피웠을 뿐, 권력의 냄새는 풍기지 않고 있었다.

이승만 정권의 부패공화국에 정경유착이 없었을 리가 없다. 4·19 후 대부분 자본가들이 부정축재 혐의를 받았다. 5·16 후 경제개발을 절체절명의 과제로 인식한 쿠데타 세력은 이 자본가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기왕의 부정축재 혐의를 최대한 무마시켜 주면서 앞으로의 긴밀한 협력 관계를 제안한 것이었다.

이승만 정권 하의 정경유착이 특혜 한 건 한 건을 놓고 흥정하는 단발식 유착이었다면 군사정권 하의 정경유착은 구조적이고 지속적인 것이 되었다. 정권은 재벌들을 위해 모든 일을 해주었다. 사업 기회를 만들어주고, 싼 금리의 자금을 제공하고, 노동운동 봉쇄를 통해 낮은 임금을 보장해주었다. 세금도 낮게 매기고 적당히 거뒀다.

그 대가는 정부가 요구하는 산업 구조에 공헌하는 것, 그리고 권력 집단에게 돈을 대 주는 것이었다. 그런대로 명분이 있을 때 거두는 '준(準)조세'라는 제도 아닌 제도는 검은돈의 거대한 빙산에서 한 모퉁이가 때때로 드러나는 것이었다. 이 거래 관계를 원활히 하기 위해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이라는 기구도 만들어졌다.

초기의 재벌 체제에는 순기능이 적지 않았다. 수출드라이브 경제 정책을 위해서는 규모의 경제가 필요했다. 그리고 시장 조건이 미비한 상황에서 계열회사 간의 내부거래 비중을 높임으로써 거래비용절감하는 효과가 컸다. 그런데 경제 성장의 결과 순기능을 위한 조건이 해소된 뒤에도 재벌 체제가 계속해서 강화되어 엄청난 역기능을 일으켰다.

군사정권은 정치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가로막는 무단적(武斷的) 속성을 가진 것이었다. 1961년의 남한 상황에는 쿠데타의 필요성을 정당화해 주는 면도 없지 않았다. 그런데 박정희 집단은 군사정권을 영속시키려 했기 때문에 사회의 발전과 갈등을 일으켰다. 재벌 체제는 이 권력중독증이 경제계에 투영되어 나타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재벌 체제는 군사정권과의 호응관계 속에서 발전한 체제였다"

  1960년에서 1990년 사이 남한의 경제성장을 타이완,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 경쟁국들과 비교해 보면 전체적 성과에 별 차이가 없었다. 다만 남한 경제가 다른 나라들에 비해 산이 높고 골짜기가 깊었다. 고속 성장기에는 남들보다 빠른 속도를 보였고, 침체기에는 유별나게 충격이 심했던 것이다.

이것은 경제와 산업에 대한 정권의 개입과 통제가 강했던 결과라고 생각된다. 여건 변화에 대한 정권의 판단과 대응이 시장에 맡겨두는 것보다 효과적일 때도 있었고, 경직된 인위적 체제가 위험에 둔감한 면도 있었던 것이다.

전체적 성과가 크게 뒤지지 않은 것은 인위적 경제 운영치고 괜찮은 성적이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외적 지표보다 재벌 중심 경제체제의 체질에 남아있었다. 이 문제가 1998년 IMF 사태 때 혹심한 타격을 받는 결과를 낳았다.

재벌 체제는 군사정권과의 호응관계 속에서 발전한 체제였다. 그리고 군사정권 초기에 가치를 발휘하다가 후기에는 역기능이 늘어나고 있었다. 그런데 군사정권이 물러선 1987년 이후에도 위정자와 기업가들은 재벌 체제의 매력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위정자들에게는 정치 자금을 쉽게 조달하는 것이 매력이었고, 기업가들에게는 경쟁을 회피하고 특혜를 따내는 것이 매력이었다. 그래서 정권과 밀착된 인물들이 특혜융자를 통해 재벌 흉내를 내는 '모의(模擬)재벌'의 기현상까지 나타났다.

1997년 후반에 세계적으로 확산된 경제위기는 유동성의 위기였다. 경제의 기반이 흔들린 것이 아니라 운영 방법의 불안정성이 표면적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국가권력 중심 재벌 체제에 묶여있던 남한 경제의 약점을 정통으로 때린 문제였다. 국가가 주축을 맡고 있던 금융계는 재벌이 떠넘긴 부담을 모두 덮어쓴 채 무너졌고, 부담은 대부분 국가로 넘어왔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잃어버린 10년"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대통령이 군부나 절대다수의 여당을 끼고 모든 일을 시원시원하게 해치우던 시절을 그리워할 만한 상황이 그 동안 여러 차례 거듭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IMF 사태 와중의 정권 교체는 특권 구조의 청산을 바라는 민의가 반영된 것이었다. 과거처럼 특권의 주재자로서 권력자가 아닌 두 대통령 아래 남한은 상당한 자생력과 안정성을 가진 국가로 변신할 수 있었다.

"1970년대 초까지 남한보다 우위에 있던 북한 경제의 몰락"

  넓은 의미의 세계화라 할까, 모든 인류의 시장이 통합되는 추세는 유럽의 산업혁명에서부터 구체적인 궤적을 그리기 시작했다. 산업화, 자본주의, 무역 자유화를 주축으로 하는 이 변화는 19세기 중에 두 가지 큰 모순을 드러냈다. 제국주의 충돌로 드러난 민족모순과 공산주의 대두로 나타난 계급모순이었다.

제국주의 충돌은 20세기 전반의 두 차례 대전으로 파국을 맞았다. 그 뒤에는 공산주의의 도전이 반세기 가까이 세계를 냉전 구조에 묶어놓았다. 돌이켜보는 입장에서 말한다면 공산주의의 도전은 하나의 대안 제시에 그쳤을 뿐, 세계 경제 구조 변화의 흐름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결정적 역할에 이르지 못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지금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세계화의 흐름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서방세계 안에서 본류를 지켜온 것이다. 1960년대까지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로 대표되는 선진국들로 그 주류가 구성되어 있었다. 1970년대 유가파동에 따른 경제격동을 계기로 한국 등 신흥 산업국들이 주류에 접근하기 시작하면서 지금 진행되고 있는 세계화의 규모와 틀이 나타나게 되었다. 커진 무대 위에서 남한의 역할은 엑스트라에서 조연급으로 격상되었다.

