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표 의원실에서 의뢰받은 작업은 역사학자로서 내가 공부를 통해 떠올린 생각 중에서 정책 판단에 참고가 될 내용을 정리해 달라는 것이다. ‘공부라는 일의 공적 측면보다 사적 측면을 중시해온 내게는 익숙지 않은 일이다. 공부란 것은 하는 사람이 좋아서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다. 내 멋대로 공부하기 위해 40세 나이에 교수직을 떠난 후 25년간 제도적 배경 없이 공부를 해왔기 때문에 제도적 요구에 부응하는 일에 익숙지가 못하다.

한편 공부한 내용을 응용한다는 전망은 무척 반가운 것이다. 나는 역사 공부의 본질적 역할이 정치의 참고에 있다고 생각한다. 학문의 지나친 제도화 때문에 이 역할이 흐려지는 데 아쉬움을 느낀다. 제도의 압력은 학문을 천박한 정략 차원에서 이용하려 들거나 정치적 중립성을 명분으로 학문의 심층적 문제 제기를 가로막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제도권 밖에서 연구 작업을 하는 동안 칼럼과 서평 등 언론매체의 글쓰기에 활동의 비중을 두고 지내게 되었다. 이 시대에 이 사회에서 성찰을 필요로 하는 과제들을 살피기 위해서였다. 교수직을 지키면서 제도권 학회 내에서 활동을 계속했다면 내 연구 분야는 동서교섭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도권의 관행적인 연구 분야 구분에 매이지 않은 입장에서 내가 공부해온 영역은 문명사라고 이름붙일 수 있을 것이다.

정치계에서 처음 받는 부탁이지만, 생각해 보면 내 공부의 보람을 크게 느낄 수 있는 일이다. 환자의 진단에서 병력(病歷)은 중요한 요소의 하나이지만 실제 임상에서 크게 주목받는 일이 드물다. 나타난 증세만으로도 충분한 진단이 가능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사회가 병들었다고 느낄 때도 조치에 앞서 진단이 필요하다. 여기에는 개체의 질병에 비해 병력의 중요성이 크다. 증세가 대개 복합적으로 얽혀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문명사회의 학술활동에서 역사학이 큰 비중을 가지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앞만 바라봐서는 현실을 볼 수 없다.

 

1987년의 민주화 이전에는 군사독재라는 외과적 문제가 이 사회의 모든 문제를 뒤덮고 있기 때문에 정밀한 진단이 아예 불가능했다. 현대사 연구의 봉쇄로 인해 역사의 성찰이 현재의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있었다. 사회의 병리적 문제들이 제대로 관찰될 기회를 갖게 된 것이 민주화의 가장 큰 혜택이다. 호소할 데 없던 환자가 의사 얼굴이라도 보게 된 셈이다. 근년 현대사 연구가 역사학 분야 중 가장 큰 발전을 본 것도 상황의 요구에 따른 일이다.

1987년 이래 지금까지 이 사회의 질병을 치유하고 건강을 향상시키기 위해 많은 이들이 큰 노력을 기울여 왔다. 하지만 역사학도의 눈에는 아쉬운 감이 있다. 문제를 충분히 깊게 살펴보려는 노력이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 병이 고황에 들었음을 깨닫지 못하고 겉으로 드러난 증세에만 매달리는 것 같다. 왜 눈길이 깊이 파고들지 못하고 있을까?

선진국을 모델로 보는 풍조에 이유의 상당한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선진국에서는 우리가 지금 겪는 문제들을 앞서 겪어봤기 때문에 그런 문제로 파탄을 일으키지 않는 자세가 갖춰져 있다. 물론 선진국에도 새로 닥치는 문제들이 끝없이 있지만, 그 문제들이 기존의 문제와 얽혀 합병증을 일으킬 위험이 적다. 말하자면 건강상태가 좋은 사람이어서 치료의 노력이 크게 필요하지 않다. 몸이 약한 사람이 그것을 따라 치료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뱁새가 황새 따라가서는 안 된다는 말이 그래서 있는 것이다.

선진국을 모델로 보는 한 적극적 치료가 필요하다고 보는 사람들조차 적극성에 한계가 있다. 그들은 미용적(cosmetic) 개혁이 안이하다고 비판하며 외과적(surgical) 혁명의 필요성을 외친다. 외과수술보다 더 적극적인 대책까지 모색하는 일이 드물다. 환자의 체질을 바꾸고 치료에 대한 자세를 세워주고 치유를 위한 환경을 조성하는 노력이 부족하게 된다.

선진국을 모델로 볼 때 또 하나 사고를 제약하는 문제가 있다. 선진국은 근대화에 먼저 성공한 나라들이기 때문에 근대적 가치기준과 사고방식에 얽매이는 경향이 강하다. 이 점이 역사의 고찰에는 한계가 된다. 근대화 이전의 문명을 봉건이니 야만이니 깔보는 관점으로는 고찰이 근대화 이후의 역사에 제한될 수밖에 없다.

내가 40년 넘게 역사를 공부해 온 목적이 지금 이 사회의 병세를 진단하는 데 있었던 것은 아니다. ‘문명사로 방향을 세운 후 30년 동안의 공부도 이 사회보다는 인류문명 전체를 살펴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이 사회의 병세가 심각한 단계에 와 있고, 내 공부가 이 사회에 집착하지 않고 쌓아온 것이기 때문에 지금 단계의 진단에 오히려 더 유용한 점이 있는 것 같다. ‘지금 여기의 문제에 매달려온 이들에게 참고가 되기 바란다.

 

자연에 대한 오만을 버린다면?

 

이 사회의 병세를 가장 가볍게 보는 사람들은 몇몇 사람에게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대통령을 비롯해서 중요한 역할을 더 적합한 사람들이 맡고 일하는 자세를 바로잡기만 하면 별 문제없을 것으로 본다. 이런 관점을 흔히 보수라 한다.

