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6. 23. 01:03

 

미국 사는 옛 제자에게 오랜만에 메일 받았습니다. 블로그에 광고해 달라고 해서 올립니다. 이런 요청에 응답하는 재단 같은 거 뭐 있을 거 같은데, 아는 분 있으면 좀 튕겨주세요.

 

 

 

안녕하세요 선생님,

 

얼마 전부터 uva alderman library에서 동아시아부 한국 도서 담당자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관심이 없어서 거기에 한국책이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는데, 관계자와의 친분관계로 뜻 밖의 일을 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한국책 코너가 너무 보잘 것 없습니다. 그 많은 중국과 일본책들의 한 구석에 200권 정도 자리하고 있습니다. 얘기를 들어보니 한국 도서 코너가 생긴 것도 몇 년 안 됐더군요. 6년 전 쯤에 school of arts and sciences에 딘으로 메러디스 우(우정은, 커밍스 교수 부인) 가 왔는데, 그 후에 이 대학에 한국책이 없다는 걸 알고 깜짝 놀란 그분이 힘을 쓴 덕분으로 그나마 한국책 코너가 생겼다는군요.

 

팽팽 노는 게 좋아서 이 일을 길게 할 생각은 없고요. 그렇지만 제가 일하는 동안 한국책을 100배는 늘리고 싶어졌습니다.^^ 책 구입비가 책정되어 있지만 얼마되지 않습니다.

 

혹시 한국에 있는 기관, 재단이나 출판사 아니면 개인이 책 기증에 관심있는 곳이 있지않을까 해서 찾아볼 생각입니다.  선생님께서 혹시 아시는 곳이 있어서 연결시켜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리고 선생님 블로그에 쪼끔만 광고해 주시면 안될까요?

 

안녕히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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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1993년 7월 제네바 북미회담의 미국대표단 단장이었던 로버트 갈루치는 7월 16일 회의에서 북한 측이 내놓은 ‘경수로 제공’ 조건이 가진 의미를 당시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당시에는 분명치 않았지만 돌이켜보면 경수로 제안을 북한이 내놓았다는 것은 북한이 핵폭탄을 제조할 수 있는 흑연감속 핵 프로그램을 포기할 의사가 있음을 처음으로 암시한 것이었다. 1993년 7월의 경수로 제안은 이후 일 년여에 걸쳐 위기를 종식시키기 위해 진행된 협상의 토대를 마련했다. 북한이 경수로를 제공받는 대신 핵확산 금지 의무사항을 이행하고 기존의 핵 시설을 파기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미국측 대표단이 이를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위트-폰먼-갈루치, <북핵위기의 전말> 91-92쪽)

 

갈루치는 북한 측이 이 제안을 내놓던 장면도 소상하게 회고했다.

 

강석주는 [한 달 전의] 뉴욕회담에서 이 문제를 띠운 적이 있었지만, 당시는 북한의 NPT 복귀 문제가 더 시급하고 중요했기 때문에 제대로 논의되지 못하고 흐지부지했다. (...)

 

강석주는 우선 경수로 기술에 대한 북한의 관심이 오래 된 것임을 과거를 짚어가며 설명했다. 그리고 흑연감속 원자로의 경우 원료로 쓰이는 농축우라늄의 공급을 위해 외국에 의존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북한으로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음을 강조했다. 그렇지만 현재의 시설을 고집하는 한 이에 대한 우려가 가시지 않을 것임을 알고 새로운 제안을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신 북한이 원하는 것은 새로운 원자로가 제공될 것이라는 미국의 확실한 약속이었다. 그동안 북한은 핵 프로그램을 동결할 것이며 IAEA가 이를 감시하도록 허용하겠다고 했다. 일단 새로운 원자로가 설치되면 북한은 NPT 이행을 다시 선언할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북한은 IAEA와 “불공정” 문제를 해결하고 안전조치로의 복귀를 위한 논의를 하게 될 것이었다.

