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책에 대한 관심에 감사드리고, 또 이 자리에 불러주신 데도 감사드립니다. 함께 열심히 토론에 임할 것이며, 또한 활발하고 충실한 토론이 될 수 있도록 저자로서 드릴 수 있는 도움을 드리도록 애쓰겠습니다.

 

토론 시작에 앞서 우선 이 책의 성격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밝히겠습니다. 어떤 의도로 벌인 작업인지, 어떤 토대 위에서 어떤 관점을 중심으로 이뤄낸 성과인지, 그리고 결과물에 대해 저자로서 어떤 아쉬움을 가졌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토론을 진행하다가 관심이 많이 모이는 주제를 사회자께서 지목해주시면 그에 대해 책의 문면에 나타난 것보다 더 소상한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작업의 목적부터 말씀드리죠. 저는 다년간 중국사를 중심으로 근세동서교섭사를 공부해온 사람인데, 2008년부터 한국사에 관한 저술을 내놓기 시작했습니다. 첫 책이 <밖에서 본 한국사>인데, ‘국사’라는 집착에서 벗어나 보다 합리적인 역사관을 모색할 사회의 필요에 부응하려는 뜻입니다. 동서문명을 넓게 바라봐온 공부를 밑천으로 시도한 작업입니다.

 

이 책을 낸 뒤 한국사 중에서도 근현대사 쪽으로 끌려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민족주의의 진화 내지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는 차원에서 기존 민족주의를 비판하는데, 이것이 마침 그 무렵 고개를 들고 있던 뉴라이트 역사관의 민족주의 부정과 일맥상통하는 것 아니냐는 견해와 마주쳤어요. 그런 피상적인 착각은 무시하는 게 제 평소 신조인데... 존경하는 지식인인 장정일 작가님까지 그런 견해를... 그래서 뉴라이트란 데서는 어떤 얘기를 하는 건지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찾아보니 참 고약한 얘기더라고요. 그런 고약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어느 사회에나 있죠. 그런데 문제는 그런 사람들이 골방에서 저희들끼리 노는 게 정상인데, 강한 정치권력과 연계되어 사회에 영향을 끼치겠다고 달려들고 있는 거예요. 교과서까지 어쩌겠다고 야단들이잖아요. 이걸 누가 꾸짖어줘야 하는데, 가만 생각하니 꾸짖으러 나서기에 나만큼 적당한 입장에 선 사람도 별로 없는 것 같데요. 그래서 <뉴라이트 비판> 작업을 하게 됐죠.

 

그 작업을 하면서 한국근현대사를 더 바짝 들여다보게 됐습니다. <밖에서 본 한국사>에서는 기존 학설의 윤곽만 살피며 문명사의 넓은 시야를 그 위에 덧씌우는 정도 작업이었기 때문에 시비를 세밀히 따질 필요가 없었죠. 그런데 뉴라이트 역사관의 문제점을 알뜰하게 지적하기 위해서는 훨씬 더 치밀한 고찰이 필요했습니다. 요컨대, 한국사를 평론가 입장에서 건드리기 시작했는데, 이제 연구자 입장에 꽤 접근하게 된 겁니다.

 

그러고 보니 2010년, 합방 100주년이 다가오고 있는데, 그 시점까지는 망국의 의미에 대해 새로운 시각의 제기가 이 사회에 많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나처럼 문명사를 넓게 바라봐온 사람이 제기하는 시각도 나름의 가치가 있겠다 싶었죠. 그 생각이 떠오르고 보니 아, 사회의 수요에 맞추는 방향의 작업을 한다면 책도 많이 팔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그래서 <망국의 역사> 작업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작업에 임하면서 망국의 의미를 세 갈래로 설정했습니다. 조선이란 국가의 멸망이라는 국가 차원. 한국인이 역사상 처음으로 이민족의 전면적 지배를 받게 되었다는 민족 차원. 그리고 동아시아문명이 서양문명에 굴복하는 ‘서세동점’ 현상의 일환으로서 문명 차원.