보다 깊은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제도를 바꿀 필요를 말한다. ‘진보의 관점이다. 그중에는 큰 틀을 지키면서 잘못된 부품을 갈아 끼우거나 정비하는 정도의 개혁을 말하는 이들도 있고, 틀 자체를 바꾸는 혁명을 말하는 이들도 있다.

문명사를 공부한 내 관점으로는 혁명을 말하는 극좌조차도 이 사회의 현실이 요구하는 변화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 혁명의 모델 역시 근대문명의 프레임(frame)’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프레임의 단적인 한계가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를 보는 시각을 바꾸기 어려운 것이다.

이 사회의 많은 병리적 문제의 원인으로 나는 자유권리에 대한 환상을 짚는다. 재벌처럼 특별한 사람들이 아랫집 개 짖는 소리 시끄럽다고 야구방망이를 휘두르는 자유나 승무원이 마음에 안 든다고 램프 떠난 비행기를 되돌리는 권리는 있을 법한 것이다. 하지만 재산도 적고 사회에 대한 공헌도 작은 나 같은 사람까지 그들과 견줄 만한 자유와 권리를 누리겠다는 것이 가당한 일일까?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상당한 수준의 자유와 권리를 누린다면 인간 이외의 존재에게는 희생을 강요하지 않을 수 없다. 인류가 존재해 온 수십만 년 동안은 물론, 문명을 가진 만물의 영장으로 지내 온 수천 년 동안까지도 인간이 자연에 대해 이처럼 오만한 태도를 일반적으로 보인 일이 없었다. 19세기 사람들은 인간이 과학을 발전시킨 업적 때문에 오만할 자격이 있다고 흔히 생각했다. 그러나 과학을 더 발전시킨 21세기에 와서는 과학을 잘 이해하는 사람일수록 종래의 오만을 깊이 반성하고 있다.

계몽주의시대 이래의 인권사상은 자연 정복의 꿈 위에 펼쳐져 왔고, 과학의 한계를 통해 인간의 한계를 인정한다면 거두어야 할 환상의 거품이 많이 끼어 있다. 18세기 이후 유럽에서 발전시킨 모든 정치사상에는 이 기준에 따른 재검토가 필요하다. 자본주의만이 아니라 공산주의, 사회주의, 심지어 민주주의까지도 모두 재검토를 필요로 한다.

재검토의 기준을 다듬어내기 위해 근대 이전, 전통시대의 가치관과 정치 원리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폐기된 지 오래된 가치관과 원리를 오늘의 세상에 그대로 복원할 수는 물론 없다. 하지만 자연과의 관계를 환상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던 자세를 배워야 한다.

한 가지 예가 봉건적사회조직방법이다. 보호와 충성의 개인적 종속관계를 중층적으로 결합하는 봉건체제는 계몽주의사상의 천부인권기준으로 미개한 제도다. 그래서 근대인은 봉건야만과 거의 동의어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하늘이 인간에게 그런 권리를 내린 일이 없다면? 인간은 자연의 제약을 감수해야 할 것이고, 그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각자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개인주의 원리보다 소규모 공동체 내에서 갈등을 최대한 소화시키는 봉건주의 원리가 더 적합한 선택일 수 있다.

 

내가 보수주의자인 이유

 

혼자 틀어박혀 공부하고 지낼 때는 내 정치적 입장에 대해 나 자신까지 포함한 누구도 문제 삼을 일이 없었다. 2008<뉴라이트 비판>을 발표할 때 비로소 입장을 밝힐 필요를 느꼈다. 굳이 따진다면 진보보다는 보수 쪽 같아서 그 이후 보수주의자를 자처해 왔다.

변화의 필요를 크게 보는 것이 진보주의고 작게 보는 것이 보수주의다. 그런데 나는 사람이나 제도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자유, 인권 같은 가장 기본적인 정치적 가치의 재검토를 주장하고 있으니 변화의 필요를 누구보다 크게 보는 것 아닌가? 그러면서도 어떻게 보수주의자를 자칭할 수 있는가?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보수주의자다. 2009년 중에 쓴 칼럼을 모아 책으로 낼 때도 이 문제를 고민하며 머리말에 이렇게 썼다.

 

나는 정말 이 세상에 근본적인 불만이 별로 없는 사람이다. 분노와 고통과 슬픔이 넘치는 세상이긴 하지만 인간세상이 원래 그런 것 아닌가? 그런 것 다 겪으면서도 대개의 사람들은 나름대로 보람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 아닌가? 더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사람들 말릴 생각은 없다. 하지만 분노와 고통을 오히려 불필요하게 늘리기 쉬운 일에 따라 나설 마음은 들지 않는다.

나 자신 불만이 매우 많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근년에 얻은 편안한 마음을 절실하게 느끼는 것이리라. 나 자신을 확! 바꾸고 싶은 마음이 많았기에 이 세상이 바뀌었으면 하는 욕심도 강했을 것이다. 지금은 더 풍족한 생활도 바라지 않고 더 훌륭한 사람 되고 싶지도 않고, 그저 편안하게 살고 싶다. 그러기에 사회에 대해서도 더 풍요로운 세상이나 더 정의로운 세상보다 그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조건만을 생각하는 것일 게다.

 

이 세상에 근본적인 불만이 없기 때문에 원칙상식을 중시하게 된다. 근본적인 불만이 있다면 더 좋은 원칙을 세우기 위해, 그리고 잘못된 상식을 바로잡기 위해 애쓰는 진보의 길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사회의 현상에 대해 아쉬움을 느끼면서도 대다수 사람들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원칙과 상식에 만족한다.

문제는 원칙과 상식이 제대로 표현되지 못하는 데 있다. 표현되지 못하기 때문에 현실에 작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양지(良知)를 가진 사람의 원칙과 상식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절대자유’, ‘절대인권같은 허깨비들이 세상을 휩쓸고 있는 것은 하나의 역사적 현상이다. 이 현상을 해명함으로써 원칙과 상식을 밝히는 것이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다.

