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3월 12일 북한의 NPT 탈퇴선언으로 비롯된 긴장은 탈퇴가 이뤄지기까지의 유예기간 만료 직전에 북한의 탈퇴 보류 선언으로 한 고비를 넘겼다. 갈루치 국무성 차관보를 단장으로 하는 미국 대표단은 북한의 상황이나 의중을 확실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북한이 원하는 양보를 해줌으로써 위기를 넘기고 다음 단계 대화의 장을 열 수 있었다.

 

미국의 ‘양보’는 엄밀한 의미에서 양보가 아니었다. “북한의 주권을 존중하겠다,” “선제적 무력행사를 하지 않겠다”는 내용을 공동성명에 넣은 것뿐이다. 이것은 유엔 회원국끼리 함께 지킬 유엔헌장에 다 들어 있는 내용이다. 회담 대표단은 회담 결과에 대한 강경파의 불평을 막기 위해 바로 이 점을 지적했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 미국이 북한을 상대로 유엔헌장을 지키겠다고 명언한 것은 지금까지 북한을 대하는 태도와 전혀 다른 것이었고, 북한에게는 매우 만족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에 NPT 탈퇴를 유보한 것이다.

 

내용은 차치하고 미국이 북한과 ‘공동’성명서를 발표했다는 것 자체가 북한에게 큰 소득이었다. 1992년 1월의 뉴욕회담에서는 거부당했던 일이다. 남한의 대결주의자들이 긴장하는 모습에서도 그 의미를 알아볼 수 있다.

 

한편, 워싱턴과 평양 사이의 성공은 서울의 우려와 맞부딪쳤다. 이런 우려는 한국을 북한의 침략으로부터 방어하겠다는 미국의 대한방위 의지에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솔직히 말해 이런 우려 밑바닥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 또 다른 우려가 감춰져 있었다. 핵문제 해결을 위해 필요한 북한과 미국의 신뢰구축은 미국의 대한반도정책에 한국이 차지하고 있던 서울의 입지를 약화시킬 것이라는 우려 말이다.

 

이러한 우려는 1993년 6월, 미국과 북한 두 정부가 협상하기 전에 북미공동성명 내용을 검토하고자 하는 서울의 태도로 나타났다. 그래서 한 한국의 외교관이 이른 아침에 성명문 내용을 보자고 내 호텔로 전화를 한 것이다. 나중에는 또 미국이 성명문 내용에 부적절한 단어, 즉 ‘공동’이란 단어를 삽입시켜 이 성명을 1972년 7월 4일 최초의 남북공동성명과 같은 수준의 것으로 만들었다고 우려를 표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한국 대사관과 유엔 대표부에서 표시한 수많은 우려를 보면 한국은 미국이 먼저 급한 불을 꺼놓고 실제로 평양과 대화할 때는 미국이 한국의 에이전트처럼 행동해 주기를 바랐다. 그런 기대는 비현실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영삼 정부의 이런 우려는 그 후 더 심해졌다. 특히 미국과 북한이 핵문제에 관해 서로 수용할 수 있는 해결에 근접하자 더욱 그랬다.

 

반면 여타 국가들, 특히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와 일본은 최초의 북미협상 결과에 대해 안심하고 만족했다. 국제원자력기구는 미국 대표단장의 ‘전면적인’ 핵사찰 입장을 견지한 데 대해 치하했다. 또 모든 나라의 대표들도 다음 회담은 언제 열릴 예정이냐고 물어왔다. (퀴노네스, <한반도 운명> 179-180쪽)

 

한국 측의 감춰진 우려를 알아보는 것이 퀴노네스의 ‘한국통’ 자격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의 하나다. 한국의 대결주의자들에게는 미국의 대외정책에서 우선순위를 확보하는 것이 국내의 정치권력 유지를 위해서도 중요한 일이었다. 1980년 광주사태에서 미국의 역할에 대한 의혹과 불만감이 1987년 이후 반미감정의 형태로 한국 내에 자라나고 있었다. 미국의 확고한 지지가 없으면 야당을 지지하는 반미감정이 더 힘을 얻을 위험이 있었다.

 

대표단장 갈루치 역시 6월 11일의 합의에 대한 국제사회의 반응이 좋았다고 회고한다. 미국 내 반응은 갈라져 나타났지만, 미국이 아무런 양보도 하지 않은 것이므로 반대 의견에는 근거가 없는 것이라고 일축한다. 그리고 한국의 색다른 반응에 주의를 기울인다.

 

미국의 의견은 엇갈렸다. <뉴욕타임스>는 공동성명서 채택을 환영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유력지인 <워싱턴포스트>는 달랐다. 칼럼니스트 랠리 웨이머스는 북한이 5월에 실험한 탄도미사일에 핵탄두를 탑재했을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그녀는 미 행정부가 “북한의 NPT 완전이행을 위한 일정을 정하고 IAEA사찰 허용을 요구하며 유엔의 제재조치를 전행해야 한도”고 촉구했다. 그와 같은 비판에 대해 갈루치는 성명서에 담긴 약속은 미국의 양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리스를 방문 중이던 워렌 크리스토퍼 국무장관도 같은 취지의 말을 했다.

 

국제적 반응도 조심스러웠다. 중국은 회담에서 이루어진 “초기 단계의 진전”을 높이 평가했다. 일본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미야자와 일본 총리는 총리로서 잡힌 많은 공식 일정을 취소하고 집이나 집무실에서 뉴욕협상의 결과를 기다리는 것이 좋을지를 물을 정도였다. (...)

 

모든 당사국 중에서 한국이 가장 기뻐해야 했을 것이다. 6-11 공동성명서는 북미협상을 적극 촉구한 한국의 입장이 옳았음을 입증했다. 한승주 외무장관의 반응도 미국과 일본정부의 성명과 같은 맥락이었다. (...) 그러나 서울은 달랐다. 서울에서는 북핵위기를 거치는 동안 오랜 동맹국인 한국과 미국 양국관계를 곤경에 빠뜨린 여러 번의 시험 중 그 첫 번째 무대가 막을 올리고 있었다. (위트-폰먼-갈루치, <북핵위기의 전말> 75-76쪽)

 

이 무렵 김영삼 대통령의 남북관계에 대한 태도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 6월 4일의 ‘취임 100일 기자회견’이다. 이 회견에서 “핵 가진 자와는 악수할 수 없다”는 말이 나왔다. “핵 가진 자”가 미국을 가리킨 말이 아닌 바에는 100일 전과 영판 다른 태도다. 김영삼 정부에서 남북관계를 맡고 있던 한완상은 이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였나?

