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傳敎방법으로서의 科學활동

 

永樂帝北京으로 천도한 뒤에도 나라는 南京에 있던 중앙기구들을 없애지 않고 형식적으로 남겨두었기 때문에 공식적 정부기관들은 北京에 새로 만들어진 것과 南京에 남겨진 것의 두 벌이 있었다. 天文曆法을 관장하는 欽天監도 그런 예의 하나였다. 리치는 南京에 자리 잡은 후 欽天監을 유심히 살펴보았는데, 그 연구와 업무 수준을 매우 낮게 보았다:

北京曆算學者 관서가 있는 것처럼 南京에도 같은 관서가 있는데, 이 관서의 훌륭한 점은 그곳 학자들의 학식보다 건물의 규모에 있으니, 이 학자들은 아는 것도 없지만 과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더더욱 무지몽매한 사람들이다. 겨우 하는 일이란 名節을 밝히도록 달력을 손보고 날짜에 干支를 붙이는 정도가 고작이다. 어쩌다가 推算이 잘못된 경우, 일어난 현상이 자기네 계산에서 조금도 벗어난 것이 없다며 착오에 대한 모든 책임을 별들에게 덮어씌운다. 地上에서 일어날 일에 대한 하늘로부터의 경고라느니 뭐니 하고는 그럴싸한 일을 끌어 붙여 자기네 책임을 회피한다.”[386]

[386] <中國誌> 329.

그러나 欽天監의 관측기구에 대해서는 경탄해 마지않았다: “이곳에는 천문관측을 위한 기구, 기계들이 비치되어 있는데, 철로 주조된 것이며 크기나 유려한 디자인에 있어서 유럽에서 보고 들은 바 같은 용도의 어떤 기구보다 훌륭한 것들이다. 이 기구들은 2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눈비를 맞고 온갖 날씨를 겪어 왔지만 그 원래의 웅장한 모습이 조금도 손상되지 않고 있다. 그 중 큰 것이 네 가지가 있다.”[387]

[387] <中國誌> 329.

이처럼 관리자의 수준과 기구의 수준 사이에 차이가 큰 까닭을 이렇게 파악했다: “이 많은 기구들의 한 가지 잘못은 南京 위도가 321/4임에도 36도에 맞춰져 있는 것이다. 아마 다른 지점에서 사용하려고 만들었던 것을 천문학을 모르는 사람들이 위치와 차이를 생각지 않고 갖다놓은 것 같다. 후에 리치 신부는 北京에서 이와 비슷한 기구들, 아니, 같은 匠人들이 만든 것이 분명한 그 복제품들을 보았다. 몽고족이 중국을 지배하던 시절에 만들어진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되며, 이것을 설계한 사람은 유럽 천문학도 알고 있던 외국인이었을 것이다.”[388]

[388] <中國誌> 331.

리치의 고찰은 대체로 정확한 것이었다. 리치가 본 천문기구들은 나라 때(1270) 郭守敬의 주도하에 만들어진 것으로,[389] 오늘날까지 대부분 紫金山 천문대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리치는 네 가지 기구를 설명했는데, 그 내용을 <元史> 天文志내용[390]과 대조해 보면 渾天象, 玲瓏儀, 高表, 簡儀 넷에 해당된다.[391] 郭守敬의 기구들이 사용된 곳은 북위 36도의 平陽(지금의 산서성 臨汾)이었는데 明代 欽天監 기구들은 이것을 옮겨오거나 복제한 것으로 보인다.[392] 그러나 北京에 기구들을 비치한 후 南京과의 위도 차이에 맞춰 조정했다는 기록을 볼 때,[393] 南京 기구들이 다른 곳 위도에 맞춰져 있었다고 하는 사정은 이해하기 어렵다.

[389] <元史> 164 郭守敬 列傳7-8. 郭守敬(1231-1316)元 世祖 때 과학자로, 算術水理 등 기술 분야에 두루 정통하여 여러 분야에 공을 세웠는데, 가장 큰 업적은 1280년부터 시행된 授時曆을 준비한 일이다. 授時曆은 이슬람 관측기술을 포함하여 당시 기술조건을 최대한 융합하여 만든 성과로, 중국 전통역법의 절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된다. 그 준비에 許衡王恂郭守敬과 함께 참여했다고 하지만, 기술적인 면은 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藪內 淸, <中國天文曆法>(東京, 1969) 139-145, 陳遵嬀, <中國天文學史> 1(上海, 1973) 227-229.

[390] <元史> 48, 2-9.

[391] <中國誌> 중문판 302에 세 번째 기구를 仰儀로 비정한 것은 잘못된 것 같다.

[392] <明史> 25 天文志15에는 1437南京에 있던 기구들을 복제해서 北京에도 비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正統二年 行在欽天監正皇甫仲和奏言 南京觀象臺 設渾天儀簡儀圭表 以窺測七政行度 而北京乃止於齊化門城上觀測 未有儀象 乞令本監官 往南京 用木做造 赴北京 以較驗北極出地高下 然後用銅別鑄 庶幾占測有憑 從之 明年冬 乃鑄銅渾天儀簡儀於北京.

[393] 같은 책 16: 明年冬 監正彭德淸又言 北京北極出地度 太陽出入時刻 與南京不同 冬夏晝長夜短 亦異 今宮禁及官府漏箭 皆南京舊式 不可用 有旨 令內官監改造.

리치는 紫金山의 기구 가운데 유럽 기구와 비슷한 것이 있다고 생각했고, 중세 후기의 유럽 관측기술과 元代의 중국 관측기술이 다함께 이슬람의 영향을 받은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자기가 본 놀라운 기구들이 유럽 천문학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元史> 天文志에는 至元 4(1267)札馬魯丁[394] 여러 가지 관측기구를 만든 일이 西域儀象이라는 소제목 아래 나와 있다.[395] 이슬람 천문학이 郭守敬授時曆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사실도 알려져 있다.[396]

[394] J Needham은 이 사람을 Jamal al-Din ibn Muhammad al-Najjari라는 마라가(Maragha)의 천문학자로 비정했다. J Needham, Science and Civilization in China, v. (Cambridge, 1959): 372-373.

[395] <元史> 48, 10-12.

[396] 藪內 淸, 中國におるイスラム天文學, <東方學報(京都)>19(1965), 65-77.

중국 천문학은 당나라 때 인도 천문학을 받아들여 하나의 절정기를 지낸 후, 元代에 이르러 이슬람 천문학을 도입, 융화함으로써 또 한 차례 절정기를 구가했다. 郭守敬이 만든 授時曆은 당시까지 중국 전통역법에서 제기되어 온 제반 문제들을 획기적 수준에서 해결한 것이었기 때문에 백년 후 왕조가 바뀐 뒤에도 몇 개 常數만 바꿔 大統曆이라는 새 이름으로 明朝 말기까지 그대로 사용되었다.[397]

[397] 陳遵, <中國天文學史> 1: 226-230, 藪內 淸, <中國天文曆法>(東京, 1969) 145-147.

따라서 明代 천문학은 前代의 기술체계를 이어받아 운용하는 범위를 넘어 독자적 발전을 꾀할 계기를 가지지 않은 채로 오랜 세월을 보냈고, 그 운용이라는 것은 실제 관측과 관계없이 曆書에 적힌 내용을 정해진 방법에 따라 계산하는 작업에 불과했다. 이런 사정을 리치는 이렇게 기록했다:

중국인들은 도덕철학 뿐 아니라 천문학과 여러 수학 분야에서도 상당한 성취를 이루었다. 그들이 헤아리는 별의 숫자는 우리 천문학자들보다 400개나 더 많은데, 늘 보이지 않는 희미한 별들까지 계산에 넣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천문가들은 천체현상에 수학 원리를 적용시키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는다. 그들이 열중하는 것은 日月食 시각과 행성 운동을 계산해 내는 일이며 이런 추산에도 많은 착오가 따른다. 끝으로 그들의 관심은 우리가 점성술이라 부르는 분야에 집중되는데, 지상의 모든 일이 천체 현상과 상관관계를 가졌다고 믿기 때문이다. 서쪽에서 들어온 사라센인이 수리과학에 관한 약간의 지식을 중국에 전해주기는 했지만 확실한 수학적 증명에 기초를 둔 것은 거의 없다. 그들이 전해 준 것은 曆法을 수정하고 행성과 일반 천체들의 운동을 계산하는 데 쓸 계산방법의 목록 정도였다. 현 왕조의 창시자는 세습적 전문가 외에는 아무도 점성술을 연구하지 못하도록 금지했다. 그 까닭은 천체의 운동을 알게 되는 사람이 제국의 질서를 무너뜨릴 능력을 가지게 되거나 그럴 의향을 가지게 될 것이 두려운 때문이었다.”[398]

[398] <中國誌> 30-31.

리치가 가져온 유럽 물화 가운데 중국인의 관심을 크게 끈 것으로 기계시계와 해시계가 있었다. 기계시계는 천문학 지식과 직접 관계는 없는 것이지만, 시간이라는 것이 천체 운행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것으로 통상 생각되기 때문에 시간 관리의 특수한 기술을 가졌다는 사실이 천문학에도 깊은 조예가 있으리라는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한편 해시계는 중국에서도 오래전부터 사용되어 온 것이지만, 리치가 가져오거나 만들어 준 해시계는 천문학과 수학 분야에서 유럽의 최신지식을 응용한 것이어서 천문학과 관련하여 중국인들의 큰 관심을 끌었다. 리치가 韶州에서 南京 禮部상서 王弘誨를 만났을 때 상서가 北京에 함께 가서 曆法 고치는 일을 맡아 달라고 했다는 것도[399] 이런 평판을 바탕에 둔 것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399] 앞 제13.

16055, 예수회 간부로 있던 알바레스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리치는 다음과 같이 부탁했다:

신부님께 끝으로 한 가지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요청해 왔음에도 아직까지 아무런 회답을 얻지 못하고 있는 일입니다. 이 일은 매우 중요하고 선교에도 유리한 일이 되겠습니다만, 천문학에 조예가 깊은 신부, 아니면 修士라도 한 분을 파견해 주십사는 것입니다. 굳이 천문학에 조예가 깊은 분이라고 하는 것은, 기하학이나 해시계, 觀測儀 같은 것은 저도 웬만큼 다룰 수 있고, 또 읽어볼만한 책도 가지고 있는데, 이런 것들보다 중국인들이 정말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행성의 운동과 日月食을 계산하는 등 曆書 편찬에 필요한 기술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황제가 해마다 큰 비용을 들여 200명의 사람들을 동원, 그 해의 曆書를 편찬해 내고 이 일을 위해 欽天監이라는 관서를 두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이 나라에서 쓰이고 있는 曆法大統曆回回曆 두 가지인데, 日月食 추산에서 후자가 조금 낫다고는 하지만 정확치 못하기는 일반입니다. 그들은 법칙에 따라 숫자를 계산해 낼 뿐 그 뜻을 알지 못하며, 잘못된 결과가 나올 경우 옛사람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일이 없다고 주장할 따름입니다. 저는 이곳에서 地圖, 해시계, 地球儀, 觀測儀 등 기구와 책들을 지어 보임으로써 최고의 수학자라는 평판을 얻었습니다. 천문학에 관한 책을 별로 가진 것이 없어서 포르투갈어로 된 항해용 天體曆 정도만을 보면서도 日月食 推算欽天監보다 더 정확하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때문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책이 모자라서 중국의 曆法을 고쳐주지 못한다고 해도 그들이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제 건의대로 천문학자 한 분을 北京으로 보내 주신다면, 우리 曆法을 중국어로 번역하는 일은 제게 어렵지 않은 일이니 중국 曆法의 교정에 착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 聲價는 높아질 것이고 입국도 쉬워질 것이며, 이곳에서 우리 사업은 더 안정되고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400]

[400] <書信集> 301-302.

肇慶시절 리치가 처음으로 중국 지식인들의 경탄을 자아낸 것은 세계지도 덕분이었는데, 이 지도가 중국인에게 놀라웠던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중국이 세계의 거의 전부를 차지한다는 중국인의 일반적 믿음과 달리 세계 육지의 십분의 일 정도 밖에는 점하지 않는다는 주장이었다. 직접 실증될 수 없는 주장이기는 했지만, 중국인들에게 얼마만큼 알려져 있던 인접지역 묘사가 그럴싸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상당한 신빙성을 가질 수 있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리치가 소개하는 문명의 규모가 더욱 더 커다랗게 느껴지게 됨에 따라 신빙성도 늘어났을 것이다.

중국인들은 지구의 크기를 모르기 때문에, 그리고 자기 나라에 대한 엄청난 자존심 때문에 이 세상에 중국 이외에는 존중받을 자격이 있는 나라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다. 국가의 규모, 행정과 학문의 수준에서 다른 모든 민족을 야만인 정도를 넘어 마치 이성을 가지지 않은 동물처럼 여긴다. 군주, 왕조, 문화를 가진 나라는 지구 위에 중국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無知 위에 쌓아올린 자존심이 클수록 진실이 밝혀질 때의 모욕감은 더 클 수밖에 없다. 우리 세계지도를 처음 봤을 때 그들 중 무식한 사람들은 이것을 비웃었지만, 학식 있는 사람들은 달랐다. 그들은 특히 경도와 위도, 적도와 회귀선 등을 유심히 보았고, 다섯 氣候帶의 대칭성 설명과 많은 민족들의 관습에 관한 기록을 보고는 많은 地名이 중국 옛 기록과 잘 합치하는 것을 확인하고 이 지도에 나타난 세계의 모양과 크기가 사실과 같다는 것을 인정했다.”[401]

[401] <中國誌> 167.

또 하나 놀라운 것은 세계의 모습을 球形으로 규정하고 曆算學에 쓰이는 것과 같은 좌표계, 즉 경도와 위도로 지구 표면을 파악하는 방법이었다. 이런 방법의 타당성은 남북으로 250리를 이동하는 데 따라 北極高度, 즉 위도가 1도씩 변한다고 하는, 중국에서도 오래 전부터 알려져 있던 사실로 뒷받침되었다. 중국인들도 지구의 모습이 둥글 것이라는 생각은 오래 전부터 해 왔지만 하나의 관념에 그쳤을 뿐, 기하학적 연구법을 적용시킬 만큼 확실한 사실로 검증해내지는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리치가 유럽 과학을 중국인에게 소개함에 있어서 무엇보다 유클리드의 전수를 앞세운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말하자면 리치가 자랑스럽게 내놓을 지식체계를 전달하기 위한 言語로 유클리드의 기하학이 필요했던 것이다. 韶州에서 瞿太素를 가르칠 때도 유클리드로 시작했고, 南京에서 젊은 수학자들을 가르칠 때도 그러했으며, 北京에서 徐光啓와 만나서는 1년 이상 공을 들여 유클리드의 평면기하학을 함께 번역했다.

1600進貢을 명분으로 두 번째 北京으로 향할 때 중국 曆法을 교정하는 일에 마음속으로 큰 목표를 두고 있었던 것은 그가 천문서적을 짐 속에 소중히 챙긴 사실에서 알아볼 수 있다:

짐을 되찾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 한 토막이 있었는데, 그들은 이것을 신의 섭리가 또 한 차례 작용한 것으로 보았다. 馬堂이 두 번째 짐을 뒤질 때 뽑아낸 물건 가운데는 중국 曆法의 잘못을 바로잡는 일을 황제가 맡길 경우에 대비해서 리치 신부가 各方으로 모아놓았던 천문서적이 몽땅 들어 있었다. 이 나라에는 실제로 운용되지 않은지 오래된 법이 하나 있었는데, 궁중 학자를 제외한 누구라도 천문을 가르치거나 배우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것이었다. 옛날 이 법을 만든 까닭은 천제 운행을 이해하는 사람이 있을 경우, 자신의 운을 뒷받침하는 天象을 포착해서 나라를 빼앗으려 들 염려가 있다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馬堂은 흔적만 남아 있는 이 법에 따라 이 책들을 다른 예물과 분리해서 상자에 넣어놓고 그 위에 쪽지를 붙여 稅監 馬堂이 외국인 利瑪竇의 짐에서 이 책들을 적발하였다. 국법으로 금지된 물품이므로 황제께 보고 드려 처분을 받을 때까지 별도로 경호 하에 보관한다고 표시해 놓았다.”[402]

[402] <中國誌> 370-371.

신의 섭리로 馬堂의 고발은 면할 수 있었지만 여러 해 지나도록 曆法 교정의 명령은 받아내지 못했다. 16055월 알바레스 신부에게 보낸 앞에 인용한 편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전문가 아닌 리치가 충분한 자료도 없이 착수하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섣불리 일을 꾸미지 않고 있었던 것인지도 알 수 없다.

그 대신 리치가 노력을 집중한 것은 <幾何原本> 번역이었다. 이 책은 다른 무엇보다 曆法 작업을 위해 필수적인 준비물이었다:

徐光啓가 가진 생각은 신앙과 도덕에 관한 책들이 이미 나온 이상, 이제 유럽의 과학에 관한 책을 만들어 앞으로 공부해 나갈 준비로 삼되, 신기한 내용과 견실한 증명을 아우르도록 해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일을 하기로 되었는데, 중국인들이 가장 좋아할만한 책은 유클리드의 <幾何原本>이었다. 그 까닭은 중국인들이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도 수학을 높이 여기기 때문이었는데, 그들의 학습방법은 온갖 명제를 다 다루면서도 증명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 결과로 수학에 관한 한 누구든지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은 채 생각나는 대로 무슨 소리든지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와 반대로 유클리드에 있어서는 명제들이 질서정연하게 제기되고 확고무비하게 증명되기 때문에 아무리 고집불통인 사람이라도 납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403]

[403] <中國誌> 476.

