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은 1971년 대통령 출마 때부터 평화통일을 꾸준히 제창해 왔고, 1990년대에는 포용정책의 최대치라 할 수 있는 3단계 통일론을 발전시켜 온 정치인이다. 1998년 초 대통령 취임 이후 내놓은 햇볕정책은 그 자연스러운 연장선 위에 있는 것이었다.

북한 지도부도 김대중의 일관성에는 신뢰를 품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북한은 쉽게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고난의 행군을 수습하고 김정일 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내부 결속에 바쁜 상황 때문이었을 것이다.

햇볕정책이 메아리를 일으키지 못하는 동안 북한을 둘러싼 상황은 악화되어 19988월 하나의 정점에 도달했다. 한편에서는 미국 국방부의 군사정보국에서 금창리 의혹을 터뜨렸다. 또 한편에서는 북한이 인공위성 발사를 빙자한 장거리미사일 발사를 강행했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는 김정일 체제 완성의 선포였다. 미사일기술은 북한이 경제적 위기와 군사적 위기 양쪽을 모두 극복하기 위한 상품이요, 무기였다. 이 기술의 한 단계 획기적 발전을 김정일 체제의 굳건한 발판으로 과시한 것이었다.

한편 금창리 의혹은 결국 오판으로 밝혀지는데, 단순한 오판이 아니라 정보 조작으로 의심할 여지가 있다. 클린턴 행정부는 북한에 대해 포용정책을 기조로 삼고 있었지만 국방부에는 네오콘의 입김이 강했다. 제네바합의를 좌초시키려는 네오콘의 획책이 군사정보국을 통해 작동한 것이 아니었을지?

금창리 의혹이 제기되었을 때 CIA는 판단을 보류했다. 판단 보류는 실질적으로 부정이다. 타부서의 정보판단을 정면으로 부정한다는 것은 증명하기도 힘들고 정치적으로도 부담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 의혹이 해소되는 데 1년도 걸리지 않는다는 것이 의혹 제기 당시에는 예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의혹 해소를 위한 남--3자 간의 협조가 예상 외로 잘 되었기 때문에 19995월에 미국 측의 현장조사가 가능했다.

금창리 의혹 제기의 목적은 1차적으로 클린턴 행정부, 2차적으로 남한 정부의 대북 포용정책을 견제하는 데 있었다. 대포동1호 발사가 여기에 보탬이 되었다. 북한의 군사적 위험성이 2중으로 제기된 상황에서 햇볕정책을 통한 포용정책의 강화는커녕 기존의 제네바합의 이행조차 힘들게 되었다.

클린턴은 대북정책의 근본적 재검토를 요구하는 의회의 압력 아래 윌리엄 페리를 대북정책조정관으로 임명했다. 페리는 클린턴 1기에 국방장관을 지낸 사람이지만 제1차 북핵위기 때 전쟁 불사의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공화당의 강경파를 만족시키는 인물이었다. 임동원도 페리의 임명에 불안감을 느꼈다고 회고했다.

 

페리 전 국방장관이 대북정책조정관으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1994년 봄 이른바 1차 북핵위기때 북한에 대한 군사적 조치를 취하자고 주장했던 강경파 국방장관인 그가 대북정책조정관으로 임명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정책이 강경노선으로 전환되는 것은 기정사실로 보였기 때문이다.

불현듯 ‘19946월의 악몽이 되살아났다. (...) 페리 당시 국방장관은 금지선을 넘은 북한의 핵 활동을 즉각 저지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전면전쟁을 준비하면서 영변핵시설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클린턴 대통령이 주재하는 국가안보회의에 ‘3단계 작전계획을 상정했다. 이제 전쟁은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

나는 이 악몽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김 대통령에게 적극적인 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란 점을 환기시키고 우리도 우리의 전략을 수립하여 페리 팀을 설득하는 외교적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피스메이커> 398-399)

 

1994년 국방장관으로서 페리의 역할은 대단히 엄격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막가파 네오콘이 아닌 합리적 보수였다고 나는 본다. 북한의 부정적 반응 앞에서 영변 폭격을, 그리고 나아가 전면전까지도 하나의 옵션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검토를 통해 영변 폭격이 전면적으로 이어지는 것을 피하기 어렵고, 전면전이 벌어지면 미국 정부가 감당할 수 없는 피해가 발생할 것을 확인했다.