 

제가 문명 차원에 가장 큰 중점을 두리라는 것은 제 공부의 배경으로 보아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일이겠죠. 그런데 기존 서술에서는 국가 차원과 민족 차원의 관점들도 제대로 분화가 되어 있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실제 작업은 국가-민족 차원의 관점을 명확히 하는 데 중점을 두고 문명 차원의 관점을 배경에 깔아놓는 식으로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다음으로 이 책에 적용시킨 전반적 관점을 간단히 설명하겠습니다. 19세기 후반의 조선에는 내외의 위기가 겹쳐서 닥쳤는데, 내부적 위기는 국가구조에 대한 위협이었습니다. 이 측면에 대해서는 한국근대사 연구자들의 연구가 많이 쌓여 있어서 평론가 입장의 제가 끼어들 여지가 많지 않았습니다. 다만, 지적되어 온 문제적 현상들에 대해 사회경제적 위기의 측면을 넘어 문명 위기의 측면으로 보는 해석을 덧붙일 수 있었습니다.

 

내부적 위기보다는 외부로부터의 위기를 설명하는 것이 제 본령이었습니다. ‘서세동점’의 틀로 개항기 외부의 위협을 해석하면 지금까지의 해석보다 더 석연하게 풀리는 것이 많습니다. 예컨대 왜 일본에는 개항으로부터 메이지유신 출범까지 근 20년 동안 외세의 심각한 개입이 없었을까? 왜 청나라는 원세개의 군대를 조선에 보냈을까? 왜 러시아는 아관파천으로 호박이 넝쿨째 떨어졌는데도 주워 먹을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제가 무엇보다 ‘망국’의 의미에 관해 중요하게 생각한 문제는 과연 1945년의 해방으로 망했던 나라가 되살아났는가 하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완전히 되살아나지는 못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진정한 ‘광복’의 기본 지표가 민족국가의 회복에 있는데, 그 지표조차 아직까지도 충족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점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세계정세 속에서 한국현대사를 바라보는 거시적 시각이 필요합니다. <밖에서 본 한국사>를 쓸 때, 역사의 모든 고비에서 거시적 시각이 도움이 될 측면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근현대사 영역에서 그런 측면이 특히 큽니다. 세계정세의 변화가 급격한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20세기 중엽의 세계에서 민족주의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는지 감안하지 않고는 1948년 분단건국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20세기 후반에 남북한의 주민이 겪은 질곡은 20세기 전반 식민지시대와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20세기 초입에 겪은 ‘망국’ 상태가 20세기 말까지 계속된 결과로 이해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망국’에는 국가 차원, 민족 차원보다 문명 차원의 문제가 더 큰 것으로 봅니다. 국가의 최소한의 꼴은 갖췄고, 반쪽의 민족국가는 만들어져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전혀 해소되지 못하고 있는 문제는 서양문명의 정복에 따른 ‘전통’의 상실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남한 사정만 놓고 보죠. 친일파 척결에 실패해서 친일파 못지않게 악질적인 친미파가 형성되어 특권구조에 집착한다는 지적이 많이 있습니다. 어느 나라를 쳐다보느냐 하는 것보다 전통적 가치질서를 파괴한 데 더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전통시대에는 엘리트계층이 어떤 방식으로든 사회의 안전에 공헌하는 질서체계가 있었는데, 그것을 잃어버린 사회에서 ‘노블리스 오블리제’니 뭐니 남의 전통을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저는 산업혁명 이래 근대문명의 특성으로 ‘폭력성’을 부각시켰습니다. 지난 수십 년간 환경-자원 문제가 심각해지는 데 따라 많이 지적되어 온 특성입니다. ‘선진’ 근대사회에서는 이 폭력성을 어느 정도 전통 질서의 힘으로 견제해 온 반면 이 폭력성이 벌거숭이로 날뛰게 한 것이 전통을 상실한 식민지사회의 현상이었습니다. 그 현상에서 한국사회가 아직까지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측면을 자각하는 것이 향후의 진로를 찾아가기 위해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을 이 책 바닥에 깔아놓았습니다.

 

 

이 작업을 망국 100주년인 2010년 여름에 맞춰 마무리하며 여러 면에서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그 후의 제 작업 방향 선택에 이 아쉬움이 많이 작용해 왔습니다. 2010년 여름부터 작년 여름까지 3년간 <해방일기> 작업을 한 것은 1945년의 ‘해방’과 1948년의 ‘건국’이 진정한 ‘광복’과 어떤 거리를 가진 것인지 밝히기 위해서였습니다.