 

잘 차린 점심식사를 하는 동안 강석주는 자신들의 새로운 제안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원하는 김일성 주석의 지도력 덕분에 가능했다고 강조했다. 북한은 또한 북한의 군부가 많은 양의 사용후 연료를 보유하는 한편 폭탄 제조 기술을 완성할 경우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우려를 표현함으로써 간접적으로 미국을 협박하기도 했다. 내부적으로 통제가 어려울 수 있다는 고전적 협상술을 발휘하여 북한측의 한 참석자는 “그렇게 되면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희망하는 쪽에 큰 문제를 안겨줄 것”이라고 말했다. (같은 책 87쪽)

 

미국대표단에 실무자로 참여하고 있던 케네스 퀴노네스도 경수로 제안이 나왔을 때 대표단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던 상황을 회고했다. 오전 회의에서 나온 경수로 이야기를 갈루치가 강석주에게 점심시간 중 더 들은 뒤 대표단에 돌아왔을 때의 이야기다.

 

우리는 강석주가 자신의 관대한 제안(2기의 경수로 요구)을 진지하게 밀어붙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들 대부분은 믿을 수 없어했고 몇몇은 분노를 표시하기도 했다. 일부는 긴장을 풀기 위해 농담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갈루치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의견을 물었다. 우리 북한 전문가는[퀴노네스 자신을 농담조로 가리킨 말인 듯] 그 제안이 긍정적인 진전이라고 주장했다. 그것은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와의 협조를 다시 생각해 볼 마음이 있다는 표시였다. 그러자 문제는 두 개의 경수로라는 엄청난 대가에 있다고 다른 사람들이 말했다. 재빨리 우리는 평양으로 하여금 국제원자력기구 및 사찰에 협조하고 남북대화를 재개하려 하려는 우리의 안견으로 다시 초점을 돌리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

 

다시 회의실로 돌아간 갈루치는 강석주에게 미국 대표단은 현재 두 개의 경수로 요구에 대해 당장 대답할 수 있는 입장에 있지 않다고 말했다. 우선 본국 정부와 장시간 의논해야 했다. 우리는 북측에게 도대체 누가 경수로 비용을 지불할 것으로 생각하느냐고 여러 번 물었다. 강석주는 즉각 그리고 반복적으로 미국이 무이자 대출을 해주면 북한이 전액을 같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갈루치는 미국은 국제원자력기구 규정을 지키지 않는 나라에는 핵발전소에 필요한 장비의 공급을 금지하는 국제협약을 이미 체결한 상태라고 설명했다. 결국 우리는 워싱턴과 상의해서 다음 회담 때 관대한 요구에 대해 가능한 것과 가능하지 않은 것을 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퀴노네스, <한반도 운명>200쪽)

 

제네바에서 이 제안이 나온 바로 이튿날 워싱턴을 방문 중이던 한완상 통일부장관이 피터 타노프 미국 국무부 정무차관을 만났을 때 경수로 제안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타노프 차관에게 나는 우선 7월 14일부터 제네바에서 진행 중인 2차 북-미 회담과 관련해 궁금한 것부터 물어보았다. 이번 회담에서 북쪽이 뜻밖에 제안한 경수로 건설 기술 제공 문제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북한과 핵 문제 해결을 위한 대화를 어느 정도 오래 끌 수 있는지도 잠깐 얘기했다. (...)

 

물론 당시 2차 북-미 회담에서 가장 놀라운 뉴스는 북한이 미국에 ‘경수로 기술 제공’을 요구했다는 사실이다. 북한은 일찍이 경수로 지원을 약속했던 소련이 해체되는 바람에 경수로 건설이 무산되었다. 미국도 이 제의를 원천적으로 거부할 것 같지는 않았다. 경수로만으로는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재료(플루토늄)를 생산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타노프도 일단 북한의 제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고 했다. 다만, 경수로 제공은 엄청난 재정지원도 해야 하는 까닭에 선뜻 나설 의향이 없고, 핵 문제가 해결된 뒤에나 검토해볼 수 있다고 했다.

