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을 전후한 세계정세 변화에 맞춰 한반도 냉전을 종식하려는 노력의 가장 큰 성과가 1991년 12월 13일 남북고위급회담에서 채택된 ‘남북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였다. 그 직전의 남북한 유엔 가입, 그 직후의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과 어울려 당시의 남북관계는 화해와 평화의 길로 성큼성큼 나아가고 있었다.

 

기본합의서의 내용은 지금까지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특별한 정치적 장애가 없을 때는 그 준수를 통해 남북관계 발전의 지표로 작동하는 그야말로 ‘기본’ 합의서의 가치를 가진 것이라는 사실을 그 동안의 경험이 보여준다.

 

1990년 9월 첫 고위급회담이 열릴 때부터 기본합의서 채택은 기정사실이나 마찬가지였다. 제1차 회담에서 남측은 8개항으로 된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기본합의서(안)’을 제시했는데, 결국 채택된 합의서는 북측이 요구한 ‘불가침’을 강조한 정도로, 애초의 제안에서 크게 바뀌지 않은 내용이었다.

 

빤한 결론을 확인하는 데 1년 넘는 시간이 걸린 것은 앞 회에서 얘기한 ‘지연전술’ 때문이었다. 북한에게는 고립을 탈피하기 위해 남북관계 개선이 극히 절실한 과제였다. 이 점을 이용해서 노태우 정권은 정상회담 추진을 고위급회담 진행에 연계시켰던 것이다.

 

1990년 10월 평양에서 열린 제2차 고위급회담에서 남측은 최초의 제안을 ‘남북 불가침과 화해-협력에 관한 선언’으로 수정 제시했다. 북측의 ‘불가침’ 주장을 받아들여 최종 합의서 내용에 도달한 셈이다. 그런데 그 후 회담 진행이 막힌 상황을 임동원은 이렇게 회고했다.

 

사실 우리측의 관계개선 기본합의서 내용과 북측의 수정안 내용은 많이 근접해 있었다. 명칭도 나중에 채택된 문서명칭인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와 근사한 것이었다. 북측은 분명히 합의를 원했고, 우리측에서 협상할 의사만 있었다면 얼마든지 타결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정상회담 개최를 원했던 우리는 ‘불가침’을 문제삼아 지연전술을 구사함으로써 협상 타결의 좋은 기회를 스스로 포기했다. 큰 실책을 범한 것이다. 결국 정상회담도 성사시키지 못한 채 기본합의서의 채택이 1년이나 지연되는 파행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됐다.

 

그 후 기본합의서를 채택했을 때는 이미 노 대통령의 집권말기였고, 대통령 선거전이 본격적으로 불붙기 시작하자 우리 정부가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일련의 의욕적인 사업을 펼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전향적인 대북정책을 추진했던 노태우 정부는 남북합의사항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시간을 영영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피스메이커> 202-203쪽)

 

왜 북측은 이때 정상회담 제안에 응하지 않았을까? 고위급회담에서 일단 성과를 거둔 후 더 차원 높은 목적을 위해 정상회담을 열어야 한다는 것이 북측 입장이었다고 임동원은 설명했다.(위 책 201쪽) 물론 타당한 이야기다. 그러나 남쪽 정권에서 고위급회담까지 지연시킬 정도로 애타게 바라는 일이라면 제공할 수 있는 온갖 인센티브를 제공하려 했을 것이다. 그리고 한 번 만나고 그만두는 게 아니라 계속 만날 거라면 차원 높은 목적을 기다릴 것 없이 우선 만나고 보자는 것도 충분히 타당한 이야기다.

 

남측에서 애타게 바라는 일이니 값을 최대한 올려야겠다는 속셈도 있었을 법하다. 그러나 내부 체제문제에 대한 고려 때문에 신중한 태도를 취할 필요가 더 크게 생각된다.