리치는 徐光啓와 함께 1606-07년에 걸쳐 <幾何原本>의 앞부분, 평면기하학을 다룬 여섯 장을 번역해서 한 책으로 간행했다. 처음에 擧人의 자격을 가진 유생 한 사람이 선교소에 함께 살면서 한편으로는 신부들에게 말을 가르쳐 주면서 이 작업을 하려 했지만 제대로 진척이 되지 않았다. 리치는 특출한 재능을 가진 학자가 아니면 이 일을 해낼 수 없을 것이라 하였고, 이에 徐光啓가 응하여 이를 해낸 것이다. 작업 결과에 리치가 얼마나 만족했는지는 여기서 또한 주목할 사실은 중국어가 그 어휘에 있어서나 용법에 있어서나 우리 과학의 개념들을 제대로 표현해 내는 데 전혀 아무런 결함이 없다는 것이라 한 것으로 알아볼 수 있다.[404]

[404] <中國誌> 477.

16105월 리치가 죽을 때까지 리치가 청원한 수학자는 중국에 파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해 12(중국력으로 11월 초하루) 日食 예보에 큰 착오가 나타났을 때 五官正 周子愚大西洋에서 귀화한 龐迪我熊三拔 등은 曆法에 매우 밝고 가지고 있는 曆書 가운데 중국 문헌에서 미치지 못한 것이 있으니, 번역해 올리도록 하여 쓸 만한 것을 고르도록 함이 마땅하겠습니다.” 상소하고 禮部시랑 翁正春 등도 洪武 초년에 回回曆科를 둔 예에 따라 龐迪我 등에게 測驗을 시키도록 해 주십사고 청하여 황제의 윤허를 얻었다.[405] 리치가 韶州에서 王弘誨를 만났을 때(1592 또는 1593)부터 십여 년에 걸쳐 꾸준히 키워온 꿈, 유럽의 수학과 천문학을 중국 曆法에 도입하는 사업은 이렇게 그가 죽은 직후 실현에 접근하게 되었던 것이다.

[405] <明史> 31, 15-16.

리치가 세상을 떠난 직후 서양인을 중국 曆法校正에 동원할 논의가 처음 공식적으로 제기된 것이 우연한 일이었을까? 전문 수학자와 서적을 보내달라는 요청이 충족되지 않은 상태에서 섣불리 중국의 公事에 끼어들지 않으려는 리치의 조심스러운 태도가 사라짐으로써 주변사람들의 보다 적극적인 태도가 겉으로 드러나게 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406] 논의의 계기가 되었던 16101215일의 日食 경우 예보가 30분 내지 한 시간 가량 틀렸다고 하는데,[407] 리치는 중국의 경도를 측정하기 위해 日食月食을 꾸준히 관측하고 있었으며,[408] 1603511일의 日食 예보에도 14분 내지 43분의 착오가 있었던 것을 확인하고 있었다.[409]

[406] 리치의 조심성과 입교자들의 열의를 극명하게 대비시키는 대목이 있다(<中國誌> 396): “리치 신부는 <天主實義>의 원고를 검토해 달라고 이 사람(馮應京)에게 보냈다. 그 목적은 사실 원고를 바꾸는 데보다 馮應京의 마음을 바꾸는 데 있었다. 그는 그 글이 몹시 마음에 든다고 회답하고 즉각 출판하도록 허락해 달라고 청했지만, 리치 신부는 출판 전에 다시 더 다듬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직 따먹기에 덜 익은 과일이니 햇볕 속에 좀 더 놓아두어야겠다고 대답했다. 이에 대해 馮應京은 아주 재미있는 故事로 응수했는데, 기독교의 사명에 아주 적절한 이야기였다. 옛날 어떤 사람이 고질적인 만성병에 시달린 끝에 명이 경각에 달려 있는데, 지나던 사람이 보고는 그 병을 고칠 수 있는 처방을 안다고 장담을 하더라는 것이다. 지금 환자 상태가 급박하니 장담만 할 것이 아니라 빨리 손을 써 달라고 주변사람들이 청하자, 이 사람은 좋습니다. 내 이제 집에 가서 곱게 먹을 갈아 멋들어진 처방전을 써 오리다하더라고. 이에 사람들이 지금 필요한 것은 잘 듣는 처방이지 멋들어진 처방전이 아니라오.’ 했다는 것이다.”

[407] <明 神宗實錄> 477, 6-7: (3811) 丙寅 禮部上言 先據欽天監 奏稱本年十一月壬寅朔 日食七分五十七秒 未時正一刻初虧 申時初三刻食甚 酉時初刻復圓 食甚日躔 尾宿一十五度八十五分一十三秒 至救護日隨 據該監五官靈臺郞劉臣等呈稱 先該春官正戈謙亭等推算 到本年此月壬寅朔日食 候至未正三刻觀見 初虧西南 申初三刻食甚正南 復圓酉初初刻東南 約至有七分餘 食甚日躔黃道 測在尾宿度分 臣等移文 以時刻之差責之 臣等復閱邸報 見兵部職方司員外郞范守所稱親驗日晷 未時正一刻不虧 正二正三正四刻俱不虧 至申初二刻 始見西南略有虧形 正二刻方食甚 又以分數 不至七分五十餘秒.

[408] 경도 측정의 기술적 어려움에 대해서는 앞 제22절에서 언급하였음.

[409] Bernard, Scientific Contribution: 64.

리치가 죽을 때 北京에 함께 있던 선교사는 판토하(龐迪我, 1599 입국)와 우르시스(熊三拔, 1606 입국)였기 때문에 두 사람 이름이 周子愚의 상주문에도 거명되었다. 판토하는 1600년 리치가 북행할 때부터 그와 함께 있으면서 수학 등 리치가 필요로 하는 여러 가지 기술을 배우고는 있었지만,[410] 직접적 선교사업을 주로 담당하고 있었다. 한편 우르시스는 1607년에야 리치와 합류했지만 로마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한 바 있고,[411] 중국에 오기 전 고아에서 1년간 수학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고 한다.[412] 161012월의 日食을 정밀하게 예측한 것도 우르시스였다.

[410] Pfister: 19번에는 풍금 타는 법, 시계 손보는 법, 위도 측정법, 해시계 만드는 법 등이 나열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위도 측정법은 천문관측에서 초보 중의 초보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것이 굳이 언급된 것을 보면 그 수준 이상의 고급 천문관측 기술은 습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이 된다.

[411] Pfister: 30.

[412] Bernard, Scientific Contribution: 74.

우르시스는 리치 사후 수학자와 서적을 보내달라고 로마에 조르는 일도 물려받았다. 그는 16109월 로마의 마스카레나스 신부에게 편지로 이런 요청을 했다.[413] 이 편지에서 그는 北京에 있는 천문학 서적이 클라비우스의 Gnomica, Sphaera, Astrolabe 세 가지뿐이라고 했다고 했는데, 세 책 모두 중국어로 번역되었다.[414] 리치로부터 중국선교단 지휘책임을 물려받은 롱고바르디 역시 161011월과 161210월 거듭해서 예수회 총장에게 수학자와 서적의 파송을 요청하면서 이 사업이 성공할 경우, 두어 명 선교사들이 공식적으로 과학사업에 종사하고, 그동안 다른 선교사들은 각 지방에서 편안하고 안전하게 교인들을 돌볼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했다.[415] 당시 선교사들은 徐光啓, 李之藻 등 고위 입교자들의 도움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이 원하는 대로 리치의 요청을 되풀이하게 되었으리라고 이해된다.

[413] P d'Elia, Galileo in China: 21.

[414] <表度說>, <環容較義>, <乾坤體義>로 번역되었다. <幾何學原本>의 대본 역시 클라비우스의 주석본이었으므로 리치의 천문학-수학 지식이 클라비우스의 울타리 안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415] P d'Elia, Galileo in China: 22.

앞에 인용한 萬曆 3811丙寅日(1611. 1. 8) 禮部 上言에 이어 禮部는 이듬해 5庚子日(1611. 6. 11) 다시 글을 올려 曆法 修改를 청하고 大西洋 歸化人曆法을 거둘 것을 청했다.[416] 明 太祖回回曆을 거두기 위해 曆書 번역사업을 벌인 일을 따르도록 청한 것이니,[417] 그야말로 왕조 중흥을 꾀하는 획기적 사업을 제안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서양 曆法의 역할은 이 修曆사업에 기술적 요소를 단편적으로 보충해 주는 제한된 의미만 가진 것이었다. <疇人傳> 利瑪竇의 말처럼 그들의 하늘에 대한 공부가 모두 얻은 바가 있으니, 이를 가려서 쓰는 것은 를 잃으면 오랑캐로부터라도 이를 구한다는 뜻[418]이라 할 수 있다.

[416] <明 神宗實錄> 483 1-1: 治曆明時 國家要務 萬曆元年至今 日食凡十餘次 其差或一刻 或二刻 多至四刻而止 卽交食有差 恐推算未的 宜講究者一也 前代若干年修改一次 漢凡修改五次 宋凡修十八次 金至元末凡修改三次 本朝二百餘年未經修改 豈能必無差訛 宜講究二也 又欽監官正周子愚言 大西洋歸化龐迪我熊三拔等 携有彼國曆法 參互考證 固有典籍所載者也 亦有典籍所未備者 當悉譯以資採用 乞照洪武十五年 命翰林李种 吳伯宗 及本監靈臺郞海達兒 兀丁 回回大師馬黑亦沙 馬哈麻等 譯修西域曆法 例取知曆儒臣 率同監官 將諸書盡譯 以補典籍之闕

[417] 이 일을 참고할 수 있는 자료로 吳伯宗, <(明譯)天文書>(四部叢刊 廣編 32) 에 이런 기록이 있다: 爰自洪武初 大將軍平元都 收其圖籍 經傳子史凡若干萬卷 悉上進京師 藏之書府. 萬機之暇 卽召儒臣進講 以資治道. 其間西域書數百冊 言殊字異 無能知者. 十五年秋九月癸亥 上御奉天門 召翰林臣李种 臣吳伯宗 而諭之曰 天道幽微 垂象以示人 人君體天行道 乃成治功. 古之帝王 仰觀天文 俯察地理 以修人事 育萬物 由是文籍以興 彛倫攸敍. 邇來西域陰陽家 推測天象 至爲精密有驗 其緯度之法 又中國書之所未備 此其有關於天人甚大. 宜譯其書以時披閱 庶幾觀象 可以省躬修德 思患預防 順天心 立民命焉. 遂召欽天監靈臺郞臣海達兒 臣阿答兀丁 回回大師臣馬沙亦黑 臣馬哈麻等 咸至于廷 出所藏書 擇其言天文陰陽曆象者 此際譯之. 且命之曰 爾西域人 素習本音 兼通華語 其口以授儒. 爾儒 繹其意 緝成文焉. 惟直述 母藻繪 母忽. 臣等奉命惟謹 開局於右順門之右 相與切摩 達厥本指 不敢有毫髮增損.

[418] <疇人傳> 44, 20: 其於天學 皆有所得. 采而用之 此禮失求野之義也.

이로부터 7개월 후(같은 해 125, 서력 1612. 1. 7) 禮部에서 다시 上奏하여 修曆사업을 청했는데,[419] 그 내용은 전번 上奏와 거의 같은 내용이고, 한림원 簡討 徐光啓原任 南京 공부원외랑 李之藻를 등용할 일이 추가되었다. 그러나 이 일은 神宗 재위 중 뚜렷한 진척을 보지 못했다. 만력 46(1618) 10欽天副監 周子愚上言하여 7년 전 논의를 진척시킬 것을 청했고,[420] 2년 후, 光宗을 거쳐 熹宗이 즉위한 후 修曆사업을 총괄할 적임자로 지목되어 오던 刑雲路修曆에 대비한 上言에서 臣今犬馬齒七十有三 老病矣 止求進言 非求進身이라 하여[421] 전통역법을 위주로 修曆사업을 펼칠 종래의 대책이 한계에 이른 것을 보여준다.

[419] <明 神宗實錄> 490, 1-1. 최소자, 17, 18세기 서구문화의 유입에 관한 몇가지 문제(<중국학보> 31, 1991)“1611년 흠천감의 회회력관은 일식을 오측하여 명 조정은 서양인을 흠천감에 관리시키고 역법을 개수하였다고 한 것은 근거를 찾을 수 없었다. 1629徐光啓가 주재하는 曆局이 개설된 뒤에야 선교사들이 동원되었으며, 그때도 흠천감에 정식으로 소속되지는 않았다.

[420] <明 神宗實錄> 575, 11.

[421] <明 熹宗實錄> 7, 14-16.

 

리치가 중국 진입 직후에는 중국의 과학수준에 상당히 높은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사실이 15849월 편지에 나타나 있다. “중국인의 지혜는 그 영리한 발명품에 나타나 있으니, 그 문자로 말하자면 그들이 또 이 문자를 사용해서 의약학, 물리학, 수학, 천문학 등 학문을 일으켜 놓은 것을 보면 참으로 총명하고도 박학하다. 日月食 추산은 매우 분명하고 정확한데, 사용하는 방법은 우리와 전연 다른 것이다. 특히 산학을 비롯해서 각종 기술과 기계학의 수준은 진정 놀라운 것이다. 종래 유럽과 아무런 왕래가 없었는데도 우리가 전 세계의 힘을 모아 이루어낸 것과 대등한 성과를 자기네 경험만을 가지고 얻어낸 것이 아닌가!”[422]

[422] <書信集> 52.

그런데 <中國誌> 4권에는 중국 과학수준을 훨씬 낮춰 보는 견해가 실려 있다:

리치 신부가 전 중국 철학계를 경탄시킨 것은 중국인이 모르고 있던 유럽 과학을 통해서였으며, 그 신기한 내용의 진실함을 확실한 추론으로 증명해 보임으로써였다. 중국인들은 오랫동안 모르고 지내던, ‘지구는 둥글다는 사실을 리치로부터 배웠다. 그 전까지 그들은 天圓地方이라는 낡은 구절을 우주의 기본원리처럼 붙잡고 있었다. 지구가 무거운 물체를 끌어당긴다는 사실, 즉 중력의 힘이 낙하체를 땅으로 향해 이끈다는 사실도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지구의 모든 부분에 사람이 살고 있으며, 서로 반대편에 사는 사람들이 어느 쪽도 떨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月食이 생기는 까닭이 지구가 달과 해의 중간을 가로막는 데 있다는 사실도 리치가 가르쳐 줄 때까지 모르고 있었다. 月食의 원인에 대해 그들이 가지고 있던 황당무계한 설명을 보면 달보다도 그들의 마음이 더 심한 어두움에 싸여 있었던 것 같다. 달이 태양을 정면으로 대하게 되면 너무나 기가 질려 빛을 잃는 것이라고 어느 성현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태양 복판에 구멍이 하나 있어서, 달이 이 구멍의 정면을 지나갈 때는 빛을 받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다. 태양이 지구보다 크다고 하는 사실도 그들은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이었지만 쉽게 수긍하려는 사람들도 있는 것은, 옛날 수학자들이 어떤 기구로 측정한 결과 태양의 크기가 몇 천 리가 넘는다고 기록해 놓은 책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들이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것은 눈으로 보기에 그토록 작은 별들 가운데 지구보다 큰 것들도 있다는 사실이다. 天球들이 단단한 물질로 이루어져 있고, 별들은 정처 없이 떠다니는 것이 아니라 天球에 박혀 있다는 것, 天球는 열 개가 포개져 있으며 서로 다른 힘에 의해 회전한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그들의 원시적인 천문학에는 周轉圓離心圓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은 北極高度가 위도에 따라 변한다는 사실도 몰랐고, 적도 반대편에서는 밤과 낮의 길이가 반대가 된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423]

[423] <中國誌> 325-326. 원리상으로는 프톨레마이오스 우주관의 천구설을 지키고 있지만 눈으로 보기에 그토록 작은 별들중에 지구보다 큰 것도 있다고 한 것은 코페르니쿠스 우주관의 성과가 혼입된 것으로 보인다.

중력 설명은 뉴턴 이전의 일이니 아리스토텔레스 이론에 따른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우주 구조에 대해서는 코페르니쿠스 학설이 나온 지 50년이 자났어도 프톨레마이오스 이론을 지키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이렇게 중국 과학을 낮보는 태도가 1595년 편지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중국에 들어온 지 10년 남짓 지나는 동안 처음 가졌던 동경의 마음이 씻겨나가고, 반대로 유럽 과학을 가지고 정복할 대상으로서 그 약점을 열심히 파악하는 모습이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424]

[424] <書信集> 171-190에는 15951028일에 쓴 두 편의 서신이 실려 있다. 그 하나는 친구인 코스타 신부에게 보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수신인이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두 편지 내용이 거의 똑같은 것으로 보아 다른 친구 신부에게 보낸 것으로 생각된다.

리치의 서양과학 소개는 거의 천문학과 수학 분야에 한정되어 있었다.[425] 실제로 리치가 펴낸 과학 분야 책들은 <幾何原本>을 위시해서 <測量法義>, <同文算指>, <勾股義>, <環容較儀>, <乾坤體義>, <渾蓋通憲圖說>, <萬國輿圖> , 천문학, 수학, 우주론에 집중되어 있다. 이런 편향성은 로마대학에서 리치의 교육배경에도 얼마간 영향 받은 것이겠지만,[426] 선교 목적에 입각해서 의도적으로 선택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렇지 않다면 동료들의 불평을 무릅쓰고 徐光啓, 李之藻 등에게 수학을 가르치는 일에 그토록 시간을 집중해서 쓸 수 없었을 것이다.[427]

[425] H Bernard, "Notes on the Introduction of the Natural Sciences into the Chinese Empire", The Yenching Journal of Social Studies, -2(1941) 220-221, 224-225: “중국에 대한 리치의 과학 분야 공헌은 수학과 그 응용분야들에 있어서는 상당한 것이었지만, 자연과학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없었다.”

[426] H Bernard, Scientific Contribution, (Peking, 1935), Ch.2 "Ricci’s Scientific Training".