내가 원하는 변화가 어떻게 보면 큰 것이지만, 없는 것을 만들어내자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본성을 회복하자는 것뿐이다. 그래서 나는 보수주의자다.

 

Posted by 문천

 

산업혁명은 농업혁명에 이어 인류 역사상 두 번째 맞는 존재양식의 큰 변화였다. 농업혁명 이전의 인류는 먹을 것을 자연에게서 얻어먹는단계에 있었다. 주면 먹고, 안 주면 굶고. 농업혁명으로 찾아먹는단계에 들어섰다. 자연이 던져주지 않아도 재주껏 먹이를 찾아 허기를 달래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산업혁명은 뺏어먹는단계를 열어주었다. 자연을 변형-훼손시키면서 식량과 에너지를 뽑아내 욕심을 채우게 된 것이다.

존재양식의 변화에 따라 사회의 조직 원리에도 변화의 필요가 일어났다. 농업혁명 이전 인류의 개체수는 지구상에 1천만 이하로 추정된다. 몇 억이 되었을 때 산업혁명이 시작되어 지금은 70억에 이르렀다. 말 그대로 세계가 좁아지는변화다. 좁아진 공간 안에서 어울려 살려면 사람들 사이에 관계를 맺는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

근대 산업사회로 넘어오면서 유동성 증가가 필요하게 된 것은 이 까닭이다. 농업혁명으로 채집-수렵사회에서 농업사회로 넘어올 때도 체제 변화가 필요했던 것은 물론이다. 그런데 농업사회에 적합한 체제가 안정되는 데는 무척 긴 시간이 걸렸다.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안정된 체제가 자리 잡은 것으로 이해된다.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전환에 따른 체제 변화에도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근대체제로 이해해 온 자본주의-민주주의체제가 사실은 산업사회에 가장 적합한 체제가 아니라 더 안정성 있는 체제를 모색하는 과정의 하나의 시행착오나 과도적 현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1972년 로마클럽보고서 <성장의 한계>로 환경과 자원의 한계 문제가 부각된 이래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 개념에 관심이 일어났다. 그 후 40년 동안 파국을 늦추기 위한 노력은 늘어나 왔지만, 확실한 해결책은 나타나지 않았다. 기존의 근대체제로는 해결이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근대’(postmodern)란 말을 흔히 하는데, 나는 ()근대를 생각할 필요도 있다고 본다. ‘근대중세처럼 상당기간 인류사회의 안정된 상태를 이루려면 지금까지 우리가 경험해 온 근대보다 훨씬 지속성 있는 체제여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근대를 ()근대’(pseudomodern)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꼭 이런 말을 쓴 논설을 아직까지 본 일이 없지만, 비슷한 맥락에서 근대의 개념을 재고하려는 시도는 꽤 보인다. ‘가근대-본근대를 하나의 가설로 내놓는 데는 별 문제가 없는 것 같다.

20세기 후반에 탈근대란 이름으로 시작된 변화를 근대화의 본 단계에 들어서는 길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지금까지 펼쳐진 근대를 완성된 근대로 보기 때문에 탈근대란 이름을 붙인 것인데, 돌이켜 생각하면 이 3백년의 시기에는 인류사회가 안정된 체제를 구축한 것이라고 보기 힘들다. 농업문명 시작 때도 오랜 시간에 걸쳐 대형화된 전쟁이 세상을 휩쓸던 상황을 여러 문명권에서 확인할 수 있다. 농업사회 체제 정착에 그런 과도기가 필요했던 것처럼 산업사회 체제 정착에도 수백 년의 과도기가 필요했던 것 아닐까?

 

()근대보다 ()근대를 생각할 때

 

과연 지금의 변화가 탈근대란 이름대로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흘러가 또 한 차례 격변의 시대를 인류가 겪게 될지, 아니면 지금까지의 시행착오를 넘어선 진정한 근대화로 안정된 세계체제를 이룩하게 될지, 지금 바로 단정할 수 없는 문제다. 그러나 생각을 본근대쪽으로 한 차례 모아볼 필요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탈근대라면 근대 이후가 어떤 것이 될지 판단할 근거가 별로 없는 반면, ‘본근대의 방향은 지금까지의 궤적에서 이어나가는 것으로 바라볼 수 있으니까.

근대화의 본질은 사회유동성의 증가에 있다. 중세체제가 한계에 접근하며 유동성 대폭 증가의 필요가 느껴질 때 그 대책이 여러 방향으로 강구되었다. 그중 유력한 대책으로 떠오른 것이 산업혁명을 앞세운 유럽식 근대화였다. 유동성을 일거에 급증시키는 극단적 대책인데, 어떤 변화든 변화 초기에는 극단적 대책이 흔히 채용되는 것이다. 기존 체제 파괴라는 단기적 과제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움직이는 시계추가 중간에 머물지 않고 반대편 끝까지 가는 것과 마찬가지 현상이다.

유동성의 급격한 증대는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유럽식 근대화가 궤도에 오르자마자 문제들이 인식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공산주의, 사회주의, 제도주의 등 대응책이 나왔다. 그러나 시계추가 관성을 가진 것처럼 기존 근대화세력이 반동력을 발휘했고, 그 결과 20세기 전반기 동안 두 차례 세계대전과 대공황을 겪게 되었다.

20세기 후반 공산주의 확장은 유동성 억제 필요에 따른 현상이었는데, 이 역시 시계추가 지나치게 반대쪽으로 간 결과였다. 유동성을 너무 줄였던 것이다. 그에 비해 일부 유럽국에서 자본주의체제에 사회주의 원리를 가미하는 중도적 정책이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환경 보호와 자원 절약을 지표로 하는 중도적 정책이 유동성을 적정선에 조정함으로써 산업사회의 지속가능성을 최대한 확보하는 효과적인 방향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이 기본 방향에 거스르는 반동 노선이 신자유주의다. 신자유주의는 유동성의 극단적 증대를 제창한다. 인간을 이기적 존재로 규정함으로써 파편화하는 데서 출발, 모든 인간적 가치를 자본의 가치에 종속시킴으로써 자본의 지배에 대한 일체의 저항을 없애는 데 목적을 둔 노선이다. 세계가 움직여가는 자연스러운 방향의 반대쪽으로 소수 기득권 집단의 이익을 위해 매달리는 것이기 때문에 반동 노선이라고 하는 것이다.