1970년대 경제 격동은 당시 자본주의 세계에서 심각한 위기로 인식된 것이었지만 "위기가 곧 기회"라는 말대로 세계시장의 역동성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다. 공산권 경제는 대조적으로 침체상황에 빠졌다. 1960년대까지 연 5% 이상을 유지하던 소련의 GNP 성장률이 1970년대를 지나는 동안 계속 떨어져 1980년대에는 연 2% 수준이 되었다. 이 장기침체가 곧장 공산권 붕괴로 이어졌다.

1970년대 초까지 남한보다 우위에 있던 북한 경제의 몰락은 이 흐름 속에 이뤄진 것이다. 어떤 이유로든 세계화를 거부한 나라들이 지금 세계에 가난한 나라로 남아있다. 옛 공산권 국가들이 1990년대에 개혁과 개방을 받아들이는 가운데 북한은 홀로 흐름 밖에 서있어 왔다. 미국의 적대적 봉쇄 정책에도 이유가 있지만, 북한의 비타협적 자세가 더 근본적 이유다.

바닥을 친 북한 경제의 건드려지지 않은 잠재력이 21세기 초반에 어떤 모습으로 터져 나올지, 한반도가 이제부터 겪어나갈 변화에서 핵심적 작용을 할 것이 기대된다.

Posted by 문천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보수주의자의 한국 근·현대사 ⑥

기사입력 2008-12-04 오전 8:39:34

뉴라이트가 지난 광복절을 전후해 대한민국 '건국'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려고 온갖 소란을 떤 데 비춰보면 <근·현대사 대안 교과서>에서 그에 대한 서술은 놀랄 만큼 소략하다. 본문만 300쪽 가까운 책에서 4부 1장의 14쪽만을 할애했을 뿐이다.

소략한 가운데서도 가장 부실한 것은 당시의 세계 정세에 대한 설명이다. 냉전의 구조와 성격에 대한 이해 없이는 분단 건국의 의미를 파악할 길이 없다. 이것은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이해 없이 식민지화의 의미를 파악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국뿐 아니라 어느 나라에서도 근·현대사는 전근대사와 달리 세계 정세와 국제관계의 밀접한 맥락 속에서 전개되어 왔다. 따라서 근·현대 각국의 역사는 세계사의 흐름에 대한 안정된 시각 위에서만 서술될 수 있는 것이다.

<대안 교과서> 역시 세계 정세에 대한 설명을 상당히 담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두 시기, 개항기와 해방 당시의 세계 정세에 대해서는 단편적인 사실만 약간 소개할 뿐, 세계사의 흐름에 대한 포괄적 시각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집필진에 제대로 된 역사학자가 없다는 사정으로 인한 기술적 문제일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어찌 생각하면, 식민 통치와 분단 건국을 옹호하고 미화하려는 의도 때문에 세계 정세를 제대로 보여줄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근·현대 세계사의 흐름에 대해서도 보는 관점이 하나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인정되는 범위의 관점 중에는 우리의 뉴라이트가 식민 통치와 분단 건국을 보는 시각을 뒷받침해 줄 만한 것이 없다.

식민지에서 해방될 때 한국인들은 어떤 국가를 가지고 싶어했는가? 이민족의 지배를 받지 않는 민족국가였다. 그리고 억압이 없는 민주국가였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를 따지기 이전에 가장 기본적인 염원이었다. 한 쪽이 '민국'을, 또 한 쪽이 '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국호에 넣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결국 주어진 것은 어떤 국가였는가? 북한 사정은 잘 모르니 접어두고, 남한 백성들이 얻은 것은 반쪽짜리 민족국가에 허울만의 민주국가였다. 왜 그렇게 되었나? 미국의 필요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필요는 냉전 구조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었다.

<대안 교과서>는 분단 건국과 전쟁의 책임을 소련과 북한에 떠넘기려고 온갖 애를 쓰지만, 그 속셈을 고등학교 학생들에게도 감추기 힘들 것 같다. 서울시 교육청에서 '현대사 특강'이란 이름으로 유신시대의 반공 교육을 부활시키려 해도 대다수 학생들의 낮잠 시간 제공에 그치는 상황을 보라.

아래 붙이는 내 글 '주어진 광복'은 냉전 형성기의 세계 정세, 특히 미국과 소련이 처해 있던 입장을 배경으로 분단 건국의 상황을 설명한 것이다. <대안 교과서> 해당 부분의 절반도 안 되는 분량이지만, 어느 독자에게든 더 충실한 설명이 될 것으로 믿는다.

이 글은 <밖에서 본 한국사> 집필에서 지키고자 했던 "역사상의 인물에게 화내지 말자"는 원칙에서 확실히 벗어난 거의 유일한 사례다. 합리적이고 냉정한 태도를 지키려고 정말 노력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정말 나쁜 지도자였다. 지금까지 살았던 한국인 중에 그 못지 않게 나쁜 사람은 얼마든지 많이 있었겠지만, 그런 인물이 한국의 진로에 그만큼 큰 영향을 끼치게 했던 상황은 한국인에게 참으로 비극적인 것이었다.

▲ 20세기 세상으로부터 타임머신을 타고 온 사람들이 있는 걸까? 고성장 지속 정책에서 시작해 백골단, 국가보안법, 여간첩에 이어 이제 안보 교육까지! 21세기 세상이 20세기 세상과 어떻게 다른 것인지 학생들을 깨우쳐 주기 위해 이보다 더 좋은 현대사 체험 교육이 어디 있겠는가. ⓒ뉴시스

주어진 광복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이 한민족의 광복을 가져왔다. 일본의 2차 대전 참전과 패전은 한일관계사나 동아시아사의 범위를 넘어서는, 세계사적 맥락 속에서 이뤄진 일이었다. 따라서 일본의 패전에 따른 한민족의 광복은 한민족을 세계사의 격류 속에 몰아넣는 결과를 가져왔다.