 

권리가 크면 책임도 크기 마련이다. 권력을 독점하는 유일지도체제는 인민의 절대적 신뢰를 필요로 한다. 선거에 의지하는 남한 정권은 선거 때만 지나고 나면 상황을 빙자해서 공약을 뒤집는 일을 스스럼없이 할 수 있지만, 유일지도체제 정권이 그런 짓을 한다면 상황을 제대로 예측하지 못한 잘못이 신뢰를 갉아먹을 것이다. ‘정상’이라 해서 다 같은 정상이 아니다. 북한의 최고지도자가 나서려면 인민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는 확고한 전망이 필요하다. 절대적 지도자와 상대적 지도자의 차이다.

 

1991년 2월로 예정되었던 제4차 회담은 팀스피릿 군사훈련 등의 이유로 북한이 불발시켰고, 8개월이 지난 10월에야 열리게 된다. 고위급회담을 통한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북한의 필요는 갈수록 더 절박해졌다. 소련과 중국의 정책 변경에 따른 대내외적 위기가 심화되고 있었다. 미국의 북한 핵개발 의혹 제기도 대외관계의 어려움을 더했다. 오랫동안 반대해 온 유엔 동시가입을 수용한 것이 이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부득이한 선택이었다.

 

1991년 10월 고위급회담 재개의 배경으로 임동원은 중국의 역할을 중시한다.

 

북한이 협상타결을 서둘게 된 데는 중국의 영향력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그해 11월 초 방한했던 중국의 한 탁월한 북한문제 전문가로부터 이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상부에 보고한 바 있다. 익명을 요구한 그의 정보에 따르면, 김일성 주석은 이해 10월 초에 10일간(10.4~13) 중국을 방문, 경제특구를 시찰하며 덩샤오핑을 비롯한 중국 최고지도자들로부터 세 가지 권고를 받았다는 것이다.

 

즉, 북한도 중국처럼 사회주의체제를 유지하면서 개방과 경제개혁을 추진함이 바람직하며, 외국의 자본과 기술을 도입하려면 한반도의 평화적 환경 조성이 필수적이니 조속히 남북협상을 타결짓고, 또한 미국 핵무기 철수의 호기를 활용하여 북한의 핵개발 의혹도 해소할 것을 권고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김일성 주석은 중국에서 돌아오는 즉시 노동당 정치국 회의를 소집하여(10.16) 북남협상의 조속한 타결과 비핵화 합의, 그리고 경제특구 설치에 관한 모종의 결단을 내렸다는 것이다.(<피스메이커> 205쪽)

 

북한이 유엔에 가입한 상황에서 임기가 1년 남짓 남은 노태우 정권이 정상회담을 위한 지연전술에 더 이상 매달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1년 전에도 빤했던 결론은 그 사이에 더 빤해졌고, 10월 하순의 제4차 평양회담에서 12월 중순의 제5차 서울회담에 이르기까지 이 결론을 확인하는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된 결과 ‘남북기본합의서’의 탄생에 이른다.

 

위 인용문에서 “미국 핵무기 철수”라 한 것은 당시 미국 부시 정부의 해외 핵무기 철수 정책의 일환으로 주한미군의 핵무기를 전량 철수하기로 한 결정을 말하는 것이다. 남한에는 1957년부터 미국 핵무기가 배치되어 1970년대 초에는 7백여 기에 이르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70년대 후반 카터 행정부 하에서 크게 감축되어 1989년 부시 행정부 출범 때는 약 1백 기가 배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무렵 북한 핵개발 의혹이 떠오른 배경은 소련의 해체였다. 소련이 보유하던 핵무기와 핵기술이 통제를 벗어나 무책임한 세력의 손에 들어갈 위험은 스릴러의 인기 소재가 될 정도로 사람들 마음속에 심각하게 떠오른 문제였다. 그런 무책임한 세력의 한 예로 북한이 등장한 것이다. 1989년까지 북핵 문제가 제기되지 않고 있던 상황을 미국 언론인 돈 오버도퍼는 <두 개의 한국>(이종길 옮김, 길산 펴냄) 382쪽에 이렇게 설명했다.