 

<해방일기>에 이어 <냉전 이후>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1990년을 전후한 ‘냉전 해소’가 세계정세에 큰 변화를 가져왔는데, 한반도는 이 변화에 보조를 맞추지 못해 왔습니다. 냉전 해소가 다른 어느 곳보다 큰 변화를 가져와야 할 이곳에 제대로 변화가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까닭이 무엇인가? 일어나야 할 변화가 진정한 ‘광복’이라는 생각 위에서 이 변화를 가로막고 있는 반도 내부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점검해보고 있습니다.

 

<냉전 이후> 작업을 통해 21세기 들어와 눈에 띄게 진행되고 있는 세계적 변화의 의미에도 접근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19세기 중엽에 동아시아지역으로 밀려온 ‘서세동점’의 물결이 해소되거나 역전되는 기미를 살피는 것입니다. 아마 <냉전 이후> 이후 작업은 이 시도를 더 밀고 나가는 것이 되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백여 년 전 조선의 망국이 혼자 망한 게 아니라 문명 몰락의 일환을 이룬 사건이었던 것처럼, 이제 한국이 망국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도 혼자 기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문명 부흥의 흐름 속에서 이뤄질 것이라는 희망을 키우고 있습니다. 물이 빠질 때 모든 배가 내려가고 물이 들어올 때 모든 배가 떠오르는 것처럼.

 

 

Posted by 문천

 

1992년 1월 22일 북한 로동당 김용순 국제비서와 미국 국무부 아놀드 캔터 차관이 만난 뉴욕회담은 북-미간 최초의 고위급 공식접촉이었다. 반년 전부터 유엔가입 등 개방노선에 나선 북한에 대해 미국은 국제핵안전 지침 준수, 미사일 수출 중단, 한국과의 대화 촉구, 테러리즘 포기, 한국전쟁 때 미군 전사자의 유해 송환 등 요구사항만 있었을 뿐, 관계를 맺을 아무런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캔터는 김용순의 후속회담 계획 요청과 회담을 마무리하는 공동성명서 발표 요구를 모두 거부했다. 미국 정부의 지침 때문이었다.

 

북-미 고위급 접촉이 다시 이뤄진 것은 1993년 6월 초순, 다시 뉴욕에서였다. ‘제1차 북미회담’이라 불리는 이 회담에는 강석주 유럽 담당 외교부 부부장과 로버트 갈루치 국무부 정치-군사 담당 차관보가 대표로 나섰다. 회담 결과 6개항으로 이뤄진 공동성명서가 6월 11일에 발표되었다. 미국은 북한의 주권을 존중하고 무력행사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북한은 3개월 전 선언한 NPT 탈퇴를 유보하기로 했다.

 

북한 입장에서는 17개월 전과 비교할 수 없는 큰 성공을 거둔 것이었다. 유엔헌장을 통해 간접적, 원론적으로만 표시되어 있던 관계를 당사자에게 확인받은 것이다. 17개월 전 너무나 싸늘하게 퇴짜맞았던 후속회담이 바로 이어지게 되었다. 착하게만 굴 때는 주어지지 않던 기회가 NPT 탈퇴선언 한 방 덕분에 주어진 것이었다. 나쁜 행동이 상을 받는다는 이치는 미국이 북한에게 가르쳐준 것이었다.

 

1992년 1월 이후 미국이 북한과 대화를 이어나갔다면 북한이 NPT 탈퇴선언도 하지 않고 ‘북핵위기’를 만들어내지 않았을까? 장담할 수 없는 일이지만, 나는 그런 가능성이 컸다고 본다. 탈퇴선언 이후 북한이 요구한 것은 한 마디로 ‘미국과의 대화’였다. 미국이 대화를 거부해온 것은 북한과의 관계에 아무런 보장도 해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고, 그것이 북한에게는 생존에 대한 큰 위협이었다. 1993년 6월, 북한에 대해 유엔헌장을 지키겠다고 한 약속, 미국대표단에서 아무런 양보도 아니라고 한 그런 약속을 1992년 중에 해주었다면 적어도 그 시점에서 NPT 탈퇴선언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1993년 6월의 뉴욕회담은 북-미간 대화를 시작한다는 선언이었다. 그리고 본격적 대화는 다음 달 제네바에서 열린 ‘제2차 북미회담’으로 시작된다. 7월 14일에서 19일까지 열린 제네바회담의 성과에 대해 퀴노네스는 이렇게 회고했다.

