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절 국가로서 중국 인식

 

리치의 시대 이전에 중국에 대한 어느 정도 체계적인 서술이 유럽에 나와 있던 유일한 예가 마르코 폴로(1254-1324)<동방견문록>이다. 1275년경에서 1292년경까지 쿠빌라이 칸의 조정에서 지낸 마르코 폴로는 제노아 감옥에서 동료 수인인 작가 루스티첼로의 도움을 받아 25년에 걸친(1270-95) 아시아 여행의 기록을 남겼다.[216]

[216] 마르코 폴로와 ‘Cathay'라는 이름이 얽힌 곡절에 대해서는 D Lach, Asia in the Making of Europe, Vol 1 (Chicago, 1965): 30-48 H Yule & H Bernard, (東亞史硏究會 編譯) <東西交涉史>(원제는 Cathay and the Way Thither, 東京, 1944) 284-384를 볼 수 있다.

<동방견문록>은 당시 독자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인쇄술이 아직 없던 상황에서 수없이 많은 부수가 필사되었고 거의 모든 유럽 언어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대부분 독자들은 이 책을 실제 여행에 근거를 둔 역사나 지리의 참된 정보라고 보기보다 허무맹랑하면서 재미있는 하나의 이야기로 보았을 뿐이다. 이 책 원고는 열두 가지 언어로 무려 140여 종 필사본이 전해지고 있어서 마르코 폴로의 원본이 어떤 내용이었는지 정확하게 재구성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되어 있다.

15세기 말엽 대항해시대에 접어들면서 <동방견문록>이 콜럼버스를 비롯한 항해가들에게 영향을 끼침으로써 이 책의 지리학적 가치가 살아났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이 책의 가장 큰 주제인 ‘Cathay’라는 나라가 실재하는 것인지는 확인이 되지 않고 있었고, 리치가 중국에 들어갈 때까지도 ‘Cathay’가 중국을 가리킨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만약 ‘Cathay’가 존재한다면 중국보다 북쪽이나 서북쪽에 자리 잡고 있으리라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결국 중국이 바로 ‘Cathay’라는 사실을 리치가 밝혀냄으로써 마르코 폴로의 기록의 사실성이 판명되고 지리적 자료로서 가치가 확립되었다. 그러나 리치가 활동한 시기에서 삼백여년 앞서 元朝 치하의 중국을 그린 이 책은 明朝 말기의 중국에 대한 안내로는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기록 방법도 학구적, 체계적인 것이 아니라 신기한 면모를 나열하는 흥미위주였고, 마르코 폴로가 傳聞한 내용 중에는 정확치 못한 것도 많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국인식에 있어서 <동방견문록>의 한계는 저자가 한자문명에 정면으로 접하지 못한 점에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중국을 본격적으로 인식하는 출발점이 된 것은 리치를 비롯한 예수회 선교사들이었다고 하겠다.

리치가 중국에 들어갈 당시 중국에 대한 유럽인들의 지식이 얼마나 빈약한 것이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마르코 폴로가 이야기한 ‘Cathay’를 중국 아닌 다른 나라로, 또는 실재하지 않는 나라로 생각하고 있었던 사실이다. ‘카테이가 바로 중국이라는 사실을 리치가 밝혀냄으로써 마르코 폴로의 기록이 곧 중국을 묘사한 것으로 인정이 되었고, 따라서 중국에 대한 인식의 출발점이 될 수 있었다:

 

타타르인이 중국을 정복할 때 타타르 왕은 북경에 수도를 두고 ‘Campalu’라고 불렀다. 베니스인 마르코 폴로는 타타르 지배시대에 이 나라에 들어온 것 같다. 타타르인과 함께 들어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기록을 통해 중국이 유럽에 알려지게 되었기 때문에 타타르인이 부르는 대로 나라 이름은 ‘Catai’, 수도 이름은 ‘Cambalu’로 알려지게 되었다. 후에 포르투갈인이 아 나라의 명성을 유럽에 전할 때는 ‘China’라는 이름을 썼는데, 샴 지역 주민이 부르는 것을 따른 것 같다. 그리고 수도 이름은 모든 중국인이 부르는 대로 ‘Pekin’이라 했다. 그런 때문에 우리 지리학자들이 이웃한 두 개의 서로 다른 나라들을 머릿속에 그린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름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같은 곳을 가리키는 것이었음을 알 수 없었던 것이다.”[217]

[217] <中國誌>(불어판) 392-394.

