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농업을 시작하기 전 지구상의 인구는 백만에서 5백만 사이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여러 생물종들 틈에 끼어 채집과 수렵으로 살아가던 이 시절에 인류의 존재는 생태계에 큰 변화를 일으키지 않고 있었다.

 

농업문명이 열리면서 인구는 기하급수적 팽창을 시작해 1만년도 안 되는 시간에 1천 배 이상 늘어났다. 생활공간을 넓히고 먹이 획득을 쉽게 만드는 등 인류가 자신의 증식에 유리한 기술을 발전시켜 온 결과다.

 

기술발전은 인류문명의 핵심이다. 이것은 생물의 진화현상에서 연장된 것으로, 다른 생물종들의 생물학적 진화와 대비되는 기술적 진화라 할 수 있다. 생물학적 진화가 유전자에 기록되는 유전정보를 토대로 이뤄지는 데 반해 기술적 진화는 뇌에 기록되는 기술정보에 의존한다. 유전정보가 한 번 획득된 유리한 형질을 보존시켜 주는 것처럼 기술정보는 한 번 깨우친 유용한 기술을 잃어버리지 않게 해 준다.

 

기술적 진화는 생물학적 진화보다 훨씬 빠르다. 유전자의 정보입력은 새로운 개체가 복제될 때만 한 번씩 행해지는데, 두뇌의 정보입력은 끊임없이 이뤄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종이나 컴퓨터 같은 보조기억장치도 쓸 수 있다. 인류가 세계를 지배하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명의 발달과 그 결과인 인구 증가에 따라 인류의 존재는 생태계에 큰 변화를 불러일으켜 왔다. 다른 생물종들의 생존조건을 압박해 들어간 끝에 이제 인류 자신의 생존조건이 압박을 느끼기 시작하고 있다.

 

언어와 문자의 발명으로 농업문명을 세운 인류는 인쇄술의 발명으로 산업문명의 단계에 들어섰다. 산업문명의 막바지에서 인류는 컴퓨터라는 돌파구를 찾았다. 기술정보 축적과 유통의 새로운 수단으로서 컴퓨터는 인류문명의 성격을 또 한 차례 바꿀 계기를 마련해주고 있다.

 

물질자원을 자연으로부터 추출하는 데 중점을 둔 종래의 기술은 중후장대(重厚長大)를 추구했다. 그런데 컴퓨터기술은 여러 방면에서 경박단소(輕薄短小) 쪽으로 방향을 돌려주고 있다. 인간생활의 토대를 가능한 한 물질자원에서 정보자원으로 바꿔주는 것이다. 컴퓨터 덕분에 많은 종류의 기계가 덩치를 줄여 온 데서 확인할 수 있는 변화다.

 

문명은 카오스의 정복과정이라 한다. 문명과 기술은 인류가 존재하는 한 계속 발전할 것이다. 그러나 정복의 대상은 외부 물질세계의 카오스에서 인간 내면의 카오스로 바뀌고 있다. 전쟁의 양상에서도 물적 파괴력보다 심리적 측면이 더 중요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199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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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