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집안 명예가 걸린 얘기니까 주인공 이름을 '모아무'란 가명으로 부르겠다. 모아무는 명문가 자제로 어릴 때 문장과 서화에 뛰어난 소질을 보여 신동이란 이름을 얻었다. 그런데 소년 시절 주색잡기에 천재성을 드러내면서 일찍이 인생 뒷골목에 들어섰다. 나이 스무 살이 되면서는 과거가 있어도 남의 일로 여기고 기방과 골방에서 주색과 잡기에 몰두할 시간을 아끼게 되었다. 집안에서 버린 자식 취급을 받아 궁색한 지경에 빠졌는데도 사치와 향락의 습성을 버리지 못하니 본인도 괴롭고 주변사람들도 괴로운 인생이 되었다.

 

어느 해 장안 거부 황아무가 이름난 명장을 시켜 병풍 틀 하나를 마음먹고 만들었다. 당대 명인의 작품을 얻어 후세에 길이 남을 명품을 만들 생각으로 작가를 수소문했다. 그 무렵 노름빚과 외상 화대가 쌓여 꼼짝도 못할 지경에 있던 모아무가 그 소문을 듣고는 인생의 돌파구를 여기서 찾을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황아무를 찾아가 자청하고 나서니 그의 소시쩍 명성을 기억한 황아무는 기이한 인연일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응락했다.

 

모아무는 황아무의 집 별채에 거처를 정하고 모처럼 편안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십여 년 내팽개치고 있던 서화에 손대려니 준비기간이 필요하기도 했다. 심신을 가다듬는 데 한 달, 붓 다듬는 데 한 달, 먹 가는 데 한 달, 석 달 동안 산해진미와 계집종의 안마 서비스로 칙사 대접을 받으며 지냈다.

 

더 이상 늦출 핑계가 없어졌을 때 모아무는 드디어 작품 제작에 나섰다. 맑은 날 새벽 별채 앞마당에 병풍 틀을 펼쳐 세우고 한쪽 옆에 먹물을 담은 물통과 빗자루 같은 붓들을 갖춰놓았다. 황아무의 가족과 하인들이 '역사의 현장'을 구경하러 둘러서 있었다.

 

모아무는 여러 날 동안 궁리해 둔 행동에 나섰다. 제일 큰 붓에 먹물을 듬뿍 찍어 병풍의 왼쪽 끝에서부터 한 일 자를 쭈욱~ 그어나갔다. 그어나가면서 발걸음을 가속시키다가 오른쪽 끝에 이르자 붓을 내던지고 같은 방향으로 내달려 재빨리 담을 넘어 도망치려 했다. 다년간 노름빚에 시달리면서 몸에 익힌 삼십육계를 시도한 것이다. 그런데 담 꼭대기를 딛은 발이 미끄러져 거꾸로 떨어지면서 목이 부러져 그 자리에서 죽어버렸다.

 

석 달 동안 사기꾼을 헛대접하고 병풍 틀까지 망친 황아무는 손해가 막심했지만, 장사꾼답게 손해를 받아들일 줄 아는 위인이었다. 모아무의 장례를 박하지 않게 치르도록 도와주고 병풍 틀은 창고에 처박아두었다.

 

그로부터 십여 년 지났을 때 청나라의 저명한 박물군자 동아무가 황제 사절의 부사로 한양에 왔다. 저녁무렵 객관 마루에서 바람을 쏘이고 있는데 뭔가 느껴지는 게 있어서 유심히 바라보니 저쪽 어딘가에서 서기가 떠오르고 있는 것이었다. 그 위치를 유념해 뒀다가 이튿날 아침 역관을 앞세우고 찾아가 보니 황아무의 저택이었다.

 

진짜 칙사를 맞아 황송해 하는 황아무에게 동아무가 청했다. 이 집에 빼어난 보물이 있는 것 같은데 구경 좀 시켜달라고. 황아무는 어리둥절했다. 제딴에 모은다고 모은 게 좀 있기는 하지만 천하의 동 대인 눈에 찰 만한 건 없다고 대답했다. 동아무는 지나친 겸손이시라며 거듭 청했고, 황아무는 가장 아끼는 물건 몇 가지를 보여줬다. 역시 천하의 동 대인 눈에 차는 물건은 없었는데, 동아무는 창고를 보여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창고 문을 열고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망쳐진 병풍 틀을 펼쳐보기에 이르렀다. 병풍을 펼치자 동아무는 옷깃을 여미고 지긋이 바라보다가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허, 참... 사람 목숨 하나 들었군."