일본 패전에 대한 한민족의 공헌은 그리 큰 것이 못되었다. 유럽의 피점령국에서 있었던 파르티잔이나 레지스탕스 같은 저항도 한국 내에서는 거의 없었다. 국외에 근거를 둔 파르티잔부대 하나가 국경 곁의 마을 한 곳을 습격한 보천보사건(1937년 6월)으로 김일성이 일약 '민족의 영웅'으로 떠오른 상황은 국내의 저항이 얼마나 미미한 상태였는지 상대적으로 비춰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이 한민족의 독립정신을 깎아 볼 이유는 되지 못한다. 유럽에서도 저항이 강했던 것은 독립국으로 있다가 전쟁 중에 점령당한 나라들이었고, 점령 기간이 길어 지배국 치안체제가 확립된 지역은 그렇지 못했다. 그러나 점령 기간이 짧고 저항이 치열했던 나라가 당연히 독립국으로 인정된 데 비해 전쟁 전부터 지배당하고 있던 나라에 대한 대접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일본을 항복시킨 연합국들의 한국 처리 방침은 자기네 이익과 편의에 맞추도록 되어 있었다. 주요 연합국 중 영국과 프랑스는 한국에 대한 관심이 적었고, 중국은 자기 자신이 해방당한 처지에 가까웠기 때문에 발언권이 약했다. 그래서 한국은 미국과 소련의 점령에 맡겨지게 되었다. 점령을 맡는다는 것은 건국 방향을 좌우할 칼자루를 쥐는 것을 뜻했다.

미국은 1899년 필리핀 점령 이래 태평양 건너편에 대한 이해관계를 키우고 있었다. 그리고 소련은 태평양 진출을 갈망하던 러시아의 뒤를 이은 나라였다. 그러나 1945년 시점에서 두 나라의 야심은 이런 평면적 패권 확장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축으로 한 세계체제 구축이라는 각자의 입체적 구상이 드러나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련은 전 세계 공산주의자들에게 흠모의 대상이었다."

  1945년 당시 소련은 공산주의 확장에 강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유럽 많은 나라들의 독일에 대한 항전 과정에서 공산당의 지도력이 성장했다. 중국에서도 베트남에서도 민족 모순과 계급 모순을 연계시킨 공산주의자들의 항전 전략이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소련은 코민테른을 통해 각국 공산당에게 강한 영도력을 발휘했다. 최초의 공산국가로서 서방 국가들의 경제 봉쇄를 극복하면서 산업화를 수행하고 2차 대전에서도 독일 격파의 주역으로 떠오른 소련은 전 세계 공산주의자들에게 흠모의 대상이었다.

한국 역시 항일운동 과정에서 공산주의의 역할이 크게 늘어나 있던 나라였다. 소련이 북한을 점령할 때 스탈린은 한국을 자신에게 종속적인 공산국가로 만들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선택한 인물이 김일성이었다. 한국 좌익 항일운동가 중 나이가 젊으면서 지명도가 높고 최근 4년간 소련에 의탁해 온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김일성을 앞세워 자기네가 점령한 이북의 공산화를 순조롭게 진행하면서 이남 좌익 세력의 동조를 이끌어내려는 것이 소련의 전략이었다. 미국의 대응은 불리한 조건 아래 이남이라도 지켜내겠다는 방어적인 것이었다.

소련에 비해 미국의 가장 불리한 조건은 효과적인 협력자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우익에도 김구처럼 지명도가 높고 강한 영도력을 가진 인물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김구를 비롯한 우익 명사들은 미국이 바라는 만큼 협조적이 되기에 민족주의 성향이 너무 강했다. 예컨대 군정 당국자들은 일제하 치안에 종사했던 인력이 자기네 한국 장악에 얼마나 요긴한지 절감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의 정통파 우익은 이들 친일파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인물이 이승만이었다.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저명인사이면서도 유연성 있는 인물. 당시 미국은 한국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 갈지 확고한 로드맵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이승만처럼 유연성 있는, 즉 기회주의적인 인물이 틈새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항일운동을 바탕으로 한 건국 영도력은 좌익에 쏠려 있었다"

  민족주의는 통상 좌익보다 우익 성향으로 나타난다. 그럼에도 한국의 민족주의 운동이 해방 당시까지 좌익 성향으로 크게 기울어져 있었던 기본 원인은 식민지 상황에 있었다. 민족 해방이 하나의 혁명적 과제로 주어져 있었기 때문에 개량적 성향의 우익보다 혁명적 성향의 좌익이 이 과제의 수행에 적합한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일본 군국주의가 극단으로 치닫던 1930년대 상황이 한국 민족주의를 좌익 쪽으로 더욱 몰아붙였다. 한국의 보수적 민족주의자 상당수는 1920년대에 일본의 자유주의파와 호응해 점진적 민족 발전에 희망을 품었다. 1931년 만주 침략을 계기로 일본 정당정치가 퇴행하면서 이 희망의 발판이 사라졌다. 일본 군국주의가 비타협적 강권통치로 조선 경영에 나서면서 한국 민족주의도 비타협적 혁명운동으로 좁혀졌다.

해외 독립운동의 주 무대였던 중국에서도 한국 민족주의 운동의 좌경화를 국민당 정권이 거들었다. 적극적 항일활동의 중심지 만주 지역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자라나 결국 괴뢰 만주국이 세워지는 것을 국민당 정부가 방관하는 동안 그 지역 항일운동에게는 공산당과의 연계가 유일한 활로가 되었다. 중국 자체의 민족주의가 공산당에 기울어져 가는 분위기 속에서 중국에서 활동하던 많은 한국 민족주의자들도 중국 공산당에 기대게 되었다.

상해임시정부는 보수적 민족주의의 거점으로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정부'의 역할을 실제로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상징적 의미를 넘어서지 못했다. 특히 1932년 상해를 떠난 뒤로는 존립 자체가 불안한 상태를 여러 해 지냈고, 1940년 중경에 자리 잡은 뒤 활동이 얼마간 되살아나기는 했지만 중국 국민당에 대한 예속이 강했다.

해방 당시 항일운동을 바탕으로 한 건국 영도력은 좌익에 쏠려 있었다. 그리고 당시의 좌익 중에는 민족주의 운동을 위해 공산당에 의탁한 사람들의 비중이 컸다. 좌익의 풍성한 인적 자원이 북한의 공산국가 건설좋은 조건이기는 했지만, 스펙트럼이 넓은 만큼 노선 갈등의 소지가 많이 있었다.

"이승만에게 민족주의는 하나의 상표일 뿐이었다"

  1948년 가을 남한과 북한에 명목상 독립국이 세워진 후 양측 정부는 오랫동안 서로를 '괴뢰'정부라고 매도했다. 북한에게도 소련의 과도한 영향력 때문에 이런 욕을 먹을 빌미가 얼마간 있었지만, 이승만 정권에 대해서는 여지없이 정확한 지적이었다. 이승만 정부는 국가발전을 위한 어떤 지향성도 보여주지 않는 대신 주어진 여건을 이용해 권력의 독점에만 힘을 쓴 기회주의 정권이었다.