[427] Hashimoto 전게서: 11에는 앞 44절에서 인용한 <中國誌> 476, 徐光啓가 과학서적의 번역을 제한했다는 대목을 들어 리치보다도 중국인들의 의지에 따라 과학 소개가 이루어진 것으로 해석했지만, 너무 피상적인 해석으로 보인다. <疇人傳> 44에서 선교사들의 과학 분야 업적을 논한 가운데 우르시스의 <泰西水法>이 단연 두드러진 칭찬을 받았는데, 농사에 공헌하는 것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런 것을 보아도 리치가 단순히 중국 지식인의 요구에 수동적으로 응하는 입장이었다면 하필 수학-천문 분야에 그토록 집중할 까닭이 없었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리치가 李之藻에게 수학 가르치는 일에 너무 시간을 쓰는 데 대한 판토하가 불평한 일은 G Dunne, The Generation of Giants (London, 1962): 99.

리치의 목표는 曆法에 있었다. 이 목표에는 몇 가지 의미가 겹쳐져 있었다. 첫째로, 중국에서 曆法은 제국 체제가 잡히기 이전 상고시대부터 天子의 권위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하늘을 대신해서 인간세상을 다스리는 天子는 시간과 공간의 주재자로서 권위를 확립할 필요가 있었고, 이 기능을 담당한 요소가 바로 曆法이었다.[428] 따라서 중국에서 曆法에 관련된 역할을 선교사들이 맡을 경우 높은 신분과 위상이 보장될 것을 리치는 기대했다.

[428] 藪內 淸 상게서: 3-17.

둘째로, 曆法 분야는 당시 유럽의 관측기술과 수학의 상대적 우월성을 효과적으로 과시할 수 있는 분야였다. 중국의 중화주의는 문화적 우월성을 토대로 하는 것이었으므로, 관측기술이나 수학처럼 그 장점을 명확하게 드러내 보일 수 있는 분야에서 인정을 받을 경우, 유럽문명의 위신을 높이고 蠻夷에 대한 반감을 완화시킬 것이 기대되었다.[429]

[429] 1605년 알바레스 신부 앞의 편지(<書信集> 301-2)에 이 점이 강조되어 있다.

셋째로, 선교사들이 曆法에 관여할 경우, 유럽 천문학의 바탕을 이루고 있던 우주관을 제시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었다. 리치 당시까지 유행하고 있던 스콜라철학에서는 우주관과 신학이 긴밀하게 얽혀 있어서, 그 우주관이 받아들여질 경우 이와 얽혀진 신학도 절반 이상 받아들여지는 것으로 볼 수 있었다.[430]

[430] <四庫全書總目><天問略>(陽瑪諾) 且擧所謂第十二重不動之天 爲諸聖之所居天堂之所在 信奉天主者 乃得升之 以歆動下愚 蓋欲借推測之有驗 以證天主堂之不誣 用意極爲詭譎 然其考驗天象 則實較古法爲善이라 한 데서 우주관과 신학의 결합이 지적된 것을 본다. 이에 비해 <乾坤體義> 에는 雖篇帙無多 而其言皆驗諸實測 其法皆具得變通 可謂詞簡而義者 是以 御製數理精蘊多採其說而用之 是書固亦大輅之椎輪矣라 한 것을 보아도 리치 자신은 이런 결합을 드러내는 데 훨씬 더 조심스러웠음을 알 수 있다. 목표를 크게 잡은 만큼 접근이 더 조심스러웠던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리치가 죽은 후 유럽 천문학을 중국 曆法에 도입하는 사업을 주도한 것은 徐光啓였다. 리치는 유럽으로부터 최고급의 인력과 자료가 확보된 뒤에 완전한 유럽식 曆法을 가지고 중국의 曆法에 대한 전면적 대안을 내놓으려 한 데 비해 徐光啓는 중국 曆法에 드러난 결함을 메우는 데 유럽 기술을 부분적으로 선별 채택할 생각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 차이는 두 사람의 처지가 다른 데서 비롯된 당연한 것이다. 리치는 아무리 적응주의의 입장에 선다 하더라도 중국의 전통 밖에 서 있는 사람으로서 전통과 맞서는 위치를 추구할 입장인 반면, 徐光啓는 비록 기독교로 입교했다고는 해도 중국의 전통 안에 서 있었기 때문에 曆法 개혁에 있어서도 점진적인, 또는 단편적인 방법을 취할 입장이었던 것이다.[431]

[431] 윤리사상 면에서도 이와 비슷한 구조적 차이점을 볼 수 있다. Gernet: 47-57.

16129, 우르시스는 중국 천문역법을 개관하는 보고서를 마카오에 있던 일본-중국 관구장 파시오에게 보냈다.[432] 이 보고서의 배경 자료는 (1) 우르시스가 리치로부터 배운 내용, (2) 徐光啓 등 입교자로부터 들은 사정 외에 (3) 正史 天文志曆志까지도 우르시스가 섭렵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광범위한 자료를 망라한 보고서를 작성한 것은 물론 이 분야 사업에 큰 희망을 걸고 있던 사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보고서에서 눈에 띄는 내용 한 가지는 徐光啓가 생각하는 修曆사업 내용이 명초에 回回曆을 채택한 것처럼 부분적으로 서양 기술을 도입하는 것이지, 전면적으로 대치하려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432] 이 보고서는 포르투갈어로 작성되었는데, P d'Elia, Galileo in China: 63-82에 영문으로 번역되어 있다.

리치가 죽기 전 몇 년 동안 徐光啓, 李之藻와 함께 번역한 <測量法義>, <同文算指> 등 여러 數學書1610년대 초반에 간행된 것도 서양역법의 활용이 임박했다는 기대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1616년의 南京敎案 이후 선교사들의 활동이 위축되고 徐光啓, 楊廷筠, 李之藻 등 고위 입교자들도 정치적으로 소외된 상황에서 修曆사업에 참여하고자 하는 포부는 10년 너머 파묻혀 있게 되었다.[433] 1627崇禎帝가 즉위하고 뒤이어 魏忠賢이 실각하는 과정에서 徐光啓의 정치적 입지가 강화된 뒤에야 修曆사업이 본격적으로 출범하게 된다.

[433] 이 시기에 徐光啓를 비롯한 입교자들이 선교사들의 학문과 기술을 활용함으로써 선교사들의 위상을 확보해 주려 애쓴 분야는 대포 제조와 조작 등 군사기술 쪽이었다. 滿洲族과의 전쟁, 魏忠賢의 전횡 등 긴박한 상황 아래 중국의 時務에 선교사들이 공헌하는 길을 열어줌으로써 조정, 입교 관료, 선교사들이 모두 혜택을 얻는 관계를 이루고자 했다는 점에서 修曆사업과 같은 방향의 노력으로 이해된다.

공교롭게도 정치적 상황 때문에 修曆사업이 십여 년간 늦어지는 동안 리치가 바랐던 대로 자료와 기술의 준비는 많이 확충될 수 있었다. 1610년 리치가 죽은 직후에 입국했던 니콜라스 트리고가 리치의 <中國誌> 유고를 가지고 1613년 로마로 돌아간 일은 <中國誌> 설명과정에서 언급했는데, <中國誌> 출판으로 인해 중국선교가 많은 유럽인의 관심을 끌었고 그 결과 트리고가 1621년 중국으로 돌아올 때는 많은 인적, 물적 자원을 가져올 수 있었다.

과학사업을 위해 가장 절실한 요망사항이었던 일류 과학자라 할 만한 선교사도 세 사람이나 함께 떠났다. 그러나 그중 한 사람은 중국에 도착하기 전 항해 중에 죽었고, 또 한 사람도 본격적인 활동을 해 보지 못한 채 1626년에 죽었다. 유일하게 살아남아 1629년에 시작된 修曆사업에 참여한 것이 요한 테렌츠(Johann Terrenz 鄧玉函, 1576-1630)였는데, 그마저 이듬해에 죽었다. 그러나 일류 과학자는 아니지만 기본적 과학교육을 받은 바 있고, 항해 중부터 테렌츠 등에게 필요한 분야의 강습을 받아 온 샬폰벨(Johann Adam Schall von Bell 湯若望, 1591-1666)과 지아코모 로(Giacomo Rho 羅雅谷, 1593-1638) 등이 테렌츠의 뒤를 이어 <崇禎曆書>를 완성할 수 있었다.[434] 그리고 트리고의 재입국 때는 7천 권의 서적이 반입되어 北京에 명실 공히 유럽 문명의 基地가 만들어졌다.[435]

[434] 이들의 과학 배경과 활동범위는 橋本敬浩, 明末中國えられた科學革命成果(<關西大學社會學部紀要> 12-2, 1980); Hashimoto Keizo, "Longomontanus' Astronomia Danica in China", The Journal of History of Astronomy, 18, 1987; 方豪, 伽利略與科學輸入我國之關係明淸間西洋機械工程學物理學與火器入華考略(<方豪六十自定稿>, 臺北, 1969) 등을 참고로 할 수 있다.

[435] 7서적에 대한 연구로 H Verhaeren, "Aperçu historique de la Bibliothèque du Pét'ang" in Catalogue de la Bibliotheque du Pé-t'ang (Pekin, 1949)方豪, 明季西書七千部流入中國考(<方豪六十自定稿>, 臺北, 1969)가 있다. 1952년에 方豪가 확인할 때까지 이 책들 가운데 남아 있는 것으로 분명한 것이 428, 그럴 가능성이 있으나 완전히 확인할 수 없는 것이 151종 있었다고 한다.

崇禎 2(1629) 5() 초하루 日食이 있을 때 大統曆回回曆이 모두 상당한 착오를 일으키고 徐光啓西法으로 예측한 것만 적중했다. 이에 監官을 문책하자 五官正 戈豊年 등은 曆法이 오래되면 오차가 생길 수밖에 없음을 上言했고, 禮部에서는 曆局을 열어 修曆사업을 벌이되 徐光啓에게 督修를 맡길 것을 상주했다.[436] 이에 徐光啓上言하여 西法의 원리들을 채용하지 않을 경우 정밀한 曆法을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밝혀서 修曆사업의 방향을 밝힌 다음 曆局을 개설하고 테렌츠 등 선교사들을 동원했다.

[436] <明史> 31, 17上下: 崇禎二年五月乙酉朔日食 禮部侍郞徐光啓 依西法預推 順天府見食二分有奇 瓊州食旣 大寧以北不食. 大統回回所推順天食分時刻 與光啓互異 而光啓法驗 餘皆疎 帝切責監官. 時五官正戈豊年等言 大統乃國初所定 實卽郭守敬授時曆也 二百六十年毫未增損. 自至元十八年造曆 越十八年爲大德三年八月 當食不食 六年六月 又食而失推. 是時守敬方知院事 亦付之無可奈何 況斤斤守法者哉. 今若徇舊 向後不能無差. 於是禮部奏開局修改 乃以光啓督修曆法.

曆局 사업은 1633년 가을 徐光啓가 죽기 전까지 세 차례, 그리고 李天經督修를 이어받은 뒤 두 차례에 걸쳐 전부 137권의 <崇禎曆書>를 황제에게 올림으로써 그 임무를 완수했다. 1610년 리치가 죽을 무렵, 리치는 충분한 기술과 자료를 도입한 뒤에 修曆사업에 착수하고, 한 번 착수하면 曆法의 전 체계를 기독교적 우주관에 입각한 유럽 曆法체계로 대치할 것을 생각한 것에 반해 徐光啓는 즉각 修曆사업에 착수하고 전통역법이 약점을 드러낸 부분에만 서양 역법을 선별적으로 채택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결국 1635년에 완성된 <崇禎曆書>는 두 사람 생각의 중간어림에 자리 잡은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10년 후, 오랑캐에서 일어나 중국의 천명을 물려받은 청조가 <崇禎曆書>의 이름을 <時憲曆>으로 바꿔 왕조의 曆法으로 채택한 것은 어찌 보면 리치와 徐光啓, 두 사람의 이념이 절충된 소산인 이 새 曆法이 자연스럽게 제 자리를 찾은 것이라고 볼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Posted by 문천

 

2절 리치의 補儒論

 

리치는 1583肇慶에 처음 자리 잡을 때부터 입고 지내던 승복을 1594년 말부터 儒士 복장으로 바꿨다. 복장만 바꾼 것이 아니라 이때부터는 자신의 신분을 西士로 내세우며 중국의 관리, 학인계층과 대등한 예를 나눌 것을 고집했다. 이런 주장과 고집이 10년 너머 승복을 입고 승려로 행세하던 廣東省에서 통하기는 어려웠겠지만, 廣東省을 떠나 南昌, 南京, 北京으로 근거를 옮겨감에 따라 저항이 줄어들었을 것으로 생각된다.[337]

[337] <中國誌> 260: “유감스럽게도 廣東省의 영역 안에서는 이라는 지긋지긋한 딱지를 떼어버릴 수가 없었다. 다른 성에서는 도착하면서부터 학인계층과 같은 신분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이 다행하고도 유용한 일이었다.” 같은 책 271: 廣東省에서 교분이 있어서 리치가 친구로 생각하고 의지하려 한 南京 공부시랑 徐大任은 리치가 유삼을 걸치고 南京에 나타나자 리치를 즉각 南京에서 쫓아냈다.

融和의 방침은 한편으로는 두 문명의 상호 접근을 최대한 촉진하는 효과를 가져왔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두 문명의 이질적 측면들이 직접 부딪히게 만들었고, 그 충돌 속에서 리치와 그의 노선을 따른 예수회 선교사들은 중국과 서양 양쪽에서 협공 받는 곤경에 처하기도 했다.

19세기 중국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벌인 서양인 중 한 사람인 윌리엄스(Samuel Wells Williams, 1812-1884)가 중국을 소개한 책 The Middle Kingdom에서 마테오 리치를 극렬하게 비난한 것도 그런 맥락이 이어진 것이다:

리치는 신학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들을 무시했다. 신학보다 책략에 소질을 가진 그는 중국에서 편안히 지내는 비결을 찾아냈다. 황제에게 그는 말 잘 듣는 신하였다. 이교도들에게는 미신에 영합해 주는 사제였다. 관리들에게는 궁정의 온갖 잔재주를 익힌 예의바른 동료였다. 그리고 악마에게는 충실한 하인이었으니, 악마의 지배를 배격하기는커녕 이교도에 대한 그의 지배를 강화시켜 주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기독교도들에게까지 넓혀 주었다. 그는 꽃으로 가려지거나 거짓된 들의 전당을 밝히는 촛대에 감춰 붙여진 십자가에 경배의 마음을 향하기만 한다면 기독교인도 우상숭배에 참여하거나 협조해도 된다고 가르치고 공자와 조상에게 제물을 바쳐도 된다고 하는 등, 이교도의 미신을 충실하게 섞어 넣음으로써 (기독교를) 왜곡했다.”[338]

[338] The Middle Kingdom (2 vols., New York, 1883): II-293.

19세기 후반, 유럽인의 자신감이 극에 달하고 중국의 제국체제가 눈에 띄게 무너지고 있던 시절, 중국의 開化에 매진하고 있던 프로테스탄트 선교사의 관점으로 전형적인 것이다. 윌리엄스의 눈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중국인들의 행복한 장래를 위해서는 통째로 말살해 마땅한 중국의 전통에 조금이라도 경의를 표한 리치의 태도가 악마의 심부름으로밖에 비쳐질 수 없었다. 리치가 26세 나이에 모국을 영영 등지고, 31세 이후로는 한 차례 마카오 방문 외에 중국인 사이에서만 평생을 보낸 것도 편안히 지내기위한 목적으로만 이해가 된 모양이다.

공격자의 편협성은 여기서 접어두고, 공격의 실질적인 내용 한 번 살펴보자. “신학의 기본적 원리를 무시했다는 것은 기독교인들도 우상숭배에 참여하거나 협조해도 된다고 가르치고” “공자와 조상들에게 제물을 바쳐도 된다고 한 것을 뜻한다. 이것은 리치가 기독교의 儒家 경전에 나오는 上帝와 동일시한 것, 그리고 불교와 도교의 범위를 제외한, 일반 중국인들의 제례를 원칙적으로 종교행사가 아닌 사회적 관습으로 보아 개종자들의 제례를 최대한 관용한 방침을 지적한 것이다.

이 방침들은 사실 리치가 죽은 직후부터 기독교의 본질과 신앙의 순수성에 저촉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점을 제기했다. 제일 먼저 제기된 것은 선교단 안에서였다. 동아순찰사 파시오가[339] 1612년 마카오에 왔을 때 리치의 후임 중국선교단장 롱고바르디에게 일본 선교사들의 우려를 전달했다. 리치가 보여준 의 모습이 중국인과 일본인들에게 잘못 받아들여질 만한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었다.[340]

[339] 파시오(1551-1612)1578년 리치와 같이 동방으로 항해하고 1582년에 같이 발리냐노에게 불려 마카오까지 왔다. 리치보다 앞서서 1582년 말 루지에리와 함께 肇慶에 정착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후 이듬해 일본으로 갔다. 그 후 일본 관구장, 극동순찰사를 지내고 1611년 일본 준관구가 관구로 승격하면서 초대 관구장을 지내는 등 예수회 극동선교의 조직과 행정에 발리냐노의 뒤를 이어 큰 역할을 맡았다. 리치와는 같은 이탈리아인이고 나이도 비슷해서 특별히 가까운 친구였다.

[340] 이런 위구심이 특히 일본 선교사들에게 일어난 것은 사비에르가 처음 일본에서 선교사업을 시작할 때(1549-51) 현지 신앙에 대해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채로 적응주의 노선을 너무 적극적으로 편 결과 하느님을 다이니치(大日)’라 불러서 혼란을 일으킨 일을 기억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롱고바르디가 선교사와 주요 개종자들의 의견을 조사한 결과 개종자들은 리치의 관점을 지지했고 선교사들은 의견이 엇갈렸다. 롱고바르디는 지나친 적응주의에 반대하는 의견을 조사결과에 덧붙여 1623De Confucio ejusque doctrina tractatus를 발표했는데, 이 글은 1701년에 외방전교회에 의해 파리에서 Traite sur quelques points de la religion des Chinois 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되어 예수회의 적응주의를 공격하는 근거로 널리 활용되었다.[341]

[341] J Gernet, China and the Christian Impact (Cambridge, 1985): 30-31.