 

내가 보기에 미국은 설사 북핵 문제가 해결된다 해도 엄청난 재정지원을 할 뜻은 없는 듯했다. 그 ‘공’은 결국 우리 정부로 넘어올 가능성이 컸다. 북한으로서는 경수로가 세워지면 핵무기 개발 의혹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워지는 동시에 심각한 전력난도 극복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한완상, <한반도는 아프다>122-124쪽)

 

한완상의 회고 중에는 회고 시점에서의 관점이 뒤섞여 내용의 정확성에 불안감을 주는 대목이 더러 있다. 이 대목도 그렇다. 제네바 현장의 미국대표단 멤버들이 경수로 제안의 현실성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던 시점에 타노프 차관의 설명을 듣고 “미국도 이 제의를 원천적으로 거부할 것 같지는 않”다고 어떻게 판단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북한이 미국의 “무이자 대출”을 얘기하고 있던 시점에 재정지원의 부담이 한국으로 넘어올 걱정을 하고 있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이 시기 북핵 문제에 관한 한국과 미국 관리와 언론인들의 서술에서 북한 경제 사정에 관한 설명에 아쉬움을 느낀다. 정보 획득이 어려웠기 때문이겠지만, 북한의 대외정책을 이해하는 데 큰 허점이다. 정확한 정보를 얻는 것은 지금도 어려운 일이지만, 이 연재의 9-11회에서 살펴본 것처럼 공산권 붕괴의 결과 북한의 경제사정에 큰 어려움이 있으리라는 것은 당시에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 어려움은 1990년대 후반의 ‘고난의 행군’으로 확인되었다.

 

1991년 북한의 유엔가입 등 개방정책에는 “하나의 조선” 등 건국 이래 국가노선의 원칙을 포기하는 의미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방정책으로 나선 절대적 이유는 소련과 중국의 군사적-경제적 보호가 사라지면서 국가 유지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에 있었다. 가장 심각한 문제가 에너지였다. 소련과 중국이 시혜적 기준으로 에너지를 공급하던 정책을 거두면서 모든 산업이 중단될 위기를 맞게 되었다.

 

핵사업에는 에너지 공급과 핵무기 제조의 두 갈래 길이 있다. 1991년 개방정책에 나서고 있던 북한의 핵사업의 기본 목적이 에너지 공급에 있었다는 데는 정황상 의문의 여지가 없다. 부차적 목적으로 핵무기 제조를 바라봤을 수는 있다. 그렇다면 그 부차적 목적의 비중은 얼마나 큰 것이었을까?

 

1991년 이전, 소련과 중국의 보호가 약해지고 있는데 북한 지도부가 아직 개방정책을 결심하지 않은 단계에서는 핵무기의 매력이 강했을 것이다. 초강대국 미국과의 적대관계를 해소할 길을 바라보지 못하는 채로 ‘자주국방’의 길을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동구 공산권의 해체를 바라보며, 혼자 힘으로 미국과 맞설 결의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세계정세의 변화로부터 오는 개방의 압력과 주권 수호의 의지 사이에서 북한은 중국식 개방정책을 모델로 삼았다. 동유럽 국가들처럼 주권(특히 경제주권)이 흔들리는 길을 따라갈 마음이 없었다. 중국이 한 것처럼 최소한의 군사주권과 경제주권을 지키고 싶었다. 그런데 당시 미국은 중국에게도 인권을 지렛대로 더 강도 높은 개방, 즉 주권 약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중국식 ‘미지근한’ 개방을 새로 개방하는 그 인접국에까지 허용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1985년 소련은 경수로 제공을 조건으로 북한의 NPT 가입을 요구했다. 개혁개방 노선을 바라보는 입장에서 시혜적 에너지 공급과 핵우산 제공을 철회하기 위한 대비책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경수로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로 해체 단계에 접어들었다. 북한은 자체 기술로 건설할 수 있고 원료를 조달할 수 있는 흑연감속로를 만들지 않을 수 없었다.

 

흑연감속로는 북한산 우라늄을 연료로 쓸 수 있고, 사용 후 재처리를 통해 무기용 플루토늄을 쉽게 뽑아낼 수 있다. 북한은 NPT 가입신청을 한 상태에서 플루토늄 추출작업을 시도했고, 그 사실을 1992년 5월 IAEA에 제출한 최초보고서에 밝혔다. 그런데 북한이 제출한 플루토늄을 IAEA가 미국에 맡겨 분석한 결과 한 차례 작업으로 추출했다는 북한 주장과 달리 세 차례에 걸쳐 추출한 것으로 동위원소 분석 결과 밝혀졌고, 이를 토대로 북한이 더 많은 플루토늄을 뽑아놓고 일부만 내놓은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것이 1992~1994년 ‘제1차 북핵위기’의 출발점이었다.