 

핵위기는 뉴욕과 제네바에서 열린 1, 2차 회담에서 해결되지 않았고, 2차 회담 후 오랜 교착상태가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되돌아보면 귀중한 진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 탈퇴라는 위기의 직접적인 원인이 연기되자 양측은 서로에 대해, 그리고 대화를 하는 방법에 대해 배울 수 있는 시간을 벌었던 것이다. 이런 진전은 협상의 궁극적인 성공에 대단히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양측 정부의 정책입안자들은 공개된 성명 뒤에 숨은 뜻을 알게 되었다. 북한이 주장하는 주권의 방어가 워싱턴의 영향력 있는 정책입안자들의 눈에 무력행사를 하겠다는 위협으로보다는 자신들의 불안한 체제에 대한 신경질적인 반응으로 비쳐지기 시작했다. 한편 북한 지도자들도 북한 핵 프로그램 및 사찰과 관련된 미국의 항의가 국제사회의 우려를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

 

우선, 양측 정부의 관료들은 새로운 현실과 절차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포용의 새로운 규칙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견제의 방편으로 오랫동안 견지해 온 냉전의 파괴적인 규칙들을 뒤로 제쳐놓았다. 대화와 몇몇 선택된 관리들의 정기적인 만남은 기본적인 필수조건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대화가 차츰 양보가 아닌 필요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서울은 이런 시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리고 워싱턴의 많은 사람들도 여전히 냉전시대 인식으로 대화를 생각했다. 그러나 핵위기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는 미국 관리들은 서울의 과민반응에 신경 쓰기보다는 북미대화를 더 강조하게 되었다. (<한반도 운명> 215-216쪽)

 

양측에 인식의 변화가 일어났다고 퀴노네스는 회고하지만, 변화의 크기가 북한보다는 미국 쪽에 훨씬 더 컸다. “국제사회의 우려”를 북한 측이 이 회담을 통해 비로소 깨우친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NPT 탈퇴선언이 바로 ‘국제사회의 우려’를 일으키기 위한 것이었고, 그 덕분에 미국과 회담을 할 수 있게 되지 않았는가.

 

미국 쪽 인식에는 정말로 큰 변화가 일어났다. 대화가 없는 상태에서는 온건한 정책을 원하는 관리들도 정보 부족 때문에 제대로 주장을 내세울 수 없었다. 북한이 못마땅한 일이 있다 해서 “전쟁 불사”를 성명이나 언론을 통해 외칠 경우, 북한이 진짜로 전쟁을 원하는 것으로 보는 강경파의 해석에 온건파가 반론을 제기할 근거가 없었다. 대화를 양보로 여기는 봉쇄정책이 미국 국민을 북한에 대한 이해로부터 격리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1993년 6-7월의 지속적 대화는 미국의 북한에 대한 이해의 길을 열어주었다.

 

제네바회담 이후 미국 정부 분위기에 대한 퀴노네스의 회고를 보면 온건파의 입장에 강경파에 맞설 만큼 자라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앙정보국과는 달리 [국무부] 정보조사국은 북한 문제를 이데올로기와 냉전의 시각에서가 아니라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인식하고 있었다. (...) 더 나아가 정보조사국 내의 온건파들은 북한 지도부가 북한을 개방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들은 평양이 이미 10년 전에 이 일을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그 증거로 북한의 1991년 남북대화의 놀라운 진전, 나진-선봉 자유무역지대의 설치, 그리고 무엇보다도 유엔 가입을 들었다. 이런 인식을 감안할 때 북한의 잠재적 핵위협을 다루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을 포용하고 협상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핵 프로그램에 대해서 온건파들은 프로그램의 진짜 의도가 흥정용이지 실제로 핵무기로 무장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

 

미국의 수많은 강경파들은 절대 동의할 수 없다고 떠들어댔다. (...) 워싱턴 관료사회에는 목소리 크고 독단적인 강경파일수록 중앙정보국, 국방정보국, 국가안보국에 몰려 있었다. 그들은 북한이 이미 몇 기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평양이 국제원자력기구와 협조하기를 거부하는 것도 핵무기를 더 많이 만들기 위해서라고 했다. (...)