롱고바르디가 가장 문제로 느낀 것은 과연 리치 등 선교사들의 경전 해석이 정확한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중국의 옛 경전들이 여러 가지 주석을 통해 상당히 넓은 폭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상황을 그도 가능한 한 유리하게 활용하고 싶었던 것은 경전 文面이 유리할 때는 그대로 따름으로써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함으로써 그들은 儒家 인물들과 쉽게 연합을 이룰 수 있었고, 그리하여 중국인들의 마음을 얻게 될 것이었다.”[342] 한 데서 알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경향이 너무 지나칠 수 있다는 것을 개종자들의 태도에서 느낀 것 같다:[343]

[342] Gernet, 전게서: 28에서 재인용.

[343] Gernet, 전게서: 32-34에서 재인용.

우리의 학식 있는 교우들이 이런(경전의 文面이 기독교의 교의와 부합할 때는 그대로 해석하고 무신론자인 주석자들을 무시하라는) 권유를 해 주는 까닭은 우리가 다루는 주제에 대해 조금이라도 착오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또는 자기들이 외국인의 법칙을 받아들인 데 대한 비난을 면하려는 생각에서 우리 종교와 자기네 교파 사이에 얼마만큼이라도 통하는 점이 있는 것을 너무나 기뻐한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학자들이 경전에 대한 글을 쓸 때는 언제나 주석에 따른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오류가 많다고, 儒家의 원칙에서 벗어난다고 경멸을 받기 때문이다. 왜 그들은 자기 자신들은 하지 못하는 일을 우리에게 시키려고 드는 것일까?”

서 바오로[徐光啓]는 내게 진지하게 고백하기를 자기는 上帝가 우리의 일 수 없으며, 고금의 학자들 가운데 아무도 천주에 대해 알지 못했음을 확신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 신부들이 훌륭한 이유를 가지고 무엇보다 학인계층을 포용하기 위한 목적에서 上帝에게 天主의 이름을 부여한 이상, 上帝에게 天主의 고유한 특성도 부여하는 것이 좋으리라고 하였다.”

레온[李之藻]과 이냐시오[孫元化]는 모든 근세의 학자들이 무신론자이며 주석자의 설명만을 따른다고 아주 솔직하게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우리에게는 우리에게 유리한 文面만을 고집하고 주석에 신경 쓰지 말라고 권유한다.”

리치는 16092월에 당시 일본 관구장으로 있던 파시오에게 쓴 편지에서 중국선교의 전망을 밝게 보는 이유를 열거하는 가운데 중국인은 원래 天理를 중시하고 경전에 事天의 개념이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344] 그는 중국인들을 기독교에 접근시킬 수 있는 통로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했고, 선교를 위한 서적을 꾸미는 데도 엄밀한 의미의 교리서가 아닌, 일종의 안내서 같은 형태로 만들면서 기독교 교리가 중국 지식층의 철학과 연결되어 받아들여지도록 애썼다. 그는 <天主實義> 내용을 스스로 이렇게 내세웠다:

[344] <書信集> 413-414.

맨 처음에는 만물을 창조하고 주재하시는 유일신이 계시다는 증거가 제시된다. 이어서 인간 靈魂의 불멸성이 증명되고 善行惡行에 대한 賞罰, 특히 내생에서의 賞罰이 설명된다. 중국인들에게 많이 통용되는 靈魂輪廻에 대한 피타고라스 학설은 철저히 배척된다. 책의 끝 쪽에 가까이 가서는 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실용적인 글 한 편이 들어가고, 이 책에 완전히 설명되지 못하고 간략하게 소개만 되어 있는 법칙들에 대해 신부들에게 추가설명을 청하도록 권유하는 말로 끝맺어져 있다.”[345]

[345] <中國誌> 449.

실제로 <天主實義> 내용을 살펴보면 여덟 편 가운데 제일 앞 두 편이 만물을 창조하고 주재하시는 유일신의 존재를 제시하는 데 바쳐져 있다. 上帝와 이 을 연결시키는 것은 의 속성이 충분히 설명된 뒤, 2편 끝부분에서 논의의 결론이 나오는 것이며, 이 명제가 논의의 다른 부분을 구속시키지 않도록 되어 있다.

1편에 들어가기 전, 引文에서부터 독자들에게 의 존재의 개연성을 힘들여 제시한 것은 논의에 앞서 독자의 저항감을 줄이는 데 역점을 둔 것으로 보인다:

어리석은 자는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은 없는 것으로 여기니, 마치 소경이 하늘을 보지 못하여 하늘에 해가 있음을 믿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햇빛은 참으로 있는 것인데, 눈이 이를 보지 못한다 하여 해가 없음을 걱정할 것인가? 天主는 사람의 마음에 있는데, 사람이 스스로 깨닫지 못하며 또 돌아보려 하지 않는구나. 하늘의 주재자가 비록 형태가 없으나 그 온몸이 눈이라서 보지 못하는 바가 없고, 그 온몸이 귀라서 듣지 못하는 바가 없고, 그 온몸이 발이라서 이르지 못하는 곳이 없음을 알지 못하는구나. 무릇 착한 일을 행하는 자는 높은 분이 계셔서 이 세상을 다스리심을 믿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분이 안 계시거나 계시더라도 人事에 관여치 않으신다고 한다면 어찌 行善의 문을 닫고 行惡의 길을 여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람들은 벼락이 고목나무만을 때리고 못된 사람들을 바로 치지 않는 것을 보고는 위에 그런 분이 계시지 않으리라 의심하는데, 이는 하늘의 갚음이 성글면서도 새지 않는 것이라서 늦을수록 더욱 무겁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346]

[346] <天主實義> .

首篇에 들어와 리치는 立說 방법에 있어서 인간이 禽獸와 다른 것은 是非를 가리고 眞僞를 알아내는 靈才가 있기 때문이니, 靈才를 배경으로 에 입각해서 추론할 것을 밝힌 다음[347] 주재자로서 의 존재에 대한 증명을 이렇게 제시했다.

[347] <天主實義> 23-26.

첫째로, 우리는 배워서 얻는 능력에 앞서서 良能을 가지고 있다. 이제 천하만국이 각자 자연의 誠情을 가져서 서로 가르쳐주지 않아도 모두 하나의 上尊을 공경한다. 어려움에 빠진 자는 애달프게 구원을 바라기를 마치 어진 부모 바라보듯 한다. 악을 행한 자는 놀라고 두려워하여 마음이 억눌리는 것이 마치 큰 적국을 대한 듯하다. 어찌 이 達尊이 계신 것이 아니라면 세간의 人心을 주재해서 스스로 받들게끔 할 수 있을 것인가?

둘째로 知覺을 가지지 않은 사물은 원래 자리에서 스스로 움직임을 일으킴에 절도를 맞출 수가 없다. 절도에 맞춰 움직이기 위해서는 밖에 있는 靈才가 도와주어야만 한다. 예컨대 돌멩이를 공중에나 물속에 놓아두면 떨어져 바닥에 닿은 뒤에야 멈추고, 그리고는 다시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돌이 저절로 떨어지는 까닭은 물속이나 공중이 돌의 원래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바람이 땅으로부터 일어나는 경우 같으면 원래 자리에서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지만, 그 움직임은 어지러워서 절도에 맞출 수가 없다. 하늘을 수놓고 있는 日月星辰의 경우는 하늘이 그들의 원래 자리이기는 하지만 기실 知覺도 없는 존재들이다. 이제 上天으로부터 운행하고 日月星辰諸天西로부터 거꾸로 운행하는 것을 보면, 度數가 법칙대로 지켜지고 次舍가 편안히 자리 잡혀 있어서 티끌만한 오차가 없다. 만일 尊主가 계셔서 그 사이에 알선하고 주재하지 않으신다면 이렇게 혼란을 피할 수가 있겠는가?

셋째로 知覺은 가졌지만 靈性을 갖지 않은 사물이 더러 영특한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은 영특한 존재가 있어서 이끌어 주기 때문이다. 예컨대 鳥獸의 무리를 보면 원래 冥頑不靈한데도 배고프면 먹이를 찾을 줄 알고, 목마르면 물을 찾을 줄 알고, 화살이 두려워 하늘을 날기도 하며 그물에 놀라 山澤에 숨기도 한다. 입에 든 것을 뱉어주거나 젖을 먹여 주는 것은 모두 자신을 보존하고 새끼를 키우기 위함이니, 해로운 것을 막고 이로운 것을 따르는 것이 을 가진 존재와 다름이 없다. 이는 필히 尊主가 계셔서 보이지 않게 가르쳐 주시기 때문에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348]

[348] <天主實義> 29-31: 其一曰 吾不待學之能 爲良能也 今天下萬國各有自然之誠情莫相告諭而皆敬一上尊 被難者籥哀望救 如望慈父母焉 爲惡者捫心驚懼 如懼一敵國焉 則豈非有此達尊 能主宰世間人心 而使之自能尊乎 / 其二曰 物之無魂無知覺者 必不能于本處所自有所移動 而中度數 使以度數動 則必外靈才以助之 設汝懸石於空 或置水上 石必就下至地方止 不能復動 緣夫石自就下 水之與空非石之本處所故也 若風發于地 能於本處自動 然皆隨發亂動 動非度數 至如日月星辰竝麗于天 各以天爲本處所 然實無魂無知覺者 今觀上天自東運行 而日月星辰之天自西循逆之 度數各依其則 次舍各安其位 曾無纖忽差忒焉者 倘無尊主斡旋主宰其間 能免無悖乎哉 譬如舟渡江海 上下風濤而無覆蕩之虞 雖未見人 亦知一舟之中必有掌舵智工撑駕持握 乃可安流平渡也 / 其三曰 物雖本有知覺 然無靈性 其或能行靈者之事 必有靈者爲引動之 試觀鳥獸之類 本冥頑不靈 然饑知求食 渴知求飮 畏繒繳而薄靑冥 驚網罟而潛山澤 或吐哺 或跪乳 俱以保身孶子 防害就利 與靈子無異 此必有尊主者默敎之 纔能如此也 ...

이어서 리치는 이 주재자가 바로 창조주임을 다시 세 가지 이유를 들어 설명하지만[349], 앞에 예시한 논리를 크게 넘어서는 것은 없다. 그 다음은 이 절대적인 존재임을 주장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제일 먼저 이 존재의 궁극적 근거임을 강조했다: “天主를 칭하여 근본()이라 하는 것이니 만일 출생의 근거가 따로 있다면 이는 곧 天主가 아니다. 사물 가운데 有始有終한 것은 鳥獸草木이요, 有始無終한 것은 天地와 귀신, 그리고 인간의 靈魂이다. 천주는 곧 無始無終한 존재이니, 만물의 출발점이며 또 그 근원이다. 天主가 없다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만물이 天主로 말미암아 생겨난 것이지, 天主가 다른 무엇으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니다.”[350] 만일 天主께서 天地를 장악하지 않으신다면 어찌 天地가 만물을 생육할 수 있을 것인가? 天主께서는 진정 無上至大所以然이시니, 그런 연고로 우리의 옛 선배들이 그분을 所以然의 첫 所以然이라 한 것이다.”[351]

[349] <天主實義> 34-40, 앞 제1.

[350] <天主實義> 42: 西士曰 天主之稱 謂物之原 如謂有所由生 則非天主也 物之有始有終者 鳥獸草木是也 有始無終者 天地鬼神及人之靈魂是也 天主則無始無終而爲萬物始焉 爲萬物根柢焉 無天主則無物矣 物由天主生 天主無所由生也.

[351] <天主實義> 47: 使無天主掌握天地 天地安能生育萬物乎 則天主固無上至大之所以然也 故吾古儒以爲所以然之初所以然.

그리고는 을 인식하는 방법이 범상한 사물을 인식하는 방법과 같을 수 없음을 밝힌 다음[352] 여러 측면에서 의 절대성을 논하였다:

[352] <天主實義> 55: 蓋物之列於類者 吾因其類 考其異同 則知其性也 有形聲者 吾視其容色 聆其音響 則知其情也 有限制者 吾度量自此界至彼界 則可知其體也 若天主者 非類之屬 超越衆類 比之於誰類乎 旣無形聲 豈有迹可入而達乎 其體無窮六合不能爲邊際 何以測其高大之倪乎 庶幾乎擧其情性 則莫若以非者無者擧之 苟以是以有 則愈遠矣.

이제 우리가 天主가 어떤 것인지 가리켜 말하고자 한다면, 하늘도 아니고 땅도 아니면서 그 高明博厚함이 天地보다 더하다, 귀신이 아니면서 그 신령함이 귀신의 따를 바가 아니다, 사람이 아니면서도 遐邁聖睿한 존재이다, 이른바 도덕도 아니면서 도덕의 출발점이다,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다.

그에게는 사실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어서, 우리가 그의 과거를 말하고자 한다면 無始라는 말 밖에 할 것이 없고, 그의 미래를 말하고자 한다면 無終이라는 말 밖에 할 것이 없다.

그의 몸에 대해 미루어 말하고자 한다면 그 몸을 담을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으면서 또 그 몸으로 채워지지 않은 곳이 없다. 움직임이 없으면서도 모든 움직임의 근원이 되며 손도 없고 입도 없으면서 萬森化生하고 萬生敎諭한다.

그의 은 허물어지지도 줄지도 않는 것으로, 에서 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의 는 막히는 곳도 틀리는 곳도 없는 것으로, 萬世以前부터 萬世以後까지 눈앞에 놓여 있는 것처럼 그를 벗어나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의 은 완전하고 깨끗한 것이어서 모든 의 귀착점이면서 티끌만한 不善도 끼어들 수 없다. 그 은혜의 광대함은 아무 곳으로도 막힌 데가 없어서 사사로움도 없고 가리는 바도 없이 미치지 않는 데가 없으니 작은 버러지들까지 그 혜택을 입지 않는 것이 없다.

무릇 乾坤 안에 善性善行天主로부터 말미암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나 이를 本原과 비겨 본다면 물방울 하나를 滄海와 비기는 것만도 못하다. 天主福德은 그 융성하고 원만함이 洋洋優優하니 어찌 더할 것이 있고 뺄 것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江海의 물은 다 퍼낼 수 있고 모래밭의 모래알은 다 헤아릴 수가 있으며 우주를 다 채울 수가 있을지언정, 天主의 모습을 다 밝힌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데, 하물며 이를 다 설명해낼 수 있겠는가?”[353]

[353] <天主實義> 58-62: 今吾欲擬指天主何物 曰 非天也 非地也 而高明博厚較天地猶甚也 非鬼神也 而其神靈鬼神不啻也 非人也 而遐邁聖睿也 非所謂道德也 而爲道德之源也 / 彼寔無往無來 而吾欲言其以往者 但曰無始也 欲言其以來者 但曰無終也 / 又推而意其體也 無處可以容載之 而無所不盈充也 不動 而爲諸動之宗 無手無口 而化生萬森 敎諭萬生也 / 其能也 無毁無衰 而可以無之爲有者 其知也 無昧無謬 而往之萬世以前 未來之萬世以後 無事可逃其知 如對目也 其善純備無滓 而爲衆善之歸宿 不善者雖微而不能爲之累也 其恩惠廣大 無壅無塞 無私無類 無所不及 小蟲細介亦被其澤也 / 夫乾坤之內 善性善行無不從天主稟之 雖然 比之于本原 一水滴於滄海不如也 天主之福德 隆盛滿圓 洋洋優優 豈有可以增 豈有可以減者哉 故江海可盡汲 濱沙可計數 宇宙可充實 而天主不可全明 況竟發之哉.

이렇게 주재자-창조주로서 절대자 天主의 개념을 세운 다음에는 이것을 儒家의 다른 개념과 혼동되지 않도록 지키는 것이 리치의 할 일이었다. 리치는 1604년 아콰비바 총장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太極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太極은 새로운 것으로 50년 전에 만들어진 것입니다.[354] 세밀히 검토해 보면 이 에 대해 비교적 정확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던 고대 중국 성현들의 가르침에 반대되는 것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그들의 말에 따르면 太極이라는 것은 우리 철학자들이 말하는 제1質料[355]일 뿐이며, 하나의 실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이것이 하나의 물체가 아니라고까지 말하며, 또 동시에 이것이 모든 사물의 구성요소로 들어있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의 일종도 아니고 이해의 능력을 가진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사물의 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그들이 말하는 物質도 아니고 知性도 아닌 것이니, 추론의 주체가 아닌 객체로서 理性을 뜻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사실에 있어서 그들의 주장에는 워낙 괴상한 것이 많기 때문에 그들의 해석만 엇갈리는 것이라고 할 수도 없겠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우리는 이 책[天主實義]에서 그들의 논설을 반박하기보다 우리의 의 개념에 적합한 방향으로 돌려세우는 편이 더 좋겠다고 판단했습니다. 우리가 중국의 사상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중국 사상가들이 우리 사상에 따라오는 쪽으로 해석해 내는 모양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국을 통치하는 학인계층은 우리가 이 (太極) 원리를 비판하는 것을 몹시 싫어하기 때문에 우리는 원리 자체보다 원리에 대한 해석에 관해 문제를 제기하는 쪽으로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마침내 太極이라는 것이 제1의 실존원칙으로서 지성과 무한성을 가진 존재로 인식하게 된다면 우리는 바로 이것이 다름 아닌 이라고 동의할 것입니다.”[356]

[354] Gernet‘50년 전이라는 것이 의도적으로 조작된 것으로 보았지만,(전게서 253, 51) 필자가 보기에는 단순한 착오 같다. <中國誌> 95에서 道學의 시작을 ‘500년 전의 일이라고 한 적이 있으며, 周敦頤(1017-73)의 연대를 기준으로 보아 ‘500년 전을 쓰려던 것으로 생각된다.