 

확정적 증거를 갖지 않은 채로 추측컨대, 북한의 보고 내용에는 미국과 IAEA가 지적한 대로 은폐-축소가 있었을 것 같다. 북한은 NPT 가입에 따른 IAEA와의 관계를 IAEA의 통상적 운용 기준에 따라 예측했을 것이다. 에너지 확보를 위해 진행하는 핵사업에 약간의 비용과 노력을 더 들여 무기용 핵연료 추출을 시도하면서, 그 내용의 일부만 IAEA에 통보해도 별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2006년에야 핵실험에 이른 결과를 보더라도, 1992년 시점의 플루토늄 추출은 실제 핵무기 제조에서 아득하게 먼 단계에 있었다.

 

그런데 IAEA가 북한의 예측을 벗어난 반응을 보였다. 제출받은 시료의 동위원소 분석을 의뢰한 것부터 전에 없던 일이었다. 게다가 헌장 조문에만 들어있는 채로 수십 년간 시행된 일이 없는 ‘특별사찰’을 들고 나온 것은 분명히 ‘주권 침해’의 성격을 가진 일이었다.

 

모든 조약은 주권 침해의 성격을 가진 것이다. 가입국들이 특정한 목적을 위해 주권 일부를 보류하거나 양보하겠다는 약속을 하는 것이 조약이다. 민주사회의 시민이 사회의 안전을 위해 행동의 자유 중 일부를 보류, 양보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NPT는 핵무기의 위협을 억제하려는 목적으로 가입국에게 핵사업 내용 공개를 요구하는 조약이다. 어느 조약이나 마찬가지로 이 요구가 모든 가입국에게 공정하고 공평하게 적용되어야만 조약이 실효성을 가질 수 있다. 특정 국가에게만 강하게 적용될 경우 해당 국가는 조약을 받아들을 동기를 잃는다.

 

문제가 된 특별사찰은 극한적인 상황에 대비하는 제도였다. 대상국의 동의 없이 IAEA가 일방적으로 사찰대상 시설을 선정한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수준의 주권 침해다. 대상국이 완성된 핵무기를 감추고 있는 정황이 분명하다든가 하는 ‘위기’ 상황에나 시행을 검토할 제도였고, 수십 년간 시행을 검토할 필요가 없던 제도였다. 1992년 2월 로버트 게이츠 CIA국장이 하원 외무위원회 답변 중 북한이 핵무기를 확보한 지 1년이 넘었다고 말한 것처럼 황당한 추측이 난무한 것은 IAEA의 특별사찰 요구를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었다.

 

특별사찰 요구에 대해 북한의 NPT 탈퇴선언은 정당하고 타당한 대응이었다. 그런데 막상 이 선언이 나오자 북한이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그 결과 미국 정부에서도 대 북한 정책을 다시 검토할 분위기가 이뤄졌다. 그때까지는 북한에 대한 관심이 적어서 군사-정보 계통의 일부 관리들이 대 북한 정책에 강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는데, 이제 더 넓은 범위의 관리들이 북한 문제를 함께 검토하게 되면서 특정 성향 관리들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줄어들게 되었다.

 