 

1993년 6월에 접어들자 김 대통령의 취임 100일 기자회견 내용에 비상한 관심이 모아졌다. 2월 25일 취임식 때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나을 수 없습니다”라는 평화 선언은 북한 당국에도 신선한 충격을 안긴 바 있다. 실제로 김일성 주석은 이 구절을 여러 번 읽었다고 한다. 그런데 6월 4일 ‘100일 회견’ 때 김 대통령이 “핵 가진 자와는 악수도 하지 않겠다”는 강경 방침을 천명할 것이라는 얘기가 들려왔다. 대학 후배이기도 한 청와대 이경재 대변인에게 사실을 확인한 나는 그런 발언이 나온다면 남북 관계를 불필요하게 악화시킬 것이라고 경고했다. 대통령이 직접 극단적인 발언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나의 평소 소신이었기 때문에 더욱더 이 대변인에게 신신당부했다. (...)

 

나는 이 대변인에게 여러 번 전화로 확인했다. 그러나 이 대변인은 잘 안 된다고 대답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그 표현만큼은 바꾸도록 힘써 달라고 부탁했다. (한완상, <한반도는 아프다> 103-104쪽)

 

2월 25일 취임사는 한완상이 중심이 되어 작성한 것이었다. 남북관계만이 아니라 국정 전반에 걸친 개혁에서 한완상이 중요한 역할을 맡으리라는 전망이 그래서 떠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100일 후의 회견문 내용은 한완상에게 “들려왔다”고 한다. 통일부총리보다도 ‘개혁 전도사’ 한완상에 대한 신임을 김영삼이 그 사이에 거둔 것으로 볼 수 있다.

 

취임 당시 김영삼의 한완상에 대한 신뢰는 절대적인 것으로 보였다. 자랑스럽게 내건 ‘문민정부’의 이름도 한완상의 아이디어로 알려졌다. 취임 초 하늘을 찌를 듯하던 김영삼의 지지도는 한완상 같은 재야 인물들을 포섭한 데서 온 ‘개혁’에 대한 기대감 덕분이었다.

 

한완상 등 재야 출신 개혁파 인사들은 김영삼이 국민의 지지를 모으기 위해 자기네를 필요로 하는 만큼 자기네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게 해줄 것으로 기대했을 것이다. 서로 이득을 보는 윈-윈의 관계를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거래관계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뒤에는 해소되어 각자의 길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런데 100일도 안 되어 아직 목적 달성이 안 된 시점에서 벌써 파탄을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 어찌된 일일까?

 

한완상의 회고 중에는 1993년 5월 말께 김영삼에게 서둘러 찾아가 보고를 올린 일 하나가 적혀 있다. 북한을 방문해 4월 10일 김일성을 만난 재미 조동진 목사가 찾아와 해준 이야기를 보고한 것인데, 조 목사의 이야기 중에는 한완상의 유화정책을 뒷받침해줄 만한 김일성의 태도가 그려져 있었다.

 

나는 곧바로 청와대로 들어가 조 목사와 김 주석이 함께 찍은 사진과 오찬 식단을 보여주고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보고했다. 김 주석이 대통령의 취임사에 감동을 받았다는 얘기를 비롯해 그가 했다는 말을 전했다. 가만히 듣기만 하던 김 대통령의 첫 반응은 이랬다. “믿을 수 있는가?” 그는 진지하게 듣는 것 같지 않았다. 나는 김 주석이 말한 10대 강령이 김 대통령의 취임사에 대한 정중하고 사려 깊은 반응이라는 점을 재차 강조했다.

 

리인모 씨 북송 발표 다음날 핵확산금지조약 탈퇴 선언을 하는 상황을 막지 못하는 등 김 주석에게 아쉬움이 컸던 때였지만, 우리는 그때 조 목사에게 토로한 김 주석의 메시지를 좀 더 전략적으로, 또 좀 더 신중하게 분석했어야 했다. (<한반도는 아프다> 72쪽)

 

‘100일 회견’의 강경한 내용을 한완상이 저지하기 위해 애쓰던 때의 일이다. 김일성을 최근 만난 사람에게 고무적인 이야기를 듣고 “곧바로” 청와대에 들어간 것이다. 김일성이 김영삼에게 호감을 갖고 있으니 유화정책을 쓰면 성과를 거둘 것이라고 설득하기 위해.

 

김영삼이 “믿을 수 있는가?” 물은 대상은 직접적으로는 조동진 목사이지만, 간접적으로는 한완상 본인을 가리킨 말로 볼 수 있다. 조동진이 전하는 이야기를 충분히 검증하고 와서 자신을 설득하려 하는 것인지 “믿을 수 있는가?” 물은 것이다.

 

한완상의 기록에서 그 직전 상황을 본다면 5월 14일의 국가조찬기도회가 있다. 1200명이 하얏트호텔에서 가진 이 모임에서 한완상은 개회 기도를 맡았고, 김영삼의 연설에 대해서는 “남북 관계에 대한 언급은 없었으나 개혁 의지는 뚜렷했고 힘이 있었다.”고 적었다.(위 책 97-98쪽) 그 시점까지는 김영삼의 심경 변화를 알아챈 것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면 그 후에는 어떤 일이 있었는가? 5월 20일에 남한이 “남북 총리회담을 뼈대로 한 대북 제안”을 했는데 북한이 5월 25일 전통문을 보내 부총리급 특사 교환을 역으로 제안해 왔다. 그 전통문의 취지를 한완상은 이렇게 해석했다.

 

이즈음에서 특사교환 제의에 나타난 몇 가지 흥미로운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핵 문제를 위시한 큰 문제들을 포괄적으로 풀어가자는 북한 당국의 의지가 엿보였다. 정상회담을 포함해서 민족 당사자 간의 회담에서 모든 주요 당면문제를 포괄적 획기적으로 풀어가자고 했다. 이는 김 대통령의 취임사에 대한 대응이기도 했다. 또 미국에 요구해온 포괄적 대화를 남쪽과도 할 용의가 있다는 것은 의미 있는 변화였다. 여기서 포괄적이라 함은 일괄 타결의 가능성을 시사한 것이다. 이때 미국도 이미 포괄적 타결을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 그만큼 북의 제안은 현실합리적인 제안이었다. 둘째로 이미 전임 노태우 정부에서 남북이 합의한 것을 새롭게 실천해나가자는 의지가 엿보였다. 남북이 직접 대화를 하자는 뜻이니 긍정적인 메시지였다. 셋째로 총리 대신 부총리급이 만나자는 것은 각기 최고위급의 뜻을 제대로 전달할 실세 간의 회담이 중요하다는 의미로 읽혔다. 이것은 그간 총리회담이 최고위의 뜻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음을 지적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북한 당국은 핵확산금지조약 탈퇴 선언으로 남쪽 부총리의 입지를 크게 좁혀놓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듯했다. (<한반도는 아프다> 100쪽)

 

내용 중에 납득이 잘 안 가는 점들이 있다. 첫째로 꼽은 “포괄적으로 풀어가자는 북한 당국의 의지”를 놓고 북한의 태도를 매우 높이 평가했는데, 그런 평가를 위한 충분한 근거가 있었던 것인가?