겉으로는 카터의 극적인 움직임이 미국 정책을 바꾸고 위기를 해소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페리의 역할도 역시 중요했던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만약 당시 국방장관이 럼스펠드 같은 네오콘이었다면 전쟁 전망을 명확하게 검토하지 않고 애매한 상태로 놓아두었다가 전쟁이 엉겁결에 터지도록 유도하려 했을 것이다. 전쟁을 무조건 터뜨리는 것이 네오콘의 지상과제니까. 이라크에서 확인된 사실이다.

아무리 네오콘이 아니더라도 페리의 등장은 포용정책 추진자들이 긴장할 만한 사태였다. 포용정책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국무부 관리들에 비해 페리는 설득하기가 훨씬 까다로운 상대였다. 위 인용문 끝 문단에서 임동원이 말한 적극적인 대책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 대책으로 임동원은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를 위한 포괄적 접근전략을 준비했다.

이 전략의 내용을 임동원은 <피스메이커> 400-405쪽에 실어놓았는데, 앞머리에 제시한 기본 원리만 여기 옮겨놓는다.

 

북한의 핵개발이나 중장거리 미사일 개발의 동기는 한반도 냉전구조에 기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개별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이에 대응하는 대증요법적인 방식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눈앞에 있는 큰 바위로 인해 그 뒤에 있는 큰 산이 가려져 보이지 않지만, 그 바위는 큰 산의 일부에 불과한 것이다.

큰 산을 바라보면서 바위를 넘어서야 하는 것처럼, 북한핵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은 한반도 냉전구조를 해체하여 평화를 만들어나가는 포괄적인 접근을 하면서 당면한 개별 현안도 차근차근 해결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문제의 궁극적 실체를 냉전구조로 보는 것이다. 그것이 큰 산이고 핵문제건 미사일문제건 모두 그 산의 여기저기 튀어나온 바위라고 하는 것이다.

나 자신 종북주의자로 몰리는 일이 있는 사람이지만, 이것이야말로 종북주의 관점이다. 북한에는 많은 문제가 있는데, 어떻게 모든 문제를 냉전구조에서 파생된 것으로 볼 수 있겠는가. 주어진 냉전구조 아래서도 피할 수 있는 문제들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내가 북한 사정을 잘 알아서 장담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사회, 어느 체제에도 스스로 키운 문제들이 있기 마련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당장 남한 사회를 보더라도 남한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문제가 얼마든지 많지 않은가?

그러나 전략적 차원에서는 뛰어난 타당성을 가진 관점이다. 1999년의 북한은 50년 전 전쟁을 일으킬 때의 북한이 아니었다. 세계적 정세변화 속에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그런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 해 동안의 행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없는 문제를 일부러 만들어낼 여유가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의 북한을 상대로 냉전구조에 모든 책임을 돌리고 살아남을 길을 보여준다면 그 길을 걷는 데 노력을 집중하고, 그 노력의 과정에서 많은 문제를 해소-완화할 계기를 찾을 수 있는 것이었다. 요즘 또 한 차례 제기되고 있는 인권문제도 그렇다. 지금 북한의 인권 문제가 남한이 어려운 시절 겪던 수준보다 덜하지 않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들이대고 닦달하기보다 냉전구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요. 이제 근본 문제인 냉전구조를 해소하면서 인권 문제도 해소되기를 바라겠습니다.” 하는 편이 더 효과적인 방법이기 쉽다. 이것이 햇볕정책의 정신 아니겠는가.