국내에서 뉴라이트의 이름으로 발표되어 온 신자유주의 논설을 보면 해외의 신자유주의자들에 비해서도 표현이 무척 노골적이다. 식민지시대를 겪은 사회에서 식민지 경험을 미화하는 주장이 이렇게 당당하게 횡행하는 것은 별난 일이다. 신자유주의 반동 노선에 대한 한국사회의 저항력이 매우 약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저항력이 약한 문제는 문명 전통의 단절이 심한 데서 오는 것이다. 단적인 문제가 엘리트계층의 부재 현상이다. 재산과 고등교육을 비교적 많이 누리는 계층이 한국사회처럼 바깥만 쳐다보고 있는 것은 정상적 현상이 아니다. 이 사회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너무 적다.

 

자연과의 평화 없이 세계평화 없다.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해 온 근대화가 산업사회 초입에서의 한 차례 방황이라고 본다면, 본 단계의 근대화는 어떤 방향의 변화일지 무엇을 보고 판단할 수 있을까? 나는 두 가지 지표를 생각한다. 하나는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이고 하나는 인간사회의 조직방법이다. 물론 두 지표는 서로 얽힌 것이다.

종래의 근대화에서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아무런 절제나 균형을 생각지 않았다. 인간의 일방적 지배만 생각했다. 그래서 근대적 인간관에서는 인간의 책임보다 권리만 생각하게 되었고, 이에 입각한 근대사회 조직방법에서는 조화와 균형을 확보하는 메커니즘이 취약하게 된 것이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라는 관념 자체가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 때문에 성립되는 것이라는 환경론자 머레이 북친의 말에 나는 공감하는데, 이 말을 뒤집어서 하면 더 중요한 뜻이 담길 수 있다고 본다. 자연과의 관계에서 균형감각을 잃은 것이 인간사회의 가치관 획일화와 극단적 분화현상을 불러온 것이라는 생각이다.

1945년 원폭 투하에 충격을 느낀 아인슈타인은 인류와 문명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세계정부 창설에 달려 있다고 했다. 현실성 없는 발언이란 비판에 이렇게 대꾸했다고 한다. “세계정부라는 생각이 현실적이지 않다면 우리 미래에는 단 하나의 현실적 전망만 있을 뿐이다. 바로 인간에 의한 인간의 전면적 파괴다.”

아인슈타인이 말한 세계정부란 국가정부가 국가 내의 질서에 책임을 가지는 것처럼 세계적 질서에 책임을 가지는 주체가 나타나는 정치적 세계화를 뜻하는 것이다. 우리가 지난 20여 년간 이야기해 온 세계화는 따져보면 경제적 세계화만을 뜻한 것이다. 진정한 세계주의(globalism)’를 바라본 것이 아니라 국가의 파괴를 통해 개인주의를 강화하는 데 목적을 둔 것이었다.

국가가 국민의 권리와 책임을 규정하고 보장하는 것처럼 구성원의 권리와 책임을 관리하는 세계정부의 존재가 인류문명의 지속을 위해 필요하다고 하는 아인슈타인의 주장은 지당한 것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근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무정부상태가 계속되어 온 가장 중요한 이유가 그 동안 초강대국의 위치를 누려온 미국의 역할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무정부상태 지속이 자국에 유리하다고 미국은 판단했고, 그러한 미국의 정책을 견제할 만한 힘이 지구상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 문제에 대한 미국의 태도를 보여주는 두드러진 특징 두 가지만 지적한다. 하나는 미국의 1인당 에너지 소비량(11.2kw)이 세계 평균(2.1kw)의 다섯 배가 넘는다는 사실이고(2011년 기준), 또 하나는 개인의 총기 보유가 허용된다는 사실이다. 미국은 세계체제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하는 턱없이 높은 자원소비 수준을 계속해 온 나라고, 문명국답지 않게 힘의 원리에 거의 아무런 절제를 가하지 않는 나라다.

2008년의 금융공황은 미국 패권 중심의 세계적 무정부상태가 한계점에 도달했다는 신호였다. 중국의 정책 선택이 미국의 정책 선택에 상당한 압박을 가하는 상황이 그 시점부터 시작되었다. 그 압박의 수준은 냉전시대의 소련보다 훨씬 더 심대한 것이고, 지금도 계속 커지고 있다. 변화의 추세를 외면하는 미국의 정치적 관성 때문에 대안으로 떠오르는 중국의 입장이 반사적으로 강화되는 형국이다.

 

아인슈타인의 꿈이 이뤄지려는가?

 

중국 역시 힘을 키우면 패권주의 성향을 나타낼 걱정이 있다고도 한다. 이미 패권주의 성향을 드러내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미국의 패권주의와 비슷한 것이 될 염려는 없다고 본다. 미국이 전 세계를 상대로 갑을관계를 맺은 것 같은 압도적인 힘을 중국이 가지게 될 것 같지도 않고, 중국이 미국과 달리 문명의 전통을 가진 나라라는 점도 생각해야 한다. 유럽식 근대화의 출발에 맞춰 만들어진 미국이라는 나라는 유동성 과잉 시대의 산물로서 절제의 메커니즘이 원래 취약한 사회다. 중국이 설령 큰 힘을 갖게 되더라도 홉스봄이 말한 극단의 시대를 답습하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세계정부는 이미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근대국가처럼 꼭 확고한 체제를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조약과 협약의 집합체 형태가 될 수도 있다. 자원과 환경에 관한 협약의 확대와 강화를 위한 노력에 대해 지금까지 미국의 저항이 뚜렷했다. 미국의 저항력은 그 동안 약해져 왔고, 앞으로도 계속 약해질 것이다.