 

이 시점에서 북한은 6월 12일의 NPT 탈퇴 유예기간 만료를 앞두고 미국 정부와 접촉, 6월 2일부터 북-미 회담 일정을 잡아놓고 있었다. 미국 측에서는 북한이 접근해 올 때 남한과의 대화부터 복원하라는 요구를 전제조건처럼 내놓고 있었다. 5월 25일의 특사 교환 제안에는 북-미 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한 목적도 있었던 것이다. 그런 취지의 제안에서 남한을 비난하지 않고 대화를 바란다는 뜻을 밝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처럼 당연한 내용을 넘어 북한의 태도를 적극적으로 평가할 만한 구체적 내용이 이 전통문에 담겨 있었던가?

 

한완상은 북한의 이 제안을 “현실합리적”인 것으로 판단한 근거로 북한이 일괄 타결의 가능성을 시사하는 “포괄적 대화”를 미국만이 아니라 남한과도 나눌 용의를 보였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에 덧붙여 그때 미국도 포괄적 타결을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고 적었다. 한완상의 이 대목 회고 중에서 가장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다.

 

‘포괄적 타결’이란 말이 북-미 대화와 관련해 많이 쓰이게 되는데, 1993년 6월의 뉴욕회담 때까지는 아직 나오지 않고 있었다. 6월 11일의 뉴욕회담 타결에 대해 미국 수석대표 갈루치도 실무자 퀴노네스도 실질적으로 아무런 양보도 하지 않은 것으로 회고했고, 7월부터 시작된 제네바회담의 성과에 대해서도 별다른 전망을 갖지 않고 있었다. ‘포괄적 타결’이란 말의 출발점이 된 ‘경수로 제공’ 제안은 7월 16일 제네바회담의 두 번째 모임이 북한대표부에서 열렸을 때 나왔다.

 

갈루치는 이 제안이 점심식사 자리에서 나왔다고 회고했지만(<북핵위기의 전말> 87쪽), 오전 회담 중 나왔다고 하는 퀴노네스의 회고가 세밀한 정황 설명을 곁들인 점으로 보아 더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

 

그때 갑자기 강석주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는 발언을 했다. 핵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평양이 ‘관대한’ 제스처를 취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한 것이다. 그는 미국이 팀스피릿을 종식하고 북한과의 관계를 정상화한 후 북한에 두 개의 경수로를 제공하기만 하면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와 협조하고 핵안전협정 약속을 지키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특별사찰만은 여하한 상황에서도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평양은 그런 모욕적인 주권 침해는 절대로 동의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선언했다. 평양의 관대한 제스처 발언을 듣는 순간 우리는 어리벙벙해졌다.

 

‘강석주가 제정신일까. 도대체 어떻게 이런 것을 생각할 수 있었을까. 핵확산금지조약 준수는 거부하면서 미국에게 수십억 달러의 경수로를, 그것도 하나도 아니고 두 개씩이나 요구할 수 있단 말인가.’

 

처음에 우리는 그저 웃으면서 농담을 했다.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아이디어였기 때문이다. 동시에 우리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아이디어를 워싱턴 상관들에게 보고한단 말인가. 그들은 너무 우스워서 말도 안 나온다고, 당장 꺼지라고 할 게 틀림없었다. (퀴노네스, <한반도 운명> 195-196쪽)

 

‘경수로 제공’에 관해서는 나중에 다시 살펴보겠지만, ‘포괄적 타결’의 열쇠가 될 이 제안이 당시 미국 측에게 어떻게 보였는지 유념해 둔다. 결국은 북한과의 타협을 위한 기본 요소가 될 이 제안의 타당성을 미국 측에서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7월 16일까지 미국 측은 ‘포괄적 타결’의 가능성을 전혀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그 가능성을 북한 측이 열어준 것이 7월 16일의 일이었다. 그런데 한완상이 5월 25일의 북한 전통문 이야기를 하면서 ‘포괄적’이란 말을 거듭 쓰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회고문을 쓰는 시점에서 혼동을 일으킨 것일까? ‘포괄적 타결’의 의지는 북한의 태도를 해석하고 평가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기준이기 때문에 이에 관한 혼동이 있다면 증언의 신뢰성에 큰 문제가 된다.

 

북한의 특사 교환 제안에서 ‘부총리급’을 규정한 것은 남한 특사로 한완상을 지명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한완상의 유화노선에 대한 호감을 표시한 것일 수도 있는데, 한완상 본인은 이것이 일종의 ‘죽음의 키스’였다고 말한다. 남한의 대결주의자들(“보수 세력”)을 더욱 격분시키고 단결시키는 전략적 착오라는 뜻이다. (<한반도는 아프다> 100-101쪽)

 

한완상은 1993년 연말까지 10개월간 통일부총리 자리를 지키지만, 정부 출범 100일이 되는 6월 초까지는 이미 김영삼의 신임을 잃어버린 것으로 보인다. 6월에서 7월에 걸쳐 퀴노네스가 관찰한 남한 정부의 입장은 한완상의 뜻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남북대화 재개를 북미회담의 재개에 연결시키려는 [미국 측의] 고리는 남북대화와 북미회담 모두에 심각한 장애물이 됐다. 평양은 국제원자력기구와의 대화 재개는 고려해 보겠지만 서울과의 대화 재개 책임은 북한에만 있는 게 아니라고 주장했다. 강석주는 서울이 문제라고 되풀이해서 우겼다. 그러다 보니 미국 대표단은 우방인 서울 편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와중에 핵문제는 남북의 경쟁과 적대감 대문에 옆길로 밀려나고 말았다.

 

서울은 이 상황을 즐기는 것 같았다. 한편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에서 탈퇴하지 않았고, 미국은 국제사회의 지원을 받아 핵안전협정의 전면적 이행을 평양에 밀어붙였다. 게다가 워싱턴은 평양에 대해 서울과의 대화 재개도 촉구했다. 다른 한편, 문제를 남북대화와 연결시키자 워싱턴과 평양의 관계가 복잡해졌다. 국제적 문제인 핵확산금지조약 문제가 지역적인 문제인 남북대화 이슈와 뒤섞이자 자연히 핵문제 협상에 외교적 정체현상이 발생했다.

 

1993년 7월, 이런 상황의 잠재적 위험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서울은 그것이 평양을 외교적으로 목졸라 결국은 평양으로 하여금 양보하게 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한반도 운명> 192쪽)

 

북한과의 대결상태가 해소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남한에 1993년 이전에도 있었고, 지금까지도 있다. 김영삼 정부 출범 때는 그런 사람들이 정책 결정에 지나치게 큰 영향을 끼치지 않게 될 희망이 있었고, 그 희망을 대표하는 인물이 한완상이었다. 그런데 석 달이 지난 후에는 그 희망이 사라진 것으로 퀴노네스의 눈에 비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Posted by 문천

 

미국 국회의사당의 ‘조각상의 홀(Statuary Hall)’은 1857년까지 하원 본회의장이었다. 새 회의장을 지어 옮긴 뒤 이 홀에 ‘기억할 만한 미국인’의 조각상을 모시기로 하고 각 주에 두 명씩 추천을 의뢰했다. 받침대에 이렇게 새겨져 있는 한 여성의 동상이 그 중에 있다. “나는 전쟁에 표를 던질 수 없다.(I Cannot Vote For War.)”