[355]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 물체의 현실성을 뒷받침하는 形相에 대칭하여 물체의 가능성에 관련되는 개념.

[356] Gernet 전게서: 27에서 재인용. 이 편지는 로마의 Casanantese 도서관에 문서번호 2136으로 소장되어 있는 데, <書信集>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다.

<天主實義>에서도 당시 儒學의 주류에서 우주의 근본원리로 파악하고 있던 와 존재의 출발점으로 생각되고 있던 太極上帝, 天主와 다른 것임을 역설했다. 먼저 太極尊奉의 대상이 아니었음을 경전의 근거로 따졌다: “내가 비록 말년에야 중국에 들어왔지만 옛 經書 읽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는데, 옛날 군자들이 天地上帝恭敬한 일만 들었지, 太極尊奉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만약 太極上帝이며 만물의 근원이라면 옛 성인들이 왜 그 을 감추었겠는가?”[357]

[357] <天主實義> 78: 余雖末年入中華 然竊視古經書不怠 單聞古先君子敬慕于天地之上帝 未聞有尊奉太極者 如太極爲上帝萬物之祖 古聖何隱其說乎.

그리고 太極이 존재의 근원이 될 수 없다는 것을 依賴者(accident, 偶有性)’自立者(substance, 實體)’라는 스콜라철학적 개념의 분석을 통해 주장했다:

대저 사물의 宗品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自立者, 하나는 依賴者. 사물 가운데 다른 몸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성립하는 것, 예컨대 天地, 귀신, 사람, 鳥獸, 草木, 金石, 四行(地水火風4원소) 등이 自立者. 한편 스스로 서지 못하고 다른 몸에 기대어서야 존재하는 것으로 五常, 五色, 五音, 五味, 七情 같은 것들은 依賴의 품에 속한다. 이들을 비교해 본다면 무릇 自立者는 앞서는 것이고 귀한 것이며, 依賴者는 뒤지는 것이며 천한 것이다. 한 물건의 몸에 自立者는 하나뿐이지만 依賴者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붙어 있다. 예컨대 사람의 몸 하나는 진정 自立者인데, 거기에는 情聲, 貌色, 彛倫 등 여러 가지가 依賴해 있고 그 종류가 매우 많다.

太極과 같은 것을 만 가지고 풀이한다면, 이것은 천지만물의 근원이 될 수 없다. 무릇 라는 것이 또한 依賴者여서 스스로 서지 못하는 것인데 어찌 다른 사물을 세워준단 말인가! 중국의 문인, 학사들이 논리를 논할 때 二端이 있음을 말할 뿐이니 곧 人心事物이다. 事物人心에 합할 때 事物眞實하다고 비로소 말한다. 人心事物에 깃든 를 남김없이 헤아려 그 가 완전할 때 이를 格物이라 한다. 이 두 가지를 볼 때 依賴者임은 확실한 일인데, 어떻게 사물의 근원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두 가지가 모두 사물의 뒤에 있는 것인데 뒤의 것이 어떻게 앞의 것의 근원이 된단 말인가?

또 사물이 처음 있기 전에 가 존재했다고 누가 말하겠는가? 어디에 자리 잡고 무엇에 기대어 있었단 말인가? 依賴者自立하지 못하니 기댈만한 自立者가 없으면 依賴者는 있을 수 없다. 묻건대 盤古에 앞서서 가 이미 존재하였다면 놀고 있으면서 움직여 사물을 만들지 않은 까닭이 무엇인가? 그 후에 움직이도록 충동한 것은 무엇인가? 하물며 는 원래 動靜이 없다는데, 어떻게 움직였겠는가? 전에는 사물을 만들지 않다가 나중에 와서야 만들고 싶은 생각이 났다고 한다면 에 어찌 뜻이 있다는 말인가? 사물을 만들고 싶어도 하고 않기도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358]

[358] <天主實義> 83-85: 夫物之宗品有二 有自立者 有依賴者 物之不恃別體以爲物 而自能成立 如天地鬼神人鳥獸草木金石四行等 是也 斯屬自立之品者 物之不能立 而託他體以爲其物 如五常五色五音五味七情等 是也 斯屬依賴之品者 且以白馬觀之 曰白 曰馬 馬乃自立者 白乃依賴者 雖無其白 猶有其馬 如無其馬 必無其白 故以爲依賴也 比斯兩品 凡自立者 先也 貴也 依賴者 後也 賤也 一物之體 惟有自立一類 若其依賴之類 不可勝窮 如人一身固爲自立 其間情聲貌色彛倫等類 俱爲依賴 其類甚多 / 若太極者 止解之以所謂理 則不能爲天地萬物之原矣 蓋理亦依賴 自不能立 曷立他物哉 中國文人學士講論理者 只謂有二端 或在人心 或在事物 事物之情合乎人心之理 則事物方謂眞實焉 人心能窮彼在物之理 而盡其知 則謂之格物焉 據此兩端 則理固依賴 奚得爲物原乎 二者皆在物後 而後豈先者之原 / 且其初無一物之先 渠言必有理存焉 夫理在何處 依屬何物乎 依賴之情不能自立 故無自立者以爲之託 則依賴者了無矣 如曰賴空虛耳 恐空虛非足賴者 理將不免于偃墮也 試問盤古之前旣有理在 何故閑空不動而生物乎 其後誰從激之使動 況理本無動靜 況自動乎 如曰昔不生物 後乃願生物 則理豈有意乎 何以有欲生物 有欲不生物乎.

<天主實義>의 사상적 근거가 스콜라철학에 있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리치는 중국인 독자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기 위해 그 개념을 직접 끌어들이는 일을 최소한 자제한 것 같다. 依賴者自立者 개념 외에 리치가 드러나게 쓴 것은 所以然개념이었다. 리치는 作者(final cause, 目的因)’, ‘模者(formal cause, 形象因)’, ‘質者(material cause, 質料因)’, ‘爲者(efficient cause, 動力因)’의 개념을 설명한 다음, 模者質者는 사물 안에 내재하는 것이지만 作者爲者는 사물 밖에 있어 사물의 존재를 뛰어넘어서 先行하는 것이라 하고, 이것이 天主의 역할이라고 설명했다.[359]

[359] <天主實義> 45-46.

그런데 가 만물의 근원이라고 보는 儒家의 관점을 공격하다 보면 얼마간의 自家撞着을 피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수레 만드는 사람의 예를 들면서 수레의 匠人의 마음속에 들어 있다면 왜 수레 하나를 마음으로부터 재깍 만들어내지 못하는가, 왜 목재와 기계와 노동이 들어간 뒤에야 수레가 만들어지는가, “어이하여 처음에는 크나큰 天地를 만들어내던 신기한 재주가 오늘날에는 쭈그러들어서 조그만 수레 하나 꺼내 놓지 못한단 말인가?”[360] 추궁하지만, 자신의 所以然이론을 가지고는 그 차이를 분명히 하기 어려운 것 같다. 결국 의 개념을 충분히 확장한다면 그것이 바로 天主가 될 수 있으며, 호칭의 문제 밖에 남지 않는다는 것을 리치는 인정한다: “당신이 말하는 가 만물의 을 품고 있어서 만물을 化生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곧 天主이니, 굳이 , 太極이니, 할 필요가 어디 있느냐.”[361]

[360] <天主實義> 87: 西士曰 ... 譬如今日有輿人於此 有此車理具于其心 何不卽動發一乘車 而必待有樹木之質 斧鋸之械 匠人之工 然後成車 何初之神奇 能化天地之大 而今之衰敝 不能發一車之小耶.

[361] <天主實義> 98: 如爾曰理含萬物之靈 化生萬物 此乃天主也 何獨謂之理 謂之太極哉.

 

의 모습을 중국인에게 밝혀주는 일 못지않게 리치가 공을 들인 일은 기독교 윤리를 중국인의 마음에 들도록 제시하는 일이었다. 리치가 한문으로 지은 첫 책이 <交友論>(1595)이었다는 사실에서도 리치가 얼마나 기독교 윤리 내지 서양 윤리를 중국인에게 제시하는 데 큰 의미를 두었는지 알아볼 수 있다. 15998南京에서 고향의 코스타 신부에게 이 책 몇 장을 기념품으로 보내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이것은 南昌에서 建安王의 요청으로 쓴 것인데, 이탈리아어로 설명을 붙여 놓았습니다만 중국어로 쓴 것은 유려하지는 못합니다. 이것은 우리 선교소에 있는 책 속에서 찾아낸 서양 격언과 哲人들의 名句를 가지고 중국인의 취향에 맞도록 꾸며 엮어낸 것입니다. 이 책은 나와 유럽인 모두의 명예를 적지 않게 높여주어서, 지금까지 한 어떤 일보다도 큰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과학이나 다른 분야 책들은 유럽의 과학기술이나 예술만을 보여주는 데 비해 이 책은 수양과 지혜, 문학을 소개해 주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몹시 좋아합니다. 이 책을 인쇄하려면 회장 신부님의 승인을 먼저 받아야 하기 때문에 인쇄를 내가 하지는 못했습니다만 두 곳에서 다른 사람들이 인쇄해서 학인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362]

[362] <書信集> 258.

몇 해 후(1604) <二十五言>[363]을 펴낸 데 대해서는 이런 기록이 있다:

[363] Christofer Spolatin, Matteo Ricci's Use of Epictetus (Waegwan, 1975)에는 이 책이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투스(55-135)의 글을 번역한 것으로 밝혀져 있다.

리치 신부는 여러 가지 도덕상의 문제와 靈魂한 성향을 바로잡는 방법에 관한 스물다섯 편의 짧은 글을 지었다. 인쇄 전에 내용을 검토해 준 중국인 친구들은 충심으로 공감을 표해 주었다. 사실에 있어서 그들은 그때까지 야만족에 속한다고 생각해 온 외국인이 그런 심오한 주제를 그토록 능란하게 다루었다는 것을 거의 믿을 수 없는 일로 생각하고, 모두들 이 책자를 복사해 가지고 싶어 했다. 그는[馮應京] 이 책을 매우 높이 평가해서 지식층 사람들에게 이 책을 읽고 나서 미신으로 얼룩진 어두운 德性과 기독교의 샘에서 솟아나오는 德性을 비교해, 어느 쪽이 개인의 에 더 적합하고 公益에 더 유용한지 판단하라고 촉구했다.”[364]

[364] <中國誌> 447.

리치는 儒家의 가르침이 현실에서 도덕과 윤리를 세우는 데 중점을 두고 있는 데 비추어 기독교가 儒學者들의 승인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기독교 윤리가 일반 중국인들에게 인정받아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다. <交友論>이 넓은 범위의 중국 지식인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고 하지만, 거기에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交友論>의 내용이 고대에서 중세에 이르는 서양 철학자들의 저술에서 조각조각 주워 모은 것이기 때문에 일관된 사상체계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었고, 또 내용의 주류를 차지한 로마 사상가들은 기독교 전통과 밀접한 관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인에게 기독교를 소개하는 목적으로 <天主實義>를 작성함에 리치가 그 내용의 중심축으로 삼은 것은 절대유일한 의 존재를 증명하고, 의 존재를 근거로 인간의 도덕적 책임을 서술하는 것이었다.

앞 절에서 살핀 것처럼 의 존재와 속성을 주장한 다음 리치는 인간에 대한 논의로 옮겨오는데, 논의의 출발점을 세우기 위해 인간의 위치를 이렇게 규정한다:

세상에는 3이 있는데 下品은 이름을 生魂이라 하며 中品은 이름을 覺魂이라 하며 上品은 이름을 靈魂이라 하니, 곧 인간의 이라, 이는 生魂覺魂을 아우르기 때문에 사람을 키우게 할 수도 있고 사람으로 하여금 物情을 알고 느끼게 하기도 하며, 나아가 사람으로 하여금 사물을 추론하고 理義明辯할 수 있게 한다. 사람의 몸이 죽어도 은 죽지 않으니 이는 영존불멸하는 것이다. 推論하고 明辯하는 일은 身形에 의거하지 않고도 그 이 혼자 할 수 있으니, 몸이 비록 죽고 모습이 비록 사라져도 그 靈魂은 그대로 이를 다시 쓸 수 있는 것이다.”[365]

[365] <天主實義> 133-134: 彼世界之魂有三品 下品名曰生魂 ... 中品名曰覺魂 ... 上品名曰靈魂 卽人魂也 此兼生魂覺魂 能扶人長養及使人知覺物情 而又使之能推論事物明辨理義 / 人身雖死 而魂非死 蓋永存不滅者焉 凡知覺之事 倚賴于身形 身形死散 則覺魂無所用之 故草木禽獸之魂依身以爲本情 身歿而情魂隨之以殞 若推論明辨之事 則不必依據于身形而其靈自在 身雖歿 形雖渙 其靈魂仍復能用之也.

生魂覺魂이 소멸하는 데 반해 靈魂은 소멸하지 않는 까닭에 대해서는 靈魂만이 四行의 물질계에서 초연한 때문이라 하고[366], 靈魂이 물질계에서 초연한 존재라는 증거를 다음과 같이 나열하였다.[367]

[366] <天主實義> 138: 子欲知人魂不滅之緣 須吾世界之物 凡見殘滅 必有殘滅之者 殘滅之因 從相悖起 物無相悖 決無相滅 日月星辰麗于天 何所繫屬 而卒無殘滅者 因無相悖故也 凡天下之物 莫不以火氣水土四行相結以成 然火性熱乾 則背于水 水性冷濕也 氣性濕熱 則背於土 土性乾冷也 兩者相對相敵 自必相賊 卽同在相結 一物之內 其物豈得長久和平 其間未免時相伐競 但有一者偏勝 其物必致壞亡 故此有四行之物 無有不泯滅者 夫靈魂則神也 於四行無關焉 敦從而悖滅之.

[367] <天主實義> 140-147.

1. 有形은 몸의 부림을 받지, 그 주인이 되지 못한다. 자제력을 가지지 못하고 욕망에 그대로 따르는 동물과 달리 인간이 理性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그 靈魂無形의 것이어서 몸을 지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인간의 성품은 形性神性의 양면이 있어서 마음에도 獸心人心의 양면이 생기기 때문에 한 가지 일에도 갈등을 겪는 것이다.

3. 有形有形의 사물에 반응하고 無形無形의 사물에 반응하는데, 인간의 마음은 有形, 無形의 사물에 모두 반응하므로 그 또한 有形, 無形을 겸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4. 그릇에 담기는 사물은 그릇의 모양에 따라 그 상태가 정해지는데, 사람의 마음에 담기는 사물이 추상화되는 것을 보면 그 담는 마음이 無形임을 알 수 있다.

5. 有形器官耳目口鼻, , , 의 기능을 통해 有形의 대상인 , , , 를 접수하는 것인데, 無形器官인 마음은 의 기능을 통해 을 추구하는 것으로 禽獸에게는 없는 것이다.

이처럼 중간적 존재로 규정된 인간에게는 獸性을 떨치고 神性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 그 도덕적 목표로 주어져 있다. 그를 위해서는 獸性의 조건인 有始를 벗어나 無終을 향해야 하므로 現世의 가치보다 來世의 가치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내가 보건대 天主께서 또한 인간을 本世에 두심으로써 그 마음을 시험하여 德行의 등급을 매기시려는 것이다. 따라서 本世는 우리가 머물러 지내는 곳이지 길게 살 곳이 아니다 우리의 원 집은 今世에 있지 않고 後世에 있으며 사람들 사이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으니, 그곳에 가서야 참 삶을 살 것이다. 今世禽獸之世이므로 鳥獸各類가 땅을 향해 엎드린 모양이며, 인간은 하늘의 백성이므로 고개를 들고 하늘을 쳐다보는 것이다. 今世로써 본 집을 삼는 자는 禽獸의 무리이며, 天主께서 인간에게 가혹히 대하시는 것도 이상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368]

[368] <天主實義> 128: 吾觀天主亦置人于本世 以試其心而定德行之等也 故現世者 吾所僑寓 非長久居也 吾本家室 不在今世 在後世 不在人 在天 當于彼創本業焉 今世也 禽獸之世也 故鳥獸各類之像附向於地 人爲天民 則昻首向順于天 以今世爲本處所者 禽獸之徒也 以天主爲薄於人 固無怪耳.

來世利害는 매우 참되고 매우 큰 것이니, 今世의 것과 비길 바가 아니다. 우리가 지금 보는 것은 利害의 그림자일 뿐이다. 그러므로 今世의 일은 흉한 일이든 길한 일이든 모두 말할 가치가 없다.”[369]

[369] <天主實義> 362: 來世之利害甚眞大 非今世之可比也 吾今所見者 利害之影耳 故今世之事 或凶或吉 俱不足言也.

리치가 제시하는 來世의 가치는 現世의 가치관을 그대로 연장한 위에 놓여 있다. 이에 대해 리치는 대화상대로 설정한 中士의 입을 통해 利害관계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는 것이 도덕적 향상의 길이 될 수 있겠냐고 의문을 제기해 본다.[370] 그리고는 다시 이에 대한 답변으로 儒家에서 중시하는 誠意의 길을 내세워 가 인간의 도덕적 작용에서 핵심적 요소임을 주장하였다.[371]

[370] <天主實義> 321: “但以天堂地獄爲言, 恐未或天主之敎也. 夫因趣利避害之故爲善禁惡, 是乃善利惡害, 非善善惡惡正志也. 吾故聖賢敎世不言利, 惟言仁義耳. 君子爲善無意, 況有利害之意耶?”

[371] <天主實義> 322-323.