70년 전 아인슈타인이 말한 당위가 이제 현실이 되고 있다. 얼마나 뚜렷한 현실이 언제까지 이뤄질지 지금 장담하지 못해도, 지금까지의 전 지구적 무정부상태와 다른 상황이 펼쳐질 것은 분명하다. 무조건적 절대자유가 누구에게도 허용되지 않고, 자연과의 관계에서나 인간관계에서나 절제가 보편적으로 요구되는 상황을 내다본다.

산업사회가 지구의 한 모퉁이에 만들어지기 시작했을 때 산업화 선발주자들의 세계정복에는 아무런 거침이 없었다. 그들의 세계정복은 인간의 자연정복과 짝을 이루는 변화였다. 2중 구조의 이 정복사업은 균형과 조화를 고려할 필요 없이 일방적으로 3백 년간 진행되었다. 1980년대 중국의 개혁-개방에 뒤이은 급속한 산업화는 한편으로는 이 정복사업의 한 차례 완성에 접근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세계가 그 다음 단계에 직면하도록 만들었다.

미국 신자유주의자들은 온 세계를 향해 억울하면 출세하라!”고 외쳐 왔다. 자기네의 자원낭비 라이프스타일을 모든 인류에게 따라 하라고 권해 왔다. 그런데 막상 13억 중국인과 11억 인도인이 정말 그 라이프스타일을 그대로 따라 한다면? 아무도 책임질 수 없는 파국이 명약관화하다.

자연의 제약을 무시하던 인류의 오만을 버릴 때가 되었다. 그 오만으로 빚어진 절대자유와 절대인권의 환상이 98%에 대한 2%의 지배를 뒷받침해 왔다는 사실도 밝혀지고 있다. 자연의 제약을 순순히 받아들인다면 인간사회의 조직 원리도 자유와 인권에 대해 보다 겸손한 태도를 취하게 될 것이다. 균형과 조화가 중시되는 새로운 세계체제의 필요성이 현실정치에 얽매이지 않은 아인슈타인의 눈에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세계정부 형성은 전 지구적 차원의 공공성 확충

 

정치적 세계화를 바라보는 움직임은 국제주의(internationalism)’란 이름으로 나타나 왔다. 그 이념을 아인슈타인은 세계정부로 표현했지만 그보다 세계연방이란 말이 더 많이 쓰인다. 국제주의는 민족주의와 맞서는 것도 아니고 기존 주권국가의 폐지를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민족주의와 주권국가를 부정하는 것이라면 국제주의가 아니라 사해동포주의(cosmopolitanism)’의 범주에 들어갈 것이다.

앞으로 나타날 세계정부가 형태에 있어서는 지금의 유엔보다 더 치밀한 조직을 당장 필요로 할 것 같지 않다. 국제주의가 한껏 고양된 시점에서 유엔이 탄생했기 때문에 세계정부의 전망이 유엔 조직에 많이 담겨 있었다. 그 후 미국 패권의 부각에 따라 유엔의 세계정부 조직이 공동화(空洞化)하고 만 것이다. 세계정부 형성은 유엔을 중심으로 국제적 조약과 협약이 확대-강화되는 과정을 통해 진행될 것으로 기대된다.

형태가 어떠하든 세계정부 형성이란 전 지구적 차원의 공공성 확충을 의미한다. 어떤 문명 어떤 사회에서든 지속가능성은 공공성에 바탕을 둔다. 주먹의 힘이든 돈의 힘이든 정보의 힘이든 힘의 작용에 절제를 가하는 것이 공공성이다. 절제 없이 힘이 날뛰는 정글 상태로는 어느 문명이나 사회도 오래갈 수 없다.

농업혁명이나 산업혁명처럼 거대한 변화에는 상당 기간의 과도기가 필요하다. 새 체제의 건설보다 옛 체제의 파괴에 주력하는 기간이다. 대형전쟁 등 낭비적이고 불합리한 현상이 많이 일어나지만 자원 공급의 급격한 증가 덕분에 당분간 계속된다. 이 단계에서는 공공성의 원리가 극도로 약화된다. 그러나 자원 공급 증가 추세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무뎌지게 되어 있고, 그에 따라 공공성이 회복된 안정적인 체제가 자리 잡게 된다.

근대성의 핵심 요소로 꼽혀 온 개인주의가 과도기의 특징이다. 개인주의는 원자론적 세계관에 근거를 둔 것이다. 공공성의 확충은 원자론적 세계관으로부터 유기론적 세계관으로의 전환을 뜻한다. 원자론적 세계관이 뒷받침하는 절대적 자유와 절대적 인권의 관념이 유기론적 세계관으로는 상대화의 대상이 된다. 자유도 인권도 현실의 인간관계 속에서 제한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멋진 신세계의 꿈을 잃는 것이 고통스럽게 느껴질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이 역사를 통해 실제 어떤 형태로 존재해 왔는지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전제체제니 봉건체제니 속박 속에 살던 상태를 근대인은 미개한 것이었다고 깔보지만,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종이 상당 수준의 속박 속에서 살아갈 특성을 진화시켜 왔다. 그런 특성 없이는 자연조건의 속박 속에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

절대인권과 절대자유는 마치 인간이 자연조건의 속박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처럼 생각한 환상의 산물이다. 사람들이 그 환상에 빠져 문명 발생 이래 사회를 보호해온 공공성의 원리를 잊어버렸을 때 힘을 가진 집단이 아무 견제 없이 힘을 휘두를 수 있었고 그로 인해 대형전쟁을 비롯한 온갖 근대적참극이 일어났다.

환상을 버리고 속박을 받아들여야 한다. 문제는 어떤 성격, 어떤 수준의 속박을 어떤 방법으로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이다. 적합한 방법을 찾지 못하면 공공성이 확충된 새 체제가 지옥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고, 적합한 방법을 찾는다면 인간의 본성을 지키면서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생존과 생활의 양식을 추구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분명한 것은 환상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최악의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점이다.