 

Posted by 문천

[동아시아를 묻다] 동양 전제와 동방 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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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민주
 
봄이다. '아랍의 봄'이 3년차를 맞는다.
 
2011년 중동 혁명이 서구적인 '민주화'가 아니었음은 나날이 확연해지고 있다. 1989년의 동구 혁명에 빗대었던 독법은 그릇된 것이었다. 견주자면 차라리 1979년이 어울린다.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과 동격에 둘 수는 없겠다. 그럼에도 '서구화'와는 상이한 경로와 궤적에 진입했다는 점에서 일맥은 상통한다. 이슬람 사회는 '민주화' 이전보다 한층 더 '서구화'에서 이탈하는 방향으로 내달릴 것이다. '비서구적 민주화'라고도 하겠다. 1989년 동구 혁명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동구의 민주화로 촉발된 담론이 '역사의 종언'이었다. 동아시아 또한 힘을 보탰다. 1987년을 기점으로 한국, 대만(타이완), 필리핀 등도 '민주화'되었다. 전 지구가 자유민주주의 제도로 수렴된다는 세계화 담론이 절정을 구가했다. 그렇게 새 천 년이 열렸다.
 
그러나 두 눈을 부릅뜨면 세계의 작금이, 동방의 현재가 불가사의하다. 중국은 맹렬하게 굴기하고 있고, 베트남은 도이모이를 거듭하고 있으며, 북조선은 삼대를 내리 지속하고 있다. 이 동방 3국 앞에서 사회과학은 좀체 무력하다. 1990년대를 풍미했던 체제 이행 이론은 숫제 쓸 구석이 없다.
 
내재적 이해가 필요하다. 재차 동아시아라는 장소성과 그 역사성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즉 1989년 동구와 동방의 차이는 동방 사회주의 국가들이 '민주화'에 더 억압적이거나 정체되어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거꾸로 (이미?) 다른 민주정을 실현하고 있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민주가 천주마냥 유일무이할 리 없다. 함에도 '민주'를 측정하는 잣대와 척도는 전혀 민주적이지 못했다. 서구 민주가 100년간 독점적 지위를 누렸다. 크게 셋이다. 시민 사회, 의회제 그리고 선거이다. 이 삼위일체가 '민주주의' 여부를 따지는 매사의, 불변의 판단 기준으로 군림했다.
 
그러나 회의와 불신은 이미 자욱하다. 도처에서 '새 정치'에 대한 갈망이 분출한다. 실제로 서구화의 경로를 밟았던 동구 국가들이 얼마나 안녕하고 태평해졌는지 모르겠다. 일본, 한국, 대만, 태국, 필리핀 등 미국 동맹국들의 '민주화' 이행에 대해서도 과대평가를 삼가게 된다. 이들이 노정하고 있는 '민주주의'의 실상을 냉정하게 직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동방 사회주의 국가들은 애초부터 상이한 정치의 맥락 아래 있었다. 건국 이래 단 한 번도 서구 민주를 추구한 바 없다. 그리고 바로 그 지향으로부터 국가의 정통성과 전통성을 보장받는다.
 
나는 '서구 민주'를 통으로 부정할 생각은 없다. 유럽산이라 해서 기각하는 것도 아니다. 사상과 문화와 제도와 가치의 자유무역을 결사적으로 옹호한다. 세상은 넓고 배울 것은 많다. 다만 인생이 턱없이 짧을 뿐이다. 짧은 인생 탓에 우리의 배움은 편중되고 편향된다. 역사적 구속을 받는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20세기 '신청년'들의 학습도 그러했다. '서구 민주'를 상대화할 여력과 여유가 없었다.
 