 

동상의 주인공은 자네트 랭킨(1880-1973). 1916년에 미국 연방의회의 첫 여성 의원으로 몬태너에서 당선되었다. 미국에서 보통선거권이 여성까지 확대된 것은 4년 후의 일이었다. 여성참정권 도입 투표에 임하면서 랭킨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다른 일을 해내는 것이 없더라도, 여성에게 투표권을 주기 위해 투표한 유일한 여성으로 기억되기 바란다.”

 

랭킨은 하원의원으로서 별로 할 수 없는 일이 없었다. 취임 직후의 세계대전 참전 표결에서 반대표를 던진 것이 치명적 악재였다. 당시 반대표를 던진 의원이 49명이었는데, 모두 비애국자로 몰려 정치적으로 매장되었다. 하물며 유일한 여성의원 랭킨은 의원활동조차 제대로 펼치지 못할 정도로 철저한 배척을 당했다.

 

여권운동가들 중에는 랭킨이 하원의원 노릇을 제대로 못하게 된 결과를 놓고 그의 참전 반대가 여권운동에 찬물을 끼얹었다고 비판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랭킨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항변했다. “전쟁에 ‘싫어요.’ 말할 기회를 가진 첫 여성으로서 그 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의무감을 느꼈다.”

 

1940년에 랭킨은 다시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유럽에서 세계대전이 또 벌어진 상황에서 미국인들이 참전 여부를 놓고 첨예한 논쟁을 벌이고 있을 때, 랭킨은 참전 반대를 공약으로 당선된 것이었다. 그런데 1년 후 진주만 폭격 뒤의 참전 표결에서 반대표를 던진 의원은 랭킨 하나뿐이었다. 만장일치를 위해 뜻을 바꿔달라고 가까운 동료들이 부탁할 때 랭킨은 이렇게 대답했다. “여성인 나는 전쟁터에 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그리로 보내고 싶지 않습니다.”

 

정치인으로서 랭킨은 다시 매장되고 말았으나 20여 년 후 반전운동의 아이콘이 되었다. 87세의 나이로 다시 의사당 앞에 선 것이 1968년 1월 15일의 일. ‘랭킨 부대’(Jeannette Rankin Brigade)를 자칭하는 5천 명의 시위대를 이끌고 하원 의장 존 매코맥에게 ‘평화 청원’을 제출하기 위해서였다.

 

 

몇 해 전부터 어린이참정권에 관한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언젠가 민주주의 발전이 그리로 나아가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뿐, 당장 우리 사회의 급한 일로 여기지는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세월호 사태를 바라보며, 바로 그런 방향의 발전이 이 사회에 절실하게 필요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보름 전 한 꼭지 글을 올렸다.

 

글을 올린 후 독자들 반응을 보니 너무나 엉뚱한 생각으로 많이 보이는 것 같다. 찬성해 주는 분들 중에도 처음에는 황당하게 들렸는데 곰곰 생각하니 일리 있는 얘기로 생각되더라는 분들이 있었다.

 

아무 데서도 시행되지 않고 있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백여 년 전 사람들 눈에 여성참정권은 어떻게 보였을까? 지금 우리 눈에 어린이참정권이 엉뚱하게 보이는 것처럼 엉뚱하게 보이지 않았을까? 여성참정권 도입 과정을 되짚어보며, 어린이참정권도 엉뚱한 것으로만 볼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정리해 본다.

 

여성참정권이 널리 확립된 것은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겪으면서였다. 1913년 노르웨이에서 주권국가 최초로 채택될 때까지 여성참정권은 식민지나 지방정부에서만 실현되고 있었다. 덴마크와 아이슬란드(1915), 네덜란드와 소련(1917),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와 스웨덴(1918), 독일과 룩셈부르크(1919), 그리고 미국(1920)이 그 뒤를 따랐다. 민주주의의 본산인 영국과 프랑스에는 1928년과 1944년에야 도입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는 여성참정권이 세계적으로 민주주의제도의 표준이 되었고, 1952년에는 유엔총회에서 ‘여성참정권 협약’이 채택되기에 이른다.

 

‘만인평등’은 계몽주의시대 이래 근대민주주의 사상의 핵심 이념이었다. “세상의 절반”인 여성에 대한 근본적 차별이 프랑스대혁명 이후 1백 년 넘게 온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다는 것이 지금 사람의 눈에는 신기한 일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근대인의 머릿속은 계몽주의 사상이 지배하고 있었어도 현실이 그에 따라 돌아가는 것은 아니었다. 여성참정권만이 아니라 남성의 참정권도 현실적 필요에 따라 확장되어 온 것이었다. 1848년 이전에는 신분과 재산에 따라 참정권이 제한되는 것이 상식이었다. 아메리카 식민지인들이 독립혁명에 나서면서 “대표 없이 세금 없다!” 외친 것도, 세금을 내니까 참정권을 가져야겠다는 주장이었다.

 

1848년 2월혁명 후 프랑스에서 신분과 재산에 관계없이 모든 성인 남성에게 투표권을 주는 ‘보통선거’ 원리가 세워졌다. 나폴레옹 몰락 후 왕정이 복구된 이래 참정권 범위를 줄이려는 왕 측의 노력과 이에 반대하는 시민 측의 저항이 이어져 온 결과 왕정이 무너지자 참정권을 대폭 늘린 것이었다. 혁명에 대한 왕당파와 보수파의 저항을 이겨내고 혁명의 추동력을 얻기 위해 평민층을 정치에 끌어들인 것이다. 무엇보다, 대혁명 이래 평민층에서 징집한 군대의 지지를 얻기 위해 참정권 확장이 필요했다.

 

남성에게 의지하지 않고 독립생활을 하는 여성의 수가 극히 적던 당시 상황에서는 보통선거의 원리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성의 의사는 남편의 투표권을 통해 표출될 만큼 표출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산업화와 도시화의 진행에 따라 여성의 권익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자라나고 이에 따라 ‘여성참정권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까지 여성참정권 운동에 대한 가장 큰 반대 이유는 전통적 가정질서에 대한 위협에 있었다. 아내가 남편과 별도의 투표권을 가진다는 사실 자체가 종래의 바람직한 부부관계에 손상을 가져오는 것으로 흔히 인식되었다. 여권 운동가들은 공산주의자와 함께 파괴적 존재로 미움을 받았을 뿐 아니라 못 생기고 성질 나쁜 부적응자로 경멸까지 받는 일이 많았다.