 

Posted by 문천

 

 

 

전국시대 후기까지 중국에서는 이웃나라보다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끼리 전쟁을 벌이는 일이 많았다. 생산력 발달에 따라 군대가 커지고 군량이 쌓여 전쟁 벌일 여력이 생기기는 했지만 전면전이 되기 쉬운 이웃나라끼리의 전쟁은 꺼렸던 것이다. 제한된 규모의 원정군을 보내 제한된 범위의 전쟁을 벌이는 이런 경향을 근교원공(近交遠攻)’이라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진()나라가 원교근공(遠交近攻)’으로 정책을 바꿨다. 소양왕(기원전 307~251년 재위)이 범수(范睢)의 헌책을 받아들인 것이라고 전해지는데, 먼 나라와의 전쟁을 삼가면서 이웃나라 공략에 국력을 집중하는 정책이었다. 소양왕이 이 정책을 채택한 후 50년이 안 되어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기에 이른다.

전쟁은 파괴적이고 소모적인 사업이다. 아무리 적이 밉더라도 가용자원에 한계가 있으면 전쟁을 쉽게 벌일 수 없고, 벌여도 오래 계속할 수 없다. 춘추시대의 계절존망(繼絶存亡)’은 전쟁을 적게 하고 작게 하는 질서의 원리였다. 전국시대의 급격한 생산력 발전이 전국(戰國)’ 상황을 가능하게 하고, 마침내 정복전쟁을 통한 천하통일로 전국시대를 끝내기에 이른 것이다. 그 마지막 단계가 원교근공’, 즉 총체적 전면전의 시기였다.

진시황의 천하통일은 진나라의 강한 힘만이 아니라 당시 인민의 평화 염원 덕분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 염원의 바탕에는 자원의 한계에 대한 인식이 깔려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평화에 대한 염원이 충분히 크지 않았다면 진나라에 대항하는 각국의 전쟁 노력이 더 끈질기게 지속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진시황의 통일로 안정된 평화가 바로 이뤄진 것이 아니다. 백년 후 한 무제(기원전 141~87년 재위) 때 흉노 정벌을 거쳐 어느 정도 안정된 천하체제가 자리 잡았다고 나는 본다. 전국시대를 벗어나고도 새로운 안정을 얻기까지 백년의 시간이 걸린 것이다.

중국의 전국시대 3백년과 비슷한 것이 지금까지의 근대 3백년이 아닐까. 전쟁이 많아지고 커지다가 결국 총체적 전면전의 시기까지 겪었다. 산업혁명의 생산력 발전이 가능하게 해준 일이다. 이 유추를 더 이어나간다면, 2차 세계대전으로 세워진 미국의 패권을 진시황의 통일과 비슷한 단계로 볼 수 있을까? 그렇게 본다면 다음 단계는 초-한 쟁패의 양상일 것이다. 전국시대의 체제를 복원하려는 항우 세력과 새로운 질서를 형성하려는 유방 세력의 대결과 비슷한 양상을 떠올리게 된다.

다시 원교근공과 근교원공의 비교로 돌아가 본다. 원교근공은 극히 소모적인 정책이었다. 패권 추구 세력이 방대한 자원을 동원할 수 있을 때 이 정책을 구사할 수 있었고, 그 결과는 문자 그대로 우승열패’, ‘적자생존을 통한 패권 통합이었다.

세계대전은 자원공급의 한계 앞에서 원교근공의 양상으로 벌어졌다. 멀리 떨어진 나라들끼리 손잡고 이웃나라들과 전면전을 벌였다. 세계대전이 끝난 후 냉전 단계에서도 이 양상은 계속되었다. 지구 반대쪽에 있는 나라와 혈맹관계를 맺고 같은 민족과 이웃나라를 원수처럼 대한 한국은 그 가장 대표적 사례의 하나였다.

그러나 냉전체제 안에서도 근교원공의 양상으로 바뀌는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고, 냉전 종식을 계기로 그 흐름이 커지고 강해졌다. 유럽통합이 가장 두드러진 사례다. 냉전기의 동-서 대결만이 아니라 제국주의시대의 민족국가 대결까지 극복하고 초국가적 국제질서를 도입하는 노력이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전쟁이 수지맞는 사업이 된 시대

 

급격한 기술 발전은 원교근공의 양상을 일으킬 수 있다. 기술 발전은 종래 활용하지 못하던 자원의 활용을 가능하게 해주므로 생산력을 높여준다. 자원 공급이 원활해질 때는 보통 때 지속적으로 행할 수 없던 낭비적 활동을 상당기간 계속할 수 있다. 전쟁이 그런 활동의 하나다. 권력자가 전쟁을 벌이고 싶은 마음은 언제든지 가질 수 있지만 자원 공급이 여의치 않으면 함부로 전쟁을 일으킬 수 없고, 일으키더라도 오래 계속할 수 없다. 근대유럽에서 전쟁의 양상이 바뀌는 모습에서도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8세기까지도 전쟁은 그리 수지맞는 사업이 아니었다. 예산 규모가 파악되는 근세 잉글랜드 경우를 보더라도 웬만한 전쟁에는 경상 수지보다 더 큰 비용이 들었고, 전리품을 충분히 얻을 만한 확실한 승리를 거두지 못하면 정권이 위기에 처하곤 했다. 전쟁 비용을 귀족 영주들에게 빌렸다가 왕의 직할지를 떼어서 갚는 일이 다반사였다. 17세기부터 상업자본가가 전쟁 비용을 담당하는 비중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1756-63년의 7년전쟁에 투자한 잉글랜드 자본가들은 엄청난 배당으로 거부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긴 쪽의 이득이 진 쪽의 손해보다 크지 않았다. 당사자 모두를 놓고 보면 제로섬이나 마이너스섬 게임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19세기 들어와서는 차츰 플러스섬 게임의 양상이 나타났다. 이길 때의 이득이 질 때의 손해보다 큰 경우가 많아진 것이다.