이제는 다르다. '서구 민주'를 지방화하고, 국지화할 수 있다. 그 제도가 진화해온 역사성과 장소성에 착목함으로써 그 장점은 물론이요 단점까지도 반추할 수 있게 되었다. '타는 목마름'은 해갈되었으니, 이제는 곱씹고 되새김질할 때이다. 돌아보면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던 선생님과 선배들의 의식과 관념, 발상 또한 '냉전형 민주'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선생님, 그건 옛날 얘기지요.' 후세와 후학의 특권을 만끽한다. 후세와 후학의 책무이기도 하다.
 
동양 전제
 
'옛날 얘기' 가운데 <동양적 전제주의(Oriental Despotism)>(카를 비트포겔 지음, 구종서 옮김, 법문사 펴냄, 1991년)가 있다. 냉전기의 한복판이었던 1950년대, 소련과 중국에 비수를 겨눈 저작이었다. 역시 잣대는 시민사회+의회제+선거의 삼위일체였다. 셋이 결여된 일당독재의 뿌리를 '동양적 전제'에서 구한 것이다.
 
터무니없다. 어처구니도 없다. 러시아는 잘 모른다. 말을 삼가겠다. 하지만 중국은 다르다. 1000년 전 이미 신분제가 사라진 곳이다. 송대 이래 중국의 통치 구조는 자유 경쟁을 통해 선발된 지식 관료로 구성되었다. 정치적 '평등주의'를 일찌감치 성취한 것이다. 독보적이었다.
 
이로써 군주 또한 귀족 집단의 사유물이 아니었다. 인민 전체를 대표하는 공공물이 되었다. 당 태종과 명 태종은 전혀 다른 군주였다. 고려의 왕과 조선의 왕 또한 성격이 판이했다. 조정의 지식 관료는 신분제 의회의 귀족처럼 지역과 계층을 대의하지도 않았다. 그래서는 천부당만부당 아니 될 일이었다. 특정 집단의 대의(representation)란 '사(私)'에 그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인의 논리이지, 군자의 도리는 아니었다. 지공무사(至公無私)해야 했다.
 
이로써 확립된 신유학 질서는 '일군만민(一君萬民) 체제'라고 할법한 것이었다. 만민은 평등하다. 그러나 아무나 주권을 행사하지는 못한다. 오로지 배우고 익힌 자들만이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 선발된 관료들은 공공성에 헌신해야 했다. 그 정점에 군주도 있었다. 군주를 천하위공의 상징체로 규율하는 것이 사(士)의 사명이었다. 탓에 국회의원처럼 유권자와 '리(利)'로써 맺어지지 않았다. 이익을 탐하지 않는 공인들의 일반 의지가 관건이었다. 그것이 공론(公論)이다. 그 공론으로써 군주를 견제하고 압박했다. 그래서 군신 간에는 오직 '의(義)'가 있을 뿐이었다. '의'가 어긋나면 군신 관계는 철회되었다. 탄핵이었다. 초야로 돌아가 후학을 키우고 후일을 도모했다. 이것이 '동방형 민주'의 원리였다.
 
이는 내 재산을 기반으로 한 표를 행사하고, 그 표를 통해 최대 다수의 최대 이익을 실현한다는 시민사회-의회제-선거형 민주와는 퍽이나 다른 논리였다. 귀족제/봉건제→신분제 의회→의회제로의 긴 이행기를 답습하지도 않았다. 일거에 봉건 귀족들을 일소해 버림으로써 단숨에 일군만민형 민주로 비약했던 것이다.
 
일체의 중간 권력 집단을 배제해 버렸다는 점에서 '순수 민주형'에 더욱 가깝다고도 할 수 있다. 천명과 민심이 합일된 것이다. 그래야 민심이 천심이라는 전복도 가능하다. 물론 이 파격과 충격을 조선은 온전히 수용할 수 없었다. 시장의 미발달로 봉건적 속성은 지속되었다. 양반제는 귀족제의 잔상이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500년은 긴 시간이었다. 신유학의 논리가 확산되고 착근되고 토착화되었다. 끝내 발현된 것이 '동학(東學)'이었다. 수운 최제우는 '사람이 곧 하늘이라(人乃天)' 했다. 200년 전 왕양명은 '만가성인(萬街聖人)'을 갈파했다. 거리의 모든 이가 성인이란 뜻이다. 상인도, 농민도 유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농공상의 차별을 허무는 동방의 '인권 선언'에 다름 아니었다. 이처럼 동방형 민주는 1000년을 통해 진화하고 있었다. '동양적 전제'는 무지와 편견, 만용의 소치였다.
 