 

 

1890년대에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 등 식민지에서 여성참정권이 먼저 채택되기 시작한 것도 기존 사회질서의 저항이 비교적 약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미국에서도 여성참정권이 지방정부 차원에서나마 처음 채택된 곳이 와이오밍(1869), 유타(1870) 등 준주(territory, 아직 주로 승격하지 못한 새 영토의 행정단위)에서였다. 유럽에서 여성참정권을 처음 도입한 곳도 가장 변방의 핀란드(1907)였다. 당시 핀란드는 주권국가가 아니라 러시아제국 예하의 대공국이었다.

 

식민지나 개척지 사회는 본국 사회와 다른 조건 위에 놓여 있었다. 본국의 제도와 관습을 가져왔지만, 현지 사정에 맞지 않는 점들이 있었다. 여성의 활동도 본국에서처럼 가정 내에 국한되지 않고 생산이나 사회활동에 나서는 일이 많았다. 읍장이나 보안관을 뽑는 데 여성의 의견까지 수렴하는 것이 본국에서와 달리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식민지와 개척지의 독특한 인구구조가 여성참정권 도입을 뒷받침해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식민지와 개척지에는 유동인구가 많고, 그중에는 가정을 이루지 않은 남성이 많았다. 투표를 통해서든 술집 토론을 통해서든 이런 사람들은 안정을 취하기보다 투기 기회를 늘리는 쪽으로 사회가 운영되기 바라는 경향을 보였을 것이다. 여성참정권 도입은 이런 경향을 억제하고 정치적 선택이 안정 쪽으로 기울어지는 조건을 만들어주었을 것이다.

 

자네트 랭킨의 사례에서 보는 것처럼 여권운동은 평화운동과 깊은 관계를 갖고 있었다. 19세기를 지나는 동안 전쟁의 규모가 갈수록 커지고 민간인의 피해를 억제하기 힘들게 되는 데 따라 평화운동과 박애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교육받은 여성의 활동영역이 좁은 상황에서 이런 운동이 노동운동과 함께 여성의 대표적 활동무대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여성참정권 보급의 결정적 계기가 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장기간 전면전을 수행하면서 전쟁 노력에 여성의 적극적 참여가 필요하게 된 점은 많이 지적되어 왔다. 또 한편으로, 전쟁의 피해를 국민이 감수하도록 하기 위해 평화운동의 발판이던 여권운동을 수용함으로써 전쟁을 억제하려는 정부의 의지를 보일 필요가 있었다.

 

근대민주주의의 발전과 확산에는 사회경제적 조건의 변화에 따른 측면이 있다. 의회제도 발전의 초기에는 지주귀족과 신흥부르주아지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것이 초기 산업사회의 큰 과제였기 때문에 신분과 재산으로 투표권이 제한되었다. 19세기에는 국민국가 발전에 따라 평민층까지 투표권이 확대되었다. 그리고 20세기로 넘어오면서는 여성의 역할 확대와 함께 끝없는 전쟁을 몰고 오는 제국주의 풍조 억제를 위해 여성의 정치 참여가 필요하게 되었다. 20세기를 지나는 동안 여성의 정치적 역할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으로 확대되었다.

 

여성참정권 확립에 이르는 참정권 확장은 한편으로 ‘만인평등’의 이념에 접근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경제적 조건의 변화에 부응하는 점진적인 움직임이었다. 이제 21세기에 들어와 ‘노령화’가 중요한 사회경제적 문제로 떠오르고 있고, 정치에 있어서도 공동체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하고 있다. 지금까지 ‘만인평등’의 테두리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던 ‘어린이’의 정치적 역할을 부여하는 것이 노령화에 대한 효과적 대응책이 아닐까. 여성참정권이 20세기 중 문명의 위기를 누그러트리는 효과를 가져온 것처럼.

 

 

어린이참정권을 도저히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이들이 가장 중시하는 문제가 ‘권리의 근거’다. 국가라는 정치공동체의 성립과 운영에 공헌하지 않는 사람은 국민으로서 참정권을 누릴 근거가 없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다. 어른들은 경제활동을 통해 국가에 공헌함으로써 권리의 근거를 확보하지만 아직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미성년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바로 이 논리가 19세기까지 평민층에게 참정권을 부여하지 않던 근거였다. 프랑스에서는 1848년 이후 신분과 재산의 제한이 철폐되었지만 다른 대부분 국가에서는 세기 말까지 제한이 계속되었다.

 

보통선거의 이념은 모든 인간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국가에 대한 공헌 여부를 따지지 않는다. 이것은 ‘국가’의 새로운 개념을 반영한 것이다. 종래의 국가 개념은 구성원들이 힘을 합쳐 자발적으로 만드는 공동체였다. 힘을 내놓는 사람들이 구성원의 자격을 가지고, 직접 힘을 내놓지 못하는 주변부 사람들(여성, 어린이, 노예 등)은 주체적 입장에 서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19세기를 지나는 동안 여러 모로 생각이 바뀌었기 때문에 보통선거 이념이 나오게 된 것이다. 한편으로는 사회과학의 발달로 사회경제적 현상에 대한 인식이 심화된 결과, 세금을 내거나 군대에 복무하는 등 직접적 방법이 아니더라도 구성원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국가에 공헌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또 한편으로는 국가권력의 강화에 따라 국가가 개인의 행복을 좌우하는 힘이 커진 만큼 개인의 의사가 국가 운영에 영향을 끼칠 수 있어야 한다는 복지국가의 개념이 싹텄다.

 

세월호 사태를 겪으면서 어린이참정권 문제를 더욱 절실하게 생각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국가 운영방법은 어린이까지 포함한 모든 국민에게 영향을 끼친다. 그런데 당장의 경기 부양만을 위한 ‘규제 완화’가 노년층의 집중적 지지를 받아 정책으로 채택되고 지금의 어린이들이 수십 년 후에 악화된 환경과 고갈된 자원, 그리고 빚더미에 올라앉은 국가를 물려받게 해도 되는 것인가? 어린이들이 가장 무력하게 당할 수밖에 없는 재난이 빈발하는 세상을 만들어도 되는 것인가?

 

복지정책의 핵심 요소인 ‘기본소득’에 대한 김종철의 관점은 참정권 문제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 기본소득을 단지 새로운 형태의 복지 프로그램으로 간주할 게 아니라 사회구성원 전원이 당연히 가져야 할 ‘권리’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즉 기본소득을 ‘시민배당금’으로 정의하자는 거죠. ‘배당금’이라고 하면, 수급자를 선별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있을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주식회사의 주주들에게 배당금을 줄 때 누구는 주고, 누구는 배제한다는 식의 분배는 있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배당금은 모든 주주의 권리이기 때문에 지급하는 것이니까요. 기본소득도 한 사회, 한 공동체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을 ‘주주’로 간주하는 토대 위에서 시행하는 것도 가능하고, 그게 논리적으로 더 타당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지금 그렇게 시행하고 있는 곳이 있습니다. 알래스카에서 지난 30년 동안 해온 방식이 바로 그렇습니다. 알래스카에는 ‘알래스카영구기금’이라는 게 있는데, 그 기금을 이용해서 매년 알래스카 주민 전체에게 일정한 액수의 현금을 지급하고 있습니다. 이 영구기금은 대부분 알래스카에 있는 유전에서 나오는 석유생산 및 판매에 의한 수입금입니다. (...)