성립기의 이승만 정권에게는 좌우 양쪽으로 강한 경쟁자가 있었다. 좌익에 대해서는 미국의 반공 지침을 등에 업고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길로 나섰다. 국시(國是), 즉 국가의 존재의미를 '반공(反共)'이라는 네거티브 명제에 두는 희한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 국시는 국민의 인권이나 행복에 앞서는 위치를 남한에서 오랫동안 누리게 된다.

오른쪽의 경쟁자는 김구를 위시한 임시정부 출신 민족주의자들이었다. 이승만 자신 민족주의를 간판으로 내걸고 있었고 보수적 민족주의라는 기준으로 서로 힘을 합쳐야 할 한 집안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에게 민족주의는 하나의 상표일 뿐이었다. 권력 독점을 위해서는 친일파의 등용도, 옛 동지들의 암살도 개의할 일이 아니었다.

가짜 민족주의를 내걸어 진짜 민족주의를 따돌리고 정권을 장악한다는 것이 쉽게 이뤄지는 일일 수 없었다. 그런 일을 이뤄내기 위해 온갖 무리한 짓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정권 장악 후 정권을 지키기 위해 행한 범죄는 정권 장악 과정의 무리를 무색하게 만들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정권의 성격을 여실히 보여주는 몇 가지 일만 살펴보자.

<반민특위 탄압> 일본지배기의 청산은 광복 후 국가와 민족의 진로 설정을 위해 꼭 필요한 과업이었다. 군정 3년간 지체된 이 과업에 착수하기 위해 건국 직후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되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구성되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일본경찰 출신 경찰요원을 앞세워 반민특위를 습격하는 등 탄압한 끝에 1949년 8월까지 반민특위를 무력화시켰다. 결국 반민족행위 혐의로 조사받은 680여 명 중 1950년 3월까지 단 7명이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이들도 1년 내에 모두 풀려났다. 그 결과 남한의 민족주의는 껍데기만 남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3권 분립 원리도 무너져 이승만 독재정권이 세워졌다.

<보도연맹> 좌익 경력의 인물들을 강압적으로 전향시킨 것만 가지고 사상의 자유 운운 하는 것은 사치스러운 일이라 해도 좋다. 그런데 그렇게 전향시킨 사람들로 보도연맹을 조직해 두었다가 전쟁이 터지자 불러 모아 학살한 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악질적 국가범죄의 반열에 오르는 것이었다. 유대인을 보호해 주겠다고 등록시켜 두었다가 그 명부를 조직적 학살에 이용한 나치의 범죄에 못지않은 것이었다.

<국민방위군> 1950년 말 중국의 참전에 밀려 서울을 두 번째 버릴 때 이승만 정권은 17세에서 40세 사이의 남성 민간인을 국민방위군으로 조직한다며 약 50만 명을 징집했다. 그러나 한겨울에 징집당한 이 군중에게 군복도 막사도 식량도 지급하지 않아 수만 명이 얼어 죽고 굶어죽는 참상이 벌어졌다. 북한 측에게 의용군 자원을 빼앗기지 않고 측근의 테러단체를 준군사조직으로 키우려던 이승만의 욕망과 야심에서 빚어진 이 사태는 그가 국민과 국가를 이용의 대상으로만 본 시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념 측면에서는 북한이 훨씬 더 유리한 조건을 누렸다"

  남한과 북한의 건국 과정에서 점령국인 미국과 소련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라 할 만큼 큰 것이었다. 남한의 대한민국 건국에 이념성이 사라진 것은 당시 미국의 대외정책에 지향성이 없던 상황에서 초래된 것이었다. 그 시점에서 미국은 유일한 핵무기 보유국으로서 세계최강의 국력을 자랑하고 있었으나, 공산주의 확산 기세 앞에 이념적으로 수세에 몰려 있었다. 그래서 편의 위주로 남한을 운영하다 보니 공산주의, 사회주의는 물론이고 민족주의, 자유주의, 민주주의, 심지어 자본주의까지, 어떤 이념에도 얽매이지 않는 이승만 집단을 키워내게 된 것이었다.

이념 측면에서는 북한이 훨씬 더 유리한 조건을 누렸다. 계급혁명을 통한 공산사회 건설이라는 지향성은 지식층과 지도층에서 폭넓은 동의를 끌어낼 수 있었다. 그래서 인민위원회를 빨리 구성해 군정을 대신할 수 있었다. 과거 청산도 남한보다 순조로웠다.

그러나 소련의 과도한 영향력이 북한 체제에 큰 부담이 된 측면이 있다. 해방 당시의 소련은 '현실 공산주의'의 대표로서 세계 공산주의자들에게 공산혁명의 본산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 치하의 소련은 많은 병리적 문제를 가진 국가였고, 이로 인해 신생 공산국가들에 대한 그 지도력에도 한계가 있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등의 고전적 공산주의에는 일당독재, 통제경제, 지도자의 우상화 같은 관념이 없었다. 이런 현상이 소련에 나타나게 된 것은 당시의 정치경제적 조건들 때문이었다. 산업화 수준이 매우 낮은 나라가 첫 공산국가가 되었다는 것부터 특이한 상황이었다. 그 위에 혁명 후 4년간의 내전부터 시작해 선진국들의 경제봉쇄 등 역경 속에서 새로운 체제의 국가를 키워내야 하는 비상사태의 연속이었다.

스탈린의 공포정치는 장기화된 비상사태가 낳은 결과였다. 이 공포정치가 당시 소련이 무너지지 않고 산업화를 이룩해 2차 대전의 엄청난 위기를 돌파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 그러나 그가 죽은 지 얼마 안 돼 소련 지도부 자체가 비판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무리한 체제였다. 그런데 1945년 당시에는 모든 공산국이 스탈린 체제에 경의를 표하고 그 지도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북한은 그 중 하나였다.

"변화를 적극적으로 겪어 온 남한, 정통성에 집착해 온 북한"

  1945년의 소련은 세계 유일의 성공한 공산국가였다. 그때까지 십여 년간 소련을 이끌어온 스탈린 체제를 온 세계 공산주의자의 대다수가 공산주의 성공의 열쇠로 여기고 있었다. 소련은 자기 영향권에 들어온 나라들을 일당독재와 통제경제의 길로 이끌었다. 그 블록에 들어온 많은 나라에서 지도자의 우상화가 행해진 것도 소련을 본받은 것이었다.