계약(social contract)과 향약(鄕約)
 
동방 민주의 파장은 비단 동아시아에 그치지 않았다. 몽골 세계 제국의 유라시아 네트워크를 통해 서쪽 끝에 자리한 유럽까지 자극했다. 송명이학의 전파는 이성의 발견과 계몽 사상을 고무했다. 예수회 선교사 활동의 부산물로 사서(四書)가 라틴어로 번역되어 근대 사상을 일깨웠음이 문헌학적으로 밝혀지고 있다. 이로써 왕권신수설에 기초한 '전제군주'도 '계몽군주'가 되어갔다. 신유학은 유럽 계몽주의의 산파였다.
 
그리하여 고대 그리스 시민→중세의 봉건 귀족→근대의 시민 계층으로, 공론장에 참여하는 참가자들이 순차적으로 확대되어 왔다는 하버마스 류(<공론장의 구조 변동>)의 대서사 또한 왜곡이 심대하다. 유럽 홀로 자가 발전해온 것이 아니다. 유럽은 초원길로, 바닷길로 아시아와 한 몸이었다. 유라시아적 맥락에서 공진화해온 것이다. 따라서 서구 민주의 발현 또한 유라시아적 지평에서 조감하는 것이 한층 합당하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의회와 선거에 기초한 서구 민주의 지방성이 또렷해진다. 봉건제와 귀족제의 잔상이 짙었던 서유럽적 맥락에서 신분제 의회를 거쳐 국민 의회가 창출된 것이다. 아니, 중국과 같은 고도의 중앙 집권적 지식 관료제 국가가 발전하지 못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의회제로 이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봉건적 속성을 완전히 소거하지 못한 지역 대표제(=영주 뽑기)라는 발상 자체가 '발전도상국'형 제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유럽에서 불꽃이 튄 민주적 열정 또한 천주 문명의 흔적이 역력하다. 프랑스 혁명까지, 아니 그 이후에도 유럽에서는 천주 문명으로 상징되는 종교적 열광이 지속되었다. 탓에 세속적 의미에서의 정치의 발전이 몹시 더디었다. 단적으로 베스트팔렌 조약(1648년)부터가 국가와 종교를 합치시켜 '주권'을 인정하기로 한 것이다.
 
'일국가 일종교'의 명문화를 통해 신/구교가 모자이크처럼 뒤섞여 다투고 있던 중세적 아노미를 정비코자 한 것이다. 허나 속성만은 여전했다. '민주' 국가들이 '비민주' 국가들을 향해 '체제 전환'마저 불사하며 노정하는 그 놀라운 호전성에도 명명백백 천주문명의 종교적 열광이 각인되어 있다 하겠다.
 
'시민 사회'라는 개념 또한 1000년 종교 전쟁과 무관치 않다. 종교를 정치로부터 분리하기 위한 각고의 노력이 필요했다. 국가와 사회의 분리를 숙고하지 않을 수 없었던 절박한 역사적 요구의 산물이었다. 그래서 '법치 국가'라는 리바이어던의 기획이 요청된 것이다. 종교적 열정을 통제할 수 있는 정치적 권위를 창출해야 했던 것이다. 공동체 의식(종파)를 뛰어넘는 '사회 계약'의 도입이 고안되었던 근본적 까닭이라고도 하겠다.
 