 

89년 1월 부시 행정부 출범 당시, 북한의 핵개발 추진 가능성을 우려하는 사람들은 위성 사진을 검토할 수 있는 권한을 보유한 소수 관리들뿐이었다. 심지어 에너지부 소속의 한 분석가는 영변에 세워지고 있는 건물들이 화학섬유 공장일 수도 있다는 의견을 제시할 정도였다. 북한 정부가 영변 시설을 너무 쉽게 노출시킨 것도 의문점이었다. 날씨가 맑은 날에는 평양 공항에서 이-착륙하는 비행기 안에서도 육안으로 영변 핵시설의 윤곽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미 정부 관계자들은 까다롭고 잘못 건드리면 오히려 심각한 사태를 야기할 수 있는 북한 핵문제를 본격적으로 규명할 의사가 없었던 탓에 이와 같은 몇 가지 의문점을 구실 삼아 어떠한 조치도 취하려 하지 않았다.

 

북한이 미국 핵무기가 남한에 배치되어 있는 상황을 이유로 IAEA(국제원자력기구)를 앞세운 미국의 핵사찰 압력을 거부한 것은 너무나 지당한 말씀이다. 미국은 핵무기의 남한 배치를 공식적으로 확인하지 않는 것이 기본방침이었지만, 그 사실을 과시할 때도 있었고, 실제 사용 가능성까지 공언하는 일도 있었다.(오버도퍼 위 책 385쪽)

 

월남 패망 후 미국은 안보에 대한 불안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있던 남한 정부를 달래준다는 명목 하에 경우에 따라 핵무기를 사용할 수도 있다며 공공연하게 북한을 위협했다. 1975년 6월 제임스 슐레진저 국무장관은 남한에 미제 핵탄두가 배치돼 있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시인하면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우리가 전술 핵무기를 반드시 사용해야 하는 상황이 전개된다면... 실제 그 사용 여부를 고려하게 될 것이다.” 이어 그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미국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시험하는 것은 결코 현명치 못한 행동이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976년 2월 핵무기 탑재가 가능한 미군 전폭기 부대가 잠시나마 남한에 배치됐고 이 사실은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게다가 그 해 6월 처음으로 실시된 팀스피리트 연례 합동 군사훈련의 일정도 대규모 병력 이동과 핵무기 사용 훈련으로 구성돼 있었다.

 

남한에 전술핵무기를 잔뜩 쌓아놓고 그것을 쓸 수도 있다고 이따금 위협까지 하는 터에 북한의 핵개발을 일방적으로 가로막을 수는 없다. 핵확산금지조약(NPT)의 기본원리도 보유국의 기득권에 대한 최소한의 보상으로 미보유국에 대해 핵무기 사용의 위협을 하지 않는 데 있다. 북핵문제 제기를 위해서는 이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런 참에 1991년 8월 소련에 쿠데타가 일어나고 소련 붕괴 조짐이 보이면서 소련 보유 핵무기의 관리 문제가 심각하게 되자 핵무기 감축과 통제 강화를 유도하기 위해 미국이 솔선해서 감축에 나서게 되었다. 이때 남한 배치 핵무기 철수 방침이 정해졌다.

 

미군 사령관들은 남한에 핵무기를 배치해야 하는 현실적 이유가 전무하다는 데에 의견을 같이 했다. (...) 다음 해[1991] 봄 합참 의장을 역임한 아시아 전문가 윌리엄 크로 제독은 대 북한 협상 조건의 일환으로 남한 내 핵탄두 철수를 거론했다.

 

크로 제독은 다른 이들이 쉬쉬하면서 감추었던 이야기들을 다음과 같이 공개적으로 지적했다. “미군의 기동성을 감안해 볼 때 대한민국의 핵우산 보장을 위해 반드시 남한에 핵탄두를 배치할 필요는 없다.”