김대중은 이 접근전략으로 주요 관계국을 설득하는 일까지 임동원에게 맡겼다. 물론 제일 중요한 상대가 미국의 페리 팀이었다. 임동원은 199812월 초 남한에 찾아온 페리 팀에게 접근전략을 설명하고, 이듬해 1월 하순 워싱턴으로 찾아가 설득을 계속했다. 이때 워싱턴에서 얻은 반응으로 임동원은 페리 팀과 미국 정부가 자기 관점에 동의한다는 자신감을 얻은 듯, 다른 관계국을 설득하는 일에 바로 나섰다. 2월 초에 도쿄, 2월 중순에 베이징, 그리고 3월 말에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미 연쇄방문에 관한 임동원의 회고 중 눈에 띄는 점 하나가 한국의 주도권을 중국과 러시아 측에서 강조한 것이다. 탕지아슈엔 중국 외교부장이 한반도문제는 당사자인 남북 쌍방에 의해 해결되어야한다고 한 말과 카라신 러시아 외무부차관이 한반도문제의 해결에 있어 한국이 주도권을 행사하는 것이 특히 중요하다는 말이 인용되어 있다. 임동원이 특히 보람을 느낀 점이기 때문에 이런 말을 인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1월 말 미국에서 어느 한반도전문가가 한미관계 역사상 한국이 먼저 정책대안을 제시하고 대북정책을 주도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 말도 인용했다. (<피스메이커> 417, 423, 425)

중국과 러시아는 북한문제만이 아니라 어느 지역의 문제에 대해서도 미국이 지나친 주도권을 행사하는 데 반대하는 입장이므로 충분히 이해가 가는 발언이다. 한편 미국의 경우에는 포용정책을 추진하는 행정부와 공화당이 지배하는 의회가 맞서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한국의 적극적 태도를 행정부가 반긴 것으로 보인다.

임동원은 회고록 중 페리 조정관이 199939일 서울에 와서 김대중 대통령에게 자신의 잠정적 대북정책구상을 보고한 대목에 유쾌한 표절이란 소제목을 붙였다. 페리가 보고 중 임동원 수석비서관으로부터 좋은 아이디어를 많이 제공받았으며, 부끄러운 일이지만 임동원 수석이 제시한 전략구상을 도용하고 표절하여 미국식 표현으로 재구성한 데 불과하다고 농담한 것을 부각시킨 것이다.(같은 책 426-430)

임동원과 김대중이 만족할 만큼 한국 측 접근전략에 부합한다는 설명을 상대방이 듣기 좋게 말한 농담이다. 그러나 한국 아닌 미국 입장의 구상임은 물론이다. 북한이 부정적 반응을 보일 때에 대비한 비상조치사항과 상호주의 원칙이 강조되어 있음을 임동원도 적었다. 페리의 입장에 대한 오버도퍼의 설명이 더 확실한 이해에 도움이 된다.

 

스탠포드대학 교수로의 안락한 생활로 복귀하고 난 뒤 그는 긴급시만이라도 대북정책 조정자의 역할을 맡아달라는 클린턴의 요청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페리는 이렇게 말했다. “그런 일은 힘들고 성공 가능성도 희박할 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에 닥친 가장 위험한 고비였던 94년을 생각나게 한다. 우리는 또다시 그때만큼이나 위험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

페리 대북정책조정관은 북한 문제를 다룰 공조체제로 한--3자 협의회를 창설했다. 또한 남한대통령이 취하는 정책방향에 따라 미국의 정책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미 자신의 행정부가 지향하는 주요 정책목표대로 북한과 관계개선을 시작해놓고 있었다. (...)