이것은 군사적 케인스주의가 타당하게 적용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대량생산 기술이 급속도로 발달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이것은 자원 활용도가 낮은 상태에서 소비의 촉진으로 경제 활성화의 길을 여는 케인스주의 정책노선이 효과를 가지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전쟁 수행을 위한 소비와 파괴 복구를 위한 수요가 생산력 증대를 촉구했고, 그에 따른 기술 발전으로 생산비 자체를 대폭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18세기 말 혁명기 프랑스의 징병제 실시 이후 유럽에서 전쟁의 양상이 크게 바뀌었다. 나폴레옹이 20년 가까이 유럽을 호령할 수 있었던 것도 군대 조직방법과 전쟁 수행방법을 앞장서서 바꿨기 때문이었고, 이것은 모든 유럽국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었다. 종래의 전투가 적군 전투원의 살상을 목적으로 이뤄진 것과 달리 공간을 파괴 대상으로 하는 포격전이 전투의 주종이 되었다. 맹목적 파괴가 전투의 목표가 된 것이다.

이 전투방식의 변화에는 화약의 존재가 큰 역할을 했다. 유럽인들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화약을 사용해 온 중국인들이 전쟁에서의 화약 사용을 크게 늘리지 않은 것이 유럽인들보다 덜 똑똑해서였을까? <삼국지연의>에 제갈량이 남만 정벌 중 화약을 전투에 사용한 뒤 그 전술의 참혹성을 반성하는 이야기가 있다. 중국에는 화약 사용 기술의 발전을 억제하는 사상적 요인들이 작용했던 것이다.

생산력의 급격한 발전 속에서 전쟁이 성행한 일은 중국 고대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춘추시대에서 전국시대로 넘어오면서 전쟁이 크게 늘어나고 전쟁 수행방법이 전면전의 양상으로 바뀌었다. 춘추 질서가 무너진 것도 생산력의 급격한 발전에 원인이 있었던 것이며, 그 질서가 무너졌다고 해서 당시 중국 전역이 전쟁을 일상적으로 겪는 상태가 2백여 년이나 계속된 사실 역시 생산력 발전이 아니고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철기의 보급으로 생산력이 급속히 향상되는 상태가 아니었다면, 전쟁 수행에 그토록 많은 인력을 투입하고 큰 파괴를 초래하는 상황이 그렇게 오래 계속될 수 없었을 것이다.

전쟁이 성행하는 상황에서는 사상의 동향도 그 영향을 받는다. 제자백가 가운데 메이저급 학파를 보더라도 전쟁에 반대하는 도가나 전쟁을 최소화하려는 유가에 비해 전쟁을 꺼리지 않는 법가사상이 전국시대에 힘을 썼다. 평화주의를 앞세운 묵가까지도 방어전 전략을 가르침의 중요한 내용으로 삼았다. 전쟁이 줄어든 한나라 때에 와서야 도가와 유가가 역할을 키우게 되었다.

전쟁을 찬양한 헤겔과 니체가 19세기 유럽 사상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것도 음미할 만한 사실이다. 20세기 대표적 양심으로 꼽히게 될 토마스 만조차도 1차대전 발발 시에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평화란 시민사회를 부패시키는 것이고, 전쟁 속에 정화(淨化)와 해방, 그리고 거대한 희망이 있는 것 아닌가?”

 

다극체제, 양극체제, 1극체제, 이제는 무극체제?

 

19세기 유럽의 전쟁 확대 추세는 20세기 초반의 두 차례 세계대전으로 극한에 이르렀다. 자본주의체제의 관성 때문에 파괴의 추세가 적정선을 넘어가버린 것이다. 19세기 말 이래 자원 공급의 폭발적 증가추세는 둔화되어 있었다. 2차 세계대전 후의 냉전이라는 기묘한 긴장상태는 빠듯한 자원 공급조건 아래 저강도전쟁(low intensity war)을 통해서라도 낭비적 자본주의체제를 유지하려는 노력의 결과였다. 전쟁의 낭비적 성격은 군비(軍備)와 파괴 두 형태로 나타나는 것인데 냉전은 파괴를 억제하되 군비를 유지하는 방식이었다.

냉전체제 아래 원교근공의 틀은 제국주의시대보다 완화된 수준에서 유지되었다. 유럽에서는 제국주의시대에 국경선마다 잠재적 전선이 형성되어 있던 것과 달리 두 개의 블록 사이에만 대립이 존재했으니 근교원공의 양상에 접근한 셈이다. 그러나 유럽 밖에서는 원교근공의 양상이 크게 줄어들지 않았다. 자본주의체제 유지를 위한 군사적 대결을 계속하되 대결의 부담을 제3세계에 떠넘긴 데 냉전체제의 요체가 있었던 것이다.

군사적 긴장은 자본주의체제의 원동력인 착취를 쉽게 해주는 조건이다. 20세기 문명의 가장 중요한 자원인 석유를 놓고 생각해보자. 저유가체제를 통한 석유의 대량소비는 20세기 자본주의체제의 기반조건이었고 냉전체제의 군사적 위협이 유가 상승을 억제해주었다. 최대의 원유 수출지역인 중동에는 이스라엘을 둘러싼 군사적 긴장이 여기에 보태졌다.

1970년대의 유가파동이 저유가체제의 한계를 보여줬고, 이에 따라 전 세계적 경제위기가 일어났다. 10여 년 후 공산권 붕괴는 냉전체제의 효용이 다한 사실이 밝혀진 결과였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적 자본권력은 냉전 해소를 통해 세계적 긴장의 완화가 아니라 증대를 도모한 것이고, 신자유주의 노선의 본질이 여기에 있다.