 

주한 미국 대사와 군 지휘관들이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건의했음에도 불구하고 워싱턴 정부는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육군 중장으로 퇴역한 후 부시 대통령의 안보 담당 보좌관으로 부임한 브렌트 스카우크로프트는 평양이 응분의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는데 덥석 선물을 안겨줄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핵무기 철수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

 

[1991년 8월 소련 쿠데타사건 이후] 부시 대통령은 보좌관들과 협의한 후 남한에서 나머지 핵무기도 완전히 철수시키기로 비밀리에 결정했다. 또한 한 걸음 더 나아가 북한 측의 요구대로 핵탄두를 보관했던 군산의 미군 기지에 대한 북한의 사찰을 원칙적으로 허용하기로 결정했다. 남한에 배치된 핵무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수개월 간 지지부진한 협상을 이끌어야 했던 리처드 솔로몬 동아시아 및 태평양 담당 차관보는 “급변하는 소련의 국내 정세 덕분에 간신히 남한 내 핵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부시 대통령은 공식 결정을 내리기에 앞서 유엔총회에 참석차 미국을 방문했던 노 대통령을 만나 핵무기의 한반도 배치 여부를 떠나 남한에 핵우산을 제공하겠다는 미국의 의지는 변함없다고 재차 다짐했다.

 

12월 핵무기 철수가 완료되자 노 대통령은 “지금 이 순간, 대한민국 그 어디에도 핵무기는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공식 발표를 했다. 미국의 핵무기 철수는 이후 북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한반도에 타협과 화해의 시대를 앞당기는 데에 큰 기여를 했다. (오버도퍼 <두 개의 한국> 386-389쪽)

 

남한 배치 핵무기의 철수는 남북기본합의서가 나올 수 있었던 중요한 조건이었고, 철수가 실현된 결정적 계기는 소련 붕괴의 조짐이 드러난 1991년 8월의 쿠데타사건이었다. 남북기본합의서의 필요성을 남북이 함께 인정하고 그 내용에도 합의하고 있으면서도 사소한 이유로 늦어지고 있던 것이 소련 붕괴를 눈앞에 두고서야 매듭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이다. 1991년 12월 10일 판문점에서 쉐라톤호텔로 향하는 차 안에서 북한 대표단의 최우진이 “도장을 갖고 왔다”고 자신 있게 말한 것은(<피스메이커> 218쪽) 합의서 채택을 위한 모든 조건이 충족되어 있음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서문과 4장 25조로 구성된 기본합의서의 요점을 임동원은 이렇게 정리했다.

 

* 남북화해를 위해 상대방 체제의 인정-존중, 내정 불간섭, 비방-중상 중지, 파괴-전복 행위 금지, 국제무대에서의 협력, 그리고 현 정전상태를 남북 사이의 평화상태로 전환 및 그때까지 정전협정을 준수한다.

 

* 남북 불가침을 위해서 무력 불사용 및 불침략, 분쟁문제의 협상을 통한 평화적 해결, 불가침의 경계선은 정전협정 규정과 지금까지 쌍방이 관할해온 구역으로 하고, 불가침의 보장을 위해 여러 가지 군사적 신뢰조성조치와 군비감축을 실현한다.

 

* 남북 교류-협력을 위해서 경제-과학-기술-문화-예술-보건-체육-보도 등 여러 분야의 교류협력 실현, 자유왕래와 접촉, 이산가족 상봉 및 재결합, 끊어진 철도-도로 연결 및 해로 항로 개설, 우편-전기통신 교류 등을 실현한다. (<피스메이커> 228쪽)

 

 

Posted by 문천

 

공산권 붕괴에 따라 ‘전 방위 수교’ 시대가 열렸다. 서로 승인하지 않고 지내던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국가들이 서로 수교하는 새로운 환경에 남한은 바로 적응해 나갔다. 1990년 9월 소련 수교에 이어 1992년 8월 중국 수교에 이름으로써 남한은 몇몇 특수국가를 제외한 거의 모든 국가와 외교관계를 맺게 되었다.

 

북한도 1991년 가을 유엔 가입을 계기로 외교관계를 크게 넓힐 수 있었지만, 미국과 일본이 숙제로 남아있었다. 이 두 나라와의 관계가 북한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평화 보장을 위해서는 미국과의 관계가 필수적이었고, 일본과의 수교는 경제 회복과 발전을 위한 열쇠였다. 남한과 고위급회담 등 대화에 적극적으로 나선 중요한 하나의 목적이 미국, 일본과의 수교를 원활히 하는 데 있었다. 중-소의 남한 수교와 미-일의 북한 수교는 모든 관계국의 양해사항이었는데, 북한이 뒤쳐져 있기 때문에 다급한 입장이었다.