 

내가 보기에 강경파 진영의 시각은 독단적인 냉전시대 사고로, 심히 왜곡되어 있었다. 물론 이것은 가장 안전한 입장이었다. 북한을 ‘불합리하고, 사악하며, 음모에 가득찬, 공산주의 침략자’로 규정하기만 하면 미국과 한국에 대한 충성심은 절대 의심받지 않았다. (...) 현재의 진전 상황이 과거의 문맥인 침략, 전쟁, 테러리즘의 프리즘을 통해 인식됐다. 따라서 지금 북한이 아는 모든 일은 과거 행동의 연장으로만 간주됐다. 북한의 변화는 그 가능성조차 과소평가되거나 완전히 무시되기 일쑤였다. (<한반도 운명 209-211쪽)

 

강력하고 거대한 기구인 CIA의 수장이 이 강경파를 대표하듯, 북한이 핵무기를 이미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한다는 증언을 의회에 내놓고 있었다. 온건파 입장을 뒷받침해주는 국무부 정보조사국은 CIA와 비교가 안 되게 약소한 기관이었지만(북한문제 전문가의 수도 백여 명 대 대여섯 명이었다고 퀴노네스는 말한다.) 1993년 6-7월의 북미회담을 통해 온건파의 입장이 살아났다. 북한을 무시하거나 부정적으로만 보던 분위기에서 벗어나는 흐름이 미국 정부 내에서 뚜렷해진 것이다.

 

제네바의 제2차 북미회담 성과에 대한 미국 수석대표 갈루치의 회고를 퀴노네스의 회고와 비교해 보면, 온건파를 자처하는 퀴노네스와 달리 갈루치는 중립적인 입장에서 회담 진행에 따라 온건파 관점으로 끌려온 것을 알아볼 수 있다.

 

결국 북한의 진심이 무엇이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평양이 심각한 에너지 문제를 겪고 있으며 이를 새로운 원자로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7월이 되지 연말까지로 계획된 제3차 7개년 계획에 따른 1천억[1천만?] 킬로와트 전력 생산을 달성하지 못할 것임이 분명해졌다. (...) 오랫동안 북한을 지켜본 전문가들은 북한의 원자로 제안이 정말 에너지 문제에 관한 것인지 아니면 핵무기 프로그램을 진행하기 위한 지연작전과 같은 다른 무엇을 위한 것인지에 대해 깊이 고심했다.

 

의도가 무엇이든 갈루치 대표는 이 제안에 따르면 북한이 기존 핵 시설을 모두 폐기해야 한다는 점에서 고려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우선 상관을 설득할 필요가 있었다. 부수장위원회의 핵심 멤버인 피터 타노프 국무차관과 프랭크 위즈너 국방차관과의 전화통화에서 갈루치는 강석주의 제안이 가진 장점을 설명했다. 한동안 침묵이 흐른 후 위즈너는 “이것이 몇 백만 달러가 필요한 제안이 아닌가?”라고 물었다. 갈루치는 “아니죠. 수십억 달러지요.”라고 대답했다. 위즈너는 북한에 어떤 약속도 하지 말라고 했다.

 

강석주가 모호한 태도를 보인데다가 원자로 제공에 들어갈 엄청난 비룡은 갈루치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결국 그는 새로운 원자로 도입을 “지원”한다는 데까지 가기로 결정했다. 그의 입장은 전향적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모호했다. (...)

 

합의에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미국과 북한은 추가 회담의 길을 열어놓는 차원에서 회담을 마무리했다. 미국의 입장에서 북한이 IAEA 및 남한과 회담을 진행하겠다는 약속을 받는 것이 IAEA의 권한을 보호하고 주요 동맹국과의 관계를 공고히 하기 위한 임시방편이었다. 이는 또한 위기 해결을 위한 외교적 노력이 효과가 있음을 증명함으로써 국내에서 지지를 받기 위한 미 행정부의 접근법이기도 했다. 미국은 9월 말 북한과 추가 회담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실제로 양측은 거의 1년간 다시 만나지 못할 운명이었다. (위트-폰먼-갈루치, <북핵위기의 전말> 92-94쪽)

 

첫 문단에 보이는 것처럼 갈루치는 회담 과정을 통해 북한의 에너지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북한의 제안이 진짜 에너지 문제 해결이 아니라 지연작전을 위해서 나온 것이라고 보는 강경파의 관점을 아주 떨쳐버리지는 못했다.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그는 “추가 회담의 길을 열어놓는 차원”에서 제2차 회담을 끝냈다. 북한의 제안을 더 진지하게 검토할 길을 막지는 않되, 북한의 경수로 도입을 “지원”한다는 정도로.