리치가 의 의미를 극단적으로 강조한 예를 보자: “옛날에 두 弓士가 있었는데 하나는 산에 갔다가 덤불 밑에 누워 있는 것이 호랑이처럼 보이기에 사람을 해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활로 쏘았는데 알고 보니 사람이었다. 또 하나는 숲 속에서 얼핏 스쳐 보이는 것이 사람 같았는데 역시 활로 쏘았는데 사실은 사슴이었다. 앞의 사람은 살인을 한 것이지만 뜻이 호랑이를 쏘는 데 있었으니 결단코 을 주어 마땅하고, 뒤의 사람은 비록 사슴을 잡았지만 뜻이 사람을 해치는 데 있었으니 결단코 을 주어 마땅하다. 어째서냐고? 그 뜻의 美醜가 다르기 때문이다. 곧 뜻이 善惡의 근본임이 분명한 것이다.”[372]

[372] <天主實義> 335: 昔有二弓士 一之山野 見叢有伏者如虎 慮將傷人因射之 偶誤中人 一登樹林 恍惚傍視 行動如人亦射刺之 而寔乃鹿也 彼前一人 果殺人者 然而意在射虎 斷當褒 後一人雖殺野鹿 而意在刺人 斷當貶 奚由焉 由意之美醜異也 則意爲善惡之原 明著矣.

목적이 정당하면 수단과 결과까지도 정당화된다는 극단적인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來世라는 것이 現世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서술해서, 現世利害관계에 얽히는 갈등이 來世에는 있을 수 없는 것이라 하였다: “내가 말하는 것은 來世이니, 至大하고 至實하며 서로 엇갈리지 않는 것이어서 모든 사람이 이것을 얻어도 서로 다툴 필요가 없다. 이런 를 가지고 왕은 그 나라를 이롭게 하고, 대부는 그 집안을 이롭게 하고, 士庶는 그 몸을 이롭게 하는 데 상하가 앞을 다툰다면 천하는 곧 편안하게 다스려질 것이다. 來世의 이익을 중히 여기면 필히 現世의 이익을 가벼이 여길 것이니, 現世의 이익을 가벼이 여기면서 犯上爭奪弑父弑君을 좋아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백성으로 하여금 모두 後世를 바라게 한다면 정치를 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373]

[373] <天主實義> 353: 吾所指來世之利也 至大也 至實也 而無相得 縱盡人得之 莫相奪也 以此爲利 王欲利其國 大夫欲利其家 士庶欲利其身 上下爭先 天下方安方治矣 重來世之益者 必輕現世之利 輕現世之利 而好犯上爭奪殺父弑君 未之聞也 使民皆望後世之利 爲政何有.

도덕적 목적 다음에는 善惡을 둘러싼 윤리적 문제가 관심의 대상이다. 善惡 개념에 대한 리치의 서술 가운데는 얼핏 서로 모순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있다.

善惡에는 사이가 없어서 선이 아니면 악이요, 악이 아니면 선이며, 다만 善惡에 크고 작은 차이가 있을 뿐이다. 善惡을 비유하면 生死와 같은 것이어서, 산 것이 아니면 죽은 것이요, 죽은 것이 아니면 산 것이며, 不生不死와 같은 것은 없다.”[374]

[374] <天主實義> 397: 西士曰 善惡無間 非善卽惡 非惡卽善 惟善惡之中 有巨微之別耳 善惡譬若生死 人不生則死 未死則生 固無弗生弗死者也.

이란 별도의 사물이 아니고 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니 라는 것이 다름 아니라 이 없음을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재판관이 죄인에게 를 내린다고 할 때 가지고 있던 를 주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375]

[375] <天主實義> 431: 西士曰 吾以性能行善惡 固不可謂性自本有惡矣 惡非實物 乃無善之謂 如死非他 乃無生之謂耳 如士師能死罪人 詎其有死在乎 苟世人者生而不能不爲善 從何處可稱成善乎 天下無無意于爲善而可以爲善也.

전자의 경우는 구약에 비쳐지는 유다이즘을 연상시키데, 후자는 善惡을 상대적 개념으로 보는, 전형적인 스콜라철학자의 모습이다. “자그마한 不善으로 天下萬民을 구할 수 있는 일이 있어도 행해서는 안 되는 법인데……[376] 하여 不善으로 표현하면서 동시에 절대적인 개념으로 규정하는 것은 양자의 입장이 뒤섞인 것처럼 보인다. 한편 사랑스럽고 바람직한 것을 이라 하고, 밉고 싫은 것을 이라 한다고 한 것은[377] 에피큐로스의 관점을 떠올리게도 하는 것이다.

[376] <天主實義> 339: 爲纖微之不善 可以救天下萬民 猶且不可爲.

[377] <天主實義> 424: 可愛可欲謂善 可惡可疾謂惡也.

인간의 도덕적 사명과 선악의 개념을 서술하는 데는 기독교의 고유한 교의를 중심으로 한 데 비하여 人性善惡의 관계를 논하는 데는 儒家의 개념에 접근하려는 노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란 다름 아니라 사물의 종류마다 內在하는 고유한 특성이다. ‘사물의 종류라 함은 같은 종류는 같은 , 다른 종류는 다른 을 가지는 것을 이른다. ‘고유하다함은 다른 종류에도 나타나는 것이라면 고유한 것이 아님을 말한다. ‘內在한다함은 그 사물의 몸 안에 있지 않은 것을 그 특성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물 가운데 自立者는 그 自立하고 依賴者는 그 依賴한다. 사랑스럽고 바람직한 것을 이라 하고, 밉고 싫은 것을 이라 한다. 이 뜻을 알고 나면 人性善否를 논할 수 있다. 서양 학자들은 이라는 것이 하고 하며 능히 論理를 펴는 자라 하였다. 함으로써 金石과 다르고, 함으로써 草木과 다르며, 능히 論理를 폄으로써 禽獸와 다른 것이다. 推論을 하되 直觀이 아니기 때문에 귀신과도 또한 다른 것이다. 귀신이란 사물의 이치를 비추어보듯 그대로 아는 것이므로 推論의 필요가 없는 데 반하여 사람은 앞의 일로 뒤의 일을 미루어 알고 드러난 일로 숨겨진 일을 미루어 알며 이미 깨우친 일로 미처 깨우치지 못한 일을 미루어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論理를 펼 줄 아는 힘이 사람을 고유한 존재로 만들어 그 존재를 다른 사물과 구별짓는 것이니 바로 이것이 人性이다. 仁義禮智로부터 미루어져 나오는 것이다.”[378]

[378] <天主實義> 423-425: 欲知人性其本善耶 先論何謂性 何謂善惡 夫性也者非他 乃各物類之本體耳 曰各物類也 則同類同性 異類異性 曰本也 則凡在別類理中 卽非玆類本性 曰體也 則凡不在其物之體界內 亦非性也 但物有自立者 而性亦爲自立有依賴者 而性兼爲依賴 / 可愛可欲謂善 可惡可疾謂惡也 通此義者 可以論人性之善否矣 / 西儒說人云 是乃生覺者 能推論理也 曰生 以別于金石 曰覺 以異于草木 曰能推論理 以殊乎鳥獸 曰推論不直曰明達 又以分之乎鬼神 鬼神者 徹盡物理如照如視 不待推論 人也者 以其前推明其後 以其顯驗其隱 以其卽曉及其所未曉也 故曰能推論理者立人於本類 而別其體於他物 乃所謂人性也 仁義禮智 在推理之後也.

이렇게 원칙적으로는 儒家의 주류인 性善說을 따랐지만, 구체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良善習善의 구별을 두고 도덕적 가치를 習善에 집중하였으므로 性善說의 실질적 의미는 그리 강하지 않다: “그러므로 진실로 두 단계의 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良善이요, 習善이다. 무릇 良善이라는 것은 天主께서 원래 性命에 만들어 주신 이니 내게는 아무런 공로가 없는 것이며, 내가 공로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 익혀 을 쌓은 에 그칠 뿐이다.”[379]

[379] <天主實義> 435: 則固須認二善之品矣 性之善 爲良善 德之善 爲習善 夫良善者 天主原化性命之德 而我無焉 我所謂功 止在自習積德之善也.

리치에게 있어서는 인간의 도덕적 주체성이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수동적인 뜻의 性善說에 만족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타고난 良善이라는 것은 하느님의 이 투영된 것일 뿐이며, 이로부터 출발하여 자신의 선택과 노력에 의해 을 쌓는 것을 인간의 할 일로 그는 보았다:

세상 사람들이 태어나 밖에 행할 수가 없다고 한다면 을 이룬다(成善)’는 말이 어떻게 성립하겠는가? 을 행할 뜻이 없이 을 행한다는 일은 천하에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을 행하도록 강제되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여 행할 때 비로소 한 군자라 할 수 있다. 天主께서 양쪽을 모두 행할 수 있는 을 인간에게 주심으로써 인류를 후하게 해 주셨으니 인간이 이 을 선택할 수 있음으로 해서 善行의 공로가 커질 뿐 아니라 나아가 그 공로가 우리의 공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과녁을 세워놓는 것이 쏘는 사람이 빗맞추기 바라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세상에 惡情이 있는 것도 사람들이 빠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金石鳥獸 따위의 善惡을 행할 능력이 없으니, 사람의 善惡을 행함으로써 공로를 세울 수 있는 것과 다르다. 그 공로는 功名의 공로가 아니라 德行의 참된 공로다. 사람의 性情이 본래 선한 것이라고 해서 세상 사람들이 그대로 모두 善人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을 가진 사람만이 곧 善人이 되는 것이다. 에 더해졌을 때 이 발휘되는 것이며, 이것이 本善性體로부터 더 위로 올라가는 길이다.”[380]

[380] <天主實義> 431-432: 苟世人者 生而不能不爲善 從何處可稱成善乎 天下無無意于爲善而可以爲善也 吾能無强我爲善而自往爲之 方可謂爲善之君子 天主賦人此性能行二者 所以厚人類也 其能取捨此善 非但增爲善之功 尤 其功爲我功焉 故曰 天主所以生我 非用我 所以善我 乃用我 此之謂也 卽如設正鵠 非使射者失之 亦猶惡情於世 非以使人爲之 彼金石鳥獸之性不能爲善惡 不如人性能之以建其功也 其功非功名之功 德行之眞功也 人之性情雖本善 不可因而謂世人之悉善人也 惟有德之人乃爲善人 德加于善 其用也在本善性體之上焉.

善惡의 가능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人性을 향하는 데는 가 그 표준이 된다. 리치는 依賴者(accident)로 보고 目的因(final cause)形相因(formal cause)의 성격을 가질 수 있는 것으로 인정한 것을 앞 절에서 보았는데, 도덕에 접근하는 기준으로서 의 중요성을 크게 강조한 것이다:

무릇 의 발현에 있어서 病疾이 없다면 스스로 필히 을 들을 것이니 절도에 어긋나는 일도 없고 선하지 않은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라는 것이 의 발(밑바닥)과 같은 것이어서 편벽된 폐단을 드러내는 때가 있다. 따라서 언제나 그 바라는 바만을 따르고 가 가리키는 바를 살피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몸에 병이 없을 때는 입으로 먹는 것이 단 것은 달게 느껴지고 쓴 것은 쓰게 느껴지지만 문득 병이 나면 단 것이 쓰게 느껴지고 쓴 것이 달게 느껴질 수 있다. 性情에 병이 들면 사물을 대함에 느낌이 잘못되어 에 어긋나게 되니 그 사랑하고 미워하는 일과 옳고 그름을 가리는 일이 바르고 진실되기가 어렵게 된다. 그러나 본성은 그 자체가 선한 것이니 이 또한(병이 났을 때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선하다고 칭하는 데 장애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人性은 논리를 능히 펼 수 있으므로 良能이 남아있기만 하다면 자신의 병을 알아내어 치료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381]

[381] <天主實義> 429: 夫性之所發 若無病疾必自聽命于理 無有違節 卽無不善 然情也者 性之足也 時著偏疾者也 故不當壹隨其欲 不察于理之所指也 身無病時 口之所啖 甛者甛之 苦者苦之 乍遇疾變 以甛爲苦 以苦爲甛者有焉 性情之已病 而接物之際悞感而拂于理 其所愛惡 其所是非者 鮮得其正 鮮合其眞者 然本性自善 此亦無碍于稱之爲善 蓋其能推論理 則良能常存 可以認本病 而復治療之.

이란 인간이 자발적인 의지를 가지고 을 이루어나가는 결과 얻어지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우리 西國 학자들은 이 곧 神性의 아름다운 의복이며, 의로운 생각과 의로운 행위를 오래 익힘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의복이라 함은 입을 수도 있고 벗을 수도 있다는 뜻이며, 기꺼이 을 행하려는 마음으로부터 이것을 얻으면 이 곧 聖賢이며, 不善者는 이와 반대이다. 다만 는 모두 무형의 의복이어서, 오직 무형의 마음, 즉 내가 말하는 에만 입힐 수 있는 것이다.”[382](리치가 <天主實義> 文面에서 이라 하는 것은 하느님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에 반대되는, ‘精神의 뜻에 가까운 것이다.)

[382] <天主實義> 438: 吾西國學者謂德乃神性之寶服 以久習義念義行生也 謂服 則可著可脫 而得之于忻然爲善之念 所謂聖賢者也 不善者反是 但德與罪皆無形之服也 而惟無形之心 卽吾所謂神者 衣之耳.

을 추구하는 기준으로 이해되었다:

유형의 몸에 耳目口鼻四肢五司가 있어서 사물과 交覺하듯이 무형의 정신에는 三司가 있어 接通하니, 司記含, 司明悟司愛欲이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맛보고 느끼는 것이 모두 그 을 몸의 다섯 감각기관을 통해 정신에게 보내며, 정신은 司記者를 시켜 이것을 받아들인 다음 잃어버리지 않도록 창고에 재이듯이 보관한다. 나중에 우리가 한 가지 사물에 明通하고자 하는 것이 있으면 司明者를 시켜 司記者가 보관하고 있는 그 사물의 을 꺼내 그 몸을 재구성해 내는데, 그 참된 性情當否에 맞추는 것이다. 그 선한 것은 司愛者를 시켜 사랑하고 바라게 하며, 그 악한 것은 미워하고 싫어하게 한다. 무릇 司明者를 밝히는 것이고 司愛者는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것이다. 三司가 갖추어져 있으면 우리가 이루지 못할 일이 없는데, 司愛者司明者가 갖춰지면 司記者는 저절로 이뤄진다. 따라서 講學에서는 이 두 가지만을 논할 따름이다. 司明者을 추구하고 司愛者를 추구한다. 司明者大功에 있고 司愛者大本에 있다. 따라서 군자는 仁義를 중히 여기는데, 이 둘은 서로 필요로 하는 것이어서 한쪽을 없이할 수 없다. 司明者을 밝힌 뒤에야 司愛者가 이를 사랑하고 아낄 수 있으며 司愛者을 사랑한 뒤에야 司明者가 이를 살펴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이라는 것이 또 精髓이기도 하므로 이 풍성하면 司明者도 더 밝아진다. 따라서 군자의 에는 또 을 위주로 하는 것이다.”[383]

[383] <天主實義> 449-451: 有形之身 得耳口目鼻四肢 五司 以交覺于物 無形之神有三司 以接通之 曰司記含 司明悟 司愛欲焉 凡吾視聞啖覺 卽其像由身之五門竅 以進達于神 而神以司記者受之 如藏之倉庫 不令忘矣 後吾欲明通一物 卽以司明者取其物之在司記者像 而委曲折衷其體 協其性情之眞于理當否 其善也 吾以司愛者愛之欲之 其惡也 吾以司愛者惡之恨之 蓋司明者 達是又達非 司愛者 司善善又司惡惡者也/ 三司已成 吾無事不成矣 又其司愛 司明者已成 其司記者自成矣 故講學只論其二爾已 司明者尙眞 司愛者尙好 是以吾所達愈眞 其眞愈廣闊 則司明者愈成充 吾所愛益好 其好益深厚 則司愛益成就也 若司明不得眞者 司愛不得好者 則二司者俱失其養 而神乃病餒/ 司明之大功在義 司愛之大本在仁 故君子以仁義爲重焉 二者相須 一不可廢 然惟司明者明仁之善 而後司愛者愛而存之 司愛者愛義之德 而後司明者察而救之 但仁也者 又爲義之至精 仁盛 則司明者滋明 故君子之學又以仁爲主焉.

이처럼 儒家 윤리의 주요 개념을 기독교 교리 내지 스콜라철학의 체계 속에 편입시키는 것이 리치가 <天主實義>에서 힘을 기울인 작업이었다. 이 작업이 기술적 의미에서 얼마나 성공적인 것이었는지는 중국인(서학을 받아들인 사람들과 공격한 사람들 모두)의 반응 속에서 검증될 수 있는 것으로 제르네의 치밀한 작업이 나와 있다.[384] 그러나 기술적 차원보다 더 근본적 차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절대성과 배타성이 儒家 윤리체계와 일으키는 갈등을 어떻게 소화시키느냐 하는 것이었다.

[384] Gernet 전게서: 193-247.

리치는 儒家의 충효와 기독교 신앙을 이렇게 조화시키려 했다:

무릇 사람에게는 이 세상에 어버이가 셋 있으니, 그 첫째가 天主, 둘째가 임금이요, 셋째가 몸으로 낳은 어버이라, 세 어버이의 뜻을 거스르는 자가 곧 불효자다. 천하에 가 있으면 세 어버이의 뜻이 서로 어긋나지 않으니, 무릇 아쪽 어버이는 자기 자식에게 위쪽 어버이를 섬겨 모시도록 명할 것이니 자식된 자는 한 어버이에 따름으로써 세 어버이에게 모두 효도할 수 있다. 천하에 가 없을 때는 세 어버이의 이 서로 어긋나 아래쪽 어버이는 그 위쪽 어버이를 따르지 않고 자식을 제 것으로 하여 자기만을 받들고 위를 바라보지 못하게 하니, 그 자식된 자는 위쪽의 명에 따라 설혹 그 아래쪽을 범하는 일이 있어도 그 효도에 손상이 없을 것이로되 만약 아래쪽을 좇아 위쪽을 거슬리는 짓은 진정 크게 불효한 짓이라 할 것이다.”[385]

[385] <天主實義> 558: 凡人在宇內有三父 一謂天主 二謂國君 三謂家君也 逆三父之旨者 爲不孝子矣 天下有道 三父之旨無相悖 蓋下父者 命子奉事上父者也 而爲子者 順乎一卽兼孝三焉 天下無道 三父之令相反 則下父不順其上父 而私子以奉 弗顧其上 其爲子之者 聽其上命 雖犯其下者 不害其爲孝也 若從下者逆其上者 固大爲不孝者也.