 

그런데 알래스카의 경우에 가장 중요한 점은 석유라는 자원을 알래스카 주민 전체의 공유자원으로 인식하고, 거기서 나오는 수입을 구성원 전원에게 배당금으로 고르게 배분해야 한다는 발상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알래스카가 30년이 넘게 꾸준히 이 제도를 운영하고 있는 것은 석유 덕분이라고 생각하기 쉽죠. 물론 그 점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석유자원이 있는 지역, 국가라고 해서 다 알래스카처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잘 압니다. (“근대문명의 반생명성, 민낯을 드러내다” <말과 활> 2014. 5-6, 52-53쪽)

 

19세기에는 국가를 위해 국민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국민을 위해 국가가 존재한다고 대다수 사람들이 믿고 있다. 그렇다면 미성년 어린이들의 입장도 정책 결정에 반영되어야 한다.

 

 

또 하나 어린이참정권에 관해 많이 걱정하는 문제는 미성년자 부모의 대리투표가 ‘직접투표’와 ‘비밀투표’ 원칙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나는 앞서의 글에서도 참정권의 성립 여부가 근본이고 그 행사방법에 관한 원칙은 지엽일 뿐이라는 의견을 밝혔다.

 

나아가 생각하면 직접투표와 비밀투표는 주권자가 주권행사에 타인의 압력을 받지 않도록 해주는 방어 장치로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 아닌 모든 사람을 ‘타인’으로 규정해서 일체의 영향을 받지 않게 하는 것이 꼭 바람직한 일일까? 미성년자의 투표에 대리투표를 행하는 보호자(부모)의 의견이 본인 의견 대신 나타나는 것이 꼭 잘못된 일일까?

 

부모 중에 자녀 본인에게 해로운 선택인 줄 알면서 자기가 원하는 쪽으로 표를 던지는 사람이 아주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 부모는 자녀를 위해 좋은 것이 어느 쪽인지 성심껏 판단해서 그에 따라 투표를 할 것이다. 지금도 학교 선택을 부모가 해준다. 자녀에게 해로운 학교를 선택할 조그만 위험 때문에 부모의 학교 선택을 금지할 수 없지 않은가.

 

나는 근년 과도한 개인주의를 비롯한 현대세계의 많은 문제들이 원자론적 세계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물질이 독립적인 원자로 구성된 것처럼 사회도 독립적 개인으로 구성된 것이라는 믿음이다. 개인의 소외, 과도한 경쟁, 공동체에 대한 무책임 등 많은 문제들이 이 믿음에서 나오는 것으로 생각된다.

 

물리학계에서 원자론은 20세기로 접어들 때 폐기되었다. 물질의 세계가 그리 쉽게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 후 물리학의 발전이 보여주었다. 그런데도 원자론에 기대어 인간사회를 손쉽게 파악할 수 있다고 보는 오만한 개인주의 관점은 21세기에 들어선 지금까지도 맹위를 떨치고 있다. 이를 극복할 필요의 인식에서 공동체, 연대, 유대감, 소통 등의 말이 여러 방면에서 나오고 있다.

 

직접투표와 비밀투표 원칙의 경직성도 개인주의 기준 때문이다. 주권 행사에서 권력자의 개입을 막는 것까지는 좋지만, 가족 사이에까지 꼭 적용될 필요는 없다. 부모가 아이와 함께 앉아 네 장래를 위해 어디에 투표하는 것이 좋을까 의논하는 것이 직접-비밀투표 원칙에 어긋난다면, 나는 그런 원칙을 내다버리고 가족공동체의 가치를 지킬 것이다.

 

백 년 전 여성참정권이 확립되던 시절을 되돌아본다. 무한경쟁의 근대정신이 인간과 인간 사이를 극한으로 몰고 가서 전 인류를 전쟁의 위협에 몰아넣던 제국주의시대였다. 그 지나침을 반성하고 위기 완화를 위해 도입한 제도의 하나가 여성참정권이었다. 여성이 정치에 참여함으로써 극단적 대결주의를 견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무한경쟁의 폐해가 인간과 인간 사이의 문제를 넘어 자연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심각한 문제로 제기하고 있다. 근대민주주의가 발전을 시작한 이래 미래에 대한 걱정을 가장 많이 해야 할 상황이 되어 있다. 과학 발전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기술만능주의의 낙관을 더 이상 지킬 수 없게 된 이제, 정책결정의 구조에서 미래에 대한 고려가 더 많이 필요하다. 어린이참정권의 실현이 그 길이다.

 

여성이 “세상의 절반”이라고 하는데, “세상의 3분의 1”로 줄여서 보았으면 좋겠다. 남성이 또 하나 3분의 1, 그리고 어린이가 또 하나 3분의 1이라고. 남성만 내세우는 데 문제가 있어서 여성까지 나서게 된 것이 1백 년 전의 일인데, 아직까지 빠져 있던 나머지 3분의 1을 이제 꺼낼 때가 되었다.

 

 

Posted by 문천

 

북한은 1993년 3월 12일 NPT 탈퇴를 선언했다. NPT 탈퇴에는 3개월의 유예기간이 규정되어 있다. 6월 12일 이전에 탈퇴선언을 취소하지 않으면 공식적 탈퇴가 되는 것이다. 결국 북한이 6월 11일에 북-미 공동성명과 함께 탈퇴 연기를 발표함으로써 위기가 한 차례 수습된다. 오늘은 그 과정을 살펴보겠다.

 

“한 번 만들어진 조직은 그 유지와 확대를 위해 움직이는 경향을 가진다.” 소련과의 대결을 위해 만들어진 미국의 정보-군사 기구들은 냉전 해소 후 필요가 없어지거나 줄어들었다. 그러나 축소와 폐지에 저항하는 추세는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그를 위해 새로운 존재의의를 찾아내려는 노력이 일어났다. 이것이 북핵위기 형성의 배경 일부가 되었다.

 

부서의 기능에 따라 선호하는 정책의 방향이 다른 것도 밥그릇 문제로 생각할 수 있다. 국방부가 대결을 좋아하고 국무부가 대화를 좋아한 것은 자기네 업무를 늘려주는 방향이기 때문이었다.