 

미국은 아직 ‘포괄적 타결’을 진지하게 검토하지 못하는 단계에서 공을 IAEA와 남한에게 넘겼다. 북한이 양측과 관계를 제대로 풀어나가는 것을 확인한 뒤에 미국이 대화를 계속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IAEA와 남한 어느 쪽도 북한에게 협조적이지 않았고, 제3차 북미회담은 1년이 지난 1994년 8월에야 열리게 된다. 오늘은 IAEA 쪽 사정을 살펴보고 남한 쪽 문제는 다음에 다룰 텐데, 퀴노네스가 분통을 참지 못한 대목 하나만 우선 옮겨둔다.

 

나는 김영삼 대통령이 북한과 미국 간의 관계완화를 복잡하게 하고 지연시키는 것을 최우선과제로 삼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것이 핵문제 해결을 방해해도 상관없는 듯 보였다. 게다가 김 대통령은 평양이 미국과의 회담에서 조급하고 좌절감을 느끼게 만들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할 작정을 한 것 같았다. 김 대통령이 그렇게 행동한 이유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한반도 운명> 268쪽)

 

7월에 제네바를 떠나면서 갈루치는 제3차 회담이 9월 말쯤 열릴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 기대가 깨어지던 상황을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그러나 [1993년 7월] 이후 4개월간 워싱턴은 IAEA 및 서울과 책임을 나누어 다자간 협조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필요한 일일지 몰라도 현실적으로 악몽에 가까운 일임을 뼈저리게 깨닫게 될 것이었다. 클린턴 행정부는 위기를 외교적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점차 한국과 IAEA 내부정치의 인질이 되고 있었다. 한국과 IAEA는 여러 면에서 북한과 대화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것이다. 첫째, 양자 모두 내부의 정치적 문제와 관료주의의 저항에 직면해있었다. 둘째, 양자 모두 과거 북한과 상대하여 좋은 결과를 얻은 경험이 없었다. 셋째, 북한의 협력을 유도하기 위해 제시할 수 있는 당근이 없었다. 게다가 북한은 미국과의 대화를 지속하기 위해 억지로 IAEA 및 남한과의 대화에 임했기 때문에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그 결과 미국의 삼면 외교전략은 양면에서 늪에 빠져 허우적거렸고, 움직이지 못한 상태에서 국내적으로 점점 거세지는 비난여론에 직면했다. 그 상황에서 벗어나는 데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뿐만 아니라 클린턴 행정부는 국력의 다른 요소, 즉 군사력의 사용에 대해 심각하게 고려하는 상황이 됐다. (<북핵위기의 전말> 96쪽)

 

IAEA와 남한에게는 북한에게 제공할 당근이 없었다는 것이 문제의 초점이었다. 북한이 원하는 것, 즉 ‘체제 보장’을 쥐고 있는 것은 미국이었고, 그래서 미국과 대화하고 싶어 한 것이다. 어렸을 때 묵찌빠 하던 생각이 난다. 부하들을 모두 이긴 뒤에야 대장과 시합을 붙을 수 있는 방식. IAEA와 남한은 미국의 부하인 셈이었다.

 

미국은 북한과 ‘대화’는 겨우 하게 되었지만, ‘협상’까지 하는 것은 아직도 내키지 않았다. 북한이 경수로만 확보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하는 것이 솔깃하기는 한데, 수십억 달러가 드는 그 과제를 어떻게 처리할지, 대책을 바로 세울 수 없었다. 그래서 대화의 길은 계속 열어놓되, IAEA와 남한을 통한 간접적 압력을 통해 향후의 대화과정에 대한 통제력을 쥐고 있으려 한 것이다.

 

책임지는 일을 가급적 회피하거나 늦추려는 전략을 미국 관리들은 다들 알고 있었다.