그는 북한이 극도의 경제난을 겪고 있기는 하지만 붕괴의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북한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북한 정권을 바라보고 대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연이어 개최된 백악관 각료회의에서 페리는 더 이상의 현상유지는 불가능하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자신이 겪었던 94년의 경험을 내세워 북한이 몰락의 길로 접어들 경우 얼마나 끔찍한 위험이 닥칠지를 생생하게 설명했다. (<두 개의 한국> 606-607)

 

페리가 부탁받은 과제를 힘들고 성공 가능성도 희박하게 본 것은 엇갈린 입장의 관계자들을 두루 만족시킬 방안을 찾기 어렵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안으로는 클린턴 행정부와 의회의 공화당세력이 대립해 있고, 밖으로는 남한과 북한 사이의 엇박자를 자신이 국방장관으로 있을 때부터 보아 왔다. 부탁을 달가워하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어렵게 봤던 일을 결국 원만하게 해낸 데는 남한 정부의 변화가 가장 큰 도움이 되었다. 김영삼 시절에는 아무 일도 않고 있다가 뭔가 될 것 같으면 달려들어 방해나 놓던 남한 정부가, 북한도 받아들이기 좋은 방향을 적극적으로, 그리고 꾸준히 추진하고 있지 않은가. 남한의 정책방향에 미국 정책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는 말은 그럴 소지가 많았다는 말이다. 실제로는 남한의 제안을 받아들이더라도 겉으로는 아닌 척하는 시늉이 공화당 쪽 반발을 줄이기 위해 필요했을 것이다.

클린턴 행정부가 포용정책 추진에 어려움을 겪은 것은 가시적 성과가 잘 나오지 않은 때문인데, 가시적 성과로 가장 중요한 것이 남북한 간의 긴장 완화였다. 김영삼 정부의 대북 대결정책에 큰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은 미국 정부를 포용정책에 묶어놓는 데도 큰 힘을 발휘했다. 남한이 햇볕정책의 의지를 보여주지 않았다면 페리 조정관은 훨씬 더 비관적인 전망을 갖고 부정적인 내용의 보고서를 작성하게 되었을 것이다.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김대중과 임동원의 공로는 좋은 정책을 세우는 데 그치지 않았다. 1년 이상 북한의 호응이 없는 상태에서 수시로 돌발사건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이 정책을 꾸준히 지키고, 나아가 미국 등 관계국들을 적극적으로 설득해서 정책의 효과를 실현한 것은 뛰어난 용기와 큰 인내심이 필요한 일이었다. 한국의 정치상황이 그 자세를 지키지 못해서 남북관계가 많이 악화되어 있지만, 김대중 정부의 노력과 성취 덕분에 이만큼이라도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고마운 일이다.

 

Posted by 문천

 

 

북한과 전쟁이 불가피한 것이라면 나중보다는 북한의 핵무기 보유가 많지 않은 지금 싸우는 편이 낫다. 이 싸움에는 너무나 많은 것이 걸려 있으며 우물쭈물할 시기는 벌써 지났다.” 부시 행정부에서 백악관 안보보좌관과 국무부 정무차관을 지낸 브렌트 스코크로프트와 아놀드 캔터가 94615일자 워싱턴포스트지에 공동으로 올린 칼럼의 한 대목이다.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의 전면사찰을 거부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이 북한의 재처리시설에 대한 공격을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한 선제공격론이다. 당시 상황에서 극단적인 주장이었지만 불과 2년 전까지 미국 대외정책의 책임을 가지고 있던 인물들이 내놓은 것이었으며, 당시 미국 합동참모본부에서도 전쟁의 가능성을 신중하게 검토하고 있었다 한다.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이 칼럼이 나오던 날 판문점을 거쳐 평양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튿날 카터는 동행한 CNN 방송팀을 통해 김일성이 핵 동결 용의를 전해왔다고 발표했다. 윌리엄 페리 국방장관이 한국에 1만 병력을 추가로 투입하겠다고 밝힌 몇 시간 뒤의 일이었다.

 

카터가 찾아낸 돌파구는 몇 달 후 제네바 기본합의문으로 이어져 2년 가까이 계속된 북핵(北核) 위기를 종결지었다. 미국정부는 무능한 이상주의자카터의 방북에 기대를 걸기는커녕 북한에게 이용이나 당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극적이었던 위기해소의 돌파구였다.