식민지 또는 점령상태에서 벗어나 독립한 나라들은 대개 산업화와 경제개발이 뒤진 상태에 있었다. 30년 전 자기네와 비슷한 상태에 있던 소련이 세계 최강을 다투는 군사력과 경제력을 가지기에 이른 것이 이상적인 모델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없었다. 공산주의 이념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도 민족과 국가의 발전을 위해 소련의 뒤를 따르려 했다.

일당독재도, 통제경제도, 심지어 스탈린 식 공포정치까지도, 불리한 조건을 이겨내기 위해 부득이한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인식했다. 부득이한 정도가 아니라 새로운 건설을 위해 고통과 파괴를 바람직한 것으로 여기기까지 했다. 6·25전쟁을 통해 한국에서 두 체제가 마지막으로 넓고 깊은 접촉을 가졌을 때, 좌익 출신을 포함한 남한의 대다수 진보적 지식인들이 북한 체제에 환멸을 느꼈다. 전체주의에 가까운 권력구조와 정치행태 때문이었다.

김일성 집단은 이승만 집단보다 훨씬 든든한 정통성의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남한에서 여러 번 정권이 바뀌는 동안 연속적인 정권을 지킬 수 있었던 것도 이 정통성 덕분이었다. 그러나 이 정통성은 정권을 지켜주는 힘으로 작용하면서 또한 변화와 발전을 가로막는 힘으로도 작용했다. 남한이 혼란스럽게 보이는 상황 속에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발전을 거듭해 오는 동안 북한은 시간이 지날수록 어려운 처지에 빠져들며 오늘에 이르렀다.

주어진 광복은 무늬만의 광복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진정한 광복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는 기회였다. 출발 단계의 남한 정권은 북한에 비해 정통성이 취약하고 예속성이 강했다. 그러나 활발한 진화과정을 60년간 거치면서 그런 대로 자기 앞을 가리는 나라로 발전해 왔다. 광복의 출발점을 웬만큼 활용해낸 셈이다.

변화를 적극적으로 겪어 온 남한, 그리고 정통성과 연속성에 집착해 온 북한이 서로 어울리기 시작하고 있다. 이 어울림이 풀려나가는 과정 속에서 진정한 민족 광복의 마무리 단계가 펼쳐질 희망을 가진다.

Posted by 문천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보수주의자의 한국 근·현대사 ⑤

기사입력 2008-11-27 오전 8:26:35

냉전시대를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는 뉴라이트의 시각

대한민국 시대의 역사인 현대사를 <대안 교과서>에서는 시기 순으로 4, 5, 6부에서 다루고 북한 역사를 보론으로 붙였다. 내 책 <밖에서 본 한국사>에는 7장의 5개 절 중 4개 절에서 현대사의 여러 측면을 각각 다루고 마지막 절에서 현재의 변화와 미래의 전망을 설명했다. 장절을 나눈 기준이 서로 달라 범위를 맞춰 대조하기 힘들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내 책의 절 하나씩을 놓고 그와 관련된 <대안 교과서> 여러 곳의 내용을 묶어 살펴본다.

밑에 붙이는 '냉전과 열전 사이'는 해방 후 반세기간 한국의 존재 상황의 일차적 조건으로 작용했던 냉전 체제가 한국 현대사에 어떤 굴곡을 일으켰는지 개관한 글이다. <대안 교과서>에는 이와 관련된 내용이 4, 5부와 보론의 여러 곳에 나와 있다.

여러 사안에 대한 두 책의 관점 차이가 미국과 소련의 역할에 대한 평가에서 가장 집약적으로 나타난다.

1945년에 해방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개항기 이래 한국인에 불리하던 세계 정세는 모습만 바꿔 계속되고 있었다. 새로운 역경은 민족의 분단과 새로운 예속의 위협을 제기했고, 현실 속에 이 위협을 체현한 주체가 양대 진영의 맹주 미국과 소련이었다. 한국에서 두 나라의 이해관계가 거의 아무런 제3자 개입 없이 직접 마주쳤기 때문에 그 갈등이 극한으로 치달은 결과 분단 건국이 이뤄지고 전쟁이 일어났다. 한민족의 비극에 대한 두 나라의 책임은 구조적으로 대등한 것이다.

미국과 소련이 악마의 나라들이어서가 아니라, 냉전 구조 속에서 그들의 역할이 한국의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에 장애물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수십 년 전 제국주의 국가들이 피지배 민족들에게 악역을 맡았던 것과 근본적으로 비슷한 상황이었다. 이것은 한국 현대사를 이해하기 위한 기본조건이다.

그런데 '대안교과서'는 모든 책임을 소련에 떠넘기고 미국에게는 면책권을 주려고 발버둥을 친다. 특히 분단 건국과 전쟁 과정에서 조그만 증거라도 소련과 북한의 책임을 뒷받침하는 것이 있으면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독자에게 냉전 상황의 구조를 이해시키기보다 미국의 역할을 정당화하는 데 바쁘다. 미국을 좋은 나라로 미리 정해 놓고 매사를 그에 맞춰 설명하려 드는 것이다.

미국이 좋은 나라인 까닭은 한국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길로 이끌어주었다고 하는 데 있다고 한다. 이 책의 서론부(1부 1장)에서부터 한국 근·현대사를 자유민주주의 발전과 경제 성장의 역사로 규정해 놓고 있다. 그리고 미국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앞장서서 실천하는 나라이니, 그런 나라에게 예속된 것이 대한민국의 복이라는 것이다.

미국은 1960년까지 대한민국의 종주국 노릇을 하다가 그 후에는 맹주 내지 후견인 노릇으로 물러섰고, 1990년경 냉전 해소 후로는 특수 관계를 정리했다. 종주국이나 맹주 노릇을 할 때 미국은 한국의 민주주의나 경제 발전보다는 냉전 구조 속의 역할을 더 중시했다. 같은 시기에 중남미 등 여러 지역 친미 국가들의 독재 정권을 비호한 것과 별 차이가 없던 것이 한국에 대한 미국 정책의 기조였다. 한국의 민주화와 경제 발전은 한국인의 힘과 뜻으로 이룬 것이며, 미국에게 고마운 점이 있다면 결정적인 방해를 하지 않았다는 정도다.