 

남북 간의 관계 개선은 경제력-군사력-외교력 등 모든 방면에서 열세에 있던 북한에게 더 절박한 과제였다. 그런데 한 가지 과제만은 남측에서 열심히 매달리고 북측에서 느긋하게 튕기는 것이 있었다. 정상회담이었다.

 

전두환 시절부터 남한 정권은 남북정상회담을 원했다. 국민의 통일에 대한 열망에 부응하고 안보에 대한 불안을 해소시킬 수 있는 정상회담은 정권에 대한 국민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최상의 열쇠였다. 북측에서는 ‘국민의 지지’가 그렇게 절실한 과제가 아니었고, 따라서 정상회담을 남측의 양보를 얻어내기 위한 카드로 쓸 수 있었다.

 

고위급회담의 출범 단계에서 정상회담이 논의되던 상황을 임동원은 이렇게 회고했다.

 

[제2차 회담 후] 지금까지 전향적 태도를 취하며 협상의 조속한 타결을 주도해 왔던 우리 정부의 협상사령탑에서 웬일인지 갑자기 ‘대북불신론’을 제기하며 지연전술을 지시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왜 갑자기 이런 지시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결국 남북대표접촉이 열리긴 했으나 아무런 성과도 이룩하지 못하게 되었다.

 

석 달 가량이 지난 뒤에야 알게 되었지만 [1990년] 10월 초 서동권 안기부장은 비밀리에 평양을 방문하고 11월 초에는 북측에서 노동당 대남사업담당비서 윤기복이 서울을 방문하여 각각 상대방 정상을 만나 남북정상회담 개최 문제를 협의했으나 실패했다는 것이다.

 

우리 정부는 처음부터 남북고위급회담에서 정상회담 개최를 제의했고, 뒤이은 비밀접촉을 통해 “고위급회담에서 채택될 남북합의문서에 양 정상이 만나 직접 서명하고 관계개선을 촉진시킬 방안을 협의하기 위해 정상회담을 개최하자”고 제의했다 한다.

 

그러나 북측은 “정상회담에서는 통일문제를 비롯한 고차원적인 민족문제를 협의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고위급회담에서 일정한 성과를 거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다. (...) 북측은 우리측이 정상회담 개최에 열을 올리면 올릴수록 더욱 고자세가 되어 ‘고려민주연방제 통일방안’ 수용만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북측이 정상회담 개최를 사실상 거부하자 남측의 협상사령탑은 지연전술로 협상의 조기타결을 바라는 북측을 압박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피스메이커> 200-201쪽)

 

남북대화에 임하는 북한의 입장을 이해하는 데 <북한의 협상전략>(척 다운스 지음, 송승종 옮김, 한울아카데미 펴냄)이란 책을 찾아보았다. 미 국방성 직원이라는 저자가 머리말에 “북한과의 협상은 난해하고도 불쾌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이 책의 독자라면 협상 과정이 생각보다 훨씬 더 불쾌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라 쓴 것을 보면 매우 치우친 서술이 아닐까 의심이 든다. 북한과의 대화가 실패하기를 바라면서 대화에 나서고, 대화 실패의 책임을 북한 측에 미루려 드는 국방성 관리의 입장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머리말의 이런 대목에는 그런 입장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는 것 같다.

 

국제사회는 협상 테이블에서 당근을 제공하여 북한의 행동을 바로잡아보려 노력하고 있지만, 전쟁이 발발하면 그들의 군사적 우위는 서방측 군대를 압도하게 될 것이다. 서방측 협상자들에 의한 부분적 양보 조치가 북한의 군사력을 강화시키는 결과만을 초래한 것이다.

 

우리는 ‘벼랑 끝 전술’이란 말에 익숙하다. 어떤 말에 익숙해지면 그 의미가 자연스러운 것으로 느껴진다. 그런데 그런 말을 어떤 사람들이 어떤 의도로 만든 것인지 유의할 필요가 있다. 북-미 대화에서 미국 대표로 나선 관리들 중에 척 다운스와 같은 태도가 일반적인 것은 아니더라도 하나의 강력한 유형일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 사람들이 북한을 ‘대화가 어려운 상대’로 규정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도 감안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북한이 ‘대화가 쉬운 상대’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일부 미국 관리들의 무책임한 유형화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는 것이다.