 

클린턴 행정부 내에서의 관료조직 간의 갈등 또한 부시 행정부의 그것과 유사했다. 국무부는 핵확산금지 체제에 초점을 두었다. 반면 국방부 장관실은 북한의 플루토늄 추가확보를 저지하는 데 집중했다. NPT는 핵물질 재처리는 금지하지 않았으므로 국방부는 재처리 포기를 약속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과 그에 따른 남북 상호사찰에 초점을 두었다. 그리고 국방부는 더 많은 것을 원했다. 4월 7일 부수장위원회 회의에서 국방부의 프랭크 위즈너 정책담당차관은 북한의 핵 프로그램이 완전히 폐기되었다는 보증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NPT, 국제적 안전의무 및 남북한 공동선언에서 다루어지지 않은 내용이다. (위트-폰먼-갈루치, <북핵위기의 전말>46쪽)

 

부시 행정부의 말기인 1992년에서 클린턴 행정부 초기인 1993년에 걸쳐 미국 정부의 공식적 대북정책은 대결과 대화 어느 쪽으로도 절대적으로 기울어져 있지 않았다. 그래서 각 부서 관리들의 성향이 있는 그대로 주장과 활동에 나타나고 있었다.

 

국무부 관리들은 북한과의 대화를 거부해 온 냉전시대 이래의 제약이 풀리기를 바랐다. 그들이 당시 북한에 대해 깊고 정확한 이해를 갖고 있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도 대화 제약이 풀리면 향상을 기대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당장 대결주의자들과의 정책 경쟁에서는 논거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코리아데스크 담당자였던 케네스 퀴노네스의 회고록 <한반도 운명-북폭이냐 협상이냐>(노순옥 옮김, 중앙 M&B 펴냄)에는 국무부 실무자로서 저자가 겪던 고충이 가득 담겨있다. 한국어에도 능통한 그는 1992년 연말에 로버트 스미스 상원의원의 평양 방문을 수행했기 때문에 몇 달 후 북핵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북한 인사들과의 대화에 나서기에 적격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대화를 열기 위해서는 저쪽에서 접근해 오기를 기다려야 했다.

 

5월 중순, 상황은 어느 정도 진정되었다. 그러나 유엔에 파견된 우리 외교관들이나 다른 일반인들이 도움을 요청할 때를 대비해 나는 늘 전화통 옆에 붙어 있었다. 어느 날 점심, 내가 막 샐러드를 한 숟갈 입에 물었을 때였다. 코리아 데스크에서 15년 동안 근무한 조 앤이 사무실 문앞에 나타나 놀란 표정으로 말을 더듬었다.

 

“자, 자기가 부, 북한 대사라며 어떤 사람이 통화를 하고 싶다는데요. 이름이 허 뭐라는데... 어떻게 할까요?”

 

그녀 못지않게 놀란 나도 말을 더듬었다. 미소외교[북한인과 마주치면 미소만 짓지, 이야기는 하지 말라는 국무부 방침]가 아직 유효할 때였다. 직속 상관은 모두 점심 먹으러 나갔고, 최소한 한 시간 안에는 돌아오지 않을 게 분명했다.

 

순간적으로 평양에서 이미 여러 명의 북한 관리들을 만난 마당에 허종 대사와 한 번 더 만나는 것이 대수겠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전화를 받았다. 1월 카터 센터에서 만난 이후 처음 하는 통화였다. 처음에 약간 머뭇거리던 그도 평상시의 태도로 돌아왔다. 그의 얘기는 믿을 수 없는 요구로 시작됐다.

 

“나는 우리 정부로부터 귀 정부에 양측 정부가 서로 만나 쌍방의 문제를 논의할 수 있는지 여부를 알아보는 권한을 위임받았습니다.”

 

나는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보라고 했다. ‘무슨 주제로 어느 선에서 언제 어디서?’ 그는 양측 정부가 핵문제를 논의한다는 원칙에만 동의한다면 세부적인 내용은 추후에 결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134-135쪽)

 

NPT 탈퇴 유예기간을 한 달 남겨놓고 북한 측이 미 국무부에 접촉을 해온 것은 “나 좀 말려 달라”는 뜻 아니겠는가. NPT 탈퇴의 직접 이유는 IAEA의 ‘특별사찰’ 요구였다. IAEA에 대한 미국의 압도적 영향력은 삼척동자도 아는 것인데, IAEA가 창설 이래 처음으로 특별사찰을 들고 나온 것이 누구 때문이겠는가. 허수아비인 IAEA와 말이 통하지 않으니 실질적 주체인 미국 나오라고 한 것이 NPT 탈퇴선언이었다. 그런데 두 달이 지나도록 미국이 대화에 나서지 않으니 이야기 좀 하자고 이제 연락을 취한 것이다.

 

유엔 북한대표부 부대사 허종이 퀴노네스에게 전화를 걸 때까지 미국 측에 아무런 대화 노력도 없었다는 사실은 퀴노네스의 서술로 보아 분명하다. 노력이 있었다면 그가 동원되지 않았을 가능성을 생각하기 힘들다. 한편 걸려온 전화를 받는 데까지 망설인 것을 보면 실무자급의 자연스러운 접촉까지 철저하게 봉쇄되어 있었던 것이다. 인용문 중 “1월 카터 센터에서 만난” 일이 언급되어 있는데, 퀴노네스가 카터센터에 출장 갔을 때 허종이 그곳에 와 있는 것을 알고 국무부에 전화해 허락을 받고서야 만났던 것이다.(122쪽) 허락을 받지 못했다면 여러 사람 있는 자리에서 미소만 짓고 지나쳐야 했을 것이다.

 

일단 연락이 오자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퀴노네스는 허종의 전화를 받은 이튿날 뉴욕으로 가서 허종의 상급자인 김종수 부대사를 만났고, 핵문제 협상을 위한 북-미 회담을 두 주일 후에 유엔 미국대표부에서 열기로 단 10분 만에 의논이 끝났다. 북한의 NPT 탈퇴를 비난하면서 대화를 거부할 명분이 미국 쪽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6월 2일 강석주가 이끄는 북한 대표단과 로버트 갈루치가 이끄는 미국 대표단이 6월 2일 열렸고, 이 회의로부터 6월 11일의 북-미 공동성명이 도출되었다. 성과에 이르는 과정에서 실무접촉을 맡았던 퀴노네스는 양측 간의 이해 수준이 너무나 낮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예컨대 북한 측이 미국 정부의 공식 발표보다 언론에 나타나는 평론가들의 ‘사적 논평’을 더 중시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을 의아해 했는데, 알고 보니 ‘private’란 말의 의미에 대한 오해 때문이었다고 한다.