NPT 탈퇴선언에 이르는 과정에서 북한 지도부는 미국 정부의 적대와 무시 앞에 좌절감을 느꼈을 것이다. 개방정책을 추진하고 싶어도 유일한 슈퍼파워 미국이 가로막는 데는 당할 길이 없었다. 미국은 같은 유엔회원국인 북한에 대해 대화를 거부하고 무력행사의 위협을 가하는 등 유엔헌장조차 도외시하고 있었다. IAEA를 통한 미국의 압박에 순응한다 하더라도 어떻게 하면 활로를 찾을 수 있을지, 미국은 아무런 언질도 주려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탈퇴선언 하나가 상황을 바꿔놓았다. 국제사회가 북한의 진로를 걱정하게 되었고, 미국 정부 내에서도 대 북한 정책의 우선순위가 올라가면서 다양한 관점이 제기되는 분위기가 되었다. 그 결과 탈퇴 유예기간인 3개월이 채워지는 시점에서 탈퇴 보류를 조건으로 미국이 유엔헌장을 지키는 수준의 보장을 해주기에 이른 것이다. 미국 정부 내에서는 이 보장을 지나친 양보로 보는 시각이 있었다. 하지만 이 보장은 당연한 것이며 아무런 양보도 아니라는 관점을 미국대표단은 취했다. 북한 지도부는 이것을 내심 미국 측의 큰 양보로 받아들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북한 지도부가 새로 배웠거나 절실하게 확인한 교훈이 하나 있었다. 핵무기의 극히 희미한 그림자라도 비쳐 보이기만 하면 국제사회와 미국 정부의 태도가 크게 달라진다는 사실로부터 국제관계에서 핵무기가 얼마나 큰 자산인지를 깨달은 것이다. 물론 핵무기에 대한 반응은 적대적인 것이다. 하지만 무시당하는 것보다 얼마나 더 나은가. ‘북핵’이 거론되기 전과 달리 미국이 유엔헌장을 지켜주겠다고 나서지 않는가. 상대방의 사랑을 잃었을 때 잊어지기보다는 미움을 받고 싶다는 연인의 마음 그대로다.

 

이 교훈 위에서 북한이 ‘포괄적 해법’을 구상할 수 있었다. ‘북핵’이 이슈화된 상황을 이용해서 자기네 진로를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진로 확보를 위한 지상과제는 미국과의 외교관계 수립이었다. 미국과의 관계만 정상화되면 국제사회 진입에 아무 장애가 없었다. 일본에게는 북한과의 관계 설정을 위한 동기가 충분히 쌓여 있었고, 북-미 대결이 해소되면 남한에서도 민족주의 정서가 대결주의 전통을 쉽게 극복할 것이 예상되고 있었다.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가 도랑 치는 일이라면 ‘북핵’ 이슈화 덕분에 가재 잡는 일까지 바라볼 수 있었다. 미국의 적대적 태도가 북한에게 ‘외우’라면 ‘내환’으로 경제난이 있었다. 북핵 문제 해결을 계기로 원조든 차관이든 외부 지원으로 경수로를 확보할 수 있다면 경제난 극복의 결정적 조건이 될 수 있었다.

 

수십억 달러로 예상되는 ‘경수로 제공’은 미국도 국제사회도 꿈도 꾸지 않고 있던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1994년 10월 제네바합의가 이 조건을 중심으로 이뤄지게 되는 것은 ‘북핵’의 이슈화 덕분이었다. 대결주의자들이 만들어내고 키워낸 ‘북핵위기’가 북한에게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준 것이다. 경수로 제공 비용의 70퍼센트를 남한이 부담하게 된 것은 위기를 키우는 데 남한 정부의 역할이 그 정도 비중이었기 때문일까?

 

북한은 1993년 6월 초 미국과의 뉴욕회담에서 경수로 제공 중심의 포괄적 해법을 제시했지만, 다음 달 제네바회담에서 더 구체적으로 다시 제시할 때까지 미국 정부에서는 아무도 그것을 진지하게 검토하지 않고 있었다. 이제부터 제네바합의가 이뤄질 때까지 15개월간은 이 포괄적 해법이 북핵 문제 논의에서 중심이 된다.

 

 

Posted by 문천

 

2년 전 후보 시절 박근혜의 역사인식을 놓고 논란이 일어났을 때 그의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한 마디에 너무 기가 막혀서 몇 자 적은 일이 있다.

 

한 사회 안에는 온갖 분열의 소지가 있다. 분열을 방치하면 사회가 약화되고 구성원들이 모두 고통을 겪게 된다. 개인에 따라 적게 겪고 많이 겪는 차이가 있겠지만, 분열을 적정선에서 억제할 때보다 고통을 적게 겪을 사람은 거의 없다. 정부와 정치의 첫 번째 기능이 국가사회의 통합성을 지키는 것이다.

 

역사인식의 차이도 분열의 소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5-16과 유신을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역시 많다.