 

이 점을 감안하고 다운스의 책을 읽으면 참고할 내용이 없지 않다. 35쪽의 이런 내용은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협상의 역사를 보면 서방측 대표들은 비타협적 입장을 고수할 수 있는 재량권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만일 협상단이 사소한 문제를 둘러싸고 싸움을 벌였다면 워싱턴은 이들의 태도를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서방측 대표단은 민주사회에서 표출되는 광범위한 여론의 흐름에 부응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협상대표들의 상관인 정책결정자들은 명확한 입장 표명을 회피했고 때때로 평화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마지막 순간에 저자세를 보였다. 그러나 협상자들이 확고한 결의를 가지고 군사적 행동을 보일 때면 북한측은 어김없이 굴복하였다.

 

정치가 공개된 국가와 그렇지 않은 국가 사이의 협상이란 한쪽 패만 펼쳐놓고 노는 카드게임과 마찬가지다. 상대방 패를 읽고 치는 선수는 마음 놓고 블러핑을 할 수 있다. 다운스는 그것이 안타까운 것이다.

 

그러나 국제정치와 카드게임은 비슷한 점이 있어도 근본적으로 목적이 다른 것이다. 카드게임에서는 당장의 승부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반면 국제정치는 장기적 효과를 살펴야 하는 것이다. 당장 손해 보는 것 같아도 국민의 승인 아래 입장을 취해 나가면 어떤 상황이 펼쳐지더라도 당당하게 대응할 수 있다. 꼼수를 써서 목전의 이익을 얻더라도 상대방과 자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하면 입장이 약해지게 마련이다.

 

다운스의 지적에서 더 중요한 점은 “광범위한 여론의 흐름에 부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문제에 있다. 여론에는 두 측면이 있다. 국민의 원하는 바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존중받아야 하는 측면과 대중의 이해 부족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개선되어야 하는 측면이다. 국제정치의 중요한 협상은 전반적 상황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인데, 아직 닥치지 않은 상황에 대한 대중의 인식에는 미흡한 점이 있기 쉬우므로 두 번째 측면을 중시할 필요가 있다.

 

한완상의 <한반도는 아프다>(한울 펴냄) 179쪽 1993년 말 통일원 장관에서 물러날 무렵을 회고하는 대목에 이런 말이 있다.

 

이즈음 미국은 북한에 채찍을 쓰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북한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가려는 것은 아니었다. 미국은 채찍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항상 외교적 노력이 소진될 때까지 인내심을 발휘하면서 고심하는 듯했다. 한국의 냉전 강경세력은 이런 클린턴 정부의 고민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현실적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주한 미8군 사령관 게리 럭은 전쟁불사 같은 강경책이 비현실적임을 잘 아는 현명한 장군이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미국이 승리할 것이 확실하지만, 치러야 할 대가와 비용이 엄청나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한반도에서 전쟁을 벌이지 않는 것이 곧 승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군 장성 중에는 왜 그와 같이 지혜로운 장군이 없는지 안타까웠다. 전쟁을 안 하는 것이 승리라는 논리는 평화가 무력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지혜를 깨달았을 때에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진리다.

 

한완상의 회고 중에는 강고한 ‘냉전 강경세력’에 대한 안타까움이 거듭거듭 표출된다. 냉전 강경세력의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다수 국민의 북한에 대한 불신 내지 혐오감이다. 이 불신과 혐오감은 오랜 냉전기 동안 언론 자유가 없는 독재상황 속에서 주입된 것이다. 민주화시대가 되었다면 오도된 의식이 척결되어야 할 것인데, 이 의식을 더욱더 조장해서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세력이 있다. 개선되어야 할 여론이 현실을 지배하는 상황은 민주화의 미숙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문제가 있거니와, 사라진 지 오래된 냉전의 유령에 붙잡혀 시대의 변화에 발맞추지 못한다는 것도 대단히 심각한 문제다.