얼른 보아서는 信仰이 나란히 주어져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은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그렇다는 이야기이고, 실제 갈등이 일어날 경우에는 큰 어버이에 대한 신앙이 작은 어버이에 대한 충성이나 효도보다 앞서도록 되어 있다. 도덕과 윤리를 서술하는 데 아무리 정교한 이론을 부연한다 하더라도 신앙의 절대성은 뛰어넘을 수 없는 엄연한 벽으로 존재했다. 황제의 기능이 위축되어 있거나 부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던 明末의 상황에서는 이런 한계가 그리 강렬하게 드러나지 않을 수 있었을지 모르겠으나, 정상적인 중국의 체제 안에서는 사회의 주류가 접근할 수 없는 장벽이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Posted by 문천

 

3補儒易佛論科學활동

 

 

1절 리치의 易佛論

 

리치는 중국에 들어오면서부터 불교 공격을 시작했다.[298] <中國誌>에서 중국의 제 종교를 소개할 때 불교에 관한 설명에서 진리의 빛이 몇 가닥 그 속에 들어 있다 하더라도 불결한 허위에 파묻혀 있어서 알아볼 수조차 없을 지경이라는 것, “좋은 계율이 있어도 제대로 지키는 사람이 희귀하고, 멋대로 계율을 어기는 죄는 布施나 기도를 통해 얼마든지 속죄해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299]

[298] 최소자, 명말 지식인 徐光啓의 서학수용태도(<한국문화연구원논총>52, 1987)에는 당시 천주교, 특히 초기 예수회적 전교방법은 처음 불교에 접근하였다가 곧 유교에로 접근 방향을 바꾸면서하였는데, 이는 리치 등이 중국 진입 초에 승복을 입었던 사실을 지나치게 확대해석한 느낌을 준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사비에르가 일본에 갔을 때부터(1549-51) 불교를 宿敵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리치가 肇慶에 처음 들어가서부터 불교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한 것은 Gernet 상게서: 72-82에 드러나 있다. 유생 복장을 했을 때 儒家의 사상에 접근하려 애쓴 것과 달리 승복을 입었을 때는 사상적 접근이 따르지 않았다.

[299] <中國誌> 99.

그리고 이어서 중국 학인들의 관점을 빌려 불교에 대한 비난을 계속했다. 불교가 처음 중국에 들어올 때 매우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진 까닭은 영혼의 불멸성과 來世의 행복을 가르친 때문이었으나 당시 중국 학인들의 기록을 보면 이 종교가 진리에 대한 접근에서 다른 종교들보다 뛰어난 반면, 그 허구성의 극악한 병폐는 모르는 사이에 그 못지않게 빨리 퍼져나갔다고 하였다. 불교의 발전을 가로막은 가장 큰 힘은 중국 지식인들이 이 종교에 내려준 평판이었으니, 불교를 처음 받아들인 임금들이 비명에 참혹한 죽음을 맞았으며, 불교와 관계된 모든 사물이 쇠퇴하고 멸망에 이른 것이 불교 때문이라는 것이었다.[300]

[300] <中國誌> 100.

승려들에 대해서도 리치의 비판에는 가차가 없다. 그 중에는 정확치 못한 것도 있고 자기중심적 관점에 얽매인 점도 많다: “(절에 사는) 승려들은 직접 노동을 통해 비용을 벌어들이기도 하지만 신자들의 보시, 또는 이미 만들어져 있는 사찰의 수입원에 생계를 의지한다. 사찰의 하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 특별한 계층은 온 나라에서 가장 비천하고 경멸받는 계급으로 간주되며, 또 실제로 그런 대접이 합당하기도 하다. 그들의 출신은 사회 밑바닥의 찌꺼기이며, 어렸을 때 노예로서 절에 팔려온다. 하인 노릇을 하며 제자가 되고, 나중에는 자기 스승들의 신분과 수입을 계승한다. 이런 계승방법이 僧職의 보존을 위해 통용된다. 성스러운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자기 의지로 이 더러운 소굴에 끼어들 사람은 한 사람도 있을 수 없다. 제자들은 스승들의 무지몽매를 그대로 이어받는데다가 학문과 품행을 향상시키려는 노력도 없으니 그들의 사악한 성향은 날이 갈수록 더욱더 나빠지기만 할 뿐이다. 이런 생활방식에 대한 예외가 아주 없지는 않겠지만, 그런 사람들은 학문을 좋아하고 스스로의 노력으로 무엇인가를 성취하는 희귀한 몇몇일 뿐이다.”[301]

[301] <中國誌> 100-101.

宋代에 시작된 승려집단의 타락현상은 元代를 지나 明代까지 계속되어, 후기에 이르러서는 지식인으로서 불교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출가하여 僧門에 들기보다는 재가수행의 길을 걷는 이른바 居士불교의 양상이 펼쳐지고 있던 것[302]에 비추어 대략 수긍이 가는 이야기다. 1640년대에 나온 서학 책자인 <闢邪集>에 실린 際明禪師의 편지에도 오늘날의 불제자들은 이름만 있지 뜻이 없는 자들이 많으니, 外難을 계기로 하여 그들을 警悚시킨다면 불법을 위해 다행한 일이 되지 말란 법도 없을 것이라 했다.[303] 그러나 達觀이나 智旭처럼 불교계만이 아니라 당대의 사상계를 지도하는 위치에 있던 고승들에 대해서까지 심한 야유를 퍼붓는 것을 보면 무차별한 비판이라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다.

[302] K Ch'en, Buddhism in China (Princeton, 1964): 447.

[303] <天主敎東傳文獻續編> 910: 且今時釋子 有名無義者多 藉此外難警悚之 未必非佛法之幸也.

達觀이라는 사람은 상당한 학식을 가진, 약삭빠르고 영리한 자인데, 모든 종파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상황에 따라 이 편을 표방했다가 저 편을 표방했다가 한다. 그는 리치 신부를 만나고 싶어 했는데, 어떤 관리들이 그러는 것처럼 자기 앞에 무릎 꿇고 찾아오면 만나주겠다는 것이었다. 이런 뜻을 리치 신부에게 심부름꾼을 시켜 전했는데, 신부는 지체 없이 답신을 보냈다. 신부는 그에게서 배우고 싶은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만약 達觀 당신이 배우고 싶은 것이 있다면 얼마든지 찾아와서 배워 가라는 것이었다. 리치는 이 사람이 속한 비천한 계급과는 아무 관계도 가지지 않는 편이 좋다는 생각이었다. 사기꾼 중에도 이 사기꾼의 거만함은 도저히 참아낼 수 없는 것이었다. 허기야 사탄의 학교에서 가르쳐 준 것이 거만함밖에 무엇이 있었겠는가? 정직한 사람이라면 아무도 참아낼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그들(정직한 사람들)은 이 사람에 대한 증오심을 키워 왔으며, 그의 몰락을 바라보고 있었다.”[304]

[304] <中國誌> 402.

達觀이 몇몇 편지에서 금상황제의 인격을 손상시키는 글을 적은 것이 또한 드러났다. 그가 조심성도 없이 편지에서 황제를 비난한 것은 황제가 우상숭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어머니에게 효성이 충분치 못하다는, 중국인에게는 중요한 不德 하나를 지적한 것이었다. 심한 笞刑 끝에 그 자리에서 죽어버렸다. 죽은 후 그의 이름은 육체의 고통에 상관하지 않는다고 허황한 장담을 하는 사람의 대명사처럼 되었는데, 그는 평소의 장담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매질을 당하는 어느 하찮은 인간 못지않게 비명을 질러댔던 것이다.”[305]

[305] <中國誌> 403.

그 교파의 또 하나 괴수인 智旭은 북경에서 쫓겨나 머나먼 광동성으로 추방되었는데, (그가 자리잡은 南華寺에서) 가까운 도시 韶州에 그를 추종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그 에서도 가장 구석진 곳(해남도)으로 거듭 추방되었다. 천주님이 오직 하늘에서만 권능을 가지셨다고 감히 떠들어대던 그는 그분의 권능이 땅 위에도 미친다는 사실을 쓰라린 경험을 통해 배웠다.”[306]

[306] <中國誌> 404. 智旭은 선교사들이 불교를 공격한다는 소문을 듣고 천주가 하늘에서 권능을 가졌다면, 이 땅에서는 우리 神佛이 할 수 있는 일이 많다고 하며 선교사들을 실력으로 공격할 뜻을 비쳤다고 리치가 기록한 바 있다: 같은 책 400.

虞淳熙라는 사람이 리치에게 편지를 보내, 자기가 보기에는 리치의 책에 나오는 내용이 불교와 비슷한 것이 많은데 어째서 리치는 불교 서적을 널리 읽어보지도 않고 불교를 敵對하는지 묻고, 불교 서적의 목록까지 적어 리치에게 읽기를 권한 일이 있다. 이에 대해 리치는 아주 긴 답장을 써 보냈지만, 불교를 비난하는 이유는 우상을 숭배하기 때문이라고 간단히 잘라 말했다.[307]

[307] <辨學遺牘> 맨 앞의 虞德園銓部與利西泰先生書利先生復虞銓部書. 이 편지들이 언제 오고간 것인지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16088월 아콰비바 총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언급한 것으로 보아 이보다 약간 앞서 있었던 일 같다.

결국 유일신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많은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리치가 불교를 배척한 궁극적 근거였다고 할 수 있다. 앞의 제12절에서 三淮화상과의 논쟁을 소개했는데, 그 논쟁의 출발점도 창조주-주재자로서 신의 존재를 둘러싼 것이었다. 三淮佛性이 만물에 遍在하는 것이며 모든 造化가 마음 하나에 달려 있다고 하는 唯心論 입장을 취했다. 이에 대해 리치는 마음속의 형상과 몸 밖의 실체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며, 형상을 수용하는 마음의 기억능력과 재현능력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라고 스콜라철학의 관점에서 반박했다.[308]

[308] <中國誌> 339-343.

<天主實義>에서도 맨 앞 두 편에서 창조주-주재자로서 유일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데 주력했다먼저 주재자의 존재를 세 가지 이유를 들어 증명했다. 첫째는 사람들의 타고난 誠情이 하나의 절대자를 우러러보게 되어 있어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은 어진 부모에게 바라듯 도움을 바라고 죄지은 사람은 무서운 을 가진 듯 마음이 무겁고 괴로우니 이것이 사람의 마음을 주재하는 절대자가 계신 증거라는 것이다. 둘째는 도 없고 知覺도 없는 물체는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법인데 日月星辰의 움직임 같은 것을 보아도 주재자의 존재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셋째는 知覺은 있지만 靈性이 없는 동물들이 온갖 영리한 짓을 하는 것은 靈性을 가진 존재가 도와주는 덕분이니, 이것이 바로 주재자라는 것이다.[309]

[309] <天主實義> 29-31.

그리고는 이어서 그 주재자가 바로 창조주임을 다시 세 가지 이유를 들어 설명했다. 첫째 이유는 목수가 있어야 집이 만들어지듯이 모든 존재는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둘째 이유는 우주 만물 사이에 존재하는 질서가 그 제작자의 의지가 아니고서는 그토록 공교로울 수가 없다는 것이다. 셋째 이유는 생물의 출생을 그 씨앗이나 알, 로 아무리 거슬러 올라가도 물체가 스스로를 만들 수는 없는 것이니, 누군가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310]

[310] <天主實義> 34-40.

이렇게 창조주-주재자로서의 신의 존재를 세워놓은 다음 이를 근거로 도가의 와 불가의 을 공격한다: “내가 가지지 않은 것을 남에게 주어서 가지게 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한 이치인데, ‘이니 니 하는 것들은 스스로 가진 것이 하나도 없는 것들이 다른 것에게 어떻게 을 주어서 물체로 만든단 말인가?”[311] 하나하나의 물체를 놓고는 처음에 없다가 나중에 있게 된다고 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전체를 놓고 말한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태어나기 전에는 과연 그 사람이 없다가 태어난 이후에는 있게 된다. 그러나 그 사람이 태어나기 전에는 그 어버이가 있어서 낳아주는 것이다. 천하의 물체에 이렇지 않은 것이 없으니, 물체가 하나도 없이 渾然하던 시초에는 천주가 계셔서 만물의 근원을 여신 것이 틀림없다.”[312] 五常은 모양이 없고 소리가 없지만, 누가 이것을 없는 것이라 하는가? 無形한 것과 없는 것은 하늘과 땅처럼 서로 다른 것이다. 이것()으로 가르침을 삼는다면 세상을 밝히기는커녕 오히려 더 어둡게 만들 것이다.”[313]

[311] <天主實義> 72: 己之所無 不得施之於物以爲有 此理明也 今 曰空曰無者 絶無所有於己者也 則胡能施有性形以爲物體哉.

[312] <天主實義> 74: 謂每物先無後有 可也 若總而言之 則否也 譬如某人未生之先 果無 某人旣生之後 有也 然未生某人之先 却有某人之親 以生之 天下之物 莫不皆然 至其渾無一物之初 始必有天主 開其原也.

[313] <天主實義> 76: 五常之德 無形無聲 孰爲之無哉 無形者之於無也 隔宵壤矣 以此爲敎 非惟不能昭世 愈滋惑矣.

절대자인 천주는 피조물들과 엄격히 구별되는 존재다. 따라서 궁극적 원리가 만물과 합일한다고 보는 당대의 성향에 대해 하느님의 권능을 넘보다가 악마가 되어 지옥으로 쫓겨간 루시퍼에 비교한 다음, “세상 사람들이 불교의 거짓된 경전을 금하지 않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그 말의 해독에 물든 것이다. 周公, 孔子의 말씀, 중국의 옛 經書后帝를 데리고 놀며 그와 자기가 하나라 한 자가 누가 있는가?” 하여 이런 잘못도 불교에서 말미암은 것으로 비난한다.[314]

[314] <天主實義> 209: 世人不禁佛氏狂經 不覺染其毒語 周公仲尼之論 貴邦古經書 孰有狎后帝而與之一者.

불교 교리 가운데 리치가 가장 열심히 공격한 것은 輪回說이다. <中國誌>에서는 심지어 幼兒살해 관습의 원인으로 윤회설을 지목하기도 한다:

이곳에서 벌어지는 악행으로 (노예제도보다) 더 끔찍한 것은 여러 에서 여자 갓난아이들을 물에 빠뜨려 죽이는 관습이다. 이런 행위를 저지르는 까닭은 어버이들이 부양할 능력이 없는 데 절망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굶어죽을 지경이 아니면서 이런 짓을 하기도 하는데, 장차 언젠가는 더 이상 아이들을 돌봐줄 수 없게 되어 모르는 사람들, 잔인한 사람들에게 노예로 팔아야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말하자면 잘해 주기 위해서 잔인한 짓을 하는 셈이다. 이런 야만스런 짓을 그리 끔찍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아마 그들이 靈魂離體說, 또는 輪回說을 믿기 때문일 것이다. 영혼이 사망하는 육체를 떠나 탄생하는 다른 육체로 옮겨간다고 믿기 때문에 이 무서운 죄악을 경건한 행위처럼 분식하면서 아이를 죽이는 것이 아이에게 좋은 일을 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아이들을 태어난 집안의 가난과 굴레에서 풀어줌으로써 형편이 더 나은 자리에 태어날 기회를 주는 것이다. 그 결과 죄 없는 아이들을 이렇게 죽이는 일이 비밀리에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주변사람들이 아는 가운데 공공연히 저질러지는 것이다.”[315]

[315] <中國誌> 86-87.

<天主實義>에서도 윤회설 비판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리치는 윤회설을 만든 것이 피타고라스였으며, 이 설을 만든 까닭은 사람들의 악행을 막기 위해 포학한 사람은 다시 태어나 虎豹가 되고, 음탕한 사람은 개돼지가 되고, 도둑질 하는 자는 여우, 이리, 늑대 따위가 된다는 등 報應을 갖고 위협한 것이라 설명한[316] 다음 이것이 석가에게 흘러가 채용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피타고라스가 죽은 후 그 말을 이어받은 門人이 적었다. 그 때 이 말이 문득 외국으로 흘러나가 身毒[인도]에 이르니 釋氏가 새 교파를 세우려 함에 이 윤회의 설을 이어받고 거기에 六道을 비롯한 온갖 거짓말을 보태 책으로 묶어 이라 일컬었다. 여러 해가 지난 후 한나라 사람들이 그 나라에 이르러 이것을 중국에 전한 것이다. 이것이 그 내력인 바, 비록 확실한 근거는 없다 하더라도 이치로 따져서 믿을 수 있다. 身毒은 작은 땅으로 上國의 반열에 끼지 못하며 文禮도 없고 德行도 없는 곳이어서 諸國史書에 그 존재조차 다루지 않았는데, 어찌 이 넓은 천하에 보여줄 만한 것이 있겠는가?”[317]

[316] <天主實義> 260.

[317] <天主實義> 261: 旣沒之後 門人少嗣其詞者 彼時此語忽漏國外 以及身毒釋氏圖立新門 承此輪廻 加之六道 百端誑言 輯書謂經 數年之後 漢人至其國而傳之中國 此其來歷 殊無眞傳可信 實理可倚 身毒微地也 未班上國 無文禮之敎 無德行之風 諸國之史未之爲有無 豈足以示普天之下哉.