앞으로 한국의 여러 방면 발전을 위해서도 미국과의 관계가 중요한 참고 사항이기는 하지만, 미국과의 관계에 지나치게 의존할 일이 아님을 현대사의 경험에서 알 수 있다. 한국 현대사에 대한 냉전 구조의 영향과 미국의 역할은 엄정한 판단의 대상이 된 과거사다. 그런데 <대안 교과서>는 미국과의 특수 관계를 떠나서는 한국의 장래를 내다볼 수 없다는 냉전 시대의 시각에서 아직까지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20년이 다 돼가는 공산권 붕괴를 증거로 자본주의 원리가 불변의 진리인 것처럼 믿는 신자유주의는 하나의 신종 유사종교일 뿐이다. 공산권 붕괴는 하나의 역사적 사건일 뿐이다. 신자유주의가 단기적 전략으로서는 효과가 있었을지언정, 세계의 앞날을 열어 갈 이념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진행 중인 금융 공황이 보여주고 있다.

뉴라이트 역사관에 동조하는 이명박 정권이 목전의 현실 앞에서도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드는 것이 무슨 까닭일까? 지금이 주식을 사놓을 때라니! 주식을 사놓아 이익이 될지 손해가 될지를 떠나, 장사 안 되고 일자리 없어 서민들이 비명을 지르는 판에, 주식 사고파는 것밖에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없는가? 신자유주의가 '가진 자'들을 대표하는 척하지만, 사실은 투기꾼만을 대표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굳혀주는 일이다.

핏대 그만 올리고 책으로 돌아오자. 한국 현대사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열쇠의 하나가 냉전 구조의 영향이다. 그런데 <대안 교과서>는 냉전 구조의 엄정한 이해를 방해하는 데 힘을 쏟은 책이다. 자본주의 원리를 절대시하고 미국에의 예속을 당연시하는 것이 결정적인 걸림돌들이다.


냉전과 열전 사이

▲ 미국은 대한민국을 낳아주고 키워준 나라다. 1990년까지 45년간 두 나라의 관계는 '전략적 동반자' 이상의 것이었다. 그 동안 미국은 우리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자리 잡았다. 그런데 어쩌나? 미국이 한국과의 특수관계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게 됐는데? 미국이 밉지 않더라도, 이제 기대지 않고 살 길을 찾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프레시안
  일본에게서 해방된 한국을 점령한 두 나라가 바로 그 후 반세기간 냉전의 주역이 될 나라들이었다. 그로 인해 한국은 둘로 쪼개져 세계 냉전 구조의 최전선에 자리를 잡고 근대국가로서의 역할을 종속적인 위치에서 시작하게 된다.

"전투와 교전 행위가 있어야만 전쟁이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무력 행사 의지를 상당한 기간에 걸쳐 서로 드러내고 있다면 그것도 전쟁으로 보아야 한다." 17세기에 토머스 홉스가 한 말이다. 냉전은 이런 범주의 전쟁에 들어가는 것이다.

냉전이 진행되는 동안 전 세계의 대다수 사람들이 어느 시점에라도 전면적 전쟁이 터질 수 있다고 걱정하며 지냈다. 그리고 그 전쟁에는 핵무기가 사용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전면적 전쟁이 실제로 벌어지지 않은 것은 당사자 사이의 신뢰 덕분이 아니라 전쟁이 터질 경우 쌍방 모두가 멸망하게 되리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해석된다.

한국은 독일, 베트남과 함께 두 진영으로 쪼개진 분단국 셋 중 하나였다. 이들 세 나라가 냉전의 속박을 가장 뼛속깊이 겪은 나라들인데, 그 중에서도 한국의 경험이 제일 철저했다. 베트남에서는 친미 정권이 국가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서 미국의 총력 지원에도 불구하고 냉전 중반에 무너졌다. 독일인들은 냉전의 제약을 넘어서는 경제와 사회의 발전을 이뤘기 때문에 냉전체제 극복의 중요한 돌파구 하나를 스스로 만들어냈다.

한국은 세계적 냉전 구조가 해소된 후에도 십년 넘게 냉전체제를 유지했다. 2000년의 남북정상회담으로 돌파구를 찾았으나 국내에서는 수구 세력의 견제가 계속되었고, 국제적으로는 미국의 북한 봉쇄 정책이 길을 가로막았다. 7년만에야 2차 남북정상회담을 열면서 해빙을 위한 지속적 작업을 바라보게 되었다.

2차 남북정상회담에 따른 변화의 전망을 미국 정부보다도 남한 내 수구 세력이 더 받아들이기 힘들어 하고 있다. 이것은 냉전체제가 오랫동안 외부의 질곡으로 남한을 지배한 끝에 남한 사회에 내면화되어 버린 결과다. 감옥에 오래 갇혀 있다가 갑자기 풀려난 사람이 자유로운 세상에서 살기를 힘들어 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미국은 소련에 대해 일찍부터 강한 적대감을 보였다"

  남한에서 냉전의 표현은 '반공'이었다. 반공 풍조가 집단적 피해망상 수준에 이르는 데는 1950~53년간의 전쟁 경험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베트남전쟁과 함께 냉전이 이례적으로 '열전'의 양상으로 나타난 사례인 한국전쟁은 남한의 반공주의를 비롯해 한국의 냉전체제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을 바라볼 시점에서 미국이 가장 걱정하고 있던 것은 전쟁 후의 경제적 위기였다. 제1차 세계 대전 후의 불황과 혼란이 되풀이될 것을 걱정한 것이었다. 미국 외의 주요 산업국들이 모두 심하게 파괴되어 있는 상황 때문에 이번 위기는 1차 대전 뒤보다도 더욱 극심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었다.

종전 후 미국 정책에서는 경제 위기 회피가 가장 중요한 목표였다. 미국이 새로운 전쟁을 막기는커녕 경기 부양을 위해 오히려 불러오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아이젠하워가 거론한 '군산 복합체'를 그런 경향의 주체로 보기도 한다. 지속적 군비 확장을 필요로 하는 냉전체제가 미국 경제 구조에 유리한 것이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미국은 소련에 대해 일찍부터 강한 적대감을 보였다. 혁명 초기의 소련이 실패하기를 바라고 비협조 정책을 취한 것은 모든 자본주의 국가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영국, 독일 등 대부분 나라들은 1925년 이전에 소련의 존재를 승인했다. 유독 미국만이 1933년까지 버티다가 프랭클린 루즈벨트 정권 들어서야 소련과 국교를 열었다.