 

이런 상황에서 집권세력이 정상회담이라는 이벤트에 집착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다. 우리 국민의식의 표피를 ‘반공’이 덮고 있다면, 그 바닥에는 민족의식이 깔려있다. 그래서 평소에는 북한을 불신하고 혐오하는 다수 국민도 ‘통일’의 가능성이 떠오르기만 하면 열광하게 마련이다. 정치세력에게는 국민의 지지를 일거에 끌어올릴 수 있는 정략적 ‘대박’이기도 하거니와, 실제로 반공의 의식 표피를 깨뜨릴 수 있는 묘책이기도 하다.

 

남북정상회담의 정치적 효과를 노린 전두환은 1985년부터 박철언의 이른바 ‘88라인’을 가동했다. 정상적 대화와 별도의 정보기관을 통한 정상회담 추진이 노태우 집권기에도 계속된 사실을 위에 인용한 임동원의 회고에서 알아볼 수 있다. 우리 측 ‘협상사령탑’이란 대통령을 가리킨 말이다. 협상을 늦추라는 지시가 왜 나온 것인지 협상단 간사가 석 달 후에나 알 수 있었다니, 협상의 최대 목적이 정상회담에 있었단 말인가?

 

남한 집권세력에게 정상회담에는 두 개의 측면이 있었다. 하나는 민족문제 해결이라는 공적 측면이고, 또 하나는 집권세력의 지지 획득이라는 사적 측면이다. 전두환 이래 남한 집권세력의 정상회담 추진과정에서 어떤 때는 공적 측면이 컸고 어떤 때는 사적 측면이 컸다. 이 사적 측면은 북한 측의 이용 대상이었다. 이 측면을 이용해 북한 측은 유리한 ‘뒷거래’를 벌일 수 있었다.

 

2000년 정상회담을 놓고 뒷거래 문제가 제기된 것은 제기한 사람들이 뒷거래의 성격을 잘 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결국 특검까지 시행해 크게 잘못된 일이 없음이 밝혀졌는데, 아마 노태우의 북방정책을 놓고 특검을 벌였다면 훨씬 건지는 것이 많았을 것이다. ‘대북송금사건’에 대해 임동원은 이렇게 회고했다.(<피스메이커> 43-45쪽)

 

[2000년] 5월 6일, 박지원, 이기호와 함께 나는 현대의 대북경협사업 합의 내용을 김보현으로부터 보고받았다. (...) 그리고 현대는 사업독점권에 대한 대가로 4억 달러를 북측에 미리 지불하기로 이면합의하고, 합법적인 대북송금을 위해 즉각 통일부에 사업승인을 신청한 후 자금확보에 나서려는 것으로 보인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정부도 이에 적극적으로 협조해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

 

며칠 후 (...) 대통령은 현대와 북측의 처사에 대단히 불쾌하다는 태도로 반응했다. (...)

 

“현대가 정상회담 개최를 이용해서 북측과 미리 합의해놓고 정부를 물고 들어가려는 것 아닙니까! 이런 식으로 하면 우리가 정상회담을 둔 주고 사는 것으로 오해받을 수 있다는 것을 그 사람들은 왜 모른답니까! (...) 정상회담 후에 순리에 따라 국민과 세계의 축복을 받아가며 당당하게 추진할 수도 있는 일을 가지고 왜 북측에 끌려다니며 굳이 정상회담 전에 합의하려고 서두는 것입니까!”

 

(...) 그러나 현대가 이미 저질러놓은 일을 쉽사리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리 현대가 우리정부의 사전승인 없이 일방적으로 추진한 일이라 해도 북한과 이왕 합의한 이상 정부가 나서서 취소시킬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다. 3년 후 집권한 노무현 대통령이 특별검찰을 임명하여 주소하도록 했던 이른바 ‘대북송금사건’은 이렇게 잉태되었던 것이다.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자리에 이기호, 박지원과 임동원 자신이 있었다고 밝힌 것은 대통령 발언의 사실성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아무래도 다소간의 ‘마사지’는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상회담 추진과 나란히 진행되고 있던 현대의 사업 추진 내용을 정부 측에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보기는 힘들다는 말이다. 그래도 북측에 대한 인센티브 제공을 정부 부담으로 하지 않고 기업에게 맡겼다는 것은 정도를 지키고자 노력은 한 것으로 인정된다.