그리고는 윤회설이 이치에 맞지 않는 증거라 하여, 만일 사람의 영혼이 다른 사람이나 동물로 옮겨간다면 마땅히 前生의 일을 기억해야 할 것인데 아무도 기억하는 사람이 없다 하고,[318] 불가와 도가의 책에 前生을 기억한 예가 많은 것에 대해서는 마귀의 소행이라고 단정했다:

[318] <天主實義> 264: 一曰 假如人鬼遷往他身復生世界 或爲別人 或爲禽獸 必不失其本性之靈 當說記念前身所爲 然吾絶無能記焉 倂無聞人有能記之者焉 則無前世明甚.

그런 일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마귀가 사람을 속여 자기 무리를 따르게 하고 싶은 뜻에서 사람이나 짐승의 몸에 붙어서 그로 하여금 어느 집 자식이라 하게 시키고 그 집안일을 읊게 함으로써 그 거짓을 믿게 만드는 것이다. 기억한다는 것은 필히 불가나 도가의 무리가 아니면 불교가 중국에 들어온 뒤의 일이다. 모든 곳에서 온갖 생물이 태어나고 죽어가는 숫자가 엄청나게 많은 것은 고금에 변하지 않는 일인데, 어이하여 불가를 제외하고는 여러 나라, 여러 학파의 뛰어난 인물들이 千卷萬句를 기억할 만큼 학식이 廣淵함에도 前世의 일 한 가지를 기억해 내지 못하는 것인가?”[319]

[319] <天主實義> 266: 西士曰 魔鬼欲誑人而從其類 故附人及獸身 詒云爲某家子 述其家事 以徵其謬 則有之 記之者必佛老之徒或佛敎入中國之後耳 萬方萬類生死衆多 古今所同 何爲自佛氏而外 異邦異門雖齊聖廣淵 可記天卷萬句 而不克記前世之一事乎.

인생을 苦海로 보는 불교적 관점에는 리치도 동의한다. 中士의 입을 통해 설령 太平之世를 만난다 한들 成全無缺한 집이 어디 있는가? 재화가 있으면 자손이 없고, 자손이 있으면 재능이 없고, 재능이 있으면 몸에 안일이 없고, 안일을 얻으면 권세가 없다. 알지 못게라, 천주께서 무슨 까닭으로 사람을 이 患難의 자리에 나게 하셨는지. 그 사람을 사랑하심이 오히려 禽獸에게만도 같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을 던져놓고[320] 그에 대한 西士의 답으로 사람들의 괴로움을 연민하여 늘 울던 데모크리토스,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비웃어 늘 웃던 헤라클리토스의 이야기와 사람의 출생을 哭弔하고 죽음을 축하하는 어느 나라의 이야기로 이에 공감을 표한[321] 다음 인간의 위치를 이렇게 설명한다.

[320] <天主實義> 117-124.

[321] <天主實義> 126: 古西國有二聞賢 一名黑蠟 一名德牧 黑蠟恒笑 德牧恒哭 皆因視世人之逐虛物也 笑因譏之 哭因憐之耳 又聞近古一國之禮(不知今尙存否) 凡有産子者 親友共至其門哭而弔之 爲其人之生于苦勞世也 凡有喪者 至其門作樂賀之 爲其人之去勞苦世也 則又以生爲凶 以死爲吉焉 夫夫也 太甚矣 然而可謂達現世之情者也.

現世는 원래 인간의 세상이 아니고 짐승들의 거처다. 짐승들이 여기서 오히려 더 편안한 것은 이 까닭이다. 인간이 이 세상에 있는 것은 잠시 머무르는 것이기 때문에 불편하고 불만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의 원래 집은 今世 아닌 後世에 있는 것이요, 사람들 사이가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니, 그곳에서 참된 삶을 살 것이다. 今世는 짐승의 세상이므로 온갖 鳥獸들은 그 모습이 땅을 향해 엎드려 있는 것이요, 인간은 하늘의 백성이므로 머리를 쳐들고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다. 今世를 본 집으로 삼는 자들은 짐승의 무리이니, 천주께서 인간에게 괴로움을 주시는 일이 진정 이상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322]

[322] <天主實義> 127-128: 現世者 非人世也 禽獸之本處所也 所以于是反自得有餘也 人之在世 不過暫次寄居也 所以于是不寧不足也 ... 吾本家室 不在今世 在後世 不在人 在天 當于彼創本業焉 今世也 禽獸之世也 故鳥獸各類之像俯向於地 人爲天民 則昻首向順于天 以今世爲本處所者 禽獸之徒也 以天主爲薄於人 固無怪耳.

이에 中士後世의 천당, 지옥을 말한다면 바로 불교와 같은 것이 아니냐고 함에 천주교는 오래된 인데, 釋氏西民이므로 필히 그 을 훔쳐들었을 것이다. 무릇 私道를 전하려 함에 있어 옳은 말을 몇 가지라도 끼워놓지 않는다면 믿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하고 이어서 釋氏가 태어나기도 전에 천주교인들은 이미 이 설을 가지고 있었다고까지 한다.[323]

[323] <天主實義> 129-130: 中士曰 如言後世天堂地獄 便是佛敎 吾儒不信 / 西士曰 是何語乎 佛氏戒殺人 儒者亦禁人亂法殺人 則儒佛同歟 鳳凰飛 蝙蝠亦飛 則鳳凰蝙蝠同歟 事物有一二情相似 而其實大獲不同者 天主敎 古敎也 釋氏西民 必竊聞其說也 凡欲傳私道者 不以三四正語雜入 其誰信之 釋氏借天主天堂地獄之義 以傳己私意邪道 吾傳正道 豈反置佛講乎 釋氏未生 天主敎人已有其說 修道者後世必登天堂受無窮之樂 免墮地獄受不息之殃 故知人之精靈常生不滅. 천주교인이 석가보다 먼저 천당, 지옥의 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 리치의 말에 대해 영문판 번역자는 여기 말하는 천주교가 유태교를 포함하는 것 같다고 설명했지만,(<天主實義> 영문판 142: 5, 6) 이것은 불교의 연원을 잘 알지 못한 리치의 착오를 덮어주려는 견강부회로 보인다. 리치가 천주교의 이름으로 유태교까지 포괄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리치가 중국에 귀화한 지 오래되는 開封의 유태인들과 연락을 가져서 그쪽 제사장이 리치에게 만일 돼지고기 먹는 것만 삼가겠다면 유태교의 높은 사제직을 주겠다는 제안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中國誌> 107-109.

리치는 인간이 禽獸, 草木 이하 다른 만물과 다른 근본적 차이가 靈魂을 가졌다는 데 있다고 했다. 그가 말한 靈魂이란 禽獸覺魂, 草木生魂과 다른 차원의 것으로서 인간으로 하여금 物情을 알게 하고 사물을 推論케 하며 理義를 가리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靈魂覺魂, 生魂 따위와 달리 永存不滅하는 것이어서, 靈魂의 관점에서 본 인간은 有始無終한 존재로 無始無終한 천주를 제외하고는 만물보다 높은 곳에 자리한다는 것이다.[324]

[324] <天主實義> 133-134: 삼비아시(Francesco Sambiasi 畢方濟, 1582-1649)<靈言蠡勺>에서 이 주제를 상세히 논했다. 박종홍, 西歐思想導入批判攝取(<亞細亞硏究> 12-3, 1969: 17-75), 최동희, <西學에 대한 韓國 實學反應>(서울, 1988)은 모두 이 주제에 상당한 비중을 둔 연구들이다.

따라서 인간이 동물로 환생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輪回說을 이유로 殺生을 꺼린다는 것도 근거 없는 일이며 삼라만상은 인간에게 쓰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만일 인간이 정말로 변하여 禽獸가 된다고 한다면 君子는 진정 작은 생물 하나 죽이는 것을 사람 죽이는 것과 같이 삼가야 할 것이니, 비록 그 겉모양이 다르다 하더라도 같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미 [인간이] 禽獸로 변하지 않는 이치를 밝히 증명하였으니 殺生도 없다는 것이 또한 분명하다. 천주께서 천지와 만물을 만드신 일을 한 번 생각해 본다면 그 어느 하나도 사람에게 쓰이도록 만들지 않으신 것이 없다. 무릇 一月星辰은 하늘을 수놓아 우리를 비춰주고 萬色을 비추어 우리가 보게 한다. 鳥獸 가운데는 毛羽皮革을 가져서 옷과 신을 만들 만한 것이 있고 寶牙角殼을 가져서 奇器를 만들 만한 것이 있으며, 妙藥을 품고 있어서 疾病을 다스리는 데 좋은 것이 있고 좋은 맛을 가져서 인간의 老幼를 양육할 만한 것이 있다. 이런 좋은 것들이 쓰임새 없이 어찌 그냥 존재하겠는가?”[325]

[325] <天主實義> 286-288.

그러므로 식물이건 동물이건, 인간만 아니라면 잡아먹는 데 거리낌이 있을 수 없다. 中士천주께서 산 것을 내심은 필히 그 삶을 사랑하셔서 그 죽음을 바라지 않으신 것이리니, 殺生함이 그 높으신 뜻에 맞지 않는가[326] 하는 물음에 西士는 이렇게 답한다:

[326] <天主實義> 294: 中士曰 天主生生者 必愛其生 而不欲其死 則戒殺生順 合其尊旨矣.

草木 또한 生魂을 가진 것이니 마찬가지로 산 것인데 당신은 매일 나물을 뜯어먹고 나무를 베어 불 때면서 필히 말하기를 천주께서 이 나물과 나무를 내셔서 인간이 쓰도록 마련하신 것이니 이를 쓰는 것이 무방하다하리라. 나 또한 말하리라. 천주께서 저 새와 짐승들을 내셔서 우리가 쓰도록 하셨으니 이를 죽여 人命을 양육하는 데 쓰는 것이 무엇이 잘못되었느냐고. 의 규범에도 다른 사람이 네게 베풀기 원치 않는 바를 다른 사람에게 베풀지 말라했을 뿐이지, 禽獸에게 베풀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다. 또한 천하의 법률에도 다만 살인을 금하지, 鳥獸 죽이는 것을 막지 않는다. 무릇 鳥獸草木財貨와 마찬가지여서, 다만 이를 씀에 절도가 있으면 족한 것이다. 孟子가 임금을 가르침에도 눈 밭은 그물로 고기를 잡지 못하게 하고 산림에 도끼 들어가는 때를 지키게 하라하였지, 도끼와 그물을 아주 쓰지 못하게 한 것이 아니었다.”[327]

[327] <天主實義> 295-6: 西士曰 草木亦稟生魂 均爲生類 爾日取菜以茹 折薪以焚 而殘忍其命 必將曰 天主生此菜薪以憑人用耳 則用而無妨 我亦曰天主生彼鳥獸以隨我使耳 則殺之而使之以養人命 何傷乎 仁之範 惟言 無欲人加諸我 我勿加諸人耳 不言 勿欲加諸禽獸者 / 且天下之法律但禁殺人 無制殺鳥獸者 夫鳥獸草木 與財貨竝行 惟用之有節 足矣 古孟軻示世主  以數罟不可入洿池 而斧斤以時入山林 非不用也.

7편 뒷부분에 가서 리치의 불교 공격은 절정에 오른다. 中士불상에 참배하고 불경을 읽는 것이 전혀 무익한 일인가묻는 데 대해 西士무익함에 그칠 뿐 아니라 正道를 크게 해치는 짓이다. 異端에 대해서는 祭拜尊崇을 하면 더할수록 죄가 더 커지는 것이다하고는 한 나라에 임금이 하나이듯 천지에도 주인이 하나뿐이며, 두 임금 섬기는 것이 죄가 되듯 천지의 주인을 여럿 모시는 것도 큰 죄가 된다고 했다.[328] 이에 천지의 광대함을 들어 마치 천자가 관리들에게 행정을 맡기는 것과 같이 佛祖, 神仙, 菩薩 등도 천주의 위임을 받은 神格으로 볼 수는 없겠느냐고 하는 中士의 이어진 물음에[329] 대해서는 천주의 절대성을 단호히 강조하여, 地主(天子)와도 격이 같지 않음을 주장한다:

[328] <天主實義> 489-490: 西士曰 奚啻無益乎 大害正道 惟此異端 愈祭拜尊崇 罪愈重矣  / 一家止有一長 二之則罪 一國惟一君 二之則罪 乾坤亦特由一主 二之豈非宇宙間重大罪犯乎.

[329] <天主實義> 491: 中士曰 天主爲宇內至尊 無疑也 然天下萬國九州之廣 或天主委此等佛祖神仙菩薩 保固各方 如天子宅中 而差官布政于九州百郡 或者貴方別有神祖耳.

그 말은 근본을 잃고서도 마치 얻은 것처럼 들려서 세밀히 살피지 않으면 잘못 곧이듣기 쉽다. 천주는 한 방면에 자리를 잡고 있으면서 사람을 보내 책임을 맡기지 않으면 다른 방면들을 한꺼번에 다스릴 수가 없는 地主와는 다른 존재다. 上帝은 무한한 것이어서 드러나게 움직이지 않아도 일을 이루시며, 존재하시지 않는 곳이 없다. 九天萬國을 다스리시며 몸소 조화를 일으키심이 우리가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도 쉬운데 다른 이를 보내 대신 다스리도록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330]

[330] <天主實義> 492-493: 西士曰 此語本失而似得 不細察則誤信之矣 天主者非若地主但居一方 不遣人分任 卽不能兼治他方者也 / 上帝知能無限 無外爲而成 無所不在 所御九天萬國 體用造化 比吾示掌猶易 奚待彼流人代司之哉.

그리고는 무릇 經文半句의 잘못이라도 들어 있으면 이를 올바른 경전이라 할 수 없다고 강조한 다음 불교 경전의 천문과 지리 해석이 틀렸음을 지적했다. 예컨대 태양이 밤에는 須彌山의 뒤에 숨는다든가, “천하에 네 개의 대륙이 있는데, 모두 바다 위에 떠 있어 반은 드러나 있고 반은 가라앉아 있다든가, “阿函이 두 손으로 해와 달을 가림으로써 日食月食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한 것 등이다.[331]

[331] <天主實義> 496.

계속해서, 獨身의 권장은 살생의 금지와 함께 인류를 絶滅시켜 천하를 짐승들에게 넘겨주려는 것이냐,[332] 誦經이나 念佛을 통해 천당에 갈 자격이 생긴다면 죽기 직전까지 마음 놓고 악행을 저지르고도 천당 갈 길을 열어주는 것이 아니냐,[333] 하는 등 야유조로 불교를 공격하지만 교리 비판의 차원에서 논할 것은 되지 못한다.

[332] <天主實義> 498.

[333] <中國誌> 499-501.

<天主實義>를 비롯한 리치의 저술에 나타난 불교 공격은 우상숭배라는 초점에 모여 있어서 실질적인 교리 비판이라고 할 만한 것은 매우 빈약하며, 리치의 불교 이해 수준이 피상적인 데 그쳤다는 인상을 준다. 구체적으로 파악된 교리는 四生六道, 人魂輪廻”, “殺生者靈魂不昇天堂”, “及地獄充滿之際, 復得再生于人間”, “禽獸聽講佛法, 亦成道果등으로 모두 윤회설의 테두리를 넘지 않는 것이다.[334] 기독교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리치의 입장은 다음 말로 요약되는 것 같다.

[334] 이 항목들은 같은 책 제4, 5편에서 논의된 것들로 <天主實義> 497단에 모아져 있다. 이용범, 利瑪竇輪廻論攻駁과 그 반응(<김재원박사회갑기념논총>, 1969)에는 리치가 윤회론을 공박한 가장 중요한 이유가 우주관에 대한 兩敎 間의 근본적 차이에 있었다고 논했지만, 이 연구에서 리치의 행적을 검토한 바에 의하면, 리치의 불교에 대한 적대적 태도는 불교의 내용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되었고, <天主實義>를 지을 때까지도 그의 불교에 대한 이해는 피상적 수준에 머물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치에는 옳은 것이 두 가지가 있을 수 없다. 만일 上帝가 옳은 것이라면 곧 다른 가 틀린 것이며, 만일 다른 가 옳은 것이라면 곧 上帝가 틀린 것이다. 조정에 設官分職을 하여도 모두 하나의 임금을 받들며 다른 禮樂이 따로 없고 다른 法令이 따로 없다. 그들 두 는 저희들끼리도 서로 같지 못한데, 하물며 천주와 같다고 할 수 있겠는가? 들은 上帝를 받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 한 몸만을 받드는 것이며 大原大本에는 어두운 것이다.”[335]

[335] <天主實義> 494: 且理無二是 設上帝之敎是 則他敎非矣 設他敎是 則上帝之敎非矣 朝廷設官分職 咸俸一君 無異禮樂 無異法令 彼二氏敎自不同 況可謂天主同乎 彼敎不尊上帝 惟尊一 昧于大原大本焉.

上帝에 대한 태도를 기준으로 去佛補儒의 입장을 취했다는 것은 리치가 虞淳熙에게 쓴 답장에서도 알아볼 수 있다: “멀리서 온 보잘 것 없는 사람이 공자에게 덕을 본 것이 무엇이며 부처에게 원수진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만약 내가 공자에게 예쁘게 굴어 사대부에게 아첨함으로써 서서히 내 설을 펴려는 것이라고 한다면, 중국의 人士 가운데 부처를 믿는 이가 공자를 믿는 이보다 훨씬 많으니, 부처에게도 함께 예쁘게 굴어서 모든 사대부에게 아첨하여 서서히 내 설을 펴려 하지 않겠습니까? , , , 은 모두 몸을 닦고 上帝 섬기는 것으로 를 삼았으니 옳다고 하는 것이요, 佛氏上帝에 대들고 욕하며 그 위에 올라타려 하니 그르다 하는 것입니다.”[336]

[336] <辨學遺牘> 4(<天學初函> 644): 區區遠人 何德於孔 何仇於佛也 若謂竇姑佞孔以諂士大夫 而徐伸其說 則中夏人士 信佛者於信孔者甚多 何不幷佞佛 以盡諂士大夫 而徐伸其說也 堯舜周孔 皆以修身事上帝爲敎 則是之 佛氏 抗誣上帝 而欲加諸其上 則非之.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