 

제시 잭슨 일행이 몇 주 전 베오그라드로 향할 때도 미국정부는 별 기대를 걸지 않았지만 잭슨은 미군 포로 석방을 성사시켰다. 카터와 잭슨이 상대방에게 이용당한 면도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정부가 '깡패국가(rogue state)'의 합리적 선택능력을 과소평가해 평화의 기회를 스스로 놓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이 사례들은 보여준다.

 

94년 북미협상의 수석대표 로버트 갈루치는 당시 미국정부가 북한의 상황과 북한정부의 의도를 잘 알지 못하고 있었다고 회고한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은 10만 미군과 수십만 한국군이 희생될 수 있는 전쟁안을 검토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정부의 햇볕정책이 주변국들의 존중을 받게 된 것은 한반도 평화정책의 자주권 확보로서 큰 의미가 있는 일이다.

 

페리 전 국방장관이 긴장완화의 사명을 띠고 북한에 다녀왔다. 그의 방북이 좋은 성과를 거둔다면 앞으로 북한과의 관계에서 한국의 역할 증대가 예상된다. 북한이 깡패국가의 블랙리스트에서 벗어나 미국과 정상적 외교관계를 맺게 되면 한반도 평화는 한국인의 책임으로 돌아온다. 199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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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2014. 12. 1. 10:32

 

 

조조(曹操)20년간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하였으나 스스로 황제의 자리를 빼앗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그가 한()나라에 충성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가 죽은 지 몇 달도 안 돼 그 아들 비()가 황제자리에 올라 위()나라를 연 것은 이미 모든 준비가 돼 있기 때문이었다.

 

조조가 한나라를 핍박한 업보는 3대도 안가 그대로 돌아왔다. 그의 증손자 방()이 황제일 때 권신 사마사(司馬師)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그 후 십여 년간 사마 씨는 허수아비 황제를 멋대로 갈아치우며 권력을 농단하다가 결국 진()나라를 세웠다.

 

고분고분하지 않은 황제를 바꾸려고 사마 씨가 심복을 보내 퇴위를 권할 때 황제가 부덕한 증거로 일식(日食)이 거푸 일어난 일을 들먹였다. 청년 황제는 반박하기를, 일식은 규칙적으로 일어나는 자연현상이니 부덕의 증거가 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이런 합리적 주장으로 황제자리를 지킬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자연현상의 법칙성이 잘 밝혀지지 않았던 시절의 사람들은 특이한 자연현상이 인간세상의 큰 변화와 상응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대낮에 해가 가려지는 일은 천자의 권위에 중대한 문제가 있는 것으로 생각됐다. 그러나 3세기 초의 중국에서는 해의 궤도 황도(黃道)와 달의 궤도 백도(白道)가 겹칠 때 달이 해를 가려 일식이 일어난다는 사실이 밝혀져 있었다.

 

많은 자연현상의 법칙성이 밝혀진 뒤에도 그 정치적 상징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일식의 법칙성이 알려진 후 근 2천년 뒤까지 조선왕조실록 편찬자들은 일식을 충실히 기록했다. 천문학 데이터를 모으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시의 정치적 사건과 관련성을 검토하기 위해서였다.

 

19992000이나 아무 의미 없는 숫자일 뿐이다. 기원으로 삼는 예수 탄생시점에도 이설(異說)이 분분할 뿐 아니라 십진법이라는 특정한 기수법(記數法)을 쓰기 때문에 그런 눈에 잘 띄는 숫자가 지금 닥쳐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새로운 백년, 새로운 천년이 다가오고 있다는 긴장감을 느끼는 것은 역시 숫자의 상징성 때문이라고 이해할 일이다.

 

어떠한 이변도 합리적으로 풀이하는 과학의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백년만의 홍수도 50년만의 가뭄도 엘니뇨, 라니냐로 설명해 치우니 아무도 정치적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근래 심해진 기상이변이 온실가스 등 인간 행위의 결과인지는 과학도 밝혀주지 못하고 있다. 인류 전체의 부덕 때문은 아닐까, 불합리한 상징성이라도 떠올려본다.  199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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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