그에 반해 동아시아는 전혀 달랐다. 때 이르게 인문 국가로 진입한 탓에 유럽을 지배했던 종교적 열정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도리어 동방의 지식 국가가 초래한 난제는 백성들의 광범위한 '정치적 무관심'이었다. 과거제의 도입으로 정치의 행정화와 경영화, 즉 경세(經世)가 지극히 발전한 탓에 야기된 역설적 병폐였다. 오늘날 현대 국가들이 경험하고 있는 탈정치화의 위기를 앞서 경험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처방전으로 제출된 것이 '향약'이었다. 향약은 봉건제 해체 이후의 새로운 공동체 의식을 배양하고 고양시키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공공에 봉사하면서도, 국가의 직접 통제는 받지 않는 협동조합의 원조 격이었다. 중국과 조선의 서당 및 서원, 베트남의 뜨 반(tu van, 斯文) 등이 향약의 거점이었다. 이곳을 마을의 허브로 삼아 덕업상권, 과실상규, 예속상교, 환난상휼로 작동하는 예치(禮治)를 침투시켰다. 지역의 정치를 (재)활성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일종의 '마을 인문학 운동'이라고도 하겠다. 시민 사회와는 일선을 긋는 민간 사회의 뿌리이다.
 
향약이 계약보다 우월하다는 말이 아니다. 홉스가 자연 상태(=종교 전쟁)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고 규정하고 공동체 의식(=종파 의식)을 초극하는 리바이어던을 궁리했던 고유의 맥락이 있던 것이다. 또 고도의 관료제 국가가 발달한 동아시아에서는 향약의 보급을 통해 공동체 의식을 주입해야 했던 그 나름의 이유가 있던 것이다.
 
서구는 도덕과 정치의 분리가 갈급했고, 동방은 행정 국가, 지식 국가에 도덕을 (재)투입하는 과업이 절실했다. 유라시아의 동과 서에서 동시대에 등장한 '계약'과 '향약'은 우열 관계도 선후 관계도 아니다. 종교 국가와 인문 국가의 차이이자, 천주 문명과 천하 문명의 구별일 뿐이다.
 
동방 민주
 
서구 민주는 봉건제와 천주 문명의 속성을 간직한다. 자명하고, 자연스럽다. 봉건제가 의회제로 이행했고, 천주 문명이 민주 문명의 세계관으로 계승되었다. 그럼에도 지난 100년 서구 민주가 그 국지성을 지우고 보편성을 자처하며 패도를 부릴 수 있었던 것은 물적 토대의 급변 때문이었다. 산업 혁명의 힘이다.
 
지하자원을 본격 활용하자 지상 자원에 의지했던 농경 문명, 유목 문명, 해양 문명은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만국이 만국에 투쟁하는 '발전 국가' 경쟁으로 내몰렸다. 발전과 성장이 '항산(恒産)'을 대체한 것이다. 항산이 동요하자 항심(恒心)도 흔들렸다. '새 마음'이 봉긋봉긋 솟아났다. 혹자는 '자유'를 더 강조했고, 일부는 '평등'을 더 높게 쳤다. 황홀한 매혹의 언어들이었다. 모던보이와 모던걸이 홀려났다. 그러나 독배였다. 너나없이, 위아래 없이 소인됨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대중사회가 열렸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서구 민주는 산업 혁명이 촉발한 '전국 시대'의 정치 논리에 그친다. 지하자원에 기생하는 성장과 발전이 지속하는 '예외 상태'의 정치일 뿐이다. 과연 난세는 역동적인 법이다. 변혁의 기세가 마구 치솟는다. 엔트로피도 극대화된다. 20세기는 가히 인류의 잔치판이었다.
 
허나 사람은 하늘과 땅 사이에 자리한다. 자유와 평등의 질주는 천지인(天地人)의 숙명을 망각했다. 그래서 하늘의 조화와 땅의 균형을 어지럽혔다. 국가의 부강도 지구의 건강을 해쳤다. 그 후과를 우리는 감히 짐작키 어렵다. 기후 변화 등 불길한 징후들을 두렵게 목도하고 있을 뿐이다.
 
'민주'라는 가치를 부정하지 않는다. 서구 민주(Democracy)가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민주화해야 한다. 동방에도 1000년을 내려온 민주(民主)가 있었다. 그 요체는 다수결도, 1인 1표제도 아니었다. 성인(聖人)이 될 자격을 만인에게 허락한 것이었다. 인성을 갈고 닦으면 천성이 발현될 수 있다는 복음의 전파였다.
 