 

나는 아직도 북한인들이 대화 도중 ‘private’이란 단어의 정의를 내려달라는 질문을 받았던 것을 분명히 기억한다. 북한 사람들은 미국인들이 서로 뭔가를 private한 것으로 하자고 약속할 때 그것이 ‘비밀의’ 또는 ‘극비의’라는 뜻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나는 ‘private’이란 단어가 ‘개인적인’ 또는 ‘공식적인 정부관리와는 아무 상관없는’이란 뜻으로도 쓰인다고 설명했다. 이 모든 것이 어찌 보면 우습고 사소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당시처럼 상대방에 대한 무지로 팽팽히 긴장해 있던 상황에서 이런 상대적으로 작은 장애물들을 먼저 치우지 않고는 본질적인 문제에 접근조차 시도할 수 없었다.(168쪽)

 

온갖 시시한 문제들이 실무자로서 퀴노네스의 어려움을 보태주었다. 북한 대표단을 회담장에 데려오는 것부터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막상 회담을 하려니까 전혀 예상치 못한 세부사항이 자꾸 불거져 나왔다. 세관은 북한 대표단이 외교관 신분을 이용해 마약이나 위폐 또는 무기를 밀반입하려고 할지 모른다고 걱정했다. 나는 외교관인 북한대표단의 몸수색을 하는 것은 안 된다고 그들을 설득해야만 했다. 짐을 열어보거나 검사하는 일도 있을 수 없다. X레이는 통과시키지만 열어볼 수는 없다고 못 박았다. 이민국에서는 입국을 허가하기 전에 대표단의 사진을 찍고 지문을 채취해야 한다고 했다. 결국 카메라는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설치했고 지문은 입국절차를 서둘러 간신히 모면했다.

 

유엔 주재 미국대표부의 보안담당자는 북한대표단 중 누군가가 회의장을 빠져나가 아래층에 있는 기밀문서를 훔쳐볼지도 모른다고 걱정을 했다. 비밀 유출을 막기 위해 회의장 출입구와 회의장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 무장 해병을 배치하겠다고 했다. 나는 무장군인의 배치는 절대로 안 된다고 빌다시피 그를 설득했다. (...)

 

관료들은 외교관으로서 나의 임무를 순전히 북한 사람들의 자존심이나 달래주는 의전상의 장식품 정도로밖에 평가하지 않았다. 더 긴 안목을 갖지 못한 이 사람들이 놓친 것은 그들이 더 실질적인 진행을 방해하기 전에 이런 복잡한 예상문제들을 내가 사전에 예방하고 해결했다는 사실이다. 결국 그것이 내 일이었고, 나는 내 일을 효율적이고 외교적인 방식으로 진행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144-146쪽)

 

북핵 문제를 놓고 북한을 상대하는 주체는 남한과 미국, 그리고 IAEA의 3자였다. 북한을 상대하는 미국 실무자로서 퀴노네스는 수시로 한국 입장에 신경 쓰는 모습을 보여주는 반면 IAEA에 대해서는 크게 주의를 기울이는 기색이 없다. 1993년 6월 북-미 고위급회담을 시작하는 단계에서도 퀴노네스는 한국의 반응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한국정부는 마지못해 마지막 카드인 북미회담을 받아들였다. 결국 북한을 외교적으로 포용하기 위한 끈질긴 노력과 상당한 경제지원이라는 당근에 대해 북한이 되돌려준 것은 무기제조용 플루토늄의 생산을 숨기려는 속셈밖에 없었던 셈이다. 그런데도 미국은 이런 잘못된 행동에 벌 대신 상을 주려 한다는 것이 한국인들의 시각이었다. 그것도 평양이 줄기차게 요구해 왔던 북미 고위급회담이라는 상을.

 

워싱턴 주재 한국대사관과 유엔 한국대표부는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주시했다. 협상 전략 수립에 영향력이 있는 미국 정부 내 모든 부서가 중대한 로비 대상으로 떠올랐다. 미국 대표단의 개개인 역시 면밀한 주시의 대상이 되었다.

 

북한데스크로서 미국과 북한 정부 간 대화유지 책임을 맡고 있던 나도 자연히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나는 한국대사관에 모든 것을 투명하게 밝히라는 지시를 상관으로부터 받았다. 다시 말해 친구인 한국이 모든 것을 알게 하라는 것이었다. 한국대사관이 모르는 사실을 북한이 언론에 흘리면 내가 그 동안 한국대사관과 쌓아온 신뢰가 깨질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 이후 5년 동안 내가 남북한 모두로부터 신뢰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투명성 덕분이었다. 불행하게도 미국 정부 내 정책 결정자급의 일부 인사들은 이 투명성 원칙을 어기고 협상의 일부를 한국 측에 숨김으로써 한-미 정부 간의 상호 신뢰에 손상을 입히기도 했다. (138쪽)

 

1993년 6월의 북-미 고위급회담은 좋은 성과를 낳았다. 북한은 NPT 탈퇴선언의 카드로 미국을 회담장에 끌어내어 북한의 주권을 존중하고 무력행사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미국도 ‘거의 아무런 양보 없이’ 북한을 NPT에 잔류시킬 수 있었다. ‘거의 아무런 양보 없이’라고 따옴표를 친 것은 여기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위 인용문에 나온 것처럼 회담 자체가 북한에 대한 ‘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북한의 주권을 존중하고 무력행사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이 엄청난 양보처럼 보일 것이다. 퀴노네스를 위시한 실무자들의 공로를 무엇보다 높이 평가하는 점은 그런 사람들의 반대를 쉽게 물리칠 길을 찾아낸 것이다.

 

6월 10일 목요일 아침이었다. 시한이 불과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워싱턴에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신속하게 회신이 왔다. 미 대표부에 가자 대표단원 두 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와 성명의 초안을 작성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나는 북한이 원하는 것은 북미공동성명으로 미국 정부는 북한에 대해 무력행사를 하지 않을 것과 북한의 주권을 존중할 것을 구체적으로 명시해야 한다고 그들에게 말해 주었다. 나는 유엔 헌장 처음 몇 페이지를 훑어보았다. 유엔 헌장 몇 구절만 바꾸면 그대로 성명이 될 것 같았다. 결국 유엔 헌장에 서명한 나라로서, 또 북한의 유엔 가입을 찬성한 나라로서, 우리는 잃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내 친구 하나가 워싱턴의 국가안보회의에 전화를 걸어 통과 또는 승인 요청을 했다. 그는 천천히 자기 앞에 놓여 있는 컴퓨터 모니터에서 깜빡거리는 초록색 글자들을 읽었다. 그 단어들이 듣는 사람을 놀라게 한 모양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우리가 북한을 상대로 그런 말들을 공개적으로 할 수 있단 말인가. 미국이 북한의 주권을 존중할 것이라고 암시하다니 북한 사람들한테 완전히 넘어간 것 아닌가.”

 

친구와 나는 그들의 입을 막을 답을 갖고 있었다. 우리는 그 말들이 실제로 유엔 헌장에 있는 말을 그대로 따온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정부에 무슨 새로운, 과격한, 유별난 것을 요구하는 게 아니었다. (172-173쪽)

 

유엔 회원국이 다른 회원국에게 주권 존중하겠다, 무력행사 않겠다, 새삼스럽게 약속을 할 필요부터 없는 일이었다. 유엔 헌장만 지키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정도 약속을 “북한 사람들에게 완전히 넘어간 것”으로 보는 것이 많은 미국 관리들의 인식이었다. 그들에게 유엔 헌장을 기억시켜 준 것이 퀴노네스 등 실무자들의 큰 공로였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