 

[1993년] 10월 13일 부수장위원회는 한완상-한승주 두 한 장관이 제안한 포괄적 접근법에 따라 중요한 조치를 취했다. 회의 직전 샌디 버거 안보부보좌관을 만난 갈루치는 “지금까지 우리의 입장은 북한의 의무사항만 강조하고 우리의 역할은 드러내지 않는 것이었지만 북한은 이를 눈치 챘다”고 말했다. 그는 “이제 그런 방식은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북핵위기의 전말> 118쪽)

 

1992년 5월 북한이 IAEA에 최초보고서를 제출했을 때 IAEA가 북한에게 어려움을 주도록 미국이 압력을 넣은 것은 명백한 일이다. 시비의 단초였던 동위원소 분석을 IAEA가 의뢰해서 미국이 행했다고 하지만 의뢰를 하도록 미국이 시킨 정황이 분명하다. 칼집에서 꺼내본 적이 없는 ‘특별사찰’을 끄집어내게 한 것도 미국 뜻에 따른 것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은 북한에게 어려움을 줌으로써 북한의 개방정책을 더 화끈한 동유럽 식으로 이끌고 싶었을 것이다. NPT 탈퇴선언이라는 반발은 예상하지 못한 것 같다. IAEA를 통한 압력에 북한이 굴복하지 않으면 어떻게든 때려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쉽게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막상 반발이 나오고 국제사회의 관심을 모으자 처리가 쉽지 않았다. 대표적 문제가 ‘특별사찰’이었다. 북한은 특별사찰이 명백한 주권 침해라며 그것만은 절대 안 된다고 뻗대는데, 정말로 파국이 일어난다면 특별사찰 요구는 국제사회의 이해를 받기 어려웠다.

 

6월 11일 공동성명서 채택을 앞둔 뉴욕회담의 막바지 협상 장면을 퀴노네스는 이렇게 회고했다.

 

오후 내내 우리는 특별사찰 문제와 씨름했다. 강석주는 특별사찰 얘기만 나와도 불같이 화를 냈다. 그는 북한에서 국제원자력기구의 특별사찰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북한의 주권을 침해하는 처사라고 했다. (...) 북한에게는 주권이 문제였다. 미국에게는 국제핵확산금지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문제였다. 타협은 불가능해 보였다. 순식간에 회담은 결렬될 것 같았다. 그러나 이제는 시간이 없었다. 모두 필사적으로 해결책을 찾았다.

 

마침내 우리는 양측이 각자 좋을 대로 해석할 수 있는, 그러나 양측 대표단이 같은 의미로 쓸 수 있는 ‘암호’를 하나 찾아냈다. ‘전면적인(full scope)’이란 단어였다. (...) 이런 용어의 우산 아래 우리는 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핵물질의 재고를 국제원자력기구가 조사할 수 있는 특별사찰에 포함시켰다. 북한은 이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평양 지도자들이 국가주권 침해로 간주하는 특별사찰이라는 단어를 거론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들에게는 안심이었다. (<한반도 운명> 177쪽)

 

나는 이것이 속임수였다고 생각한다. ‘특별사찰’은 IAEA헌장에 명시된 하나의 제도 이름이다. 비슷한 뜻의 다른 단어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1993년 6월 11일 북미공동성명서의 문면은 미국이 IAEA의 특별사찰 요구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이 되었다. 이에 대한 미국 정부 내 강경파의 반대를 회피하기 위해 속임수를 쓴 것이다.

 

특별사찰의 포기로 IAEA를 조종하기도 힘들어졌다. 명색이 국제기구인 IAEA에 가했던 무리한 압력을 주워 담기가 어렵게 된 것이다. 미국이 포기했다 해서 IAEA가 바로 따라 포기한다면 국제기구의 독립성을 어디 가서 주장할 수 있단 말인가.

 

IAEA는 자신들의 권한을 방어하면서 미국의 외교적 노력을 저해하지 않기 위해 조심했지만 전자에 더 치우치는 우를 범했다. 1993년 5월 이루어진 제한된 사찰을 훨씬 넘어서 1992년 안전조치 협정에 포함된 보다 광범한 임시 및 정기사찰을 수행해야 한다는 IAEA 내부의 압력이 특히 안전조치 강경론자들을 중심으로 거세지고 있었다. 북한은 그와 정반대의 논리에서 IAEA의 접근을 제한하려고 들었다. 즉 사찰활동의 계속은 안전조치 협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북미회담의 결과였다는 주장이었다. 이에 따라 “안전조치의 계속성”의 정의를 놓고 끝없는 설전이 시작되었다.