 

리치는 북경에서 西域 사람을 만날 때마다 카테이라는 나라의 존재를 아는지 물어보았다. 머지않아 그는 카테이가 중국의 또 하나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거의 확신하게 되어서 그 의견을 인도와 유럽의 상급자들에게 편지로 알렸다. 그러나 인도에서는 다른 방향으로 카테이를 찾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리치의 친구인 로돌포 아콰비바를 비롯해 몇 명의 예수회 선교사들이 아크바르 황제의 초빙으로 모굴 제국의 궁성에서 몇 해 머문 일이 있었다.[218] 모굴 제국 동북쪽에 카테이라는 나라가 있으며, 그 나라에는 기독교인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교회와 사제들이 있고 기독교 전례를 지킨다는 이야기를 이 때 이 선교사들이 들었다고 한다.

[218] W Bangert, A History of the Society of Jesus (St Louis, 1986): 85-86, 150-151 M Harney, The Jesuits in History (New York, 1941): 150-151, 225-226.

예수회의 동인도순찰사 니콜로 피멘타는 이 이야기에 고무되어 벤토 데 고에스를 시켜 카테이를 탐사하게 했다. 고에스는 모굴 궁성에 여러 해 살면서 페르시아의 언어와 문화를 습득한 수도사였다. 리치의 추정도 완벽한 것이 아니었고 당시까지 중국에서는 기독교의 흔적이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카테이가 중국과 다른 나라일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었다.

1603년 초에 인도를 떠난 고에스가 천신만고 끝에 중국 서북쪽 모퉁이의 肅州에 도달한 것은 1605년 말. 그 동안 고에스는 카테이가 바로 중국임을 확인했고, 선교사들이 북경에 자리를 잘 잡고 있다는 소식도 들었다. 고에스는 肅州에 머물면서 북경의 선교사들에게 연락을 취했으나 16073월에 중국인 교우 鐘鳴禮가 선교사들의 편지를 가지고 찾아왔을 때는 중병에 걸려 있었다. 십여 일 후 그는 눈을 감았다. ‘카테이정체 확인의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한 것이다.[219]

[219] <中國誌> 499-521.

리치는 중국의 위도를 북위 19(海南島)에서 42(만리장성) 사이, 경도를 카나리 군도 기준으로 동경 112(雲南省)에서 132(황해 연안) 사이로 기록하였다. 카나리 군도의 본초자오선은 현행 그리니지 본초자오선보다 17도 가량 서쪽이었으므로 리치의 경도 표시는 오늘날의 동경 95도에서 115도 사이로 환산되는 것이다.

위도 측정은 기술적으로 간단한 것이기 때문에 리치의 표시가 거의 정확한 것으로 인정된다. 그러나 경도 측정은 훨씬 복잡한 작업이기 때문에 당시와 같은 작업조건의 제약 속에서 정확한 측정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었다.[220] 리치의 경도 표시는 실제보다 7도 가량 서쪽으로 치우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20] 이때 경도 측정은 행성들 사이의, 또는 행성과 달 사이의 상대적 위치를 측정하여 관측시각과 맞춰 계산하는 방법을 썼는데, 1499년에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개발한 것이다: D 부어스틴, (이성범 역) <발견자들>(원제는 The Discoverers, 서울, 1986): 384-385. 이 방법에는 정밀한 관측기구와 함께 정밀한 시계와 행성운동의 정확한 데이터가 필요했다. 리치를 비롯한 초기 중국 선교사들은 일월식 시각을 측정하는 방법을 썼는데, 이 방법은 아무 때나 측정할 수 없는 대신 정밀한 관측기구(시계를 제외하고)를 필요로 하지 않는 점이 편리한 것이었다.

경도가 전체적으로 7도 가량 치우쳐 있었던 것은 중국에 관한 당시의 지식수준에 비추어 큰 결함이라고 말할 수 없다. 더 중요한 것은 중국의 크기가 남북으로 23도의 위도에, 동서로 20도의 경도에 걸쳐 있다는 상당히 정확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의 유럽인들이 의식하던 유럽의 크기보다 더 큰 것이었다.