초기 소련에 대한 미국의 적대감은 경쟁의식에 상당한 원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두 나라는 유럽의 변방에서 산업화를 늦게 시작했으나 방대한 잠재력을 가진 나라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소련이 세워질 때는 1차 대전으로 유럽 선진국들이 피폐해진 상황에서 두 나라의 잠재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던 시점이었다. 2차 대전으로 유럽이 초토화된 상황은 두 나라가 초강대국으로 나설 기회였다. 강력한 경쟁국 소련이 스탈린의 호전적 팽창주의를 앞세우고 나오는 데 미국인들은 위구심을 느꼈다.

"소련이 걸어온 길이 전 세계 공산주의자들에게 모델이 되었다"

  2차 대전이 끝날 때 소련은 승리감의 절정에 올라 있었다. 그 승리감은 오랜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얻은 것이었기에 더욱 빛나는 것이었다. 혁명 전의 러시아가 2류 국가였다면, 혁명 후 4년간의 내전을 겪은 뒤의 소련은 3류에도 못 낄 만신창이 국가가 되어 있었다. 최소한의 민생을 회복시키기 위해 몇 해 동안 유화적인 신경제 정책을 쓰다가 결국 철권에 의거한 통제 경제가 돌파구로 떠올랐다. 이런 배경에서 스탈린이 집권한 것이었다.

스탈린의 공포정치는 그가 죽은 후 소련 지도부에게까지 비판받을 정도로 참혹한 것이었지만, 경제면에서는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중공업에 치중한 산업 발전은 2차 대전에서 가치를 발휘했다. 전쟁은 스탈린체제의 어두운 면을 덮어주고 장점을 드러내줬다.

2000만 가까이로 추산되는 소련의 2차 대전 인명 피해는 다른 모든 나라 피해의 합계에 맞먹는 수준이었다. 그런 피해를 딛고 소련은 나치 격파의 주역이 되었다. 1812년 나폴레옹 침략에 이어 러시아가 두 번째로 유럽의 주축 세력을 이겨낸 영광의 승리였다.

1920년대 코민테른에서는 독일어를 공용어로 썼다. 2차 대전 후 코민포름에서는 러시아어가 공용어가 된다. 러시아 같은 후진국에서 첫 공산국가가 나타난 것을 하나의 우연으로 여기고 공산주의 중심지로 인정하지 않던 상황이 이제 바뀐 것이었다. 소련이 걸어온 길이 전 세계 공산주의자들에게 강력한 모델이 되었다.

스탈린이 승전의 여세를 몰아 공산권 확대에 나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전체적으로 보아 모험을 회피하는 경향을 보였다. 유고슬라비아의 코민포름 이탈을 강경한 행동으로 막지 못하고 대신 다른 동구권 국가들이 동조하지 못하도록 숙청을 가하는 데 그쳤다. 산토끼 잡는 데보다 집토끼 지키는 데 뜻이 있었던 것이다. 독일 처리를 둘러싼 서방과의 대결에서도 그의 행동은 시위 수준의 베를린 봉쇄에 그쳤다.

1949년 중국 공산당의 승리는 스탈린이 예측하지 못한 것이었다. 공산정권 수립을 불과 반년 앞둔 1949년 4월 남경에서 광동으로 후퇴하는 국민당 정권에 동행한 유일한 외국 외교관이 소련 대사였다. 자생력 있는 또 하나 거대한 공산국가의 등장은 소련과 스탈린에게 꼭 반가운 것만이 아니었다.

1950년 무렵까지 소련은 미국과의 직접 대결을 회피하고 있었다. 이란에서, 그리스와 터키에서, 독일에서, 소련의 양보가 이어졌다. 한국에서의 도발은 당시 상황에서 이례적인 것이었다. 1949년 원자탄 개발로 얻은 자신감 덕분에 외곽 지역에서 시험적 도발을 감행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같은 진영이면서도 애매한 관계에 있던 중국을 앞세우는 전략이 또한 이 도발을 가능하게 했다.

"이승만 정권은 무능을 드러내고 미국에게 해고당한 것이었다"

  1948년 한국 남북에 세워진 두 정권은 전쟁을 바랄 만한 동기를 피차 얼마만큼씩 가지고 있었다. 전쟁이라는 비상 상황이 벌어지면 종주국 내지 후원국인 미국과 소련의 집중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속셈이 있었다. 그리고 정권에 대한 경쟁 세력을 숙청하여 체제 확립의 기회로 삼을 수 있는 것이 전쟁이었다.

북한 김일성의 체제 확립은 소련과 스탈린의 모델을 따랐다. 연안파, 소련파, 남로당파 등 좌익의 큰 줄기들을 꺾고 김일성 한 사람에게 권력과 권위를 집중시켰다. 그리고 당의 통제력을 중심으로 긴장된 사회체제를 구축했다.

남한에서는 건국 전후부터 도태되기 시작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진영이 전쟁 동안 거의 박멸 상태에 이르렀다. 전쟁 후에도 미진한 박멸 작업이 '반공'이란 간판 밑에 계속되었다. 이승만 체제에 대한 일체의 도전자들이 '빨갱이'로 몰렸다. 1958년 조봉암의 처형으로 정치계의 박멸 작업이 완료되었고, 이승만의 자유당과 마찬가지로 이념성 없는 정당만이 야당으로 존속이 허용되었다.

1960년 학생의거로 이승만이 축출되었다. 남한에서는 이 사건을 '혁명'으로 받드는 전통이 있다. 그러나 이승만의 축출 자체를 혁명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승만의 퇴임 결정 자리에 함께 있던 것은 외무부장관(대통령 유고시 승계권자)에 막 임명된 허정과 육군참모총장 송요찬, 그리고 미국 대사 매카나기였다. 이승만이 최후의 보루로 여겼던 군부와 미국의 대표들이 그의 퇴임을 방관하거나 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 입장에서 이승만은 이용 대상일 뿐이었다. 한국 통제라는 미국의 목적에 능률적으로 공헌하는 데 그의 가치가 있었다. 이승만 정권의 부패와 수준 낮은 독재정치는 미국의 신뢰를 받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이념 없는 정치는 능률로 평가받을 뿐이다. 북한의 김일성 정권 같은 자생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던 이승만 정권은 무능을 드러내고 미국에게 해고당한 것이었다.