 

그에 비해 노태우 정권에서 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고위급회담에 ‘지연전술’을 쓴 것은 정도에서 크게 벗어난 태도였다. 냉전 해소의 격변 상황에 서둘러 대응하지 않고 대화를 지연시킨 결과가 무엇이었는가. 사적인 동기에 그처럼 얽매이지 않고 당당히 진행해 나갔다면 김영삼과의 권력투쟁 과정에서 ‘훈령 조작’ 같은 황당한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김영삼 역시 정상회담을 열심히 추진했다. 예정된 날짜를 앞둔 김일성의 죽음으로 정상회담이 불발된 후 김영삼 정권의 대북정책이 극단적으로 적대화하는 과정에서도 정상회담의 성립 여부가 크게 작용했다. 정상회담은 남북관계에서 하나의 중요한 변수였다.

 

 

Posted by 문천
2014. 3. 11. 15:51

 

중국의 진로를 놓고 그 '문명의 전통' 때문에 미국 같은 나라와는 힘을 행사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한다. 그 차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힘든데, 이런 식으로 말할 여지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노나라가 제나라에게 거듭된 패전 끝에 땅을 떼어주기로 맹약을 맺을 때, 노나라 장군 조말이 단상에 뛰어올라가 비수로 환공을 위협, 땅을 빼앗지 않기로 약속을 받고야 내려왔다. 환공은 화가 나서 이 약속을 어기고 싶었는데 지키는 편이 낫다고 관중이 권해서 그대로 지켰다는 이야기가 <사기 자객열전>에 적혀 있다. 나도 더러 글에 활용한 일이 있다.

 

이 이야기는 "힘보다 덕이 낫다"는 정도의 막연한 교훈으로 전해져 왔다. 그런데 시스템공학이나 게임이론을 적용하면 이런 이야기에서 꽤 구체적인 의미를 뽑아낼 수 있을 것 같다. 빼앗으려던 땅의 가치와 "그런 상황에서 맺은 약속까지 철저하게 지키는구나." 하는 신뢰의 가치를 직접 비교할 수 있으니까. 이런 신뢰의 주체가 이웃나라에게 "당신네 나라를 향후 10년간 침범하지 않겠소." 하든지 "함께 저 나라를 공격하면 어떤 이득을 주겠소." 할 때 상대가 쉽게 믿고 호응해 준다면 믿음을 받지 못하는 경우보다 큰 이득을 볼 것은 분명한 일 아닌가.

 

그러고 보니 사대-자소의 관계에 대해 그런 식의 설명을 시도한 일이 있다. "이 세상은 큰 자와 작은 자들이 어울려 이뤄진 곳인데, 그 안에서 각자의 분수에 맞게 행동함으로써 조화로운 질서를 지킨다는 이념이다. 힘에 눌려 억지로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니라 천하 질서에 능동적으로 공헌한다는 명분으로 약자는 자존심을 지킬 수 있고, 강자는 약자의 태도가 일시적 득실에 따라 바뀌지 않으리라고 신뢰할 수 있는 길이었다. (...) 천자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천하의 모든 세력을 끊임없이 힘으로 억누른다는 것은 오랫동안 계속하기 힘든 일이다. 제국 내에 있는 좁은 범위의 신민에게는 충의 이념을 적용하고, 제국 밖의 주변국이나 오랑캐에게는 작은 존재로서 주체성을 인정해주는 타합책이 현실적으로 유용했던 것이다." (<밖에서 본 한국사> 177-178쪽)

 

이런 이야기들을 수천 년간 새겨 온 사회의 진로 선택은 미국 같은 나라의 선택과 아무래도 같을 수 없을 것 같다. 교양 수준이 낮은 대중의 태도는 중국이고 미국이고 별 차이가 없겠지만, 지식층의 역할에는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중의 직접선거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아 '비민주적'이란 비판을 받는 중국의 현 체제가 문명의 힘을 살려내는 데는 더 적합한 체제라 할 수 있지 않을지.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