20세기를 통해 제국주의체제에서 냉전체제로, 그리고 냉전체제에서 미국 1극체제로 옮겨온 것은 자본주의체제의 유지에 갈수록 불리해지는 여건을 무릅쓰고 자원 착취의 조건을 지키는 길을 찾아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불리한 여건 속에서 착취의 조건을 지키려면 그만큼 더 극단적인 방법을 취할 수밖에 없다. 방법의 극단성이 현실조건을 견뎌낼 수 없는 단계에 이르면 자본주의체제의 효용성이 소진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동력을 얻는 수력발전에서 비유를 얻을 수 있다. 발전량은 댐의 높이와 터빈을 지나는 물의 양에 비례한다. 물이 넉넉할 때는 댐이 그리 높지 않아도 충분한 동력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유량이 줄어드는데도 같은 동력을 얻으려면 댐의 높이를 늘려야 한다. 그런데 댐의 높이가 어느 한계를 넘어서면 수압이 전체 구조를 무너트리게 되는 것이다.

동구공산권 붕괴 후 미국은 1극체제 수립을 시도했다. 그것은 네오콘과 신자유주의의 배후에 있는 세계적 자본권력의 의지를 대행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21세기에 들어와 벌어지고 있는 일들, 특히 2008년의 금융공황을 보면 그 시도는 좋은 성과를 얻지 못하고 있다. 제국주의시대의 다극체제, 냉전의 양극체제에 이어 최후로 시도한 1극체제가 댐의 높이를 감당할 수 없게 만든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1극체제가 성공하지 못한다면 그 결과는 무극체제가 될 것인가? 자본주의체제가 요구하는 대립의 틀이 사라진다는 의미에서는 무극체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무극체제라 하여 전쟁 없는 세상을 바랄 수는 없다. 인간사회에 분쟁은 따르게 마련이다. 하지만 전 세계적 권력구조 때문에 당사자들이 원치 않는 대결에 휘말려드는 상황은 벗어날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한반도를 예로 들자면, 남북의 인민이 서로를 싫어하고 믿지 못해 다툴 수는 있어도 외부 세력의 이익을 위해 대결을 계속할 필요는 없어지기 바라는 것이다.

 

이웃과의 협력’, 그 중요성을 왜 잊고 지냈나?

 

새뮤얼 헌팅턴이 <문명의 충돌>에서 말한 문명권의 통합 추세가 바로 근교원공의 원리에 따라 일어나는 현상이다. 유럽 기독교문명권만이 아니라 다른 문명권에서도 통합 추세는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그런 추세에서 유럽 통합이 앞서 나가는 것은 근교원공의 실익(實益)을 가장 투철하게 인식하기 때문일 것이다. 원교근공의 폐단을 가장 철저하게 겪은 지역이니까 인식이 투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문명권 통합의 추세는 한국을 둘러싸고도 진행되어 왔다. 중국과의 교류 확대가 단적인 예다. 한국사회는 냉전시대의 의식 상태를 벗어나는 데 뒤졌기 때문에 근교원공의 원리를 능동적으로 추구하지 않았다. 목전의 경제적 이익만을 보고 중국과의 교류를 늘려온 것이다. 지구 반대쪽과의 교역보다 이웃나라와의 교역에 이로운 점이 많다는, 너무나 자명한 사실은 그 과정에서 스스로 드러나 왔다.

이제 와서야 인문(人文) 유대같은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이웃과의 긴밀한 관계를 능동적으로 추구할 필요가 비로소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도 물적 교류가 늘어난 현실을 따라오지 못하는 미약한 인식이지만, 이 인식은 앞으로 자라날 수밖에 없다. MD 참여를 비롯한 반동-수구적 정책이 얼마나 자해적인 것인지도 차츰 깨닫게 될 것이다.

한국 산업계의 가장 큰 성공으로 꼽히는 휴대폰 분야에 충격을 일으키고 있는 샤오미 사태를 보며 착잡함을 느낀다. 다각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중국 산업 발전과정에서 국가정책이 우선순위에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 한국과의 경제관계를 협력관계로 중국 당국과 산업계에서 인식한다면 우선순위 조정에서 한국 산업에 대한 배려의 여지가 있다. 그런데 한국 정부나 산업계에서 그런 인식을 이끌어내려는 노력이 조금이라도 있었던가?

이런 상황에서 중국보다도 더 가까운 이웃, 북한과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북한을 이웃이라고 부르는 데 반감을 느끼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세상에서 제일 가까운 부부간에도 이웃을 대하는 것 같은 조심성을 가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부부간이니까아무렇게 대해도 된다는 방심이 관계를 해칠 위험이 있다. 조심할 일은 조심하면서 관용과 배려의 마음이 저절로 일어나기를 바라는 편이 낫다.

북한인과 한국인은 같은 민족이지만 오랫동안 격리되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살아오면서 서로 다른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에 익숙해져 있다. 지금의 서로 다른 점을 비판하기보다 관용하면서 앞으로 관계를 키우며 더 많은 경험을 공유하다 보면 민족으로써 통하는 점들이 저절로 살아나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통일이란 말도 마음속에 묻어두고 싶다. 너무 큰 욕심을 담은 그 말보다 통합정도에 노력을 모으며 통일의 씨앗이 스스로 자라나기를 기다리는 마음을 지키고 싶다.

그 동안 닫네 마네 말이 많았지만, 나는 개성공단을 만들어낸 남과 북의 여러 관계자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북한과의 관계에도 근교원공 원리의 적용이 바람직한 것이고 또 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을 개성공단이 분명히 보여줘 왔다. 공단 폐쇄를 비롯해 남북관계를 경색시키고 싶어 하는 세력이 여러 해 동안 정권을 끼고 획책해 왔음에도 공단을 쉽게 없애지 못한 것은 그것이 자해행위라는 사실이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이다.

지금 단계에서는 남북관계의 특수성을 내세우기보다 근교원공 원리의 연장선 위에 우선 세워놓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고 본다. 중국과의 긴밀한 관계도 굳이 목표로 내걸지 않은 채 경제적 득실만 따라오면서 오늘에 이르지 않았던가. 북한과의 관계도 같은 기준으로 운영해 가다 보면 근교원공 원리의 실익이 저절로 드러날 것이고, 그런 뒤에는 그 특수한 의미도 생각할 여유가 생길 것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