중국 인구에 대해서는 1579년판 <廣輿圖>丁數58,550,801로 되어 있는 것을 인용하고, 이 숫자에는 여자와 어린이, 그리고 징세대상이 아닌 군인, 환관, 왕족 등이 빠져 있다는 것을 해설했다. 1600년경의 중국 인구는 15천만 정도로, 같은 시기의 유럽 전체 인구는 1억 정도로 추산되는데,[221] 리치는 이런 윤곽을 대략은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다.

[221] C. McEvedy & R. Jones, Atlas of World Population History (New York, 1978)를 따름. 당시의 중국 인구에 대해 Ho Ping-t‘i, Studies on the Population of China, 1368-1953 (Cambridge-MA, 1959)에는 비슷한 수치가 추정되어 있고 Mark Elvin, The pattern of the Chinese past (Stanford, 1973)에는 2억 정도로 추정되어 있다.

일반적 사실에 관해 정보 부족이나 경험의 한계로 인해 균형을 벗어난 인식을 하는 곳도 많다. 예를 들어, 면화가 중국에 재배된 지 40년 밖에 안 된다고 하기도 하고, 비단 짜는 것이 유럽 상품을 보고 배운 것이라고 하기도 한다.[222] , 수로의 교통망에 탄복해서 배를 타고 갈 수 없는 곳이 거의 없다고 했는데,[223] 이것은 그가 여행하고 거주한 지역이 중국의 동부와 남부에 국한되어 있었던 데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지엽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중국 인식이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그 이전 유럽인들과 다른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는 사실에는 부정의 여지가 없다.

[222] <中國誌> 13.

[223] <中國誌> 12-13.

 

<中國誌> 16장에서 리치는 중국 정치제도의 특징을 서술했다. 중국에서 20여년을 지내는 동안 축적된 지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상당한 이해수준이 확보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永樂帝洪武帝의 조카라고 한다든가, 중국의 모든 법이 왕조가 바뀔 때마다 바뀐다고 한다든가 하는 등 지엽적 착오가 있기는 하지만, 중국 통치체제의 윤곽은 상당히 정확하게 그려져 있다.

리치의 서술에서 가장 흥미 있는 대목은 중국의 체제를 유럽과 대비시킨 곳들이다. 무엇보다 리치는 중국인들이 평화를 좋아하는 점을 주목하였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거의 무한한 영토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구, 그리고 온갖 종류의 물자를 풍성하게 가진 이 나라, 주변의 어느 나라라도 쉽게 정복할 수 있는 육군과 해군을 갖추고 있는 나라임에도, 황제도 국민들도 침략전쟁을 일으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할 뿐, 정복의 야욕은 일으키지 않는다. 이 점에서 이들은 유럽 사람들과 아주 다르다. 그들은 걸핏하면 자기 정부에 불만을 가지고 남들이 누리는 것을 부러워하지 않는가. 4천여 년에 걸친 중국 역사를 열심히 검토해 본 결과, 이런 정복에 대한 아무런 기록도 찾아볼 수가 없었고 중국인들이 제국의 영토를 확장한 일도 찾아볼 수 없었음을 밝혀야겠다.”[224]

[224] <中國誌> 55.

또 이런 대목도 있다: “병사든 군관이든, 문관이든 무관이든, 어느 누구도 시내에 무기를 가지고 다니지 못하게 되어 있다. 전쟁에 출동하는 길이나 훈련에 나가는 경우만 예외다. 그리고 적은 수의 고급관원들은 무장한 호위병을 거느릴 수 있다. 그들(중국인들)은 워낙 무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아무도 집에 무기를 두지 못한다. 여행 시 강도에 대항하기 위한 칼 정도 밖에는 허용되지 않는다. 사람들 사이의 싸움이나 폭력이라면 고작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거나 손톱으로 할퀴는 정도를 넘어서는 일이 없기 때문에 사람이 죽거나 다친다는 일은 들어볼 수 없다. 오히려 싸움을 피하고 물러서는 사람이 점잖고 용기 있는 사람으로 칭송을 받는다.”[225]

[225] <中國誌> 58-59.