 

온 국민을 섬기는 대통령 자리를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분열의 소지를 해소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자신이 5-16과 유신의 긍정적 가치에 믿음을 가졌더라도 반대하는 사람들의 생각에서 받아들일 것이 없는지 고민해야 하고, 반대하는 이유에 허점이 있다고 생각되면 그 점을 설득하려 최선을 다해야 한다. 내 주장의 지지자도 많이 있으니 숫자로 붙어보자는 배짱은 국민을 섬길 생각 없이 권력만을 노리는 사람의 것이다.

 

박정희의 평가를 둘러싼 ‘국론 분열’은 일시적 현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박정희를 비판적으로 본 국민은 1987년까지 아주 소수였다. 독재의 문제점에 대한 논의가 독재의 힘으로 막혀있었기 때문이다. 민주화 진행에 따라 비판적 시각이 점점 자라나 오늘에 이른 것이다. 아직도 상당수의 사람들이 박근혜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은 이 사회의 민주화 수준이 아직 미흡하기 때문이고, 그 수가 계속 줄어들 것이라고 내가 믿는 것은 이 사회의 민주주의가 계속 발전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http://pressian.com/news/article.html?no=4990)

 

대통령 취임 이래 사람 쓰는 것이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에 너무 제한되는 것 같아서 늘 아쉬운 마음이 들었는데, 이제 총리 후보로 문창극을 지명하는 데는 정말 말문이 막힌다.

 

나는 5-16에 대해 박근혜처럼 생각하지 않지만, 긍정적 의미가 전혀 없다고 보지는 않는다. 예컨대 쿠데타로 무너진 민주당 정권에 이승만 시대로부터 이어진 문제들이 많이 있었다고 보기 때문에 쿠데타 자체의 타당성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 문제는 박정희 집단이 정권 장악 후 추진한 정책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박정희 정권의 정책 중에 바람직한 것도 적지 않았음을 인정한다.

 

5-16과 유신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박근혜를 지지하는 사람들 중에도 그 부정적인 측면을 완전히 묵살하는 사람은 별로 없으리라고 믿는다. 그런 생각을 가진 친구들과 기회 있는 대로 토론도 하고, 토론을 통해 박정희 정권에 대한 내 관점이 전보다 밝아진 것도 적지 않다.

 

박근혜가 말하는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정말 어떤 생각을 가진 사람을 가리키는 것인지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2년 전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5-16과 유신에 긍정적인 면이 많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런데 문창극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5-16과 유신을 조금이라도 비판하는 것은 나쁜 짓’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은 결코 많지 않다. 새누리당을 지지하고 박근혜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다른 당의 박정희 비판이 지나치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박정희의 독재정치에 아무 문제가 없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6년 전 <뉴라이트 비판>(돌베개 펴냄) 작업을 하면서 근대화지상주의 논설을 검토할 때, 독재를 미화하고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는 원리주의 차원의 극단적 역사왜곡은 정략적 동기에서 나오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윤창중부터 시작해서 박근혜가 중용해 온 사람들이 그런 원리주의 성향을 가진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은 그 동안 계속 들었다. 그런데 이제 문창극에서 확인되었다. 4년간 같은 캠퍼스에 다니고 10년간 같은 신문 일을 하면서 보아 온 사람이기 때문에 의문의 여지가 적다. 역시 같은 신문 일을 하던 윤재석의 증언(http://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8012)으로도 내가 가졌던 인상이 그대로 확인된다.

 

문창극은 언론인으로 활동해 왔기 때문에 그 언행이 많이 드러나 있다. 이 점은 윤창중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박근혜의 인사 내용 중 윤창중 문제가 가장 두드러지게 불거진 것은 색깔을 너무나 적나라하게 드러내온 그가 청와대 대변인이라는 현시적 직책을 맡는다는 것이 너무 ‘황당해’ 보였기 때문이다.

 

윤창중이 결국 ‘황당한’ 사건으로 자취를 감춘 것이 우연한 일이 아닌 것 같다. 자신의 대변인 기용이 황당한 조치라는 사실을 그도 의식했을 것이다. 그래서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황당한 짓을 열심히 하다 보니 업무 밖에서까지 황당한 짓을 하게 된 것 아닐까.