 

IAEA와 북한의 대립이 계속되자 미국의 입장이 곤란해졌다. 미국정부 내 전문 기술자들은 IAEA의 감시 장비만 정기적으로 관리한다면 북한의 핵심시설들이 가동되지 않도록 감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5월 사찰과 같은 제한된 활동으로도 미국의 단기적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더욱 중요한 것은 미국이 지나친 간섭을 자제하는 것이었다. 물론 미국의 입장이 IAEA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틀림없었지만 미국은 IAEA의 독립적 권한을 존중할 필요가 있었다. (<북핵위기의 전말> 98쪽)

 

원래부터 북한 핵활동에 대한 감시는 1992년 5월의 사찰 수준으로 충분했던 것이다. 그런데 북한이 제출한 보고 내용의 흠을 찾아 특별사찰까지 끄집어낸 것이 IAEA의 누가 원한 일이었는가. 미국이 앞장서서 문제를 벌여놓고는 이제 IAEA의 엄격한 태도 때문에 미국 입장이 곤란하게 되었다고 한탄하기에 이르렀다.

 

북한은 IAEA를 미국의 꼭두각시로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꼭두각시 임자를 찾아가 얘기를 해서 ‘특별사찰’을 배제한 공동성명서를 작성, 발표했는데도 꼭두각시가 계속 귀찮게 구니까 짜증만 난다. 반면 IAEA 측에서는 미국의 무리한 압력에 따라 움직였던 일이 아무리 후회가 되더라도 독립된 국제기구의 위상을 스스로 포기할 수는 없다. 그 위상을 지키기 위해서는 태도를 누그러트리라는 미국의 눈치를 일부러라도 무시해야 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IAEA가 확대된 “안전조치의 계속성”을 위한 사찰을 요구한 것이 클린턴 행정부에 새로운 부담을 주었다는 점이다. 핵확산금지체제를 위한 국제기구로서 IAEA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입장을 존중해야 하기 때문에 미 행정부는 IAEA에게 8월 사찰과 같은 제한적 사찰에 만족하라고 촉구할 수 없었다. 결국 북한이 포괄적인 사찰에 합의하도록 설득해야 하는 새로운 과제가 생겼다. 이 과제를 완수하는 데 거의 8개월이라는 시간이 소요됐다. (<북핵위기의 전말> 102-103쪽)

 

위트-폰먼-갈루치는 <북핵위기의 전말> 98쪽에서 IAEA의 엄격한 태도를 “양날의 칼”에 비유하기도 했다. 북한의 양보를 얻어내는 도구이지만, 한계선을 넘을 때 위기를 키운다는 문제점을 지적한 비유다. 이 비유를 보더라도 미국 관리들이 IAEA를 손쉬운 이용 대상으로 여기는 관점이 분명하다. 그런데 조작을 급하게 바꾸려면 이용이 불편할 때도 있었다.

 

 

Posted by 문천

몇 해 얼굴 못 보던 친구에게서 어젯밤 느닷없이 전화가 왔어요. 용건인즉, 따님이 참석하는 독서토론회에서 오는 토요일 <망국의 역사> 토론을 하는데, 저자가 참석할 수 있다면 대환영일 거라고. 따님과 바꿔 몇 마디 들으니 아주 재미있는 토론회 같네요. 그래서 참석하겠다고 했죠. (15년 전의 초등학생이 어떻게 컸는지도 보고 싶고)

 

신촌역 4번 출구 앞의 르메이에르 5차 지하2층 '미플'(02-313-4300)에서 오후 2시에서 5시까지라고 합니다. 세 시간이나 토론을 하고, 그것도 모잘라 몇 시간씩 뒷풀이까지 하는 분들이 있다니... 엄청 질긴 토론회 같아요.

 

토론에 중점을 두는 모임인 만큼 제 역할은 최소한으로 하려 합니다. 시작할 때 작업의 의도와 성격 등 총론적인 이야기를 2-30분 하고 토론에 들어갔다가, 토론에서 중점적으로 떠오르는 주제에 관한 이야기를 보충하는 방식으로 진행할까 합니다.

 

100여 명 회원을 갖고 매주 모임을 갖는 토론회라고 하는데, 최유진님은 정식 가입도 하지 않은 채로 저자 초청까지 알선할 만큼 분방하고 활달한 분위기인 것 같아 더욱 마음이 끌리네요. <망국의 역사>에 특별히 관심이 없더라도 빡센 독서토론회에 흥미있는 분들 와보세요.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