또 한 가지 유럽과 대비시켜서 리치가 감탄하는 것은 중국의 문민우위 전통이다: “모든 영역을 질서 있게 관리하는 책임은 전적으로, 그리고 완전히 학인들에게 맡겨져 있다. 병사든 군관이든 군인들은 학인들을 존경하고 아무 여지없이 그들에게 복종하고 따른다. 생도들이 스승의 꾸지람을 받듯이 군인들이 학인들에게 조련을 당하는 모습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전쟁에 관한 정책을 세우고 군사문제를 결정하는 일도 학인에게 맡겨져 있고, 황제는 군사지도자보다 학인의 의견과 권고를 더 귀담아 듣는다. 사실에 있어서 전쟁에 관한 의논에 참여하는 군사지도자의 수는 극히 적고, 그런 기회마저 극히 드물다. 이러한 정서의 근원은 아마 사람의 마음이 학문의 연마를 통해 고상하게 된다는 사실에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제국의 확장에 거의 아무런 야욕도 보이지 않는 이 나라 사람들에게는 먼 옛날부터 군사기술보다 학문연구를 선호하는 경향이 늘 있어 온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226]

[226] <中國誌> 55-56.

질서정연한 관료체계가 또한 리치의 감탄을 자아낸다. 상하간과 동료 간의 엄격한 예절, 그리고 모든 관직의 3년 임기제와 고핵제도를 세밀하게 묘사했다.[227] 그리고 감찰을 맡은 廷臣들이 책임감과 용기를 가지고 고관이나 심지어 황제의 뜻을 거스르면서까지 공익을 추구하는 태도를 높이 평가했다. 그 예로 만력 초에 태자를 폐위하려다가 廷臣들의 반대로 인해 중지했던 일, 稅監으로 파견된 환관들의 횡포에 지방 관리들이 몸을 던져 저항한 일 등을 적어 놓았다.[228]

[227] <中國誌> 56-57.

[228] <中國誌> 49-50, 343-344. 지방관의 저항을 기록한 데는 리치의 큰 협조자가 된 馮應京을 특히 염두에 두었을 것 같다.

그러나 황제에게 아들을 낳아주는 여자가 가장 우대를 받으며, 어느 여자에게서든 첫 번째 얻는 아들이 황제의 자리를 물려받는다. 이것은 황제와 황족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온 나라에 다 같이 적용되는 관습이다한 것을 보면[229] 嫡庶의 구분은 잘 모르고 있던 것 같은데, 아마 당시 태자의 자리를 놓고 갈등을 빚던 당사자 尙洵尙洛이 둘 다 황후의 소생이 아니었던 때문에 이런 착각을 한 것인지.

[229] <中國誌> 75.

황제제도의 이념에 대한 리치의 인식은 중국인의 표준적인 인식에서 그리 벗어나지 않았다: “중국의 황제위는 우리 유럽 군주들과 마찬가지로 아들에게, 또는 다른 황족에게 세습된다. 고대의 임금 몇은 자기 아들이 통치 자격이 없다는 판정을 내리고 혈연관계가 없는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물려준 예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백성들이 무능한 임금을 견디다 못해 임금의 권능을 박탈하고 품성과 용기가 뛰어난 다른 사람을 그 대신 임금으로 모신 일도 여러 번 있었다. 찬탈한 군주에게 충성을 바치느니 차라리 명예로운 죽음을 택한다는 일반 중국인의 태도는 칭송할만한 것이다. 학인들 사이에는 烈女不嫁二夫, 忠臣不事二君이라는 말이 통한다. 이 나라는 워낙 넓어서 국경까지의 거리가 아득하게 먼데다가 해양의 세계에 대해서는 전연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이 나라 사람들은 전 세계가 이 나라 안에 들어 있다고 상상한다. 역사가 생긴 때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도 그들은 자기 임금을 天子라고 부르는데, 그들은 을 절대자로 모시기 때문에 天子라고 하는 것은 그들에게 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과 똑같은 뜻이다.”[230]

[230] <中國誌> 42-43.

리치의 기록 가운데는 당시 중국의 치안상태를 외국인의 눈으로 살핀 재미있는 대목이 있다: “도시의 밤에는 수천 명 순라꾼들이 징을 치면서 정기적으로 거리를 돈다. 그러나 이렇게 순라가 돌고 성문을 꽁꽁 잠가 놓아도 밤도둑이 집을 터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그 까닭은 순라꾼 자신들이 도둑들과 한통속이기 때문이며, 이런 도둑질이 자주 일어나는 결과로 순라꾼을 감시하는 사람들을 다시 고용하게 된다. 유럽에서는 아무리 인구가 밀집한 도시에서도 경비를 서는 것이 집털이를 막기 위해서보다 적국의 습격에 대비하기 위한 것뿐이라는 이야기를 해주면 중국인은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다. 이곳 중국에서는 큰 나라 한복판에서 더할 수 없는 평화를 누리는 가운데서도 밤마다 성문을 잠그고 열쇠를 守令이 보관해야 한다.”[231]

[231] <中國誌> 81-82.