 

문창극은 드러난 색깔을 갖고 현시적 직책을 맡는다는 점에서 ‘제2의 윤창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가 하나 있다. 국무총리와 청와대 대변인이 가진 직책의 무게 차이다. 청와대 대변인은 기관 하나를 대표하는 자리인 데 반해 총리는 행정부 전체를 대표하고, 나아가 국가까지도 어느 정도 대표하는 자리다.

 

이 차이 때문에 국무총리 자리는 대통령의 임명으로 끝나지 않고 국회의 동의를 필요로 한다. 아무리 새누리당이 다수당인 국회라도 이런 수준의 임명에 동의하지는 않을 것으로 믿는다. 동의했다가는 지지층의 엄청난 동요를 일으킬 것이다. 야당의 역사인식에 불안감을 느껴 새누리당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자기네 지지가 문창극 같은 ‘꼴통’을 향한 것이라고 한다면 다시 생각해볼 사람이 많을 것이다.

 

‘국무총리 문창극’을 보는 일은 없으리라고 믿지만, 대통령의 임명 자체가 중요한 정치적 행위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아, 정말 박근혜 대통령 너무한다. 청와대 대변인 자리야 어떤 얼간이를 앉히든 마음대로 갖고 놀아도 좋지만, 어찌 ‘대한민국 국무총리’ 자리를! ‘국무총리 후보 문창극’을 보는 것만도 많은 국민에게 큰 스트레스다.

 

한탄을 하다 보니 국무총리 자리를 꼭 저런 식으로 갖고 놀던 대통령 하나가 생각난다. 이승만이다.

 

1948년 7월 20일 제헌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이 8월 15일 정부 수립을 앞두고 첫 번째 할 일이 국무총리 임명이었다. 물망에 오르던 총리 후보는 조소앙, 신익희와 김성수였다. 김구가 분단건국 참여를 거부하고 있던 상황에서 조소앙이나 신익희가 참여해서 임정을 대표하는 한 몫을 해주기 바라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분단건국을 지지하던 사람들은 한민당 영수 김성수의 등용으로 건국세력의 화합과 안정이 이뤄지기 바랐다.

 

그런데 이승만은 대통령으로서 첫 권한 행사인 총리 임명을 여론에 순순히 따라 할 생각이 없었다. 대통령 선출 직전에는 기자의 질문에 “아직도 할 일이 많은데 총리 같은 것이 선결문제가 아니”라고 대답했다.(<경향신문> 1948년 7월 17일) 그게 선결문제 아니라면 뭐가 선결문제란 건지. 대통령 당선 후에는 “국무총리는 아직 지정한 사람은 없으나 발표될 때에는 다 놀랄 것”이라고 한다.(<서울신문> 1948년 7월 23일) 국민 놀라게 하는 것을 대통령의 임무로 생각한 모양이다.

 

7월 27일 이승만은 정말로 국민을 놀라게 했다. 이북 출신 개신교 목사로 조선민주당 부당수를 맡고 있던 이윤영을 임명한 것이다. 인준안은 찬성 59표, 반대 132표로 부결되었다. 이윤영을 국무총리로 임명한 ‘대한민국정부공고 제1호’는 휴지조각이 되었다. <해방일기> 작업 중 이 장면에서 나는 이런 생각을 적었다.

 

이승만은 이런 상식적 전망을 벗어나 인준 부결이 확실한 이윤영을 임명하고 인준을 위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의 목적은 인준 부결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자기 발등을 자기가 찍은 것이었을까? 왜 그런 짓을 했을까?

 

당시 사람들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해방일기”에서 당시 사람들의 현실 인식을 복원하는 데 중점을 두어 왔지만, 이런 일을 놓고는 그 후에 일어난 일을 참고해서 설명을 좀 보충해야겠다.

 

이승만은 ‘독재’를 원한 것이었다. 자기가 차지하는 대통령 자리를 견제할 만한 다른 자리가 없게 될 것을 그는 획책한 것으로 보인다.