출신과 신분에 관계없이 모두가 성인이 될 수 있다는 만민평등의 파격이었다. 그리하여 외적 성장이 아니라 내적 성숙을 향해 들끓었다. 그래서 '정치(politics)'보다는 '덕치(德治)'가 한층 심화되었다. 이제는 정치와 덕치도 견주어봄직 하다. 서구에 대한 열등감 없이도 양자의 대차대조표를 따져볼 수 있게 되었다. 덕치의 귀환을 알리는 조짐들이 완연하다. 다음 글에서 살펴보겠다.
Posted by 문천

 

한 마을에 귀머거리 영감님 세 분이 살았다. 세 분의 또 하나 공통점은 말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남의 말 못 듣는 분들이 자기 말 하기를 좋아하니 가족들도 괴롭고 본인들도 괴로울 수밖에. 그렇게 지내다가 어느 날 묘책이 떠올랐다. 세 분이 함께 사는 것이었다. 빈 집 하나를 구해 세 분이 함께 지내면서 각자 마음껏 이야기를 하며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지나가다가 들여다보면 세 분이 동시에 열변을 토하고 있는 모습도 종종 볼 수 있었다.

 

어느 해 설날 착한 젊은이 하나가 "노인들끼리 이 명절에 얼마나 쓸쓸하실까" 하는 마음이 들어 이 집에 세배를 왔다. 절을 받은 뒤 한 노인이 말했다. "우리 살림이 이 모양이라 모처럼 찾아온 자네에게 대접할 게 없구먼. 내가 재미있는 옛날얘기라도 하나 대접하지." 그렇게 시작한 이야기를 요약하면 이렇다.

 

"인천을 옛날에 제물포라 했지. 그 앞바다에 월미도란 섬이 있는데 시커먼 바위로 둘러쳐져 있어. 이 바위에 물가마귀가 많이 와서 앉아 쉬는데, 물속에 있는 오징어란 놈이 그 길다란 다리를 뻗어 물가마귀 다리를 잡아챈단 말이야. 그래서 가마귀 오, 도둑 적, '오적'이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오래 지내다 보니 '오징'이라고 바뀌게 된 걸세. 자네 오징어란 이름이 어떻게 생긴 건지 이제 알겠는가?"

 

워낙 착한 젊은이인지라 재미없는 이야기도 재미있는 것처럼 열심히 들어드렸다. 가끔씩 고개도 주억거리고 놀란 눈빛도 지어 드리니 노인은 신이야 넋이야 침을 튀기며 열변을 토하다가 이야기가 끝나고 젊은이가 고맙다고 고개 숙여 인사드리자 흐뭇한 표정으로 물러앉는다.

 

그러자 또 한 노인이 나섰다. "자네 내 이야기도 하나 대접함세." 그리고는 "인천을 옛날에 제물포라 했지." 하고 허두를 꺼내는 게 아닌가? 젊은이가 눈이 둥그레져 쳐다보자 노인은 더욱 신이 났다.

 

앞서 노인의 이야기가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그대로 재생되는데, 젊은이는 터지려는 웃음을 틀어막기 바쁘다. 당신께서 똑같은 얘기인 줄 모르고 저렇게 열심히 말씀을 해주시는데, 내가 티를 낸다면 너무 실례가 되지 않겠는가. 아무리 애를 써도 웃음 깨무는 기색이 드러나지 않을 수 없다. 그 기색을 노인은 재미있어 하는 줄 알고 더욱더 신이 나 이야기에 힘이 실린다.

 

겨우 웃음을 삼키며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낸 뒤 젊은이가 일어서려 하자 세 번째 노인이 나섰다. "앉은 김에 내 이야기도 하나 듣고 가구려." 그리고는 막무가내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인천을 옛날에 제물포라 했지."

 

인내에도 한계가 있다! 젊은이는 노인의 첫 마디가 떨어지자 마자 뒤집어져버렸다. 이야기가 계속되는 동안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웃음을 참지 못했고, 이야기가 끝날 때도 웃음을 걷잡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도 숨을 헐떡이고 있는 젊은이에게 이야기를 끝낸 노인이 회심의 미소를 띠고 물었다. "어때? 내 얘기가 그중 재밌지?"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