이승만의 축출은 혁명이라기보다 하나의 정변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후 3개월간의 허정 정부만이 아니라 1년에 못 미친 민주당 정권도 과도정부의 성격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러나 4·19 학생의거는 허울만의 해방 이후 억압과 공포에만 짓눌려 있던 한국인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떠올려준 계기로서 의미가 있는 사건이었다. 이 과도기에 냉전체제 거부 움직임이 남한 사회에 나타났으나 현실의 장벽을 넘을 수 있는 수준은 되지 못했다.

"한국군 수뇌부는 일본군과 만주군 장교 출신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1년가량의 과도기를 거쳐 이승만 정권의 뒤를 이은 것은 군사 독재였다. 군사 독재는 냉전체제 속에서 미국이 원하는 남한의 역할을 이승만 정권보다 훨씬 능률적으로 20여 년간 이끌었다.

박정희 집단의 쿠데타 음모는 4·19 무렵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한국군은 6·25전쟁을 계기로 방대한 규모가 되었다. 50년대를 통해 군부는 남한 최대의 재력과 인력을 갖춘 조직이 되었으나 이승만 체제 아래서는 독자적 세력으로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승만이 미국의 신임을 잃자 이승만의 권력을 대신할 여건이 된 것이다.

한국군 수뇌부는 일본군과 만주군 장교 출신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미국은 한국 군부를 한국 통제의 가장 중요한 통로로 사용하면서 미국식 지휘부를 양성하려 노력했지만 장군들 중에는 일본식 군인 정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군부가 정치 전면에 나서는 행태부터가 1930년대 일본에서 배워온 것이었다. 그래서 박정희 군사정권은 미국에 의존하면서도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와 체질적으로 맞지 않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 책에서는 1961~1987년간의 남한 정권을 모두 '군사정권'이라 칭한다. 대부분 형식상으로는 선거를 통해 정부가 구성된 기간이다. 그러나 선거가 선거다운 선거가 못되었고, 군 통제력이 선거보다 중요한 정권의 근거였다고 보기 때문에 군사정권이라 부르는 것이다.

군사정권은 실력을 갖춘 조직인 군부를 발판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이승만 정권보다 안정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미국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이승만 정권에 비해 냉전체제 속의 역할을 효과적으로 수행했다. 경제를 중심으로 한 국가발전도 보다 능동적인 자세를 갖추게 되었다.

군사정권은 나름대로 주체성이 있는 정권이기도 했다. 정권 안보를 위해 국권을 훼손시킨 일도 더러 있었고 국가를 봉사의 대상보다 이용의 대상으로 여긴 경향도 있었지만, 자기 나라로 생각하고 그 발전을 도모한 것이 정권의 기조였다. 억압체제를 대미 종속 관계가 아닌 국내 문제로 보는 시민계층의 인식은 이 시기 민주화운동 성장의 배경이 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유신이라는 전체주의 노선으로 대응했다"

  남한에 군사정권이 들어선 후 미국의 영향은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방향으로 남한에 작용했다. 한편으로는 미국이 표방하는 자유민주주의 사상이 들어와 시민계층의 정신적 성장을 뒷받침해 주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베트남전 등 반공 투쟁에 대한 남한의 현실적 공헌을 확보하기 위해 군사독재를 지원해 주었다. 그래서 미국의 절대적 지원을 받는 남한 정권이 <타임>, <뉴스위크> 등 미국의 주류 정기 간행물 배포를 통제하는 기현상이 펼쳐지기도 했다.

미국에 대한 남한 정권의 절대적 종속 상태가 계속된 것과 대조적으로 북한 정권은 소련과 중국, 두 후원국 사이에 끼어 있으면서 주체사상을 키워냈다. 소련과 중국의 관계는 한국전쟁 과정에서 불안하게 되었다가 1950년대 후반 극한 대립에 이르렀다. 북한은 소련에 주로 의지하던 상태에서 중국 쪽으로 서서히 무게를 옮기다가 1966년 주체사상을 선포했다. 주체사상의 출발점은 어느 한쪽에도 종속되지 않는 독자 노선에 있었다.

북한의 독자 노선은 남한에 대한 전면적 우위를 바탕으로 세워진 것이었다. 당시의 북한은 정권의 정통성과 이념성, 그리고 경제력과 군사력에서 모두 남한보다 우월한 상태였다. 청와대 습격 시도, 푸에블로호 납치, 울진·삼척 지역 무장대 투입 등 1960년대 말의 대공세는 이 자신감에서 나온 것이었다. 남한 인민의 이목을 가리고 있는 독재체제의 통제를 깨뜨리기만 하면 남한 인민도 북한 체제를 선택하리라는 믿음이었다.

독재에 대한 시민계층의 점증하는 반발과 북한의 공세 사이에 끼인 박정희 정권은 유신이라는 전체주의 노선으로 대응했다. 종래의 독재와도 차원이 다른 극약처방이었다. 반공전선에서 남한의 이탈을 꺼려 부득이 지원을 계속해 온 미국과의 관계에도 긴장이 늘어났다. 극약의 약효는 6년 만에 터져 유신체제가 내부붕괴를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1979년 10월 박정희의 죽음으로 유신체제의 뼈대는 무너졌지만 그 약발은 8년간 더 계속되었다. 1987년 6월 항쟁은 안팎의 조건이 합쳐져 이뤄진 것이었다. 안으로는 유신체제 붕괴 이후 민주화운동이 상당한 성숙단계에 이르렀고, 밖으로는 고르바초프 등장으로 미소 대결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 것이었다. 6월 항쟁을 계기로 민주화운동이 남한 정치의 전면에 나서면서 냉전체제 탈피 과정이 비로소 시작되었다.

그 후 공산권 붕괴를 이어 남북한이 유엔에 가입하면서 각자 종래의 적성국들과도 수교를 맺게 되는 변화가 일어났다. 이 변화를 남한에서는 순조롭게 받아들인 데 반해 북한이 얼른 소화하지 못해서 해빙이 안 된 채로 21세기를 맞게 된다. 미국의 적대정책도 이 사태의 한 이유였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는 북한의 경직된 1인 독재체제였다. 결정적 전환점이 될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1994년 7월 김일성의 죽음으로 체제 정비가 바쁘게 된 북한이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한 차례 기회를 잃고 만 것이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