 

행정부에서 대통령 다음으로 큰 권위를 가지는 자리로 부통령과 국무총리가 있었다. 이승만은 이시영이 초대 부통령을 맡도록 이끌었다. 명망은 높지만 정치적 세력을 갖지 않은 노인을 앉힌 것이다. 이시영이 참다 참다 못해 1951년 사임하자 어쩔 수 없이 김성수를 부통령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그 뒤에는 역시 노령인 함태영(1872~1964년)을 앉혔고, 1956년에는 추종자 중에도 평판이 나쁜 인물인 이기붕을 내세웠다가 민주당의 장면에게 부통령 자리를 빼앗기기까지 했다. 4-19의 도화선이 된 3-15부정선거 역시 주목적이 이기붕의 부통령 만들기에 있었다.

 

국무총리 자리는 임명권을 통해 권위를 죽여 버렸다. 1954년 11월 사사오입 개헌으로 없앨 때까지 다섯 사람이 국무총리 자리에 앉았다. ‘서리’ 또는 ‘임시’ 국무총리는 열 차례 임명되었다.(그중 네 차례가 이윤영이었다.) 이 시기 국무총리들의 능력과 인품을 도매금으로 평가한다는 것은 내가 감히 할 수 없는 짓이지만, 정부 수립 당시 국무총리의 역할에 대한 사회의 여망과 거리가 크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이승만이 국무총리 선택에 있어서 국정수행 능력보다 자기 권력에 대한 위험이 없는 인물 위주로 선택했다는 사실 또한 분명하다. (이범석, 장면, 장택상, 백두진, 변영태가 정식 국무총리를 지냈고, 이윤영, 신성모, 백낙준, 허정, 이갑성, 백한성이 서리 또는 임시 국무총리를 지냈다.)

 

대통령의 독재를 일컬어 ‘제왕적 대통령’이란 말을 흔히 쓰는데, 적절한 표현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근대 이전 군주제 시대의 진짜 임금은 무책임한 독재자가 아니었고, 전근대시대의 군주제를 모두 비민주적 전제정치로 보는 근대인의 통념은 현실에서 벗어난 하나의 ‘신화’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중국과 한국의 군주제는 공공성의 원리에 입각한 것이었고, 비록 상하관계가 있다 하더라도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책임을 갖는 상당 수준의 민주적 원리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규모가 큰 사회는 소수 집단의 전횡을 억제하는 공공성의 원리를 가진다. 이 원리 없이는 내부 질서의 유지도 어렵고 다른 사회와의 경쟁에서 불리하게 된다. 근대와 전근대의 구분 없이 국가란 공공성의 원리를 보장하는 제도다. 나는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돌베개 펴냄)에서 조선 후기 권력의 과도한 사유화로 인한 공공성의 증발을 조선 망국의 근본적 원인으로 지목했다. 왕과 신하가 모두 ‘분수’를 잃고 권력에만 집착하던 풍조가 유교국가의 원리를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일본 침략에 관계없이 왕조 멸망의 조건이 되었다고 본 것이다.

 

일본 지배에서 해방되어 민족국가를 다시 세우기 위해서는 문자 그대로 ‘공화(共和)’의 원리가 필요했다. 국가사회에 대한 시대의 요구를 순조롭게 받아들이기 위해 여러 위치의 사람들이 각자 공헌할 수 있는 ‘협력’의 체제를 만들어야 했다. 그런데 이승만은 ‘경쟁’의 대상으로서 권력만을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행정부 안에서조차 국무총리가 자기 권위를 갖고 자기 몫의 공헌을 하도록 놓아두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이후 십여 년간 대한민국 역사가 어둡고 괴로운 길을 걷게 되는 데는 물론 많은 요인이 뒤얽혀 작용했지만, 이승만처럼 공공성 의식이 없는 인물이 큰 권력을 쥐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중 중요한 하나였다.

 

이승만 시절에 없던 중요한 사료 하나가 그 사이에 발굴되었다. <정조어찰첩>(성균관대학교출판부 펴냄). 당시의 ‘야당’이라 할 수 있는 벽파 영수 심환지와의 관계에 정조가 얼마나 공을 들이고 심환지의 입장과 역할에 어떤 배려를 했는지 살펴본다면 이승만보다는 나은 대통령이 될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