리치의 기록에 중국 경제를 체계적으로 파악하려는 노력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나라의 엄청난 규모에 대해서는 여러 곳에 감탄한 대목들이 있고,[232] 재정 규모에 관해 간략하게나마 설명한 곳이 있다: “해마다 일억 오천만()을 넘는 租稅關稅, 그리고 그 밖의 歲入은 황궁의 寶庫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황제가 마음대로 쓰는 것도 아니다. 화폐로 통용되는 은자는 정부 금고로 들어가고, 미곡으로 납입된 조세는 정부 창고로 들어간다. 황제의 가족과 그 친척들, 궁성의 환관들과 일꾼들을 위한 풍족한 생활비가 모두 이 국고에서 지출된다. 이런 비용은 황실의 광영과 위엄을 뒷받침해 주기에 충분하도록 넉넉히 책정되지만, 하나하나의 지출항목이 모두 법률로 결정되고 조절된다. 토목과 군사를 비롯해서 모든 정부기관의 비용이 이 국고에서 지출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규모는 유럽인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것이다. 이렇게 엄청난 규모의 세입을 가지고도 온갖 지출을 충당하지 못하는 때가 있다는 사실은 정말 믿기 어려운 것이다. 이런 일이 벌어질 때는 국고의 수지를 맞추기 위해 새로운 세금들을 부과하기도 한다.”[233]

[233] <中國誌> 45-46.

그밖에 중국의 물산이 다양함을 기록한 곳이 있다: “이 나라는 동서로나 남북으로나 워낙 넓은 영역에 펼쳐져 있기 때문에 한 나라의 경계 안에 이처럼 다양한 동물과 식물의 종류를 찾아볼 수 있는 곳이 또 없으리라는 것을 마음 놓고 장담할 수 있다. 다양한 기후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열대작물에서 온대작물, 한대작물에 이르기까지 농산물 종류도 다양하다. 중국인 스스로 작성한 地理誌들을 보면 여러 성 토지의 비옥도와 산출하는 다양한 작물들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나는 감히 단언하건대, 유럽에서 자라나는 모든 작물이 똑같이 중국에서 자라난다고 하더라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설령 한두 가지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하더라도 유럽에 없는 다른 작물들로 충분히 대치되고 있는 것이다.”[234]

[234] <中國誌> 10-11.

쌀을 비롯한 곡류, 그리고 각종 채소류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류가 대량으로 생산되어 사람의 식용 뿐 아니라 가축 사료로까지 사용된다는 것, 2모작이나 3모작이 통상 행해지는데, 토질이 비옥하고 기후가 온화할 뿐 아니라 농부들이 부지런해서 다모작이 가능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육류로는 소, 돼지, 염소, , 오리, 거위 등의 고기가 풍성하게 생산되는 외에 말고기, 개고기, 노새와 당나귀 고기까지도 식용으로 시장에 나오는 것을 기록했다.[235] 그리고 바다와 민물에서 나는 물고기가 매우 많은 것도 기록하고 있어서[236] 적어도 리치의 눈에 당시 중국인이 절대적인 식량부족의 위협은 받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비쳐졌음을 알 수 있다.

[235] <中國誌> 11-12.

[236] <中國誌> 13.

금속 사용에 있어서도 야금과 주철 등 기술이 유럽보다 뒤떨어지지 않음을 기록했다. 다만 금의 가치가 유럽보다 낮게 평가되는 것, 은이 화폐의 본위로 되어 있지만 가치 변동이 심하고 화폐 위조가 용이하기 때문에 많은 불편이 있다고 적었다.[237]

[237] <中國誌> 14.

마테오 리치가 본 중국의 경제면은 엄청나게 큰 규모의 시장, 그리고 절대적 빈곤이 없는 안정된 물질조건을 가졌으면서도 적극적 경제활동이 도출되지 못하는 상태, 요컨대 잠자는 거인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그가 중국의 정신면을 바라봄에 있어서 이성의 빛을 바탕으로 훌륭한 도덕과 문명을 가졌으면서도 은총을 받지 못하고 있는, 잠재적인 하느님의 나라로 보는 시각의 틀이 경제면에도 비슷하게 적용되었다는 인상을 받는다.

 

 

Posted by 문천